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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당신은 누구십니까

 

 

정민 |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문학동네 | 2014

 

우리는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는 양 이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래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최근에 가진 경험과 공포를 고려하여 인간 조건을 다시 사유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사유의 문제이다. 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이라 생각된다.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정민의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공허한 진리를 반복하지 않았다. 18세기 한(朝鮮) 지식인이라고 하면 북학파(北學派)로 불리는 몇몇을 아는 정도라고 답할 수 있다. 화이(華夷)의 명분론에 맞서 북학은 실학(實學)이었다. 하지만 18세기 한중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상당히 멀어져 허학(虛學)에 가까워진다. 18세기 중(靑代) 지식인에 관해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18세기 한중 지식인들의 필담을 접하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드넓은 세계를 담론이 아닌 사실을 증거로 다양하게 쏟아내면서 접근하고 있다.

 

문예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이란 말은 17세기 후반 이후 주로 18세기 유럽에서 쓰였던 용어다. 라틴어를 공통 문어로 나라와 언어의 차이를 넘어 인문학자들이 편지와 책으로 소통하던 아름다운 지적 커뮤니티를 일컫는 상상 속의 공화국이다. (5쪽)

 

저자는 한문을 공통 문어로 쓰는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에 관심을 가지고 지난 1년간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저자는 후지쓰카 지카시의 구장(舊藏) 도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저자에게 후지쓰카는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을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출발점이었다. 당시 조선의 학문이 송명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편견에 맞서 그는 ‘청조학으로 가는 우주정거장’이라는 학문적 엄정함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이 책을 통해 후지쓰카의 학문적 자존감을 엿볼 수 있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쓰기보다 읽기를 사랑한 학자였다. 빨간 펜 선생으로 불렸던 어지간한 메모벽 때문에 그는 책 속의 지휘관이라는 범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잘 정리된 그의 방대한 소장서를 빌려보는 것이 감격스럽다는 저자 정민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독서망양(讀書亡羊)을 깨닫는다고 말했을까?

 

이 책을 좀 더 읽으면 책이 책을 부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을 불러낼 때 학문의 세계는 풍요롭고 다채로워진다. 화려한 학문의 꽃은 빨리 피우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학문의 뿌리를 오래 다지려고 했을 때, 붓끝이 특별한 진실을 담는다.

 

저자에게 후지쓰카는 끊임없이 살아있는 지식인이다. 후지쓰카를 말하면서 과거와 현재라는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저자에게 그는 언제나 현재다. 그들의 학문적 인연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문예공화국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한중 지식인들은 필담을 통해 서로 그리움과 애틋함, 안타까움을 남겼다. 그들의 사귐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다. 지기는 나를 넘어선 안목으로 나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사이(‘비아관아 - 非我觀我)’다. 만약에 그들에게 지(知)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문벌(文伐)공화국이라는 함정에 빠져 북학(北學)이 아닌 북벌(北伐)로 첨예하게 대립했을 것이다.

 

저자는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소통망 즉 문예공화국을 복원하면서 ‘문화는 선(線)’이라고 표현한다. 저자의 문화관은 간결하면서도 명쾌하다. 문화가 단선적이라면 문화는 절대 소통되지 않을 것이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화는 그들만의 문화가 아니다. 문화는 모든 방향에서 선이 교차한다. 문화는 시공간을 건너는 리듬 속에서 작동한다. 19세기 문예공화국은 어떤 리듬이 될지 더욱 기다려진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오우아'님은?

글로 소통을 지향하는 독서 중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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