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4.12.03 《눈먼 자들의 국가》 - 2014년 4월 16일
  2. 2014.11.17 지지 않고 계속
  3. 2013.11.26 《야만적인 앨리스씨》 - 야만의 서글픈 기원
  4. 2012.07.19 《파씨의 입문》 - 나는 황정은에서 내렸다
  5. 2012.03.06 [요즘 뭐 읽니?] 황정은, 《파씨의 입문》
  6. 2012.02.28 [요즘 뭐 읽니?] 중앙북스 편집부, 《문예중앙 2011 여름 126》
  7. 2012.01.25 [에디터의 북카트] 희진의 1월 25일 북카트
  8. 2011.12.29 [서점에서 만난 사람]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희진입니다!
  9. 2010.07.09 <百의 그림자> - 쓸쓸함이 쓸쓸함을 만났을 때

《눈먼 자들의 국가》 - 2014년 4월 16일

 

 

김애란, 박민규, 황정은 외 | 《눈먼 자들의 국가》 | 문학동네 | 2014

 

"인간의 인간다운 세상을 위해 인간에게 기여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숭고하고 보람스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진정한 문학, 참된 문학은 역사를 변혁시키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 길을 따라 남은 인생을 살고자 노력하는 작가 조정래 작가의 말씀입니다.

 

역사상 유례없는 해양 참사가 일어난 지 여러 날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 슬픔과 상처의 흔적은 몸속 깊이 만연해 있습니다. 잘못과 죄는 일어났는데, 책임을 지려고 하는 이 없는 이 사회에 문인들이 슬픔과 진실을 외칩니다. 이 책은 계간 문학동네 여름호와 가을호에 게재된 김애란, 김연수, 황정은 등 12명의 글을 묶은 것입니다. 김훈 작가가 팽목항에 내려갔을 때 유가족들 모두에게 준 책이 있는데, 바로 이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그때 이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박이 침몰한 ‘사고’이자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다, 라고 쓴 박민규 작가의 표제작 ‘눈먼 자들의 국가’는 읽는 내내 심장을 두들깁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눈을 떠야 한다.’는 말이 크게 울립니다. 책의 판매 수익금은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자 하는 다양한 움직임’에 기부될 예정이라니 더 눈길이 갑니다.

 

재일 학자 강상중은 ‘문학의 힘’에 관하여 여러 번 말했습니다. 그는 2010년에 갑작스럽게 아들을 잃었고,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목격했습니다. 그가 느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담은 소설이 《마음》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문인들이 해야 할 일이 많다고도 재차 강조했습니다.

 

“마음의 상처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 그리고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하는 일이 문학이 해야 할 일”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라는 김애란의 글에서 세월호가 남긴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겠습니다. 소설가 황정은은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그녀는 우리의 무기력을 고백하는데, 정말 가슴속 깊은 곳을 뜨겁게 찌릅니다.

 

세월호는 고도성장과 눈부신 발전 이면에 숨은 거품과 안개의 단상을 여과 없이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지겹다고, 잊고 싶다고 말합니다. 한쪽에서 진상 규명을 외치면, 다른 쪽에서 그만하자고 외치죠. 처칠은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비극으로….’라고’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사건이 다시는 반복되어선 안 된다며 문인들이 한마음으로 만든 이 책은 곁에 두고 항상 봐야 할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이쁜뚜영이님은?

좋은 책을 읽고 추천합니다.

 

Trackback 0 Comment 0

지지 않고 계속

 

 

 

지지 않고 계속

 

단 하루에 성패가 결정된다는 건 사실 억울한 일입니다. 단 한 번이기에 내가 아는 것을 최대한 써먹어야 한다고, 또 그럴 수 있겠다고 하지만, 최선은 아무리 다해도 부족하고, 가차 없이 잘 못한 상태로 끝날 수 있습니다. 수능만이 아닙니다. 삶에는 ‘단 한 번’만으로 평가에 놓이는 일들이 많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시도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정답인지 오답인지에 따라 가름 나는 등급처럼, 사실 인생은 그렇게 깨끗이 변별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말이죠.

 

오직 한 번뿐인 일을 겪어야 한다는 건 번번이 쉽지 않습니다. 오늘의 성과가 다음을 똑같이 기약하지 않으니까요. 중요한 건 틀려도 꺾이지 않고 계속해보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어쩌면, 틀릴지도 모를 혼돈과 이미 틀어진 복잡함 속에서 삶의 숱한 ‘단 한 번들’이 흘러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므로 고통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특별히 더 고통스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특별히 더 달콤하다. 고통스럽더라도 고통스럽지 않다. 본래 공허하니 사는 일 중엔 애쓸 일도 없다. 세계는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해진다. (…)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 오래지 않아 날이 밝을 것입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창비, 2014)

 

연관 도서

 

   

 

| Editor_정혜원

hyewonjung@bnl.co.kr

'코너 > 이야기 채집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래도 읽어 간다  (0) 2014.11.28
미리보는 양띠 해 세상  (0) 2014.11.20
지지 않고 계속  (0) 2014.11.17
그래, 우린 모두 미생이야  (0) 2014.11.10
저문 가을에 삽을 씻고  (0) 2014.11.03
'러버덕'이 뭐기에  (0) 2014.10.28
Trackback 0 Comment 0

《야만적인 앨리스씨》 - 야만의 서글픈 기원

 

 

황정은 | 《야만적인 앨리스씨》 | 문학동네 | 2013

 

살아있는 몸뚱이가 무슨 죄처럼 느껴진다. 그저 생긴 대로 살 뿐인데 존재만으로 누군가의 분노를 사고 만다. 애초에 태어난 게 큰 잘못이라도 되는 양 아직 어리기만 한 그의 몸뚱이 위로, 일상적으로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억제되지 않은 감정과 절제하기 “단지 귀찮”은 이미 다 자란 짐승의 폭력이 쏟아진다. “씨발 상태가 되어 씨발 년이 된 그녀는 그녀가 가진 짐승의 머리뼈부터 꼬리뼈까지를 다룬다.” (65쪽) “그런 순간에 그녀는 한 점 빗방울처럼 투명하고 단순하다. (…) 때리니까 때리고 싶고 때리고 싶으니까 가속적으로 때린다. (…) 때려서는 안 된다는 당위를 내면에 쌓는 일이 귀찮고 구차해 이것도 저것도 마다하고 때리는 데 몰두하는 것이다.” (41쪽) 이렇게 태어날 것을 바란 적도 선택한 적도 없는 어린 짐승의 날들이, 누명처럼 이어진다. 말할 수 없이 억울한 그의 울분이 말없이 매 맞는 몸뚱이 안으로 차곡차곡 쌓여져 간다. 그것을 먹이로, 그 몸을 무기로 어린 목숨은 자라고 무엇보다, 기다리고 있다.  

 

소년 앨리스는 그 나무 아래에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다.
뭐를?
뭐냐면… 뭔가 다른 일이 벌어지기를. 밤과 낮이 뒤집어지기를. (130쪽)

 

앨리스 소년은 떨어지면서 다시 기다렸다.
뭐를?
바닥에 닿기를.
뭘 하려고?
그래야 다른 데 가지. (131쪽)

 

어린 짐승은 기다리고 있었다. “한 번에 그녀를 이길 수 있”“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이길 수 있”는 “역전”의 순간” (99, 125쪽)을. 그리고 지금,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기다리고 있다. 야만으로 떨어져 내린 어린 짐승의 사정을, 야만의 상태에서 활개 치는 폭력과 ‘씨발 됨’의 기원을, 야만적 폭력으로 잉태된 그들의 피치 못할 사연을,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지독히도 냄새나는 ‘고모리’의 광경을, ‘나’를 주어로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 현실의 서글픔을, 그러므로 “바닥에도 닿지 못하고 토끼굴 속을 빙글빙글, 언제까지고 떨어지고 있는” 소년 앨리스의 것으로 대체된 그의 이야기을, 그리하여 “여자 부랑자로 사거리에 서”서 “여전히 고모리에 남아 고모리를 반복하는 앨리시어의” 눈 뜨고 꾸는 꿈을, 그 “실패와 패배”의 기억을, 그대가 듣고 기록하고 기억해주길 “오래전 그의 어머니와 닮”은 얼굴을 하고 “씨발 년으로 이 거리에 서 있”는 앨리시어가 내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만, “그렇게 하려고 존재한다. 다른 이유는 없다.” (159-161쪽)

 

그대는 앨리시어가 발을 끌며 걷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불시에 앨리시어의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 그대는 얼굴을 찡그린다. 불쾌해지는 것이다. 앨리시어는 이 불쾌함이 사랑스럽다. 그대의 무방비한 점막에 앨리시어는 도꼬마리처럼 달라붙는다. 갈고리 같은 작은 가시로 진하게 들러붙는다. (…) 추하고 더럽고 역겨워서 밀어낼수록 신나게 유쾌하게 존나게 들러붙는다. 누구도 앨리시어가 그렇게 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앞으로도 앨리시어는 그렇게 한다. 앨리시어의 체취와 앨리시어의 복장으로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앨리시어를 추구한다. 누구의 지문으로도 뭉개버릴 수 없는 앨리시어의 지문을 배양한다. 그대가 앨리시어 덕분에 불쾌하고 지루하더라도 앨리시어는 계속할 것이다. 그대의 재미와 안녕, 평안함에 앨리시어는 관심이 없다. 계속 그렇게 한다. (7-8쪽)

 

그렇게 《야만적인 앨리스씨》는 “그대가 먹고 잠드는 이 거리에 이제 앨리시어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고 “결국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사라질” 것이며 그러므로 소년 앨리스의, 부랑자 앨리시어의, 그리고 소설가 황정은의 이야기는 “언제고 끝날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있었으므로 고통스러우므로, 이렇듯 재차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그것이 있었음을 듣고 기록하고 기억할 “단 한 사람인 그대”,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나.” “어디까지 왔나.”

 

“이제 그대의 차례가 되었”으므로. (160-162쪽)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0

《파씨의 입문》 - 나는 황정은에서 내렸다

 

 

황정은 | 《파씨의 입문》 | 창비 | 2012

 

단 한 편의 소설을 만난다면 나는 소설 읽기를 그만둘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현존하는 소설에 대한 오만이 아니다. 독서에 임하는 일종의 마음가짐이다. ‘단 한 편의 소설’이라는 불가능성을 전제한 채로 사실은 소설 읽기를 그만두지 않을 작정이니까. 그래서 생애 첫 소설에서 비롯된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수많은 이야기를 향해 대체로 쉬지 않고 달려온 버스지만 종종 내 의지로 세우기도 했다. 한 사람의 등장에, 한 단락의 순간에, 한두 줄의 문장에 사로잡힐 때였다. 그런 소설 앞에는 사유의 텐트를 치고 오래 머물렀다. 이를테면 황정은의 <문>을 나는 기억한다. “m은 길음에서 내렸다.”라는 마지막 문장, 그 기이하고도 쓸쓸한 결말은 내 여정에 황정은 이름 석 자를 각인했다.

 

<문>이 수록된 첫 소설집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의 출간에 이어 황정은은 사 년 사이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와 두 번째 소설집 《파씨의 입문》을 펴냈다. 황정은이라는 소설가의 행보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설 속으로 들어가자면 우리에게는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자, 텐트는 준비 되셨는지.

 

<야행>에서 내린다. 때는 한밤중, 우리는 골목길을 걸어간다. 누군가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두 명? 네 명쯤은 되는 것 같다. 우리는 머지않아 그들을 발견한다. 어떤 집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가족, 가족처럼 보인다. 그들은 벨을 누르고 누군가 나오고 함께 그 집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기다린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그들이 집을 나선다. 여전히 깊은 밤이다. 아까 나왔던 사람이 손을 흔들어 배웅한다. 우리는 힘없이 걸어가는 네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불을 끄라고. 누가 또 문을 두드리기 전에.”(32쪽)라는 말이 집 쪽에서 들려온 것 같다. 저기도 가족, 이 집에도 가족, 그러나 저마다 멀어지고 있다. 멀어지는 것은 이들 뿐이 아니다. <대니 드비토>에는 사랑하는 남자의 삶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원령이, <낙하하다>에는 무한한 공간을 떨어지며 쓸쓸해하는 존재가, <옹기전>에는 사람들로부터 달아나 홀로 항아리를 옮기는 소년이, <묘씨생>에는 다섯 번 죽고 다섯 번 살아났지만 또 한 번의 일생을 두려워하는 길고양이가, <뼈 도둑>에는 연인의 뼈를 찾다가 눈에 갇혀 버린 남자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대로 ‘우리’일 수는 없는 것일까.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삶으로부터 쓸쓸해질까.

 

우리는 <양산 펴기>와 <디디의 우산>을 향해 말없이 걸어간다. 양산을 파는 사람과 우산을 든 사람을 각각 만난다. 양산을 파는 사람은 연인에게 장어를 먹일 요량으로 일일 아르바이트에 나섰고, 우산을 든 사람은 언젠가 자신에게 우산을 빌려준 사람을 생각한다. 그러나 단지 양산과 우산을 그들이 생각하는대로만 받아들이기에는 구질구질한 세상이다. “돈이 언제나 문제”(175쪽)가 되는 곳에서 그들은 서로 멀어질 듯 흔들린다. ‘우리’는 위태롭다. 하지만 그들은 보다 먼저 기억한다. 생존의 피로감을 무화시키는 연인의 “목화를 닮은 낮잠 냄새”(153쪽)와 “돌려주지 못했던 우산에 대해서 여태 남은 부채감”(165쪽)을, 그것이 세상과 삶 속에 자신들을 붙들어 놓으리라는 것을, 조금 외로워도 ‘우리’인 채로.

 

텐트 치기는 <파씨의 입문>에서 끝난다. 아니 시작한다. “파씨의 왼쪽 머리”에서 “최초의 기억과 최초의 질문과 최초의 정서가 시작”(211쪽)한 것처럼, 우리는 종착역에서 비로소 그녀의 소설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우리는 동행하였으나 이 모든 감상은 나의 것이다. 사적인 기록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는 동시에 말할 수 있겠다. ‘나는 황정은에서 내렸다’라고. 그리하여 우리는 단 한 편의 소설(들)을 막 읽어 내렸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0

[요즘 뭐 읽니?] 황정은, 《파씨의 입문》


 

황정은 | 《파씨의 입문》 | 창비 | 2012

 

황씨에게

 

비가 내립니다. 저는 편지의 서두에 날씨를 언급하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에게’라고 적은 뒤에 꼭 창밖을 봅니다. 사실 비는 아까 점심에 그쳤고 하늘이 흐릴 뿐이지만 그런 기분입니다. 비가 내립니다, 라고 쓰고 싶은. 며칠 전부터 황씨의 책을 가지고 다닙니다. 전철에서, 까페에서, 거리에서, 여기저기에서…… 반쯤 읽었습니다. 가끔은 황씨가 진행하는 라디오를 듣습니다. 졸린 듯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아, 이 사람은 꼭 자기 소설 같다. 혹시 기분이 상하신 건 아니죠? 황씨의 소설이 졸립다는 뜻은 아닙니다. 잠든 것처럼 (죽은 것처럼) 여겨지는 많은 ○○들이 《파씨의 입문》에 있더군요. 그들은 곧 황씨의 현현(顯現)이 아닌지요. 전철에서, 까페에서, 거리에서, 여기저기에서…… 소외된 존재들을 바라보는 황씨의 눈빛을 상상해 봅니다. 그 시선을 빌릴 수 있기에 저처럼 눈이 어두운 사람에게 《파씨의 입문》 같은 책은 안경보다 낫습니다. 사실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저를 위해 소설을 낭독해주세요. 아래 발췌한 대목의 마지막 세 줄이면 됩니다. 저로 말할 것 같으면 전철에서, 까페에서, 거리에서, 여기저기에서…… 자주 쓸쓸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오늘은 비도 내리(는 기분이)고요. 말을 꺼내고 보니 딱히 이유랄 것은 없네요. 거절하셔도 괜찮아요. 모쪼록 계속 쓰세요. 이야기하세요. 답신 여부와 무관하게 소설을 읽을 수 있도록, 황씨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말입니다.

 

   야노 씨와는 봄부터 가을까지 만났다. 봄부터 가을까지 빠짐없이 만났다. 야노 씨는 은백색 테에 둥글고 맑은 유리를 끼워넣은 안경을 끼고 타박타박 걸어다녔다. 다도를 배운 듯 단정한 자세로 앉는 사람이었다. 어느날 가치관이 맞지 않네요, 라는 말을 듣고 헤어졌다. 어떤 면에서 가치관이 맞지 않는다는 것인지 자세한 내용도 듣지 못했다. 가치관이 맞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요, 묻고 싶은 것도 묻지 못하고 헤어졌다. 마시던 차를 다 마시고 찻집 앞에서 조심히 가세요, 인사했다. 그뒤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소식조차 들은 적 없다. 어떤 면에서 가치관이 맞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런 걸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정도로 섬세하지 못했기 때문에 헤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야노 씨는 잘 있을까.
   잘 살아 있거나 잘 죽었을까.
   살아 있다면 다도를 가르치듯 단정한 자세로 앉아서 우리는 역시 가치관이 맞지 않네요, 라고 누군가에게 말하거나 하고 있을까. 야노 씨.
   보고 싶어요.
   나 떨어지고 있어요.
   무척 쓸쓸하답니다. (72쪽)

 

<낙하하다>중에서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0

[요즘 뭐 읽니?] 중앙북스 편집부, 《문예중앙 2011 여름 126》




 

중앙북스 편집부 | 《문예중앙 2011 여름 126》 | 중앙북스 | 2011

 

조선후기 재자가인소설과 통속적 한문소설, 결혼기계들, 시간과 타자, 동화처럼, 아마도 아프리카, 젊은 시인들의 상상세계/말들의 풍경, 둔스 스코투스의 삶과 사상, 중력과 은총, 사랑과 교육, 사랑의 단상, 숨겨진 우주, 오늘 아침 단어, 라캉 읽기, 라캉의 주체, 책의 우주, 풀이 눕는다, 보들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장국영이 죽었다고, 형이상학의 근본개념들, 니코마코스 윤리학, 百의 그림자, 비평의 우울, 가나, 사랑의 단상,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열정으로서의 사랑, 이별의 능력, 사랑 예찬, 아픈 천국, 문학으로 보는 성,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1권, 침이 고인다, 사유의 악보, 소설의 기술, 무정, 법철학……

 

고작 한 문단으로도 현기증이 날 만큼 방대한 양이지요. 이 많은 책들을 한 편의 글에 소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평론가입니다. 벌써 하품 소리가 들리네요. 책 뒤에 따라붙는 고루한 해설? 독설과 논쟁의 진원지? 어려운 작품만 추켜세우는 교수?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고요. 평론가가 모든 대중에게 사랑 받는 지식인은 아닌 듯합니다. 저는 묻고 싶어집니다. (못하면 욕먹고 잘해도 티 안 나는) 이런 일을 왜 합니까? 그들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음악평론가라면 음악을, 영화평론가라면 영화를, 문학평론가라면 문학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나만 알고 싶다. 혹은 모두에게 알려주고 싶다. 사랑에는 이와 같이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한다고 봅니다. 특히 후자는 매개가 필요합니다. 이때 평론가는 글쓰기를 선택합니다. 자신의 사랑을 선언하는 것이지요. 비평의 권력화나 현실과의 괴리는 그들이 경계해야 마땅한 부분이겠으나, 초심만은 순애보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침 몇몇 평론가가 사랑을 주제로 쓴 글을 읽고 있습니다. ‘성난 얼굴로 사랑하라’라는 주제 아래 《문예중앙 2011 여름 126》에서 특집 비평으로 다루어진 것들입니다. 허윤진, 권혁웅, 강동호, 백지은, 박원익이 참여하여 사랑을 말합니다. 첫 문단은 이들이 인용하는 텍스트를 나열한 것입니다. 이 시대 한국 사회의 사랑과 연애, 그 풍경을 그려낸 소설과 시, 이들 작품을 사랑하는 평론가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성난 얼굴로 사랑하라’의 관점을 전부 소화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소화한 것이니까요!) 다만 저 현기증 나는 책들을 읽고 싶어집니다. 통틀어 백여 쪽에 달하는 글 중에서도 일부만을 발췌해 봅니다. 사랑의 메신저들을 만나 보시지요.

 

나는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중 한 편일 「미리케의 노우트」를 홀로 읽는다, 아니 (다시) 쓴다. 나와 그대는 각자의 운명에 갇혀 있다. 내가 살아가는 세계가 이율배반적인 것만큼이나 나 역시 이율배반적이어서, 나는 나의 말을 배반하며 살아간다. 내가 나를 부정하고 그대가 그대를 부정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운명, 파두(Fado). 나에게 육박해 들어오는 매력적인 타인들은 무수히 많지만 내가 처한 난국은 그대가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

 

허윤진, <해빙>

 

새로운 것은 이러한 사랑이 황정은의 대화 양식과 결합하는 순간 두 연인의 서로에 대한 개방이 어떤 본원적인 수준의 나눔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고백 뒤에 무심하게 던진 “계란 먹을래요?”라는 말처럼, 이 나눔은 매우 미약하지만 그래도 어딘가 근본적인 느낌을 준다. 대체, 무엇을 나누는가? 다시 반복하거니와 대화를, 서로의 언어를 나누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화를 나누다’라는 한국어 문장은 절묘한 데가 있다. 나눌 수 없는 것(언어)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강동호, <사랑의 영도(零度), 만짐의 현상학>

 

우리는 실연한 남녀에게 ‘다른 상대는 얼마든지 있어’라고 위로하는 걸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그러나 실연이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건 단순히 각자에게 필요한 파트너가 결여되었다는 사실에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이 파트너와의 예기치 못한 만남 속에 일별했던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돌이킬 수 없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실연한 이에게 천박한 위로를 건네지 않기 위해서라면 사무엘 베케트 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실패하라, 그리고 더 잘 실패하라.” 실패에 대한 보상은 없으며, 우리는 다른 실패를 감수하고자 하는 행위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박원익, <20대의 연애와 사랑, 혹은 그것을 둘러싼 소문들을 넘어서>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0

[에디터의 북카트] 희진의 1월 25일 북카트

 

황정은 | 《파씨의 입문》 | 창비 | 2012

 

탐나는 작품들은 때로 너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월급쟁이에 불과한 독서가를 괴롭게 합니다. 읽을 책은 많은데, 돈도 없고 시간도 없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지요. 에잇! 시간은 어쩌지 못하니 돈이라도 질러 봅니다. 《파씨의 입문》은 너무도 기다려 왔던 황정은의 두 번째 단편집이니까요. 이 책을 이미 손에 넣은 옆자리의 H님이 ‘작가의 말’을 살포시 보여 주십니다. 터프한 인간이 되고 싶다. 작가의 각오가 이러하니 《파씨의 입문》으로 과감하게 시작하길 잘했네요. 《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와 《百의 그림자》에 이어, 이 세계의 공백과도 같은 이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한유주 |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 | 문학과지성사 | 2011

 

한유주의 세 번째 단편집입니다. 저의 독서 이력을 따지자면, 문예지에서 스치듯 몇 편 읽은 것이 전부입니다. 사실 확연하게 기억나는 작품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한유주 이름 석 자가 각인된 것은 일관된 정서 때문입니다. 언어, 존재, 사유, 쓰기와 같은 관념들이 소설 안에서 치열하게 부딪힙니다. ‘아무리 미학적이라 해도 언어는 불완전해요. 하지만 그것 자체가 소설의 내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한 바 있는 이 작가의 최종 목표는 소설이 되는 것 아닐까. 잠깐 생각해 본 적도 있습니다. 만약 그런 과정에 있다면, 저는 기꺼이 목격하고 싶네요. 그래서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를 북카트에 담습니다. 조만간 생생한 목격담을 풀어 놓겠습니다.

 

 

니콜 크라우스 | 《그레이트 하우스》 | 민음사 | 2011

 

태평양 너머로 눈을 돌려 봅니다. 젊은 작가들은 해외에도 무진장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독서가들의 허리가 휘는 이유지요. 니콜 크라우스는 미국 작가입니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을 쓴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반자이기도 하지요. 남편 못지않은 내공의 소유자일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2006년에 출간된 《사랑의 역사》가 이 책보다 더 유명한데요. 저는 역주행을 택했습니다. 《그레이트 하우스》가 ‘미국 최고의 젊은 소설가들’이라는 타이틀을 납득할만한 소설이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에도 역시나 북카트를 비워 둘 틈이 없네요. 괜찮습니다. 이런 신예들, 신간들 앞에서 주머니 사정이 뭐 대수인가요. (대수야!)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0

[서점에서 만난 사람]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희진입니다!

 



* 자기소개를 간단하게 해주세요.

 
반디앤루니스 인터넷사업부 컨텐츠팀에서 근무하는 오희진입니다. 오늘은 일을 시작한 지 사흘째랍니다. 일주일도 안 된 애송이로서 이렇게 인사를 드리려니 참 쑥스럽습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지만, 책을 매개로 둘러보면 교집합이 있는 분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괜스레 친한 척을 하고 싶네요. 하지만 지금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차츰 본성을 드러내도록 할게요. 


저는 여전히 문학소녀(‘소녀’에 집중해주세요. 하하.)로 불리고 싶은 청년(?)입니다. 좋은 글을 읽고, 또 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평소에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즐깁니다. 최근에는 우쿨렐레를 연습하고 있습니다. 비루한 자작곡을 만드는 무리수를 범할 지경에 이르렀지요. 식물을 키우거나 요리를 하는 것도 좋아하지요. 상꼬맹이처럼 보여도 취미는 꽤 여성에 가깝답니다. 이거 책과 관계없는 수다가 된 것 같지만, 끝까지 들어주세요. 저는 이야기를 가진 것에 폭 빠져드는 편입니다. 영화, 드라마, 음악, 식물, 요리…… 고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들이잖아요. 책에서 시작된 이야기 예찬은 이렇듯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답니다. 말하자면 책은 저에게 이야기의 고향이지요. 어이쿠, 새끼 치느라 주절주절 소개가 길어졌네요.

 

* 서점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반디앤루니스는 서울에 올라와 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니까 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답하는 것이 정확하겠지요.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 부작용이 있다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면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일단은 제가 생각하고 행동하기 나름이니까요!

 

* 일을 하면서 의미 있는 순간이 있었나요?

 

일을 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사흘간의 기억 중에서 하나 꼽아 보자면 역시 댓글! 제가 올린 서평에 ‘저도 이거 읽었어요.’ 혹은 ‘읽고 싶어집니다.’와 같은 반응을 해주시면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바로 소통의 묘미일까요?

 

* 책 읽는 설렘에 대해 한 마디 해주세요.

 

유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네요. 당시 살던 집에는 구형 라디오가 있었습니다. 녹음 기능이 있어서 옹알이나 노래 같은 것을 공테이프에 담고는 했지요. 그 중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녹음된 것도 있습니다.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두 딸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입니다. 그때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남겨진 녹음이나마 듣고 있자면, 아마도 독서의 시작은 그때쯤이 아니었을까요? 글을 읽게 되기까지 저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었겠지요. 어떤 주제를 통찰하기까지 몇 번이고 책을 읽어 내리는 지금과 마찬가지로요. 독서를 지속한다면 설렘은 어떤 식으로든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 책을 고르는 기준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좋아하는 작가나 선호하는 출판사에 대한 신뢰가 기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윤성희 작가의 책은 주저 없이 골라듭니다. 한국 문학을 즐겨 읽기 때문에 문학과지성사와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신작을 별도로 살펴보기도 하지요. 일상적으로는 믿을만한 이들의 추천을 따라갑니다. 예를 들면 눈이 밝은 독서 친구나 진중하게 활동하는 블로거가 있겠지요. 문예지를 꾸준히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어떤 작품이 주목 받는지 동향을 알 수도 있고, 게재된 작품을 보며 추후 지형도를 그려볼 수도 있으니까요. 한국 문학에 한해서 주로 이야기했지만 (이쪽이 나름 저의 필살기라서요. 허허.) 분야가 달라져도 맥락은 비슷하다고 봐요. 누군가의 추천으로 시작하여 내가 추천하는 취향을 가지게 되기까지, 그리고 취향을 넘어서는 또 다른 책을 만나기까지, 기준은 성장합니다. 나 책 좀 읽어, 하는 순간에도 안 읽은 책이 무수하게 줄을 서지요. 지금 저의 앞에도 수만 권쯤 있습니다. 이쯤 되면 기준도 기준이지만, 언제든 기준을 뒤엎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네요. 어떤 책이든 받아들이는 마음 말이죠. 아아, 말이 또 길어졌습니다. 일단은 여기까지!

 

* 지난 일 년 간 읽은 책 중 '베스트 5'를 말해주세요.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 바스티앙 비베스, <염소의 맛>, K.C.콜의 <우주의 구멍>,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까지 다섯 권을 꼽겠습니다. <百의 그림자>는 자주 언급하게 되는데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무감하게 지나치고 마는 동시대의 현상과 하찮게 여겨지는 관계들을 섬세하게 그려낸 장편소설이지요. 황정은은 한국 문단에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가 됩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폴란드 시인입니다. 1980년과 1996년, 두 번에 걸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요. 우리나라에는 출간된 시집이 많지 않은데요. <끝과 시작>은 그 중에서도 시선집이라서 소설책 한 권 분량의 시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쟁 속에서 삶의 극단을 경험한 시인의 시선은 서늘합니다. 그 냉기는 어쩌면 온기로 향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시를 다 읽고 나면 느껴지지요. 바스티앙 비베스는 프랑스 만화가입니다. <염소의 맛>에서 ‘염소’는 수염 난 동물이 아니라 소독제로 사용되는 ‘Cl'을 이르는 말이지요. 수영장이 배경인 이야기로, 사랑에 빠진 인물의 내면을 온전히 그림으로만 보여주는 표현력에 낮은 탄성이 연달아 뱉어집니다. 최근에는 <사랑의 혈투>라는 신간이 나왔더군요. 이 만화 역시 수작입니다. K.C.콜의 <우주의 구멍>은 말 그대로 구멍에 관한 이론과 잠언을 방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영(0), 공(空), 무(無), 진공, 무한, 무중력, 부재, 침묵 등으로 표현되는 구멍은 철학과 과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문에서 풀지 못한 문제라고 합니다. 그런 만큼 앞으로도 풀이는 계속되리라는 여지를 남기며 책은 끝을 맺습니다. 깊이 있지는 않지만 유머 있고 폭넓은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자연과학 전문지 기자라는 저자의 성향이 드러나는 대목이랄까요.

 

무의 이중성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텅빈 구멍이다. 구멍은 항상 양면적이다. 구멍은 존재인가, 부재인가? 정의에 따라 구멍은 부재이다. 그러나 구멍이 없으면 빵은 부풀지 않고, 탄산수는 쏘는 맛이 없고, 피 속의 헤모글로빈은 산소를 운반할 수 없고, 벌은 집을 지을 수 없고, 우리는 도넛을 먹을 수 없다. 스위스 치즈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문장에는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지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앞서 언급한 <우주의 구멍>처럼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지만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인 것 같습니다. 강신주는 온오프라인에서 왕성하게 강의 활동을 하는 철학자입니다. ‘인문학의 부재’라는 말이 유령처럼 떠도는 우리나라에서 철학의 일상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요. 시에 곁들여 철학을 이야기하는 책의 말미에는 다량의 철학 서적 추천 목록을 삽입했습니다. 그야말로 친절한 철학입문서지요.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학이 무엇인지 고민해 봅니다. 프롤로그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만 마무리할게요.

 

시와 철학은 인문학의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와 철학은 모두 이성복의 말처럼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 친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인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들입니다. 앞서 말한 뇌과학의 현대 이론이 타당하다면 시는 정서와, 철학은 사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와 철학에도 두 종류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한편으로 독자들의 기존 정서와 사유를 거스르지 않는 시와 철학이 있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독자들의 정서와 사유에 충격 혹은 자극을 주는 다른 부류의 시와 철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진정한 시인과 철학자는 후자의 길을 가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할 겁니다. 새로운 실천, 새로운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정서가 불가피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인문학이 시와 철학의 힘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요즘 같은 계절과 잘 어울리는 시 한 편을 추천해주세요.

 

박서영 |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 천년의시작 | 2006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점자책

 

 


흰 종이의 땅을 뚫고
출토된 글자들이 방울방울 솟아 있다

 

이 책은 어둠을 켜놓고 읽어야 한다
무색무취 글자의 근육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는 글자들은
조금 쭈그리고 앉아 있기도 하다

 

후각과 청각과 시각과 미각을 열고서도
마음의 감각까지 동원해야
차가운 너의 몸을 만질 수 있다
이것이 눈송이 같은 너의 몸을
다치게 하지 않는 방법이다

 

나는 어두워지면 불을 켜는 습관이 있어
영원히 이 책을 읽지 못하리라
어둠을 켜놓고도 환한 세계의 한 공간을
내 몸이 엿볼 수 있다면

 

아,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 같은
책 한 권을 나는 읽을 수 없다

 


*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빌림


같이 글을 쓰던 선배에게 선물 받은 시집입니다. 안쪽에는 오늘을 기억하자는 글을 남겨져 있지요. 읽을 수 없는 책 한 권이 또 있다면 '오늘'일 것 같습니다. 저는 겨울마다 어제가 되어 버린 '오늘'을 기억합니다. 시집에 대한 답례로 가지고 있던 형광펜을 농담처럼 건넸었지요. 선배는 '오늘'에 몇 번이나 밑줄을 그었을까요?

 

*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독서가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책이라는 고향이 있어서 저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삶의 변두리에 있더라도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요. 저에게 책이 어떤 의미인지 되짚을 수 있었네요. 이제는 여러분에게 물어 볼게요. 나에게 책이란? 앞으로 그 답을 듣고 싶습니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0

<百의 그림자> - 쓸쓸함이 쓸쓸함을 만났을 때

황정은, <百의 그림자>, 민음사, 2010


시간은 무엇에게나 흔적을 남긴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평생 동안 혹은 그 이상으로.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사이, 필시 무언가는 사리지고 또 무언가는 생겨난다. 수많은 밤과 낮을 오고가며 이루어진 생멸(生滅)의 축적이 다름 아닌 시간의 흔적일 것이다. 그렇게 어제를 지나 오늘에 이르는 우리에게 아픈 상처의 기억을 남기는 것도, 그 고통을 이겨낼 또 다른 기억을 심어주는 것도 결국 시간이다.

이 소설, <百의 그림자>은 그 시간의 흔적들을 생각하게 한다. 처음 책을 폈을 때, 우리에게는 숲을 헤매고 있는 ‘은교’와 ‘무재’가 걸어들어 온다. 쓸쓸한 그들의 기억, 그들에게 새겨진 시간의 흔적이 함께 따라 들어온다. 그 안에 집 나간 어머니, 무뚝뚝한 아버지, 왕따와 폭행을 당했던 은재의 학창시절과, 아홉 명의 식구, 개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빚을 지게 된 무재의 부모, 아버지의 죽음 등이 들어 있다.

그들의 일상이 이어진다. 은교와 무재를 만나게 했던 장소,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가 이야기 속에 들어온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 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그곳. (29쪽) 그 자체가 시간의 흔적이고, 그 안에 수많은 이들의 삶을 담아냈을 그곳, 전자상가의 역사가 함께 들어온다. 가족들에게 외면당한 기러기 아빠, 공사장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유곤 씨, 전구를 파는 ‘오무사’ 할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전자상가 철거가 시작된다. 그렇게 사십여 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의 삶을 품어 주었을, 그 ‘시간의 흔적’을 참 쉽게도 지워버리는 철거가, 또 한 번의 쓸쓸함을 남기며 또 다른 '시간의 흔적'으로 새겨지고 있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113-115쪽)

전자상가의 가동을 밀어내고 들어선 깔끔한 공원 벤치에 앉아 은교와 무재는 말한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요. […] …… 어디로 갈까. ……조용하네요. 네. 예쁘네요. 예쁘지만,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112-117쪽)

그러나 여기에 한 번의 눈물로 타인(그들)의 불행을 쉽게 지나쳐 가게 하는 상투적 표현은 없다. 그들은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그림자가 일어섰다’고, 말하자면 언제고 우리 옆에 들러붙어 있는 어둠이 결국 일어서고야 말았다고 말할 뿐.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둠 속을 걷고 또 걷는 그들이, 모두에게 남겨진 ‘시간의 흔적’처럼 시간을 걸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실컷 울고 난 후, 어렵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나는 없다. 내 옆에도 그림자(어둠)는 언제든지 달라붙어 있으니까.

그러나 삶의 어느 순간에 “달려온 방향과 가야 할 방향이 모두 어둠에 잠겨 있”을지라도, 은교의 쓸쓸함과 무재의 쓸쓸함이 만나 그랬던 것처럼, “걸어갑시다”라고 말하며 손을 이끌어주는 누군가를 만나 “어둠에 잠겼다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하며 천천히” 시간을 걸어 나가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Trackback 0 Comment 0
prev 1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