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선'에 해당되는 글 42건

  1. 2010.01.13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과의 아이러니한 연애 고백서 (2)
  2. 2010.01.06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 배회하는 시선의 주인, 소외된 구경꾼 (4)

<나쁜 소년이 서 있다> - 나쁜 소년과의 아이러니한 연애 고백서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사, 2008


순전히 우연이었다. 허연의 <나쁜 소년이 서 있다>라는 시집을 발견한 것은.

나는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칼날 같은 글 속에서 은근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나쁜 소년’의 시구를 보았다. 그리고 첫눈에 그에게 반했다. 나는 그가 더 궁금해졌고, 세상에 막 나온 뜨거운 그의 언어를 일부러 찾아 읽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첫눈에 반한 그와의 만남은 나에게 그만큼의 설렘이었다. 어떤 신호였다. 그래서 한동안은 집에서, 그리고 지하철 안에서 항상 ‘나쁜 소년’을 꺼내들었다. 읽고 또 읽으면서 첫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는 즐거운 확신을 계속했다. 그러다 종종 울컥하고 차오르는 눈물을 막으려고 남몰래 눈을 끔벅이거나, 벅차오르는 감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컴퓨터의 자판을 두들기며 메신저의 친구에게 공감을 재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말처럼, 연모는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하철 안에서 조용히 눈물을 삼키는 동안, 옆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이는 그에게 닿아 있던 내 옷자락을 밀쳐냈으며, 또 다른 이는 이어폰과 휴대폰으로 무장하고 자기만의 세상으로 들어가 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컴퓨터 화면의 메신저는 신나게 두들겨댄 나의 흥분을 뒤로 한 채, 나쁜 소년이 아닌 내 자신의 눈먼 사랑 고백만을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문제는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쁜 소년이 나에게 말하고 있는 것도, 내가 그에게 반한 것도, 모두 ‘나누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하나의 대답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일종의 아이러니에 직면한다.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말에 매혹되어 나누어지지 않는 것을 나누려고 하는 지독한 아이러니. 

불빛이 누구를 위해 타고 있다는 설은 철없는 음유시인들의 장난이다. 불빛은 그저 자기가 타고 있을 뿐이다. 불빛이 내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내가 불빛이었던 적이 있는가.

가끔씩 누군가 나 대신 죽지 않을 것이라는 걸. 나 대신 지하도를 건너지도 않고, 대학 병원 복도를 서정이지도 않고, 잡지를 뒤적이지도 않을 것이라는 걸. 그 사실이 겨울날 새벽보다도 시원한 순간이 있다. 직립 이후 중력과 싸워온 나에게 남겨진 고독이라는 거. 그게 정말 다행인 순간이 있다. 

살을 섞었다는 말처럼 어리숙한 거짓말은 없다. 그건 섞이지 않는다.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다시 밖으로 나갈 자다. 

세찬 빗줄기가 무엇 하나 비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남겨 놓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그 비가 나에게 말 한 마디 건넨 적이 있었던가. 나를 용서한 적이 있었던가.

숨 막히게 아름다운 세상엔 늘 나만 있어서 이토록 아찔하다. 

- ‘안에 있는 자는 이미 밖에 있던 자다’ (14-15 쪽)  - 

“파편 같은 삶의 유리 조각들이 처연하게 늘 한자리에 있기 때문”“세월이 흐르는 걸 잊을 때가 있다.”는,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더럽게 (그를) 치장하고, 소년이게 했고 시인이게 했고, 뒷골목을 헤매게 했던 푸른색을 잃어버린, 그러나 앞으로도 푸른색의 기억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다짐하는 소년, 그 “소년이 서 있다.” "무슨 법처럼", 무슨 신호처럼, 내 앞에 서 있다. 그는 나에게 “돈 버는 곳에선 아무도 진실하지 않지만 아무도 무심하지 않”으며,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침묵하기도” 한다고 토로한다. “늘 작년 이맘때쯤처럼 사는” “집착도 끊지 못하고 밥도 끊지 못하”는 그가 “비루한 삶의 한 방편”에 대해, “비굴함”에 대해 그러므로 결국 “설움”에 대해 말한다.

그의 앞에서 나는, 하릴없이 내 삶에 들러붙어 있던 고독과 외로움의 흔적들을 위로받는다. 나른하게 기울어지던 누군가의 고단한 삶을 어깨로 밀쳐내며 인상을 찌푸렸던 지난 날의 나와 낡은 지하철이 실어 나르던 과거의 시간들을 떠올린다. 결국 모두가 하나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나누어지지 않는 고독의 짐을 홀로 짊어지고 걸어가야 한다는 것, 그러므로 끊임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내 어깨로 슬그머니 기울어지던 그의 삶이 내 것만큼 무거운 것임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는 그를 만났고, 첫눈에 반했으며, 오랜 시간 함께 했으나 항상 혼자였으며, 그러므로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처럼 나도 '집착을 끊지 못'했고 '밥도 끊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왠지 홀가분하다.  
                                                                                          
                                                                                   -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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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 배회하는 시선의 주인, 소외된 구경꾼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2009


축구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사실상 골키퍼에게 주어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골키퍼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키커들이 공을 쫓는 그라운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를 향한 관중의 시선 또한 그가 차지하고 있는 조그만 공간 안으로 상대방의 공이 침입해 들어오는 그 순간뿐이다. 이는 축구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이들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던 골키퍼의 소외된 존재 방식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잠겨 있게 된다. 

그리고 여기, 공격수의 슈팅을 재주 좋게 막아내거나 페널티킥의 방향을 예견해 관객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골키퍼의 환희에 가려진 ‘소외’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은 전직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가 건축 공사장에서 해고된 아침에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고통지는 현장감독의 말이 아닌 시선에 대한 블로흐 자신의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한다. 그렇게 스스로 해고통지를 받아든 블로흐는 이제 경계가 정해지지 않은 공간 속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배회’한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행동은 이전까지 관중 혹은 구경꾼의 시각적 대상이 되었던 블로흐가 시선의 주인이라는 자리로 옮겨와, 스스로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소설은 블로흐의 시선이 써내려가는 일기체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길거리에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는 일상의 세부를, 그 속의 사람들을, 그 모두를 담고 있는 신문과 영화를 말 그대로 끊임없이 ‘본다.’ 그의 시선은 골키퍼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에 집중하는 것처럼 기민하고, 페널티킥의 방향을 예견할 때만큼 갈팡질팡하며, 경기 내내 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블로흐는 삶을 살기보다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며, 철저하게 관객 혹은 구경꾼의 자리에 머무른다. 사건 사고를 기록하고 있는 신문을 보듯, 영화 안에서 흘러가는 가공된 삶을 목격하듯, 그저 보기만 할 뿐 예민한 시선이 잡아낸 삶의 순간들은 그의 의식 안에서도 여전히 배회하며 끝끝내 의미로 남지 못한다.

블로흐는 자주 가던 극장에서 만난 여자 매표원과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그녀를 죽인다. 이유는 아마도 아침에 나눈 그녀와의 대화가 그를 불쾌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대답하려고 하면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지레짐작했”고,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거리던 그녀가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순간, 블로흐는 그녀의 목을 졸라 삶의 의미를 지우고 그녀의 죽음은 '사건'이 아닌 단순한 '사실'로 무감하게 받아들이는 데 그친다. 

시선에 의해 생겨난 의미는 다른 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남겨 놓은 자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국을 남기며 살아간다. 이는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를 통해 표현한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고,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그러므로 블로흐의 배회하는 시선은 누군가에게 ‘하나의 눈짓이고 싶고 무엇이 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며, 그에게 와서 꽃이 되어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절절한 몸짓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구경꾼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데, 그가 현장감독의 모호한 시선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고정시킨 것처럼, 그의 내부로 들어온 다른 것들은 고립되어 있는 블로흐 자신을 재생산해낼 뿐, 그에게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며 외부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무기력한 골키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소외되어 있는 골키퍼의 존재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소외라는 문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흘러간 역사만큼 축적되어 무게를 더하고 있을 뿐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고독과 우울은 블로흐가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 속에 자국을 남기지 못하는 구경꾼의 습관에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추운 겨울밤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취객을 지나쳐, 지하철 바닥에 누추한 잠자리를 펴고 있는 노숙인을 신문 읽듯 훑어보고, 지하철 안에서 들여오는 삶의 소리들을 영화 사운드처럼 흘려보내며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우리는 ‘무기력한 골키퍼’이거나 ‘무심한 구경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 던지는 질문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두에게로 향해 있다. 

당신은 플레이어인가, 구경꾼인가? 
                                                                                
                                                                                                                                                                 
                                                                            -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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