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선'에 해당되는 글 42건

  1. 2010.02.19 [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나희덕의 「귀뚜라미」
  2. 2010.02.17 <오래된 연장통> - 겨울날의 카페 창가 자리를 좋아하시나요? (8)
  3. 2010.02.12 [내 맘대로] 뼈 속까지 즐거운 명절은 없다. (4)
  4. 2010.02.10 <그 삶이 내게 왔다> - 어느 날, 그 책이 내게 왔다 (3)
  5. 2010.02.09 [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나희덕의 「나 서른이 되면」
  6. 2010.02.03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 신명나는 삶의 주인이 되리라
  7. 2010.02.02 [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에쿠니 가오리의「잃다」 (2)
  8. 2010.01.28 [내 맘대로] 모든 관계를 「연애」처럼
  9. 2010.01.21 [내 맘대로] 찻잔이고 싶어요, 하나
  10. 2010.01.20 <한자의 역설> - 한자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2)

[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나희덕의 「귀뚜라미」

나희덕,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1994 

「귀뚜라미」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소리에 묻혀
내 울음 아직은 노래가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 69쪽 -

하루의 절반을 밖에서 보내는 요즘, 목적한 곳을 오고가는 길 위에서 문득 어린 날이 그리워집니다. 그 날의 기억에는 발끝에 붙어 집에까지 따라 들어오던 땅의 흔적이, 빠른 속도로 자동차가 지나간 자리에 ‘탈탈탈탈’ 시끄러운 소리를 흘리며 땅으로 향해 가던 아버지의 경운기가 있습니다. 까맣게 그을린 피부가 땅에 가까이 사는 이들의 삶을 증명하던 애틋한 그 시절이 그렇게 세월과 함께 시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그리움의 마지막에서 저는, 아마도 오늘 우리의 외로움은 지나온 흔적 없이, 집밖을 나섰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끔하게 집으로 돌아온 신발 때문인가’라고 조용히 중얼거려 봅니다. 작은 물방울조차 스밀 틈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콘크리트 바닥을 걸으며, 우리의 신발이 예전처럼 더렵혀지지 않는 만큼 우리는 또한 조금 더 쓸쓸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낮 동안 나에게 보내졌던 누군가의 “타전소리”를 더러운 흙인 것 마냥 탈탈 털어버리고, 우리의 발밑에 견고하게 굳어 있는 콘크리트 바닥처럼, 누군가의 눈물 한방을 담을 수 없는 차가운 마음으로, 오로지 자신만을 지키며 살아온 건 아닐까.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리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로 남겨지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차가운 바닥 위에 아직 노래가 아닌 울음”을 토하며 사방이 ‘신정 6-1 지구’와 같은 “여기” 그리고 “그곳에서”, 울고 있는 “귀뚜라미”, ‘우리’들이 살아 있습니다.  

「신정 6-1 지구」

끊임없이 무엇인가 세워지는 곳에 사는 일은, 폐허에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럽다, 집에 갇혀 있던 흙들은 수십년 만에 풀려나와, 햇빛을 껴안아본다, 그러나 이내 무료한 표정으로 돌아가, 더 견고한 벽 속에 갇히기를 기다리며 푸석해진다, 휘어진 철근 사이, 콘크리트덩이들이 먹다 남은 살점처럼 걸려 있고, 반쯤 깨어져나간 항아리가 하늘을 벌써 몇입 베어먹었다, 햇살은 찡그리며 그 칼날 위에 눕는다, 내일은 어느 집이 헐려나갈까, 내 몸이 나를 모르듯, 저 낡은 지붕들도 제 때를 모르고, 손바닥만한 텃발을 일구던 늙은 손도 그 끝을 모르고, 다만, 내일이라는 믿음이 벽을 낳고, 새로운 지붕을 낳고, 흙은 다시 그 소에 갇혀 마음으로나 쑥갓 상추 따위를 기르겠지, 큰 희망이 작은 희망을 내쫓고, 높은 지붕이 낮은 지붕을 삼키고, 끊임없이, 그림자가 길어지는, 그곳에서  -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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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선 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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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연장통> - 겨울날의 카페 창가 자리를 좋아하시나요?


전중환, <오래된 연장통>, 사이언스북스, 2010

요즘처럼 눈이 내리는 날이면, 문득 좋은 사람과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집니다. 건조하게만 느껴지던 회색 도시가 새하얗게 물들어가는 모습을 사진처럼 눈에 담아놓는 것도 좋겠죠. 그러려면 큰 창이 있는 2층 카페 창가 자리가 제격이겠네요. 하얀 눈에 쌓여 새로 태어나는 세상을 책상 앞 액자에 넣어둔 듯 잠자코 바라볼 수 있으니 말이에요. 그렇게 앉아 있는 동안, 저는 더 이상 두터운 옷을 껴입고 한껏 움츠린 자세로 바삐 걸어가는 ‘현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세상과 잠시 떨어져, 사실상 저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그들을 관망하며, 그렇게 오래도록 마냥 앉아 있고만 싶어집니다.

내 맘과 같은 우리, 이게 ‘석기 시대의 마음’이라고?

그런데 사실 제가 원하는 것처럼, 언제든 2층 창가 자리에 쉽게 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만큼은 모두 한 마음이 된 것처럼, 다들 창가 자리부터 찾아 앉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금 바로 한적한 별다방에 가서 줄지어 들어오는 손님들이 과연 어떤 테이블부터 채우는지 살펴보”면 금세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토록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 걸까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팍팍한 현대인의 삶에서 잠시라도 벗어나는 여유를 느끼기 위해서일까요?

이에 대해 진화심리학의 눈으로 우리의 일상을 ‘다시 보기’하고 있는 <오래된 연장통>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우리의 현대적인 두개골 안에는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인데요, 아니 지금이 어느 때인데 석기 시대의 마음이냐고요? 석기 시대는커녕 디지털 기술의 수혜를 온몸으로 받고 있는 오늘,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당치도 않은 소리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막상 책 속에 펼쳐져 있는 진화심리학의 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니 이게 어쩐 일일까요?

‘오래된 연장통’을 뒤지는 진화심리학

일단 진화심리학이란 그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다윈의 진화론에 기반하고 있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이 진화론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 바로 ‘자연선택이론’입니다. 다윈은 그의 저서 <종의 기원>에서, 부모가 가지고 있는 형질이 후대로 전해져 내려올 때 자연선택을 통해서 주위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는 형질이 선택되어 살아남아 내려옴으로써 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생물 개체는 같은 종이라도 환경에 적응하여 여러 가지 변이를 나타내게 되는데, 이 변이 중에서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변이가 선택되고, 결국 후대로 전해져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화심리학은 “인간의 마음 역시 (이러한)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산물”로서 인식합니다. “우리의 진화적 조상들이 수백만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부딪혔던 여러 적응적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자연선택이 설계해 낸 수많은 다양한 심리 기제들의 묶음”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이죠. 그러니 이 책의 제목이 <오래된 연장통>인 것은 일상생활의 문제가 생겼을 때 꺼내드는 연장통처럼, 인간의 마음 또한 “각각의 적응적 문제들을 잘 해결하게끔 특수화된 수많은 심리적 ‘공구’들이 빼곡이 담긴 연장통”이라는 생각에서 기인합니다.

일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갖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은 사람들이 창가 자리를 선호하는 현상은 ‘조망과 피신’ 즉, “인간은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바깥을 내다 볼 수 있는 곳을 선호하게끔 진화했다.”는 이론으로 설명됩니다. 인류의 조상이 살던 선사 시대의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장애물에 가리지 않는 열린 시야가 필요했는데요, 이는 물이나 음식물 같은 자원을 찾거나 포식자나 악당이 다가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는 데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창가 자리에 앉아 있는 현대인의 '두개골에 석기 시대의 마음이 들어 있다'는 이야기가 더 이상 황당하게만 들리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 이외에도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행동들 모두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자 전중환은 바로 이 질문 앞에 서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요, 진화를 우리의 일상생활에 초대하려는 그의 노력은 소비, 도덕, 음악, 종교, 예술, 문화, 문학처럼 진화 이론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분야들에까지 폭넓게 걸쳐 있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왜 우리가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박장대소하고, 연예인의 가십에 귀를 쫑긋 세우며, “오! 필승 코리아~”를 열창하며 눈물을 흘리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진화심리학은 내 삶에서 매일같이 벌어지는 온갖 현상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제공하며 내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마침 다윈 탄생 200주년을 즈음하여, 우리가 모르는 사이 늘 우리 곁에 있었던 진화심리학의 세계를 여행해 보는 건 어떨까요?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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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뼈 속까지 즐거운 명절은 없다.

반디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현선’입니다.
와~~~ 이 얼마나 반가운 연휴란 말인가!!! 다들 너무 좋으시죠?? ㅇ(^^ㅇ)(ㅇ^^)ㅇ

저처럼 나와 사시는 분들은 오랜만에 가족과 상봉하실 수 있어 좋고, 고향에 내려가면 그곳에서 터를 닦고 사는 옛 친구들을 불러내 술 한 잔 할 수 있어 좋고, 게다가 무엇보다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빨간색 옷을 입고 찾아온 월요일의 존재입니다.
(꺄~~ 너무 좋아!! 빨간 날, 넌 내 스타일이야~~~) 

가만가만,,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니 연휴의 설렘은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ㅡㅡ;;)
다들 숨 한 번 고르시고~~ 요이, 땅!!! (그나저나 제 입에 붙은 요이 땅은 국민학교 마지막 세대의 지워지지 않는 흔적일까요? ^^;;)


1.
일단 저와 같은 From County분들은 기차든 버스든 암튼 뭐든 타고 길 위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내야 하고,
2. 저처럼 울렁거리는 버스에서 그 이상 울렁거릴 수 없는 내장을 갖고 태어나신 분들은 내장의 솔직한 요구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모두 고려하여 충분히 교육받은 교양인으로서 면모를 유지해야 하며,
3. 또 저처럼 운 좋게 이제 막 사회인이 된 신입사원들은 어른들 내복 사느라 빵구난 지갑에 더 이상 세뱃돈 따위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는 가혹한 현실에 눈을 떠야 하고,
4. 가계도에 따라서는 오히려 세뱃돈을 내놓아야 하는 경제적 곤혹의 처지에 놓일 수도 있으며, 
5. 저처럼 내년이면 흔한 말로 계란 한판 채우시는 분들은 “너 시집은 언제 갈 거냐?” “사귀는 사람은 있고?” “내가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인데,,,,어쩌고저쩌고,, 그러니까 함 만나볼래?” 등등
6.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이 저에게 벌어졌던 수많은 일들과 신변, 특히 연애사에 대한 업데이트를 그분들이 만족하실 때까지 제공해드려야 하는 수고로움은 물론
7. 관심도 없는 누구누구네 자식들이 한 해 동안 잘 살아낸 성공스토리는 그동안 갈고 닦은 표정관리 꾸준히 유지하며 들어드려야 하고,
8. 그러는 중간 중간에도 어른들과 다른 내 생각을 예의바르면서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적확한 단어들을 찾아 머리를 굴려야 하고,
9. 자칫 긴장을 풀었다가 맞이할 수 있는 “인생은 말이야~”라는 말머리가 데리고 들어오는 구구한 인생 강의도 들어야 하고,
10.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최악의 사태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말에는 무조건 자동반사적으로 우호적인 맞장구를 쳐드리는 순종적 태도를 보여야 하며,
11. 이제는 더 이상 누가 해준 음식 받아먹을 나이는 지났으므로 팔 걷어 부치고 명절 때마다 무임금으로 부엌에 취직하는 여성 노동자들과 연대도 해야 하며, 
12. 연휴 내내 시체처럼 잠만 자고 싶어도 살아있는 사람답게 끼니때마다 일어나 모래알 같은 밥알을 억지로 씹어넘겨야 하고, 
13. 촌수도 잘 모르는 친척들을 포함, 엄청나게 많은 식구들의 수저도 놓아야 하며, 
14. 다 먹은 후에는 다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로 돌아가 환경보호를 거스르며 수저에 퐁퐁질도 해야 하고,
15. 간혹 고모와 엄마 사이에서 생길 수 있는 엄청난 갈등 상황을 대비해 비상시에는 ‘어른이고 뭐고 없다. 반드시 우리 엄마는 지켜 내리라’라는 비장함도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어려움은 아무래도, 이렇게 저렇게 며칠을 지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이것저것 손에 쥐어주시는 엄마 앞에서, ‘사람들도 많은데 짐까지 많으면 차 없는 뚜벅이들이 이만저만 고생이 아닌데, 그러나 저러나 왜 아직 지구상에서 저 까만 비닐 봉다리는 사라지지 않았는지’를 생각하다, 머리 속 생각과는 상관없이 거의 자동으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누르며, ‘왜 이렇게 밖에 못살아,,..’라는 말 대신, ‘엄마 올라가면 전화 자주 할게’라는 언제나 진심이였지만 또 언제나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되었던 약속을 하고 돌아선다는 겁니다. 아... 어머니 

「어머니」

나는 나만 앓아도 이렇게 무거운데
도대체 바위는 누구를 그리 앓았나,

저 바위
같은 사람을 알고 있다.

받아들인 근심의 무게로
딱딱하게 굳어,

묻혀가는,


-이대흠, <귀가 서럽다>, 창비, 63쪽-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리고 머리가 울리고
이내 가슴속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려나온다

어머니라는 말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웅웅거리는 종소리 온몸을 물들이고
어와 머 사이 머와 니 사이
어머니의 굵은 주름살 같은 그 말의 사이에
따스함이라든가 한없음이라든가
이런 말들이 고랑고랑 이랑이랑

어머니라는 말을 나직이 발음해보면
입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웅얼웅얼 생기는 파문을 따라
보고픔이나 그리움 같은 게 고요고요 번진다

어머니라는 말을 또 혀로 굴리다보면
물결소리 출렁출렁 너울거리고
맘속 깊은 바람에 파도가 인다
그렇게 출렁대는 파도소리 아래엔
멸치도 갈치도 무럭무럭 자라는 바다의 깊은 속내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그 바다 깊은 속에는
성난 마음 녹이는 물의 숨결 들어 있고
모난 마음 다음어주는
매운 파도의 외침이 있다.

-이대흠,『귀가 서럽다』, 창비, 54-55쪽-

 -현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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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삶이 내게 왔다> - 어느 날, 그 책이 내게 왔다

정성일 외, <그 삶이 내게 왔다>, 인물과사상사, 2009

견딜 수 없이 추운 날이 있다. 꼭 얇은 옷을 입어서만은 아니다. 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마치 단단한 얼음이 맨살에 닿듯 마음까지 아려오는 날, 그런 날이 있다. 누군가와 같이 있어도 이해받지 못해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그러나 사실은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해 홀로 남겨 놓았다는 걸 깨닫는, 아픈 순간이 있다. 결국 피해자의 눈물을 뿌리다 말고 가해자의 죄의식을 갖게 된 그때, ‘나는 누구이고,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을 때. 그렇게 나보다 먼저 아픈 날을 보냈을 누군가에게 무작정 의지하고 싶어지던 날, <그 삶이 내게 왔다>가 내게 왔다.

<그 삶이 내게 왔다>는 어느덧 인생의 절반에 이른 이들이 자신만의 길을 찾으며 오늘에 이른 과정을 담담하게 들려준다. 책 겉표지에 적힌 것처럼, 이 책에 “담긴 17인의 이야기의 공통점은 이들이 자신과 삶에 대해 진지하게 물으며 살아왔다는 것뿐이다.” 소설가 공선옥씨는 자신이 글로 “밥을 벌”게 된 사연을 고백하며, “사람이 혼자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이 외롭거나 가난하거나 억울하거나 슬프거나 답답하거나 할 때 무엇이 그런 ‘슬픔’들을 덜 억울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처럼 글쓰기가 시작되었음을 이야기한다.(13쪽)

그러나 만약 책 속에 있는 17인 중 다른 누군가가 똑같은 물음 앞에 직면하게 됐다면, 그는 아마 다른 삶을 선택해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때 ‘다른 누군가’는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된다. 그러니 모두 “그저 자신답게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이런 이유에서 ‘그 삶’은 ‘내게’로만 오는 것이다. 미술치료사 박승숙씨가 말하듯, “(사람은) 누구나 유전적으로 결정된 체질이란 게 있어 어떤 면은 과도하고 어떤 면은 적당하며 어떤 건 부족하고 비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중심을 정중앙에 두고 똑바르게 나아가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운 무게중심 때문에 구르거나 휘어서 간다. 거기에 순간순간 당기고 밀고 부딪는 수많은 인연이 변수로 보태지니 당연히 이리저리 쏠리고 절뚝이며 돈다. 그건 극히 자연스런 일.” (209-210쪽)인 것이다.

이처럼 삶이 그렇듯, 이 책을 읽는 방법 또한 마찬가지이다. 17인의 에세이, 17개의 ‘그 삶’에서 무엇을 보든 그것은 “그저 자신다움”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지표에 불과하며, 나를 건드린 ‘그 삶’은 그 모습 그대로 내게는 오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 어딘가에서 자신을 닮아 있는 순간들을 발견하고 그들이 “보내는 작은 응원”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다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로부터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그렇게 낯선 길을 대딛을 소박한 용기를 얻어가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우리에게 고마운 존재다.

대중예술평론가 이영미, 이슬람 문화와 함께 하는 이희수, 사진작가 강홍구, 『작은책』발행인 안건모, 저술가 남경태, 기생충 연구하는 서민, 영화평론가 정성일, 금산간디학교 교장 양희규, MBC기자 이진숙, 인권운동가 박래군, 문화비평가 김창남, 인터넷 서평꾼 로쟈 이현우, 건축비평가 전진삼. 이들 모두는, 지갑 안에 들어가는 작은 명함 따위로 다 담아낼 수 없는, 그들의 이름을 수식하고 있는 직함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그 삶’의 살아있는 숨결, 그 생(生)의 역사를 들려준다.

그렇게 우리가 영원히 모르고 지나쳤을 수많은 삶의 가능성 속에서, 지금 우리의 눈앞을 지키고 서 있는 ‘이 삶’의 어려움이 “그저 자신다운” 삶의 일부가 되리라는 사실을 넌지시 일러준다. 그러므로 낯선 거리에서 길 잃을 불안을 다스리기 위해 대되는 ‘모든 길은 통해 있다.’라는 말처럼, 그저 걷고 또 걸으면 내 삶에 영영 등장하지 않았을 어떤 사람이나 풍경을 새롭게 발견하거나, 언젠간 목적한 그곳에도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위안을 받게 된다. 결국 우리의 삶은,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꼬리를 붙잡힌 도마뱀처럼 ‘툭’하고 끊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 듯하다. 

이러저러한 생각으로 목적지를 지나친, 단 한 정거장 정도의 짧은 거리에 이제껏 달려온 모든 길보다 더 먼 거리감을 느끼는 막막한 그날. 그 자리에 주저 앉아버리고 싶은 그대에게 권한다. 

“길 모르니 서둘 것 없다.”
(221쪽)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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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나희덕의 「나 서른이 되면」

김종길 외, <설운 서른>, 버티고, 2008  

나 서른이 되면

나희덕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 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러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가을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 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잘 길들여진 발과
어디로 떠나갈지 모르는 발을 함께 달고서
그렇게라도 걷고 걸어서
나 서른이 되면
그것들의 하나됨을 이해하게 될까
두려움에 대하여 통증에 대하여
그러나 사랑에 대하여
무어라 한마디 말할 수 있게 될까.
생존을 위해 주검을 끌고가는 개미들처럼
그 주검으로
어린것들의 살이 오른다는 걸
나 감사하게 될까, 서른이 되면.

단 하나, 세상이 우리 모두에게 공평한 게 있다. 어쩔 수 없이 눈 뜨고 보내야 하는 한나절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온다는 것. 우리는 “밝아오는 빛 속에” 전시(展示)된 세상의 몰골을 여지없이 보아 넘겨야만 한다. 죄 많은 이들의 생(生)이 바로 그 세상에 걸려 있기 때문에. 그래서 시인 허연은 그 세상을 “슬픈 빙하시대”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처럼 이제 “혼자 술을 먹는 사람들을 이해할 나이가 됐다. 그들의 식도를 타고 내려갈 비굴함과 설움이, 유행가 한 자락이 우주에서도 다 통할 것 같아 보인다.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베란다 홈통에서 쏟아지는 물소리만큼이나 출처불명이라는 것까지 안다. 내 나이에 이젠 모든 죄가 다 어울린다는 것도 안다.(실제로 얼마 전 나는 길거리 쓰레기 투척으로 벌금을 물기도 했다. (>_<);;) 업무상 배임, 공금횡령, 변호사법 위반, 뭘 갖다 붙여도 다 어울린다. 때묻은 나이다. 죄와 어울리는 나이. 나와 내 친구들은 이제 죄와 잘 어울린다. 안된 일이지만 청춘은 간” 것이다. (허연, 『나쁜 소년이 서 있다』, 「슬픈 빙하시대 2」, 민음사, 2008

그러므로 날이 저물어갈 무렵, 취기에 목마른 이들이 제각기 술집으로 향해간다. 거나하게 취한 정신이 낮 동안 쌓아놓았던 울분을 작은 술잔에 넘치도록 쏟아 붓는다. 개그맨 박성광은 매주 일요일 저녁, 우리 대신 외친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열패감이란 놈이 비싼 안주를 대신해 자꾸만 술을 재촉한다. 그러나 생의 연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우리의 몸은 더 이상의 위험(알코올 중독, 생(生)의지 상실 (ㅡㅡ;;))을 피하기 위해 매우 적절한 시기에 수면욕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결국 육체에 복종하는 우리의 정신은 “더러운 세상”을 고스란히 남겨놓고 눈 질끈 감아 내일을 맞이하러 떠난다.

또 다시 해가 뜨고, 새로운 날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지난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나” (허연, 같은 책,「간밤에 추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어제의 울분을 내일의 희망으로 바꾸어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 치욕스레 합류해 걸어간다. 그리고는 언제고 찾아올 부끄럼은 모르는 척 돌려보내고, 또 다시 세상을 향해 구시렁거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의 죄가 하나 더 추가된다. 

말랑말랑해서 몸과 마음 모두가 헤맬 수 있었던 청춘은 가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딱딱하게 굳은 비(非)청춘의 몸만 남았다. 더러운 세상의 모순, 그 자체가 되어버린 내가 서른을 기다리며 남아 있다. 

                                                                                                                                                                     -현선 씀

[산울림의 <청춘> 들으러 반디앤루니스 네이버 블로그 바로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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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 신명나는 삶의 주인이 되리라

 

유승훈,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 우리 놀이의 문화사>, 월간미술, 2009

지금, 놀고 싶으십니까? 

예상컨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누구나 쉽게 그리고 비슷하게 할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최소한의 삶(의식주)이 보장되는 한에서 최대한 많이 놀고 싶어 할 테니까요. 특히, 최소한의 삶을 위해 버거운 노동을 지속해야 하는 사람일수록 놀이는 더욱 간절해집니다. 그들에게 노동은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고달픈 것이기 때문이죠.

이때, 노는 것(놀이)은 일하는 것(노동)의 반대가 됩니다. 그러므로 일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 노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실업자, 백수들은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노는 사람’으로 통용됩니다. 그러니 현재 우리는, 일하지 않고 놀고 싶어 하는 동시에 놀지 않고 일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확고한 경계들 사이에서 ‘노동’ 아니면 ‘놀이’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로 인해 노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놀이의 욕구가, 노는 사람에게는 노동의 필요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즐길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책 속에 나타난 과거 조상들의 놀이는 노동과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는 자연 속에서 그 순리대로 살아가던 농업 중심의 생활 방식을 보여줍니다. 특히, 겨울-봄-여름-가을의 계절 순환 구조에 따라 우리의 전통 놀이들을 배치한 책의 구성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 관계 속에서 계절의 변화와 깊이 맞물려 있는 세시 풍속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책이 겨울의 놀이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농번기를 비껴 놀이 문화가 생성된 자연스러운 현상을 그대로 담은 것입니다. 이처럼 과거 조상들의 삶은 자연의 흐름 속에서 그것과 분리되지 않은 채 이어져 나갔으며, 계절의 변화에 따른 노동은 절기 마다 이루어지는 놀이와 맞물려 ‘신명’나는 삶의 일부가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농사를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입춘 놀이 풍속은 흙으로 만든 소(토우)를 세워두고 한기(동장군)를 쫓는 용도로 사용됩니다. 이는 12월은 달의 간지로 소(丑)에 해당되며, “끌기도 하고 멈추게 할 수” 있는 소의 견인성(牽引性)을 활용"하여, 한기를 몰아내고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봄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토우를 만들어 세울 뿐만 아니라 때리는 풍습인 타춘(打春)은 입춘 하루 전날 관아 앞에 토우를 세워 두고 고을의 수령이 제사를 지낸 다음, 버드나무 가지로 이 토우를 때리는 것입니다. 이는 봄을 빨리 오게 하라는 재촉의 신호로 타춘을 통해 부서진 토우의 조각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모태가 되는 자연 순화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104-107쪽)

아니 놀지는 않으십니까?

그런데 “입춘에 대한 애틋한 기다림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농사가 홀대받는 후기 산업 사회에서 입춘의 반가움을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사시사철 레고 같은 건물 안에 갇혀 일을 하는데 입춘이 언제 오는지 알기는 할까요? 현대사회에서 노동과 놀이(혹은 여가)의 분리는 자본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놀이 문화에서 문화는 결국 산업의 일부로서 자본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또 놀이문화의 주체가 개인이나 공동체가 아닌 소수의 생산자로 이행되면서 놀이의 방법 중 하나인 문화산업은 또 다른 이윤창출의 도구가 됩니다. 

이는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판에 들어가 문화를 소비함을 의미합니다. 게다가 현재 삶의 기반이 개인 중심으로 되어 있는 만큼 놀이 문화 또한 혼자 혹은 소수 집단으로 축소되어가고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몇 해 전에 유행했던 “혼자 놀기의 진수”라는 말은 마을과 같은 삶의 공동체를 상실한 개인들의 씁쓸한 현재 모습을 드러내는 유머라고도 볼 수 있겠죠.

다시 한 판 놀아 볼까요? 
 

그러나 이 말은 또 다른 의미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혼자 놀기의 진수”를 체득한 개인들은 그만큼 능동적으로 자신이 즐길 수 있는 놀이문화를 창조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생산물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공간을 통해 보다 쉽게 많은 사람들과 공유되기도 합니다. 분명 예전과는 다른 세상이 도래한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의 놀이 문화가 달라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러나 ‘우리 놀이의 문화사’를 시작하는 저자의 말은 변화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노동과 놀이 모두를 더욱 신명나게 할 만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놀이는 경계의 문화라는 것. 죽음에서 삶으로, 고통에서 희망으로, 노동에서 여가로, 그 경계에 서 있는 것이 놀이였다. 만가를 통해 죽음을 승화되고 달구질은 힘든 노역이 아닌 즐거운 노동이 되는 것처럼 전혀 달라 보이는 양자는 놀이를 통해 굳게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놀이를 통해 삶과 죽음, 일과 여가, 의례와 놀이가 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하나는 바로 ‘신명’이었다. 신명을 알아차리는 순간, 가슴에 묻혀 있던 죽음의 공포가 허물어졌다.”

이처럼 놀이의 방식이 무엇이든, 경계에 서 있는 문화로서의 놀이는 신명나는 삶의 자리로 삶의 주인인 우리를 초대합니다.  

                                                                                                                                      -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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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에쿠니 가오리의「잃다」

에쿠니 가오리, <제비꽃 설탕 절임>, 소담, 2009  

「잃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당신은 말하지만
나를 잃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
멀리 가지 마
당신은 말하지만
나를 멀리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
깜짝 놀랐잖아
당신 혹시
나를 잃어가고 있는 거야? 

- 42쪽 -

 A: 너를 잃고 싶지 않아. 멀리 가지 마

. 일단 A가 무엇을 ‘너’로 지칭했는지 알 수가 없네요. 빛나고 뜨거웠던 청춘의 너일까요? 오늘 A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있는 너일까요? 우리로선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죠.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답답한 노릇일 밖에요.

잃다
. ‘가졌던 물건이 없어져 그것을 갖지 아니하게 되다’라는 의미라는데요, 그러니까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그 대상이 없어지거나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잃다’라고 얘기하게 되는 거겠죠? 그런 의미에서 ‘잃다’는 ‘버리다’라는 말의 반대가 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잃는’ 대상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너’이니, 이것 참 큰 일입니다. 어떤 너를 잃는다는 건지... 게다가 여기서 문제는 더 복잡해지는데요, ‘나’의 의지와 상관없다던 ‘잃다’라는 상황이 정말 ‘나’와 상관없는 건지 의심이 생기기 때문이죠. ‘나’가 ‘너’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듯이, ①반대편에서 ‘너’는 또 ‘나’를 자기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너’가 똑같은 방식으로 ‘나’를 잃어갈지도 모른다고 가정했을 때, 너와 나의 관계 안에서 ‘잃다’라는 결과의 근본 원인은 불분명해진다는 거죠. 

이런이런,, 분명한 결과의 원인을 알 수 없으니,, 책임 추궁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그냥 ‘너를 잃다’라는 결과만 남는 거죠.
더욱이 시간은 이런 결과를 부추기는 잔인함까지 보입니다. 야금야금 흘러가는 시간이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너와 나를 변화시켜 분명 어떤 시점의 너와 나는 잃어가게 하니까요.  

A는 ‘잃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엇, 그런데.. 그렇다면!! 이 말 이전에 A는 ‘너를 잃다’라는 상황을 이미 생각한 거겠네요, 이유가 어쨌든 ‘너를 잃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A는 이미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그러고 ‘싶지 않다’라는 바람이 생길 수 있는 거 아닐까요? 물론 A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너’가 변할 수도 A 자신이 변할 수도, 너와 A의 관계가 총체적(?)으로 변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A는 또 ‘멀리 가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멀리’는 심리적 육체적 거리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멀리 가다’는 능동적인 행위의 주체(너)를 전제합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멀어지다’ 정도의 표현을 사용했겠죠. 하지만 A의 말이 '너'의 능동적 행위를 가정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의 원인 역시 ‘너’에게만 한정할 수 없습니다. 경험상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떠나도록 은밀하게 유도하는 못된 이들이 있다는 걸 알잖아요. 휴... 뭐가 이렇게 복잡한가요. 

B: 당신은 말하지만 나를 잃을 수 있는 사람, 나를 멀리 보낼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 깜짝 놀랐잖아 당신 혹시 나를 잃어가고 있는 거야?

이 말을 통해 조금은 분명해지는 게 있네요. ①에 대한 설명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를 잃을 수 있고 멀리 보낼 수 있는 사람’으로 A를 호명하고 있는 B를 알 수 있다는 거죠. B로 인해 A는 능력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해보면 이 말은 특정한 관계(A와 B)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나와 너는 각각의 관계 안에서 만들어지는 자리이고 의미이기 때문에, A와 B에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 의미, 역할 등은 그 관계 안에서만 유지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 B의 말은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B를 잃을 수 있는 사람은 애초에 B를 가졌던 A밖에 없으며, B를 (A로부터) 멀리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역시 A밖에 없는 것이죠.

B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을 잃고 싶지 않다며 멀리 가지 말라는 A의 말을 듣고 말이죠. 왜일까요?? 잃고 싶지 않다는데요, 멀리 가지 말라는데요. 저도 한 번 들어보고 싶은 말인데요.(ㅡㅡ;;) 

그런데 다시금 생각해보니 앞서 우리가 눈치챘던 것처럼 B 역시 A가 이미 ‘B를 잃는, 그래서 B가 멀리 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하고 있으며 어쩌면 이미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불안한 마음에 한 말이라는 걸. 알아챈 걸까요?? 그래서인지 B가 묻네요. 당신 ‘혹시’ 나를 잃어가고 있는 거야? 

우리말이 전하는 생활의 진리 중 이런 게 있죠.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또 누군가(이오공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A랑 B, 이제 어쩌나요? 그나저나 A랑 B가 저를 포함한 여러분일 수 있다는 거, 그게 더 문제네요.
그러므로 우리 이제 어쩌나요? 결국 우리에게도 ‘잃다’라고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 건가요?? (ㅠㅠ) 

[이오공감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들으러 반디앤루니스 네이버 블로그 가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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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모든 관계를 「연애」처럼

반디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현선’입니다. ^ㅇ^

똑딱똑딱똑딱.... 여러분은 이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레드썬!!
문이 하나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그 문을 열고 일주일 전으로 돌아갑니다.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그것은,,

  
[내 맘대로] 찻잔이고 싶어요, 하나
↑↑ 바로 요 장면(^^;;)

그럼, 오늘의 이야기, 요이~ 땅!!

하나
, 그분의 시선이 ‘찰칵’ 저의 이미지를 찍습니다.
키 164cm (하이힐 포함 170cm), 보통 체격, 가방끈이 흘러내릴 일 없는 직선 어깨, 커트 머리, 검은 코트, 검은 자켓, 검은 바지, 검은 가방, 검은 테 안경 등등 (사진 찍히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관계로 정확한 분석을 위한 인증샷에 대한 압박은 저 멀리 우주로 날려버립니다. “인증샷, 개나 줘버려~”) 그러므로 이상을 종합하여 제법 유사해 보이는 가상의 대상을 설정합니다. 바로~~ 


오! 마이! 갓!!!!!!!!!

어쨌든 위의 이미지만을 보고 여러분은 저와 함께 첫인상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걸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 이미지는 어떤 느낌 혹은 인상을 동반합니다.
엄격, 냉정(冷情), 비정(非情), 또,,,,,, 저승자사, 장례식 (ㅡㅡ;;)

일단 여기까지 정리해보면, 사실상 ‘하나’에서 나열했던 요소들과 ‘둘’에서 제시한 단어들은 논리적인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칼로 자르듯이 분리할 수 없으므로, 내면의 어떤 요소가 외면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는 검은색을 냉정 혹은 저승사자와 연결해 생각하는 것은 경험이나 교육, 관습 등 사회적 연상인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저 또한 이런 관습적이고 사회적인 연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 ‘하나’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선천적인 체형을 제외하고 남은 것들은 모두 주관적인 선택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선택의 결과는 선택의 주체 즉, 저에 대한 분석을 요구합니다. 물론 첫인상에서 선천적인 외모는 무엇보다 큰 영향력을 미칩니다. 그러나 이 분석을 위해서는 관상학 뭐 이런 게 동원되어야 듯해서,,, 은근슬쩍 패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제가 저의 선택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즉 어떤 인상들로 이어질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면 저는 왜 그런 선택을 한 걸까요? 

① 나는 타인에게 엄격하고 냉정하게 보이고 싶다.
② 나는 그냥 내 취향대로 선택했을 뿐,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①과 ② 모두 지난 포스팅의 ‘저는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습니다.’라는 문장에 의거해 정답이 될 수 없습니다. 엄격과 냉정은 친절한 사람과는 거리 먼 단어이며, 어떻게 보이고 싶다는 마음은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 알 바임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저에게는 어떤 모순이 발견됩니다.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으면서도 친절해보이지 않을 것 같은 복장의 요소를 선택하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내 맘대로] 찻잔이 되려면 저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겠네요. 일단 최대한 솔직하게 저와 관련된 사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① 저는 진짜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①-1 모든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이고 싶지만 특히 제가 마음에 드는 사람이 저를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습니다.
①-2 제가 마음에 드는 모든 사람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할 수는 없습니다.
①-3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그 사람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때, 저는 어쩔 수 없이 상처받습니다.
①-4 저는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
①-5 그러므로 누군가 저를 먼저 마음에 들어 하기 전까지, 아무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마음처럼 잘 되지는 않습니다.

② 저는 검은 색이 연상시키는 친절하지 않은(감정이 결여되어 있는 듯한) 이미지를 알고 있습니다. (p.s 저는 모든 색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옷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만은 모든 색을 압도하는 검은 색의 매혹을 뿌리칠 수 없더라구요. (^^;;))

그러므로 상처받고 싶지 않은 저는 검은 색으로 냉정(冷情) 혹은 비정(非情)을 가장해 자기방어를 완성합니다. 제 전략대로 타인들은 쉽사리 저에게 접근해오지 않습니다. 타인을 알 기회가 별로 없으니 그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할 일도 별로 없습니다. 저는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외로워지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니 지난 번 [내 맘대로]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달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 전 앞으로 이루어질 전략 수정의 방향을 예견해주는 좋은 시를 발견했습니다.
 

「연애」

샤워기 틀어 몰 온도 맞추듯
나를 그대의 온도에 맞추고 싶다
찬물 한 방울에도 소스라치는 세포처럼
가을의 원형질이 눈 뜨는 저녁
북쪽으로부터 발갛게 숲이 물들다

- 김석교,『봄날 아침부터 가을 오후까지』, 심지, 2009, 62쪽

그리곤 누군가 저에게 이 노래를 불러줄 날을 상상해봅니다.

「Crave」 - Nuno

Got the right house 집을 맞게 찾긴 했는데
But the wrong address 번지수가 틀렸어
I should have my head examined 머리를 한번 검사 해봐야겠군
I finally found the difference between 마침내 키스와 세균전쟁의
A kiss and germ warfare 차이점을 알아내고
I siphoned gasoline 난 가솔린을 빨아 들였지

Your eyes, your ears, 당신의 눈과 귀
your mouth, your nose 당신의 입과 코
Your arms, your legs, 당신의 팔과 다리
your heart, you soul 당신의 마음과 영혼
Touch me, Touch me 내게 손길을 줘봐
My body crave your touch 내 몸은 당신의 손길을 갈망하고 있어

A snapshot of you 당신 사진은
Tucked in my shoe 내 신발 속에 쳐박혀 있어
So close and yet so far from you 너와는 가깝고도 먼 사이야
I'm sitting at the back of the bus 버스 뒷좌석에 앉아서
I picture you driving 당신이 운전하는 걸 그려봐
Your review mirror eyes 백미러에 비친 당신의 눈

I crave you 당신을 원해

A prisoner I'm the warden too 난 죄수인 동시에 감시자야
Nothin' worse than self made misery 자신이 초래한 불행보다 더 비참한 건 없어
If Moses truly parted the sea 모세가 정말 바다를 갈랐다면
Then can I quit smoking 난 담배를 끊을 수 있을까?
My miracles run weak, 내게 기적이 일어날 확률은 적어지고 있어
yes they do 정말 그래

  [Nuno의 Crave 들으러 반디앤루니스 네이버 블로그 바기(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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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찻잔이고 싶어요, 하나

반디 가족 여러분, 안녕하세요! ‘현선’입니다. ^ㅇ^
날씨가 제법 따뜻해졌습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운 날씨는 저를 ‘너무’ 힘들게 하거든요.

너무
,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라는 의미를 지닌 이 말은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차가운 사람은 다가가려는 사람을 망설이게 하고 그 스스로도 외로워지며, 너무 뜨거운 사람은 무던한 일상을 뒤흔들어 놓으니 오래 담아둘 수가 없으니까요. 게다가 그만큼 빨리 식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가 되기도 하죠.  

그러니 비극입니다. 제가 바로 그 ‘너무’한 사람인 거 같거든요.

지옥 같은 추위가 걷히기 전, 모르는 사람과 술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게 됐습니다. 곧바로 낯선 사람에 대한 ‘울렁증’이 작동하기 시작합니다. 표정을 관리할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되고 싶어집니다. 방금 전까지 제가 어떻게 웃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얼굴의 어떤 근육을 써야 웃을 수 있는 걸까요? 물론 웃을 만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친절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너무 솔직한 제 안면근육은 언제나처럼 관성의 법칙을 따라 환한 미소를 위한 움직임은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으니까요. 

늘 그렇듯 모르는 사람과의 어색함을 무마시키기 위해 마음 대신 술잔에 담긴 가벼운 말들만 나누기 시작합니다. 나를 미루어 남을 생각하건데, 아마도 지금 오고가는 말들 중에 내일까지 기억나는 것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들과 함께 저도 그 사람에게서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겠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누구에게나 잘 지워지지 않는 게 있습니다. 첫인상.

드디어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단골 화제로 떠오르는 ‘첫인상’이 등장했습니다. 그 사람은 경직된 제 안면근육에 대한 화답으로 한 마디 하십니다. 

그 분: 너무 차가워 보여요.

이런.. (ㅡㅡ;;)

나: 아, 그런가요? 

모르는 척 한 번 해봤습니다. 똑같은 말, 수백 번은 족히 들어본 것 같습니다. 어리석은 저는 스스로 확인사살까지 하고 말았네요.

그 분: 말이라도 걸면 “뭐야, 니 놈은??”이라고 화낼 것 같아요.

사실 그 분의 대사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습니다. 범죄처럼 제 기억은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어차피 모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고, 그 말이 그 말이며 결론은 같으니까요. 반전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전 사전의 경험을 십분 활용하여 능숙하게 공감을 표해 우호적인 반응을 유도하는 동시에 내가 절대로 그대를 헤치지 않을 것이며, 사실은 나도 제법 따뜻한 사람임을 은밀히(?) 주입시킵니다. 

나: 아니에요! 아니에요! 절대!! 지금은 친해진 언니도 처음에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다’고 했지만, 지금은 제가 너무 쉽다던데요?
  하하하,,,하하,,하,,,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그냥 내질러 보는 겁니다. 믿거나 말거나 강바닥에 삽질하는 게 녹색성장이라고 주장하는 누구처럼. 어쨌든 이미 그 분에게는 그 어떤 논리가, 말하자면 제 안면근육의 경직성과 유사한 무언가가 확실하게 박혀 있으니까요.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거죠. 다음 분을 기다려 봐야겠습니다. 그래도 다시 강조해봅니다. 목소리 톤을 갑자기 높여서 ‘삑사리’가 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노력했는데, 그 분의 안면을 보아하니 믿지 않는 게 분명합니다. 결국 그 분이 Winner입니다. ABBA가 부릅니다. “Winner take it all", 너 다 가져라. (>_<);;

가만 생각해 보니 그 분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고교시절, 역 앞에 세워져 있던 헌혈차는 아이들의 피를 받는 대신 공짜 영화표를 손에 쥐어 줬는데요, 저도 그 영화표를 한 번 얻어 볼 요량으로 헌혈차에 올랐었죠. 그런데 기대하던 영화표 대신 ‘남 줄 피가 없다’는 말이 돌아옵니다. 찌르면 피가 나오긴 하는데 너무 적게 나온다는 거죠. 또 한 번 저는 ‘너무’합니다.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건 사람이 아니니, 남 줄 피가 없는 저는 개중에 가장 차가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그렇지만 역시 조금밖에 나오지 않는 제 피도 남들만큼 따뜻한 건 분명합니다.

그러니 저도 더 이상 너무한 사람이고 싶지 않네요. 그래서 다음 분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외쳐볼까 합니다. 전 모두에게 ‘찻잔이고 싶어요.’ 

[찻잔 - 노고지리]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 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네게로 흐른다 

[<찻잔> 들으러 반디앤루니스 네이버 블로그 바로가기(클릭)]

덧붙이는 말
첫인상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러니까 나의 첫인상을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일까요, 타인의 시선일까요? 혹은 차갑게 보이는 인상이 가리고 있는 내면의 심리는 뭘까요?

첫인상과 관련된 질문과 [내 맘대로] 답변은 계속됩니다.
속편을 싫어해 만화책과 일드는 완결된 것만 골라보고, 반지의 제왕은 과감하게 포기했던 저지만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합니다.^^;;                                    

그러므로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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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역설> - 한자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김근, <한자의 역설>, 삼인, 2009


<한자의 역설>을 시작하는 물음, “왜 한자를 이해해야 하는가”

저자 김근은 중국의 광대한 대륙과 4000년에 이르는 역사뿐만 아니라 언어와 관련된 다양한 이론의 영역들을 유연하게 횡단하며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혹은 숨겨져 있는 ‘한자’의 사회·문화적 가치와 의미를 꼼꼼하게 찾아내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행보를 시작하게 하는 것은 (우리는) “왜 한자를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 발전과 가능성에 기대어 급격히 늘어난 중국어에 대한 수요와 자격증의 하나로 취급되는 ‘한자능력시험’의 관심 증가, 더욱이 한자문화권 안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 물음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도 매우 의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한자를 외우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들에게, 중고등학교 교과목에 왜 한문이 포함됐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취직과 승진 등을 목적으로 중국어와 씨름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한자의 역설>은 질문합니다. “왜 한자를 이해해야 하는가.”

한자는 중국을 이렇게 지배했다

<한자의 역설>은 ‘언어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한자가 중국 역사에 미친 영향과 중국을 지배한 과정,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한자의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여 드러내줍니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광활한 대륙을 통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효과적인 지배의 틀이 필요했으며, 이는 곧 한자의 형성과 연관되어 있는 관념적인 틀로서의 이치(행동 규범으로 작용하는 상징적 원리)에 대한 강조에 다름 아닙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자는 지배이데올로기의 생성과 적용에 있어서 무엇보다 유용한 도구로 사용됐습니다.

한자는 우리말과 달리 글자 하나하나가 의미를 지니고 있는 표의문자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표의기능은 한자의 구성에 이미지가 개입돼 있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아이콘이나 로고가 특별한 독해 방법 없이도 지시하는 의미를 스스로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이미지로서의 "한자 역시 스스로 그 의미를 표상"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효도 효(孝)자는 그 자형에 있어서 자식(子)이 노부모(老)를 업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효도라는 의미를 드러냅니다.

이처럼 한자가 전달하는 이미지의 상징적 의미들은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그것이 담고 있는 사물의 가치와 질서체계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다시 말해, “상징적 모양의 효(孝)자의 자형은 이 글자를 보는 사람들에게, 효도하려면 노부모를 업고 다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불러일으키며”, 이와 동시에 부모와 자식 사이의 상하관계를 규정하는 위계질서를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문자언어가 우리에게 권력의 담론을 내재화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형이라는 시각적 상징은 너무나 형상적이어서 (효에 대한) 이러한 개념이 정당한 것인지, 또는 효를 이렇게 실천하라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물의 의미를 이미지로써 규정해주는 한자의 기능은 이데올로기를 당연한 이치로 여기도록 유포하는 데 매우 유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상징체계로서의 모든 언어가 개별적인 실제 세계의 모습들을 모두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한자 또한 그 내부에 포섭되지 않은 잉여 혹은 모순을 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물들 간의 공통적 특징을 추상화하는 언어는 본질적으로 개개의 특징적 양상들을 필연적으로 배제시킬 수밖에 없는데, 예를 들어 ‘사람’이라는 말은 나와 너의 차이를 지우고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특성만을 지시합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포함한 모든 상징체계는 그 자체로 불가피한 역설에 직면하게 되며, 이러한 맥락에서 지배이데올로기는 이에 대항하는 잉여와 모순이라는 위험 요소를 항상 내재하게 됩니다. 이러한 잉여가 해결되지 않은 채 축적되어 세력화되면 역사의 흐름을 뒤바꾸는 혁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위기 속에서 중국인들은 ‘중용’이라는 지혜를 통해 역사의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자는 그것의 해석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능성에 의해 잉여와 모순을 내부로 포섭하고, 큰 저항 없이 지배 이데올로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점이 바로 저자가 강조하는 ‘한자의 역설’, 즉 이데올로기의 상징체계 밖으로 내몰린 잉여와 모순적 존재들에게, 가능성으로 남겨진 의미들을 통해 그 체제 안으로 진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이를 통해 현재의 체제를 인정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한자의 역설>은 독자를 이렇게 안내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한자의 지식으로부터 출발, 역사적인 맥락에서 그 의미들을 구체화해 보여줍니다. 그리고 다양한 예를 통해 한자에 대한 사전 지식이 많지 않은 이들에게도 쉽게 읽힐 수 있도록 내용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학창시절에 보았던 낯익은 용어들, 즉 한자의 형성원리인 '육서'나 서체의 종류 등을 발견하는가 하면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지식을 만나는 참된 독서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하는 한자들의 기원과 의미의 그물망으로 얽혀 있는 다양한 한자들에 대한 설명은 한자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줍니다. 이렇듯 <한자의 역설>은 독자에게 언어(한자)와 이데올로기의 관계라는 깊이 있는 이론적 이해와 함께 '한자의 재미'라는 덤까지 가져다줍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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