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선'에 해당되는 글 42건

  1. 2010.04.14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어떤 몸의 증언, 그 '뜨거움'을 느끼다 (2)
  2. 2010.03.31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 발에 밟히는 기억, 눈에 밟히는 역사
  3. 2010.03.24 <어떤 건축> - 삶과 건축의 예술적 대화를 듣다 (2)
  4. 2010.03.17 <통장의 고백> - 모르는 게 '독'약이다
  5. 2010.03.15 [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강기원의 「아바타」 (4)
  6. 2010.03.10 <윤미네 집> - 한 장의 사진이 담고 오는 한 움큼의 그리움 (4)
  7. 2010.03.09 [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최연식의 「지하철역에서」 (2)
  8. 2010.03.03 <내 삶에 빛이 되어준 아름다운 만남>-사막에서 길 잃은 이들을 위한 안내서 (2)
  9. 2010.02.25 [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장석주의 「얼룩과 무늬」 (2)
  10. 2010.02.24 <눈사람이 엄마를 데려 갔어요> - 행복한 상상을 되찾아줄 아이의 시선 (2)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어떤 몸의 증언, 그 '뜨거움'을 느끼다

김원영,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푸른숲, 2010

그의 이야기는 미물(微物), 즉 미세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부터 시작한다. 미세하기 때문에 타인들의 시선 밖으로 밀려나고,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 존재, 그 극단에 장애인 김원영의 지나온 날이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는 시작되었다. 혹은 또 다른 누군가는 여전히 그가 있던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어느 때고 다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사회적 계급이 없어진 시대에 아름답고 건강한 몸은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렇지 못한 몸의 극단에 장애인이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무수히 많은 몸들, 유약한 몸, 병에 걸린 몸, 추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몸, 가난에 찌든 몸들이 존재하며, 그 사이에서 장애인과 자신을 철저하게 구분하던 비장애인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미물로 전락할 수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존재의식을 ‘미물’로부터 시작하는 김원영의 이야기는 그의 몸에 덧씌워진 세상의 그릇된 시선에 대한 기록인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그 시선에 의해 사로잡혀 있었던 저자 자신의 성장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그 스스로 세상의 차별적 시선을 내재화하여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고 그런 것에 다른 외피를 입혀, 즉 장애를 열등한 것으로, 부정한 것으로, ‘서울대’라는 세속적 타이틀에 의해 소거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던 자신을 버리고 비로소 장애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들은 스스로를 고고한 ‘정상인’의 세계, 그 상상된 테두리 속에 안전하게 모셔두고,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테두리 밖 비정상의 세계에 있다고 여기는 장애인을 바라보기 일쑤이다. 그리고는 이로 인해 그들이 느끼는 모욕감과 좌절감은 모르쇠로 일관한 채, 은근한 자기 우월성의 쾌락을 느끼기에 급급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타인의 존재, 특히 비정상적인 인간을 ‘구경’하는 것으로 위안을 얻기 희망하는 우리들 대다수에게 장애인의 삶의 어려움은 그들의 몸이 지니고 태어난 어쩔 수 없는 불운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겪는 이동(지하철, 버스 등의 대중교통)의 불편은 버스가 잠시 정차 하는 동안 느끼는 우리의 지루함과 조급함에 비견되지 못하며, 교육의 불평등은 우리 아이들의 편안한 교육 환경을 지키는 것만큼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는 ‘비정상의 거주민’들을 하나의 세계에 몰아넣고 그들이 일상 세계를 침범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에 강한 연민과 (부당한 차별에 대한) 분노를 느끼는” 모순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생물학적인 ‘손상(impairment)'을 입었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사회로부터 배제되는 ’장애(disability)'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장애란 손상과 다른 것으로 생물학적인 몸의 손상에 사회적인 차별이 더해져 생기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저 생물학적 손상을 입은 그들의 몸에 장애라는 낙인을 찍어 세상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미물’로 취급하는 태도는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한 스스로의 몰이해를 드러내는 것이다. 게다가 비정상의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따로 확고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정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은 언제든지 누군가를 비정상의 세계로 추락시킬 수 있다.

이는 ‘몸짱’이라는 신조어가 현실의 많은 몸들을 ‘루저’라는 이름으로 낙인찍어 콤플렉스로 만들어 놓거나, 효용과 경쟁을 최우선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가 노화한 몸들을 노동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오늘의 현실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 김원영이 강조하는 것처럼,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가 전하는 메시지는 비단 장애인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애인 인권 운동은 사실 특정한 사회 집단의 인권에 대한 운동이라기보다는 취약한 몸, 불균형한 몸, 병약한 몸, 노화한 몸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일반적인 몸에 대한 새로운 권리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그 몸들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뜨거움’을 되찾아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저 보호와 시혜라는 틀 안에서 존재를 드러내며 욕망 자체를 아예 갖고 있지 않은 무성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온 장애인들은 “추하고 손상된 외모를 가진 인간은 착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개인적인 욕망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으며, 그러한 욕망은 드러나는 순간 “병신 육갑한다”라는 저 오래된 언명 앞에 철퇴를 맞“아야 했던 현실에 저항하며, 다양한 몸이 평등하게 존중받으며 사랑을 하고 직업을 갖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해 나가는 선봉자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김원영은 “‘야한’ 장애인, ‘야한’ 가난뱅이, ‘야한’ 추남/추녀가 되자”고 말하며 그 몸들의 뜨거움을 증언하는 것이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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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 발에 밟히는 기억, 눈에 밟히는 역사

 유재현,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 그린비, 2007

이제 우리나라도 좀 살만 해진 걸까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기아에 허덕이며 비쩍 말라가는 아이들, 먹고 살기 힘들어 타국으로 돈 벌러 가야 했던 이들이 더 이상 ‘우리’라는 대명사로 불리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죠. 그들은 이제 말 그대로 ‘우리’가 아닌, 우리와 분리된 ‘그들’ 혹은 ‘타자’일 뿐입니다. 이전까지 유례가 없었던 경제 발전의 속도를 따라 오늘에 이른 우리는, 현재 파리 한 마리 쫓을 힘없는 먼 나라의 아이들에게 어렵지 않게 하루치의 식량을 전해줄 수 있게 되었으며, 어쩔 수 없이 고국에 가족을 두고 돈벌이를 찾아온 수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일자리와 월급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좀 살만 해진 우리는 아직 살만 하지 않은 그들과 다른 처지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종종 우리는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거나, 괄시하고 무시하는 태도로 그들을 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휴가철마다 여행 가방을 챙겨 들고 ‘관광’하러 가는 동남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은, 그들에게 변변한 돈벌이 하나 마련해주지 못했던 서글픈 고국의 땅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들에게는 힘겨운 삶의 공간이었던 그곳이 우리에게는 고단한 삶을 쉬어가는 쉼터, 즐길 수 있는 휴양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관광객인 우리에게 그들이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고국의 현실, 그 아픈 역사의 기억은 우리와 무관한 것이기 때문에 보고 즐길 만한 것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시아의 기억을 걷다>의 저자 유재현이 지적하듯, “유럽 제국주의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였던 동아시아가, 미국의 패권 아래 전쟁의 포연과 독재와 수탈의 시련으로 달음칠치던 그 시대가 의미하는 것은 태생의 동일함”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린 모두 한 애비와 에미의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통해 2차대전 종전 후의 아시아의 지형을 그리려는 그의 노력은 이와 같은 태생의 동일함을 망각하고, 새삼스레 쇠퇴해가고 있는 제국주의의 정신을 헛되이 모방하려 드는 오늘의 '우리'를 향한 날선 비판에 다름 아닙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시아'라는 동일한 테두리로 묶여 있는 우리가 그 내부의 아시아인들을 ‘그들’로 호명하며 타자화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오만한 태도는 아시아의 역사와 기억에 대한 무지와 편견, 무관심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정신적으로 제3세계의 일원이 된 적이 없”었던 남한은 급속한 경제발전으로 OECD의 일원이 되어, 오늘날 “그 머리와 심장을 천박하기 짝이 없는 하위제국주의의 울타리 안에 두고 있”는가 하면, 민족주의가 숨기고 있는 인종주의에 휩싸여 “전(全) 아시아인을 남한족의 하위에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오만한 관광객의 발에 밟혀온 '아시아의 기억'을 자신의 진중한 발걸음에 맞춰 생생하게 되살려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차마 잊어선 안 될 과거의 흔적, 그 눈에 밟히는 역사가 현재의 시점 안으로 들어와 오늘의 우리에게 다시금 말을 걸어옵니다. 그러므로 이전까지 우리와 무관하게 느껴졌던 아시아의 역사는 이제 우리나라, 이땅에 새겨진 아픈 기억과 닮은꼴을 하고 찾아옵니다. 

다시 말해, 태국의 섹스 산업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위안부나 한국전쟁 당시의 기지촌을 떠올리게 하고, 반복되는 쿠데타는 60, 70년대 우리나라 군사정권의 야욕을, 서구의 반공주의와 베트남의 국제적 프로파간다에 의해 왜곡된 '킬링필드'에서는 거대 권력에 의해 기입된 반공주의 사상을, 대만의 2・28학살를 통해서는 6・25 학살과 광주항쟁을, 베트남의 전쟁과 분단은 한국 전쟁과 분단으로 겹쳐져 보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제껏 외면해 왔던 아시아의 슬픔과 상처를 ‘우리'라는 테두리 안으로 다시 들여와 그릇된 오늘을 비추는 반성적 거울로 삼을 수 있게 됩니다. 

"더 나은 세계와 미래를 건설할 힘은 아시아에 있다. 남한의 미래는 신자유주의와 세계화가 주도하는 자본과 시장의 아시아가 아니라, 핍박받는 아시아 민중의 신음 소리에 담겨 있을 것이다. 이게 남한이 아시아에, 아시아를 통해 세계를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유이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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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건축> - 삶과 건축의 예술적 대화를 듣다

최준석, <어떤 건축>, 바다출판사, 2010

“건축물은 그 스스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이야기를 말하는 다른 방식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는 사람들이 예술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공간과 시간을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지에 의해 캐릭터화 된다.”  -영화감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인터뷰 중

‘꽤 인간적인 그래서 예술적인 건축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어떤 건축>을 손에 든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영화와 건축 사이의 유사성을 이야기하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말이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영화 안에서 사람 대신 건축물을 이미지의 중심에 놓곤 하는데, 그의 인터뷰 내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에게 건축물은 그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인 셈이며, 따라서 그의 영화를 보는 데 있어서 이전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익숙한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방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그의 영화가 담고 있는 수많은 삶의 세부들은 결국 놓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최준석은 기존에 우리가 습관적으로 건축물을 대했던 태도, 즉 자본주의 부의 수단인 부동산이나 일상과 멀리 떨어진 고매한 예술품 정도로 건축물을 봐왔던 시각에서 벗어나, 그것이 담고 있었으나 우리가 눈치 채지 못했던 '무표정한 건축'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일상적 경험과 삶의 기억으로 건축물에 말을 걸어, 사실은 그 둘 사이를 잇고 있는 징검다리가 바로 예술의 감수성이였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가 말을 걸었고 그에게 대답한 건축물들은, 자신만의 개성으로 만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처럼, 우리와 자리하고 있는 삶, 그곳으로 초대되어 일상의 일부를 공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삶과 건축 모두에서 우리가 쉽게 보지 못했던 예술의 감성이, 일상의 표면으로 점점 더 스며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책의 부제가 그런 것처럼, 그가 들려주는 건축 이야기는 꽤 인간적이며 그래서 예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이 더 흥미로운 점은 저자가 ‘어떤 건축’을 말하기 위해 그 건축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감상의 대상으로 불리기엔 왠지 어렵기만 했던 건축을 영화나 미술 작품처럼 편하게 보고 즐길 대상으로 만드는 일”을 점점 의미있게 여기게 됐다는 그가 자신의 의도대로 유연하게 독자를 이끌어가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저자의 삶에서 출발한 대화가, 그로부터 떠오른 예술작품의 감상을 경유하여, 그 자신의 무한한 상상을 담고 ‘어떤 건축’으로 당도했을 때, 결국 우리는 삶과 건축의 예술적 대화로 자연스럽게 인도되었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저자를 따라 그 길을 걸어오는 우리에게 건축과 예술의 거부감이라는 장애가 막아서는 일은 쉬이 일어나지 않으며, 누구나 자신 앞에 놓여 있는 삶을 살아나가듯 <어떤 건축>이 친절하게 마련해 놓은 길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가 앞에서 했던 말의 의미로 돌아와, 이제는 내 삶 안으로 들어온 건축과 그의 이야기가 나 자신에게도 들려올지 모른다는 상상을 해보게 된다.  

“대단한 예술성을 강조한 건축이라도 사람들의 절절한 현실을 담아내면서 세월을 버텨야 한다. 그렇게 버티고 버티면서 수많은 삶들의 그릇이 되어야 했던 게 건축의 의무였다.”
(5-6쪽)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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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의 고백> - 모르는 게 '독'약이다

 

심영철, <통장의 고백: 당신만 모르는 금융회사의 은밀한 진실>, 더난출판사, 2010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이 생긴 건 내가 직접 돈을 벌기 훨씬 전부터이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 나에게 통장이란 안전하게 돈을 보관해 두는 은행의 개인 금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내 통장은 쉽게 열리고 그만큼 빨리 텅 비어 버리는 헤픈 지갑 대신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요사이 TV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재테크’나 ‘자산관리’, ‘투자’ 같은 말들은 나와 무관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자산관리는 관리할 자산이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재테크는 먹고 사는 데 쓰고 남을 만큼 많이 버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므로, 수많은 광고를 장식하고 있는 금융상품들이 보장해준다는 소비자의 이익은 간단히 말해, 내 알 바 아니었다. 그러므로 얼마 되지 않는 내 돈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일은 케이블 광고에서 쉼 없이 쏟아내는 대부업체나 사금융의 ‘쉽고 빠른’ 대출의 유혹과 시사 프로그램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신용카드의 잠재된 위험을 피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영철의 <통장의 고백>은 ‘당신만 모르는 금융회사의 은밀한 진실’을 여실히 보여주며, 그간 나의 무관심과 무지를 정면으로 공격해 왔다.

“대다수 사람들이 재테크에 있어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월급이 많아야, 많이 저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 오히려 수입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 적게 버는 대로 더 아끼고 저축해서 종자돈을 빨리 모으고, 그 돈을 잘 굴려서 자산을 불려 나가는 경우가 많다.”
(244쪽)

그러니까 그동안의 나는 재테크에 있어서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 중의 하나였으며, 재테크 최대의 ’공공의 적‘인 그 은행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별 볼 일 없는' 주거래 고객 혜택을 소박한 믿음의 근거로 삼고, '만능청약통장'의 수식어 '만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순진한 고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저자는 '너무나 많은 금융회사와 금융상품 등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현재의 소비자들, 특히 재테크는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해 왔던 나와 같은 이들에게 많지 않은 수입으로 내일을 대비할 수 있는 든든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게다가 각 장의 처음을 장식하고 있는 '믿습니까'라는  단도직입적인 질문은 그 동안 우리들이 가져왔던 금융회사들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뒤흔들어, 소비자로서 가져야 하는 객관적인 판단 기준과 시각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도록 한다. 또한 그의 입을 통해  풀려 나오기 시작하는 은행, 보험, 증권 그리고 펀드에 얽혀 있는 은밀한 진실들은 '아는 것이 곧 힘이다'라는 익숙한 말의 가치를 실제의 경제 생활 테두리 안으로 들여와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통장의 고백>이 일러주는 유용하고도 중요한 정보 중 하나는  '금융도 회사의 이익을 위한 상품'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이 말은 각종 매체의 광고(상업적 필름을 의미하는 CF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를 통해 금융 상품을 접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전혀 새로울 게 없으며, 오히려 새삼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금융 상품이 다른 소비재(식료품, 의류 등)들에 비해, 보다 전문적인 지식과 정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다른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금융 상품의 생산과 판매를 담당하는 회사들 또한 원천적으로 소비자들의 이익보다 그들의 이익을 우선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금융상품을 소비하는 일반대중들은 그들의 전문성만을 믿고, 그 이면에 가려져 있는 상술을 예민하게 감지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 지식을 쌓는 데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고 접하기 쉬운 매체인 책 조차 내용적으로 문제가 많으며, 이는 금융 및 재테크 관련 책들의 저자들 상당수 역시 현직 금융회사 소속의 금융상품 판매자이기도 하고, 책을 출간하는 것 자체를 그들의 경력 쌓기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 (7쪽)이라고 가르쳐주는 저자의 말을 귀담아 듣고, "이들 금융회사의 이해관계와 상품 판매를 위한 선정적인 광고와 마케팅 전략에 속아 더 이상 손해를 보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8쪽) 

소비자에겐 모르는 게 '약'이 아니라 '독약'이므로.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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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강기원의 「아바타」

강기원,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민음사, 2010  

「아바타」

자, 이제 골라 보시지
누구를 나로 택할 건지
이곳은 공간 없는 공간
육체 없는 육체
일단 밑그림을, 색깔도 좀
아, 그림자를 그려야지
잊지 말아야 할 데포르메
아무런 징후 없이
세상에 없는 나를 만드는 일
마초? 뱀파이어? 몬스터 고양이? 4차원 소녀?
무엇이든 설정은 ‘기쁨’
해독할 수 없는 눈빛 대신
방실방실한 웃음
내 어두운 바닥 감쪽같이 감춰 줄
오렌지색 아우라
낯선 이목구비 그리는 동안
스멀스멀 빠져나가는
담즙질 영혼
아이콘의 화색이 화사해지는 동안
창백해지는 내 낯빛
너는 그렇게 강림하고
나는 나를 잊고, 잃고
익명의 네가 살아 숨 쉬는
여긴 가상일까 현실일까
불현듯
실수인지 고의인지
눌러 버린 ‘삭제’ 버튼
순식간에 사라진 건
너일까 나일까

-40, 41쪽-

우울과 고독으로 자신을 치장하는 건 좋지 않아. 그렇지. 컴컴한 골목길, 버려진 걸 원망하며 눈만 번뜩이고 있는 고양이 같은 인상이어서야 곤란한단 거야. 마치 세상의 가장 슬픈 얼굴은 자신만 알고 있다는 듯이 오만하게 고독을 발설하진 말라는 거지. ‘우울’이라는 단어의 동어반복으로 다른 이들을 질리게 해서야 되겠어. 어느 누구의 인생도 녹록치만은 않다는 걸 알아야지. 어린 양은 어린 이들이 하는 거고, 너는 이제 벌써 어른인 양을 해야 할 때가 됐다는 거야. 거울을 봐. 지나온 세월만큼 네 얼굴에 남겨진 흔적들을 찾을 수 있을 테니. 웃어야 할 때 더 크게 웃고, 울어야 할 때도 종종 웃어야 했던 처세의 습관이 이미 너의 얼굴 표면에 천연덕스럽게 새겨져 있을 테니까. 잊지마. “해독할 수 없는 눈빛 대신 방실방실한 웃음”을… ….

가만. 지금 난 어디에 있는 거지? 

이곳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중력에 반해 버티고 서 있는 현실의 공간. 경계와 구획으로 나누어진 장소의 일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구 ○○동 ○○번지.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육체가 보이는 이곳은… …. 오호라. 현실이구나. 육체의 부피만큼만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내가, 실명(實名)이라는 낙인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의도적인 설정 혹은 무의식적인 행동, 하물며 실수 마저도 그게 무엇이든 내 호적에 새겨진 이름으로 고스란히 남겨지는, 내가 나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바로 그 곳이구나. 그래, 그렇지. “방실방실한 웃음” 그게 여기에서 내가 가져야 하는 가장 바람직한 얼굴이었지. 고의로라도 ‘삭제’ 버튼을 누를 수 없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이곳이 바로 현실인 거지. ‘삭제’의 시늉만으로도 ‘위선자’나 ‘거짓말쟁이’라는 비난이 쏟아져 내리는 그 곳이 내가 사는 세상이었지.

그럼. 내가 어제 밤 만들었던 아바타는 뭐지?
 

“내 어두운 바닥 감쪽같이 감춰 줄 오렌지색 아우라” 그건 현실이었나? 아바타가 더 이상 아바타일 수 없는 그곳은 이제 현실이 된 건가? 그럼 내 현실은 어디로 간 거지? 방실방실 웃는 나를 그리는 동안 “스멀스멀 빠져 나간” 고독한 내 영혼, 그려지지 않은 진심, 어느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어려웠던 울고 있는 그 얼굴, 진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그건 어디에 있는 거야?

분명. 모든 게 거짓말이거나 거짓말이 아닌 거야.
거참.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군.

-현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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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네 집> - 한 장의 사진이 담고 오는 한 움큼의 그리움

전몽각, <윤미네 집>, 포토넷, 2010  

그 찰나, 서로 다른 ‘순간’들의 마주침

눈도 채 뜨지 못한 갓난아이를 보았습니다. 딱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지금’과 나의 ‘지금’이 만나는, 그 찰나 말입니다. 그때, 단 한 장의 사진 속, 그 사각의 틀 안에서, 오래도록 꼼짝 않고 있었을 그 아이의 시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그리하여 <윤미네 집>을 펼쳐 책장을 넘기는 내 손이, 그 손을 따라 옮겨가는 내 눈동자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과거의 시간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 전몽각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보여주기 위해 태어난 사진의 운명이 그제야 보고 있는 나로 인해 완성될 수 있었던, 그 찰나 말입니다. 그때,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을 품고 있던 ‘보는 이’의 공백은 채워지고, 언제나 ‘지금’이라는 이름만이 허락된 ‘현재’가 그녀와 나 사이에서 차마 언어화할 수 없는 감정을 만들어냅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언어의 무능력을 절감하며, <윤미네 집>이 붙들어 놓은 시간의 흔적들 안에서 그저 울고 웃을 따름입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가장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시간 속에서 우리네 모두의 삶을 머금은 순간의 살결들이 드러나니까요. 놀라운 일이기도 합니다. 타인의 시간이 이리도 가깝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윤미네 집>은 “기념을 위한 사진이 아니라 매일 매일이 다른 아이들의 모습과 가족의 생활을 자연스럽게 담고 있기 때문에 보는 이(나)의 가슴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나 봅니다.(161쪽) 

지나간, 지나가는 모든 ‘순간’들에 대한 그리움

몇 장을 더 넘겨보았습니다. 그 사이, 그러니까 앞장과 뒷장이 서로 자리를 바꾸는 짧은 시간 동안, 아이는 그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윤미네 집>의 한 장이 사진첩을 넘기는 내 찰나의 시간에다, 그들의 몇 개월 혹은 몇 년의 세월을 나란히 맞대어 놓습니다. 그 세월 속에서 고(故) 전몽각 선생의 첫아이 윤미는 태어나고, 어느새 자라 학교를 다니며,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결국 윤미네 집을 떠나갑니다. 그렇게 갓난아이 윤미가 엄마가 되었을 때, 윤미의 엄마 이문강 여사는 가족의 역사를 주름으로 새겨 놓은 할머니가 되어 있습니다. <윤미네 집>의 첫 장과 마지막 장 사이사이에 켜켜이 쌓인 가족의 사랑이, 웃고 있는 할머니의 눈가에 촘촘히 배어 삶의 표면을 드러내줍니다.  


ⓒ 전몽각

그 삶을 따라가다 보면, 안고 업고 뒹굴고 비비대는 피붙이의 촉각이 사진에 점점이 박혀 있는 빛의 흔적, 그 2차원의 세계를 넘어 본래의 감각을 회복한 양 나의 과거가 되고 오늘의 그리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미처 기억(기록)되지 못한 순간, 그 보이지 않는 시간의 흔적들마저, 나의 시간을 빌어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그리고는 ‘오늘’ 끝끝내 그것을 볼 수 없음에 사무치는 그리움은 더해만 갑니다. 이미 지나간, 지금도 지나가고 있을 모든 순간들이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아름답고 또 애틋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됩니다.

“기억과 망각 사이에 사진이 있다. 잊혀져 가는 것을 떠올리게 하고 다시 숨쉬게 하는 사진. 한 장의 사진이 담고 있는 것은 과거의 한 순간이지만 그것이 되살리는 것은 그 순간을 감싸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감정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아주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 사랑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펼쳐질 때 그것은 오늘, 그리움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되돌아가지 못해 더 아름답게 추억될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들이, 사진 속에서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159쪽)

<윤미네 집> 앞에 선 나는 ‘보는 이’로만 온전히 남아 있지 못하고, 어린 날의 윤미가 되었다가 어린 날의 내가 되기도 하고, 내 부모의 딸이 되었다가, 누군가의 부모 혹은 나이 지긋한 여인이 미리 돼 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다시 ‘보는 이’, 그 최초의 자리로 돌아와, 윤미네 집의 가장이자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였던 고(故) 전몽각 선생, '내가 보고 있는 사진의 이편에서 몇 십 년 전 내 자리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선생의 애정 어린 시선 또한 가져 봅니다. 그리하여 결국 유유히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하루 또 하루를 보내며 아무렇지 않게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몇몇의 기억으로만 살고 있는 오늘의 나로 되돌아옵니다. 아련하고 슬픈 그리움에 취한 내가 ‘지금’, ‘여기’에 돌아와 있습니다. 


제공 PHOTONET

“한 장의 사진, 그 사진 속의 아름다운 순간을 추억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렌즈 너머에 있는 사진가를 생각하게 하는 사진. 그런 사진이야 말로, 사람의 가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사진일 것이다.” (166쪽)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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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최연식의 「지하철역에서」

최연식, <허름한 보폭 사이의 흔적>, 화남, 2009  

「지하철역에서」

먼저 등 돌려 갈 수 없음은
그의 뒷모습을 남기고 싶어서고
내 미련을 기억시키고 싶어서다

멀어지는 그의 등이
손 흔듦보다 애잔하기에
그림자 묻힐 때까지 시선을 고정하고
망막에 남기고 간 눈인사를 애무한다

동행할 수 없는 길을 돌아 서서
살아온 날처럼 쌓여 있는 계단을 밟다 보면
부딪쳤던 눈망울이 보폭마다 깜빡이고
저만큼 멀어지며 인파 사이로 보였던 손 인사가
눈물보다 짠하게 계단을 흔든다

안녕이라고 소리칠 때 그 메아리가
지하를 흔들며 방금 떠난 소음을 따라
고요 속으로 잠든다

-51쪽-

안녕. 지금 나를 떠나는 그대여, 앞으로도 내내 안녕하시길.
과연 그럴까? 나를 떠나는 그대가 나 없이도 내내 안녕하시길 기원하는가?

나는 아니다. “내 미련을 (먼저 등 돌려 가는 그대에게) 기억시키고 싶”은 나다.
그대의 “뒷모습을 남기고 싶어”, 내 미련을 기억시키고 싶”어 “먼저 등 돌려 갈 수 없”는 나.
그런 내가 같이 있을 때만 그대가 안녕. 하길 바라는 나다. 

그런 나는, 
안녕. 인사한 후, 돌아오는 내내 오늘의 헤어짐을 아쉬워 하며 지나간 시간을 되새김하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게. 문자를 보낸 후,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성급하게 연락하고 싶어지며
끊을게. 말한 후, “근데 있잖아”라며 천연덕스럽게 예정에 없던 대화를 이어가는가 하면
내가 ‘안녕.’ 하는 것의 아쉬움과 그대가 ‘안녕’ 하는 것의 서운함 모두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역시 그 유명한 노홍철의 “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먼저 안녕.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데,
그대가 ‘그런 나’가 되어 그대도 ‘이런 나’와 같아지길 바라기 때문이다.
물론 돌아선 그대로 집까지 가지 못하고 결국 다시 돌아서서 여느 날과 똑같이 멀어지는 그대의 등을 바라보게 되지만. 

그래서 나는,
떠나고 끊는 행위의 매정함을 그대에게 떠넘겨, 나에게 남겨진 미련과 아쉬움마저,
지하철 소음에 뭍혀가는 그대의 목소리로, 인파 사이에서 흔들리다 사라지는 그대의 손으로, 저만치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는 그대의 등으로, 끊어내주기를 바라곤 한다. 그렇게 스스로 매정해지기보다는 처연해지길 자처하곤 한다.

그러니까 나는,
습관적으로 자기 연민에 빠지길 즐기는 지도 모르는데,
진짜 헤어짐의 순간에는 그러지 말아야지 다짐하곤 한다.
그리고 되뇌인다. 'You say goodbye and I say hello'

그러므로 진짜 헤어짐의 순간, 그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You say goodbye and I say hello  
 

「Hello Goodbye」

The Beatles

You say yes, I say no
You say stop and I say go, go, go
Oh, no
You say goodbye and I say hello
Hello, hello
I don't know why you say goodbye
I say hello
Hello, hello
I don't know why you say goodbye
I say hello 

I say high, you say low
You say why, and I say I don't know
Oh, no
You say goodbye and I say hello
Hello, hello
I don't know why you say goodbye
I say hello
Hello, hello
I don't know why you say goodbye
I say hello 

Why, why, why, why, why, why
Do you say good bye
Goodbye, bye, bye, bye, bye
Oh, no 

You say goodbye and I say hello
Hello, hello
I don't know why you say goodbye
I say hello
Hello, hello
I don't know why you say goodbye
I say hello
hello, hello
I don't know why you say goodbye I say hello
hello 

Hela, heba helloa
 Hela, heba helloa 

 지금 주문처럼 외워 두자!!! ㅇ(^^ㅇ)(ㅇ^^)ㅇ
-현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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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 빛이 되어준 아름다운 만남>-사막에서 길 잃은 이들을 위한 안내서


최복현, <내 삶에 빛이 되어준 아름다운 만남>, 이른아침, 2010 

최근 설 연휴 기간을 포함해 닷새 동안 PC방에서 인터넷 게임만 하던 30대 남자가 돌연사 하는가 하면 게임에 중독된 20대 청년이 친모를 살해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여졌습니다. 이로 인해 ‘인터넷 게임 중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됐는데요. 문제는 인터넷 게임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 사실상 실제 삶의 영역인 현실을 무력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현실에서의 소외’와 ‘인터넷 중독’이라는 문제는 단순한 선후의 관계를 넘어 악순환적인 인과의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 안에서 현실과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이는 다시 현실적 삶으로부터의 유리(遊離)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PC방이라는 현실적 공간 안에서 함께 게임을 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실제로 의미 있는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아닌 모니터 상의 가상세계일 뿐이며, 그렇게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며 외딴섬처럼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살다

저자 최복현은 <내 삶에 빛이 되어준 아름다운 만남>을 시작하면서 “사막은 멀리 있지 않다. 내가 살아 숨 쉬는 지금 이 순간,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이곳, 바로 지금 여기가 사막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PC방이라는 현실적 공간 안에서 외딴섬처럼 홀로 존재하는 이들 또한 소통이 부재한 삭막한 현대사회, 즉 사막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갈수록 개인화되어 가는 현대인의 삶은 타인과의 소통을 점점 더 잃어가게 하고 있을 뿐 입니다. 과거 공동체 중심의 사회에서는 삶의 기반 자체가 타인과의 유대를 통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이웃과의 왕래가 자연스러운 동시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휴일 내내 집에만 있는다 해도, 누구 하나 초인종을 누르며 나를 불러주는 이가 없습니다. 그렇게 이웃해 있는 이들이 서로에게 없는 존재가 되어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집이 아닌 사막으로 만듭니다. 자신 외의 생명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곳에서 어떤 이는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은둔형 외톨이), 또 어떤 이는 쓸쓸하게 죽어갑니다.(독거노인의 죽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다

이처럼 타인과의 소통이 부재한 현실은 현대인의 삶을 메마른 사막과 같이 만듭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오아시스가 필요하듯이 현실적인 삶, 그 생명의 시간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타인과의 소통’ 그리고 ‘사랑’이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PC방에서 죽어간 30대의 남자가 인터넷 게임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비단 사이버공간에서의 승리와 성취감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현실에서 잃어버린 혹은 그 안에서 채워지지 않은 삶의 의미, 그 오아시스를 찾아 가상공간으로 들어가 버린 것은 아닐까요?

생텍쥐베리의 <어린 왕자>가 그랬듯,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과정을 통해 타인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삶을 이어갈 생명력을 얻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결국에는 ‘사랑’이라는 오아시스를 찾게 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복현의 <내 삶에 빛이 되어준 아름다운 만남>은 <어린 왕자>에서 <성채>로 이어지는 삶에 대한 생텍쥐베리의 애정 어린 조언을 따라가며,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현명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저자는 생텍쥐베리의 마지막인 동시에 미완성 작품인 <성채>를 통해 여러 별을 여행하며 성장한 끝에 결국에는 하나의 왕국을 다스리는 위대한 왕이 된 어린 왕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작품의 행간에 자신의 사색을 덧붙여 사막과도 같은 우리의 삶을 촉촉하게 만들어주고자 합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간절함’으로 ‘진실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 나서며,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 이유’를 강조하여 ‘사랑 없는 마음은 황량한 사막’과 같음을 다시 한 번 확인케 합니다.

“무엇이든 내가 소중히 여기는 순간 그것은 내게 가치 있는 것이 된다. […] 무엇인가를 소중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땀과 노력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무언가 비어 있다. 그 비어 있는 곳을 채우는 게 나의 땀과 노력이다. 그렇게 빈 곳이 채워질 때 그것은 내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 우리는 모두 삶의 건축가이자 예술가이며 시인이다. 그 무엇인가가 네게 의미 없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내 노고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며 내 정을 담지 않았기 때문이다." (269-272쪽)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인과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내 삶에 빛이 되어준 아름다운 만남>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식상해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그 사실이 현실에서 지켜지지 않을 때,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위험은 수면 위로 떠올라 누군가의 생명을 앗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책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또한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몇 번이고 물을 마시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행위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요?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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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장석주의 「얼룩과 무늬」

 

장석주, <몽해항로>, 민음사, 2010 

얼룩과 무늬

욕망과 어리석음이 만드는 게
얼룩이라면
꿈과 고요는 무늬를 낳는다.
얼룩이 나를 가리켜
얼룩이라 한다.
성급함과 오류들이
내 얼룩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감히 무늬라고 우기지 못하고
크게 상심한다.
누군들 얼룩이 되고 싶었으랴.

- 29쪽 -

얼마 전 오래된 친구로부터 글이 후지다는 말을 들었다.아, 이런. 그런가. 정말 그런가. 물론 내가 읽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란 만큼 좋은 글을 써냈다고 우기고 싶은 건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그리고 다음 순간, 그 오래된 친구로부터 내가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 이런. 그런가. 정말 그런가. 물론 내가 듣는 순간 겸허하게 비판을 받아들일 만큼 넓은 마음을 가졌다고 우기고 싶은 건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후진 글을 쓰는 나는 순식간에 그 후진 글보다 더 후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후진 걸 인정하지 못하는 것만큼 후진 것도 없으니까. 아, 그때의 나에게, 열린 마음으로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은 말 그대로 ‘생각’일 뿐이었던 거다. 이런. (>_<);;

아, 정리가 필요한 시기다.
 

나의 욕망은 글을 진짜 잘 써서 타인들로 하여금 글을 잘 쓴다는 칭찬도 듣고 싶고, 더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해 타인의 비판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쿨~ 한 태도도 가지고 싶다. 그러나 나의 어리석음은 쥐꼬리만 한 삶의 만족을 위해 “그래도 이정도면,,”이라고 더 나가야 하는 생각을 중지하고 스스로 합리화할 수 있는 타협점을 찾으며, 또 거의 대부분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내 안에만 갇혀 있기 일쑤여서, 내 글이 어떤 지 정확하게 분별할 만한 깜냥이 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래도 이정도면..”이라는 비겁한 자기만족은 ‘나’라는 사람의 본성과 본질을 가리고 제 스스로 제법 괜찮은 사람인 것 마냥 자아도취 하는 나르시스적 괴물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니 “아, 이런. 그런가. 정말 그런가.”라는 회의(懷疑)적인 되물음은 바로 이런 나의 어리석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지나친 성급함으로 “그대로 이정도면,,”이라는 타협을 습관화했으며, 더욱이 이런 습관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를 심화시켜, 그만큼의 오류를 내 안에 품고 있게 했다. 내 얼룩들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얼룩이 나를 가리켜 얼룩이라 한다. 아, 이런. 정말 그렇다. 감히 무늬라고 우기지 못하고 크게 상심한다. 누군들 얼룩이 되고 싶었으랴. 아, 이런.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 것을.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건드려 끝내는 울게 해야 하는 것을. 

아, 변화가 필요한 시기다.
    -현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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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이 엄마를 데려 갔어요> - 행복한 상상을 되찾아줄 아이의 시선


불라 마스토리, <눈사람이 엄마를 데려 갔어요>, 보물상자, 2009 

어린 시절 우리에게는 지구가 둥글다는 과학적 사실과 함께 세계 평화 이념을 건전하게 가르쳐주던 동요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하하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있노라면 동심은, 열려 있는 세계를 향해 진취적인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하고, 나와 다른 세계 아이들은 소꿉친구와 같은 친근함으로 다가와 말을 거는 상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어른이 된 지금, 이 노래는 더 이상 우리에게 행복한 상상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계화의 긍정적인 비전 이면에 놓여있는 ‘하하하하’ 웃을 수 없는 현실의 단면을 보았기 때문이죠.

각국의 경계를 무화시키는 세계화의 흐름은 ‘앞으로 앞으로 자꾸 걸어 나가지 않아도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현재 인류가 누리고 있는 교통과 통신, 그리고 디지털 기술의 발달은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먼 곳의 사람들까지 어렵지 않게 한 공간으로 모이도록 해주니까요. 그러니 지금 아이들은 둥근 지구를 앞으로 걸어갈 일 없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아이들 사이에서 ‘하하하하’ 웃는 소리 대신, “너,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매몰찬 소리가 들려오는 게 또한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렇게 자본의 흐름과 생계를 쫓아 이 나라에 찾아온 이주 노동자, 이주 결혼 (대부분 여성) 이민자, 그의 자녀(코시안)들 앞에서 「앞으로」라는 동요의 희망적 바람은 무색해집니다.

<눈사람이 엄마를 데려 갔어요>라는 아동도서는 그 사이 우리가 잊어버렸던 「앞으로」의 행복한 상상을 되돌려줍니다. 그리스인 아빠와 영국인 엄마를 반씩 물려받아 태어난 주인공 ‘반반이’는 그리스어로는 ‘이야니스’, 영어로는 ‘존’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언제든지 마주칠 수 있는 우리나라의 반반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게다가 반반이에게 하나의 국가정체성만을 강요하며 서로 싸우는 엄마와 아빠는 현실에서 어른들이 벌이는 갈등과 반목을 여실히 드러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마의 손에 이끌려 영어 유치원에 가게 된 반반이의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른 차이를 차별로 이어갔던 그릇된 태도를 되돌아보고, 보이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아이의 시각을 빌어 잃어버렸던 동심의 세계를 다시 보게 됩니다.

모든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반반이 또한 유치원에 가면서 처음 엄마와 떨어지는 슬픔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엄마를 기다리며 울고 있던 반반이에게는 새로운 따뜻함이 전해져옵니다. 바로 ‘친구’들입니다. 누르스름한 피부에 눈은 가늘고 새까만, 늘 큼직한 수건 없이는 아무 데도 가지 않는 ‘수’, 얼굴은 새하얗고 머리는 샛노란 아이 ‘마틴’, 자기를 ‘가슴으로 낳은 아이’라고 소개하며 ‘엄마가 고른 아이’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내는 ‘피터’, 처음에는 매일 울다 잠만 잤지만 반반이의 ‘하이Hi’라는 인사에 웃기 시작한 짙은 커피색 피부의 여자아이 ‘네즈린’ 등은 그렇게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만나,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반반이의 길동무가 돼줍니다. 특히, 유치원에 처음 온 날에도 신기하게 울지 않았던 미스테리 숙녀 엘레니는 “나는 엄마도 둘, 아빠도 둘이야.”라며 엄마 아빠가 많은 걸 자랑해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이처럼 <눈사람이 엄마를 데려 갔어요>는 전지구적 세계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가 정해 놓은 경계에 갇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어른들의 세상, 그 차별적인 시선의 세계를 전복시켜, 애초에 존재하던 서로의 차이 그대로를 재치 있는 시각으로 그려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다수의 삶의 방식만이 정상이라거나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혼혈아, 입양아, 황인종, 흑인종, 백인종과 같은 말들도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반반씩 나누어 가진 반반이일 뿐이며, 엄마와 아빠는 하나씩일 수도, 둘씩일 수도, 혹은 없을 수도 있는 겁니다.

반반이가 유치원에 적응하고, 친구들과 만들어 놓았던 눈사람이 사라질 무렵, 엄마는 반반이의 곁을 떠납니다. 그래서 처음 유치원에 간 날과 달리 이제는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도 엄마가 오지 않을 거라는 슬픈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 반반이는 말합니다. 엄마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엄마, 엄마가 원한다면 아빠 국기를 버리고 엄마 것만 가지고 있을게.”
“존, 사랑하는 우리 아가! 두 사람 마음이 안 맞으면 헤어지는 게 오히려 나을 수 있어.”
“그렇지만 엄마하고 나는 마음이 맞잖아. 그런데 왜 헤어져야 해? 나도 엄마 따라 갈래.”
“여름 방학에 영국으로 와. 그때는 엄마 차례가 돼서 우리 존이랑 함께 지낼 수 있어.”

"들었지? 우리 아이들은 반반이인 것도 모자라서 어른들이 맘대로 우리를 나누어 갖는다. 우리를 반으로 자르는 거랑 같다."
(44-45쪽)

그리고는 눈사람이 사라지면서 엄마를 데려갔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아빠가 둘인 엘레니보다 ‘아빠가 눈사람’인 자신이 더 낫다!라는 기발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렇게 이전까지 우리가 결손가정이라고 낙인찍어 왔던 엄마의 부재를, 특별한 자랑거리로 만들 수 있는 아이의 시선이, 엄마 잃은 슬픔과 세상의 모든 차별적 경계를 넘어 '하하하하' 웃는 세계인에 대한 행복한 상상을 되찾아 주는 듯합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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