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01.07 [반달토끼의 책방앗간] 법륜, 《스님의 주례사》
  2. 2013.03.05 [서점에서 만난 사람] 다른 너를 품는 생(生)의 온도 - 《숲의 대화》소설가 정지아
  3. 2009.11.05 <오늘은 세상에 이별하기 좋은 날>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4. 2009.05.20 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2)

[반달토끼의 책방앗간] 법륜, 《스님의 주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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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다른 너를 품는 생(生)의 온도 - 《숲의 대화》소설가 정지아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자료 및 사진 제공 | 은행나무

 

지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 지금입니다. 역사도, 인간도, 나도 또 너도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찾아보면 어딘가엔 분명 있습니다. 말과 행동, 감정, 생각. 그 모든 지금의 근거들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그 세월의 흔적에 꼭 맞는 웃음과 울음을 지니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거 아닌 걸 가질 수 없기도 하고요. 또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런 나를 미루어 너를 생각할 밖에요.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너는 언제나 나한테 그렇습니다. 누구도 공으로 살아온 세월 없으니, 꼭 그만큼은 나를 고집하고 싶어지니까요. 또 그런 내가 먼저 이해받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나는 아직, 나로서만 뜨거운 생(生)인 겁니다. 그런 채로, 이런 나까지 품는 《숲의 대화》를 듣게 된 거고요. 그 대화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죠...

 

《빨치산의 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작가님이 가져가고 있는 것 혹은 바뀐 것이 있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제 관심은 역사와 인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숲의 대화》의 주제 또한 이전 소설집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역사를 바라보는 거리,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이전 소설들이 다소 근거리의 시선이었다면 이번에는 원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할까요. 원거리의 시선에서 좀 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소설 속에 담고 싶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죠.

 

사실 20대 초반에 썼던 《빨치산의 딸》은 제 부모님의 역사였고, 밝혀지지 않은 역사였기에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저도 나이가 들었고, 더 많은 경험을 했고, 그사이 우리 사회도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습니다. 변화를 겪고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죠. 더 넓어져야 한다는 게 제 바람이고 그 시절보다야 조금은 넓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렇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일간지에서 “이데올로기로만 갈라지지 않는 인생의 풍부함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해가 이번에 출간된 소설집 《숲의 대화》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요. 하지만 이 ‘인생의 풍부함에 대한 이해’가 비단 세월만으로 얻어지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그간의 세월 안에 그 이해의 근거가 여럿 있으실 텐데요.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하나만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이해하게 됐다는 표현은 좀 과장이고요.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루하루 살아낸 그 모든 시간들이 이해의 근거를 제공했겠지요. 이를테면 이성적으로 절대 흐트러질 것 같지 않던 아버지가 늙음 앞에서 무너질 때,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친구의 어떤 행동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걸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됐을 때, 아무것도 학습하지 않은 어린 아들에게서 제가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을 때…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행위에는 어떤 근거가 있다는 자연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겠지요. 설령 그게 유전자의 힘일지라도요. 유전자는 핏줄로 타고난 것이지만 그런 성향, 기질을 벗어난다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저 역시 극복하고 싶지만 극복하지 못하는 성향 같은 것들이 있고요. 나를 보듯이 남을 보는, 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은 사실 고대의 성현들이 이미 오래 전에 주창한 보편타당한 진리인 건데, 제가 아둔하여 세월의 교훈 앞에서야 겨우 겸손해진 것이죠.

 

소설집 《숲의 대화》 중에서 가장 아끼는 단편은 무엇이고, 쓰느라 힘들었던 단편은 무엇인가요? 또 작가님이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단편은요?

 

음, 아끼는 단편은 <숲의 대화>,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단편은 <혜화동 로터리>, 크게까지는 아니고 좀 힘들었던 단편은 <절정>입니다. <절정>은 노숙자로 전락하기 직전의 고통을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에 시간이 걸렸는데요. 진실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게 아니라 희망을 놓으면 노숙자로 전락할까봐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그러한 분들의 삶이 아직도 제게는 어렵습니다.

 

가장 아끼는 단편으로 <숲의 대화>를 꼽으셨는데요. <숲의 대화>의 화자는 종의 신분과 가난, 평생 다른 남자(주인집 도련님)만 바라본 여자 등 자신의 삶에 주어진 것들을 죄다 안으로 품으며 그저 묵묵하게 살아온 인물 ‘운학’입니다. 노인이 된 그가 죽은 아내를 그리며 숲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사랑하는 여자와 자신의 아이, 자신의 목숨보다 사상과 이념을 더 중요하게 여긴 ‘도련님’이고요. 이 소설의 화자를 ‘운학’으로 설정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뭣이 그리 답답했소? 내가 되련님맹키 새로운 시상을 맘에 안 품어서 그것이 그리 답답했소? 있는 시상 품기도, 나넌 고달팠소.
   고달픈 시상 품을라 말고 버리면 되는디, 니는 끝내 버리질… 못했니라.
   버리다니 무엇을? 종의 신분 물려준 부모를? 종놈에서 천형처럼 따라붙은 가난을? 그는 무엇 하나 버릴 생각 하지 못하고, 그것 품고 갈 생각, 오롯이 그것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도련님 아이 품은 여자도, 도련님 마음에 품은 여자도, 도련님과 여자의 아이도, 그는 품고 갈 생각, 그것 외엔 하지 않았다.
   버릴 것이 나는… 한나도 없었어라.

 

<숲의 대화> 중에서

 

일단 제가 참고 견디는 사람들을 좋아해서기도 하고요. 오랫동안 말없이 견디는 그 마음을 잘 알지 못했는데, 알고 나니 그들의 입장에서 보는 세상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도련님보다는 운학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더 많을 테고요. 도련님은 혁명가였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혁명이 세상의 모순을 홍수처럼 단번에 뒤집는 것이라면 참고 견디면서 남을 품는 그 마음은 모순까지 품음으로써 인간의 삶을 정화하는, 늘 흐르는 조그만 시냇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고민의 결과가 운학을 화자로 선택하게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숲의 대화>는 ‘운학’에게, <봄날 오후, 과부 셋>은 ‘에이코’에게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자신이 사랑 받길 원하는 대상이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고 그래서 그 이에게 샘을 내고 질투를 느낀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운학’과 ‘에이코’에게 이와 같은 감정을 실어줌으로써 어떤 이야기를 더 이끌어내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운학의 경우와는 조금 다릅니다. 운학이 받아들이고 견디는 자인 반면 에이코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라서 저지르는 인물입니다. <숲의 대화>는 받아들이고 견디는 운학을 통해 이미 죽은 도련님의 삶까지 포용하는 닫힌 구조의 소설이고, <봄날 오후, 과부 셋>은 늙었으나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의 건강한 욕망을 보여주는 열린 구조여서 세 명의 인물 중 가장 역동적인 에이코를 화자로 선택했습니다.

 

 

‘운학’과 ‘도련님’이 그랬듯, 같은 시?공간일지라도 저마다 다른 삶을 일구어가는 게 ‘사람살이’고 그게 또 ‘인생의 풍부함’으로 연결될 텐데요. 《숲의 대화》를 읽으며 그 각각의 사정과 심정을 들여다보는 듯했습니다. 제각기 다른 삶들을 보듬고 있는 작가님의 따뜻한 시선도 느낄 수 있었고요. 그런데 ‘이 또한 삶이다’라고 무수히 많은 다른 삶들을 긍정하고 나서,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로 생각이 옮겨지고 나면 다시 또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가치관과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과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존중하는 태도, 그 사이에서 중심잡기가 어려운 거죠. 《숲의 대화》 속 이야기들을 경유해 이 고민에 대한 작가님의 조언을 들려주신다면요?

 

제대로 알면 누구라도 이해하게 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문제겠지요. 그런데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게 어디 쉽겠어요? 운학도 도련님도 서로에 대한 애정은 있었으나 온전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눈먼 송아지 때문에 혁명에 몸담지 못하는 운학의 마음을 도련님은 몰랐고,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선시했으나 사랑을 잊지 못해 그 여자 보낸 자리에 돌아와 죽은 도련님의 마음 또한 운학이 알지 못했지요. 긴 세월이 지나서야 그 다름의 한계를 어렴풋이 느낄 뿐입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과연 단 하나의 어떤 절대적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것이 가능할까, 이런 문제는 저 역시 고민 중입니다. 다만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향해야 할 여러 가치들은 있을 것이고, 그런 문제라면 다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인간의 다름을 인정한다면 타인에게 반드시 그 보편적 가치를 지키라고 강요하기 전에, 인간이 그러한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모순들부터 해결하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살인자가 처음부터 살인자로 태어난 건 아닐 테니까요. 살인자를 이 사회로부터 추방하기 전에 살인자로 살고 싶지 않았을 한 인간을 살인자로 만든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바라보고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것, 진정으로 다름을 품는 자의 마음일 것 같습니다.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이야깃거리를 잘 건져 올리시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 소재는 어떻게 찾으시는지요?

 

그야말로 일상에서요. 저 역시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친구, 선후배, 가족, 이웃집 아저씨, 동네 이장 아저씨, 이런 분들의 삶을 늘 지켜보며 살고 있습니다. 사실 누구나 그렇겠지만요. 때로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들려오는 뒷좌석의 이야기가 제 마음을 끌 때도 있습니다. 미용실에서 아줌마들의 수다를 듣다가 어떤 말 한마디가 제 소설의 한 문장으로 탄생할 때도 있구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소설의 소재가 됩니다.

 

<봄날 오후, 과부 셋>이나 <혜화동 로터리>처럼 소설 속 인물들이 투닥거리며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상대의 핵심을 찔러 비방하는 듯한데 그 바탕에 은근한 애정과 마음씀이 있다는 것도 느껴지거든요. 함께 보낸 세월과 끈끈한 정이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대화들인데요. 이와 같은 인물들의 대화는 어떻게 구상하시나요?

 

   “흐응, 잘도 그랬겠다. 늙어 꼬부라진 게 청승맞게 피붙이 그리워 울었겠지. 맞지? 삼류 빨치산?”
   “왜 이래? 토벌대 벌벌 떨던 남도부 부대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몸이야.”
   “흥, 그러니 삼류지. 오죽 못났으면 살아남았겠니? 좌나 우나 잘난 놈들은 다 먼저 갔어. 몰라 물어?”
   “그러는 너는 잘나 살아남았니?”
   “누가 뭐래니? 나도 삼류지. 같은 삼류니까 평생 어울려 놀았지.”

 

<혜화동 로터리> 중에서

 

구상이라기보다 제가 ‘촌년’이라서요. 시골이란 서울과 달리 싫으나 좋으나 동네의 모든 일들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맘에 안 든다고 안 볼 수도 없고요. 직장인들처럼 이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지어 먹고 살아야 하는 땅이 거기 있으니까요. 어제까지 멱살잡이를 하다가도 농번기가 되면 서로 품앗이를 해줘야 합니다. 그런 세월이 수십 년 흘러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면 서로의 바닥을 보고서도 그 바닥까지 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게 아닐까요? 대부분의 가족이 그렇듯 말이죠. 시골에서 나고 자란 경험들이 그런 인물들, 인물들 간의 관계, 대화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투리뿐 아니라 농촌의 생활 방식,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인물간의 정서가 소설 안에 많이 녹아 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목욕 가는 날>에서 고향에 살고 있는 엄마와 언니 그리고 도시에 살고 있는 나 사이에 감지되던 경계가 ‘나’가 사투리를 쓰는 순간 허물어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나’가 정말 ‘고향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실제로 현재 작가님께서도 시골에 내려가 살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고향’ 그리고 ‘귀향’, 작가님께는 어떤 의미인가요?

 

(…) 멀리 산다는 핑계로, 직장에 다닌다는 핑계로, 아이들 핑계로,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나날이 어머니로부터 멀어졌다. 어떠한 세월도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아웅다웅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어머니와 언니의 지난 세월이 오늘 고스란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어머니의 세월도.

 

<목욕 가는 날> 중에서

 

앞의 답을 통해 어느 정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유년의 원체험은 저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들에게 있어 세계관, 인간관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30대까지만 해도 농촌에서 보낸 유년의 경험을 전근대적이라 치부했고, 근대성을 획득하고 싶어 안달을 냈습니다. 농사짓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 전근대적인 삶의 방식인 것은 확실합니다만, 인간의 역사란 것이 꼭 직선만은 아니어서 과거의 삶이 미래의 거울이 될 수도, 혹은 새로운 시작의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요즘에야 듭니다.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제게 고향은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파랑새 같은 게 아닐까 싶네요. 별것 아니라 생각하고 더 나은 것을 찾아 세상을 떠돌다 이제야 돌아와 별것 아니라고 치부했던 그 사소한 삶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으니까요.

 

실제 시골생활은 어떠신가요?

 

시골생활이야 당연히 불편하지요. 겨울에는 하루 두 번 아궁이에 불도 지펴야 하구요. 여름이면 온갖 벌레들과 전투도 치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충분히 경험해서 면역력도 있는 데다 불편함이 주는 여러 가지 선물도 있죠. 고작 저 먹을 채소 몇 가지 키우는 수준이지만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노동을 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예전보다 단순하고 담백해지는 느낌도 아주 좋구요.

 

그런가 하면 소설 속 농촌 현실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피부로 느끼는 오늘의 농촌 현실에 대해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사실 시골에 와서 살긴 하지만 저 사는 곳이 인가 드문 산속이고 집밖 출입을 잘 하지 않아 시골의 현실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합니다. 시골 내려온 지 겨우 2년이니까 아직은 외지인인 셈이죠. 그냥 눈에 보이는 현실이라고 한다면 어디를 가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분들이 계시다는 것, 그분들이 중장년층만 남은 시골의 노동력을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다는 것, 그분들과 그 자손들에게 우리나라 농촌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 뭐 이런 정도의 현실을 본 것 같습니다. 노인 문제야 다들 아시는 거구요.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노약자, 중증 장애인, 이민 여성 등 ‘겨우 살아가는 존재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천착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 이력이 붙으면 뭐든 견딜 만하다. 아버지는 병신자식 하나 낳아놓고 살 수 없게 됐지만,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사는 게 지옥이었던 그는 살다 보니 사는 일에도 그럭저럭 이력이 붙었다. 사는 일이 만만치 않은 것임을 제일 먼저 알려준 것은 아버지였다. (…)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그는 마음 한구석 거미줄처럼 질기게 엉겨 있던 아버지를 떨쳐낸다. 이곳은 아버지의 삶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아니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던 그만의 천국이다.

 

<천국의 열쇠> 중에서

 

글쎄요. 왜 그럴까요?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그냥 그런 분들의 이야기가 제 마음을 움직였던 건데요. 생각해보니 잘난 사람, 예쁜 사람, 돈 많은 사람들의 화려한 삶은 제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나 부러워하고 있잖아요.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한 쓸쓸한 삶에 더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쩌면 저 역시 그런 시간들을 보내봤던 경험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그냥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는 성정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구요. 그런데 나이 들어 보니 꼭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화려하게 보이는 삶에도 반드시 아픔은 있더라구요. 누구에겐들 살아가기가 쉽겠어요. 살아 있는 한 고통이나 아픔, 슬픔은 피해갈 수 없죠. 어쩌면 아픔은 생명의 쌍둥이 형제인지도 모르지요.

 

작품을 쓰는 데 영향을 줬던 소설이나 책이 있으신가요?

 

특별히 어떤 작품, 어떤 작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평소에 이문구 선생님의 《관촌수필》과 박상륭 선생님의 《죽음의 한 연구》를 즐겨 읽습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그분들의 따스하고 깊은 시선에 늘 감탄하면서요.

 

 

고향에 내려가 사시면서 학생들에게 문학도 가르치고, 여타 문학 심사나 강의도 많이 하시는 걸로 압니다. 소설은 보통 언제 쓰시는지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요. 어떤 일을 하고 있든 소설 쓸 시간은 반드시 있습니다. 어차피 과작이잖아요. (웃음)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만드는 것보다 하나의 소설을 통해 저 자신이 성장하는 느낌을 더 좋아합니다.

 

만약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 것 같으세요?

 

별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농부로 살고 있다면 좋겠네요. 저는 농부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정직한 노동으로 생명을 키워내고 그것으로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잖아요? 한 톨의 쌀이 소설 한 편보다 아름다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신지요?

 

좋은 소설? 죄송합니다. 이런 질문이 제일 어려워서요. 어떤 작가나 작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앞서 말한 것은 어떤 소설이 좋은지를 저 스스로 잘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설령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인지를 안다고 해도 제 삶이 그렇지 않다면 그런 글이 나올 리 없구요. 그냥 저는 제가 따뜻하고 넓고 깊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께 한마디 해주세요.

 

음… 가능하다면 제 글을 천천히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밥도 천천히 오래오래 먹는 게 좋다잖아요. 글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요. 느릿느릿, 천천히, 산보하듯 읽어주신다면 참 좋겠습니다.

 

1965년 전남 구례에서 출생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빨치산 부모님 이야기를 소설화한 《빨치산의 딸》을 펴내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판금 조치를 당하고, 이후 노동해방문학 관련 활동으로 수배생활을 했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됐고, 2004년 소설집 《행복》, 2008년 《봄빛》을 출간했다. 2006년 단편소설 <풍경>으로 이효석문학상을, 2008년 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올해의 소설상을, 2009년 소설집 《봄빛》으로 한무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빨치산의 딸》의 주 무대이자 고향인 구례로 내려가 소박하고 느린 삶을 살고 있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전공전담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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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세상에 이별하기 좋은 날>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존 이조, <오늘은 세상에 이별하기 좋은 날>,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멋진 삶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남을 위해 사는 것이 복된 삶이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는 것만이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도 한다. 어떤 것이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질문 같다. 나도 가끔 사람들에게 ‘잘 사는 방법’에 대해 물어보는데 그들의 답을 듣다보면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대답은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지금 당장 살아남는 게 문제라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오늘은 이별하기 좋은 날>을 보면 그 동안 내가 주위사람들에게 던졌던 질문-잘 사는 방법이 무엇이냐?-이 잘못되었다는 깨닫게 된다. 즉 ‘잘 사는 법’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살아갈 나날을 바라보지 말고, 죽는 순간을 생각하며 물어봐야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소원>에서 저자 게이 핸드릭스는 행복한 삶이 알고 싶으면 죽음을 생각하라고 한다. 죽음의 사신이 내 앞에 서 있다는 가정 하에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며 가장 후회스러운 일, 다시 태어난다면 꼭 하고 싶은 것’에 답해 보라고 한다. 그때만이 개인적인 욕심과 이기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저자는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 책은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의 비밀을 분명하게 깨닫고픈 나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평생토록 내 안에 있던 의문들을 더욱 절박한 심정으로 묻게 되었다.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삶을 마감하는 순간 나는 어떤 생각들을 하게 될까? 남아 있는 건 시간뿐인데, 이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행복과 의미 있는 삶의 비밀들은 무엇일까?”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후회 없이 살아가는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산 지혜를 듣다

그는 앞서간 세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 전역과 캐나다에 거주하는 1만 5천명에게 “당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 인생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당신이 아는 어른들 중에서 삶에 대해 중요한 무언가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분이 누가 있지요?”라는 질문지를 보냈고, 그들이 추천한 사람, 즉 다른 사람들이 지혜롭다고 인정한 사람 중에서 다양한 집단을 대변할 수 있는 253명을 선정해 인터뷰했다.

저자가 인터뷰를 통해 얻고자 한 것은 ‘현관 흔들의자에 않아 있는 노인’이 가진 혜안이었다. 오랜 삶을 통해 인생의 참 의미를 이해한, 항상 죽음을 생각하며 개인적인 아집보다는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후회 할 줄 아는 ‘깨달은 자’의 지혜다. 저자는 이들을 만나 “가장 행복을 안겨주는 것은 무엇이며,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점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던졌고, 다양한 대답들을 공통된 몇 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정리했다.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나이 60세를 기점으로 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분명히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오십대 초반사람과도 인터뷰를 했는데 20여 명 정도를 인터뷰하다 보니 예순에 즈음해서야 삶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예순 이전에는 아직 삶의 경험 속에 휩싸여 삶과 충분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다 세월이 더 흘러 예순을 넘으면 더욱 신비롭고 아름다운 어떤 것이 사람들을 한층 지혜롭게 해 주는 것 같았다. 나이와 지혜사이에 신비롭거나 혁명적인 어떤 연관성(저자는 이를 죽음과 연관되었다고 한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253명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자, 죽기 전에 발견해야 할 다섯 가지 비밀, 즉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들은 인종, 종교, 문화, 성, 사회적 지위를 떠나 표현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공통된 이야기를 전해준다. 첫째,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아라.’ 둘째, ‘후회를 남기지 말라.’ 셋째, ‘스스로 사랑이 되라.’ 넷째,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다섯 째, ‘받기보다 주는데 힘써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실행하라.’다.

어찌 보면 빤한 내용들, 자기계발서나 인생에 대한 책을 몇 권 본 사람이면 누구나 익히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삶을 거의 다 지낸 사람들은 다시 이 말을 전한다.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위해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함으로써 절대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라’는 말이다. 내가 이 책을 보면서 절실하게 느낀 점은 ‘나도 죽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언젠가는 세상에서 얻은 것을 다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그게 내일이 될지, 십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러운 죽음

의료전문가들은 요즘 나이든 사람들을 보고 ‘나이를 부정하는 세대’라고 한다. 젊어지고 싶은 마음을 넘어, 젊음 그 자체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대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운동하다 힘들면 나이 들었다는 생각보다 체력관리를 잘 못한 것이고, 잇몸이 약하고, 눈이 침침하면 나이보다는 영양문제나 과로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현대과학이 무책임하게 쏟아내는 망상에 사로잡혀 영원한 삶을 믿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늙음을 인정하지 않는 세대는 죽음을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그렇기에 죽음이 더욱 두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저자는 행복하게 살아왔던 사람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들은 고통이 무섭고 주위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이 걱정스러운 것이지 죽음에 대해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죽음 자체보다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누려야 할 행복을 충분히 느껴보지 못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는 삶. 그리고 단 한 번의 삶(다시 태어난다 해도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테니까). 어떻게 살던지 간에 자신만이 평가할 수 있는 삶이기에 책에 들어있는 내용들이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우리 역시 그 나이가 되어 삶보다 죽음이 더 가까워졌을 때 이들과 같은 말을 할 것 같다. 누군가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또 어떤 사람은 ‘내 이럴 줄 알았어’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다.

나이 60세가 넘은 사람들, 살아간 세월보다 죽음이 더 가까운 사람들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값진 선물이라고 느끼며, 아침에 눈뜰 때마다 오늘 하루가 ‘나에게 주어진 또 하루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소중함을 가슴 깊이 느끼면서 말이다. 이런 삶에 대한 지혜를 깨달을 수만 있다면….

*일열님 블로그에 가시면 5가지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만나실 수 있어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일열’님은?
20년 가까이 다양한 직장생활을 하다 지금은 ‘일열의 나를 찾는 독서 & 독서경영’ ‘집객연구소’ 등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집객연구소는 ‘사람 모으는 법’을 연구하는 카페로, 좋은 분들과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기를 바랍니다. 사람보다 좋은 게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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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루시M.몽고메리, <빨강머리 앤>, 세종서적, 2008


얼마 만에 앤을 다시 만난 것일까? 언제 앤을 만나기는 했었던가?


어린 시절, 내 기억과 추억의 일정부분은 앤과 함께한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그 당시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떤 공상을 나누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앤을 떠올리면 언제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친구, 알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마음 든든해지는 앤은 그런 친구다.

지난 해 10월, 앤이 다시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빨강머리 앤>이 재출간된 것이다. 이 책은 앤 시리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앤이 커스버트 남매를 만나는 순간부터 교사가 되기까지의 성장 기록을 담고 있다. 묵직한 책의 두께와는 상관없이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경쾌한 운율이 살아난다. 그 옛날처럼 앤의 발랄함에 두 눈과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앤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행복을 전하는 특별한 소녀

때로는 원치 않는 인연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삭막한 고아원에서 벗어나 초록색 지붕 집으로 앤의 삶이 옮겨지던 날. 매슈 커스버트와 마릴라 커스버트 남매가 입양을 원한 건 앤과 같은 ‘여자 아이’가 아니라 일을 도와 줄 ‘남자 아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열한 살,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쉬운 게 하나도 없었던 앤 셜리. 온 몸에 실수를 장전하고 과도하게 감정을 남발한다.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상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한다. 이런 앤에게도 타인을 사로잡을 만한 특별한 매력이 있다. 정교하게 닫혀있던 마릴라의 마음을 열게 만든 이 필살기는 차차 소개하기로 하겠다. 원치 않는 인연도 ‘인연’인 법. 다소 불편한 이들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앤이 이렇게 수다스러웠었나?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도 바로 옆에서 조잘대는 것처럼 귀가 윙윙 거린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마음을 놓는다. 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무던하던 마음이 싱숭생숭 설레기 시작한다. 조금 더 파릇하고, 조금 더 경쾌하고, 조금 더 자연스러운 세상을 볼 줄 아는 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미세한 부분에도 앤의 눈이 가닿으면 어김없이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모난 구석이라곤 없다. 두려움도 없고, 상상에도 끝이 없다. 앤에게 이 세상은, 오늘은, 환희 그 자체인 것이다. 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가 있다. 그래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면 당신도 이미 ‘앤의 폐인’ 일지 모른다.

빼빼 마른 몸에 도드라진 주근깨, 무엇보다 눈에 띄는 빨강머리는 ‘앤’을 무심코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 타고난 이야기꾼 기질까지 선보이는 앤.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앤의 풍부한 상상력은 과연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이미 서너 살 때부터 힘든 일을 겪어왔던 앤은 공상을 통해 모진 상황들을 이겨내곤 했다.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상상 속에서라면 행복한 아이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초록색 지붕 집을 둘러싼 캐번디시의 수려한 자연 경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치 그림 속 풍경처럼 아름답게 자리한 고즈넉한 시골 마을. 앤은 숲 속 작은 동물들을 바라보며 꽃과 나무 사이를 거닐곤 했다. 그러는 동안 마음가득 상상이 차올라 감수성은 한없이 풍부해졌으리라. 앤은 보이는 모든 것에 가장 어울릴만한 이름을 새롭게 지어주기도 한다. 이것 역시 뛰어난 상상력의 산물인 셈이다.

대책 없는 긍정, 맑고 밝은 기운

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가끔 대책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라는 데 있다. 원망과 고통이 생길 법한 자리를 앤은 온통 긍정으로 무장한다. 그 맑고 밝은 기운 때문일까. 누구라도 앤을 만나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가녀린 몸의 작은 아이 한 명이 어른의 마음까지 다독여주다니 그 재주 한 번 놀랍다! 앤의 하루는 진실하고, 절실하며, 축복으로 가득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앤 스스로가 그런 날들로 만들어 버린다. 그녀가 발산하는 해피 바이러스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을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꿈을 간직하며 살아가게 될 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수줍음 많지만 극진한 사랑을 보여준 매슈 커스버트, 앤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늘 노심초사하며 감정을 절제했던 마릴라 커스버트에게 ‘앤’을 사랑스런 아이로 키워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다이애나와의 추억, 길버트와의 아련한 기억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다.

누구나 저마다의 마음 어디쯤 품고 있을 고향,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라는 그 낙원 같은 고향이 <빨강머리 앤>을 펼치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지치고 힘들 때 어디서든 어깨를 내어주는 단짝 친구처럼 앤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보다 희망차게 삶을 살아내는 경쾌하고 명민한 작은 아이 한 명이 늘 우리를 반겨주는 책. <빨강머리 앤>이 100년이 넘도록 사랑 받아온 비결은 루시M. 몽고메리가 그리고자 했던 세상이 앤을 통해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가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꿈 사랑 희망을 노래하며 상처를 치유해주는 <빨강머리 앤>은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에 남을 명작중의 명작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soulnote'님은?

다독보다는 정독의 묘미를 즐길 줄 아는 진정한 슬로 리더(slow reader). 문예창작학을 전공하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다, 전업독서가로 전향 후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soulnote라는 닉네임처럼 영혼의 진실한 언어로 인생의 페이지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것이 목표. 현재, 생활의 일부이자 전부인 독서와 서평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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