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출판'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2.10.15 [사이언스 북 카페] 조홍섭, 《한반도 자연사 기행》
  2. 2011.06.22 <미칠 수 있겠니> - 우리 모두의 슬픈 월리스 라인
  3. 2010.12.10 <나는 왜 쓰는가> - 쓰고 읽고 다시 쓰면서
  4. 2010.11.05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우리의 의식을 깨워, '우리'로 나아가다
  5. 2010.08.02 <무력소년생존기> - 지옥 같은 현실, 희망의 꿈꾸기는 가능한가
  6. 2010.06.03 <4천원 인생> -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사이언스 북 카페] 조홍섭, 《한반도 자연사 기행》

 

 

조홍섭 | 《한반도 자연사 기행》 | 한겨레출판 | 2011

 

■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오늘은 우리 땅 곳곳을 찾아다니며 한반도의 지질과 지형,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조홍섭의 《한반도 자연사 기행》이라는 책입니다. 

 

■ 지질과 지형이라면, 한반도라는 땅 자체의 역사를 말하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조금 더 쉽게 설명하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반도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또 북한산, 한탄강, 울릉도, 독도 그리고 제주도 등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보는 것인데요. 한반도를 구성하고 있는 땅, 바다, 강, 섬의 현재에서 출발해 과거 뿐 아니라 미래까지 내다보는 자연사 기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책 전체의 구성은 어떻게 되어 있나요?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요. 처음에 한반도, 산, 바다, 강 등 주요 지형과 지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보고 다음으로는 그 땅 위에서 생존했던 공룡 등 생명의 흔적을 따라가 보고, 마지막으로는 우리나라의 지질 명소들을 두루 둘러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 우리 땅의 뼈대와 근본을 알아본 후,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생명의 역사를 탐사하는 것이네요. 그렇다면 한반도에 생명이 살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아시다시피 생물이 살기 위해서는 산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책이 2부에 처음으로 소개하는 게 최초로 광합성을 해 지구의 생물이 쓸 수 있는 산소를 만들어낸 남조세균이고요. 이 남조세균은 ‘스트로마톨라이트’라고 부르는 구조물을 통해 그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우리나라에는 약 10억 년 전의 원생대 스트로마톨라이트 화석이 인천의 소청도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태백산 분지에는 5억 년 전의 삼엽충 화석이, 경기도 화성시 시화호에는 1억 년 전 다양한 공룡이 살았다는 증거들이 발견되었고, 전남 여수에는 멸종을 앞둔 공룡의 최후의 흔적인 발자국들이 곳곳에 남겨져 있다고 하고요.

 

■ 한반도의 곳곳이 사실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사 박물관이었네요.

 


[YTN 사이언스 북 카페 《한반도 자연사 기행》 방송 다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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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 우리 모두의 슬픈 월리스 라인


 

 

 

김인숙 | <미칠 수 있겠니> | 한겨레출판 | 2011

 

자꾸 붕붕 떠다니는 어떤 감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지금도 역시 모른다. <미칠 수 있겠니>라는 제목과 화사한 표지가 주는 소설의 분위기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미칠 수 있겠니, 이 삶에.’라고 묻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문득 깨달은 건 나는 삶에 미치지도 않았다는 것과 미칠 수도 없을 것 같은 불안함이었다. 삶을 충실하게 사는 사람에게만 삶에 미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 주인공 진이의 삶에 동조할 수도, 그러지 않을 수도 없는 채로 묵묵하게 읽어 내렸다. 절반 남짓. 

 

그럼에도 무엇 하나 손에 잡히는 게 없다. 공허한가. 내가 그러한지 소설이 그러한지 분간이 안 됐다. 그럼에도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애처로움이 솟아올랐다. 딱히 슬프지 않은데 꾸역꾸역 삼켜지는 삶이 의아해서 울고 싶었다. 울지 않았다. 울어서는 안 되었다. 진이의 삶은 내 삶이 아니므로. 그녀의 사랑보다 내 사랑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의 삶이 그보다 나을 수 없었다. 잘 넘어가는 페이지를 부러 천천히 넘기며 오래 시간을 끌었다. 생각했다. 삶이 마음대로 흐르는 것은 아니라는 걸. 하물며 강물은 자유로워 보이나 가는 길이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그것이 부러웠다. 한낱 강물이, 부러웠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둘은 어떻게 사랑에 빠졌는지, 그런 이야기는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두근거리는 가슴, 은밀한 떨림과 의심, 그리고 망설임과 그 망설임을 한꺼번에 압도해버리는, 그 무엇도 확실하다고 할 수 없으나 확실하다고 믿고 싶은, 결정적이라고 믿고 싶은, 그냥 이거, 바로 이거라고 말하고 싶은... 그 모든 불분명한 감정과 추상어들을 제외하고 나면 남는 것은 이것뿐이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났다.' 혹은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들, 가족에 대한 치밀한 탐색, 유년기의 장황한 추억들,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습관들, 같이 영화 보기, 각자 선물 사기, 서로의 친구들을 만나 떠들기... 그리고 마침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 상처를 찾아내기, 상처를 만들어내기... 제 성한 살을 뜯어서라도 상처를 만들어 그 안에 그를 들여놓기... 그리고 마침내 운명이라고 믿어버리기” (145-146쪽) 

 

내가 알고 있는 시작은 무조건 설레고 아름다운 것. 남자를 보낼 때 여자는 이렇게 되어버릴 줄 몰랐을 것이다. 그를 찾아 나섰을 때 그의 새 여자를 만나게 되고 그 여자의 당당함에 분해 그 여자를 찌르고, 찔렀는데 죽었는지 어떤지 몰라 섬을 배회하다 현지 택시기사 겸 가이드인 외국인 남자와 하룻밤을 보내게 될 줄을, 진은 당연히 몰랐다. 하필이면 관광 중 지진이 나서 눈앞에서 폐허가 된 건물 잔해와 비명을 지르는 사람과 비명조차 지를 줄 모르는 사람들 틈에 멍하니 쓰러질 줄은, 어떤 연유로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인생이 미쳐야만 살 수 있는 거였나. 진의 과거와 미래를 온전히 짐작할 수 없다. 소설은 잠이 드는 와중에만 읽어 흐릿하고 고요하면서도 처절하게 읽혔다. 마치 현지에 떨어져 길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명확한 언어로 쓰인 소설인데도 모호하기만 하다.

 

이야기를 해주고 싶은데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 그러니까 <미칠 수 있겠니>는 읽고 있되 읽지 않은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름이 같아서 운명이라 믿었던 두 남녀가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가 일찍 생기지 않았으므로 근사한 여행을 반복할 수 있어 섬 여기저기를 드나들 수 있다. 내가 바라는 삶이다.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외아들인 남자는 이름이 같은 여자를 만나 사랑하고 청혼했다. 이렇게 말하면서. 

 

“내가 언젠가 다시 한 번 그렇게 울 때, 네가 내 손을 잡아주고 있으면 돼.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148쪽) 

 

연애를 시작했으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면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아야 삶의 이야기는 완성된다. 둘 중 하나라도 룰을 어기면 잘 먹고 잘 사는 삶의 규칙성은 어김없이 깨지는 법. 여자 진을 남자 진이 배신한다. 섬으로 여행을 떠난 남자 진을 찾으러 갔다가 오래전 그곳에서 그녀의 시중을 들어주던 다른 언어를 쓰는 여자의 달라진 표정을 확인하고 그녀는 남편의 배신을 직감한다. 그래도 사랑이다. 남자가 살기 위해 섬으로 떠나고 싶어 한 것도, 남자를 따라가지 못하는 여자도. 불안을 직감하면서도 남자를 멈추게 하지 못했던 여자도, 여자에게 함께 가자고 하면서도 여자를 떼어놓고서라도 가고 싶어 했던 남자도. 그들은 사랑이다. 그런 남자와 여자의 상태는 월리스 라인이다. 

 

“이쪽과 저쪽을 선명하게 가르는, 선명하게 갈라, 아무것도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월리스 라인, 대륙이동설, 판구조론! 단어들이 어지러웠다. 그 어지러운 단어들이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그녀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과 기억해야 할 것 사이의 금이라는 사실뿐이었다. 그녀는 결코 그 금을 건너지 못할 것이었다.” (140쪽) 

 

남자가 떠나겠다 하면 나는 어떡해야 하나. 그제서야 감정이입이 된다. 남자가 섬으로 가자 하면 나를 따라갈 것이나 남자가 가자하는 곳이 내가 가고자 하는 곳이 아니라면 나는 남자를 혼자 보내야 한다. 불행이 시작될까 두려우면서도 그를 결코 붙잡아 앉히지 못할 것이다. 그 역시 그러할 테니까. 그래서 ‘함께’라는 것은 중요한 말이다. 여자는 수없이 돌이켜 생각하고 후회한다. 남자를 혼자 보낸 것이 잘못된 시작이었나 하면서. 

 

꿈을 꾼다고 해서 누구나 그 꿈을 이룰 시도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진의 꿈은 단지 소망에 그치지 않았다. 진이 기를 쓰고 말렸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모든 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불행히도 진은 유진을 멈추게 할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현지 공장에 채용될 수도 있다는 소식을 갖고 들어온 날, 그 설레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때 그가 쏟아낸 계획과 가능성들, 낭만적인 꿈과 무수히 펼쳐지던 소망들, 그것은 거의 신대륙의 꿈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였을 것이다. 그는 삼십 년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어미의 구멍이 아니라 자신의 구멍을 찢고 나갈 태세였다. 그리하여 그는 오래전 수줍은 목소리로 청혼을 할 때와는 전혀 다르게, 힘차고도 우렁찬 목소리로 진에게 말했던 것이다. 

 

같이 가는 거지?

 

그리고 진의 침묵... 침묵 끝의 고작 사랑한다는 말... 달콤했을까. 따듯했을까. 혹은 간절했을까.” (152-153쪽) 

 

진은 어떻게, 이야나는 어떻게, 또 다른 남자 진은 어떻게 될지, 미래를 알 수가 없다. 그들의 미래가 궁금하지 않다. 미쳐야만 살 수 있는 삶은, 미쳐야만 할 수 있는 사랑은, 어려웠다. 낯설었다. 완성을 시킬 수가 없다. 모든 것을 내 손안에서 완성하고 싶은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이다. 그래도 살 것이다. 계획표대로 흘러가는 게 삶이 아니고, 약속한다 해서 영원한 사랑이 완성되는 게 아니므로. 

 

내가 주말에 서울에 간 이유는 결혼식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모두는 행복하게만 보였다. 마치 영원히 지속될 행복을 나만 빼놓고 획득한 듯 보였다. 그렇지 않다는 걸 모두 알고 있는데도 모두 그런 것처럼 행동한다. 월리스 라인을 만나면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우린 7년간 수없이 많이 크고 작은 약속들을 했는데 월리스 라인이 우리에게는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가 떠날 태세를 하면 나는 보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또한 그렇듯.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어떤 이유나 어떤 핑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로 떨어져 살 수도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그때 진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는 영화 대사를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 대사가 비록 변해버린 사랑 앞에서 외치는 지나간 사랑의 말이었다고 하더라도. 사랑은 얼마나 가벼운가. 그것이 전 생의 무게보다도 더 무거운 거라고 믿어도, 서로를 못 견딜 지경이 되면 결국 밀어 올려지고, 마침내 갈라지는 것이다.” (159쪽) 

 

우리의 미래가 불안한 이유는 그것. 아름다운 이유는 불안해서. 아아,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삶은 비극적이고 아름답다. 나는 아무래도 비극 앞에서만 아름다움과 고결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의 「러브 발라드」가 아름다운 선율로 이어폰을 통해 귀로 흘러들었다. 순간 나는 오로지 지금만을 사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약속은 오늘까지만. 약속의 유효기간은 우리 중 누군가에게 월리스 라인이 찾아오지 않을 때까지만. 나는 또한 그는 기꺼이 함께 또는 각자. 의연히 대처할 수 있을까. 바닥을 보이지 않고 그런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로소 남자 진과 여자 진 그리고 이야나와 만의 미래 또 이름 모를 이국소녀의 죽음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 계획 없이, 계획 따위에 구속되지 않은 채로 이렇게 오롯이, 또는 우뚝. 의연하고도 처연하게. 문득 희열 같은 것이 차올랐다. 이것이 지나면 어쩐지 울음이 찾아올 것만 같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감성소녀’님은?
아직 20대인 것이 희망. 자칭 예술애호가.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다. 몰입과 지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단 것을. 규격적 인간을 선호하는 세상을 거스르며 살고 싶어 책읽기를 선택했다. 로마 스페인광장에서 하루 종일 사람구경하며 책 읽는 삶을 꿈꾸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에 로마로 떠나는 사람들의 여권에 도장 찍어주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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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쓰고 읽고 다시 쓰면서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10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은 너나 할 거 없이 많은 이들이 글을 씁니다. 홈페이지, 블로그, 카페뿐 아니라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짧은 문장에 정보와 사람, 그들의 삶을 실어 나르기 바쁩니다. ‘글’이라는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곳 어디에서든,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내 보이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크기를 넓혀가려는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1인 미디어’라는 말이 나오는 이 시대에,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과 고민은 비단 이름을 알린 작가의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 중 가장 빼어난 29편을 묶은 <나는 왜 쓰는가>는 1946년 ‘갱그릴’지에 게재한 오웰의 대표적인 에세이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그의 작가론과 정치론이 한데 잘 녹아 있는 가장 상징적인 작품으로,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일종의 짧은 자서전”도 한데요. 그 속에서 오웰은 자신이 글을 쓰는 동기를 네 가지로 정리해 밝히고 있습니다.

1.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하는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
3.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
4. 정치적 목적.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
(293-294쪽)

그의 이런 생각에서 저는, 세상에 나를 더하고 세상 속으로 좀 더 들어가려는 ‘글쓰기’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 <나는 왜 쓰는가>를 채우고 있는 그의 또 다른 에세이들에서 그 마음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오웰의 생애 곳곳에 배어있는, 세상을 향한 발걸음의 흔적을 읽으며, 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기도 합니다.

‘스파이크(1931)’에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을, 그리고 이어지는 <위건부두로 가는 길>(1937)의 기억. ‘교수형(1931)’, ‘코끼리를 쏘다(1936)’를 읽으며 <버마시절>(1935)을,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1937)’과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1942)’에선 <카탈로니아 찬가>(1938)가, 그 모든 기억으로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었던 <동물농장>(1945)과 <1984>(1949)까지.

그러고 보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이미 그 목적을 달성한 오웰의 성공적인(?) 글쓰기를 확인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특유의 유머와 통쾌한 독설에 담긴 날카로운 통찰은 그의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이끌고, 그 생각은 다시 책 속의 세상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나를 더해, 세상 속으로 좀 더 들어가고 싶은 ‘글쓰기에 대한 욕망’를 구체화시켜주니까요. 그렇게 쓰고 읽고 다시 쓰는 과정에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우리가, 과거와 다른 현재의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을 테니까요.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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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우리의 의식을 깨워, '우리'로 나아가다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한겨레출판, 2010

 


조지 오웰을 만나는 세 번째 시간, <위건부두로 가는 길>.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글이 되고 기록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나는 오웰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까지 보기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그의 삶의 태도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경계로 나뉘어져 있는 우리의 삶을, 그러므로 결국 너와 나의 삶을, 다시금 ‘우리’라는 테두리 안으로 들여와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오웰의 글이 자꾸만 읽고 싶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겠죠. 더욱이 그 경계들을 안으로 품고 그만큼의 세상밖에 볼 수 없는 저이기에, 경계 밖 ‘그들’의 삶까지 ‘우리’라는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내가 노동 계급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유사성을 발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의에 당하는 상징적 희생자였으며, 버마에서 버마인들이 하는 역할을 영국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쪽)

“하급 상류 중산층”인 그가, 식민지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하면서 세상의 일그러진 얼굴을 대면하게 되고, 그때의 죄의식을 씻어내기 위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했었던 것처럼, 이 책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불의에 당하는 희생자’ 즉, 1930년대 당시 경제 대공황으로 대량실업을 겪고 힘겨운 삶을 지속해야 했던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그의 또 다른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진보단체이자 독서클럽인 ‘레프트 북클럽’으로부터 취재 제의를 받은 그는, 두 달에 걸쳐 랭커셔와 요크셔 지방 일대의 탄광 지대에서 광부의 집이나 노동자들이 묵는 싸구려 하숙집에 머물며 그들의 삶을 기록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로 남게 된 거죠.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다시, 정치적 글쓰기를 통해 ‘우리’의 삶으로 나아가는 그의 치열한 고민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자신의 성장배경과 영국의 계급문제, 당시 사회주의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겨 있는 2부의 내용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비판적 개인’으로서 오웰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어느 쪽으로 가려 해도 이런 계급 차이의 저주는 돌담처럼 우릴 막아선다. 아니면 돌담이라기보다는 수족관의 판유리 같다고 해야겠다. 없는 듯 대하기는 쉽지만 뚫고 지나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211쪽)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는 있되,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 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차별의 산물이다.” (216-217쪽)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제 안에 박혀 있는 “수족관의 판유리”를 보게 됩니다. “눅눅하고 설익은 위선”으로 ‘진보’를 말했던 모습을 돌이켜 봅니다. 너무 쉽게 ‘우리’라는 말을 쓰고 말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이제 진짜 ‘우리’에 대해서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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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소년생존기> - 지옥 같은 현실, 희망의 꿈꾸기는 가능한가

주원규, <무력소년생존기>, 한겨레출판, 2010


이야기는 한 소년으로부터 시작한다. “크렁크렁 쇳소리를 뿜어내며 쉼 없이 공산품을 쏟아”내는 기계 앞에서, 1초에 하나씩 나오는 주먹 크기만 한 공산품을 개수에 맞춰 골판지 박스에 담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놓는 비루한 기술이 전부인 그 소년으로부터. 그의 어미가  그랬던 것처럼, 1년 365일 아침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지극히 단순한 노동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사는 유약한 소년이, 매월 말 낮은 생산율을 이유로 구타당하며 ‘폐신 집합소(廢神 集合所)’ 42층 78명의 노동자 중 하나로 무력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왠지 그 소년이 낯설지 않다. 공산품을 쏟아내는 기계, 컨베이어 벨트 그리고 노동자에서 검수원, 감시원, 작업반장 순으로 이어져 결국에는 총지배자인 독재자에 이르는 감시와 지배의 수직적 체계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전면을 장식하고 있는 산업화와 대량생산, 경쟁과 계급 구조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이다. 혹은 거대한 조직 안에서, 권력의 이름으로 부과된 억압적인 지시와 폭력 앞에서 언제나 작아질 수밖에 없는 오늘 우리의 모습도 생각난다.

그러니 이 책, <무력소년생존기>를 읽어가는 과정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게 사실이다. 책을 읽고 있는 독자의 욕망이 ‘힘없는 소년의 생존’이라는 희망적인 서사의 결말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을지라도, ‘힘없는(무력)’과 ‘생존’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묵직함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결국 그 서사를 채울 것이며, 그것이 또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무한경쟁은 우리 모두를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아수라장 속에 몰아넣고 오직 한 가지 욕망에만 반응하는 괴물로 탈바꿈시키고 말았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맹목적인 인간이 된 셈입니다. 정치는 희망을 잃고 더 이상 대의를 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맹목이 대세인 사회라면 꿈과 희망이라는 단어보다 지시와 복종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릴 테니까요.”
(작가의 말, 6쪽)

작가의 말마따나, ‘지금, 이곳’의 현실은 괴물로 가득한 지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치열한 경쟁의 삶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우리가 곧 괴물이며, 그런 우리가 부딪혀 깨지며 살고 있는 이곳이 곧 지옥일 테니. 따라서 작가의 자유분방한 상상력이 그려낸, 다소 황당한 서사와 그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폭력과 욕망의 그림을 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은 희망을 품게 된다면, 그것은 곧 ‘거대한 고통의 출현’이라는 결말로 단호하게 끝을 맺어버리는 작가의 비관적 시선에 의해 배반당하고 말 것이다.

“거의 완벽하게 건물이 붕괴될 그 시점에 벽을 붙잡고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던 칼잡이와 소년은, 목격하고야 말았다. 그들의 어설픔과 잔인함, 근거를 상실한 분노와 해명할 수 없는 모순이 일궈낸 마지막 꿈의 한 조각을 말이다. […] 바닥에서부터 밀고 올라오는 혼들이 토해낸 일그러진 영웅이 거대한 불가항력이 되어 지금 그들의 분노, 꿈, 자유를 짓밟고 유린한 모든 것에 대한 심판으로 정체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365쪽)

그러므로 <무력소년생존기>를 읽는 이유는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우리가 놓여 있는 바깥의 절망적인 현실을 위로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현실이 '그러함'을 인정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기 위함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희망'은, '희망의 꿈꾸기'는 거세되고 짓밟힌 희망의 흔적, 그 ‘거대한 고통의 출현’을 보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렇게 책 속에 담겨 있지 않았던 희망이 책을 덮고 난 후에야 찾아오는 것, 그 희망을 오늘의 현실로 불러들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우리의 이유가 될 것이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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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천원 인생> -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안수찬 외, <4천원 인생 -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우리 시대의 노동일기>, 한겨레출판, 2010


80년대 이후 태어난 세대들은 잘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위장취업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신장시키기 위해 대학생이나 지식인들이 공장 등의 근로현장에 취업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각성시켜 계급을 타파하겠다는 투쟁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위장취업이라는 말조차 사라졌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공장 노동자의 권리나 복지가 신장되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공장 노동자들보다도 못한 삶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아져, 더 이상 공장으로 취직해 노조 결성을 하고 투쟁하는 것이 호응을 얻기 어려워졌기 때문인 듯하다. 오히려 요즘의 공장 노동자들은 누군가가 노조를 결성해 자신을 대신해 싸워줄 수 있는 복 받은(?) 직장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니 말이다.

<4천원 인생>은 우리 시대의 '일해도 가난한 자(working poor)'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들은 어떻게 하면 그들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 대한 답을 의외로 간단하고 우직하게 해결했다. 바로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자"이다. 그들이 실제로 사는 삶을 직접 체험하고 부딪혀서 그 감상을 적자는 것이다. 그런 단순하지만 확실한 논리로 한겨레21의 기자들은 비정규직인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직접 들어간다. 4명의 저자는 식당, 마트, 가구 공장, 조립 공장에 위장(?) 취업하여 그들의 삶에 대해 체험하고 피부로 느낀 것을 모아 책으로 냈다.

사실 나는 그들의 삶에 대해 책을 읽지 않아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과거 나의 어머니께서는 공장에 나가서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하시고 집에 돌아와 아무런 불평도 없이 집안일을 모두 해내셨으며, 숫한 야근에도 피곤하다는 내색 한 번 없이 이겨내셨던 노동자였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아르바이트로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며 노동에 의한 허기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껴봤기 때문에 노동자의 하루가 얼마나 길고, 고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의 어머니와 나에게는 그래도 지금의 노동자들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그래도 자식 하나 대학에 보내면 자식이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고, 나에게는 힘들어도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학교에 돌아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어떤가? 내 세대가 사교육 없이도 대학에 입학해서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다면 지금은 사교육 없이는 어디 변변한 대학에 입학조차 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아니 웬만큼 변변한 대학을 나와서는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에 웬만한 대학 같은 경우 보내는 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의 시대이다. 그렇기에 제대로 된 사교육을 시킬 수 없는 가난한 노동자들은 영원히 가난할 수밖에 없다. 이제 노동자가 꿈꿀 밝은 미래는 없다.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이 교육을 통해 자신과 같은 높은 정신 수준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는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계처럼 혹사되는 이들에게 정치와 사상 그리고 이념을 이야기한들 그들이 과연 이해나 할 수 있을까? 항상 자신이 가진 자라고 착각하는 불쌍한 작업 반장이 읊조리는 보수의 이야기가 진리인 양 세뇌되는 이들이 과연 제대로 된 정치관을 가질 수 있을까? 매일 배운 것 없는 노동자들끼리 가진 자들이 주입시켜 놓은 보수 신문 기사에 영향을 받아 서로를 보수화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가진 자들의 부조리에 대해서 논하고, 가난한 자를 위한다는 정치인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면, 오히려 착취당하고 있는 계급에서 엄청난 반발이 튀어나오는 이런 아이러니를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한다는 말인가.

일본의 사회학자 미우라 아츠시가 <하류사회>에서 지적한 것처럼 양극화는 점차로 심해져 과거와 같은 신데렐라 스토리는 더 이상 없다. 하류와 상류는 아예 지역적으로 갈라지기에 이제는 만날 일조차 없는데 어떻게 신데렐라 스토리가 생기겠는가. 양극화된 계층이 만나는 유일한 창구인 서비스 현장에서 상류층 사람들은 하류층 사람들을 마치 투명인간인 것처럼 대한다. 자신과 다른 계층인 사람들에게 상류층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것이 작금의 현실인 것이다.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정치가 바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도 노동자를 진정으로 위할 수 있는 정치인에게 표를 주기를 주저한다. 그게 누가되었든 정치인들은 다 똑같다는 이유이거나 뽑혀도 워낙 소수라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하지만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고 그 영향이 미약할지라도 시작하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 시작마저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 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제발 이번에 뽑히는 시장, 구청장, 교육감은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 계층의 현실을 진정성 있게 고민해줬으면 좋겠다. 지지기반의 부재 때문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루는 과오 없이 "저 사람 꼴통이다.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노동자들의 권익을 신장시켰으면 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Twinsen'은?

현실이라는 무덤에 잠든 이상주의자 Twinsen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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