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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샤오헝 《느리게 더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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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철학함의 가치

 

하버드 철학 리뷰 편집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돌베개, 2010

 


하버드대 최고의 명강의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마이클 샌덜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화제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 정의가 무뎌진 한국사회에서 ‘정의’를 둘러싼 정의(定義)는 뭘까? 라는 호기심이 적지 않은 탓이다. 어느 정도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다. 정의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해서 그렇다. 그러나 우리가 정의에 관심이 많다는 것과 ‘철학’을 좋아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인문학의 위기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며 그 중심에 있는 철학에 대한 무관심은 안타깝게도 오랜 관행이 되었다.

 

그래서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를 읽으면서 당혹감에 휩싸였다. 말 그대로 철학이 맨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한 <정의란 무엇인가>는 화장(化粧)을 한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즉 ‘인터뷰에서 제기된 물음은 단순히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함이라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러한 물음은 철학 분야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를 관통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네하마스의 말처럼 “철학자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그들을 읽고 나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옴베르트 에코, 존 롤스, 마이클 샌덜을 비롯하여 14명의 철학자들이 나온다.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이 ‘사변적 형이상학’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지만 그들은 치열하게 철학에 대한 의문을 던졌다. 가령,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쓴 리처드 로티는 ‘형이상학 이후의 문학’을 향하고 있다. 시적인 문화 혹은 형이상학 이후의 문학이란 ‘종교나 형이상학에 공통적인 명령문이 사라져버린 것’을 말한다. 그래서 ‘시적인 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인간을 신이나 실재의 본질에 책임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생활-세계를 창조하는 존재로 사유’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알렉산더 네하마스는 <삶의 방식>에서 ‘소크라테스적 삶의 방식’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소크라테스적 삶의 방식이란 삶에는 오직 한 가지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을 안다는 것은 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네하마스는 삶에는 수많은 방식이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에게 있어 전기적 사건들은 그의 사유에 있어 최소한의 역할을 한다고 했다. 즉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기획이란 당신의 철학적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지, 당신에게 아이가 몇 명인지, 무슨 옷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한편 <정의론>으로 유명한 존 롤스는 ‘원초적 입장’(original position)을 주장했다. 이는 ‘무지의 베일’ 뒤에 사람들이 처했을 때의 사유 실험이다. 다시 말하면 ‘그 장막 뒤에서 사람들은 각각의 개인을 만드는 모든 것, 즉 부, 나이, 재능, 인종, 좋은 삶과 같은 어떠한 개념에 대한 지식들도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하이 맨스월드는 반대하고 있다. 이유인 즉 우리가 알아야 하는 지식을 빼앗는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마이클 샌덜은 이 책에서도 정의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그는 ‘정부는 그 자체가 선’(good-in-itself)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존 롤스와 칸트의 자유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개인의 자유권에 호의적이긴 하지만 사회가 있기 때문에 자기정의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들의 자유주의는 ‘인간을 자신만의 목적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존중하기 때문에, 좋은 삶에 대한 경쟁적인 개념들에 대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밖에도 힐러리 퍼트넘의 ‘내재적 실재론’을 보면 몇몇 경험적 진술은 입증되지 못한다고 해도 참일 수 있다고 한다. 특히 그는 모든 사실 진술을 규정할 수 있는 단일한 어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실용주의적 실재론’이다. 그는 단일한 어휘 대신에 가치 판단, 사실 묘사, 언어적 관습 모두가 ‘상호침투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윌러드 콰인은 <말과 대상>에서 ‘번역 불확정성 원리’를 전개했다. 그는 ‘어떤 두 언어 사이를 번역하는 것에는 많은 방식이 있는데, 각각의 방식은 잠재적으로 이용 가능한 모든 증거와 합치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인식이 ‘믿음의 그물’을 구성한다고 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철학하는 삶, 즉 학문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것은 마치 피터 웅어가 최악으로 치달은 아프리카 참사 같은 상황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형이상학에 대한 작업을 선택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철학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철학의 이론적인 측면과 실천적인 측면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다는 좋은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존 듀이가 <철학의 재구성>에서 말한 것처럼 ‘철학이 철학의 문제들을 다루는 도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철학자들이 인간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발전시킨 방법이 될 때’ 철학이 소생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吾友我’ 님은?
다독보다는 정독을 좋아하고 버스보다 전철을 좋아하고 집보다 도서관을 좋아하는 독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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