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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 선율 아래 치명적 잔혹함이 - <소리 수집가>

 

트리아스 데 베스, <소리 수집가>, 예담, 2009

 

“오, 지존의 쾌락이여!”

에로스(Eros;사랑) 속에 타나토스(Thanatos;죽음)가 내재화 된 자, 절대적이고 완벽한 쾌락을 소유한 존재, 축복인가, 저주인가? 아일랜드의 전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 사랑이야기,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차용한 이 낭만적 작품은 잔혹한 죽음이 즐비함에도 관능적 설렘이 전체를 지배한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하고 저장하는 아이, 소리의 형태, 소리의 정수, 소리의 본질, 그리고 소리의 존재를 놓치지 않는, 더 이상은 해체할 수 없는 소리를 구별하는 천부적 능력의 소년, ‘루트비히’의 경이롭고 절망적이며, 치명적이고 지고한 사랑의 이야기다. 소리에 대한 무한한 영역을 갖춘 소년은 소리를 받아들이는 대상에서 새로운 소리를 창조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독일연방 최고의 성악가로.

모든 이들이 탄성을 내뱉는 천상의 목소리를 들려주지만, 루트비히 자신만은 속이 텅 빈, 무언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함을 채우지 못한다. “간절하고, 경이롭고, 영원한 소리, 완벽한 천상의 소리, 지각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감흥 같은 그 소리”는 바로 자기 내면에 숨겨진 소리이고, 곧 이의 자각은 완벽함, 신으로서의 자신의 발견이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 불멸의 사랑에는 오로지 죽음만이 존재한다는 ‘영원한 사랑’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여인들을 사랑의 정염에 휩싸이게 하고,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쾌락에 몸을 던지게 한다. 사랑의 묘약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데려간 곳이 삶이 아니라 죽음이듯이, 루트비히의 ‘사랑의 음향’을 품고 있는 정액은 여성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독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절정, 엑스터시(ecstasy)는 숙명적 절망을 확신시킬 뿐이다. 모든 여인을 마음껏 유혹할 수 있는 힘, 그 완벽한 선율은 곧 저주의 다른 이름일 뿐.

루트비히의 이 원죄적 절망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그루누이’처럼 향(香)으로 모든 인간을 조종하지만, 자신만은 그 향기에 취할 수 없는 그 절대적 부조리와 닮아있다. “음악적 관능성이라는 보호벽 아래 치명적인 잔혹함을 감추고”, 여성들의 생명을 빼앗아 영혼을 섭취하는 도구가 된 육체는 온통 고통이 되어버린다. 이렇듯 사랑과 죽음의 불가분성이란 이야기 구조 속에 삶 최고의 숭고한 명제로서 자기희생의 고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지만, 최고의 선(善)으로서의 지고한 사랑, 절대적이고 완벽한 쾌락이란 뛰어넘을 수 없는 모순, 절망이란 고통과 함께 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있다.

한편, 소설 내내 흐르는 관능의 미학 또한 이 작품에서 간과할 수 없는 요소가 된다. “온 몸이 팽팽하게 조여 오는 느낌”, “나는 더 세게, 점점 더 세게 몰아붙였고 급기야 ‘크레센도(점점 더 세게)’의 한계를 넘어, 정점으로 치달아 버렸다.” 육체의 전율과 갈망, 충동, 도발, 황홀경이 장식하고 있다. 더구나 이성(理性)보다 더 상위에, 욕망보다 더 강한, 운명 보다 더 강한, 영혼을 파괴시키는 어떤 힘이, 존재와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 같았다는 두 번째 사랑의 결합인 ‘루도비카’와의 극한적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정사의 묘사는 가히 압권이랄 수 있다.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실제 서신(書信)이 수시로 차용되면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조는 클라이맥스를 치닫는 작품의 긴장감과 흡입력을 더더욱 고조시키고,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3막의 “쾌락에 대한 극단적 욕망과 죽음에 대한 결사적 희구가 동반되는 총체성”의 표현과 같이 상상력과 그 격정적 떨림을 공명시킨다.

“천국의 문에 들어서는 것보다 더 지고(至高)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 숨 가쁘게 흐르는 작품이다. 오페라와 전설이 교묘하게 교차하며, 마치 19세기 낭만주의가 부활한 듯한 불멸의 사랑을 담은, 삶의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되는 소설이다. 치명적 죽음을 머금고 우리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사랑의 선율이 어디선가 들여오는 듯하다. <향수>를 넘어설 걸작이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느니!
오감이 기쁨에 전율하느니!
갈망하는 사랑으로 피어나는 꽃의 자태.
느긋한 사랑이 빚어낸 완벽한 설레임이니!
향락의 충동이여, 나의 가슴을 진정시킬지니!
이졸데! 트리스탄!
세상 먼 곳에서 내 그대를 소유하느니!
도발적인 그대의 지고한 사랑이여.
나, 오로지 그대를 위해 살아 있느니!”   
(p. 284. 트리스탄의 노래中)

오늘의 책을 리뷰한 ‘비의식’님은?
누군가는 독서를 통해 존재론적 변신이니 극기복례를 말하지만, 나에게 독서는 “그저 스스로 사는 것에 대한 희로애락을 좀 더 폭넓게 느끼기”위해서이다.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나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무하여 삶을 건강하게 유지하겠다는 정서적 위안이고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절대적 도구이다. 생이란 외로움을 더욱 민감하게 느끼는 중년이란 세월의 풍화에는 책읽기가 더욱 위로가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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