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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18 그대의 오늘을 살아나게 만드는 주문 - <무지개>

그대의 오늘을 살아나게 만드는 주문 - <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무지개>, 민음사, 2009


얼마 전,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태양 5cm 옆에 있는 무지개를 봤다. 요즘 아침에 초점이 맞지 않아 세상이 왜곡돼 보이는 기현상을 겪고 있어,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그런데 형태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분명 무지개였다. 늘 같은 아침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무지개가 고마워 한참을 바라봤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무지개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몸은 만원 전철을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무지개 너머의 공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하늘 건너편 타히티 섬에서 무지개를 바라보는 ‘그녀’ 에이코를 만났다.

에이코는 도쿄의 타히티안 레스토랑 ‘무지개’에서 오랫동안 일한 플로어 매니저이자 치프였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에서 일손을 돕던 그녀는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도쿄의 여느 장소와 다르게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일궈진 그 모습”이 좋았고, “맑은 날에는 투명하게, 비 내리는 날에는 부옇게, 구름 낀 날에는 차분하게, 한꺼번에 밝혀진 불이 귀엽게 빛나”는 것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에이코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일을 치르느라 피곤했는지 아니면 그 슬픔이 몸에까지 번졌는지, 그녀는 쓰러졌다.

식당에서 일하기 어렵게 된 에이코는 무지개의 오너 다카다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할 것을 제안 받는다. 고민을 하던 그녀는 ‘몸이 좋아지면 식당에서 일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고, 제안을 받아들인다. 오너의 집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오너의 아내는 남편과 달리 차가웠고, 집의 개, 고양이, 정원은 피폐해질 데로 피폐해져 있었다. 평소 살아있는 것을 좋아하던 에이코는 동물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고, 정원을 정성껏 관리하면서 집안 분위기를 바꾼다. 하지만 출산을 앞둔 오너의 아내는 개를 팔아버리고, 에이코는 그 집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다카다에 대한 연민을 느끼면서….

에이코는 타히티로 향한다. 자신이 애정을 품고 일했던 식당의 원천이기도 한 타히티는 그녀에게 치유의 공간이다. 섬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하든, 수영을 하든, 잠을 자든, 그녀를 포근히 안아 주었다.

마치 꿈같다. 마치 무지개를 보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세계에 일곱 가지 빛깔이 모두 들어 있다. 그리고 그 빛들이 서로 번지듯 가늘고 예쁜 리본 띠가 되어 한들한들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했다. (p. 17)
 


사진제공 민음사


1 대 무한대의 공간

‘타히티’는 ‘1 대 1 대응’이 무의미한 공간이다. ‘내가 하나 주면, 너도 하나 줘’란 세속의 공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란 말이다. 타히티의 하늘, 바다, 햇빛 그리고 무지개는 사람의 꼴에 상관없이 관대함을 선사한다. 타히티에서 에이코는 시공(時空)을 넘어 유년의 기억, 다카다의 정원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 그녀가 경험했던 할머니의 가게는 돈과 음식이 교환되는 공간 이상의 의미였다. “할머니 얼굴만 보아도 마음이 놓인다는 사람”, “엄마가 만든 생선찜이 먹고 싶다는 사람”, “간판 아가씨였던 나를 보러 오는 사람” 등 손님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찾아온다. 정원도 마찬가지다.

그 정원에 발을 디디면 나는 힘이 왕성한 장소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중심이 곧추서는 듯한 안정감을 느꼈다. 어느 틈엔가 새싹이 돋아나고 꽃망울이 맺힌 것을 보면 얼굴에 절로 웃음이 피었고, 그런 나날의 변화가 과장스러울 만큼 감수성을 자극한다는 것도 알았다. (…) 더불어 나 역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보살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p. 69)

지금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주고받는 것’을 뛰어넘는 공간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위안과 감동을 준다. 에이코가 타히티 섬에서 만난 자연에 대한 풍성한 감상, 그리고 동물, 정원, 다카다와 교감하면서 만난 경이로운 체험은 우리를 판타지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무지개>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남태평양의 화산섬 타히티를 여행하고서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그녀가 본 것은 바로 이런 위로와 충만함이 아닐까.

에이코가 머물었던 그곳에 가고 싶다. ‘기상’, ‘놀기, ’밥, ‘휴식, ’꿈나라’로 가득했던 유년시절의 생활계획표 달랑 한 장 들고 말이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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