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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세기》 - 우리는 경이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

 

 

 

케런 톰슨 워커 | 《기적의 세기》 | 민음사 | 2014

 

우리는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느낄 수가 없었다.
(... ...)
그 무렵 우리의 관심사는 날씨와 전쟁이었다. 지구의 자전 따위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먼 나라의 도시에서 쉴 새 없이 폭탄이 터졌다. 허리케인이 몰려왔다가 물러났다. 여름이 끝났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은 평소처럼 흘렀다. 초가 모여서 분이 되었다. 분이 모여서 시간을 이루었다. 그 시간들이 모여서 언제나 일정한 길이의 하루가 만들어 지는 걸 사람들은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11쪽)

 

어느 날부터인가 지구의 자전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 현상을 ‘슬로잉’이라 부른다. 슬로잉으로 인해 낮과 밤은 점점 길어진다. 일조량과 중력의 변화로 지구의 곳곳에서 예측했던, 또는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혼란과 불안에 빠진다. 캐런 톰슨 워커의 첫 번째 소설 《기적의 세기》는 그 시기를 겪어내는 열한 살 소녀 줄리아의 이야기다. 사춘기 소녀의 성장소설이지만 회상형으로 쓰인 만큼 또 다른 색조가 덧입혀 있다. 줄리아는 어떤 시기를 이미 지나보낸 사람이다. "익스플로어에 대한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나는 스물세 살이었다."(375쪽)는 말을 보면, 그녀는 대략 스물세 살 이상일 것이다. 소설 초반에는 사태의 진행을 이미 알고 있는 자의 시선이 설명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 시선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빼앗겼다. 간결한 문장 속에 돌이켜 보는 자의 담담함, 쓸쓸함이 묻어났기에. 이를테면 이런 문장. "그건 내가 마지막으로 먹은 포도였다." (247쪽)

 

몇 달 뒤, 미카엘라의 엄마는 별자리 그림을 펼쳐 놓고 슬로잉이 모든 사람의 별자리를 바꾸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운명이 바뀌었다. 사람도 달라졌다. 불운이 행운으로 바뀌었다. 행운이 불운으로 바뀌었다. 오랫동안 별자리에 새겨져 있던 사람들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다시 쓰였다. (66쪽)

 

잠자기가 어려웠다. 잠에서 깨는 것도 힘들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거리를 쏘다녔다. 지구는 날이 갈수록 점점 느리게 돌았다. 엄마가 양초와 생존요령이 적힌 책들을 사 모으는 동안 나는 다른 유형의 생존기술을 익혔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146쪽)

 

작가는 '슬로잉' 현상을 있을 법하게 구축해내었다. ‘슬로잉’이라는 명명은 제법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사회에서 한번쯤 외쳐보고 싶은 단어이기도 하니까. 슬로잉 현상이 계속되자 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가 정한 방침은 해가 뜨고 지는 것과 상관없이 하루 24시간 주기를 고수하는 것이다. 시계 시간제, 즉 클락 타임(clock time)은 학교, 관공서, 기업 등 빠른 협조에 힘입어 주류 정책으로 자리 잡는다. 이에 대해 반대하며 자연의 주기를 따르는 리얼타임 생활자들이 생겨난다. 사회는 어떤 시간 체계를 따르느냐에 따라 자연스레 두 집단으로 나뉘게 된다. 리얼타임 생활자들은 사막에 공동체 마을을 세우고 순리에 따라 생활한다. 작가는 인물의 입을 빌려 그곳을 ‘황금의 땅’이라 부르고 하나의 유토피아처럼 묘사한다. 여전히 도시에 남은 리얼타임 생활자들은 클락타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하기도 한다. 작가는 소설 속 소수인 리얼타임 생활자들 편에 서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느리고 자연 친화적인 삶이 진정한 삶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이라고 은연중에 내비치듯 다가왔다. 소설 후반부에서는 혼란에 빠져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거나 육체적 고통에 빠진 많은 클락타임 생활자들처럼 리얼타임 생활자들도 곤경에 처하게 된다. 별자리가 뒤바뀐 세계에서 살아가기란 어떤 생활방식을 유지하든 누구에게나 쉽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은 더 복잡하다. 《기적의 세기》는 하나의 커다란 조건에서 사회와 인간이 어떻게 반응하고 변해 가는지 지켜보는 관찰기로도 읽힌다. 줄리아는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변화를 주시하고 환경에 적응해 나가는 동시에 가족,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소하거나 심각한 일들 또한 헤쳐나간다.

 

그해 우리에게 닥쳐온 모든 이상한 현상들 중에서 세스 모레노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짤막한 질문, “같이 갈래?”만큼 나를 놀라게 한 건 없었을 것이다. (268쪽)

 

나는 커튼을 내리고 잠을 청했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햇빛이 카펫에 줄무늬를 그렸다. 옷장 위에서 자명종의 초침 소리가 났다. 새삼스레 초침이 빨리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딱, 똑딱, 똑딱. 몇 분이 눈 깜박할 새에 지나갔다. 몇 시간이 금세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뒤숭숭한 꿈을 꾸었다. 하루, 한 달, 일 년, 일평생... ... 모든 것이 끝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305쪽)

 

슬로잉은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여겨 돌아보지 않던 것들을 다시 보게끔 한다. 하늘을 나는 새, 저물어가는 하늘,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24시간으로 이루어지는 하루, 곧 시간을. 줄리아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전문가들은 인류에게 남은 시간이 몇 년밖에 안 된다고 전한다. 어른이 된 줄리아가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며 거듭 상기시켜 주었던 것은 ‘시간’이었다. 슬로잉이 곧 시간의 혼란을 가져왔다고 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러나 작가는 슬로잉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이야기를 가두지 않았다. 슬로잉 안에 시간 혹은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죽음 안에 슬로잉도 있다는 것이다. 슬로잉이 있기 전에도 누군가는 병으로 아팠고 그 병으로 결국 죽음을 맞았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은 슬로잉이라는 현상과 상관없이 이미 주어진 삶의 조건이다. 이 소설은 전 지구적인 거대한 소재를 다루지만 결국 인간의 유약함을 말하고, 개인의 감정을 돌아본다. 사적인 감정이 지구의 위기보다 절대 하찮지 않음을. 다행이었다. 줄리아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함께하기를 바라서. 점점 더 나빠지는 세계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건 그것 없이는 설명할 수 없다. 어떤 의미로든 아래의 저 말은 참이다.

 

“놀라운 시대야. 우리는 경이로운 시대에 살고 있어.” (136쪽)

 

오늘의 책을 리뷰한 'paper25'님은?

참 게으릅니다. 그게 꼭 나쁜가, 하고 생각해 보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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