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자'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3.12.16 《기억의 집》 - 그래도 살아
  2. 2013.05.09 [詩로 물드는 오후]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3. 2011.10.19 [詩로 물드는 오후]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4. 2010.10.01 [이슈와 추천도서] 가을이 오면, 나는 ‘나’를 읽고 싶어진다. (2)

《기억의 집》 - 그래도 살아

 

 

최승자 | 《기억의 집》 | 문학과지성사 | 1989

 

오래된 그녀의 말을 훔친다. 그녀인 듯 시인인 듯 나는 잠시, 다른 시간의 잔재에 나를 가져다놓는다. 그곳에는 어쩔 수 없는 절망과 나누어지지 않는 고통과 벗어날 수 없는 고독이 살고 있다. 그것들이 떠나지도 죽지도 않으면서 우글거리고 바글거리며 허약한 생(生)의 속살을 갉아먹고 있다. 그리하여 “일찍이 세계는/ 내 실패들의 전시장, 내 상처들의 쓰레기 더미.”(19쪽, ‘일찍이 세계는’ 중에서)가 된다.

 

어떤 아침에는, 이 세계가
치유할 수 없이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또 어떤 아침에는, 내가 이 세계와
화해할 수 없을 만큼 깊이 병들어 있다는 생각.

 

내가 나를 버리고
손 발, 다리 팔, 모두 버리고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숨죽일 때
속절없이 다가오는 한 풍경.

 

속절없이 한 여자가 보리를 찧고
해가 뜨고 해가 질 때까지
보리를 찧고, 그 힘으로 지구가 돌고……

 

시간의 사막 한가운데서
죽음이 홀로 나를 꿈꾸고 있다.
(내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이십 세기가 나를 모독한 것일까.) (20쪽, ‘어떤 아침에는’ 전문)

 

그러고도 세월은 흐르고, 그동안도 용케 살아냈으며 그러므로 기억들이 남는다. 그렇게 《기억의 집》은 다시, 남겨진다. “저 강 저 벌판을 돌아/ 내 청춘이 가”는 걸 목도하면서 “묻어다오, 헤매는 이 발목./ 흐르는 이 세계를./ 묻어다오.”라 간절히 애원하면서 “이런 詩를 훌쩍이”면서 그러나 “이런 詩를 훌쩍이기 위하여/ 시를 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 “청춘을 다 소비해버”(18쪽, ‘그날 이후’ 중에서)린 걸 통렬히 자각하면서 그러니까 “이제 가야만 한다”고 단단히 다짐하는 그날의 그녀를 열어,

 

때로 낭만주의적 지진아의 고백은
눈물겹기도 하지만,
이제 가야만 한다.
몹쓸 고통은 버려야만 한다.

 

한때 한없는 고통의 가속도,
가속도의 취기에 실려
나 폭풍처럼
세상 끝을 헤매었지만
그러나 고통이라는 말을
이제 결코 발음하고 싶지 않다.

 

파악할 수 없는 이 세계 위에서
나는 너무 오래 뒤뚱거리고만 있었다.

 

목구멍과 숨을 위해서는
動詞만으로 충분하고,
내 몸보다 그림자가 먼저 허덕일지라도
오냐 온몸 온정신으로
이 세상을 관통해보자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을 때
내가 더 이상 나를 죽일 수 없는 곳에서
혹 내가 피어나리라. (30-31쪽, ‘이제 가야만 한다’ 전문)

 

단연코 내게는 과장이 될 게 뻔한 그녀의 기억에 지그시 몸을 담궈 “깊고 깊은/ 오리무중의 밤”으로부터 그 밤이 “단지 애매하게 손가락을 쳐들어보일 뿐”“그곳을 향해” “의문을 찾아나서”“대답을 찾아나서”(58-59쪽, ‘희망의 감옥’ 중에서)는 그녀의 행보를, 그 비포장 길을 혹독히 걷고 또 걸어 끝내는 제 몸뚱이를 바꿔 “고통의 춤”마저 출 줄 알게 된 그녀의 어떤 도착을, 이렇듯 내가 숨죽여 지켜보는 사이에,

 

그리하여 이제 휘황한
고통의 춤은 시작되고,
슬픔이여 보라,
네 리듬에 맞추어
내가 춤을 추느니
이 유연한 팔과 다리,
평생토록 내 몸이
얼마나 잘
네 리듬에 길들여졌느냐. (89쪽, ‘고통의 춤’ 중에서)

 

내 기억의 집에도 기어이 한자리 차지하고 있는, “자칭” 절망이었고 고통이었으며 고독이었던 것들의 실제와 최후를 목격함으로, “살고 싶음의 뿌리 그리하여/ 살아 있음의 뿌리 되찾고 싶은”(66쪽, ‘아시는지’ 중에서) 마음까지를 빌려 이제는 “살아 있음의 내 나날 위에 무엇을 쓸 것인가./ 무엇을 더 보태고 무엇을 더 빼야 할 것인가.”(26쪽, ‘기억의 집’ 중에서)를 자문하게 된 나로 돌아와 “문득 내 얼굴을 확인하고 싶어/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어”(11쪽, ‘문득 詩가 그리워’ 중에서)보는 것이다.

 

그녀의 충고인 듯 명령인 듯 나는 한동안, 오래된 기억처럼 단호한 속삭임처럼 ‘그래도 살아’라 산 입을 움직여 중얼거리며.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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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물드는 오후]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 1984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오.


이 절망을 어쩔까요. 원한 적 없이, 냅다 주어진 목숨이 아닙니까. 나는 말이죠. 오늘도 어김없이 살아요. 어제는……, 말하고 싶지가 않아요. 잘 말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하지만 무엇이든 무엇으로든 말하긴 해야겠어요. 한 숟갈의 밥을 목구멍으로 또, 집어넣으며 나 홀로, 최초부터 이미 홀로인 그대로, 끼니때마다 이 몸을 배경으로 재상연 중인, 생(生)이라는 사태의 이 가혹한 몰골을. 그러니까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의 것도 될 수 없는 비유인 것으로, 그것은 그저 원초적인 결핍을 연거푸 들추고 착각과 망상에 근거한 상실에 젖게 할 뿐, 나  대신 밥을 먹어주지도 눈물을 삼키지도 못하는 무능력의 초능력자임을, 내 진작 알아 언제적부터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아야 했던 것을 “이제”서야 “이제”라고 마음먹게 하는 무책임으로 말미암아, 그래도 살아, 이것이 지속하는 생이 장착한 고도의 트릭이었던고로,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만 나는 기다리고.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마침내, 내 몸피에 갇힌 이 절망을 말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말로써, 팔과 다리가 꺾여 네 꽃병에 꽂힌 채로, 죽지 않고 살고 사랑함으로, 이 몸으로 절절히 절망을 체현해내도록. 그 정도는 나에게.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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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물드는 오후] 최승자, 외롭지 않기 위하여


 

 

최승자 | <이 시대의 사랑> | 문학과지성사 | 1999

 

외롭지 않기 위하여

 

외롭지 않기 위하여

밥을 많이 먹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하여

술을 조금 마십니다

꿈꾸지 않기 위하여

수면제를 삼킵니다.

마지막으로 내 두뇌의

스위치를 끕니다

 

그러면 온밤내 시계 소리만이

빈 방을 걸어다니죠

그러나 잘 들어보세요

무심한 부재를 슬퍼하며

내 신발들이 쓰러져 웁니다 

 

먹히지도 않는 밥을 꾸역꾸역 배가 터져라 먹었습니다. 그래도 밥은 맛있었습니다. 술은 마시지 않았습니다. 괴롭지 않기 위해 마신 술 때문에 더 괴로워질 것 같았거든요. 꿈꾸지 않기 위해 수면제를 삼키기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잘만 잤습니다. 마지막으로 두뇌의 스위치를 꺼야 하는데, 그것만은 되질 않았습니다. 낑낑 거리며 내린 스위치는 오뚜기처럼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잠을 잤습니다. 그것만이 두뇌의 스위치를 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요.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고, 어제인지 오늘인지 내일인지도 모르고 잤습니다. 자는 동안에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자다가 잠시 눈을 뜨는 순간마다 어김없이 스위치는 켜졌고, 끈질기게 따라붙는 생각들은 꿈에까지 따라오려 했습니다. 새벽에 잠깐 눈을 떴습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눈만 깜빡거려 보았습니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집안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는 부지런한 시계 뿐이었습니다. 시계는 한 박자도 틀리지 않고 째깍째깍 소리를 냈습니다. 외로움도 괴로움도 모른다는 듯 얄밉게도 시침과 분침은 나란히 또박또박 제 갈 길을 갔습니다. 괜히 기분이 상한 나는 다시 눈을 감았습니다. 글쎄요, 내 신발들도 쓰러져 울었을까요? 무심한 부재, 를 슬퍼했을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내 대신 무심한 부재,를 슬퍼해주고 울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 컨텐츠팀 에디터 료(fololy@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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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추천도서] 가을이 오면, 나는 ‘나’를 읽고 싶어진다.

 

오랜만에 모두에게 찾아온 긴 연휴를 지내고 나니, 이제 완연한 가을이 와 있는 듯합니다. 번잡한 마음을 추스르고, 몸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있지만, 공연히 창밖으로 애꿎은 시선을 보내게 되는 건, 비단 저만이 아니겠지요. 늦은 밤 평소에 좋아하던 음악을 틀어놓고 마냥 뒹굴어도 좋겠고, 느긋하게 "책상 앞에서 詩集들을 뒤적이"며, "詩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어오"르는 걸 보아도 좋겠다, 생각합니다. 한 해의 반 이상을 꼬박 살아낸 우리가, '가을은 낭만의 계절'이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핑계삼아 스스로에게 얼마간의 여유를 주는 것도, 저물어가는 해年와 함께 스스로를 정리할 수 있는 작은 시작이 될 테니까요.

 

 

 

 

「어떤 풍경」

 

고요한 서편 하늘

해가 지고 있습니다

건널 수 없는 한 세계를 

건넜던 한 사람이

 

책 상 앞에서 詩集들을 

뒤적이고 있습니다

 

그가 읽는 詩의 행간들 속에서

고요가 피러오릅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時間의 무상함

 

(어떤 사람이 시간의 詩를

읽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문학과 지성사, 2010, 65쪽 

  

“시집들을 뒤적이”는 일은, 이제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내 안의 언어를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내 안에 있었지만, 그에 맞는 언어를 갖지 못했던, 어떤 감정과 생각들의 맨얼굴을 보고 싶을 때. 내가 나를 설명하지 못하는 무능력을 절감할 때. 그때야 비로소 추상과 이미지로 열려 있는 시의 세계가, 객관에 지배되는 일상의 우리에게, 간절한 필요로 다가오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일상적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 방향을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전에서 위험으로."  -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문학동네, 2001

 

늘 보고 듣고 느껴왔던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해, 그 생경함으로 '사실'과 '안전'의 지대에 안착한 일상을 뒤흔들고, 자발적인 혼란에 처하는 일. 그게 바로, 시를 읽고, 시에서 타인을 읽으며, 타인을 통해 다시 나를 읽는 방법이 아닐까요. 그러나 '시 읽는 철학자' 강신주가 강조해 말하듯, 이와 같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 "삶을 낯설게 하는" 것은 비단 예술과 시의 역할만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일상적 세계를 동요시키고 낯선 세계를 도래시키는 힘"은 "개념들을 창조하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엮음으로써 새로운 사유 문법을 만드는" 철학 또한 충분히 지니고 있는 것일 테니까요.

 

그러니 이 '가을의 낭만'이 자연스럽게 추동하는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를 위해,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을 그리고 있는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가을의 낭만에 기대어 내 자신을 설명해줄 언어를 찾아 헤매다 만난 이 책을 권합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이즈음이 되면, 그 사이 무감하고 무던해져 버린 일상 속에서, 작년 이맘때쯤과 다른 '오늘의 나'를 찾고 싶어지는 모든 분들에게.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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