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12.23 《고래》 - 천명관을 처음 만났다
  2. 2014.01.24 [서점에서 만난 사람] 함께 살고싶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집 -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출간 기념 간담회

《고래》 - 천명관을 처음 만났다

 

 

천명관 | 《고래》 | 문학동네 | 2004

 

천명관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답니다. 꽤나 유명한 소설가인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이라는 말에서 오는 기대와 설렘보다는 오히려 밋밋하고 그저 그럴 것이라는 편견이 먼저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처음'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대개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한 짜릿한 설렘을 느끼게 마련인데 말이죠. '첫눈', '첫사랑', '첫키스' 등 처음으로 시작되는 이런 숱한 말들은 그 흔함과는 별개로 각별하고도 강렬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처음'이라는 말은 가장 보편적인 언어인 동시에 가장 개별적인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러한 개별성 때문인지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첫'경험은 항상 새롭고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워 듣게 됩니다. 어쩌면 '처음'은 가장 진부한 주제인 동시에 언제나 새로운 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기도 전에 느꼈던 한국 소설에 대한 편견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고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묘하게도 천명관의 소설 《고래》는 그가 쓴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군요.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그럴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은 기존의 한국 소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지요. 뭐랄까, '신선하다'고 하면 식상하고, 이게 과연 소설이라는 장르에 제대로 속하기나 할까 의심부터 드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파격의 연속이지요. 그는 형식 밖의 형식으로 자신만의 글(또는 소설)을 쓴 셈입니다. 

 

그의 이력이 궁금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국어국문학이나 문예창작과를 전공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내가 어느 시점에서 한국 소설과 멀어진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만 보였던 창작 분야에서마저 산업화의 영향은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소설이라는 특정 형식은 판에 박은 듯 일정하고 내용만 조금 달라진 수많은 소설이 쏟아졌던 거지요. 제 눈에는 그게 그거인 듯 보였고, 심지어 일정한 생산 설비에서 자동으로 뽑혀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내가 한국 소설에서 멀어졌던 게 아마 그때부터였던가 봅니다.

 

이따금 궁금하기는 했어요. 그럴 때면 어려서부터 눈에 익은 유명 작가의 작품에만 손이 가더군요. 그마저도 없으면 일본이나 서구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되었고요. 그러다가 최근 유행하는 한국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된 것도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천명관의 《고래》였습니다. 말하자면 《고래》는 나로 하여금 한국 소설과 재회하게 한 첫 소설인 셈입니다.

 

아, 천명관의 이력이 궁금했었다는 말을 해놓고 그에 대한 설명이 없었군요. 늘 이런 식입니다.  두서가 없지요. 다들 예상하겠지만 그가 이 세상에 《고래》를 내놓기 전 그의 (작가로서의) 이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가다판을 전전하다가 영화의 세계로 뛰어들었던 것이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말입니다. 그가 소설 같지 않은(그래서 더욱 놀라운) 소설 《고래》를 쓸 수 있었던 것도 틀에 박힌 교육을 받지 않았던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 《고래》는 긴 겨울 밤 시커먼 남정네들이 행랑에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을 때, 작가가 투명인간이 되어 그들 몰래 방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를테면 허풍과 현실이 한데 섞여 서로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음담패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그러면서도 한국 근대사가 교묘히 섞여들어간, 때로는 '가량맞다'와 같은 순 우리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소설입니다. 설화나 전설, 신화가 아닐까 의심하는 순간 작가는 불쑥 '독자 여러분!'을 외치며 등장하기도 합니다.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말입니다. 그 말에 놀란 독자는 '아, 맞아.  이건 가상현실이지.'하며 안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군은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그는 자신이 다시 선출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정적들은 더욱 거세게 그를 압박해왔고 민심은 그를 떠난 지 오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영원히 집권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법률을 공포한 것이었다. 그것은 독재의 법칙이었다." (351쪽)

 

이런 터무니없는 소설이 어떻게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일까요?  그것이 비단 작가의 글솜씨나 소설로서의 파격에만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뻥과 허풍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살짝 비껴간 듯하면서도 결코 현실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그들의 말, 그들의 삶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덕과 법의 테두리 속에 존재하는 삶이 난데없는 뻥과 결합했을 때 우리가 받는 느낌은 비현실이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재미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로 합쳐 흐트러짐 없는 서사로 엮어낸 작가의 능력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은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그들만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구요.

 

아무튼 소설 《고래》는 기존의 소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것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소설의 태생이 그렇듯 뒷골목의 이야기를 일정한 형식에 담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발상은 작가 천명관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들이 뭐라 하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내려간 까닭에 독자는 규칙에서 해방된 듯한 자유를 느끼고 그의 뻔한 허풍에 웃음을 짓게도 됩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탈 없이 이야기가 꾸려지는 게 신기하지요?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 강제로 이끌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규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우리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듯 자유로운 소설에 무수히 많은 법칙이 등장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작가는 소설 중간중간에 말도 안 되는 법칙들을 갖다붙여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이 다큐가 아닌 예능으로 읽히도록 강제하는 듯합니다.  예컨대 '구라의 법칙', '권태의 법칙', '생식의 법칙', 아랫것들의 법칙', '구호의 법칙', '흥행업의 법칙', '논쟁의 법칙', '고용의 법칙', '사랑의 법칙' 등 법칙이란 법칙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즈음에는 청산유수로 쏟아내는 그의 말솜씨에 세 여자가 모두 넋을 잃어 국이 졸아붙는지 밥이 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것은 구라의 법칙이었다." (140쪽)

 

사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별 의미도 없지만 천부적인 입담꾼 천명관의 손에서 펼쳐지는 글의 얼개는 국밥집 노파와 금복, 금복의 딸 춘희로 이어집니다. 읽는 독자에 따라 금복을 주인공으로 또는 그녀의 딸 춘희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소설 속 무대인 평대를 중심으로 이재에 밝은 금복은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부자가 됩니다.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된 셈이지요. 그것은 순전히 한을 품고 죽은 박색 노파의 재물을 손에 넣었기 때문인데 결국 금복은 그 죽은 노파로 인해 파국을 맞게 됩니다.  산골 출신의 한 소녀가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내달리는 모습입니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271쪽)

 

금복이 지었던 고래를 닮은 영화관은 그 상징성이 남다릅니다. 영화라는 가상현실, 그 덧없음은 우리가 욕심내는 어떤 것도 스크린의 그것처럼 허망한 것임을 말하는 듯합니다. 결국 금복은 영화관과 함께 불에 타 죽게 됩니다. 방화범으로 몰린 벙어리 춘희는 자신에 대한 변명도, 결백에 대해 주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매섭고 긴 옥살이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장한 육체 하나에 의지하여 간신히 버틸 뿐입니다. 순진하리만치 미련한 춘희, 남에게 해코지 할 줄 모르는 춘희도 결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을 보면 이 소설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주제로 집약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301쪽)

 

천명관의 《고래》는 내가 그동안 줄곧 생각해왔던 한국 소설에 대한 이미지를 단박에 깨트린 작품이었습니다. 나는 어쩌면 천명관이라는 작가로 인해 한국 소설에 대해 기대와 흥미를 한동안 품고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첫눈에 대한 막연한 기대처럼 설레는 것일 테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12월의 서평 주제는 '처음'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각자의 '처음'을 책과 함께 떠올려 보세요.

'오늘의 처음'으로 생생히 떠오르길 바랍니다.

 

│ 펜벗 일문일답

 

《고래》로 인하여 그동안 가졌던 한국 소설에 대한 이미지가 깨졌다고 했어요. 기존에 갖고 있었던 한국 소설에 대한 이미지라는 것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려준다면요.

 

뭐랄까, 기발하다거나 독특하다고 느낄 만한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았었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멀어졌고요. 일단 그런 생각이 들면 마음에 드는 다른 소설을 찾아보려는 노력이나 수고 하는 것이 부질없다 생각하게 마련이죠. 다 그게 그거라는 편견이 자리 잡았다고 할까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한국 소설에 기대하는 바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개인적인 바람이나 한국 소설을 통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기존에 보지 못했던 창의적이고 독특한 소재를 다룬 파격적인 소설을 기대합니다. 예컨대 한국 소설은 빠르게 변하는 사회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뒤처진다는 느낌이 강했었죠. 저만 그렇게 느꼈을까요? 게다가 표현에서도 작가가 의도적으로 순화하거나 두루뭉술 넘어가려는 모습이 많았거든요. 특히 성애의 장면이 그렇죠. 작가가 판단할 때 어떤 장면의 세밀한 묘사가 작품에 꼭 필요하다 느끼면서도 대충 넘어가는 것은 솔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그렇다고 일부러 성적인 묘사를 많이 다룰 필요는 없겠지만 말이죠.

 

금복이 ‘고래’에게 강하게 매료되었던 것처럼, 꼼쥐1님에게도 지금껏 그토록 강력하게 매료되었던 대상이 있었는지요. 한 가지를 꼽는다면요.


저는 참 무미건조한 사람입니다. 딱히 어떤 대상에 애착을 갖는다거나 매료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실이나 이별에 대해 지나치게 염려하여 미리 방어막을 쳐왔다고 생각해요. 물론 어렸을 때 가정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여 내 소유의 어떤 물건을 가져보지 못했던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요. 그런 까닭에 성인이 되어서도 물건에 대한 애착은 생기지 않더군요.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아요.

 

요즘 무슨 책을 읽으세요?


그동안 일부러 외면하거나 등한시했던 베스트 셀러 작품을 챙겨 읽고 있어요. ‘올해의 책’ 목록에 오른 작품을 위주로 보고 있죠. 책에도 어떤 유행이나 트렌드가 있어서 그것을 마냥 무시하며 내 나름의 독서를 고집한다는 것도 조금 우스워 보이거든요. 연말이면 대개 그랬던 것 같아요.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못 읽고 지나쳤던 책이라던가 제 취향은 아니지만 독자에게 사랑받았던 작품을 주로 읽게 됩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꼼쥐1'님은?

책을 사랑하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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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함께 살고싶은 한국문학의 새로운 집 -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출간 기념 간담회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혜원
사진 제공 | 문학동네

 

같은 책이라도 전집(全集) 안에 들어가면, 새로워 보입니다. 책의 새로운 터전 같다고나 할까요? 위대한 문학전집이 세상에 나오면, 이 땅에 훌륭한 집 한 채가 지어진 것 마냥 우두커니 바라보는 일부터 시작합니다. 자꾸 보면 살고 싶어지는 것이 집입니다. 책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훌륭한 전집일수록 전부 다 모으고 싶죠. 그래서 전집은 ‘샀다’는 말보다 ‘장만했다’는 말이 더 어울립니다.

 

 

세계문학전집과 한국고전문학전집을 출판한 문학동네에도 새집이 들어섰습니다. 하얗고 튼튼한 스무 권의 책들입니다. 김승옥의 단편 10편이 수록된 1권부터 2009년에 나온 박민규의 <카스테라>까지. 스무 권을 아우르고 있는 시대는 사실 모호합니다. 문학동네의 신형철 편집위원은 한국문학전집의 발간을 기념하며, 선정 기준을 밝혔습니다.

 

 

 

 “’문학성’입니다. 문학동네가 소설을 출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신뢰하는 기준은 ‘서사의 힘’입니다.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이야기가 밝혀서 보여줄 수 있는가.” 그리고 작품이 어느 정도 독자들과 소통했는지, 한 시대의 사회적 징후를 대표적으로 보여줬는지 하는 ‘문제성’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박완서를 읽고 자랐고, 모두가 박완서를 읽으며 세월을 났다.” (400쪽)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의 세 번째 책, 박완서의 대표 중단편선 <대범한 밥상>에 쓰인 문학평론가 차미령의 해설입니다. 세월을 함께한 책을 전집으로 다시 보는 기분은 어떨까요?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은 2014년에 나온 ‘새 책’이기도 합니다. 이 전집을 계기로 누군가는 한국문학 입문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을 통해 ‘한국문학이 이런 거구나.’라고 처음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세대의 한국문학 독자, 한국문학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문화가 우리 사회 속에 정착되도록 하는 게 문학 출판사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종연 편집위원의 바람이 문학동네가 한국문학전집을 출간하는 중요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우선으로 발표된 스무 권 외에 앞으로 전집에 입주 예정인 이웃도 궁금해집니다.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문학동네 편집위원들은 자신감 있게 입을 모았습니다. “전집을 만든다는 것이 기존에는 정서를 확정 짓는 대단히 권위적인 작업이었습니다. 문학동네는 좀 더 동시대 독자들과 호흡할 여지를 많이 남기고자 합니다. 조금 더 유연하게. 어떤 작품은 전집으로 묶기엔 조금 낯설 수 있어요. 하지만 동시대의 작품 중 앞으로 어떤 것이 한국문학전집에 포함될 것인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서 누군가는 맨 처음 기준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모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문학동네의 자신감 표현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한국문학전집을 장식하는 표지에는 한강 사진이 있습니다. 낯선 풍경의 한강을 아름답게 찍는 이대원의 사진입니다. 문학동네가 기록할 한국문학전집의 역사가 한강의 물결을 따라 굳세게 흘러가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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