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5.02.10 『아내의 빈방』 -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2. 2014.12.18 《킹》 - 짖는 법을 잊었네
  3. 2014.12.15 2014 미결산 도서
  4. 2009.09.22 편지로, 그대 숨결을 느끼다 - <A가 X에게>

『아내의 빈방』 -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버거, 이브 버거 | 『아내의 빈방』 | 열화당 | 2014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오직 나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도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누군가 사라지면 그 자리는 영원히 빈 공간이 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 그곳에서라도 그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말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떤 이는 그런 시간을 오래도록 지속한다. 누구도 그 시간을 방해할 수 없다. 충분한 애도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당신은 사 주 전에 죽었지. 어젯밤 처음으로 당신이 돌아왔다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없어진 자리에 당신의 존재감이 돌아왔다고나 할까.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론도」 2번(작품번호 51)을 듣고 있던 중이었소. 구 분 남짓한 동안 당신은 그 ‘론도’였고, 그 ‘론도’가 당신이었지. 거기에는 당신의 밝음, 당신의 고집, 당신의 치켜 올라간 눈썹, 당신의 부드러움이 들어 있었다오. (10쪽)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존 버거의 글은 부드러운 햇살처럼 쏟아진다. 마치 그 햇살로 아내를 안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사십 년을 같이 산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분명 아내는 죽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곁에 존재한다.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을 때,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함께 있다. 만질 수 없는 형체로, 볼 수 없는 형상으로, 대답이 없는 메아리로.

당신을 유심히 보면, 길을 찾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섬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오. 모자를 쓰거나 코트를 입은 모습, 머리를 만지는 모습, 문을 여는 모습, 돌아서서 나가는 모습. 당신은 길을 찾는 사람이오. (13쪽)

우리는 종종 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 잊는다.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생생했던 세포는 긴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져 꺼내지 않는 옛 이불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당신을 기억하는 일이 새삼 힘들다. 무엇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예정된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존 버거는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뒤돌아보고 있소. 그리고 당신이 그런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당신은 시간을 벗어난 곳에,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으니 말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31쪽)

존 버거와 그의 아내 베벌리 버거가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며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아내의 물건에 담긴 아내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자 노력했을 존 버거. 점점 사라지는 아내를 향한 눈빛은 얼마나 애틋했을까. 화수분 같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잊힐 수 없다. 아들 이브 버거에게 전해졌을 사랑은 감히 그 크기를 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지속된다. 어쩌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나밖에 없다는 말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당신이 살고 있다면 말이다.

엄마가 어디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엄마의 몸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요. 잠시 후면 저희가 고른 돌멩이가 엄마 무덤 위에 놓이겠죠. 흙과 풀 사이에 놓은 텐데, 그러면 아름다울 거라고 믿고, 또 그러기를 바라요. (35쪽)

애도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랑하는 방법이 그렇듯이. 아내의 빈방은 존 버거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이 얇은 책에는 사랑이 전부 담기지 않는다. 부재 속에 존재하는 ‘당신’이라는 사랑을 살 뿐이다.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아내의 빈방』은 어떻게 읽게 되셨어요?

존 버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아내의 빈방』을 만났어요. 개인적으로 제게도 2014년은 죽음과 상실을 벗어날 수 없는 해였기에 더욱 마음이 닿았습니다.

● 오랫동안 서평을 써 온 선인장님에게 ‘서평’은 특정한 활동이 아니라 이미 일상의 일부 같아 보입니다. 서평은 처음에 어떤 계기로 쓰게 되셨어요?

그저 독후감으로 시작된 메모였습니다. 분명 읽었지만 모든 책을 소장할 수 없기에 나중에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책에 대한 애정의 작은 표현이랄까요. 정작 지금은 좋은 책에 대해 쓰지 못하고 있네요.

● 평소 한국문학을 즐겨 읽으시죠. 『아내의 빈방』과 함께 읽으면 좋을 한국문학 작품도 추천해주시겠어요?

같은 주제라 할 수 없지만 이런 책들이 떠오릅니다. 김선우의 『물의 연인들』, 한강의 『검은 사슴』, 윤대녕의 『누가 걸어간다』, 서영은의 『꽃들은 어디로 갔나』, 박범신의 『외등』이요.

●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잡았는데 감기 때문에 쉽지 않네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선인장'님은?

그저 폭넓은 책읽기를 꿈꾸며 책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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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 짖는 법을 잊었네

 

 

존 버거 | 《킹》 | 열화당 | 2014

 

《킹》은 노숙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킹은 그들 중 어느 한 부부와 함께 사는 개의 이름이고, 소설은 개의 시선에서 쓰였다. 존 버거는 화자 킹이 '개'라는 것에 군데군데 균열을 놓았다. '인간'의 존재 자체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앤디 메리필드가 쓴 《존 버거(John Berger)》에 따르면, 존 버거는 이 소설을 스페인 알리칸테 지방의 노숙인 거주 지역을 본 후 썼다고 한다. 소설에 묘사된 이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인정받지 못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거처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숙인의 개념과는 다르다. 사실, 잘 모르겠다. ‘노숙인’의 정의를 한번 살펴보면,

 

"우리나라에는 노숙인에 대한 공식적인 개념정의가 없다. 노숙인은 19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부각된 용어로 부랑인과 유사하게 사용되어 왔다. 노숙인은 말 그대로 일정한 숙소가 없어 거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정의를 내리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서 다양하게 정의된다. 국제연합(UN)은 노숙인을 ‘집이 없는 사람과 옥외나 단기보호시설 또는 여인숙 등에서 잠을 자는 사람’, ‘집이 있으나 UN의 기준에 충족되지 않는 집에서 사는 사람’, ‘안정된 거주권과 직업과 교육, 건강관리가 총족되지 않은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노숙인', homeless person)

 

이 자료의 다른 부분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서울에 특히 노숙인들이 많은데 그 이유가 "생활하기 편하고,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라는 문장이다.

 

얼마만큼 넘나들 수 있으며, 얼마만큼 당신을 체감하고 체화하면 당신이 될 수 있을까. 번역된 존 버거의 책을 대부분 읽은 입장으로서, 이 소설의 초점은 '노숙인'에 맞춰져 있지만, 그의 글쓰기가 행하는 시선은 세상의 모든 하위계층에 가 있다는 것을 알겠다. 자신을 보편적인 존재로 여기게끔 억압하고, 그것에 공모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사회가 얼마나 많은 목소리와 존재들을 은폐한 뒤에 세워진 삐뚤어진 세계인지. 그리고 온전히 낮은 곳의 그들이 된 존 버거가 얼마나 미려한 문장으로 그 목소리를 조용히 읊어주는지.

 

비코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저들의 실수야. 킹, 들어 봐! ... 실수는, 킹. 적보다 더 미움을 받는 거야. 실수는 적처럼 굴복하지 않으니까. 실수를 물리치는 일 같은 건 없는 거야. 실수는 있거나 없거나 둘 중 하나인데, 만약에 있다면 덮어야만 하지. 우리는 저들의 실수야, 킹. 그걸 잊으면 안 돼" (190쪽)

 

그들의 거주 지역인 생 발레리의 노부부 비코와 비카. 비코는 자신의 조상이며 위대한 근대인이라 일컫는 잠바티스타 비코(Giovanni Battista Vico, 1668~1744)를 여러 번 인용한다. 비코는 이렇게 말한다. "라틴어에 '후마니타스'라는 말이 있는데, 서로 도우려는 사람들의 성향을 일컫는 거야. 우리 조상님은 말이다. 킹, '후마니타스(humanitas)'라는 단어가 '후마레humare)'라는 동사에서 온 거라고 믿었다. '묻다'는 뜻이지.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거 말이야. 인간성이라는 건, 그분의 생각에 따르면, 죽은 사람들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거였어."(95쪽) 라틴어 '후마니타스'는 인간성, 인간애, 인류애를 뜻한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시작에 관한 최초의 철학자'라고 존경을 표했고 이성이 낳는 야만에 대해 경고했던 잠바티스타 비코, 그는 인간 역사의 발전 과정이 '신적 · 영웅적 · 인간적' 단계를 거친다고 설명했다. 존 버거의 비코는 잠바티스타 비코를 인용하면서도 하나의 단계를 더 추가한다. 신 · 영웅 · 인간의 시대, 다음에 개의 시대가 온다는 것이다. "이 리르코시(I ricorsi, '짖다', '항의하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옮긴이)!" (164쪽) 비코의 말에 따르면 후마니타스, 인간의 시대는 끝난 것이다. "'후마레(humare)'는 킹, '묻다'라는 뜻의 라틴어인데 이제 사라져 버렸단다. 새 단어는 '박살내다'야. 박살내다. 박살, 완전히 보내는 것.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박살 내 버리는 거지." (191쪽)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존중이 살아있는 사람을 묻고 은폐하고 박살내어 버리는 것으로 바뀌는 시대. 인간의 시대는 끝났고, 개의 시대가 시작한 셈이다. "자유를 약속하고 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인간을 죽이고 모든 것을 앗아 가 버리는"(192쪽) 야만 사이에 역사가 있었고 진행 중이다. 이 시대의 야만은 감각뿐 아니라 생각 자체에까지 침투했기 때문에 더 사악하고 잔인하다.(192쪽) 그들은, 그들의 '실수'인 하위계층을 묻고 은폐하여 스스로 공모하게끔 했다. 인간을 존중하는 인간과 인간을 박살내는 인간 사이에서 고개를 돌리며 그들이 되어왔다. 야만의 무리는 무수히 발견되는 그들의 '실수'에 쉽게 고개를 돌린다. 앞서, 서울에 특히 노숙인들이 많은 이유가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라는 문장을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 나는 이미 그들이며, 오래지 않아 그들의 실수가 될 것이다.

 

개의 시대, 짖고 항의하는 시대. 다시, 얼마만큼 당신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얼마만한 의지로 가능한 것일까. 손쉬운 감정이입을 통한 어쭙잖은 이해와 공감의 폭력을 경계하며, 자신을 죄인이라고 어림잡는 무거움을 탈피하면서 얼마나 당신이 될 수 있을까. 모든 어려운 질문들. 옮긴이 김현우 선생께서 번역 인세 전부를 노숙인 복지시설에 기부하였다는 사실과, 존 버거의 이 문장을 빌릴 수밖에. "말의 이중성. 아니, 다시 말해야겠다. 모든 세 번째 말은 적어도 가슴에서 나온다." (207쪽)

 

"잠시 후 자신이 짖고 있다는 것도 잊고, 그제서야 다른 사람들의 소리가 들린다. 합창처럼 들리는 짖는 소리. 그 누구도 변하지 않았고, 제각각 또렷하게 들리지만, 너무나 또렷해서 가슴을 찢는 소리. 그 짖음은 이제 무언가 달라졌다고 말하다. 이렇게, 우리가 여기 있어! 라고. '우리 여기 있어!'라는 그 말이 거의 죽어 있던 기억을 깨우고, 그 기억이 밤바람에 다시 불꽃을 피우는 재처럼 살아나고, 함께 있었던 기억, 두려움, 숲, 음식에 대한 기억도 되살아난다. 그들이 거기 누워 짖고, 그 짖음에서 나는 그들의 이름을 듣는다. 사냥개 대니, 요아킴, 솔, 말락, 애나, 알폰소, 스피츠 리베르토, 보잉의 먼지 더미 속에 웅크리고 앉은 그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 내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듯이. 우리는 모두 똑같았고, 모두 짖고 있었다." (204쪽)

 

오늘의 책을 리뷰한 ‘soumas’님은?

얼마나 당신이 될 수 있을지, 또 당신과 연결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때로 시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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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미결산 도서


 

 

2014 미결산 도서

 

곳곳에서 시상식으로 분주한 걸 보니 역시 연말입니다. 다수의 매체가 올해 ‘최고의 책’을 가르고 있습니다. 덮어놓고, 지금 잠깐 여기에 있는 네 권의 책을 되짚어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 출간되었고, 최고로 잘 팔리진 않았지만, 오늘날 분명 필요했던 책입니다. 다시금 보시고, 내년을 헤아리는 건 어떨지요.

《그의 슬픔과 기쁨》은 올해의 온도를 어느 정도 높였습니다. CBS 라디오 PD 정혜윤은 ‘선도투’라 불리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26인의 시간을 기록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가장 뜨거웠던 순간 곁으로 바짝 다가서서요. 해고된 노동자들은 슬픔을 기쁨으로 치환했습니다. 그들은 절망의 밑바닥에서 다시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으로 몸소 올라왔습니다. 나 외에 다른 인간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해 보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그들을 보고 궁금해졌습니다.

《킹》은 한 도시에서 부조화를 이룬 노숙인의 삶을 섬세히 그려낸 작품입니다. 존 버거는 스페인 알리칸테 지방에 있는 노숙인을 관찰한 후 1999년에 이 소설을 썼다고 합니다. ‘킹’이라는 개는 노숙인의 삶을 지긋이 바라보고는 끊임없이 울부짖었습니다. 킹은 “파괴를 견디고 살아남은 자, 혹은 견디고 살아남은 물건만이 다음 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고 말합니다. 무기력하고, 참을 수 없었고,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무참했던 한 해, 절실한 마음으로 거듭 펼쳐 읽을 책이었습니다.

《나를 고백한다》에서 피에르 바야르는 자신을 극한 상황으로 모질게 몰고 갑니다. 충격적인 상황, 전쟁, 대학살, 삶의 갈림길에서 확연히 변할 ‘나’, 잘 모르고 있던 자신의 일부를 자세히 살피고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자기의 핵심에 있다는 그 비밀스러운 씨앗이 없는 걸까? 분노를 구체적인 행동으로 탈바꿈시켜줄 에너지를 끌어낼 수 있는 선택 받은 소수만이 가진 그 씨앗이?” 올 한 해, 다른 존재도 아닌 하필 인간이어서 무력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의 고통만이 유난히 가여워 보였습니다.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비정상화된 세상에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으로 살길 바라며, 다시 꺼내 볼 책입니다.

《노인으로 산다는 것》에서 노인 장 루이 세르방 슈레베르가 말합니다. “노인은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미래를 보여주니까요. 부당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불평은 그만두고 다른 사람들이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됩시다.“ 2014년은 어른이 그르쳤기에 더없이 불쾌했고, 어른의 잘못을 감내해야 할 아이들이 처량했던 한 해로 기억될 것입니다. 어른다운 어른, 사회가 받아들여야 마땅한 노인을 그리며 읽을 책입니다.

2014년,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연관 도서

 

   

 

| Editor_정혜원

hyewonjung@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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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그대 숨결을 느끼다 - <A가 X에게>


 

존 버거, <A가 X에게>, 열화당, 2009


몸이 조금씩 아파오는 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내가 약국을 다녀올 수도 있었지만, 이미 옷을 갈아입은 뒤라 조카들에게 약 이름을 알려주고 심부름을 보냈다. 집 근처에 약국에 세 군데 있어서 설마 못 사올까 싶어서 안심하고 보냈는데, 휴일이라 그런지 모두 문이 닫혔다며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근방의 약국들이 한꺼번에 문을 닫으면 다급한 사람은 어쩌라는 건지, 잠시 푸념을 한 뒤 헐레벌떡 뛰어온 조카들에게 수고비 500원을 쥐어 주고(배분은 알아서 하겠지.), 읽다만 책을 펼쳤다.

굳이 안가도 되겠다 싶은 약국을 조카들을 시켜서 가게 한 것은 존 버거의 소설 속 인물  아이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곳에서 아이다의 환영을 보게 될까봐. 조카의 손을 거쳐 내게 도착한 약에서 혹시나 그녀의 손길을 느낄까 그녀를 나의 현실로 끌어 내렸지만, 그런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다. 다른 약국을 간다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진탕 아파 버렸다. 데굴데굴 구르고, 토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나니 정신이 몽롱했다. 오전 근무만 하고 집으로 돌아와 내리 몇 시간 동안 잠만 잤는데도 아픔은 가시지 않고, 배는 고프고, 생각은 한정돼 버리는 것에 상실감을 느꼈다.

누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에 책을 꺼내 읽었다. 손에 쥔 책을 다 읽었음에도, 어제 읽은 존 버거의 소설 속의 아이다란 인물이 자꾸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다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를 컴퓨터 앞으로 이끌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남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 그녀가 한 남자에게 쓴 편지들이 묻힌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감옥에 갇힌 남자, 편지하는 여자

아이다는 감옥에 갇힌 한 남자에게 편지를 쓴다. 남자는 반정부 테러 조직을 결성했다는 혐의로 이중종신형(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고, 죽은 나이만큼의 기간 동안 시신을 감옥 밖으로 내올 수 없다는 형벌.)을 받을 사비에르라는 청년이다. 새 교도소가 들어서면서 73호 감방에서 머물렀던 마지막 수감자. 협소한 수납 칸에서 아이다가 보낸 편지가 발견된다. 이 책에는 부치지 않은 편지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 경위는 밝히지 않고 사비에르가 정리한 순서그대로 실려 있다.

아이다는 비교적 차분한 어투로 사비에르에게 편지를 쓴다. 격정에 휩싸여 쓴 편지는 종종 붙이지 않았지만, 이중종신형을 당한 남자에게 쓴 편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차분하다. 자신의 일상을 토대로 그와의 추억을 기록해 가는 그녀는 담담해 보인다. 그러나 다양한 언어로 애칭을 바꿔가며 애정을 표시하고, 편지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사랑해요’라는 표현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흔히 볼 수 있는 연애편지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아이다와 사비에르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회도 허락되지 않고, 결국 유일한 교류 수단은 편지 밖에 없다.

돌아올 수 없는 이에게 쓰는 편지란 어떤 기분일까. 오래 전,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그리움을 가득 담아 편지를 쓴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이다의 먹먹한 기분이 조금은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휴가, 면회, 제대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반면 아이다는 그 모든 것이 단절된 상태고, 강제로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밖에 전할 길이 없다. 편지 안의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 내재된 그리움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편지 속의 그리움은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처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사비에르가 어떠한 연유로 잡혀갔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지만, 혼란스러운 국가, 억압당하고 강제성을 띠는 인권,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두려움은 늘 감지된다. 그녀도 어떤 활동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저자의 설명대로 숨겨진 의미를 찾기란 어렵다. 사비에르를 향한 그리움, 거대한 집단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한 인간과 무리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숨이 차오를 지경이다. 
 
오랜 기간 사비에르가 받았던 편지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녀의 그리움은 배가 되어 내 안에 맴도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잠시 책을 덮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아이다의 상실감에 비할 바 못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천연덕스럽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상세히 기록해가는 아이다, 큰 사건을 일상처럼 말해야 하는 아이다, 처절할 정도로 사랑하는 이의 온기를 느끼고자 자신의 손을 그려 나가는 아이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갈라놓은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심마저 생긴다.

아이다의 편지에 상응하는 사비에르의 편지는 없다. 다만 그녀가 보낸 편지 뒤편에 사비에르의 메모가 있는데, 그의 해설이 필요한, 난해하고 짤막한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 글은 아이다에 대한 글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 행해지는 반인간적인 행위에 대한 개탄과 상대성을 그린 것이 많다. 그 낯선 이질감에 몸을 떨면서도 사비에르가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그랬을까. 감옥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그는 아이다의 편지의 뒤편에 세상의 곳곳을 누비며 보이지 않는 활동가다운 호소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더라도 사비에르가 아이다에게 보낸 편지는 상세히 알 수 없었기에 그런 아이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난감해지기도 한다.

감추지 않는 마음, 아니 감출 수 없는 마음
 
아이다가 보낸 편지의 무게가 가벼웠더라면, 사비에르의 메모가 아이다를 향한 것이었다면 편지를 읽는 내 마음은 어떻게 변모돼 갔을까. 아마 조금은 특별한 연애편지로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현재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가볍게 읽고 지나칠 수가 없다. 약국에서 일하는 아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전하며, 때로 활동가로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이 알고 있는 다양한 지식들을 진부하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사비에르 앞에서만큼은 한 사람의 여자이고 싶은 마음 또한 감추지 않는다.

아이다의 편지를 읽으며 사비에르의 메모가 무심하다 싶다가도 그가 한두 마디씩 흩뿌려 놓은 아이다를 향한 마음을 볼 때면 둘의 단절이 피부에 와 닿아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단절이 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져 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하다. 세계화를 빌미로 이루어진 폭력과 자본세계의 병폐와 만인에게 가해지는 불편한 진실을 파악할 힘이 내게 남아있을 리도 없다.

연인(戀人)의 단절된 상황으로 나머지 배경을 파악해 나가는 도리밖에 없다. 아이다의 절절한 편지, 사비에르의 개탄과 비난이 섞인 메모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과연 나는 행복한 것일까, 저들의 모습을 무시해도 괜찮을 것일까란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물론 둘의 단절 앞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이다가 얼마를 기다려야 사비에르가 돌아올지 알 수 없었고, 사비에르가 과연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마지막 편지 뒷면에 그려진 ‘오늘 밤의 탈출 경로’를 통해 둘의 재회를 잠시나마 꿈꿔본다. 먹먹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들의 운명이 어떤 종말을 맞든 그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저자의 말처럼 신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이 처한 상황들이 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크지만, 그 바람은 아주 먼 얘기로만 느껴져, 내 존재가 너무나 미미하게 다가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존 버거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가라 그의 신간이 나왔나 정기적으로 검색해 본다. 우연히 신간이 나온 것을 보고 바로 구입했는데, 그의 소설은 처음이거니와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의 산문과 시, 평론을 주로 읽다 소설을 마주하게 되니 다시 한 번 그의 역량에 감탄하면서도, 허공을 향한 흐릿한 시선을 거둘 수 없는 나를 자주 만나게 됐다.

아이다의 편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사비에르의 메모에 동감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존 버거가 그려낸 세계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이 책을 계기로 그의 소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먹먹한 가슴앓이가 계속 이어지더라도 다른 작품을 탐독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당분간은 아이다란 인물이 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을 갈망하며 그의 새로운 작품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련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태극취호’님은?
도능독(徒能讀)을 일삼는 자. 책 읽기도 습관이라 생각하며, 책이라면 환장하며 달려드는 서른을 눈앞에 둔 철딱서니. 언제나 머릿속에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살아볼까 꿈만 꾸는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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