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오웰'에 해당되는 글 10건

  1. 2013.02.13 [에디터의 북카트] 현선의 2월 13일 북카트
  2. 2012.01.27 [접어놓은 구절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3. 2010.12.10 <나는 왜 쓰는가> - 쓰고 읽고 다시 쓰면서
  4. 2010.12.03 <1984년> - '개인', 그리고 '자유'가 없는 곳에는 '인간'도 없다
  5. 2010.11.26 <동물농장> - 두 발은 나쁘다 (2)
  6. 2010.11.19 <코끼리를 쏘다> - 조지 오웰, 그 이름으로 느끼는 글맛
  7. 2010.11.12 <카탈로니아 찬가> - 행동으로 알고, 앎으로 행동하라
  8. 2010.11.05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우리의 의식을 깨워, '우리'로 나아가다
  9. 2010.10.29 <버마시절> -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0. 2010.10.22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 가난의 얼굴을 보다

[에디터의 북카트] 현선의 2월 13일 북카트

실로 오랜만입니다. 그간 마음에 담아둔 책이 없지 않았는데 새해 처음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2월이 되어서야 제 북카트에 쌓여있는 책들을 소개해드리네요. 

 

전작주의라고 잘 아시지요? 특정 작가를 꼭 집어, 그 작가의 책을 모조리 읽어내는 것. 열정을 오래 붙들지 못하고 금새 피로감에 젖어드는 저로선 애초에 의욕만큼 쉽게 성사되기 어려운 목표 같은 것인데요. 하지만 이런 저에게도 전작주의라 자신 있게 말할 만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바로바로바로바로바로 ‘조지 오웰’. 아, 그인 것인데요. 기쁘게도, 최근에 그의 새 책이 나와 버렸습니다. 에헤라디야. 

 

 

다음은요. 얼마 전에 ‘오늘의 책’으로 올렸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을 필 받은 바 있어, 이 저작의 근간이며, 이 저자의 핵심 사상이 그곳에 있다 하여 만만치 않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덥석! 손에 넣기를 망설이지 않았던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 Ⅰ,Ⅱ》입니다. 날 때부터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온 제가 이 책을 통해 바야흐로, 문명화과정이 무엇이고 그로 인해 인류는 무엇을 얻고 또 잃었는지, 찬찬히 곱씹어보겠다는 계획을, 야심차게도!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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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어놓은 구절들]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 《나는 왜 쓰는가》 | 한겨레출판 | 2010

 

우리 시대에는 ‘정치와 거리를 두는’ 일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모든 문제가 정치 문제이며, 정치란 본래 거짓과 얼버무리기, 어리석음, 반목, 정신분열증의 집합체인 것이다. 그러니 전반적인 분위기가 좋지 않을 경우 언어는 수난을 당하게 된다. 검증할 만한 자료를 들고서 하는 추측은 아니지만, 나는 독일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가 지난 10년에서 15년 사이 독재 정권 때문에 상당히 타락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킨다면, 언어 또한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 부적절한 어법은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관습과 모방에 의해 퍼져나갈 수 있다. 내가 거론하고 있는 타락한 언어는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편리한 것이다. (…) 이렇게 이미 만들어진 표현들(‘토대를 구축하다’, ‘획기적인 변혁을 달성하다’)이 내면에 침입하는 것을 막자면 항상 경계를 단단히 하는 수밖에 없으며, 그렇지 않으면 그런 표현들 하나하나가 뇌의 일부를 마취시켜버린다. (…)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의미가 단어를 택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산문의 경우, 단어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단어에 굴복하는 것이다.

<정치와 영어>중에서

 

무협소설을 쓰는 주인공 ‘대구’가 노트북을 빠르게 두드리며 소리친다. 내 타이핑 속도가 영감이 떠오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2007년에 방영한 드라마 ‘메리 대구 공방전’의 한 장면이다. 이번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소설가인 주인공 ‘박만수’가 며칠 만에 미친 듯이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다. (작가의 경험담과 무관하다는 전제 하에) 아마도 이것은 글 쓰는 사람의 공통된 로망인 것 같다. 현실에서는 반대인 경우가 더 많으니까.

 

몇 줄 안 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생각이란 엉킨 실타래와 비슷하다. 언어를 쓴다는 것은 실을 살살 풀어 다시 정돈된 타래를 만드는 일과 같다. 언어가 생각을 타락시킨 모양새는 무엇일지 그려 본다. 겉보기에는 말끔하지만 막상 사용할 때면 뚝 끊어지는, ‘잇는’ 기능을 상실한 실이 아닐까. 한 마디로 속아 넘어가기 쉬운 실 말이다. 어떤 면에서는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키는 쪽보다 더 악질이다.

 

《나는 왜 쓰는가》는 조지 오웰의 생각이 담긴 실타래다. 나는 어느덧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수십 년 전 문학관(정치관)이 여전히 유효한 시대라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총선을 앞둔 유권자로서 참 씁쓸하다. 우울한 얼굴을 모니터에 비추면 뭐하나. ‘대구’나 ‘박만수’는 없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조지 오웰의 말을 따를 수밖에. 의미에 맞는 단어 고르기. 시대를 속이지 않는 사람 고르기.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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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쓰고 읽고 다시 쓰면서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10

 


인터넷이 발달한 요즘은 너나 할 거 없이 많은 이들이 글을 씁니다. 홈페이지, 블로그, 카페뿐 아니라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짧은 문장에 정보와 사람, 그들의 삶을 실어 나르기 바쁩니다. ‘글’이라는 매개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곳 어디에서든, 자신을 타인에게 드러내 보이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크기를 넓혀가려는 많은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1인 미디어’라는 말이 나오는 이 시대에,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과 고민은 비단 이름을 알린 작가의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 중 가장 빼어난 29편을 묶은 <나는 왜 쓰는가>는 1946년 ‘갱그릴’지에 게재한 오웰의 대표적인 에세이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그의 작가론과 정치론이 한데 잘 녹아 있는 가장 상징적인 작품으로,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일종의 짧은 자서전”도 한데요. 그 속에서 오웰은 자신이 글을 쓰는 동기를 네 가지로 정리해 밝히고 있습니다.

1. 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하는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
3. 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
4. 정치적 목적.세상을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
(293-294쪽)

그의 이런 생각에서 저는, 세상에 나를 더하고 세상 속으로 좀 더 들어가려는 ‘글쓰기’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그리고 이 책, <나는 왜 쓰는가>를 채우고 있는 그의 또 다른 에세이들에서 그 마음을 다시금 발견하게 됩니다. 오웰의 생애 곳곳에 배어있는, 세상을 향한 발걸음의 흔적을 읽으며, 그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되새겨 보기도 합니다.

‘스파이크(1931)’에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1933)을, 그리고 이어지는 <위건부두로 가는 길>(1937)의 기억. ‘교수형(1931)’, ‘코끼리를 쏘다(1936)’를 읽으며 <버마시절>(1935)을, ‘스페인의 비밀을 누설한다(1937)’과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1942)’에선 <카탈로니아 찬가>(1938)가, 그 모든 기억으로 더 풍성하게 읽을 수 있었던 <동물농장>(1945)과 <1984>(1949)까지.

그러고 보면, 이 책을 읽는 것은 이미 그 목적을 달성한 오웰의 성공적인(?) 글쓰기를 확인하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특유의 유머와 통쾌한 독설에 담긴 날카로운 통찰은 그의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끊임없이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이끌고, 그 생각은 다시 책 속의 세상과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나를 더해, 세상 속으로 좀 더 들어가고 싶은 ‘글쓰기에 대한 욕망’를 구체화시켜주니까요. 그렇게 쓰고 읽고 다시 쓰는 과정에서 어제와 다른 오늘의 우리가, 과거와 다른 현재의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을 테니까요.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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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 '개인', 그리고 '자유'가 없는 곳에는 '인간'도 없다

 

조지 오웰, <1984년>, 열린책들, 2009

 


1984년의 오세아니아, 그 세계가 더없이 절망적이다. <동물농장>에서 보여줬던 권력의 부패와 전체주의를 향한 비판이 극단으로 치달아 비관을 낳으면 <1984>가 되는 걸까. 삶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통제당하는 암울한 시대, 개인 없는 개인의 합, 전체주의 국가만 덩그러니 남은 <1984>의 세계는 디스토피아, 그 자체이다. ‘빅 브라더’로 대변되는 독재 권력이 그들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극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모든 정책은 탁월(?)하고, 그런 세계를 창조해 인류의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게 한 조지 오웰의 통찰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1984>에서 하나의 권력을 위해 부정된 모든 것들이 모두의 삶을 위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다.

1984년,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전체주의 국가에 의해서 지배되고, 이 세 나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다. 전쟁에 대한 공포를 통해 내부 권력에 기대게 하는 것, 이 또한 ‘빅 브라더’의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다. 당원들의 사생활은 철저히 감시되고, 그들을 사상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과거 조작과 ‘신어’ 창조는 계속된다. 권력에 반하는 어떠한 생각과 행동도 용납될 수 없으며, 통제되지 않는 ‘개인’의 삶, 그들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생각 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없다면, 그 질문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을 ‘인간’이라 부를 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의 주체인 ‘개인’을 말살당하고 반성하는 사고 자체를 차단당한 이들로 가득한 <1984>, 그 어디에도 진정한 의미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모두가 하나의 생각을 기계처럼 반복하며 권력의 유지를 위해 봉사하는 그들에게 내일은 없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서정주의 ‘자화상’ 중에서


1984, 어떤 미래의 자화상

세상이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한데, 그 세상이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런 사고의 능력을 빼앗긴 이들이 <1984>에 있다. 진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린 그들이 ‘빅 브라더’를 대신해 타인의 눈에서 죄인을 읽고 그들의 입에서 천치를 읽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뉘우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다운’ 내일은 분명, 어떤 뉘우침을 통해, 그 뉘우침의 능력를 양보하지 않으려는 의지, 그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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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 두 발은 나쁘다

 

조지 오웰, <동물농장>, 민음사, 1998

 


권력의 부패는 필연적인가. 온갖 미디어가 실어 나르는 부패한 권력의 이야기는 더 이상 ‘충격적 사건’이 되지 못한 지 오래고, 그 진실을 전해준다는 미디어조차 신뢰를 져버리는 일이 종종 벌어지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눈과 귀를 막고 썩어가고 있는 <동물농장>은 그것이 풍자하고 있는 과거 스탈린 시대의 소비에트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동물농장’은 지금도 있고 미래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영리한 돼지 ‘스노볼’과 ‘나폴레옹’의 주도 아래, 메이너 농장의 주인 ‘존즈’를 몰아내고 동물들 스스로 농장의 주인이 되었던 혁명은 성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일곱 계명에 따라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게 대우받던 동물농장의 공동체는 곧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나폴레옹을 위시한 지배 엘리트 돼지들의 권력 집단이 대신 들어선다. 무지로 눈 멀어 저항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동물들이 온갖 억압과 착취를 견뎌내며 무기력한 삶을 이어간다. 온갖 만행과 부패를 일삼던 돼지들이 애초 그들의 적이었던 지배자 인간의 모습을 닮아간다.

“열두 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 맞고함질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123쪽)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라는 혁명의 구호는 사라지고, 두 발로 서서 그들을 짓누르는 권력의 발밑에 네 발 달린 동물들의 변하지 않는 고단한 삶이 남았다. 결국 혁명 세력의 변질과 그들의 타락을 방조한 동물들의 무지와 무기력함이 또 다른 독재, 파시즘를 낳은 것이다. 그렇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며, 개인의 모든 활동을 국가와 민족 등 전체의 존립과 발전에 복속시키는 전체주의의 암울한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느닷없이 국가의 품격을 높이기 위해 생계를 잠시 미뤄야 했던 얼마 전까지 우리의 모습이 겹쳐져 떠오른다.

이 책, <동물농장>이 보여주고 있는 신랄한 풍자의 묘미마저 잃어버린, 아니 오히려 억지로 빼앗겼던 침울한 날들의 기억이 떠오른다. “풍자는 무엇보다 당대성의 서사 장르이다. 풍자가 물어뜯고 비꼬고 우스갯감으로 만드는 것은 그 풍자가 생산되어 나온 당대 사회의 실존 인물, 사회환경과 제도, 이데올로기, 사건, 편견 같은 것들이다. 당대의 것들에 대한 비판, 공격, 희화화가 아니라면 풍자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풍자는 동시에 약자의 서사이다. 이 약자는 권력보다는 진실의 편에 서고자 하기 때문에 궁지로 몰리는 약자이다. 약자의 이야기이므로 풍자가 두들기는 대상은 권력을 쥔 부당한 강자, 지배 세력과 이데올로기, 지배적 제도와 관행이다.”(도정일, <동물동장>의 세계, 147쪽)

당대의 풍자를 통해 자신의 얼룩을 들여다보지 못하는 권력의 인색함과 그 권력에 의해 궁지로 내몰린 약자를 보았던 또 다른 약자의 독서, <동물농장>의 뒷맛은 그래서 씁쓸하다. 권력을 위해, 권력에 의해 서 있는 ‘두 발은 나쁘’고, 위트와 풍자를 잃고 맹목적으로 걸어가는 ‘두 발은 더 나쁘다.’ 그 발길에 채이고, 발자국에 짓눌린 약자의 삶은 더없이 아프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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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를 쏘다> - 조지 오웰, 그 이름으로 느끼는 글맛

 

조지 오웰, <코끼리를 쏘다>, 실천문학사, 2003

 


“오웰의 문학을 논할 때 우리는 그의 삶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작품을 생각할 수 없고, 작품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리처드 리즈(문예비평가)

이처럼 적확한 표현이 또 있을까. 책 뒷표지에 적혀 있는 이 글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다. 흔히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를 수식하기 위해 등장하는 작품은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동물농장>과 <1984>. 오웰의 후기 작품에 속하는 이 소설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의 삶의 궤적이 묻어나오는 다른 작품들이 소환되곤 한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버마시절>, <위건부두로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 그리고 그의 산문집 <코끼리를 쏘다>, <나는 왜 쓰는가>까지.

시대의 목격자인 동시에 참여자이기도 했던 그의 삶이 오롯이 담긴 이 책들 속에서 우리는 1920년대 유럽의 제국주의, 30년대 경제대공황과 전체주의라는 역사의 큰 흐름을 만나게 된다. 그 흐름에 휩쓸려 역사의 변두리로 내몰린 개인들의 삶을 대면하게 된다. 부랑자, 식민지 피지배자들, 실업자, 참전 의용군 등, 이념과 사상에 묻혀 지워지기 일쑤인 그들의 숨소리가 시대의 공기처럼 전해져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중간의 어디쯤에서 역사의 큰 흐름과 삶의 세부를 오고가는 ‘비판적 개인’ 혹은 ‘실천적 지성인’으로서의 조지 오웰이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그때, 조지 오웰의 작품이 아닌 작가 ‘조지 오웰’이 읽고 싶어진다.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소설과 르포르타주 이외에, 한국어 텍스트로 읽을 수 있는 그의 또 다른 글을 만날 수 있는 <코끼리를 쏘다>를 읽기 시작한다.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오웰이 제국주의 식민지 경찰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들로 실제 그의 ‘버마시절’을 느끼게 하고, 2부는 오웰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있는 글들로 삶과 작품이 겹쳐져 있는 작가 ‘조지 오웰’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3부는 파리와 런던의 뒷골목에서 최하층 사람들과 생활했던 경험을 담은 글들로 이 또한 그의 작품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과 이어진다. 그리고 4부는 일상에 스며 있는 정치성에 관한 견해를, 마지막으로 5부는 유럽 문학에 대한 단상들을 피력한 에세이들이 담겨 있다.

그렇게 그의 작품을 읽다 삶으로 눈을 돌리게 된 우리는 그 삶의 일부 혹은 전부일 수 있는 작품들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곤 또다시 삶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삶과 작품의 세계가 교차하는 ‘조지 오웰’을 읽으며 ‘글 속의 세상’과 그 ‘세상 속에 있는 글’ 사이를 오고가는 우리에 대한 발견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조지 오웰, 그 이름으로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게 되는 것은, 세상과 사람 사이를 잇는 견고한 고리, 즉 세상을 스스로 등지거나 혹은 그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끌어 ‘사람이 세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냉혹한 현실은 생생한 묘사로, 날카로운 비판과 자기 성찰은 위트와 유머로 담은 그의 글이 ‘맛’을 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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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 행동으로 알고, 앎으로 행동하라

 

조지 오웰, <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2001

 


1936년에 발발했던 스페인 내전. 프랑코가 지휘한 파시스트 반란군과 이에 대항한 공화주의자들과의 전쟁은 결국 프랑코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이 전쟁에 참전한 조지 오웰의 기록이 바로, <카탈루니아 찬가 Homage to Catalonia>다. 파시즘에 저항해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싸웠던 많은 이들의 열망이 아군의 배신으로 환멸과 분노, 절망으로 바뀌어야 했던 서글픈 역사. 오웰은 그 어디에 오마주 Homage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건 전쟁에 대한 기사를 쓰려고 바로셀로나에 도착한 오웰이 생전 처음으로 맞보았던 ‘평등의 공기’을 향한 걸 거다. 당시 무정부주의자들이 통치하고 있었던 바로셀로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를 평등하게 대하는 ‘계급 없는 사회의 축소판’과 같았고, 군에 자원한 후 배치된 아라곤 전선에서도 오웰은 이와 다르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장교에서 사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은 같은 월급을 받고, 같은 음식을 먹었으며, 계급적으로 차별을 받지 않았다. 오웰은 그곳에서 평등한 공동체의 가능성과 희망을 본 것이다.

“나는 우연히 정치적 의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정상으로 취급되는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다. […] 모두들 똑같은 수준에서 생활하였으며,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어울렸다. 이론적으로는 완전한 평등이었다. 실제적인 면에서도 완전한 평등에 가까웠다. […] 문명화된 생활의 여러 가지 일반적인 동기들, 예컨대 속물근성이라든가, 돈을 악착같이 벌어 모으려는 태도, 상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 누구도 주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않았다.” (139-140쪽)

물론 그 경험 안에서 오웰이 직면해야 했던 현실적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 더러움, 권태, 이 그리고 생명의 위험 등은 정의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의욕적으로 전선에 투입된 많은 이들의 시간을 고통으로 채웠던 게 분명하다. 특히, 오웰은 이렇다 할 전투는 이루어지지 않은 채 불필요한 경계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에 대해, 당시에는 전선에서 보내는 그 기간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무익한 시기로 여겨졌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오웰에게 또한 “다른 방식으로 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던 소중한 기억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은, 파시스트에 대한 항쟁의 주도권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넘어가고, 스탈린의 지시를 받는 공산주의자들이 함께 파시즘에 저항했던 무정부주의자들을 배신해 결국 내전의 승리가 파시스트 프랑코에게 돌아가게 된 이후에도, 오웰이 그것에 대한 환멸 대신 깊은 매력을 느끼고, 사회주의의 수립을 갈구하는 그의 욕망이 전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러므로 이 책, <카탈로니아 찬가>은 그 기억을 가져다 준 경험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사건의 밖에서 그것을 관망하며 현장의 소리를 듣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당시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며 죽어있는 글을 쓸 때, 오웰은 자신의 양심이 시키는 대로 세상에 뛰어들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고, 이 경험과 기억 그리고 앎으로 다시 ‘정치적 글쓰기’의 목적과 방향성을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오웰의 글이 지니고 있는 욕망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를 특정한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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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우리의 의식을 깨워, '우리'로 나아가다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한겨레출판, 2010

 


조지 오웰을 만나는 세 번째 시간, <위건부두로 가는 길>. 이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시선이 닿는 곳마다 글이 되고 기록으로 남을 수 있다면, 나는 오웰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까지 보기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그의 삶의 태도를 배우고 싶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수많은 경계로 나뉘어져 있는 우리의 삶을, 그러므로 결국 너와 나의 삶을, 다시금 ‘우리’라는 테두리 안으로 들여와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오웰의 글이 자꾸만 읽고 싶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겠죠. 더욱이 그 경계들을 안으로 품고 그만큼의 세상밖에 볼 수 없는 저이기에, 경계 밖 ‘그들’의 삶까지 ‘우리’라는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듯합니다. 

“내가 노동 계급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유사성을 발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의에 당하는 상징적 희생자였으며, 버마에서 버마인들이 하는 역할을 영국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201쪽)

“하급 상류 중산층”인 그가, 식민지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하면서 세상의 일그러진 얼굴을 대면하게 되고, 그때의 죄의식을 씻어내기 위해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을 했었던 것처럼, 이 책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불의에 당하는 희생자’ 즉, 1930년대 당시 경제 대공황으로 대량실업을 겪고 힘겨운 삶을 지속해야 했던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에게 시선을 돌리는 그의 또 다른 발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진보단체이자 독서클럽인 ‘레프트 북클럽’으로부터 취재 제의를 받은 그는, 두 달에 걸쳐 랭커셔와 요크셔 지방 일대의 탄광 지대에서 광부의 집이나 노동자들이 묵는 싸구려 하숙집에 머물며 그들의 삶을 기록했으며, 그 결과물이 바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로 남게 된 거죠.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다시, 정치적 글쓰기를 통해 ‘우리’의 삶으로 나아가는 그의 치열한 고민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자신의 성장배경과 영국의 계급문제, 당시 사회주의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담겨 있는 2부의 내용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비판적 개인’으로서 오웰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게 해줍니다.

“어느 쪽으로 가려 해도 이런 계급 차이의 저주는 돌담처럼 우릴 막아선다. 아니면 돌담이라기보다는 수족관의 판유리 같다고 해야겠다. 없는 듯 대하기는 쉽지만 뚫고 지나갈 수는 없으니 말이다. (211쪽)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는 있되,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직시해야 할 사실은, 계급 차별을 철폐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는 점이다. 여기 중산층의 전형적인 일원인 내가 있다. 내가 계급 차별을 없애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행하는 거의 모든 것은 계급 차별의 산물이다.” (216-217쪽)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제 안에 박혀 있는 “수족관의 판유리”를 보게 됩니다. “눅눅하고 설익은 위선”으로 ‘진보’를 말했던 모습을 돌이켜 봅니다. 너무 쉽게 ‘우리’라는 말을 쓰고 말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이제 진짜 ‘우리’에 대해서 생각해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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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시절> -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조지 오웰, <바머시절>, 열린책들, 2010

 


1920년대 중반, 영국의 식민지 버마. 조지오웰의 <버마시절>은 영국에 기생해 권력을 휘두르고,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해 새로운 음모를 꾸미는 하급 치안 판사 ‘우 포 킨’으로부터  시작된다. 개발을 통한 문명화의 논리로 영국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원주민 의사 베라스와미, 이를 부인하며 영국 제국주의의 본질은 사실상 세계 평화를 위한 희생이 아닌 강탈을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플로리. 이 둘 모두는 우 포 킨이 식민지 권력의 핵심인 유럽인 클럽에 들어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에서 희생의 제물로 선택된 인물이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오 포 킨의 사악한 계획은 성공으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사이를 채우고 있는 아이러니, 피지배자의 희생의 제물이 돼버린 지배자의 예정된 파멸. 게임의 승패는 결정났지만, 승자와 패자 그 누구도 해피엔딩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결말.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 그리고 권력을 향한 맹목이 낳은 비극.

<버마시절>은 조지 오웰이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입장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식민주의자들이 문명화라는 논리로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의 불합리함을 여실히 보여주며, 이와 함께 이러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면서도 단호하게 이를 끊어내거나 맞서 투쟁하지 못하는 나약한 한 인간(플로리)의 내면적 고뇌와 절망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한 인간과 제국주의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이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자살이라는 결말로 이어진다. 플로리의 ‘버마시절’은 끝이 났고, <버마시절>의 이야기 또한 끝이 났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그간 인류의 역사에 수많은 비극을 새겨 넣은 인종적 편협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문명이라는 독단적 입장으로 문명화되지 않은 것들의 가치가 매겨지고 있으니. 게다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인간의 욕망은 부와 권력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만족을 모르지 않던가.

결국 모든 비극은 자기 본위 대로 매겨진 우월의 가치가, 차이의 단순함을 지우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것을 채우고 지키기 위해 버려진 것들이 타인의 비극, 혹은 인류의 비극을 지속시킨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부와 권력을 얻고 승리감에 도취된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가 얻기 위해 버린 것이 정작 '인간다움'일지 모르며, 그러므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결말 또한 비극이라는 것을.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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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 가난의 얼굴을 보다

 

조지 오웰,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삼우반, 2008 

 


출근길 지하철, 사람으로 빼곡히 채워진 비좁은 내부를 오가며 경쟁적으로 신문을 모으는 사람들. 한 달만큼의 삶을 보장받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의 뒤편에서, 취기에 젖어 나른하게 아침을 맞이하는 길 위의 사람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도 구석에서 누추한 잠자리를 펴고, 재빨리 지나쳐 가는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을 벌리고 있는 사람들.

평범한 이들이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가난’의 표정이다. 습관처럼 지나쳐 버리고 마는 타인의 삶이다. 집과 직업이 있고, 그러므로 의식주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사는 이들에게, 간혹 짜증과 애처로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혹은 두려움, 대개는 불편함을 느끼게 하는 존재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악착스럽게 무가지 수거에 매달리는 모습에서, 더러운 옷차림과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에게서, 구걸하기 위해 땅으로 향한 그들의 시선만큼 바닥으로 내려앉은 그들의 자존심을 보며, 결국 무관심으로 끝나고 말 몇 가지의 감정만으로 그들의 삶을 소비하며 자신의 현재에 안도하는 우리들.

이것이 가난을 대하는 우리 대부분의 끝이다.

작가 ‘조지 오웰’은 직접 그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이 된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은 두 도시에서 접시닦이와 부랑자 생활을 했던 그의 체험이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담겨져 있는 작품이다. “전반부는 1929년 늦가을의 파리 생활을 주로 반영했고, 후반부의 영국 생활은 1928년 겨울에서 1931년 여름 사이에 그가 직접 체험하거나 간접적으로 취재한 내용을 재구성했다”고 한다.

이를 통해 오웰은 부랑자, 하층민들의 삶을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그러한 삶이 자신의 육체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배고픔’, ‘잠’, 등의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나간다. “배고픔에 대한 주된 기억은 완전한 무기력이다.” (50쪽) “잠은 단순한 신체적 필요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능적인 것이었고, 휴식이기보다 폭식이었다.”고 (120쪽) 더욱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마무리하는 22장과 36장에서는 파리의 접시닦이 생활과 영국에서 경험한 부랑인에 대한 “일반적인 소견”을 밝히며, 앞에서 서술한 개인적 체험 수기를 벗어나 가난의 문제에 대한 그 자신의 진지한 사고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오웰은 체험자인 동시에 목격자의 위치에서 “하층민의 삶을 취재하고 그것을 다시 중산층의 언어로 증언”하고 있는데, 여기에 영국 식민지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했던 그 자신의 (불의한 식민 체제에의 봉사자였다는) 개인적인 죄의식이 더해져, 보다 적극적으로 하층민이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재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차원의 노력이 절실하며, 궁극적으로 계층적 차이가 개인의 본질적 차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다만 그들도 평범한 인간이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만 못한 것은 그들의 생활 방식에서 빚어진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 (270쪽)며, “문제는 어떻게 하면 지루하고 생기 없는 부랑인에서 자존심 있는 인간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274쪽)

하층민의 삶이 여실히 드러나 있는 이 책에서, 아침저녁으로 스쳐 지나갔던 그들의 이야기가 들리는 듯하다. 미처 알지 못했던 가난의 얼굴을 본 듯도 하다. 책의 말미에서 “가난의 언저리까지밖에는 보지 못한 것 같다”고 말하는 오웰이, 그러나 “이것이 시작이다.”라고 글을 마무리 지을 때, 이것이 나와 우리의 시작이진 않을까 생각해본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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