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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1.28 《장자》 - 인생의 터무니를 찾아
  2. 2010.10.01 <느림과 비움의 미학> - 매인 데 없이 자유로워라

《장자》 - 인생의 터무니를 찾아

 

 

장자 | 《장자》 | 현암사 | 1999

 

31. 망량(罔兩, 엷은 그림자)이 영(景, 본그림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조금 전에는 걸어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조금 전에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으니, 왜 그렇게 줏대가 없소?’
 그림자가 대답했다. ‘내가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겠소? 내가 의존하는 그것 또한 딴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니오? 나는 뱀의 비늘이나 매미의 날개에 의존하는 것 아니겠소? 왜 그런지를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왜 안 그런지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그림자 둘레에 생기는 엷은 곁 그림자 ‘망랑’이 본그림자인 ‘영’을 보고 줏대가 없다고 나무란다. 줏대, 줏대가 무엇인가. ‘자기의 처지나 생각을 꿋꿋이 지키고 내세우는 기질이나 기풍’이다. 주체성 혹은 독립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아무렴, 그래야지. 이 말에 이쪽으로, 저 말에 저쪽으로 흘러가는 이를 두고 어찌 제대로 살고 있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림자 자체가 물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어디 그림자뿐인가.  “어느 누구도, 어떤 사물도 엄격한 의미의 독립성이나 주체성이 없다 (…) 만물은 자체가 존재의 바탕이거나 움직임의 근원일 수 없다. 모두 무엇에 의지해 존재하거나 움직인다.” (133쪽)

 

그러니까 망랑은 ‘내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고 있으나 ‘내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의 질문은 간과하는 있는 사람과 같다. ‘나’에게 사로잡혀 ‘나’가 ‘너’와의 관계 안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혹은 그 모든 ‘분별’들에 얽매여 더 큰 삶의 본질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반면에 자기가 딴 것에 의존해 있는 걸 두고 ‘왜 그런지를 내 어찌 알 수 있겠소? 왜 안 그런지 내 어찌 알 수 있겠소?’라고 되묻는 그림자는 이와 같은 사물의 상호의존성을 알고 있음을 물론이고, 더 나아가 앎과 모름의 분별 자체를 넘어서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무분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무궁의 세계에 머물 수 있다. 무분별은 일월을 품고 우주를 품는다. 그러나 분별 속에서 사람은 작아진다.” (장석주, 《느림과 비움의 미학》, 푸르메, 20쪽)  

 

아니, 도대체 무슨 말인가. 분별을 지나 무분별해져야한다니.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이다. 《장자》를 읽는 일이 그렇다. 그가 풀어내는 모든 이야기가 우리의 상식적 사고에 반하는 까닭이다. “그는 해학으로 일체를 묵살하면서 상식적인 사고와 세속적인 가치에 반역하고 있다. 상식적인 사고에 사로잡힌 옹졸함과 세속적인 가치관에 뒤틀린 왜소함을 함께 연민(憐憫)한다. 해학은 그의 반역이며, 홍소는 그의 연민이다. 그는 세속 인간의 미망(迷妄)을 통곡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통곡까지도 소리 높여 홍소한다. 그는 세속 인간의 허세와 오만을 모멸(侮蔑)하며 그 모멸을 홍소 속에서 해학한다. 장자의 철학은 이 인간 모멸과 연민이라는 이율배반(二律背反) 속에서 탄생하고 있다.” (안동림 역주, 《莊子》, 현암사, 12쪽)

 

말하자면, 상식 안에서 《장자》는 터무니가 없다. 그러므로 질문하게 한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안다는 것 자체에 대해 다시. 그렇게 이 삶에, 우리의 인생에 ‘터무니’란 게 과연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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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과 비움의 미학> - 매인 데 없이 자유로워라

 

장석주, <느림과 비움의 미학>, 푸르메, 2010 

 

 

「몽해항로 1」 ― 악공(樂工)

누가 지금
내 인생의 전부를 탄주하는가.
황혼은 빈 밭에 새의 깃털처럼 떨어져 있고
해는 어둠 속으로 하강하네.
봄빛을 따라간 소년들은
어느덧 장년이 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네.

하지 지난 뒤에
황국(黃菊)과 뱀들의 전성시대는 짧게 지나가고
유순한 그림자들이 여기저기 꽃봉오리를 여네.
곧 추분의 밤들이 얼음과 서리를 몰아오겠지.

일국(一局)은 끝났네. 승패는 덧없네.
중국술이 없었다면 일국을 축하할 수도 없었겠지.
어젯밤 두부 두 모가 없었다면 기쁨도 줄었겠지.
그대는 바다에서 기다린다고 했네.
그대의 어깨에 이끼가 돋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려네.
갈비뼈 아래에 숨은 소년아,
내가 깊이 취했으므로
너는 새의 소멸을 더듬던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라.
네가 산양의 젖을 빨고 악기의 목을 비틀 때
중국술은 빠르게 주는 대신에
밤의 변경(邊境)들은 부푸네.

-장석주, 『몽해항로』, 민음사, 2010, 31-32쪽

 

하루를 시작했던 해는 금세 저물어 어둠을 몰고 온 밤을 맞이하듯이, 우리의 생애를 채우는 무수한 시간 또한 그렇게 흘러 일국이 끝나는 시점을 향해 가고 있겠죠. 그리고 그 시점에 다다른 누군가의 입에서는 결국, “일국(一局)은 끝났네. 승패는 덧없네.”라는 시의 노래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이토록 짧은 생애의 순간들을, 승리에 골몰하며 보내는 우리의 하루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는, 그리 오래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승패의 여부가 아니라 그 삶을 채워 나가는 과정이며, 그렇게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진실로 필요한 것은 삶을 어떻게 연주해 나갈 것이냐, 일 테니까요.

아마도 시인 장석주는 그 해답을 『장자』에서 찾은 듯합니다. 우리에게 ‘존재의 기술’, 즉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를 질문하는 『느림과 비움의 미학』은 그 물음으로 시작하고 있으니까요.

지난 10년 동안 『장자』를 머리맡에 두고 하루도 쉬지 않고 읽었다는 저자는 잘 알려진 ‘독서광’ 답게 삶과 존재 방식을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하는 독서의 가치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나온 삶에서 받아온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기 탐색과 자기 생성의 기술”을 『장자』라는 책을 통해 찾을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겠죠.

그가 강조해 말하듯, 장자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바람처럼 떠도는 방랑의 천재, 예기치 않은 은유와 환유로 잠든 뇌를 깨어나게 하는 수사학의 달인, 삶과 죽음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드는 초월과 지혜의 진인” (368쪽)이며, 이러한 그의 면모는 이 책이 바탕으로 삼고 있는 『장자』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곽상의 편집에 따라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장자』의 내편은 ‘느림과 비움의 미학’으로 연결되는 이치의 근본을 밝히고 있어, “자기만족과 나태함”에 빠져 있는 현 인류의 반성적 거울을 제공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삶과 죽음, 옳고 그름,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 등을 끊임없이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에 갇혀, 만물이 하나라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편견과 아집에 얽매여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돌이켜 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현실적 삶에 대한 시인의 예민한 시선이 더해진 이 책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 『장자』 속 이야기를 우리 가까이로 데려와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렇게 이 책은, 세상의 속도에 맞춰 사느라 자기 탐색의 시간을 갖지 못하는 우리에게, 이것과 저것 사이의 분별과 편견에 사로잡힌 마음에 매여, 참된 삶의 자유를 잃어버린 우리에게, 말합니다.


느리게, 그리고 비우며 살고, 매인 데 없이 자유로워라. 라고.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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