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4.12.01 《글쓰기를 말하다》 - 왜 쓰는지 나도 몰라
  2. 2013.09.24 [서점에서 만난 사람] 닫히지 않는 이야기의 문 -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소설가 에트가르 케레트
  3. 2013.06.20 [서점에서 만난 사람] 너 어느 장르에서 왔니? - 《인터뷰》의 만화가 루드비코
  4. 2011.03.04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 죽어도 다시 한 번
  5. 2010.10.18 <기쁜열대> - 눈치 볼 이유가 없다!
  6. 2009.09.11 [인터뷰] 상상할 수 없어 더 특별한 - 꽃별 1부 (2)
  7. 2009.06.01 [인터뷰] 이한철, 그의 지나간 한철 - 2부
  8. 2009.04.14 청춘표류 - 실패 없는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

《글쓰기를 말하다》 - 왜 쓰는지 나도 몰라

 

 

오스터 | 《글쓰기를 말하다》 | 인간사랑 | 2014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은 내게 “왜 사는가?”라는 질문과 같다.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내게 글이 그렇다. 왜 쓰는지 알 수 없을 때부터 나는 어설픈 동시를 끄적였고, 독서감상문 쓰기는 내겐 놀이와 같았다. 폴 오스터 또한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그는 《빵굽는 타자기》에서 말한다. 글쓰기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 ‘받는’것이라고. 우리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선택 받았고,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돈이나 나이, 생김새 따위는 상관없다. 그저 쓰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쓰는 것뿐이다. 아니라면, 쓰고 싶지 않은데 쓰고 있다고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글을 쓸 때 두 가지 이상의 동의어를 놓고 고민한 적이 있는지, 한 문장을 잘 쓰기 위해 하루 이상 고민한 적이 있는지, 잘 썼다는 생각이 들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스스로 자랑스러운 마음이 드는지.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된다면 당신이 글쟁이로 지어진 것은 아닌지 고민 해봐도 좋겠다.

 

물론 위 세 가지 경우에 해당하더라도 누구나 노후가 보장된 유명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얻는 거라곤 마음의 평화 정도인데, 그 평화마저도 글을 쓰기 시작하면 망가질지 모른다. 제목에 가장 부합하는 장은 단연코 5장 ‘손으로 쓴 원고’다. (책 내용이 길어서 일부분만 읽고 싶은 사람에게 5장을 추천한다)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참고할 만한 방법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글쓰기를 말하다 ? 폴 오스터와의 대화》의 전체 내용이 여기에 강조점을 찍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재미있게도 이 책의 꽤 많은 분량이 ‘폴 오스터의 영화’를 얘기 하는데 할애된다. 시나리오는 당연히 폴 오스터의 몫이고, 그가 감독 또는 투자까지 겸하는 영화도 있다. 그가 투자하는 영화에서 그의 활약은 대단하다.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카메라 감독과 동선을 체크하고, 역에 적합한 배우들을 캐스팅하며, 미술감독과 소품을 사러 다니기도 한다. 그 작업을 즐거워하면서도 영화의 한계를 지적하고, 결국 글이 더 오래 갈 것이라 예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카메라 렌즈가 인간의 눈을 뛰어넘을 수 없는 것처럼, 영화 산업도 상상력보다 높이뛰기는 힘들다.

 

혹자는 “오독의 권리를 남용했다.”고 말할지 모르나, 책을 읽는 동안 글쓰기야말로 문화산업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할리우드는 작가들이 파업하면 마비될 정도라지 않은가!) 소설이나 시 등은 물론, 영화, 연극, 뮤지컬로 각광받는 문화 산업도 결국 ‘글’에서 출발한다. 폴 오스터의 작품이 그렇듯 모든 이야기는 영화와 연극, 뮤지컬로 변신할 수 있다. 글쓰기는 ‘마술봉’이다. 언제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누구라도 될 수 있다. 앞으로의 세상은 지식산업사회, 문화산업사회라 하니 나에겐 마술봉을 제대로 휘두를 일만 남았다. 휘두를 능력이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

 

오늘의 책을 리뷰한 'YAMUYAMUBOOKS'님은?

감동도 잘 받고 상처도 잘 받고, 칭찬도 잘 하고 욕은 더 잘 한다. 창조적 언어체계 형성에 일조하고 싶으나 언제나 마음뿐이다. 소설창작에 관심이 많고, 시나 칼럼 쓰기도 좋아한다. 언젠가 ‘작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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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닫히지 않는 이야기의 문 -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소설가 에트가르 케레트

 

 

취재·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주변에 하나쯤은 이야기를 참 맛갈나게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똑같은 사건과 줄거리일지라도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라면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해지고 쫀득쫀득해집니다. 살을 더하거나 빼고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음은, 그 다음은? 하고 성마르게 이야기를 재촉할 수밖에 없는데요. 이런 이야기꾼에게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려, 강도처럼 이야기를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이야기 하나 해봐.” 라며 권총으로 위협하고 윽박지르면서 말이죠. 

 

“평소처럼 하면 되잖아.” 수염은 투덜대며 권총의 공이치기를 당긴다. “이야기를 하느냐, 두 눈 사이에 총알이 박히느냐야.”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수염은 농담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11쪽,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중에서)

 

‘나’가 시작한 그 이야기가 궁금하시다고요? 그렇다니까요. 바로 그거거든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에 담긴 모든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다음은, 그 다음은?’이라는 마음의 소리를 반복하게 만들고, 그렇게 기발하고 통통 튀는 상상력으로 현실 안에서 초현실을 꺼내고, 초현실 안에서 현실이 떠오르게 하는 재주가 바로, 낯선 나라 이스라엘에서 건너온 작가 ‘에트가르 케레트’의 매력이라는 거죠. 그의 이야기,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반디| 작품은 그것의 태생적 배경, 즉 작품이 쓰인 시기의 역사적 상황, 작가의 성장 환경 등을 지니게 됩니다. 작가님의 작품 또한 이스라엘의 현대사라는 배경과 연관해 독해되곤 하는데요. 2013년, 한국 현대사의 자장 안에 있는 독자들에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로 묶인 작가님의 “주관적인 이야기”가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다가가길 바라시는지요?

 

에트가르 케레트| 지리적으로 멀리 사는 독자들이 최고인 것 같아요.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나라에서 살고 있는 저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 분들이 소설에서 발견하시거든요. 저는 독자들한테 이스라엘의 어떤 면을 가르치고 싶은 게 아니라, 스토리를 같이 나누고 공감하고 싶을 뿐입니다.

 

반디 | 표제작인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작가의 집에 괴한들이 들이닥쳐 이야기를 해 보라며 종용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첫 번째 순서로 하여 나머지 각각의 소설들이 배치된 점이 흥미롭습니다. 꼭 ‘천일야화’ 같기도 하고요. 다른 점이라면 책에 실린 이 소설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개별의 이야기라는 것이겠죠. 그 중에서도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이 이야기들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모든 이야기들을 시작하게 한 작가님의 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이 책이 쓰여진 때는 개인적으로 제 삶에서 매우 특별한 시기였습니다. 소설을 쓰는 사이에 결혼도 하고, 담보대출로 아파트도 얻고, 아이도 생겼거든요. 이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글을 쓰는 새로운 방식을 찾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써나갈 이야기가 과연 독자들에게 충분히 다가갈 지를 확신하는 데에도 시간이 조금 걸렸고요. 

 

표제작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계기가 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인물이 처한 환경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인물의 복잡미묘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거든요. 말하자면, 객관적인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객관적인 사건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니까요. 동일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트라우마로 남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살게 되는 것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삶에서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사건을 통해 주인공이 어떤 강렬한 감정을 느꼈느냐에 더 주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글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보다 아파트를 파는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삶이 훨씬 흥미로울 수도 있고요.  

 

제목인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은유합니다. 이 변화가 인물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고요. 예컨대, 잘 살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제 삶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누구인지는 몰라요. 그저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또 다른 삶이 펼쳐지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제가 부모가 되면서 다른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한 변화가 이 책에도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반디| 그런가 하면,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는 이야기 자체가 지닌 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될 테니까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를 읽으며 무엇보다 강하게 남은 인상 또한 그것이었는데요. 직접 이야기를 만들고 쓰시는 작가님께서도 이 이야기의 힘을 느끼신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은 일화가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사실 저는 작가로서 책을 출판하기 전부터 이야기에 힘이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어렸을 때의 일인데요.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주먹으로 남자를 때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몰랐지만 저는 그 상황에 대한 저만의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얼굴을 맞은 남자가 여자의 이복동생이었는데 어머니가 죽고 화가 나서 때린 거라는 식으로 맥락을 만들면서요.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폭력을 중화시켰던 경험이죠.

 

 

반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단편들에선 일상이 재기발랄하게 묘사되는 상황에서도 삶의 비의가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삶이란 땀을 흘리는 것, 삶이란 지랄맞게 잊을 수 없는 아픔”(190쪽, <치핵>)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하지만 인물들은 이런 삶일지라도 거부하지 않고 희망에 좀 더 가까이 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픔을 “살아 있는 느낌”(58쪽, <아침을 건강하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보이고요. 아픔 자체인 현실에서 문학의 역할,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사람들은 보통 기쁨과 고통, 두 가지로 감정을 구분하곤 하는데, 저는 뭔가를 느끼는 상태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로 구분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놀이공원을 갔다가 그곳을 나서면서, 누군가는 기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 감정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의 시간으로 아무것도 느낀 게 없다면 티켓을 낭비한 게 되겠고요. 물론 저 또한 삶에서 기쁨을 느끼는 편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떤 일로부터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제 삶 전체를 고통이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에서 기쁨만을 따로 분리해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아들한테 늘 하는 이야기가 ‘네가 원하지 않는 음식은 먹을 필요가 없지만 항상 모든 것을 맛보도록 하라’는 겁니다. 음식의 다양한 맛을 느끼듯, 삶이 가진 다양성을 충분히 활용하라는 의미죠.

 

반디| 많은 단편들에서 ‘거짓말’이 나오는데요. 기본적으로 허구인 소설 속에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내는 인물이나 그 거짓말로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가 등장하는 순간, 독자의 입장에선 허구인 이야기와 거짓말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야기와 거짓말에 대해, 작가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저에게 있어 소설(fiction)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이야기(story) 혹은 거짓말을 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거짓말이 있는데요. 어떤 상황을 모면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이 있는가 하면, 동정이나 연민 같은 인간적 감정이 작용해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도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면, 누군가에게 그 삶은 지금보다 조금 더 쉬워질 수 있지만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에게는 삶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살면서 거짓말을 하지만 의도는 거의 선한 것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허구인 이야기는거짓말로 점철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제가 가장 진실해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제가 쓰는 이야기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때 거짓말과 진실,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경계를 두기보다는 그 뒤에 있는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선한지 악한지에 대해 더 중점을 두는 편이고요.

 

반디| 개인적으로 <거짓말 나라>나 <문예 창작> 같은 경우는 결말에 이르러 아쉬울 만큼 더 보고 싶은 소설이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이어질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데요. 그만큼 이야기 내에 또 다른 이야기가 가지를 치는 식으로 쓰인 것이 꽤 있습니다. 특히 이것을 아주 짧은 단편 소설 안에서 시도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아무래도 단편소설은 형식상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기에 한계가 있을 텐데, 그럼에도 단편소설 쓰기를 선호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개인적으로 ‘선호’한다는 말은 쓰고 싶지 않아요. 저도 기꺼이 장편소설을 쓸 용의가 있긴 합니다. 출판업자도 좋아하고, 제 은행잔고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웃음) 하지만 단편소설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제가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작가인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 스스로가 결정한다고 느끼는데요. 예컨대, 어떤 문을 향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 문이 제 앞에서 닫히면서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있는 이야기가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르는 거죠. 이렇듯 저는, 소설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느낌을 갖는 게 독자들에게는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쓰기-읽기가 작가와 독자의 지성이 만나는 관계라고 본다면, 독자 나름대로 다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스스로 생각해보는 게 엄격한 틀에서 쓰여진 이야기를 접하는 것보다 좋을 테니까요.

 

반디|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떤 방식으로든 진실에 다가가는 작업이라면,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독자가 글로 쓰인 소설을 경유해 작가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매우 친밀해질 수 있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제가 타인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면 사람들은 그 경험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처럼(작가님께서 실제로도 이 말씀을 하실 때 통역해주시는 여성 분의 얼굴에 본인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 들이미셨더랬습니다^^) 독자들 또한 자신만의 상황이나 감정을 갖고 책을 읽을 겁니다. 그래서 같은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독자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고요. 예를 들어, 제가 쓴 한 편의 이야기를 두 명의 감독이 각각 로맨스와 호러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이야기인데도 로맨스 영화를 만든 감독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느꼈고, 호러 영화를 만든 감독은 무서웠다고 해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진실은 외부에서 보는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라 독자들 각자가 자기 삶과 관련해 질문을 이끌어내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진실인 거죠. 

 

반디| 소설집 안에는 작가님의 번뜩이는 상상력이 가득합니다. 평소에도 상상이나 공상을 많이 하실 것 같은데요. 불시에 찾아든 어떤 상상이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작가님만의 작업 방식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소설 쓰실 때의 습관이라든지, 작업하시는 공간의 분위기 같은 것도 궁금하고요.

 

에트가르 케레트| 저는 항상 다른 것들에 대해서 상상합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하고요.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하는 생각들이요. 어릴 때도 공상이 많은 편이었는데, 제가 공상한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불편해하거나 당황스러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은행을 턴다든지,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든지 하는 공상들은 점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게 되고, 제 사적인 감정으로만 남게 되었죠.

 

글쓰기 규칙 같은 걸 따로 정해 놓지는 않습니다.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글을 쓰려면 저 혼자만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아들이나 아내가 있으면 글쓰기에 집중하기 힘들어서요. 장소만 있다면 그곳이 깔끔한 곳인지 지저분한 곳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더운 나라다 보니 속옷 차림으로 쓸 때도 있고, 소설을 쓰면서 관련된 것들을 큰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한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예전에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외부 지원금을 받고 작가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창밖에 숲이 보이고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는데요. 한 번은 그곳에 초대된 친구가 저한테 묻더라고요. ‘네가 글쓰기를 할 때 창밖의 아름다운 숲은 보지 않고 변기를 쳐다보더라. 왜 그랬니?’ 그 질문을 받고 제가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닌데 글을 쓸 때는 물리적인 실제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글을 안 쓸 때는 저도 아름다운 경관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물리적인 장소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반디|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뜨겁고 민감한 곳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타국의 사람들에겐 이스라엘의 문학작품보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것도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작가님께 어떤 의미일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이스라엘이 분쟁과 갈등이 많은 지역이긴 하지만, 살기에는 나쁘지 않은 곳이고 글쓰기에는 더없이 좋은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이야기는 갈등관계와 다양성에 기반을 두고 쓰여지는데, 이스라엘만큼 갈등관계가 많은 곳도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사람에게 이스라엘은 천국과도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가끔 상상을 하게 되는데, 공항에서 여권 검사를 할 때 좋은 이야깃거리가 있는지를 보고 통과를 시켜주는 겁니다. (웃음)

 

반디| 살만 루슈디, 아모스 오즈, 조너선 사프란 포어, 얀 마텔 등 동시대 각국의 작가들에게 호평을 받으셨습니다. 작가님께도 한 사람의 독자로서 호평을 보내고 싶은 작가가 있을 텐데요. 동시대에 주목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면, 해당 작품과 그 이유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동시대 유대계 작가들과 매우 인상적인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마이클 샤본’ 등인데요.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정체성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작가들에게서는 이와 같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데, 저의 경우는 오히려 외국에 사는 유대계 작가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반디 | 정체성의 문제를 말씀해주셨는데요. 자국 내 작가들이 느끼는 정체성과 이주한 작가들-디아스포라-이 다른 나라에서 고민하는 정체성은 그 본질에 있어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정체성 문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질문을 항상 하게 되니까요. 만약 내가 유대계 미국인이나 유대계 프랑스인이라면 어느 쪽 정체성에 더 가까운지, 자신을 규정하는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학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주제를 쓰게 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죠. 이스라엘인이 곧 유대인이니까요. 그래서 이스라엘 문학에서는 개인적인 정체성 문제보다 집단적인 이슈, 어떤 것이 국가에 이해득실을 가져오는지를 고민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더 가까이 느끼는데요. 굳이 정체성을 구분하자면 제 자신이 이스라엘인이라기보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더 강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어떤 그룹에 속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어떤 측면에서 나와 맞지 않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동질감을 느끼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디|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감정을 중요시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체성 문제에 대한 작가적 관심이 국가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어진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대개의 사람들이 국적에 따른 정체성을 당연시하지만, 제가 쓰는 이야기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국적이 본질적으로 내재적으로 설정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늑대는 그저 한 마리의 늑대로 살아갈 뿐, 자기가 어떤 군락에 속해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사실상 국가라는 형태가 역사에 등장한 지는 얼마 안 됐고, 그 전까지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부족 형태로 살았잖아요. 이 국가라는 개념을 아파트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파트에 사는 세입자들이 공용 구역 청소를 얼마나 자주 하고, 침입자로부터 어떻게 사람들을 보호할 지 다같이 고민하는 것처럼, 국적을 선택하는 일도 같은 식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유대인은 꼭 이스라엘계가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이 국가와 연관된 자기 정체성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제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해 감정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그들의 문화가 개별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코스모폴리탄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고요.

 

반면에 이스라엘처럼 국적을 중요시 여기는 나라에 사는 것은 심리적으로 부담이 됩니다. 제가 ‘텔아비브’의 작은 동네에서 살았는데요. 여섯 살 때 축구 토너먼트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게 태어나 처음 보는 축구경기였는데, 저희 동네 팀과 다른 동네 팀이 겨루는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보다 보니 다른 동네 팀이 신사적인 태도로 경기를 더 잘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쪽을 응원했는데, 선생님이 왜 다른 쪽을 응원하느냐고 해서 반발심을 느꼈었습니다.

 

또 제게는 형 한 명과 누나 한 명이 있는데, 형은 무정부주의자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건국이 정당화될 수 없고, 그래서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소수인종으로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누나는 신앙심이 굉장히 깊어서 종교지도자가 곧 정치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열한 명의 아이와 열 명의 손자를 갖고 있는 분이죠. 그런데 이렇게 형제 자매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 형제 자매는 모두 친절하고 따뜻하고 똑똑한 사람들이니까요. 오히려 제가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제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탈세를 하기도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람을 볼 때 개인을 바라보지,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반디| 소설뿐 아니라 영화도 연출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작가님의 상상을 구현하는 데 있어, 소설과 영화 각각의 매력이 무엇인가요? 

 

에트가르 케레트| 영화의 매력은 여러 사람이 협업한다는 데 있습니다. 애초에 제가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 것인데, 글쓰기 자체는 작가가 혼자서 해야 하는 외로운 작업이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연극이나 영화에 관심이 생기고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저는 다른 사람과 일하면서 느끼는 연대감을 원했고, 그런 측면에서 영화가 큰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일하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갖을 수 있저는 일하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일하기를 선호하는데,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과 일하고 싶습니다. 

 

반디|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만큼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한국의 소설이나 영화, 혹은 그 밖의 문화를 접해보셨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부끄럽게도 한국에 대해 거의 모른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책을 읽은 적은 없지만, 굉장히 훌륭하고 유명한 한국영화 제작자들이 만든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호기심도 생기고 한국문화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껴져 앞으로 한국에 대해 더 배워볼 생각입니다.

 

에트가르 케레트(Etgar Keret)

 

이스라엘 젊은 세대의 가장 큰 지지를 받는 단편의 귀재이자 <뉴욕 타임스>로부터 '천재'라는 찬사를, 살만 루슈디, 아모스 오즈, 얀 마텔, 조너선 사프란 푸어 등 동료 작가들의 극찬을 받은 동시대 가장 독창적인 작가. 1967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1992년 소설집 《파이프》로 데뷔했다. 두번째 소설집 《미싱 키신저》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후 정체성과 사랑에 대한 고뇌, 고독감 등을 초현실적으로 그려낸 단편들을 발표해 카프카에 비견되었다. 《신이 되고 싶었던 버스 운전사》를 비롯해 《냉장고 위의 소녀》《네 편의 이야기》 등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여러 소설집이 35개국 3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여덟번째 소설집으로 기발하고 독창적인 스타일이 무르익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스라엘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2012년 미국에서 여섯번째로 번역 출간되어 그해 아마존 '올해의 책'에 선정된 것은 물론, 전 세계 22개국에 판권이 팔리는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밖에도 몇 권의 만화책을 공동 집필하고 어린이책을 썼으며 본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다른 예술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몇몇 단편이 그래픽 노블 《시차증》《가미카제 피자집》으로 묶여 나왔고, <리스트 커터스―어떤 사랑 이야기>의 원작인 중편소설 〈크넬러의 행복한 캠프 생활자들〉을 비롯해 40여 편의 작품이 영화화되었다. 그 자신도 영화에 조예가 깊어 아내와 공동 연출한 <젤리피시>가 2007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고 지금까지 영화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스라엘 출판협회에서 수여하는 플래티넘 상, 총리상 문학 부분, 문화부장관상 영화 부분을 수상했고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미란다 줄라이가 수상하기도 한 국제적 권위의 단편문학상 프랭크 오코너 국제 단편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현재 네게브의 벤구리온 대학교와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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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너 어느 장르에서 왔니? - 《인터뷰》의 만화가 루드비코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도서 이미지 제공 | 세미콜론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한창 흥행 중입니다. 이처럼 원작 웹툰을 소스로 만든 영화가 꽤 있죠. ‘이끼’라든가 ‘26년’이 그랬고, 앞으로는 ‘신과 함께’와 ‘목욕의 신’ 등이 제작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웹툰이 주도하는 이야기의 춘추전국시대! 이러저러한 웹툰이 영화화되길 바라는 독자 분들처럼 저도 기대를 걸어보는 웹툰이 몇 있습니다. 그 중 루드비코 작가님의 《인터뷰》를 빼 놓을 수는 없지요. 독특한 스릴러물로, 2011년 다음 만화속세상 연재 웹툰입니다. 이후 한동안 차기작을 볼 수 없어 아쉬워하던 차에 작가님의 이름 넉 자를 다시 만난 장르는 무려 코. 미. 디.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유머 있는 생활툰으로 그려낸 ‘만화·영화’였어요. 아니, 같은 작가 맞아? 대체 몇 개의 장르를 소화하는 거지? 마침 《인터뷰》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김에 직접 묻기로 했습니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들은 어디쯤에서 온 것인지요.

 

반디 | 《인터뷰》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사실 이 만화는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일찍이 단행본으로 제작한 적이 있었죠. 당시 한정판 이후 공식적인 책으로 시중에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나의 첫 책’을 받아보신 작가님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루드비코 | 기쁩니다. 물론 전에 한정판으로 판매된 적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1000부 한정이라 절반쯤 살아 있는 ‘미생’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서가에도 진열되는 공식적인 책이니까요. 평소 호감 있던 세미콜론이랑도 만나게 되어 기쁘고요.

 

반디 | 이미 완성된 웹툰이라고 해도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오려면 거의 처음부터 다시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웹툰과 출판만화의 차이 때문이겠죠. 작가님께서 ‘작가 후기’를 통해서도 언급해 주셨는데요. 《인터뷰》를 만들면서 경험한 양쪽 만화의 각기 다른 매력을 말씀해주신다면요?

 

 

루드비코 | 아무래도 웹툰의 최고 강점은 영상적 연출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 같습니다. 특히 영화의 롱테이크* 기법과 흡사한 효과를 낼 수도 있고요. 웹툰에 흥미를 보이고 붙잡고 있는 건 이 영상적 효과 때문이겠네요. 이 외에 음악이나 실험적 효과를 넣을 수도 있고요.  반면 출판만화는 읽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죠. 간지를 활용한 연출이나 책장의 넘김을 의식해가며 리듬감을 부여해야 하고요. 특히 컷과 컷이 단절되어 영화의 “컷” 효과처럼 무심하게 관객에게 이미지를 뜩! 하고 던져놓는 맛이 가능해서 좋습니다. 웹툰의 경우, 이미지가 점차적으로 스믈스믈 올라오니 뜩! 하고 던지는 “컷”의 맛을 내기가 힘드니 아쉽고요. 그런데 요즘은 N사의 스마트툰 같은 것도 있으니 꼭 그렇지도 않겠네요.

 

* 롱테이크(long take) : 테이크(take)는 카메라를 한번 작동시켜 하나의 쇼트를 촬영하는 것을 뜻한다. 롱테이크(long take)는 1~2분 이상의 장면이 편집 없이 길게 진행되는 것으로 영화의 시간과 공간의 사실성을 증대시키는 장면 구성 방법 중 하나다.

 

반디 | 웹툰과 책 모두를 접한 독자로서 저는 책에 더 깊게 몰입했던 것 같아요. 스크롤을 내리며 볼 때는 놓쳤던 내용이나 구성을 찬찬히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별개의 이야기들이 한 접점에서 만나지는 식의 치밀한 구성이 인상적이고, 일종의 추리극과 닮아 있기도 합니다. 작가님께서는 그보다 ‘부조리극’에 가깝다고 하셨는데요. 이를 위해 구성상에서 특히 공들인 부분이 있다면요? 

 

루드비코 | 사실 인터뷰는 리얼리즘 기반의 추리 장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죠. 물론 추리 요소로 재미를 주려는 의식적인 시도와 보일 듯 말듯 심어놓은 밑밥들이 퍼즐 맞추기의 쾌감을 주기도 하니 어느 정도 추리장르의 속성이 있긴 하지만, 인터뷰에 나오는 작은 이야기들은 현실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이죠. 이상한 우연이 겹쳐 상황이 꼬이고, 아무런 의도도 없던 미세한 행위들이 나비효과가 되어 부조리하게 희극을 비극으로 비틀어 놓기도 하죠. 작은 이야기와 큰 이야기 모두 그런 말도 안 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분명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저에게 최근에 일어났던 불행들, 저를 힘들게 만들었던 일들에 비춰보면 오히려 이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네요.

 

사람들은 대부분 제각기 합리적, 논리적, 권선징악, 인과관계에 기반한 사고를 갖췄지만, 그 사람을 둘러싼 외부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우발적, 비논리적, 가변적일 때가 많아서 거기서 발생하는 혼란들 탓에 조그만 불행도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라면서요. 아마 《인터뷰》를 그렸을 땐 그런 부조리함의 부정적인 특성, 어두운 측면만을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네요. 우연이 나쁜 쪽의 방향으로 전파될 때도 있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파될 때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노력여하에 따라 완전히 필연적인 결과물을 만들긴 물론 힘들겠지만, 좋은 쪽의 우연을 발생시킬 확률을 높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거 굉장히 거창해져버렸네요. 질문은 구성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 답변이 《인터뷰》를 읽는 독자 분들께 더 유효할 것 같습니다.

 

반디 | 만화의 내용은 단 한 권의 소설책으로 유명해진 작가가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삼류 기자에게 여러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이야기들 중에서 작가님께서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거나, 이 만화를 처음 있게 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그 일부를 독자 분들에게 맛보기로 소개해주세요.

 

루드비코 | 아마도 ‘헝가리 사진사’ 같습니다. 가장 처음 나온 이야기였거든요. 전날에 대학교 판화교수님 작업실에서 기기괴괴한 현상실을 들락날락하며 작업하다 ‘이런 공간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다음날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다 순식간에 헝가리사진사의 주된 플롯이 조립됐습니다. 이후에 조금 살을 붙이거나 덜기도 했지만 처음에 조립된 플롯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은 것 같네요.

 

 

반디 | 작가가 작품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과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의문점에서 만화를 구상하셨다고요. 실제로 ‘작가(창작자)에게 현실이란? 그 속에서의 창작이란? 그리고 진실이란?’과 같은 묵직한 질문이 만화 속에서 거듭되고 있는데요. 이 작업 이후 의문점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루드비코 | 그건 제가 해답을 알고 있거나 구하려 했다기보다 단지 제 스스로가 헷갈렸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답은 이거다! 이것이야 말로 최상의 답변이다! 이자식이 나쁜 놈이다!”라며 해결책을 내놓는 이야기보단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그럴까?”라며 질문하는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건 제 스스로의 개인적 특성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네요. 저는 제 스스로가 피곤할 정도로 회의적이고 의심이 많아 헷갈리는 게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만화를 그릴 땐 좋은 태도 같은데, 정신적으로는 굉장한 스트레스를 주는지라 요즘은 그나마 잠정적인 결론이라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반디 | 창작의 바탕을 영화에 두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영화광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시죠. 《인터뷰》의 인물들은 각각 특정 감독과 배우를 모델로 하고 있고,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차기작으로 영화를 소재로 한 ‘루드비코의 만화·영화’를 연재하셨을 정도인데요. ‘씨네키드’가 된 데는 부모님이 운영하던 비디오 가게의 영향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루드비코 | 별 건 없는데요. 알려진 대로 어머니가 비디오가게를 운영하셨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영화를 좋아하셔서 신작이 나오면 옆에 앉아서 하루종일 몰아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약 7살?) 어린나이에 보면 안 되는 영화도 많이 봤습니다. ‘토탈리콜’이나 ‘블레이드 러너’같은 폭력적이고 팔 잘리고 목 잘리는 자극적인 영화도 엄마 옆에서(!) 많이 봤는데, 저는 전혀 폭력적이지도 않고 학창시절 싸움한번 하지 않은 건전한 사람으로 자라났습니다. 고로 폭력적인 대중매체나 웹툰이 폭력적인 학생들을 유발한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여성가족부 보고 있나?

 

반디 |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요청도 종종 받으시겠지요. 이 질문도 역시 비슷한 요청이 되겠네요.^^;; 《인터뷰》에서처럼 유명한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상상을 하는데요. 작가님께서도 그런 상상을 해보신다면 특히 이야기하고 싶은 감독이나 배우가 있나요? 그들의 대표작과 함께 독자 분들에게도 소개해주세요.

 

루드비코 | 음, 우선은 너무 많아서 한명만 꼽긴 힘들지만, 올해 개봉작중으로 한정하자면 ‘문라이즈 킹덤’의 웨스 앤더슨을 인터뷰해보고 싶습니다. 이분 영화를 볼 때면 단연 천재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되죠. 너무나도 독특하고 낯선, 유아틱하지만 결코 유치하지 않은 유머감각, 또 한편으론 쓸쓸한 미장센, 그러면서도 가슴까지 저며 오는 감동을 함께 주는 웨스 감독님의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네요. 특히 ‘문라이즈 킹덤’은 이분 영화중에서도 단연 압권입니다.

 

 

 

반디 | 모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위대한 캣츠비》로 웹툰을 처음 접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영화계를 지나 웹툰계로 접어든 시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그 후에도 《위대한 캣츠비》 만큼의 충격을 준 웹툰을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있었다면, 그 중 몇 편을 독자 분들에게도 추천해주세요.

 

 

루드비코 | 《위대한 캣츠비》 말고도 강도하 작가님 만화는 대부분 좋고요. 조금 색다른 충격이었다면 네온비님의 《기춘씨에게도 봄은 오는가》가 좋았습니다. 유쾌하면서도 뭔지 모르게 사악한 유머감각이 좋았어요. 시니·혀노님의 《죽음에 관하여》도 좋았습니다.

 

반디 | 영화나 웹툰뿐만 아니라 평소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주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독서도 활발히 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근래 관심사라든가, 요즘 읽고 있는 좋은 책이 있다면 반디앤루니스의 많은 독서가 분들과 공유해주세요.

 

 

루드비코 | 다독이라는 게 꼭 책으로만 한정하는 게 아니라 영화나 연극 등을 포함한 다양한 인풋이 중요하단 말이었는데, 제 의도와 조금 다르게 인터뷰가 나가서 제가 무슨 다독왕처럼 포장되어 버렸네요. 뭐, ‘활발히’까진 아니지만 틈나는 대로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하곤 있습니다. 최근엔 과학 서적을 주로 많이 읽고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 같은 진화론 시리즈나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처럼 대중화된 양자물리학 서적 위주로 읽고 있습니다. 

 

반디 | 많은 독자 분들이 《인터뷰》를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데뷔작인 ‘크리켓 마스크’와 완결된 ‘루드비코의 만화·영화’의 책 출간을, ‘만화 일기’의 연재분을, 레진 코믹스의 새 웹툰을 기다리게 될 텐데요. 목 빠질 독자 분들을 위해 책 출간 계획을 들려주세요. 더불어 ‘루드비코의 만화·일기’ 이후의 차기작은 어떤 이야기가 될지 살짝 알려주신다면요?

 

루드비코 | 저는 이상하게 차기작 정보를 조금이라도 흘리면 꼭 김 샌 콜라마냥 시나리오쓰기가 싫어지더라고요. 대략적인 정보만 말씀드리면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로 돌아가, 한 남자가 주인공인, 긴박감 넘치는 스릴러를 그릴 생각입니다.

 

반디 | 현재는 ‘루드비코의 만화·일기’로 《인터뷰》와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작가가 천재다!’부터 ‘작가가 미쳤다!’까지 다양한 반응을 쏟아내고 있는데요. 정작 작가님 본인은 어떤 만화가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루드비코 | 어떤 장르를 해도 본전은 쳐주는 신뢰감 있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다양한 장르를 해보는 작가가 되고 싶은데, 좀 뒤처지는 작품이 있더라도, 그 수준이 아주 밑바닥까진 떨어지지는 않는, 재미와 질이 균등한 작가가 되고 싶고요. 덧붙이자면 사실 코믹함과 유머라는 영역은 제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습니다. 거의 노이로제가 생길 정도로요. 유머라는 건 가장 까다로운 장르죠. ‘루드비코의 만화·일기’는 가장 취약하고, 어울리지 않는 장르로 들어 가보자라는 취지 아래 그리게 된 작품입니다.

 

반디 | 마지막으로 긴긴 여름을 보낼 독자 분들에게 덕담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루드비코 | 어렸을 때부터 여름이라는 계절을 가장 좋아합니다. 추억도 여름에 관한 추억이 가장 많고, 좀 덥긴 해도 그만큼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계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역시 이런 여름엔 낮엔 개발에 땀나듯이 뛰놀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선 시원한 과일 먹으며 만화책 보는 게 제맛이죠. 특히 심장쫄깃한 스릴러만큼 여름에 잘 맞는 장르가 없는 것 같아요. 여러분, 호평일색 스릴러 만화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루드비코

 

198*년에 태어났다.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크리켓 마스크’로 데뷔했으며 ‘인터뷰’, ‘만화·영화’를 연재했다. 현재 ‘만화·일기’를 연재 중이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비디오 가게를 공부방 삼아 영화를 자습하여 그 결과를 만화에 속속 이용하고 있다. 광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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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 죽어도 다시 한 번

 

 

커트 보네거트 |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 문학동네 | 2011 

 


하얀색 날개를 달고 서 있는 커트 보네거트 씨가 보입니다. 두 손은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내려 쓴 안경 위로 보이는 두 눈이 뭔가를 응시하고 있는 걸 보니, ‘역시 그답다’라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됩니다.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움을 재기발랄함과 엉뚱함, 유머와 재치로 유쾌하게 녹여내는 보네거트 씨말입니다. 문득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라는 그의 말이 떠오르네요. 그의 입에서 튀어 나온 듯, 말풍선 안에 적혀 있는 책 제목 또한 그의 이런 유머를 담고 있는 것이겠죠?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이 책은 그 키보키언 박사의 도움을 받아 임사 체험을 하며 사후세계 취재 기자로 나선 커트 보네커트의 가상 인터뷰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푸른 터널의 끝에서 천국의 문을 볼 수 있고, 그곳에 도착해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 아돌프 히틀러, 메리 셸리 등의 인사들을 인터뷰하게 됐다는데요. 황당하면서도 기발한 상황 설정이 그다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합니다. 사실 보네거트 씨는 스스로, 자신이 내세나 천국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거든요.

그는 “사후의 보상이나 처벌을 기대하지 않고 항상 품위 있게 행동하고자 노력해왔”던 인도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이 인도주의자들은 신이 아니라 “그들에게 어느 정도 친숙한 단 하나의 추상적 실체, 즉 그들의 지역사회를 위해 최선으로 봉사하는 것에 만족”하는 현세를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이고요. 그런 그가 내세로 건너갔다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미 죽었지만 다시 한 번 만나야 할 사람, 기억해야 할 혹은 잊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거나 그들을 만나 들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거라고요. 

죽느냐 사느냐

이미 죽은 사람을 만났다지만, 사실상 그들에게서 보네거트 씨가 듣고자 하는 이야기는 살아생전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먼저 그가 처음 인터뷰한 인물인 메리 D. 에인즈워스 박사는 ‘생후 첫 일 년 동안의 모아 결속 또는 결속의 부재가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에 대해 활발하게 연구했던 발달심리학자였는데요. 이는 곧 생애 초기에 어머니 같은 존재와의 애착관계가 성장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현재 그렇지 못한 사회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은퇴한 건설노동자이자 동물애호가였던 비아지니와의 인터뷰에서는 그의 말을 빌어, 사랑하는 애견을 지키려다 심장 발작으로 사망한 것이 ‘베트남전쟁에서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다.’라는 자신의 의중을 드러내며 전쟁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합니다. 게다가 이와 같이 국가나 체제에 의해 자행되는 잔인한 폭력과 대량 학살의 문제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애버리지니, 테즈메이니아인, 아돌프 히틀러 등의 이야기로 이어지며 그 비판의 날을 더 날카롭게 세우기도 하는데요.

다른 한편 커트 보네거트 씨는 국가 내부적 차원에 있어서도 법과 질서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삶을 억누르고 짓밟았던 역사를 불러들이며 ‘현세의 삶’을 위해 우리가 맞서 싸우고 지켜내야 할 게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합니다. 다시 말해, 노예폐지론을 주장해 미합중국에 대한 반역죄로 교수형을 당했던 ‘존 브라운’과 초기에 노동조합을 조직한 운동가들을 법정에서 변호하고, 인종차별과 사형제도에 강력하게 반대했던 변호사 ‘글래런스 대로’, 미국의 주요 산업인 철도 부분에서 처음으로 성공적인 파업을 조직하고 이끌었던 ’유진 빅터 데브스‘ 등에 대한 인터뷰들은 모두,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들의 흔적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말하자면 보네거트 씨는 인터뷰이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죽은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삶과 사회의 모습을 현재로 불러 오는 것인데요. 그중에는 누구나 알고 있듯, 히틀러처럼 수많은 목숨들을 끔찍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내동댕이쳤던 사람도 있고, 존 브라운, 마틴 루터 킹, 글래런스 대로, 유진 빅터 데브스처럼 좀 더 나은 그들의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결국 삶과 죽음 사이를 오고가는 인터뷰어 커트 보네거트의 상황처럼, 삶에서 죽음을 묻고,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세상살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더욱이 이와 같이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한 고민을 극대화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책의 기본 설정인 닥터 잭 키보키언이라는 인물과 임사 체험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독극물주자 사형실입니다. 다시 말해, 실제로 삶을 마감하고 싶어 하는 말기 환자들 130 여명에게 치사 약물을 투여해 죽음을 도와주며 적극적 안락사를 찬성했던 키보키언 박사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안락사 논쟁의 이슈를 던져주는가 하면, 그가 임사 체험 동안 누워 있었던 사형실의 침대와 그 공간의 존재 자체는 어떤 이유에서건 인간이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사형제 존폐에 대한 고민으로 우리를 이끈다는 것입니다.

역시 커트 보네거트 씨.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고민해야 할, 죽음에 대한 민감한 이슈들을 잘도 한자리에 묶어 놓았죠? 아주 짧은 분량의 책으로 아주 무거운 고민거리를 안겨준 그대에게, “신의 축복이 있기를, 커트 보네거트 씨” 당신은 사후세계에서 제가 반드시 한 번은 인터뷰하고 싶은, 죽어도 다시 한 번은 만나보고 싶은 첫 번째 유명인사가 되셨습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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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열대> - 눈치 볼 이유가 없다!

 

앤(ANN), <기쁜열대>, MIRRORBALL MUSIC, 2010

 

 

이승철, 조성모도 ‘노래 잘하는 신인’으로 오해받는 이 시대, 두려움 없이 돌아온 인디 밴드가 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앤(ANN). 과연 그들은 누구이며, 아이돌이 판치는 세상에 무슨 마음으로 앨범을 들이 밀었을까. 앤(ANN)의 보컬 장현정과 밴드의 역사와 음악,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인디에 대해 들어봤다. _ 반디(ak20@bandibook.com



- 먼저 밴드 이름에 대해서 얘기 좀 해야겠다. 앤(ANN)이라. 처음 들었을 때 빨간 머리 소녀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소개글을 보니 ‘12년 만에 다시 뭉친 한국 인디 밴드 1세대’라고 하는데,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밴드 결성 히스토리(history)를 들려 달라. 근데 30대에 ‘1세대’란 말을 듣기에 불쾌하거나 부담스럽지 않나?

앤은 1996년에 부산에서 결성됐고, 98년에 데뷔 앨범을 내면서 홍대로 거주지를 옮겨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멤버들이 각자 다른 밴드에서 음악을 시작하던 90년대 초, 밴드들의 이미지가 너무 마초적이거나 무겁고 의미심장했는데 그런 경향이 맘에 안 들어서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이름만으로는 아무 것도 유추할 수 없는, 그리고 그냥 가볍게 불릴 수 있는 이름을 고민하다가 밴드 이름을 지었다. 

1998년이 한국 인디의 원년으로 평가되면서 여러 모로 타이밍은 좋았다. 데뷔 첫 해, 350회 정도 크고 작은 공연을 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2년 반 정도 활동하다 2집 준비과정 중 해체했다. 중간에 ‘서태지 레이블’에서 2집 작업제의도 있었고 잠시 재결성을 고민했는데 그냥 각자 가던 길 가기로 결정했다. 이후 몇몇 멤버는 다른 밴드 꾸리고 이대우(드럼)는 회사 들어가고 나는 부산 와서 대학원 진학했다. 그러다가 12년 만에 다시 앨범을 내고 활동하게 되었다. 30대 중반에 데뷔하는 밴드도 많으니 1세대란 말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불쾌할 것까진 없다. 어차피 무대 위에선 나이는 별 상관없다.(웃음)


- 앨범 제목이 ‘기쁜 열대’다. 앤(ANN)의 기반이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부산이라 열대기후가 기쁠지 모르겠으나 열대기후는 반갑지 않다. 올해 날씨가 너무 뜨겁고 비가 많이 와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난 열대야도 싫다. 하여튼 무슨 생각으로 ‘기쁜 열대’라 했나.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아니길 빈다. 어렵다.(웃음)

이번 앨범의 가사 방향에 대해 의논하면서, 전반적으로 가난한, 추한, 모자란, 늙은. 뭐 이런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작은 이야기들을 쓰자 라는 이야길 나눴다. 그러던 중 이대우(드럼)가 ‘기쁜열대’ 가사를 가지고 왔다. 제목을 못 정하겠다고 하는데 문득, 레비스트로스라는 인류학자의 유명한 책 제목인 ‘슬픈열대’가 떠올랐다. (하하, 아니길 빌었는데 미안하다.)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야만이랄 수 있는 미개한 지역 사람들에 대한 책인데, 그들은 미개한 게 아니라 그냥 다를 뿐이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고 자기들만의 다른 문화가 있을 뿐이다, 단 하나의 기준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는 건 폭력이다, 라는 게 그 책의 요지다. 그래서 그 제목을 패러디해서, 도시의 많은 군상들을 보며 저들도 저마다 자기만의 이야기, 사연이 있고 하나하나가 다 우주인데... 뭐 그런 느낌으로 기쁜 열대라는 제목이 어떠냐고 제의했고 몇 가지 후보들 중 이대우가 그 제목을 선택했다. 음악도 우리가 의도한 컨셉에 가장 알맞게 마무리된 곡이 그 곡이기도 하다.

 

 

 


- 본격적으로 음악 얘기를 해보자. 잠시 본인이 하는 음악에 대해 장르에 대해 말해 달라. 내가 음악을 안 듣는 편은 아닌데 장르 구분은 쥐약이다. 앨범 홍보할 수 있는 시간을 줄 테니 맘껏 해도 좋다.


딱히 어떤 장르라고 말하긴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98년에 낸 1집의 경우도 사람들은 혼혈이란 의미의 ‘하이브리드(Hybrid)록’ 이라고 말하곤 했는데 비슷한 색깔은 있는 것 같다. 여러 장르들 중 저희 감성에 와 닿는 것들이 우리만의 방식으로 재배치되고 재편집되고 재해석되는 식이다. 다만 1집엔 힙합, 레게, 스카 등의 장르가 하드코어 같은 거친 음악과 섞여있었다면, 이번 앨범은 맨 처음 우리가 음악에 매력을 느꼈던 록키드 시절, 즉 중학생 때 유행하던 뉴웨이브, 헤비메탈, 디스코 등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여러 장르를 섞어봤다. 그래서 1집과는 달리 보다 상큼하고 경쾌한 느낌이 나고 전자음도 전폭 추가됐다.

1, 2번 트랙은 뉴웨이브의 느낌. 3번은 심플한 레게, 4번은 정직한 8비트의 대학가요제 느낌. 5번은 헤비메탈에 대한 코믹한 오마주. 6번은 다소 퇴폐적이고 앨범의 다른 수록곡에 비해 좀 튀는 디스코 리듬 같은... 7번은 라이브 때 제일 다이내믹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 정통 록음악이라 넣었다. 원래 여름에 내려고 했는데 한 평론가 말로는 가을에 내길 잘했다고 한다. 청량감이 느껴진단다.(웃음)


- 앨범을 듣고 가장 좋았던 것은 ‘힘주지 않음’이다. 보컬도 그렇고, 연주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서로 잘 어울린다. 어떤 느낌이냐면, 어떠한 지점을 향해서 달려가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잘하는 걸 즐겁게 하는 느낌이다. 나는 이게 이번 앨범의 가장 큰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인디란 게 주류 대중음악이 목표하는 지점과는 다른 곳을 향하고 있기에 방송, 큰 페스티벌 등 큰 목표를 잡지 않았다. 또 예전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이름을 알리고 메이저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다. 그런 것이 우리 음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될 리도 없는데 예전엔 어렸던 것 같다. 욕심도 많았고.

우리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거대담론이 가진 위선을 본능적으로 더 잘 감지한 세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큰 이야기들이 사라진 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 지 고민할 만큼 강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강하기에 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이전 세대라면 우리 세대는 작은 이야기의 중요성을 알지만 이전 세대보다는 훨씬 나약한 세대라고도 생각한다. 그래서 건강한, 기쁜, 긍정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른 정서의 작품들도 나름대로 중요하겠지만, 우리가 음악적으로 풀어낼 수 있는 부분은 바로 그런 부분 아닐까 생각했다. 비판하기보다 껴안아주고, 비꼬기보다 웃어넘길 줄 아는.

뭔가 한결 단단하고 넓어진, 견고해진 모습과 음악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 답이 아마도 힘주지 않고 좀 더 편안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1집은 완전 자의식 과잉의 나약한 냉소로 가득한 앨범이지만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그것도 나름 자랑스럽긴 하다. 하하!


- 이준오(Casker)는 “그들 특유의 낙천성이 그대로 남아있고 한국적인 정서가 groovy한 리듬과 묘하게 결합되어있는 사운드도 여전히 흥겹다. 거기에 전폭적으로 추가된 전자음들은 뉴웨이브의 향수마저 느끼게 한다”고 이 앨범을 평했다. 낙천성, groovy한 리듬, 흥겨운 사운드 등 대부분 동의한다. 그런데 ‘전폭적으로 추가된 전자음들’이 좀 촌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걸 이준오는 ‘향수’라고 표현한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가 사용한 전자음의 목적은 최근 트렌드인 일렉트로니카나 시부야계열의 라운지, 혹은 테크노 음악처럼 최첨단의 고급스런 느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어릴 적 듣던 뉴웨이브 계열의 음악, 예를 들어 듀란듀란이나 조이의 ‘터치 바이 터치’ 같은 노래들을 떠올리면 알겠지만 그런 느낌의 전자음을 의도했다. 그래서 아마 듣는 분들에게 최근 많이 들을 수 있는 일렉트로니카 계열의 전자음(좀 차갑지만 도시적인 느낌이죠)보다는 촌스럽고, 대신 조금은 따뜻한 느낌이 묻어나지 않을까 생각하고 선택한 거다.


- 음악에서 한 발짝 나와서, 멤버들이 각자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새 앨범을 내게 된 계기는 뭔가. 광안리 해수욕장 근처 포장마차에서 멤버들이 모여 소주를 한 잔 하고 있다고 상상해보자. 각자 다른 모습을 한 멤버들을 볼 때 어떤 느낌이 되는가.

앤이 정식으로 해체한 게 2001년으로 기억하는데. 당시엔 멤버들도 20대 중반이 되고 생각도 좀 깊어져서 보다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 같다. 과연 인디가 뭔가, 우리가 하는 방식이 옳은 건가. 그러다 부산에선 가능성이 없고 서울에서 싫더라도 메이저로 가야되는 건가, 하는 논쟁이 좀 있었다. 나랑 최성훈(기타)이 부산에 내려와서 초심으로 돌아가 2집 준비를 하게 됐고 이대우(드럼)는 아예 음악을 관두고 취업 준비를 하게 됐고 나머지 멤버는 모두 서울에 남아 다른 밴드를 만들었다. 그러다 최성훈과 내가 2집에 대한 생각이 크게 엇갈리는 바람에 결국 최성훈도 서울로 가고 나만 부산에 남게 됐다.

근데 나는 지금(30대 중반)쯤 되니까 진짜 돈이나 명예랑 상관없이 인디답게 음악 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고 본다. 눈치 볼 이유가 없다. 지금은 다들 자기 밴드 있고, 자기 일이 있으니까. 긴 시간을 보내고 내린 결론은 ‘앤’같은 밴드는 서브(sub) 로 해야지 인생의 메인이 되면 골치 아파진다는, 뭐 그런 암울한 결론에 도달했다고 할까? 하하!


- 오, 의미 있는 성찰이다. 원래 좋아하는 걸 일로 해야 하나 취미로 해야 하나 말이 많지 않나. 밴드도 삶 속에서 인디로 만들어 버리는, 진정한 인디 밴드다!(웃음)  

원래 2008년에, 그러니까 98년 앨범 낸 지 10년이 됐을 때 가벼운 마음으로 10주년 공연이나 오리지널 멤버들로 한 번 하자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다 작업을 해보니 옛 생각도 나고 의외로 탄력이 생겨서 아예 4곡 정도 들어가는 미니앨범을 내자는 걸로 얘기가 바뀌었다. 작업해보니, 멤버들이 서로를 눌러주고 또 뽑아내주고 하는 호흡을 느꼈다. 우리가 모였을 때 서로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구나, 하는 묘한 깨달음. 그래서 각자의 생활에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쪽으로 얘기가 진행됐고 그 결과물이 7곡의 미니앨범 형태로 나오게 됐다.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지는 또 생각해봐야 될 문제다. 아마 당분간은 최대한 많이 노력해서 옛 팬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고 싶고 많은 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작업과 결과물, 그리고 공연은 너무나 맘도 가볍고 즐겁다. 지난 9월17일 서울에서 있었던 쇼케이스도 반응이 좋았다. 아마 그런 쓸데없는 중압감이 적어도 현재의 앤 안에서는 사라진 것 같고 그게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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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상상할 수 없어 더 특별한 - 꽃별 1부



프롤로그: “나의 잃어버린 기억과 결코 지워지지 않는 자국들...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함께 잘려나간 좋았던 순간. 아프지 않은데도 엉엉 울어버린 어느 날... 그러나 봄은 다시 오고 꽃은 새로 핀다. 잃어버린 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꽃별의 “Yellow Butterfly” 중 일부)

꽃별의 4집 음반 “Yellow Butterfly”는 잃어버린 것들 그리고 낯선 곳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Yellow Butterfly”는 길 위에서 만난 소중한 것들에 대한 기억을 곳곳에 담고 있다. 그녀가 길 위에서 본 것을 무엇일까. 6월 초, 꽃별을 만나 그녀의 음악, 여행 그리고 책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다. (글 안늘, 홍군. 사진 꽃별, 포니캐년 코리아 제공) 

4집 음반 “Yellow Butterfly”를 내고 5월 1일에 공연 하셨죠?
되게 많이 오셨어요. 요즘 경기도 어렵고, 연휴도 있어서 많이 안 오실 줄 알았거든요. 처음 공연을 잡을 때는 연휴 생각을 못했어요. 쉬는 날이니까 출근 안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시겠지 생각하고 나름 작전을 짠 건데.(웃음) 공연이 다가오면서 마음을 비웠어요. 근데 많이 와주셔서 기분이 정말 좋았어요. ‘아, 걱정 많이 한다고 잘 되는 건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그냥 열심히 준비하고 기다렸더니 잘 된 것 같아요.  

공연 분위기는 어땠나요?
이번 음반이 기존에 제가 했던 음악하고는 좀 다르잖아요. 그래서 예전보다 차분했어요. 파도가 치는 듯한 사운드를 가슴에 담고 가실 수 있게끔 공연 준비를 했는데 이번 음반에 아픔, 많은 생각을 담아서 그런지 관객들도 아픔이나 무거움을 들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막 즐거워할 수만은 없는 그런 음악이요. 근데 공연 막바지로 가면서는 빠르고 스케일 크고, 친숙한 곡들을 연주했더니 분위기가 뜨거워졌어요. 공연 끝나고 관객들이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모를 정도로 공연이 짧게 느껴졌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다음에는 ‘말을 좀 짧게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있었고요.(웃음)  

무슨 말을 그리 많이 했길래. 기억에 남는 말이라도 있나요?
사실 하고나서 다 잊어버려요. 준비해서 한 말들은 기억이 나는데, 저도 모르게 한 말들은 잘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근데 그걸 또 관객들이 말씀해주세요. 이번 음반 만들게 된 동기가 여행이었어요. 컨셉도 여행이었고요. 제가 여행 중에 느꼈던 좋았던 점을 말씀드렸죠. 여행이 낯선 곳을 가는 거잖아요. 특히 혼자 하는 여행은 더 그래요. 두려움도 있고, 사람들에게 말 걸기도 어렵고, 이 길이 맞는지 계속 걱정하고. 근데 그 두려움에서 한 발짝 더 나가면 모험에서 오는 즐거움이 있더라고요. 그 얘기를 했더니, 많이들 기억을 해주세요. 

‘두려움에서 한 발짝 더’란 표현 멋지네요. 이번 음반이 한국대중음악상이 선정한 4월 5주 ‘이 주의 음반’으로 선정됐어요. 축하드립니다!
(눈이 커지며) 네? 몰랐는데.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찾아볼께요.(웃음) 

음악, 여행을 담다, 닮다 

여행을 모토로 해서 그런지 음악에서 유럽을 부유하는 자유가 느껴져요.
여행에서 느끼는 두려움 반, 설렘 반의 수줍은 마음, 훌훌 떠났을 때의 자유로움, 한참 걷다가 신발 벗고 맨발로 앉았을 때 발가락 사이로 바람이 스치는 좋은 느낌,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마음에서 계속 싸우고 있는 느낌들까지 담고 싶었어요.  

마음에서 싸우고 있는 느낌이요?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놓고 온 것들이 잘 있을까? 나 없이도 잘 지내고 있을까’ 하는 거요.(웃음) 그리고 일상에서 묻어두고 있던 감정들을 여행에서 계속 곱씹고 그러잖아요. 그리고 앞으로 저의 모토가 되면 좋겠다 싶은 게 만남이거든요. 집시들과의 만남, 여행자와의 만남,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의 만남. 눈빛이 통하든, 나에게 물을 건네서 통하던, 그 사람의 춤에 반하던, 그런 소통이요. 그런 것들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음악 얘기하기 전에 어디 여행하셨는지 들어야겠어요. 무척 궁금해집니다.

제가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를 정말 좋아하는데, <순례자>와 <연금술사>에 나오는 ‘순례자의 길’이 있어요. 스페인 북부의 800km나 되는 길이에요.

옛날에 산티아고라는 성인이 걸었다는 길인데, 저는 종교적인 걸 떠나서 책을 보고서 ‘아, 여길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작년에 프랑스에 공연이 있어서 갔다가 15일 정도 시간이 남아서 ‘이번 기회에 걸어야지’하고 갔어요. 원래 800km를 걸으려면 40~45일 정도 걸려요.  

혼자서 다녀오신 건가요?
네. 그래도 가면 동행자들이 있으니까. 그때 느낀 게 많았어요. 정말 제 인생의 최악의 여행이자 최고의 여행이었어요. 고생을 많이 했어요. 갔다 왔을 때 살이 더 빠졌었고, 많이 타기도 했어요. 

해금은 동행 안했나요?
함께하지 못했어요. 제가 가져간 짐이 35리터였는데, 그것도 ‘꽤 무거운 정도’를 넘더라고요. 길을 떠나기 전에 ‘짐은 자기가 인생에게 가져가는 업보와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짐은 가져가지 마라’는 말을 들었어요. 아무리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도 두 번 생각해 보면 쓸데없고, 하루만 걸어도 버리게 되니까요. 최소한으로 줄이니까 35리터가 되더라고요. 그걸 메고 하루에 20km에서 40km를 걸었는데 거의 행군이었어요. 태어나서 그렇게 걸어본 적이 없어요. 게다가 혼자니까 말벗도 없고, 같이 쉴 친구도 없고, 너무너무 외롭고, ‘내가 여기 왜 왔을까. 내가 미쳤나?’ 생각도 들었어요. 파울로 코엘료가 뭐길래.(웃음) 

파울로 코엘료가 꽃별 씨를 순례자로 만든 셈이네요.

그렇죠. 파울로 코엘료는 저에게 많은 영향을 줬어요. 책을 보면서 ‘뭔가 있는 길이겠구나’ 했고, 다 걷고 나니까 ‘역시 뭔가 있는 길’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긴 어느 길이든 40일을 자기 자신에게 도전하고 힘든 걸 계속 극복해나가는데 누군들 뭔가를 얻지 못하겠어요?(웃음) 물론 저는 15일 정도 못 걸었지만요.  

15일도 대단한데요.

800km를 다 걷지는 못하고 버스도 타고 택시도 타고 했어요. 근데 너무 힘들고, 목마르고, 외롭고 그러다가도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면 시간이 그렇게 아까워요. 다시 걷고 싶고. 순례자의 길에는 800km 내내 노란 화살표가 있어요. 그러니까 지도고 뭐고 아무것도 없어도 갈 수 있죠. 가끔 놓치기도 하고, 헤매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지만요. 근데 버스 타고 가는 길에는 화살표가 없어요. 그러니까 도리어 무섭고, 빨리 갈 수는 있지만 성의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걷는 게 훨씬 좋았어요.  

한 가지는 확실히 얻었겠어요. 관절염.
관절염도 있었죠. 그래서 발목이 나가고, 발목이 나가서 비정상적으로 걷다보면 몸이 다 흐트러져요. 무릎도 아프고, 고관절도 아프고. 완전 만신창이었어요. 

무슨 고집으로 끝까지 걸으셨어요. 운동선수도 아닌 뮤지션이.

하하하! 힘든 것과 행복함은 같이 있는 거 같아요. 너무 힘들기 때문에 최고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거든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있는 피레네 산맥을 걸었어요. 산맥을 타기 전에 아래서 올려다보는데 ‘이걸 사람이 발로 올라갈 수 있을까’ 싶더라고요. 굉장히 가파르고 땡볕이고. 전 키도 작잖아요. 큰 배낭 매고 땅에 바싹 붙어서 올라갔어요. (웃음)

그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웃음) 너무너무 힘들게 올라가서 산 중턱에 신발 벗고 앉았어요. 사람도, 그늘도 없었어요. 근데 아주 멀리 제가 출발한 곳이 보이잖아요. ‘30~50cm도 안 되는 작은 걸음으로 저기서부터 이 먼 길을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정말 작은 존재지만 순간 제가 대단한 존재처럼 느껴졌어요. 진부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못 오를 곳이 없겠구나’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인간이라는 게 아주 작지만, 아주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고, 나도 그 중 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 걸 느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여행이 아니면 절대 만날 수 없었던 인연들

여행 중에 여러 사람들을 만났겠어요.

잊지 못할 사람들이 있어요. 그 중 한 분이 이번 음반 2번 트랙 ‘Star Fla’란 플라멩고 곡을 만들게 해준 분이에요. 거기서는 비가 와도 걸어야 돼요. 거기에 알베르게라는 순례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분들이 하는 숙소가 있는데 싼 편이에요. 3유로니까 한국 돈으로 5천원 정도? 근데 다른 순례자들도 묵어야 하니까 2박하기가 힘들어요. 정말 아파서 앓아눕지 않은 이상에야 아침에 일어나서 나가는 게 의무처럼 되어 있어요. 

이제 본격적인 고생담이 시작되나요.
하루는 비가 오는데, 안 갈 수가 없잖아요. 우산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비옷만 입고 가는데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다 젖더라고요. 쫄딱 젖어서 아주 낡은 숙소에 들어갔는데 여가수가 부르는 플라멩고 노래가 나오고 있었어요. 너무 오랜만에 음악을 들으니까 너무 아름다워서 오만가지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쭈그리고 앉아서 막 울었어요. 얼마 뒤에 2층에서 아저씨 한 분이 내려오셨는데 이도 빠지고, 머리도 빠지고, 무슨 영화에서 본 것 같은 아저씨였어요. 근데 아저씨가 절 딱 보더니 내려오면서 플라멩고를 추는 거예요. 제 앞에서요. 

정말 영화 속 한 장면 같은데요?
아저씨를 보니까 웃기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막 친구 같은 거예요. 내 집에 들어온 것처럼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아저씨가 음악에 취해서 플라멩고 춤을 추는데, 사랑하는 여인을 안고 춤을 추는 것처럼 행복한 모습이었어요. 아름다웠어요. 제가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서 ‘이 음악 너무 좋아요’라고 말했더니 아저씨는 자기 나라 말로 ‘이 플라멩고를 부른 여자가 최고다’라고 말했어요. 한 30분 동안 얘기를 했더니 정말 친구가 된 거 같았어요. 말도 안 통하는데. 아저씨는 영어를 못하셨거든요. 스페인어로 ‘너 절뚝이는 거 같은데 내가 부축해줄까’라고 하는데 다 알아듣겠더라고요.(웃음)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감동 스토리네요.

여행이 거의 끝날 무렵에 한 스페인 아줌마를 만났어요. 저보다 더 작은 분이었어요. 몇 번 길에서 만났는데, 항상 씩씩하게 제게 인사를 하더라고요. 전 널브러져 쉬고 있고.(웃음) 절 보시면서 ‘부엔 까미노’(Buen, Camino!)라고 말씀하셨어요. ‘즐거운 여행되라, 힘내라!’ 그런 뜻이에요. 그리고는 ‘물 줄까? 초콜릿 줄까?’ 하시는 거예요.  

둘 다 드셨죠?
노코멘트.(웃음) 그날 같은 숙소에 묵게 됐어요. 그때 제 발은 짓무르고 물집 터지고, 하얗게 퉁퉁 불어 있고, 정말 말이 아니었어요. 또 쭈그리고 앉아 있는데 아줌마가 ‘소금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물집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아줌마는 영어를 잘했어요.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너무 따뜻했어요. 3일 남았을 때인데 목적지까지 아줌마랑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죠. 둘째 날에는 ‘저 프랑스 사람 코 심하게 고니까 방을 옮겨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줌마 방에 들어갔더니 제 침대 옆에 앉아서 유칼립투스 꽃잎을 주셨어요. 

유칼립투스 꽃잎이요?
네. ‘이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피곤할 때 손을 꺼내 냄새를 맡으면 손에서 유칼립투스 냄새가 날거다. 너한테 도움이 될 거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아까 너 주려고 주운 거야’라면서요. 너무 고마웠어요. 아줌마는 꽃잎이나 돌멩이를 주워서 의미를 담아 사람들한테 줬어요. 다음날 걸으면서 그 향을 맡는데 그 아줌마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 날은 아침부터 같이 걸었어요. 

순례자의 길의 마지막 동행이네요.
마지막 날은 무리를 해야 했어요, 비가 왔는데, 비가 오면 느려지잖아요. 새벽 5시 반에 나왔는데 정말 깜깜해서 화살표가 안 보였어요. 또 제가 야맹증도 있거든요.(웃음) 마침 아줌마랑 친구하던 아저씨가 있었는데, 아저씨는 두 번째 걷는 거라 길을 알고 있었어요. 비가 와서 흙길이 진창이 됐는데 아저씨가 밟았던 곳만 따라 가니까 젖지도 않고 길을 잃지도 않았어요. 그분들은 빛과 같은 존재였어요.  

길의 끝에서 빛을 만났네요.
네. 아줌마랑 길의 끝에 있는 산티아고 성당에서 껴안고 엉엉 울었어요. 전날 아줌마랑 얘기하다가 ‘아줌마가 우리 엄마 같다. 너무 좋다’고 말했어요.

그 아줌마를 생각하면서 만든 곡이 7번 트랙 ‘Buen, Camino!’에요. 지금도 서로 이메일로 연락하고 있어요. 음반을 보내드렸더니 ‘자긴 너무 많이 울었다. 너와 같이 걸었던 시간들이 생각난다. 정말 좋은 시간이었다’고 답장이 왔어요. 이게 여행이 아니면 절대 만날 수 없는 인연이고 선물인 거 같아요.  

음반에 감사 인사를 함께 넣었나요?
아니요. 예전 같았으면 다 넣었을 텐데, 요즘엔 그렇지 않아요. 특히 그 아줌마는 말로 하지 않아도 늘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분도 아마 느끼고 계실 거예요. 

-1부 끝-



*내일 만날 2부에서는 꽃별의 음악과 책 이야기가 풍성하게 펼쳐집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 ^^ 


*꽃별의 '사월' 들으러 가실 분은 여기를 꾹 눌러주세요~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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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이한철, 그의 지나간 한철 - 2부


이한철 인터뷰 2부! 곧 시작합니다.
혹시 1부 안 보셨다고? 요기(인터뷰 1부) 클릭해 주세요~^^

자, 다 보셨지요? 이제 2부 고고고~

음악은 스토리

일반적인 팬들이 생각하기에 이한철 씨 음악이 긍정적이거나 밝고. 특히나 슈퍼스타가 뜬 이후로는 이한철 씨의 이미지가 정형화된 것 같더라고요. 그런 이미지가 부담스러운가요?
그 이미지가 부담스러운 면도 있고, 어떤 사람을 이미지화 시키는 것도 싫다는 느낌이 들어요. 요새는 정보가 많으니까. 이제 그 사람을 빨리 기억하고 싶으니까. 쟤는 늘 웃는 애, 쟤는 독설가, 뭐, 이런 식으로 사람을 기호화 시켜버리니까. 이미지 때문에 성공하는 뮤지션도 많지만. 싱어송라이터들은 겹겹이 쌓여진 음악 색깔이 있는데, 한가지로 규정시켜버렸다가 벗어나면 팬들이 당황해 하거든요. 옛날에는 음반을 사면 오래 듣잖아요. 나 고등학생 때만 하더라도 용돈 잘 모으면 LP 3장, 4장 샀는데. 일주일을 그것만 듣는 거죠. 듣다 보면 ‘아, 이사람 가사에는 새가 많이 나오네’ 또 앨범 사진만 뚫어지게 보면 ‘아, 늘 이런 표정이구나’ 하고 사람을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는데. 지금은 쟤는 그런 음악. 쟤는 늘 웃는 애, 하는 게 안타까운 게 있죠.
사실 슈퍼스타도 CF에서 발랄, 명랑으로 나와서 그렇지. 이 노래 자체는 잘 되지 못한, 그러니까 희망이 불투명한 야구선수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를 위해서 만든 거거든요. 위로해 주는 음악인데, ‘주식회사’ 할 때 김현철 형은 그 느낌을 받았더라고요. 이 노래 참 울컥하는 노래라고.

이 노래도 그렇고, 예전에 연예인들을 위한 로고송도 지어주시고, ‘도은호의 사랑’도 그렇고 어느 인터뷰에서는 팬들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시고. 그렇게 주변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 때 멜로디가 떠오르시나요?
네, 그 사람과 사람 사이에 스토리가 있잖아요. 아, 얘랑 처음 만났을 때 대학 진학 못해서 게임기 팔고, 서울 기차 타고 와서 뭐, 그런 스토리들이 생기잖아요. 그런 스토리들이 자연스럽게 음악으로 바뀌는 거 같아요.

그럼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람은 이런 멜로디, 저 사람은 저런 멜로디, 하고 떠오르는지?
사람마다 다르죠. 근데 화가가 그림 그리듯이 그런 게 아니라, 도은호의 사랑도 사실 놀리려고, 일본어도 못하는데 일본 사람한테 반해서… 웃기잖아요. 그때가 버드 락 콘서트라고 대학로에서 한 공연인데, 그 형이 차분하고 말수가 적은 형이거든요. 놀리려고 옆에서 하다가 만들어진 거예요. 그다지 심각하게 끌어내고 그런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사람과 나의 이야기들이 만들어져요. 

예전에 손무현 씨랑 이한철 씨랑 노래 작곡 대결처럼 하는 프로도 괜찮았는데.
‘즐겨찾기’. 저도 그런 아이템이 참 좋은데. 그런데 예능프로에서 몇 분 안에 재밋거리가 터져야 하고, 또 곡은 만들어야 하고, 그런 제약을 다 헤쳐내고 오래 살아남는 프로가 없는 거 같아요. 그거 참 재미있었는데. 그리고 그 프로가 힘들었던 게 그 사람을 위해 곡을 만들다가도 그 날의 토크가 “이 사람은 록커, 키도 크고 평소에 락도 좋아하고 하니까” 근데 얘기가 트로트로 가는 거야. 그럼 생각해놓은 게 다 바꿔야지. 드럼, 베이스, 다 편곡을 해야 하는 거죠.

그럼 그렇게 도전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 성취감을 좋아하시는 건가요?
그런 거 같아요. 무언가를 도전하는 거. 영화음악도 비슷한 거 같아요. 음악은 정답이 없는데, 영화음악은 장면에서 음악이 잘 붙을 때가 있더라고요. 영화음악이 최후반 작업이기 때문에 여유를 안 줘요. 근데 슬픔 장면에서 세 가지 테마를 만들어서 이거 저거 붙였다가 딱 들어맞을 때. 스타완성곡도 마찬가지로 문소리 씨 꺼 할 때. 이름이 문소리니까 문소리로 끼이익~ 쿵, 찰칵, 쾅! 이걸로 했을 때 그분이 놀라면서 기뻐하고. 처음에 인터뷰 장소에 들어오잖아요. 그럼 인사하고 리포팅 할 사람이다, 얘기할 때는 그냥 그런 반응이다가 그 노래 틀어주면 기분이 확 좋아진 느낌을 받은 적이 있어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에 영향을 받은 독자를 보면 행복해 한다고 하던데. 이한철 씨는 자신의 음악을 들려줬을 때 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길 원하시나요?
일단 제가 곡을 만들었을 때의 감성을 느끼는 게 답은 아니겠죠. 근데 ‘슈퍼스타’를 김현철 형이 듣고 제가 곡을 만들 당시의 느낌을 그대로 얘기했을 때 맞아떨어지는 거. 지금도 팬과 가수의 관계로 잘 지내고 잇는데. 제가 솔로 2집이 97년 겨울인가, 96년 말인가 나왔는데. 그때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전화인터뷰를 했어요. 걔가 중학교 2학년 박 아무개라는 얜데, 나는 스물 한 다섯, 여섯? 이런 때였어요. 그 앨범에 있는 곡이 8곡 됐는데, 제가 만들었을 때 감성을 얘기하는 거예요. 딱딱. 깜짝 놀랐죠. 나중에는 팬클럽 만들어지고 거기 오고 얼굴도 보고, 얼마 전 서울역사박물관에도 왔었죠. 2월 콘서트 때도 왔었고.

그럼 지금 직장생활을 하고 있을 나이이겠어요.
지금은 대학원, 아 대학원 졸업을 했던가? 아무튼 그렇게 딱 맞아 떨어지면 기분 좋고 반가운 느낌이 있죠.

혹시 이한철 씨 음악을 듣고 행동의 변화를 느낀 팬은 없나요?
미니홈피의 방명록인 경우가 많은데, 자기 임용고시 준비하는데, 되게 힘들 때 이 노래로 많이 희망을 얻었어요, 지금은 시험 붙어서 기분 좋아요. 가까운 공연 때 꼭 갈게요. 그런 친구도 있고 지방에 사는 고등학생이었는데, 대학을 서울로 가서 아저씨 공연을 많이 보고 싶다고 얘기한 친구도 있었어요. 

아, 미니홈피도 다 관리하시나요?
글들은 자주 보는데, 사진이나 글은 자주 올리지 못해요. 간단하게 미니홈피 첫 화면에 프로필처럼 적는 거 있잖아요. 그런 거 좀 바꾸고. 방명록에 올라오는 글들 좀 보고.

여 가수들과의 호흡

최근 남과 여 컴필레이션에서 박새별 씨랑 듀엣은 처음이었는데, 이 듀엣 음악이 참 괜찮더라고요. 정말 잘 맞아 떨어진다. 그런 느낌. 혹시 혼성 듀오는 생각을 해보셨는지? 지금껏 다 해보셨잖아요. 그룹, 프로젝트, 솔로…
하하, 그렇네. 재미있을 거 같아요. 이번에 작업해보니까 좋더라고요. 여성 뮤지션과 처음 듀엣이었는데, 신인가수지만 노래 실력도 좋고, 사람도 매력적인 그런 분위기 있는 사람이어서 좋았던 거 같고. 전 박정현 씨 되게 좋아하거든요. 노래 잘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사람도 너무 좋고 시원시원한 느낌. 또 노래할 때 표정도 말하듯이 얘기하듯이 하는 게 너무 좋아서 기회가 되면 박정현 씨와 콜라보레이션 해봤으면 좋겠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여성과 듀엣으로 해보고 싶어요.

그럼 ‘이런 글은 꼭 곡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생각되는 글이 있으신지요?
아, 기형도 시인 올해가 돌아가신 지 20년 됐잖아요. 그래서 시집을 꺼내서 보다가 맨 마지막에 엄마걱정이라는 시가 있어요. 그 느낌. 유재하 씨 음반에 맨 마지막 트랙을 들은 느낌. 더 이상의 컨티뉴가 없는 마지막 싱글. 그 기분에 만든 곡이 있어요. 그냥 혼자 들으려고 만든 곡. 근데 그 노래는 진짜 확 울컥하는 마음으로 만들게 됐어요.

일전 인터뷰에서 보니까 따로 슬픈 곡들 모아서 “이한철 소품집” 해서 ‘이한철 새드송’ 내고 싶은 욕심이 있다고 하셨는데, 계획이 있으신가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고요. 3집 음반 나온 지 얼마 안됐으니까. 나중에 스페셜한 앨범을 내야겠다 준비 중인데. 다음이 될 지 다다음이 될 지 아직 모르겠어요..

슬픈 음악을 노래하는 이한철. 가사도 현재는 긍정적인데, 이걸 비관적으로 인생의 회의가 느껴지는 가사. 혹시 쓰신 적이 있나요?
없죠. 가장 그랬던 거는 불독맨션 ep에 있는 노래, “99” 그 곡이 좀 음악 계속 할 수 있을까 절박한 마음에 만들었어요.

프로듀서로서의 재능도 탁월하신 듯 해요. 이소라 씨의 ‘8번 트랙’이 이한철 씨 곡이라는 게 참 놀라웠거든요.
그것도 그렇지만, 소라 누나가 저한테 그런 곡을 부탁한 것도 놀라워요. 어떻게 나한테 그런 감성이 있는 걸 알았을까.

이소라 씨의 7집 음반 타이틀곡인 ‘8번 트랙’을 들어보세요. 평소 들어보았던 이한철 씨의 음악과는 사뭇 다른 향기가 풍깁니다.
 

이한철의 키워드, '음악 여행'

지금까지 ‘불독맨션’, ‘하이스쿨 센세이션’, ‘주식회사’, 솔로, 프로젝트 등 ‘아, 이게 딱 나의 음악상이다’라고 느끼신 게 있으신지?
가장 좋은 건 솔로인 거 같아요. 주변에 훌륭한 뮤지션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내 이름으로 음반 내는 게 가장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인 거 같고. 다시는 해낼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음반은 불독맨션 1, 2집인 거 같아요. 그 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었기에 만들 수 있는 음반인 거 같아요. 

앞으로 솔로는 계속?
아까 말했던 스페셜한 음반이나. 써놓은 곡이 많아요. 

정말 다작하시네요!
저도 맨날 듣고 다니는데, 차에 MP3 플레이어에 담아 가지고 ‘요건 언제 내지?’ 하면서 ‘요건 요렇게 묶으면 되겠다’ 하고.

그럼 아내는 음악적 영향을 주시나요?
영향은 별로 안 주는데. 대부분의 곡은 다 알고 있죠. 그리고 어느 폴더에 저장되어 있는지도 알고 있으니까. 구체적으로 “이런 거 저런 거 해봐” 뭐, 그런 건 없어요.

그렇게 해주기를 원하시는 건가요?
도움을 받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도 들지만 너무 도움 줘서 그런 거보다 지금처럼 방관자인 듯 있다가 한 번씩 던져주는 말들이 더 고맙고 편한 거 같아요. 집에서까지 내가 나가야 할 음악에 대해 토론하고.. 아침 밥 먹으면서… 으, 얼마나 힘들겠어요. 집에서의 생활도 있으니까.

예전 인터뷰에서 봤는데 영화음악을 무척 하고 싶으셨다고, 그 후에 <색즉시공 시즌 2>를 하셨는데 만족하셨나요?
기간이 짧았고, 처음이라서 실수인 채로 영화에도 음반에도 실린 게 있어요. ‘이거야’ 하고 말하지 않으면 모르시는 분도 있겠지만, 그런 아쉬움이 좀 있고. 하면서 여러 가지 시행착오가 있었는데. 작업하는 과정은 기억에 오래 남을 거 같아요. 두 달 동안 했는데, 눈 뜨면 이거하고 눈 뜨면 이거하고.

영화의 토씨 하나까지 다 기억하는?
네, 나중엔 다 외우고, 편집하면서 음악 깔면서 하면 대사가 같이 입에서 나오는 수준까지.

그럼 차후에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또 하실 건가요?
인디영화 음악을 해봤으면 좋겠어요. 색깔이 확실히 있는. 이건 신나야 하고 눈물 흘려야 되고 그런 게 있는데. 정말 색이 뚜렷한 거 있잖아요. 눈물, 분위기. 뭐 그런 거.

영화제 자주 다니시면 영화 보면서 이 영화에는 내 이 곡 이 들어가면 좋을 거 같은데 하고 느낀 적은 없는지?
네, 그런 적은 없어요. 훌륭한 영화음악은, 영화를 다 봤는데 음악은 생각 안 나고 스토리에 빠져들게 한 그런 음악. 무색무취. 사람들로 하여금 영화의 스토리와 영상의 색감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어떨 때는 거치적거리게 느껴지는 부분 있잖아요. 간혹 가다가 ‘음악이 튄다’라고 느껴지는 그런. 전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또라는 멕시코 출신 감독이 있어요. <21g>, <바벨> 이런 거 연출한 사람인데, 그 음악하는 사람도 음악 되게 잘하더라고요. 음악에 구에엥~ 쿠에엥~ 구에엥~ 쿠에엥~ 뭐, 그런 거 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장면의 퀭한 느낌과 딱!

아, 궹하고 퀭한 장면이라서요?
아, 그래서 그랬나? 아무튼 그 장면 되게 멋있더라고요. 

지금까지의 이한철을 키워드로 표현한다면?
음악 시작하고 나서는 음악 여행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 거 같아요. 다양한 장르를 여행 다니듯이. 음악하는 형태도 두 명이서 다니다가 네 명이서 다니다가 나중에 정착할 수도 있고, 끊임없이 떠돌 수도 있겠지만, 하나에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고 해본다는 거. 그게 재미있는 거 같고. 저한테 음악할 수 있는 원동력. 에너지를 주는 공급원인 거 같아요. 새로운 게 있다는 게. 가볼 새로운 여행지가 있다는 것처럼.

그럼 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다면요?

만들어 놓은 게 몇 개 있었어요. 약간 모로코 스타일의 테마들, 알제리, 중동 문화도 있고 아프리카도 있고, 그런 테마가 있었어요. 완전 플라멩고 같은 것도 있었고. 이번 앨범에 세비야도 있는데, 너무 균형이 그쪽으로 가는 듯 해서 뺐던 곡들. 아프리카 리듬의 곡들도 많이 듣는데. 또 오늘 서울재즈페스티벌 같이 보는 친구들이 월드뮤직 동호회 친구들이에요. 동호회 가면 진짜 재미있는 사람 많아요. 폴리네시아 음악들. 막 CD 가져와서. 어디서 가져오는지 “여행가서 샀다” 그러고. ‘파엘라(Paela)’라는 동호회인데, 재미있어요. 매월 두 번째 주 토요일 음악 감상회 해요. 

한 달에 한 번씩 음악 감상회라니. 참 좋은 취지를 가진 동호회입니다. 반디 고객분들도 한번쯤 들러보는 여유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2세 계획은?
아, 지금 노력하고는 있는데, 이번 여름에 놀러 갈 거거든요. 제 와이프가 초등학교 교사에요. 근데 얘기 낳으면 놀러 못 가겠지, 하면서 생각도 하고.

그럼 그 2세에게는 음악 교육을 시킬건가요? (핵심은 이거였습니다)
원하면. 뮤지션이라는 직업이 얼마나 좋아요. 세상에 전혀 없는 걸 만드는 거잖아요. 파울 클레(Paul Klee)인가요? 화가이기도 하고, 미학자이기도 하고. 그 사람이 “예술을 하는 것은 제2의 조물주, 창조자”. 그런 비슷한 느낌으로 인사동에 늘 계시는 시인 분인데, 아, 지금 이름이 생각 안 나네요. 하튼 그 분이 매일 술을 드시는데, 술 값 한 번도 안내고 매일 얻어먹는 거예요. 그래서 핀잔을 주면, “아이, 뭐 시 한 줄 도 못 쓰는 것들이…” 하면서 넉살 좋게 던지는 그런 모습들. 

그는 자유롭게 방랑하는 영혼을 늘 동경합니다. 지금까지 말해온 얘기들도 그렇지만, 남은 얘기들 역시 소년이 어른을 꿈꾸듯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얘기합니다.

음악 여행, 존재를 그리는 그림

그럼 지금까지 읽으셨던 책 중에서 내 음악적 감수성에 영향을 많이 끼친 도서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최근에 티베트 여행기도 좋았던 거 같아요. 제목이 <열병>(?) 여행기 쓰는 사람들 보면 여행기의 주인공이 자신이 되잖아요. 내가 느낀 뭐 그런 거. 표현이 좀 애매한데. 그 사람. 박동식 씨. 사진작가면서 글도 쓰는. 사실적으로 잘 담아낸 여행기라서 좋아하고요. 또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그거 작가 이름이 생각 안 나네. 뭐뭐뭐뭐 겐지. 아 몰라요?

(갑작스레 툭 등장하신 가게 주인님의 한 마디) “마루야마 겐지”

아아, 맞아요.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시네요. 거기 주인공이 오토바이에요. 무정물이 주인공이에요. 내용이 운문적인 터치라고 해야 하나. 전 책보면서 줄을 긋거든요. 근데 줄을 계속 긋게 되는 거예요. 소설이지만 툭툭 던지 듯 쓴 그런.

그 문구 중에 쓰고 싶은 문구는 없었나요?
그런 건 없고 불독맨션 시절일 때 ‘스타걸’이라는 노래가 있었어요. 같은 이름의 성장소설이 있는데, 거기 등장하는 주인공이 스타걸이에요. 되게 엉뚱한 애인데, 그 소설 중에 “픽픽하다”라는 구절이 나와요. 그게 좋아서 가사에 썼어요. 책 읽는 것도 대중없어요. 손에 잡히는 대로 읽어요. 여행기도.

여행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네, 곽재구의 <포구기행>, 그리고 친구가 얼마 전에 추천해 준 리영희의 <대화>. 그것도 재미있게 읽고 있어요. 한국 근대사를 대화식으로. 그걸 입문서적으로 다가가면 너무 어렵고 치우친 쪽으로 갈 수 있잖아요. 그거 괜찮은 거 같고. <녹색평론 선집> 단행본처럼 만들어진 것도 있는데 그것도. 아, 그리고 음악에 영향을 준 거는 <지식채널 E> 그 거 책이 두 권 나왔거든요.

이번에 4권까지 나왔어요.
진짜요? 아, 그렇구나. 전 2권까지 샀어요. 그거 보면서 어떤 테마에 대한 의문을 툭툭 던져주잖아요. 축구공에 얽힌 이야기들. 축구공 보면 개발도상국 혹은 저개발 후진국의 어린이들을 착취하는 수단이라고 하잖아요. 그런 문젯거리들을 하나씩 던져줘요. 아직은 제 음악에 현실적인 사회의 문제들이 반영이 안 되고 있는데, 사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그게 무시될 순 없잖아요. 나도 지금 대통령의 정치나 사회적으로 신문에 나온 일들이 은연중에 음악에 드러나게 될 텐데. 그거로부터 도피하는, 순결할 음악만 하는 게 옳은 거는 아닌 거 같아요. 결국은 영향을 받게 될 거 같고. 그런 곡도 좀 쓰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
첫 여행지에서는 공항에서 호텔까지 가는 길에 항상 바가지를 쓰는데. 그런 것처럼 하얀색 도화지에 나를 그려나가는 느낌. 처음 아침을 먹으러 식당을 내려갔을 때의 느낌과 그 다음날, 마지막 날에 ‘나 집에 간다’ 했을 때의 그 느낌. 그 사람에게는 흰 도화지에 나라는 존재가 그려지는 느낌. 그렇게 하나의 풍경을 남기고 다른 여행지를 가는 느낌. 그런 게 좋아요.

음악으로만 들어서 알고 있던 ‘그’와 그의 전반적인 삶을 듣고 난 후의 ‘그’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음악은 그의 대변자이며, 꿈을 꾸게 만드는 초석입니다. 모쪼록 그의 음악에서 더욱 다양한 향내가 짙게 배어 나오길 진심으로 바라봅니다.

글, 사진 - 음반MD 홍군 (bhoranga@bandinlunis.com)

그간 소식이 뜸했던 이한철에 대한 궁금증, 호기심을 풀어낸 인터뷰 ‘이한철, 그의 지나간 한철’을 읽고 반디앤루니스 홈페이지 ‘오늘의 책&음반 -이한철, 그의 지나간 한철’ 코너에 댓글을 남겨주세요. 추첨을 통해 1분께 이한철 싸인CD 5장을 드립니다. [반디앤루니스 홈페이지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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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철 싸인CD 구성 (각 1장)
2
009.02 이한철 – 순간의 기록
2007.12 색즉시공 시즌2 OST
2005.12 이한철 - Organic
2005.01 하이스쿨센세이션 - 충격고교(衝擊高敎)
2000.05 불독맨션 – Debut E.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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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표류 - 실패 없는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


다치바나 다카시, <청춘표류>, 예문, 2005.


“너, 정말 하고 싶은 게 뭐야?”

누군가 내게 꿈을 물어본다.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자부해온 나였다. 훌쩍 떠나온 길만큼 어느 새 몸뚱이도 머리도 훌쩍 커버린 나지만, 이 질문 앞에서는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간의 발자취를 슬며시 더듬어보니 무언가 이상하다. 그동안 ‘내가 진정 이루고 싶었던 것’에 대한 열정이 떠오르지 않는다. 부끄러웠던 기억이 없다. 좌절의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나는 내 청춘을 청춘이라 자신 있게 외치지 못하고 결국 우물쭈물해버리고 만다.

이 책에서 다치바나 다카시는 11인의 청춘들을 차례로 조망해간다. 자전거 프레임 빌더, 원숭이 조련사, 사진작가, 소믈리에 등 다양한 청춘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진정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기까지 겪은 좌절과 방황, 인고의 시간이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물론 심심치 않게 출간되는 여타 성공담 중 하나이지만, 이 책이 부각되는 이유는 그것이 ‘나 자신’을 투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충 적당주의로 얼버무리고 살아가려는 나에게, 그들은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으면서, 나는 그저 파도치는 대로 이리저리 쓸려 다니며 사는 것이 제일이라 믿었다. 그것은 머나먼 항해를 조금 피곤하게 할지는 몰라도, 최소한 다치지는 않을 거란 이유에서였다. 괜한 물벼락을 맞느니 차라리 멀미하고 말 일이지 싶었다. 남들에게는 뒤쳐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튀지 않으려고 끓어오르는 피를 삭히고, 그렇게 적당히 타협하며 평균선만 막연히 넘나들었다. 아아, 나는 정말 멍텅구리 항해자였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비겁한 갈지자 선로인가. 최소한의 신기루도 갖지 못한 채 아무 목적 없이 표류하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큰 회한은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할 때 생긴다고 했거늘.

어느 날, 거울을 보며 조용히 한숨을 내뱉는다.
“너, 나이만 먹었어.”

그것은 현실에 안착하고자 하는 심리, 좀 더 깊숙이 파고들자면 자아에 대한 불안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혹자는 투쟁이 또 다른 분쟁을 야기한다고 했다. 불합리한 사회제도와 불만, 무관심, 그로 인한 분규와 끊임없는 전쟁, 살인, 가난의 세습과 이기주의의 연결고리 따위가 이제는 지긋지긋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주장한다. 애당초 이놈의 불행한 시대에 잉태된 자체가 잘못이며, 아무리 뭐가 이렇다 저렇다 해봤자 처절한 울부짖음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제 그만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무념무상, 안빈낙도함이 제일이라고. 역사 속 뜻있는 사람들이 속세를 초월하여 초야에 묻혀 지낸 뜻이 여기에 있지 않느냐고. 더불어 제 좋고 남 좋은 게 편안한 인생 아니겠냐고. 그래도 굳이 투쟁하려 들고 싶다면 그 잘난 폐인정신으로 어디 혼자 콕 처박혀 제 밥 적당히 빌어먹고 살 정도의 필살스킬 하나 연마하면 그만이라고.

그러나 그리 살면 무엇 하겠는가. 우습기도 하지. 아무 어려움 없이, 과자공장 기계가 찍어내는 크래커처럼 손쉽게 반죽되고, 똑같은 옷을 입고, 뚝딱 구워져 이내 부스러질 그저 비슷비슷한 인생살이. 수많은 인생 중 ‘일련번호 0000’의 작은 표딱지 하나로 유통되다 저리 안타깝게 폐기되고 말 것을. 나, 그간 죽어도 평범하길 원해왔으나 이제는 도통 내가 정한 노말의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내일 평균치 이상의 식사를 할 수 있고, 모레 누군가에게 벌레보다 못한 대접을 받을 수도 있다. ‘보통’의 범주란 것은 상당히 가변적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인의 지명도에 반비례한다. 가령 오른손잡이는 보통이다. 보통의 경우(아이러니하지만) 누군가 내게 ‘당신, 오른손잡이군요?’라고 물어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물어준다면, 나는 매우 기쁠 것이다. 나는 그 사람에게 이미 ‘특별한’ 존재가 된 것이니까. 마치 어린왕자의 장미 한 송이처럼.

이렇게 쓰고 보니 참으로 구태의연하지만, 나는 타인의 눈빛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일에 이미 넌덜머리가 난 상태이다. 나는 분명 모든 인생들에게 지나가는 에피소드 181이나 182쯤 될 것이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이대로 묻혀가는 것이 억울하고 배알 꼴려 애드리브라도 치고 가야겠다. 기억되고 싶다. 누군가의 인생에 있어 소중한 사람으로 각인되고 싶다. 그러므로 좀 더 투쟁적으로 살아가련다. 치열하게, 누군가의 말대로 더 아파해 보기도 하면서…

‘내가 좋으면 됐지 무얼’ 하고 쓰레기 같은 삶에 만족하는 이들과 늘 불만투성이에 끊임없이 욕심만 부리는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겠다. 동시에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냐고 스스로 신해철이 되어 절규하겠다. 나, 축구는 헛발질에 바둑도 젬병이라 어깨 너머 눈알만 굴리고, 노래방에선 한껏 띄워놓은 분위기에 발라드 한 키 낮춰 부르는 대참사밖에 일으킬 줄 모르고, 술은 지지리 못하면서 진탕 마셔대다 꼴아박기 일쑤고, 인간관계 또한 그리 썩 좋지 못하며, 페이스나 경제적 여유, 무엇 하나 딱히 내세울 것 없는 못난 청년이지만, 그래, 나는 아직 젊으니까. 수없이 쓰러져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하니처럼 달리며 박카스를 벌컥벌컥 마셔댈 수 있으니까. 그게 청춘의 특권이니까.

순응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정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고 싶은 건 다 하련다. 부끄러움 없는 청춘, 실패 없는 청춘은 청춘이 아니다. 더 부끄러워하자. 더 많이 실패하자. 아자! 내 인생은 이제 막 마알갛게 떠오르는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최세훈'님은?

20대 청년. 고려대 재학. 제 잘난 맛에 사는 독서가.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 전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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