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일리치의죽음'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2.12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인간의 자리
  2. 2010.04.06 [4월 1-2주 이슈와 추천도서]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길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인간의 자리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 《이반 일리치의 죽음》 | 창비 | 2012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우리는 으레 말한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이를테면 학생 된 자가 공부를 하고 사장 된 자가 리더십을 갖추는 것을 두고 쓰는 표현일 게다. 자리라는 것은 실로 그런 측면이 있다. 자리에 있기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한다. 이 ‘다른 삶’이란 이전보다 퇴보한 경우도 해당되겠으나, 반면에 “최고 상류사회에 속해 있었고 지체 높은 사람들은 물론 젊은 사람들도 그들 집에 드나”(48쪽)드는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소위 성공한 것으로 간주되는 삶 말이다. 어떤 이들은 평생을 자리 잡는 데에 바친다. 그것이 곧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잡아넣을 수 있다는 권력의식, 비록 외적인 것이지만 법정에 들어설 때나 부하 직원을 만날 때 분명하게 전해져오는 존경 어린 시선, 상관들과 부하들 앞에서 과시할 수 있는 성공,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자신 스스로도 잘 느끼고 있는 탁월한 업무처리 능력”(35쪽)과 같은 삶의 기쁨과 직결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도 그러했다.

 

‘이반 일리치’는 고위 법관이며 한 집안의 가장이다. 그러나 어느 날, “별다른 변화 없이 아주 순조롭게 잘 흘러”가던 이 모든 자리를 마비시키는 일이 발생한다. ‘이반 일리치’의 병(病)이다. 병원에서도 원인을 밝힐 수 없는 복부의 통증은 이윽고 엄청난 고통이 되어 삶 전반에 번진다. 동료나 가족, 병을 치료하는 의사나 기도를 하는 사제라고 해도 주변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어떻게 해주지 못한다. 그 자신도 마찬가지다. 병세는 악화되고, ‘이반 일리치’는 차츰 죽음을 예감한다. 이 예감만큼이나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에서 죽음을 마주하지 않는 이들의 태도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이 무섭고 끔찍한 죽음의 의식을 그저 있을 수 있는 기분 나쁜 일, 특히 조금 품위가 없는 (온몸에 더러운 냄새를 풍기는 사람이 응접실에 들어온 것 같은) 일 정도로 격하”하는데, 사실 그것은 “그가 평생 지키려고 애써온 ‘품위’”(83쪽)이고 최근까지도 그가 차지했던 자리에서 행해진 생각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에 걸터앉은 다음에야 허위를 벗겨낸 삶의 자리, 모두에게 공통된 인간의 자리가 여기임을 인식한다. 삶은 말하자면 죽음인 것이다.

 

“임종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에 되뇌었다.
‘끝난 건 죽음이야. 이제 더 이상 죽음은 존재하지 않아.’ (119쪽)

 

그래서 끝난 것은 죽음이다. 하지만 마치 한창 때인 양 살아 있는 인간 대개는 “그건 이반 일리치의 일이지 자신의 일은 아니다, 자신에겐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19쪽)을 할 뿐, “아직 할 일이 많다는 듯이”(22쪽) 무수한 자리들로 돌아간다. 자신의 죽음 또한 끝날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진실에 가깝다. 죽음을 배제한 자리는 결국 제 삶을 헛것으로 따돌리는 사람을 만든다. 죽음이 이토록 우리를 지탱하고 있음에도 말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이 어리석은 삶을 성찰하는 실마리가 되어 준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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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주 이슈와 추천도서]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길

안녕하세요. 반디앤루니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현재의 시간을 얻어 새로운 생(生)으로 태어나고, 다른 누군가는 잠시 빌려온 시간을 반납하듯 영원한 과거로 자리를 옮겨가고 있습니다.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인간의 보편적 역사가, 그렇게 우리의 곁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막 태어난 어린 생의 눈에는 비치지 않는 생사(生死)에 얽힌 순환의 구조가 오늘은 또 오늘만큼 늙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갑작스럽고 반갑지 않은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제까지도 들썩이던 내 피붙이의 가슴이 더 이상 세상의 공기를 안으로 들이지 않을 때, 그 단절의 명백한 증거가 온기를 잃고 싸늘하게 식은 그의 육체로 남을 때, 어제를 기억하며 사는 우리 모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상실의 고통과 슬픔이 여지없이 찾아오고 맙니다. 그러므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슬퍼질 수 있는 우리는 지나간 어제를 부여잡은 채 온전한 오늘을 미루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는 고(故) 기형도 시인이 말하듯, “이 거리 끝”, 그 인생의 마지막에 있는 “커다란 전당포” “주인의 얼굴”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각되는 살아있는 자의 무능력, 즉 죽음 앞에 선 인간은 떨어지고 있는 가로수 잎들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일 수 있는 접속사는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될 것입니다. “가는 비……”와 같은 죽음은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하다는 사실을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 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 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서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04, 50-51쪽- 

그런데 요사이 우리 앞에 나타난 갑작스러운 죽음들은 이전까지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던 어느 날과 달리, 그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김길태에게 희생된 여중생의 어린 목숨이 그랬고, 아직도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천안함 침몰 실종자들의 생명이 그랬고, 고(故) 최진영 씨의 자살이 그러하며,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끝내 사망한 고(故) 박지연씨가 그렇습니다. “어느 날 저녁, 지친 눈으로 들여다본 석간신문의 한 귀퉁에서, 거짓말처럼, 아니 환각처럼 읽은 짧은 일단 기사로, […] 한 시인(기형도)의 죽음을 알게” 된 그 누구(김현)처럼, “이럴 수가 있나, 아니, 이건 거짓이거나 환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김현,「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04, 135쪽

        

 이와 관련하여 베르크손H. Bergson(1859~1941)은 『창조적 진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억이나 기대를 가지지 않은 존재들은 결코 ‘비어 있음’이나 ‘없음’과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단지 있는 것과 지각되는 것만을 표현할 것이다. 그런데 있는 것과 지각되는 것은 이러저런 사물의 현존이지 결코 어떤 것이든 그것의 부재는 아니다. 기억하고 기대하는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만 무엇이 없다는 것이 가능하다. 아마 그는 어떤 대상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것과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대상을 발견한다. 이때 그는 기대를 좌절시키는 것 앞에서 원래의 기억을 상기하게 되고, 자신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자기는 ‘없음’과 조우했다고 말하게 된다."  

-강신주, 『철학, 삶을 말하다』, 이학사, 2009, 214-215쪽에서 재인용  

그러므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슬퍼질 수 있는 우리는 지나간 어제를 끊임없이 불러다가 오늘에 앉히고 슬픔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어제의 기억과 그 기대에 집착하는 이유로,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해명되지 않은 죽음의 원인은 ‘있음’의 기억으로부터 오는 좌절된 기대, 즉 ‘없음’의 지각에 더해져 더욱 더 우리를 지난 시간에 묶어놓습니다. 

물론 우리는 마땅히 물어야 합니다.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를. 그리고 그것으로 하여금 어제를 정리해야 합니다. 순수한 애도의 시간을 유예시키고 있는 그 불투명을 투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고 육체의 시간이 다 하면 누구나 서서히 소멸해가는 자연의 순리와 같이 생사의 투명함을 되찾아, 그로부터 애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영원히 해명되지 않을 죽음의 사건이 남겨져 있습니다. 자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 자신을 죽인 이들은 흔히 그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한 우울과 절망으로 설명되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것의 진위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영영 알 길이 없습니다. 이는 설사 그들이 죽기 전에 몇 글자의 유언을 남겨 놓았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종종 그것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 틀을 갖게 되지만, 그 누구도 죽은 이를 두고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무어라 말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해명되지 않는 죽음의 이유는 스스로 자살을 겪고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삶에 내재해 있을 어떤 절망의 존재를 상기시킵니다. 더욱이 내 가족이나 친구가 자살을 선택한 경우,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능력에 대한 자책이 사실상 남은 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며, 이와 함께 외롭게 죽음을 선택했을 그들의 마지막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자살』(살림, 2007)에서 저자 이진홍은 ‘거칠고 급하게’ 죽음을 택해 버린 자에 대해 말하는 행위 자체에 뒤따르는 불편함과 망설임을 시작으로, 자살에 대한 사회적 수용의 양태를 다양하게 살펴보고,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장 아메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살이 자유인의 권리(『자유죽음』, 산책자, 2010)인지, 아니면 불가피한 선택인지에 대해 논의하며, 이와 함께 자살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다시 말해, “때가 되어 떠나가는 조용하고 포근한 죽음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의도적으로 소멸의 시기를 결정해버리는 ‘자살’”을 고찰하여, "자살이 가지고 있는 ‘터부’라는 묘한 신비감을 제거하고, 우리가 현재 영위하고 있는 삶의 가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한길사, 2007)을 통해 여러 익명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의 삶을 보여주며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사람들의 절망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로써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 즉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현재의 삶의 모습을 다시금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일리치의 죽음』은 “이반 일리치란 한 개인이 자신을 상실한 삶을 살다가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죽음에 의해 삶에 생겨나는 동요와 불안을 독자로 하여금 목격하게 하고, 이를 통해 다시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사건 이후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에 대한 충분한 애도를 통해 어제에 대한 기억과 기대를 위로하고, 그런 연후에 이러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철학, 삶을 만나다』의 저자 강신주는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우리의 오늘에게, 더 이상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있음에 대한 기억과 기대)을 마음 바깥으로 투사하지 말고 외부 사태(없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지나간 어제가 아닌 오늘을 바로 보며, 지금도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을 내 생의 역사로 돌아와 나에게 다가올 죽음이라는 사건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문국진은 『주검이 말해주는 죽음 屍活師』(오픈 하우스, 2009)에서 수많은 죽음을 지켜봐 왔던 의사의 입장으로서 그간 보고 느낀 경험을 토대로 죽음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우어 정리해줍니다. 영생과 부활의 상징인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존엄사(안락사)까지 포괄하고 있는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의학적, 철학적, 문화적 고찰을 통해 독자 스스로 죽음에 대한 개념과 사생관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와 함께 소크라테스, 플라톤,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커, 야스퍼스, 레비나스, 들뢰즈, 장자, 유가 등의 철학자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철학, 죽음을 말하다』(정동호 외, 산해, 2009)는 죽음 자체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통해 독자가 다시 삶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는 아직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살아있는 자들일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살아있는 자들이 살아가기 위해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종 목적은 죽음을 통해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결국 삶의 일부인 죽음을 긍정하여 웰빙(Well-being)뿐 아니라 웰다잉(Well-dying)를 준비하는 게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미래사, 2002,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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