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02.11 [요즘 뭐 읽니?] 김종갑, 《생각, 의식의 소음》
  2. 2013.04.08 [사이언스 북 카페] 방기호, 《대머리를 기만하지 마라》
  3. 2013.03.05 [서점에서 만난 사람] 다른 너를 품는 생(生)의 온도 - 《숲의 대화》소설가 정지아
  4. 2012.03.29 [서점에서 만난 사람] 패배자라는 낙인, 그래도 삶이다 - 소설가 전민식

[요즘 뭐 읽니?] 김종갑, 《생각, 의식의 소음》

늘,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나와 관련되어 불명확하고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들을 없애나가야 한다고요. 이를 테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오래된 정체성의 문제를 꼽을 수 있겠죠. 혹은 지난날 무엇보다 나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만들었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는 질문도 있겠고요. 하지만 이렇듯 정체성이나 사랑 등 거창한 주제가 아니래도 저는 늘 어떤 생각에서 어떤 생각으로 건너가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중입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일까, 왜 그렇게 말했을까, 왜 나는 불쾌해졌을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등. “궁극적으로 보면 (…) 먹고살기 위해서, 그냥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16쪽), 말하자면 행복한 삶을 위해서 ‘생각’이라는 ‘외로운 사업에 골몰’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 외로운 사업
생각은 생각을 낳는다. 한번 생각이 구르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래서 거울의 방처럼 생각의 프레임에 갇혀 빠져나갈 수가 없다. 이상에게 거울은 자의식의 상징이었다. 그의 「거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잘은모르지만외로운사업에골몰할게요/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마는/또꽤닮았소” 외로운 사업이 생각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 외로운 생각의 악순환!
= 르네 마그리트, 「금지된 복제」(1937)

 

지금 전, 생각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행복에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만났거든요. 그는 “외로운 생각의 악순환”에 빠져 있는 제게 “생각은 의식의 소음이다. 이것을 잡념이라고 말해도 좋다. (…) 생각의 8할, 아니 99%가 삶의 소음이다. 의학이 눈부시게 발달한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생각의 소음을 스트레스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봄에 황사를 뒤집어쓰듯이, 남들이 잠든 조용한 시간에도 생각의 소음을 뒤집어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불행에 대한 과민반응과 절대적인 행복의 요구가 결합”돼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생각! 생각! 생각!” 하도록 부추기는 현재의 사회에선 “행복과 불행의 드라마도 생각의 극장에서 상연이 되”“자칫하면 생각 스트레스의 무게에 다리가 꺾일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진정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이제는 생각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요.

 

‘넌 너무 생각이 많아’ 주변 사람들로부터 제가 늘 들어온 말입니다. 조금 더 친분 있는 이에게는 ‘쓸데없는 생각 좀 하지’ 말라는 직언을 듣기도 여러 번입니다. 하지만 전 그 말을 듣고도 생각을 줄이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는 다시 제가 남들에 비해 생각이 많은 이유가 뭘까를 생각하기 시작했거든요. 그 이유를 알아야만 불어나고 비대해진 생각의 꾸러미를 줄여나갈 수 있다고도 생각했고요. 그런데 《생각, 의식의 소음》을 통해 “생각의 가장 큰 폐해는 거울의 방처럼 자기반영적인 생각의 악순환에 있다. (…) 중요한 것은 생각을 한 가닥 한 가닥 꼼꼼하게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통 크게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생각과 싸워 이기기 위해 생각의 링에서 생각과 격투를 벌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는 말을 듣고 만 거죠.

 

 

그래서 지금 전,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책의 다음 장을 넘기고 있는 것이고요.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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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북 카페] 방기호, 《대머리를 기만하지 마라》

 

 

방기호 | 《대머리를 기만하지 마라》 | 은행나무 | 2012

 

■ 오늘은 어떤 책을 소개해주실 건가요?

 

최근 들어 탈모로 고민하는 분들이 부쩍 많아지셨는데요. 오늘은 이 탈모와 관련된 일반적인 상식과 오해를 바로잡고 탈모예방은 물론 그 치료와 발보비법을 일러주는 책, 《대머리를 기만하지 마라》입니다.

 

■ 제목이 인상적입니다. 대머리를 기만하지 마라, 누가 대머리를 기만했다는 건가요?

 

쉽게 말해, 발모를 향한 탈모인들의 간절함을 이용해 이익을 얻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짜 발모제품과 고가의 기능성 샴푸를 파는 제약회사, 탈모관리센터 등이 이에 해당하고요.

 

■ 본격적인 책 이야기로 들어가볼까요?

 

첫 번째 부분은 이 책의 제목과 직접 연관이 있는, 그동안 ‘대머리를 기만’해온 잘못된 정보들을 바로 잡는 내용입니다. 이를 테면, 영양 부족으로 탈모가 된다, 검은콩을 먹으면 머리카락이 난다, 두피에 열이 많아 탈모가 된다, 비듬방지용 샴푸가 탈모를 방지한다, 두피 마사지를 하면 발모가 된다, 등이 있고요.

 

■ 검은콩이 탈모 예방에 좋다, 저도 들어본 얘기인데요.

 

검은콩이 발모에 좋다는 의학적 근거는 콩 안에 들어 있는 이소플라본이 여성호르몬과 유사한 효능을 지녀,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을 억제하고, 그래서 남성형 탈모증에 효과가 있다는 것인데요. 저자에 따르면 콩이 탈모개선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발모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라고 합니다. 발모를 위해서는 오히려 모발형성에 필요한 단백질과 효소 그리고 코엔자임을 이상적으로 갖추고 있는 현미 92%, 조 4%, 수수 4%의 비율로 밥을 지어 먹는 것이 좋다고 하고요.

 

■ 그러니까 탈모예방과 치료에 있어서도 기본이 되는 건 역시 식생활이라는 거네요.

 

그렇습니다. 앞서, 영양 부족이 탈모가 된다는 말 또한 잘못 알려진 상식이라는 얘기를 했는데요. 근본적으로는 영양 부족 때문에 머리가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고, 오히려 영양 과잉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 요즘 현대인을 괴롭히는 수많은 질병이 사실은 ‘너무 먹어서’ 생기는 것이기도 한데요. 탈모도 마찬가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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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다른 너를 품는 생(生)의 온도 - 《숲의 대화》소설가 정지아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자료 및 사진 제공 | 은행나무

 

지난 시간이 차곡차곡 쌓이면 지금입니다. 역사도, 인간도, 나도 또 너도요.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찾아보면 어딘가엔 분명 있습니다. 말과 행동, 감정, 생각. 그 모든 지금의 근거들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나는 그 세월의 흔적에 꼭 맞는 웃음과 울음을 지니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거 아닌 걸 가질 수 없기도 하고요. 또 그러니 자연스럽게 그런 나를 미루어 너를 생각할 밖에요.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너는 언제나 나한테 그렇습니다. 누구도 공으로 살아온 세월 없으니, 꼭 그만큼은 나를 고집하고 싶어지니까요. 또 그런 내가 먼저 이해받고 싶어지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나는 아직, 나로서만 뜨거운 생(生)인 겁니다. 그런 채로, 이런 나까지 품는 《숲의 대화》를 듣게 된 거고요. 그 대화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죠...

 

《빨치산의 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작가님이 가져가고 있는 것 혹은 바뀐 것이 있나요?

 

그때나 지금이나 제 관심은 역사와 인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숲의 대화》의 주제 또한 이전 소설집들과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역사를 바라보는 거리,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이전 소설들이 다소 근거리의 시선이었다면 이번에는 원거리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할까요. 원거리의 시선에서 좀 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소설 속에 담고 싶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좀 더 넓어졌다고도 할 수 있겠죠.

 

사실 20대 초반에 썼던 《빨치산의 딸》은 제 부모님의 역사였고, 밝혀지지 않은 역사였기에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저도 나이가 들었고, 더 많은 경험을 했고, 그사이 우리 사회도 여러 가지 변화를 겪었습니다. 변화를 겪고도 달라지지 않는다면 이상한 일이죠. 더 넓어져야 한다는 게 제 바람이고 그 시절보다야 조금은 넓어지지 않았을까요? 그렇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일간지에서 “이데올로기로만 갈라지지 않는 인생의 풍부함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해가 이번에 출간된 소설집 《숲의 대화》 전체를 떠받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고요. 하지만 이 ‘인생의 풍부함에 대한 이해’가 비단 세월만으로 얻어지는 건 아닐 것 같습니다. 그간의 세월 안에 그 이해의 근거가 여럿 있으실 텐데요.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하나만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이해하게 됐다는 표현은 좀 과장이고요.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정도가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루하루 살아낸 그 모든 시간들이 이해의 근거를 제공했겠지요. 이를테면 이성적으로 절대 흐트러질 것 같지 않던 아버지가 늙음 앞에서 무너질 때,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친구의 어떤 행동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는 걸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알게 됐을 때, 아무것도 학습하지 않은 어린 아들에게서 제가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 제 모습을 발견했을 때…

 

이런 경험들이 쌓이다 보니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행위에는 어떤 근거가 있다는 자연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겠지요. 설령 그게 유전자의 힘일지라도요. 유전자는 핏줄로 타고난 것이지만 그런 성향, 기질을 벗어난다는 건 어려운 일이잖아요? 저 역시 극복하고 싶지만 극복하지 못하는 성향 같은 것들이 있고요. 나를 보듯이 남을 보는, 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은 사실 고대의 성현들이 이미 오래 전에 주창한 보편타당한 진리인 건데, 제가 아둔하여 세월의 교훈 앞에서야 겨우 겸손해진 것이죠.

 

소설집 《숲의 대화》 중에서 가장 아끼는 단편은 무엇이고, 쓰느라 힘들었던 단편은 무엇인가요? 또 작가님이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단편은요?

 

음, 아끼는 단편은 <숲의 대화>, 가장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단편은 <혜화동 로터리>, 크게까지는 아니고 좀 힘들었던 단편은 <절정>입니다. <절정>은 노숙자로 전락하기 직전의 고통을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에 시간이 걸렸는데요. 진실로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게 아니라 희망을 놓으면 노숙자로 전락할까봐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그러한 분들의 삶이 아직도 제게는 어렵습니다.

 

가장 아끼는 단편으로 <숲의 대화>를 꼽으셨는데요. <숲의 대화>의 화자는 종의 신분과 가난, 평생 다른 남자(주인집 도련님)만 바라본 여자 등 자신의 삶에 주어진 것들을 죄다 안으로 품으며 그저 묵묵하게 살아온 인물 ‘운학’입니다. 노인이 된 그가 죽은 아내를 그리며 숲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사랑하는 여자와 자신의 아이, 자신의 목숨보다 사상과 이념을 더 중요하게 여긴 ‘도련님’이고요. 이 소설의 화자를 ‘운학’으로 설정하신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뭣이 그리 답답했소? 내가 되련님맹키 새로운 시상을 맘에 안 품어서 그것이 그리 답답했소? 있는 시상 품기도, 나넌 고달팠소.
   고달픈 시상 품을라 말고 버리면 되는디, 니는 끝내 버리질… 못했니라.
   버리다니 무엇을? 종의 신분 물려준 부모를? 종놈에서 천형처럼 따라붙은 가난을? 그는 무엇 하나 버릴 생각 하지 못하고, 그것 품고 갈 생각, 오롯이 그것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도련님 아이 품은 여자도, 도련님 마음에 품은 여자도, 도련님과 여자의 아이도, 그는 품고 갈 생각, 그것 외엔 하지 않았다.
   버릴 것이 나는… 한나도 없었어라.

 

<숲의 대화> 중에서

 

일단 제가 참고 견디는 사람들을 좋아해서기도 하고요. 오랫동안 말없이 견디는 그 마음을 잘 알지 못했는데, 알고 나니 그들의 입장에서 보는 세상이란 어떤 것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도련님보다는 운학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더 많을 테고요. 도련님은 혁명가였고,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런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혁명이 세상의 모순을 홍수처럼 단번에 뒤집는 것이라면 참고 견디면서 남을 품는 그 마음은 모순까지 품음으로써 인간의 삶을 정화하는, 늘 흐르는 조그만 시냇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런 고민의 결과가 운학을 화자로 선택하게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숲의 대화>는 ‘운학’에게, <봄날 오후, 과부 셋>은 ‘에이코’에게 이야기의 무게중심이 실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자신이 사랑 받길 원하는 대상이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고 그래서 그 이에게 샘을 내고 질투를 느낀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운학’과 ‘에이코’에게 이와 같은 감정을 실어줌으로써 어떤 이야기를 더 이끌어내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운학의 경우와는 조금 다릅니다. 운학이 받아들이고 견디는 자인 반면 에이코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라서 저지르는 인물입니다. <숲의 대화>는 받아들이고 견디는 운학을 통해 이미 죽은 도련님의 삶까지 포용하는 닫힌 구조의 소설이고, <봄날 오후, 과부 셋>은 늙었으나 아직 살아 있는 자들의 건강한 욕망을 보여주는 열린 구조여서 세 명의 인물 중 가장 역동적인 에이코를 화자로 선택했습니다.

 

 

‘운학’과 ‘도련님’이 그랬듯, 같은 시?공간일지라도 저마다 다른 삶을 일구어가는 게 ‘사람살이’고 그게 또 ‘인생의 풍부함’으로 연결될 텐데요. 《숲의 대화》를 읽으며 그 각각의 사정과 심정을 들여다보는 듯했습니다. 제각기 다른 삶들을 보듬고 있는 작가님의 따뜻한 시선도 느낄 수 있었고요. 그런데 ‘이 또한 삶이다’라고 무수히 많은 다른 삶들을 긍정하고 나서, 그럼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로 생각이 옮겨지고 나면 다시 또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가치관과 신념을 지켜나가는 것과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존중하는 태도, 그 사이에서 중심잡기가 어려운 거죠. 《숲의 대화》 속 이야기들을 경유해 이 고민에 대한 작가님의 조언을 들려주신다면요?

 

제대로 알면 누구라도 이해하게 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문제겠지요. 그런데 사람을 제대로 안다는 게 어디 쉽겠어요? 운학도 도련님도 서로에 대한 애정은 있었으나 온전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눈먼 송아지 때문에 혁명에 몸담지 못하는 운학의 마음을 도련님은 몰랐고,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선시했으나 사랑을 잊지 못해 그 여자 보낸 자리에 돌아와 죽은 도련님의 마음 또한 운학이 알지 못했지요. 긴 세월이 지나서야 그 다름의 한계를 어렴풋이 느낄 뿐입니다.

 

우리가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과연 단 하나의 어떤 절대적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 그런 것이 가능할까, 이런 문제는 저 역시 고민 중입니다. 다만 다름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보편적으로 지향해야 할 여러 가치들은 있을 것이고, 그런 문제라면 다름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겁니다.

 

인간의 다름을 인정한다면 타인에게 반드시 그 보편적 가치를 지키라고 강요하기 전에, 인간이 그러한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지 못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모순들부터 해결하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살인자가 처음부터 살인자로 태어난 건 아닐 테니까요. 살인자를 이 사회로부터 추방하기 전에 살인자로 살고 싶지 않았을 한 인간을 살인자로 만든 우리 사회의 어둠을 바라보고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것, 진정으로 다름을 품는 자의 마음일 것 같습니다.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이야깃거리를 잘 건져 올리시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 소재는 어떻게 찾으시는지요?

 

그야말로 일상에서요. 저 역시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친구, 선후배, 가족, 이웃집 아저씨, 동네 이장 아저씨, 이런 분들의 삶을 늘 지켜보며 살고 있습니다. 사실 누구나 그렇겠지만요. 때로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들려오는 뒷좌석의 이야기가 제 마음을 끌 때도 있습니다. 미용실에서 아줌마들의 수다를 듣다가 어떤 말 한마디가 제 소설의 한 문장으로 탄생할 때도 있구요.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소설의 소재가 됩니다.

 

<봄날 오후, 과부 셋>이나 <혜화동 로터리>처럼 소설 속 인물들이 투닥거리며 나누는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상대의 핵심을 찔러 비방하는 듯한데 그 바탕에 은근한 애정과 마음씀이 있다는 것도 느껴지거든요. 함께 보낸 세월과 끈끈한 정이 있지 않고선 불가능한 대화들인데요. 이와 같은 인물들의 대화는 어떻게 구상하시나요?

 

   “흐응, 잘도 그랬겠다. 늙어 꼬부라진 게 청승맞게 피붙이 그리워 울었겠지. 맞지? 삼류 빨치산?”
   “왜 이래? 토벌대 벌벌 떨던 남도부 부대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몸이야.”
   “흥, 그러니 삼류지. 오죽 못났으면 살아남았겠니? 좌나 우나 잘난 놈들은 다 먼저 갔어. 몰라 물어?”
   “그러는 너는 잘나 살아남았니?”
   “누가 뭐래니? 나도 삼류지. 같은 삼류니까 평생 어울려 놀았지.”

 

<혜화동 로터리> 중에서

 

구상이라기보다 제가 ‘촌년’이라서요. 시골이란 서울과 달리 싫으나 좋으나 동네의 모든 일들을 알 수밖에 없습니다. 맘에 안 든다고 안 볼 수도 없고요. 직장인들처럼 이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지어 먹고 살아야 하는 땅이 거기 있으니까요. 어제까지 멱살잡이를 하다가도 농번기가 되면 서로 품앗이를 해줘야 합니다. 그런 세월이 수십 년 흘러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면 서로의 바닥을 보고서도 그 바닥까지 품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게 아닐까요? 대부분의 가족이 그렇듯 말이죠. 시골에서 나고 자란 경험들이 그런 인물들, 인물들 간의 관계, 대화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사투리뿐 아니라 농촌의 생활 방식,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인물간의 정서가 소설 안에 많이 녹아 있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목욕 가는 날>에서 고향에 살고 있는 엄마와 언니 그리고 도시에 살고 있는 나 사이에 감지되던 경계가 ‘나’가 사투리를 쓰는 순간 허물어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나’가 정말 ‘고향에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실제로 현재 작가님께서도 시골에 내려가 살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고향’ 그리고 ‘귀향’, 작가님께는 어떤 의미인가요?

 

(…) 멀리 산다는 핑계로, 직장에 다닌다는 핑계로, 아이들 핑계로,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나날이 어머니로부터 멀어졌다. 어떠한 세월도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아웅다웅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어머니와 언니의 지난 세월이 오늘 고스란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나와 어머니의 세월도.

 

<목욕 가는 날> 중에서

 

앞의 답을 통해 어느 정도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유년의 원체험은 저뿐만 아니라 모든 작가들에게 있어 세계관, 인간관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30대까지만 해도 농촌에서 보낸 유년의 경험을 전근대적이라 치부했고, 근대성을 획득하고 싶어 안달을 냈습니다. 농사짓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이 전근대적인 삶의 방식인 것은 확실합니다만, 인간의 역사란 것이 꼭 직선만은 아니어서 과거의 삶이 미래의 거울이 될 수도, 혹은 새로운 시작의 첫걸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요즘에야 듭니다.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제게 고향은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파랑새 같은 게 아닐까 싶네요. 별것 아니라 생각하고 더 나은 것을 찾아 세상을 떠돌다 이제야 돌아와 별것 아니라고 치부했던 그 사소한 삶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으니까요.

 

실제 시골생활은 어떠신가요?

 

시골생활이야 당연히 불편하지요. 겨울에는 하루 두 번 아궁이에 불도 지펴야 하구요. 여름이면 온갖 벌레들과 전투도 치릅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충분히 경험해서 면역력도 있는 데다 불편함이 주는 여러 가지 선물도 있죠. 고작 저 먹을 채소 몇 가지 키우는 수준이지만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노동을 하는 것도 즐겁습니다. 예전보다 단순하고 담백해지는 느낌도 아주 좋구요.

 

그런가 하면 소설 속 농촌 현실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듯합니다. 피부로 느끼는 오늘의 농촌 현실에 대해 한마디 해주신다면요?

 

사실 시골에 와서 살긴 하지만 저 사는 곳이 인가 드문 산속이고 집밖 출입을 잘 하지 않아 시골의 현실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합니다. 시골 내려온 지 겨우 2년이니까 아직은 외지인인 셈이죠. 그냥 눈에 보이는 현실이라고 한다면 어디를 가나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분들이 계시다는 것, 그분들이 중장년층만 남은 시골의 노동력을 상당 부분 감당하고 있다는 것, 그분들과 그 자손들에게 우리나라 농촌의 미래가 달려있다는 것, 뭐 이런 정도의 현실을 본 것 같습니다. 노인 문제야 다들 아시는 거구요.

 

소설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노약자, 중증 장애인, 이민 여성 등 ‘겨우 살아가는 존재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천착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 이력이 붙으면 뭐든 견딜 만하다. 아버지는 병신자식 하나 낳아놓고 살 수 없게 됐지만,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사는 게 지옥이었던 그는 살다 보니 사는 일에도 그럭저럭 이력이 붙었다. 사는 일이 만만치 않은 것임을 제일 먼저 알려준 것은 아버지였다. (…)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그는 마음 한구석 거미줄처럼 질기게 엉겨 있던 아버지를 떨쳐낸다. 이곳은 아버지의 삶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아니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던 그만의 천국이다.

 

<천국의 열쇠> 중에서

 

글쎄요. 왜 그럴까요?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그냥 그런 분들의 이야기가 제 마음을 움직였던 건데요. 생각해보니 잘난 사람, 예쁜 사람, 돈 많은 사람들의 화려한 삶은 제가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나 부러워하고 있잖아요.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한 쓸쓸한 삶에 더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쩌면 저 역시 그런 시간들을 보내봤던 경험 때문일 수도 있겠네요. 그냥 그런 것에 마음이 끌리는 성정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구요. 그런데 나이 들어 보니 꼭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화려하게 보이는 삶에도 반드시 아픔은 있더라구요. 누구에겐들 살아가기가 쉽겠어요. 살아 있는 한 고통이나 아픔, 슬픔은 피해갈 수 없죠. 어쩌면 아픔은 생명의 쌍둥이 형제인지도 모르지요.

 

작품을 쓰는 데 영향을 줬던 소설이나 책이 있으신가요?

 

특별히 어떤 작품, 어떤 작가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평소에 이문구 선생님의 《관촌수필》과 박상륭 선생님의 《죽음의 한 연구》를 즐겨 읽습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그분들의 따스하고 깊은 시선에 늘 감탄하면서요.

 

 

고향에 내려가 사시면서 학생들에게 문학도 가르치고, 여타 문학 심사나 강의도 많이 하시는 걸로 압니다. 소설은 보통 언제 쓰시는지요?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요. 어떤 일을 하고 있든 소설 쓸 시간은 반드시 있습니다. 어차피 과작이잖아요. (웃음) 새로운 이야기를 많이 만드는 것보다 하나의 소설을 통해 저 자신이 성장하는 느낌을 더 좋아합니다.

 

만약 소설을 쓰지 않았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 것 같으세요?

 

별로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농부로 살고 있다면 좋겠네요. 저는 농부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정직한 노동으로 생명을 키워내고 그것으로 사람을 살리는 직업이잖아요? 한 톨의 쌀이 소설 한 편보다 아름다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떤 소설을 쓰고 싶으신지요?

 

좋은 소설? 죄송합니다. 이런 질문이 제일 어려워서요. 어떤 작가나 작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앞서 말한 것은 어떤 소설이 좋은지를 저 스스로 잘 모르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설령 어떤 소설이 좋은 소설인지를 안다고 해도 제 삶이 그렇지 않다면 그런 글이 나올 리 없구요. 그냥 저는 제가 따뜻하고 넓고 깊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글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께 한마디 해주세요.

 

음… 가능하다면 제 글을 천천히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밥도 천천히 오래오래 먹는 게 좋다잖아요. 글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서요. 느릿느릿, 천천히, 산보하듯 읽어주신다면 참 좋겠습니다.

 

1965년 전남 구례에서 출생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1990년 빨치산 부모님 이야기를 소설화한 《빨치산의 딸》을 펴내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판금 조치를 당하고, 이후 노동해방문학 관련 활동으로 수배생활을 했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됐고, 2004년 소설집 《행복》, 2008년 《봄빛》을 출간했다. 2006년 단편소설 <풍경>으로 이효석문학상을, 2008년 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올해의 소설상을, 2009년 소설집 《봄빛》으로 한무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빨치산의 딸》의 주 무대이자 고향인 구례로 내려가 소박하고 느린 삶을 살고 있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전공전담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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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패배자라는 낙인, 그래도 삶이다 - 소설가 전민식

 

 

글과 정리: 컨텐츠팀 현선, 희진/ 사진: 희진

 

해마다 각종 문학상을 통해 새로운 작가와 작품이 세상에 등장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이제껏 가져본 적 없는 또 하나의 시선을 갖게 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작가란 결국 지나온 삶으로부터 얻어진 마음과 생각, 이 모든 걸 아우르는 시선에 그 사람만의 고유한 이름을 새겨넣은 존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이가 바라보는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며 그 세계의 온도를 느껴볼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여기, 2012년 제8회 세계문학상을 통해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진 시선 하나가 있습니다. 그 시선의 이름은 '전민식'. 삶이 남기고 간 상실의 아픔과 상처를 살아 숨쉬는 사람의 온기로 은~근하게 데워주는, 그래서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의 세계를 펼쳐보여주는 작가이시죠. 시종일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음을 보이며 편안하게 자신의 시선을 빌려주신, 패배자라는 낙인을 낙관할 수 있을 때까지 그래도 답은 죽음이 아닌 삶이다!라고 말하는 그를, 출판사 '은행나무'의 포근한 공간에서 만나뵙고 왔습니다.      

 

 

1965년 겨울에 태어났다. 부산서 났지만 어려서 평택에 있는 캠프 험프리라는 미군 기지촌에서 자랐다. 그래서 고향은 미국과 한국 문화가 범벅이 되어 있던 캠프 험프리라고 생각한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그 후 추계예대를 입학할 때까지 유랑의 세월을 보냈다. 별별 아르바이트를 다하며 살았다. 서른을 앞둔 마지막 해에 추계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고 생활고로 다니다 쉬기를 반복하며 6년 만에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오로지 글만 쓰기 위해 취직은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아야겠기에 온갖 종류의 대필을 했다. 우연한 기회에 두 군데 스포츠신문에 3년 정도 연재소설을 썼다. 기획된 연재물을 쓸 때에도 대필을 할 때에도 자투리로 남는 시간엔 소설을 썼다. 많이도 썼다. 이번 세계문학상에 당선되기까지 장편소설로 아홉 번쯤 최종심에서 고배를 마셨다. 단편에서도 수차례 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했다. 유령작가이자 통속작가였고, 한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자의 지아비다. 

 

 

 

허투루 흘러가는 시간은 없다 

 

세계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일상에 많은 변화가 생겼을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수상하기 전부터 대필 작업을 해왔는데요. 한꺼번에 밀려든 업무를 처리하느라 더 바빠졌습니다. (당선을 축하하는) 술자리나 인터뷰 자리도 늘었습니다. 무엇보다 올곧게 내 이름 석 자가 들어간 책을 냈다는 기쁨이 큽니다. 가족들도 좋아하고요. 앞으로 대필 작업은 접고 소설 쓰기에 전념할 생각입니다.

 

소설을 쓸 때, 대필 경험에서 도움을 받기도 했나요?

 

당연히 있습니다. 그 경험을 감추려고 하지는 않아요. 밥벌이를 원해서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대필 또한 나에게 노동의 일환입니다. 일반적인 직장생활처럼 얻는 것들이 있어요. 대필을 하기 위해서는 취재 작업을 선행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내밀하게 볼 수 있어요. 누군가의 인생관이나 경험은 시간이 지나면 내 안에서 잘 삭아요. 그것이 곧 이야기가 됩니다. 자서전 외에 전문적인 분야를 대필하기도 하는데요. 예를 들어 의학이라면 문외한이니까 의뢰한 쪽에서 책을 받아 먼저 읽습니다. 전문 서적이니까 관심을 안 두면 평생 읽을 수 없는 책이지요. 그런 소소한 소득이 있습니다. 관련 현장을 견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발전소에 관해서 쓸 때였죠. 내부 설비를 두 눈으로 직접 봤습니다. 규모가 어마어마해요. 인간의 문명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생산하는 곳입니다. 전기를 만들어내는 힘이 여기에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스스로 체험하기는 어려운 세계잖습니까. 이런 점을 생각하면 득이 더 많았습니다.

 

그런 경험이 소설에 직접적으로 반영이 되었나요?

 

물론입니다. 당선되지 못한 아홉 편에도 녹아 있습니다. 내부의 경험과 외부의 경험, 반반이지요.

 

 

 

절망 그리고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구 년 전, 동생이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게 출발이었어요. 장남으로서 나는 가족을 책임지지 못했어요. 소설을 쓰겠다고 고집 부리는 장남의 집안은 결코 평화롭지 않거든요. 자연히 동생들이 내 역할을 분담했고, 나는 부채의식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러던 중에 사고가 난 겁니다. 그 일이 정점이었죠. 동생에게 뭔가를 갚고 싶었어요. 그동안 삶에 누적된 것들도 있었고, 그래서 이 소설을 썼습니다.

 

‘임도랑’은 남다른 가족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 면에서 감정적이지 않습니다. 죽음 혹은 상처의 여파가 전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요. 어떤 의도가 있나요?

 

앞서 말했던 아홉 편 중에는 젊은 친구들이 동반 자살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을 견딜 수 없는데 왜 억지로 살아가느냐. 죽음도 삶의 한 방편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었지요.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어려서 죽으면 그때까지의 경험이 전부에요. 나이가 들수록 그만큼의 경험이 쌓인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임도랑’은 인생의 모든 기반이 허물어진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갔으면 했습니다. 궁지에 몰리더라도 죽음이나 상처에 도달하기보다,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삼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모임의 성격은 이러한 상실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서로를 위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임도랑'이라는 인물과 대비되며, 상처에 대처하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고요. 특히 그 모임의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 즉 윤회랄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작가님께서 부여하고 싶었던 의미가 있으실 것 같은데요. 

 

그렇습니다. 책에서는 피타고라스 이야기를 끌어왔습니다. 동생의 죽음을 생각하면, 그게 끝이라고 여기면, 삶이 허무해요. 사후에도 다른 우주에 존재할 수 있다고 믿으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삶에서 실제로 마주치는 죽음들을.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의연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평소 참고하는 사상이 있나요?

 

어려서부터 불교 철학에 심취했습니다. 동서양은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동양은 삶의 여정, 서양은 삶의 단절로 봅니다. 후자를 바라보면 긍정적으로 살기는 힘듭니다. 그래서 동양적 사고방식이 내면화된 같아요. 소멸하더라도 새로운 물질로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은 극복의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자살도 일종의 방법이 아니냐. 누군가 묻는다면 그건 아니에요. 받아들이는 것과 행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까요.

 

 

 

 

개만도 못한 인생과 사람보다 나은 개팔자 사이 

 

개를 산책시키는 일이 실제로 있나요?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보편화된 직업입니다. 한국에는 많이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에서 개가 사람을 물거나 동종을 죽이거나 교미하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이것이 인간 사회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는데요. 개에게 특별히 어떤 의미를 부여하셨나요?

 

개를 산책시키는 일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보편화된 직업입니다. 그만큼 개에 대한 인식이 다릅니다. 외국의 경우와 다르게 우리나라의 많은 욕설에는 개가 들어갑니다. 대부분 인간보다 못한 인생이나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그런 맥락에서 끌어왔습니다.

 

그렇다면 라마는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불가에서 개는 수도를 하면 인간이 되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현대 문명에서 사람보다 훨씬 잘 사는 개도 많지요. 라마는 그런 개를 대표합니다. 앞서 언급한 개들과는 다른 삶의 절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개를 산책시키는 걸 밥벌이로 삼고 있는 '임도랑'의 처지가 더 부각되는 것이기도 하고요.

 

라마와의 관계가 ‘임도랑’에게는 어떤 의미로 남았나요?

 

‘임도랑’은 모든 걸 다 잃은 인물입니다. 그런 ‘임도랑’에게 라마를 비롯한 인물들이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임도랑'이 라마를 산책시키며 받은 돈은 일반 대기업 직원들의 월급을 상회합니다. 그래서 '임도랑'은 라마를 통해 재기하려는 욕망을 갖게 되고요. 그런데 라마의 실종으로 인해 이와 같은 기대가 허물어지고요. 차후에 라마가 ‘임도랑’에게 돌아와 안기는 것은 욕망과 구별되는 관계에 대한 믿음의 확인입니다. 자신의 욕망으로만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삶을 버티게 하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요.

 

 

 

사랑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

 

‘임도랑’이 파산하는 계기로 ‘진주’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두 사람의 애정관계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나요?

 

연인의 결별, 그 갈등을 통해 ‘임도랑’을 더 궁지로 몰아넣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임도랑’은 ‘진주’를 사랑합니다. ‘진주’의 배신보다 그 사랑에 주목해 주었으면 해요. 사랑의 목적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입니다. 단지 남녀뿐만 모든 관계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삶의 흐름 속에서 사랑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이 자살하는 사람보다 더 많습니다.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임도랑’에게 진주에 대한 사랑은 회한의 복원입니다. 그것이 곧 ‘임도랑’의 믿음이겠지요. 다른 인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음보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살아가는 것은 개개인이 믿는 것들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사랑을 주기보다 받을 때 의미를 느끼는 삶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바를 대입하면 주고받음은 연쇄 작용을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내가 낼 수 있는 에너지가 열 개, 반대의 경우에는 백 개입니다. 사랑을 줄 때 삶에 대한 욕망은 더 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 소설가의 인생법

 

: 책으로부터 받은 위안을 세상으로 돌려주다

 

임도랑’의 독서 행위, 그리고 작가님에게 독서란 무엇인가요?

 

소설 속에서 독서는 특별하게 볼 수 있겠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집 근처에 도서관이 있어요. 보통은 그곳에서 작업을 합니다. 대학 도서관 못지않고 신간은 또 얼마나 빨리 들어오는지 몰라요. (웃음) 책은 나에게 위안이자 도피처입니다. 도서관이라는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은 가장 값싼 가격으로 자기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매체입니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컨텐츠와 달리 상호작용이 가능합니다. 거리를 둘 수도 있고, 다시 가까이 할 수도 있어요. 책에 소요하는 시간, 그 과정을 거치며 인간이 성숙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맛을 아는 사람은 책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임도랑’도 그 맛을 아는 인물이지요.

 

한 편의 소설을 마무리하셨습니다. 여전히 못다 한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요.

 

책으로 내고 싶은 이야기가 두 개쯤 있어요. 국가 혹은 거대권력에 감시당하는 현대인에 관한 겁니다. 사회생활을 하면 사적 정보가 나도 모르게 정부나 기업에 들어갑니다. 그걸 인식했던 적이 있는데요. 자동차가 고장 나서 보험회사에 전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위치 확인에 동의하느냐고 묻더군요. 그 메시지를 확인했더니 바로 전화가 와서 ‘지금 어디어디에 계시죠?’라고 하는 겁니다. 놀라웠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출생부터 관리하는 쌍둥이가 있고, 그들을 감시하는 관찰자가 있다. 그런 이야기죠. 더 말해드릴까요? (웃음) 이건 대필 경험에서 비롯된 겁니다. 앞서 발전소 이야기를 했는데요. 양수저수지라는 게 있습니다. 상부에서 하부의 물을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전기를 생산합니다. 실상 생산량보다 그 과정에서 전기가 더 많이 들어갑니다.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에 평소에는 가동하지 않습니다. 화력이나 원자력 가동이 불가한 상황을 대비한 긴급용이죠. 그래도 늘 상주하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할 일이 없어도 출근해서 자리를 지켜야죠. 그런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싶습니다.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미국 월가 점령 시위’를 언급하셨습니다. 그만큼 현 사회상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근래 주목하고 있는 이슈가 있다면요?

 

요즘에는 당연히 선거입니다. (웃음) 투표를 잘못해서 벌어지는 일이 많아요. 정권이 바뀌면서 이상한 일이 많았습니다. 예술계만 봐도 그렇습니다. 한예종 원장을 이유 없이 교체한다거나 문예진흥원에서 예술인에게 지원금을 주는 정책에도 문제가 있어요. 서류를 보면 정부 정책에 반하면 지원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하거든요. 무엇이 됐든 그런 식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억압 받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투표를 잘해야 합니다. 또한 그런 임무를 띠고 글을 써야겠지요.

 

무명 시절이 길었습니다. 긴 터널과도 같았을 그 시간을 견디게 해준 작품 혹은 작가, 롤모델이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하는 작가는 많습니다. 그 중에서 소설을 이렇게 써야겠다고 느낀 작가는 ‘최서혜’입니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고 대표작으로는 ‘홍염’이 있어요. 어느 정도였냐 하면 대학 때 일제강점기 작가를 조사하는 과제가 있었는데, 나는 ‘최서혜’를 주인공으로 전기소설을 썼습니다. 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그렸어요. 이후에도 그만한 인물은 없었던 것 같아요. ‘최서혜’라는 작가, 좋아합니다.

 

글 쓸 때는 자기 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은데요. 준비하는 동안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나요?

 

당선 후에 모교인 추계예대에서 강연을 부탁 받았습니다. 그런 건 처음이라서 그저 내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믿어야 한다. 졸업할 때까지도 자신을 아직 믿지 못하겠다면 취직하지 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랬더니 누가 질문을 합니다. 너무 막연하다.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나. 나는 말했습니다. 당선되기 전에 내가 쓴 아홉 편의 소설이 전부 장편이었다. 편당 이 년이 걸렸으니 도합 십팔 년이다. 그 정도는 노력하는 것이 좋지 않나. 재능이 있다면 나보다 준비 기간도 짧아질 테고. (웃음) 물론 힘든 시간입니다. 하지만 보상 받는 날이 옵니다.

 

소설만이 가지고 있는 힘이 있다면요?

 

소설과 대치되는 매체가 영화입니다. 영화랑 소설이 싸우면 소설이 질 것입니다. 그러나 영화가 한방이라면 소설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파이터에요. 영화가 장치적으로 풍부한 매체라면 소설은 영화 몇 편은 담을 수 있는 그릇입니다. 또한 소설은 인간의 삶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휘어질 수 있도록 합니다. 그 감동이 굵고 강하고 오래간다.

 

건전지 광고가 생각나는데요. (웃음)

 

비슷합니다. 소설은 오래 가는 건전지!

 

이제는 본인의 이름 석 자를 앞세우고 세상에 나오셨습니다. 작가님의 작업에 기대가 많은데요. 앞으로 만나게 될 독자 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조금 있으면 내 나이 오십입니다. 아직도 철이 덜 들었단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도 살아가지요. 삶은 살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특권이에요.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뭅니다. 불평등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대항하지 않으면 인간으로서의 의미가 상실됩니다. 맞서야만 사는 것입니다. 그때 덜 꺾이려면 주변에 있는 좋은 책을 읽으면 됩니다. 《개를 산책시키는 남자》도 많이 읽어 주시고. (웃음) 인터넷에서 인생의 답을 구하지 말고, 책 속에서 찾으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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