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5.02.13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의 위로하는 마음
  2. 2013.10.02 [서점에서 만난 사람] 기억되지 못한 삶을 기억함으로 - 《제7일》의 소설가 위화
  3. 2013.06.12 《내게는 이름이 없다》 - 괜찮아. 그게 인간이야
  4. 2012.09.13 [서점에서 만난 사람] 그녀가 건네는 첫 번째 위로 - 소설가 신혜진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의 위로하는 마음

 



위화 |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문학동네 | 2012


오늘날 중국은 놀라울 정도로 급성장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 발전을 거듭하면서 이제는 미국과 나란히 힘을 겨루는 나라가 되었다. 전 세계의 명품들은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가고 그들은 세계로 여행을 다닌다.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관광객이 줄어들면 큰 타격을 입을 정도로 중국의 영향력은 커졌다.

하지만 억만장자와 백만장자가 넘쳐도 중국의 다른 한쪽에서는 빈민 인구가 1억 명에 달한다. 대외적 이미지에 빠진 중국은 힘든 가난 속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지 않는다. 위화는 중국인의 진정한 비극이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빈곤과 기아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 빈곤과 기아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이 책은 중국에서는 금지되어 대만에서 출판되었다. 중국 지식인들이 보편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문제에 관하여 작가가 거론했기 때문이다. 1989년 베이징 대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민주와 자유를 요구하는 동시에 관료의 부패와 전횡에 반대했다. 하지만 곧 중국 정부는 무력으로 진압했고 그 후 어느 매체에서도 이 사건은 사라졌다. 인터넷에서도 6월 4일은 금지된 날짜가 되었다.

위화는 유년시절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거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그리고 천안문 사태를 겪으면서 오늘날의 중국이 되기까지, 그의 경험을 토대로 10가지 단어를 선택해서 이야기한다. 즉 10개의 방향으로 나아가며 중국을 입체적으로 그려보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 책이 몰랐던 중국의 과거와 현재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놀라운 책이었다.

문화대혁명이 진행되던 때에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 반혁명분자가 되었다. 가정은 파탄이 나고 모든 가정에서 책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책을 찾아 헤매고, 거리에는 대자보가 붙고, 수많은 사형수가 총살되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하지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책이 넘쳐나고 개발 명문으로 불도저가 강제로 집을 무너트린다. 사람들은 돈만 쫓아다닌다. 물질이 결핍된 시대에서 낭비가 넘치는 시대로, 정치 지상의 시대에서 금전 제일의 시대로, 본능이 억압된 시대에서 욕망이 넘쳐나는 시대로. 극과 극으로 바뀌었다.

위화는 이렇게 10개의 단어로 중국을 살피고 무조건 개발과 돈만 보고 달리는 지금, 환상의 이면에 진정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어디 이것이 중국뿐이겠는가? 우리나라 현실과도 겹치는, 지금 세상의 모습이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 책은 특히 후기에서 여운이 길게 남는다. 직업을 국가에서 배정할 때 위화는 1978년 치과의사가 되었다. 치아를 뽑는 일 외에도 매년 여름이면 노동자들과 아이에게 예방주사를 놓았다. 당시에 물자가 부족하다 보니 주삿바늘을 재사용했다. 매번 주사기를 사용해서 바늘 끝이 구부러져 팔뚝에 바늘을 꽂는 것도 힘이 들었다. 주사기를 뺄 때는 작은 살점이 바늘에 딸려 올라오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극심한 고통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지만 위화에게 그들의 고통은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유치원에 가서 예방주사를 놓을 때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살이 연한 아이들은 바늘에 달려 나오는 살점의 크기가 컸고 피도 많이 났다. 유치원이 온통 아이들의 고통으로 울음바다가 되었다. 그 뒤 달리 손을 쓸 수 없었던 위화는 일과가 끝나면 숫돌에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뾰족하게 갈기 시작했다.

그는 왜 울부짖던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 전에 노동자의 고통을 생각하지 못했는지 회상할 때면 마음이 괴로웠다. 주사를 놓기 전에 먼저 구부러진 주삿바늘을 자신의 팔에 찔러보았더라면 노동자들이 극심한 통증을 못 이기고 신음하는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느낌이 내 뼛속 깊이 새겨졌고, 그 뒤로 내 글쓰기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353쪽)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 중국의 고통은 나 개인의 고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화의 말이다. 이 말처럼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 되어 글쓰기를 한다는 위화의 글이야말로 진정 빛보다 멀리 간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자두줄기'님은?

꿈, 희망, 행복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이 세 가지를 가지기 위해서 오늘도 책을 읽고, 글을 끄적거리고, 그리고, 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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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기억되지 못한 삶을 기억함으로 - 《제7일》의 소설가 위화

 

취재·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빈자와 부자, 사람과 삶이 둘로 쩍 갈라져 있다. 그 사이를 자본의 칼이 날카롭게 지나간다. 날에 베이고 피 흘리는 건 안 됐지만 빈자들의 몫. 먹고 살겠다 아등바등 거리던 몸부림의 끝에 고독해서 서글퍼진 죽음들이 남았다. 따뜻한 피 돌고 비릿한 땀냄새 그득한 이 생의 흔적마저 애도해줄 이 없는 이들이 죽음 이후에도 안식에 이르지 못한 채 희뿌연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 창세기

 

그렇게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제7일》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위화는 죽음 이후의 시간에 다시금 삶을, 현실을 들여다 놓았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깨지고 망가져 너덜거린 채로 죽음으로 내몰린, 말해지지 않고 기억되지 않으나 결코 망각해선 안 되는 인생사들을 움켜쥐고. 고요하고 적막한 사후에야 비로소 기억을 곱씹고 추억을 되새겨 삶을 정리할 수 있게 된 이들로부터 그와 다르지 않은 현실에서 그와 다르게 않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로, 7일의 시공을 전하기 위해 지금-여기에 그가.

 

 

 

항상 현실과 밀착된 이야기를 써오셨는데요. 이번 소설은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후세계가 배경이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현실의 시점에서 썼다면 한 각도나 한 단면만을 다루게 되었을 텐데, 사망 이후의 시점을 선택해 사회 전체를 보다 객관적이고 다채롭게 그리고자 했습니다.”

 

흔히 죽음 이후에는 평등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요. 《제7일》은 사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빈자와 부자, 그 불평등한 처지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죽은 후에 찾은 화장터에서 그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고요.

 

   대기실 오른쪽에는 쇠틀에 고정된 플라스틱 의자가 줄줄이 놓여있고, 왼쪽에는 푹신한 소파가 둥글게 몇 겹의 원을 이루며 놓여 있었다. 소파 구역의 중앙 탁자에는 플라스틱 꽃까지 꽂혀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에는 화장을 기다리는 대기자가 무척 많았지만 소파 쪽에는 다섯 명뿐이었다. 그들은 전부 성공한 명사들처럼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고, 플라스틱 의자 쪽 사람들은 하나같이 옷깃을 여민 채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귀빈 구역의 화제는 수의와 유골함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은 모두 최고급 명주 수의로, 손으로 직접 수를 놓은 화려한 무늬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수의의 가격을 말했는데, 여섯 명 모두 2만 위안이 넘었다. (…) 이어서 그들은 자신의 유골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두 장미목 재질에 정교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면 6만 위안이 넘는다고 했다.
   우리 쪽에서도 수의와 유골함에 관해 이야기가 오갔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인조 견사에 천연 면사가 섞인 1천 위안 이하의 수의를 입고 있었다. 유골함은 측백나무나 잡목 재질에 조각은 없었고 가장 비싼 게 8백 위안, 가장 싼 게 2백 위안이었다. (17-20쪽)

 

“현재 중국에는 경제 발전의 폐해인 불평등 문제가 불거지고 있고, 그 점을 소설 속에서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제7일》에선 화장터에서 화장된 후 유골함에 안치되는 것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수의와 유골함, 묘지 등을 마련할 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고, 죽은 이를 애도해줄 누군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죽고 나서 ‘안식의 땅’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 잊힌 고독한 사람들입니다. 가족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를 알지 못하니, 스스로가 직접 자신을 애도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고요.”

 

   걸음을 옮기려다가 뭔가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흩날리는 눈송이 속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장(喪章)이 떠올랐다. 나는 외톨이라서 애도해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애도하는 수밖에.
   다시 셋집으로 돌아가 옷장에서 검은 천을 찾았다. 한참을 뒤졌지만 검은 천은 보이지 않고, 대신 검은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탓에 검은색에 희끄무레한 색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소매 일부를 잘라 하얀 잠옷의 왼쪽 소매에 끼웠다. 스스로 애도하는 모양새라 부족한 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만족스러웠다. (16쪽)

 

 

소설 속 모든 이야기는 화자인 ‘양페이’를 통해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는 이승에서의 자신의 삶뿐 아니라 사후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을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제7일》의 서사가 그를 통해 진행되는 만큼, 이 인물의 성격이나 태도 등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양페이’가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배경이 사후세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 속 상황들을 더욱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장치이고요.”

 

   앞으로 걷고 또 걸어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강제 폭력 철거에 항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현수막도 걸지 않고 구호도 외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불행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가면서 나는 그들이 서로 다른 강제 철거의 피해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나는 그 폐허를 바라보았다. 콘크리트 사이로 옷가지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옆으로 지게차 두 대와 트럭 두 대, 경찰차 한 대가 정차해 있고 따뜻한 차 안에 경찰 네 명이 앉아 있었다.

   빨간색 오리털 점퍼를 입은 여자아이가 부러진 철근이 양옆으로 구불구불 튀어나온 시멘트 판에 혼자 앉아 있었다. (…) 아침에 집을 나서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집이 사라진 것이다. 집도 부모도 보이지 않아, 폐허에 앉은 채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칼바람에 덜덜 떨면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첫째 날’, 30, 34쪽)

 

(…)
“저쪽에서 우리 딸을 보신 적이 있나요?”

 

(…)
“두 분 딸을 보았습니다. 정샤오민이죠.”

 

(…)
나는 그들이 말하는 딸이 누구인지 알았다. 빨간 오리털 점퍼 차림으로 콘크리트 폐허 위에 앉아, 그 차가운 바람 속에서 숙제를 하며 부모를 기다리던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 아이는 부모가 바로 밑 폐허 속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
“샤오민은 두 분 위에 앉아 있었어요.” (‘다섯째 날’, 204, 207, 209쪽)

 

그가 전해준 저마다의 사연에 화가 나고 눈물도 나고 미소가 번지기도 합니다.

 

“소설로 옮기면서 재구성된 면이 있지만, 실제로 모두 중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샤오민’의 부모는 야근 후 새벽에 돌아와 아이를 학교에 보낸 후 잠들어 있었습니다. 강제 철거가 이미 진행된 후에야 잠에서 깨어나고요. 그래서 그들이 무너지는 건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폐허 속에 묻히게 된 것이고요.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권력에 의해 “그들 부부가 업무 중에 함께 순직했다는 이야기로” 엄폐되었으니까요. 소설 안에는 이 같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된 뉴스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작가로서 현실을 직시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세대 작가들이 다들 그런 것처럼 저 또한 제 작품을 통해 실제 현실을 일관되게 다루어왔는데요. 요즘은 이 일에 다소 어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 중국사회가 소설보다 더 황당한 경우가 많거든요. 말하자면, 지금 중국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이거 그냥 현실 이야기지.’ 정도로 받아들인다는 거죠. 하지만 이 소설을 미래의 독자들이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비로소 ‘우리가 정말 황당한 시대를 살았었구나’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이 중국 현실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보다 황당한 중국사회, 이 현실을 제대로 알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요. 언론의 자유, 실제 중국 상황은 어떤가요?

 

“중국 정부는 매체와 문학에 대한 통제와 검열을 계속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식이 조금 달라졌죠. 소설의 경우, 독자들이 직접 찾아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TV나 신문 등의 다른 매체에 비해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현재 문학은 출판사 사장이 그 소설을 출간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고요. 반면에 매체에 대한 통제는 여전히 강한 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놀고 싶어서 문학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히셨습니다.

 

“일단 ‘논다’는 것은 자유와 관계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외의 일은 하지 않는 것이죠. 지금도 물론 그 생각은 유효하고요.”

 

놀려고 문학을 한다고는 하셨지만 창작의 고통이 있을 것 같은데요. 작품 쓰시다가 스트레스가 생길 때 어떻게 해소하시는지요.

 

“처음에 글쓰기를 시작했을 땐 굉장히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무엇을 쓴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기도 했고, 점점 더 글 쓰는 게 재미있어졌습니다. 가장 좋은 건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몰입해서 글을 쓰는 건데, 지금은 거의 내 존재를 잊을 만큼 몰두해서 쓰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한참 글을 쓸 때는 뇌가 각성 상태여서 잠을 잘 못 잡니다. 반면,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잠이 솔솔 쏟아지고요. 필요할 때 자고 필요 없을 때 안 자야 하는데 그게 바뀌어있어 고민입니다.(웃음)”

 

 

작가로서 앞으로의 목표가 있으실 텐데요.

 

“단순합니다. 내가 계속해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써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죠.”

 

 

위화(余華)

 

1960년 중국 저장성에서 태어났다. 1983년 단편소설 〈첫 번째 기숙사〉를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등 실험성 강한 중단편 소설을 잇달아 내놓으며 중국 제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첫 장편소설 《가랑비 속의 외침》으로 새로운 글쓰기를 선보인 위화는 두 번째 장편소설 《인생》을 통해 작가로서 확실한 기반을 다졌다. 《인생》은 장이머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으로 '위화 현상'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1996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로 세계 문단의 극찬을 받으며 명실상부한 중국 대표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1998년 이탈리아 그린차네 카보우르 문학상, 2002년 중국 작가 최초로 제임스 조이스 기금, 2004년 프랑스 문학예술 훈장 및 미국 반스 앤 노블의 신인작가상, 2005년 중화도서 공로상, 2008년 프랑스 꾸리에 엥테르나시오날 해외 도서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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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이름이 없다》 - 괜찮아. 그게 인간이야

 

 

위화 | 《내게는 이름이 없다》 | 푸른숲 | 2007

 

그는 자기한테 어떤 약점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하지만 자신은 그걸 모르고 있다. 어쩌면 이제껏 그 점을 인정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138쪽, <내가 왜 결혼을 해야 하죠>)

 

인간은 모두 약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약점을 포장하는 것은 물론, 완벽한 인간을 꿈꾸기까지 한다. TV와 영화에 나오는 세련되고, 이지적이며, 훌륭한 매너에 고결한 인품까지 갖춘, 무결점의 인간형이 우리가 추구하는 모습이다. 현실을 애써 외면한 채 가상의 스크린에 비친 허상만을 좇는 셈이다. 그에 반해 총 17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위화의 단편소설집 《내게는 이름이 없다》에는 하나같이 비루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못 배우고, 야비하고, 순박하다 못해 멍청하기까지 한, 우리의 눈높이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는 인간유형들이다. 책의 제목과 동일한 단편 <내게는 이름이 없다>에서는 자신의 이름과 사랑하는 개의 목숨을 맞바꿔 버린 아둔한 인물이 등장하고, <내가 왜 결혼을 해야 하죠>에서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받아 친구의 부인과 엉겁결에 결혼하는 황당한 남자의 사연이 소개된다. 생면부지인 사람의 장례식에서 떠밀리듯 상주가 되어버린 한 인텔리의 이야기 <북서풍이 불어오는 오후에>에서는 나오느니 한숨 뿐이다. 친근감과는 거리가 먼 인간군상들의 모습이지만 위화 특유의 해학과 페이소스로 버무려져 의외의 정감이 느껴진다. 

 

 

위화 작품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이긴 하지만 특히 이 단편집에서는 두 가지 특징이 도드라진다. 먼저, 드라마틱한 반전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 친구로부터 빌려온 비디오에서 자신의 부인의 불륜을 목격하게 되는데, 그래서 어떤 큰 사건이 터질 것이 예상되지만, 허무하게도 이야기의 결말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냥 흐지부지 넘어간다(<왜 음악이 없는 걸까>). 겁쟁이 주인공이 아버지의 장렬한 죽음까지 회상해 가며 자신을 괴롭힌 녀석에게 복수하러 찾아가지만 또다시 죽도록 얻어맞을 뿐,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다(<난쥐새끼>). 바람을 피우다 걸린 주인공을 도와주러 간 친구들의 이야기도 결국 술로 진탕 회포만 풀뿐, 별일 없이 마무리 되고 만다(<공중분해>). 화를 내야 할 장면에서 바보같이 뒤로 물러서고, 복수를 기대하는 장면에서 그 어떤 통쾌함도 없으며,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긴장감을 조성해 놓고는 슬며시 헛바람만 빠지게 한다. 엉겁결이거나, 황당하거나, 아니면 무기력하거나, 그렇게 이야기들은 싱겁게 끝이 난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친구 마얼은 비디오 테이프 세 개를 궈빈에게 되돌려주지 않았다. 궈빈도 마얼에게 그 일을 끄집어내지 않았다. 이따금 궈빈은 예전에 하던 대로 회색 바바리를 입고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 도시의 긴 거리가 끝날 때까지 걸어가 마얼의 집 대문 앞에 도착하면 길쭉한 손가락을 굽혀 대문을 두드렸다. (87쪽, <왜 음악이 없는 걸까>)

 

두 번째로, 다면적이기에 공감하게 만드는 등장인물들을 들 수 있다. <황혼 속의 소년>을 보자. 너무도 배가 고파 사과 하나를 훔친 소년, 그리고 그 소년의 손가락을 잔인하게 부러뜨리는 것으로 모자라 짐승처럼 가게 앞에 묶어 놓는 과일장사 노인. 치솟는 분노를 느끼게 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의 모습이다. 하지만 소설은 그 노인의 애절한 가족사를 말해주는 낡은 사진 한 장으로 결말을 대신한다. 이해하고 싶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저 악랄한 노인의 삶에 그나마 한 가닥 고개를 끄떡이게 하는 사진인 것이다. 결국 속사정을 알고 보면 이해 못 할 인간은 없다는 것. 열 일곱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대개 이런 식이다. 나쁜 사람인 것 같으면서도 알고 보면 꼭 그렇지 만도 않고, 멋져 보이기도 하면서 달리 보면 추한 인간이며, 허름해 보이면서도 알고 보면 의외로 세련된 인간들.

 

결국 기대를 벗어난 반전 없는 밋밋한 결말도, 정형적이기보다 다중적인 모습을 가진 등장인물들도, 모두 어깨의 힘을 뺀 인간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작가의 계산된 설정으로 이해된다.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어쩌면 생소한 척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이해할 수 밖에 없는, 앞뒤가 안 맞고 뒤죽박죽이지만 알고 보면 그런대로 연결고리를 유지하고 있는, 그러한 인간 그대로의 모습 말이다. 이전의 작품들에서도 그렇지만 결국 위화의 인간들은 ‘현실’을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현학적이고, 관념적이고, 가식적 삶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현실. 그래서 하나같이 모순투성이지만, 그런 인물들이 날뛰던 책장을 덮으면 모든 찌꺼기가 걸러지고 비로소 하나의 잔상만이 눈앞에 남는다. 인간. 우리는 오늘도 저 높은 곳에 눈높이를 맞추려 안간힘을 쓴다. 동시에 땅을 딛고 있는 아래에서는 이율배반적이고 약점투성이인, 까치발로 모아 세운 두 다리의 저림을 느낀다. ‘모름지기 인간은 말야..’라며 헛기침 섞인 설교들이 난무하고, 부르르 떨려 오는 두 발의 쉴 곳을 찾지 못해 탄식만 흘러 나올 때, 바로 그때 저 멀리서 위화가 다가온다. 그리고 우리에게 따뜻한 한마디를 건넨다.

 

괜찮아. 그게 인간이야” 

 

오늘의 책을 리뷰한 '닌자뚱땡이'님은?
검도를 그만둔 후 뱃살이 부풀어 오를 무렵 얼떨결에 만든 아이디가 '닌자뚱땡이'입니다. 좀 더 멋진 걸로 만들 걸 땅을 친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냥 팔자려니, 포기하며 살고 있습니다. (아이디의 뜻을 묻는 분들이 간혹 계셔서요.) 지금껏 개인사업을 해오느라 경제경영서나 자기계발서 외에 인문서적을 많이 접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겨우 한두 권 읽으며 초보적인 리뷰 쓰기를 하고 있는데, 이렇게 '오늘의 책'에 겁도 없이 응하는 만용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좋은 도전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동시에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9살 난 아들 녀석에게 물려줄 최고의 유산은 '여행과 책'이라는 신념 하에 틈나는 대로 끌고 다니고 있으며 이게 취미라면 취미입니다. 가끔 혼자만의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데, 여행지에서 만나는 좋은 책 한 구절에 야밤 '치맥'과 버금가는 전율을 느끼기도 하는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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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그녀가 건네는 첫 번째 위로 - 소설가 신혜진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관련자료 제공 | 은행나무

 

나 좀 위로해줘. 사람들은 이런 말을 쉽게 꺼내지 않습니다. 위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 데서 시작하거든요. 발견, 그 자체에 힘이 있는 거죠. 몇몇 위로는 보통 이 단계를 건너뜁니다. 새로운 은하계나 공룡 발자국을 발견하기보다 헤아리기 어려운 게 마음속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주 어긋납니다. ‘말을 해야 알지!’라는 말에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라고 받아치는 식입니다. 하지만 모든 위로가 이처럼 겉돌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음악이나 영화, 책 한 권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죠. 그 이야기 참 내 이야기 같더라, 하면서요. 이 소설,《퐁퐁 달리아》는 어떨까요? 모름지기 글쓴이에게 답을 구해야 할 터. 그 위로의 장을 막 넘기는 순간입니다.

 

첫 소설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책을 보면 소도시 변두리의 정서가 느껴지는데요. 작가님이 자라온 환경이 반영된 소설들인가요?

 

충북 중원군 노은면 연하리 장터가 고향입니다. 소도시는 아니고 면소재지입니다. 흔하디흔한 시골이지만 뛰어난 시인을 둘이나 배출한 동네입니다. 신경림 선생님, 함민복 선배님이 한 동네 어른들이세요. 저는 초등학생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고, 부모님은 아직 그곳에서 살고 계세요. 세련된 도회지보다는 농촌이나 어촌에 있을 때 더 마음 편합니다. 소설의 배경이나 인물들도 농어촌, 촌사람에 끌리는 듯합니다.

 

소설의 공간을 상상할 때 고향 마을을 변형시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잘 아는 곳이니까요. 예전에는 인근에 금광이 있어서 꽤 융성했는데 폐광이 된 이후로는 점차 쇠락했어요. 지금은 행정구역상 충주시에 편입되고 고속도로까지 뚫렸지만 오일장도 안 서고 세 개 있던 다방도 하나로 줄었지요.

 

<활명수> 등 소설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은 ‘어딘가’로부터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귀향의 정서에서는 ‘드디어 돌아왔다!’라는 안정감보다 상실감이 느껴집니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님에게 고향이란, 그리고 귀향이란 소설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궁금합니다.

 

소설을 쓸 때, 잘나가는 강남오빠의 성공담보다 찌질한 인간들의 실패담, 그리고 그 안에서 독자가 찾아낼 수 있는 따뜻함과 위로는 뭘까, 고민하는 편입니다. 저는 시골 출신입니다. 당연히 머릿속 고향의 이미지는 논, 밭, 산으로 고착돼 있지요. 언젠가 ‘귀농’을 소재로 소설을 하나 쓸 생각입니다만, 생각해 보세요. 귀농을 하시는 분들의 공통점이 뭘까요? 도시 살이에 지친 사람들이 고향과 귀농을 떠올리고, 좀 더 행동력이 있다면 마침내 돌아가지 않던가요. 그건 또 왜일까요?

 

제 생각에 ‘고향’은 그런 곳입니다.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묻지 않는 유일한 곳. 왜 왔느냐고 묻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 부모이고 언제 가더라도 품어주는 비빌 언덕이 고향이라고 생각해요. 때로는 위로받기 위해 그곳을 향해 떠나기도 하고요. ‘위로’와 ‘떠나다’라는 단어의 어감은 꽤 쓸쓸한데요. ‘위로’는 상처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지요. 비자발적인 ‘떠남’은 배척당한 사람의 비애를 느끼게 하지 않나요? 물론 저만의 주관적인 느낌일 수 있겠습니다만 상처받지 않은 사람에겐 위로가 필요 없는 법이지요. 금의환향하는 아들보다 거지꼴로 몸을 숨겨가며 밤에 돌아온 딸을 더 꼬옥 안아주는 사람이 부모인 것처럼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향은 그런 곳이 아닐까요? 물론 강남오빠도 밤새 말춤을 추고 나서는 힘들고 외로울 수 있겠지만요.

 

다른 소설 이야기도 궁금한데요. <바겐세일>에 ‘구슬아이스크림’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인물은 공간적 배경인 백화점이나 그 속의 다른 인물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면을 지닙니다. 탈의실에서 시집을 읽는 설정이 특히 그렇고요. 이 인물을 등장시키신 특별한 의도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대학 시절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일 년 동안 휴학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백화점에서 일을 했어요. 당시에 구슬아이스크림이 한국에 막 상륙하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제가 일하던 곳에도 아이스크림 마차가 들어섰고, 거기서 일하던 언니가 정말 예뻤어요. 얼굴과 몸매도 예뻤지만 그 사람만 유니폼이 달라서 더욱 눈길이 갔지요. 강남에 있는 백화점이었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 중에는 돈이 궁하지 않은 고학력 중산층 주부사원도 있었어요. 인품 좋으신 할아버지가 도넛을 튀겨 파시던 것도 생각나네요. 그런데 이상했어요. 부자도, 높은 공부를 한 사람도, 좋은 인품도 전혀 부럽지 않은데 그 앞치마가 그렇게 부러운 거예요. 칙칙한 백화점 유니폼을 입는 자들과는 계급이 달라 보였나 봐요. 소설 안으로 데려올 때 시집은 더 튀라고 일부러 붙여준 액세서리인데요.

 

백화점에서 일하는 소녀가장 J에게 욕망의 대상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신분 상승 욕구가 크면 클수록 J가 처한 상황이 핍진하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싶었지요.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런 이야기도 들었는데요, 심지어 교도소 안에서조차 계급과 계층이 갈린다고요. 박탈감이나 부당하다는 느낌은 상대적인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요. J가 느낄 법한 불만족을 구슬아이스크림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우회적으로 보여주려는 의도였습니다.

 

<대신 울어드립니다>를 보면 장례식장에서 대신 울어주는 여자가 나옵니다. 소설을 읽으며 누군가 죽었다는 것의 슬픔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의 슬픔 중 어느 것이 더 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대신 울어드립니다>를 쓸 때는 배경 설정을 장례식장으로 잡았지만 솔직히 죽음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며 쓰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자의 ‘식욕을 돋우는 냄새’를 썼지요. 죽음에 근거리에 있지만 역으로 삶을 보여주고 싶었는데요. 죽음과 가까운 곳에 들어가, 살려고 발버둥치는 여자의 인생이 슬퍼 보였던 모양입니다. 오히려 <밤소풍>을 쓸 때 삶 또는 죽음에 대하여 많이 생각했습니다. <밤소풍>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생의 이면에 유통기한이 찍혀 있고 우리가 그것을 읽을 수 있다면 과연 행복할까? 모두가 삶의 끝에서 죽음을 경험할 테지만 태어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듯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마감의 순간을 속속들이 이해하긴 어려울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줄 수 없기에 누구도 배운 바 없는 생의 끝.”

 

이런 이야기를 하면 작품에 대한 인상이 반감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밑줄 그은 부분은 제 일기장에서 베낀 것입니다. 이 부분만큼은 작품 속 ‘나’의 심리이면서 한때 저의 생각이기도 한 셈이네요. ‘삶 같은 죽음’, ‘죽음 같은 삶’, ‘잠 같은 삶’, ‘죽음 같은 잠’ 등등 제 느낌에 비슷하다고 분류할 수 있는 것들을 엮어서 생각하는 편인데요. 생각을 증폭시켜 작품을 쓸 때 상당히 유용한 것 같거든요. 실제 생활을 할 때는 ‘그냥 열심히 사는 거야!’ 정도이지, 매일 ‘삶과 죽음’에 대해 심각하고 무겁게 생각하면서 어떻게 사나요. 친구들이랑 막 떠들고 일상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지요. 그게 사는 걸 ‘생각하는 게 아닌 느끼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가 있듯이 사람은 누구나 외롭기 마련일 텐데요. 작가님의 작품들에서도 이 “‘외로움’이라는 기호”로 읽을 수 있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외로움의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지 끝내 알 수 없”을 만큼요. 그런 의미에서, 작가님에게 외로움이란 무엇인지, 그 외로움을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게 이 소설집에 있는 작품들과는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랑이 외로운 건 운명을 걸기 때문이지. 모든 것을 거니까 외로운 거야. 사랑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외로운 거야.” 조용필 아저씨의 노래입니다. 리와인드해서 앞부분을 조금 더 들어볼까요?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있는 내 청춘에 건배!”

 

어렸을 때 이 노래를 들으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어요. 아유, 근데 이제 나이를 먹나 봐요. 막 공감이 되는 겁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 함께 있을 때 더 외롭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아, 요건 ‘진짜배기 외로움’인가 보다, 싶을 정도로요. 바꿔 말해 몸만 한 공간에 있을 뿐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일 텐데 높은 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이 있죠. 물론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고요. ‘소통의 부재’는 서로에게서 등 돌리게 할 만큼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우리들이 참 다양하게 가면을 잘 쓰고 살잖아요. 대체로 튼튼하고 멋진 가면을 만들고자 골몰하지요. 저는 상대적으로 웃긴 가면만 많은지 사람들에게 얕보일 때가 많은데요. 이게 또 참 억울하기보다 소설가로서는 쏠쏠합니다.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면서 막 어린애 대하듯 천진하게 다가올 때가 있거든요. 꼼수라고요? 그렇게 잔머리 잘 돌아가지 않아요. 그냥 생겨먹길 제가 좀 그런 편입니다. 가령, <젖몸살>처럼 누군가와 부대끼며 살 때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외로움은 충분히 소설 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경험은 상당히 보편적인 것이리라 추측하고요. 저의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이든 그런 일들을 만나거나 알게 되면 착실히 메모해 둡니다. ‘외로움’이라는 주제는 앞으로도 계속 쓸 거니까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화려하면서도 쓸쓸하고 가득 찬 것 같으면서도 텅 비어있는 내 청춘에 건배!”

 

어떤 인물, 어떤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시나요?

 

스펙은 찌질한데 자신감 하나는 박태환 못지않은 자, 소심해서 매사에 주저하는 성격임에도 김연아처럼 대인배이고 싶은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고 감당 못할 행동을 하고선 오래도록 후회하는 자, 악마와 천사를 오락가락하는 자 등등 단선적인 성격보다는 문제적 성격이 아무래도 소설의 인물로는 적합하다는 생각입니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는, 하는 짓은 얄밉지만 속이 다 보일 정도로 순진한 구석도 있어서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게 됩니다.

 

소설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요?

 

뻔한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소설은 사람살이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억지웃음이나 최루성 감동을 짜내려고 무리수를 두면 작위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습작들 대개가 그렇게 망해 버린 불쌍한 자식들입니다.) 묵직한 주제의식을 보여 주면서도 ‘자연스럽게’ 웃기고 울릴 수 있어야겠지요.

소설을 쓰지 않을 때는 평소 어떤 일상을 보내시나요? 소설가가 아니라 한 가정을 꾸리는 사람으로서, 삼십대의 여성으로서, 생활인으로서의 속사정을 이야기해주세요. (그것이 소설 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덧붙여 주세요.)

 

실망하실지 모르겠지만 별 거 없습니다. 여러분들과 똑같아요. 밥해 먹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 분리수거하고, 인터넷 쇼핑몰 들락거리며 카트에 넣었다 뺐다, 통장 잔고 걱정하고요. 집에 고양이가 여러 마리라서 수시로 요놈들 주물럭거리는 재미가 있어요. 음악 좋아하니 꽤나 문화적인 집인 양 늘 클래식이니 뽕짝이니 종목 다양하게 시끄럽고요. 일기 쓰고 책 읽고 그렇게 삽니다. 책 나온 이후에는 페이스북을 시작해서 옛 친구들 그동안 뭐하고 살았나 엿보기도 하고요.

 

좀 내세울 만 한 건 여행을 무진장 좋아해서 느닷없는 가출을 할 때가 있다는 정도. 원주 사는 동화작가 친구가 터미널에 용한 사주쟁이 할배가 있다며 제 사주를 대신 봐준 적이 있는데요.(아, 그 녀석에게 복채 만원 빚이 있었네!) 제 사주에 거대한 역마살이 세 개나 들어있다는 겁니다. 사주, 점 이런 거 안 믿는 편이었는데 온몸으로 믿어지던 걸요. 아, 또 하나 자랑거리가 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방과 후 글짓기 선생을 하는데요. 올해 과천중학교 제자 두 명이 대산청소년 문학상을 탔어요. 가르치는 재미는 있는 거 같아요. 한국 문학의 미래를 과거 시점에서 목격하는 기분이랄까. 요놈들 만나는 시간이 긴장도 되고, 한편으로 제 글 쓰는 데 자극도 되고 여러 가지로 참 좋아요. 애기들이랑 떠들다가 갑작스레 소설 구상을 하기도 한다니까요.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이 있다면요?

 

돌아가신 이문구 선생님과 중국작가 위화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딱 한 작품만 고르라면 송기원 선생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꼽겠습니다. 이십대 때, 학교 도서관 어둑어둑한 구석, 시멘트바닥에 앉아 이 작품을 읽고 ‘나도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곧 장편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어떤 소설인지 궁금합니다.

 

원고지 600매 나간 성장소설이 있는데 어느 순간 딱 막히더니 풀리지 않습니다. 쥐어짜 내기 전에 다른 작품을 하나 쓸까 궁리 중입니다. 우리나라 초창기 다이버들의 이야기와 심부름센터 직원이 주인공인 이야기, 둘 중에서 하나를 골라 짧은 장편으로 쓰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 한마디해주세요.

 

저의 첫 번째 독자가 돼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소설가 신혜진

 

1973년 충주 출생. 서울예대 문창과와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서 공부. <로맨스 빠빠>로 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수상. 2009년 서울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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