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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08.05 [서점에서 만난 사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대신 - 《안녕, 내 모든 것》의 소설가 정이현
  2. 2012.05.11 [서점에서 만난 사람] 여름의 소설가, 그 소설가의 여름 - 소설가 김유진
  3. 2011.12.06 [반달토끼의 책방앗간] 오정희, <내 마음의 무늬>
  4. 2009.10.21 ‘엄마’의 이름은 가을 여자 (2)

[서점에서 만난 사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 대신 - 《안녕, 내 모든 것》의 소설가 정이현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사진 제공 | 창비

 

소설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지구에 있는 소설가만큼이나 무수합니다. 추측컨대, 그 답은 결코 ‘시간’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이 순간에도 사람은 흘러가는 ‘시간’ 속을 살고, 그런 삶에 대해 쓴다는 것은 결국 ‘시간’에도 응답해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안녕, 내 모든 것》은 정이현 작가님의 지난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세상에 내보낸 소설들에게 안녕이라고,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는 작가님에게는 이 소설도 그러할 텐데요. 어쩌면 그 말을 전하기 이전에 인사는 이미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시절을 떠나보내는 방식으로 쓰인 소설입니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대신하는 그 응답을 이제 우리도 접할 수 있게 되었네요. 자, 책의 첫 장을 펼쳐 볼까요?

 

 

반디 | 《안녕, 내 모든 것》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작년 봄부터 올해 여름까지 ‘내 모든 것’이라는 제목으로 계간 《창작과비평》을 통해 연재되었던 소설이죠. 연재시기에 맞춰 써 나가셨다면 차후에 마지막 원고를 탈고하셨을 때의 심경이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원고 전체를 다시 모아 책으로 만드는 과정도 그렇고요. ‘작가의 말’을 통해서도 밝혀 주셨지만 그 시간들을 조금 더 부연해 주신다면요?

 

정이현 | 《안녕, 내 모든 것》은 계간지 창작과비평에 2012년 여름호부터 2013년 봄호까지 4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작품입니다. 2012년 봄 알랭드보통과 함께 쓴 소설 《사랑의 기초》의 마지막 작업을 마치자마자 잠시도 쉬지 않고 곧바로 연재 준비에 돌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로부터 일년 여가 넘도록 이 작품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었고요. 그동안 계절이 어떻게 왔다 갔는지, 이 세상에 무슨 큰 사건이 터졌는지도 잘 모를 정도로 소설의 세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았습니다. 저의 하루는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과 ‘그렇지 못한 시간’으로 양분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상의 일들을 수행하는 동안에도 어서 책상 앞에 가 앉고 싶어 애가 타기도 했어요.

 

반디 | ‘프롤로그’를 지나 두 번째 챕터인 ‘노란 뚜껑의 작은 유리병 속에’는 “김일성이 죽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김일성이 죽었던 1994년 즈음을 살았던 아이들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데요. 90년대는 작가님의 다른 소설에서도 종종 이야기되는 시절이죠. 작가님의 개인적인 경험이 반영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90년대를 어떻게 기억하고 계시나요?

 

정이현 | 저는 1991년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90년대는 제 이십대라는 생물학적 연대기와 거의 일치하는 시간이지요. 개인적으로 ‘지금 나라는 인간의 팔할은 구십 년대가 만들었다’고 할 만큼 그 시간에 빚진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잊지 못하는, 구십 년대 적인 상징적인 장면은, 대학 입학식을 마친 다음날 첫 수업에 들어갔을 때 십여 분만에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모두 뿔뿔이 어디론가 흩어지던 풍경입니다. 캠퍼스 한가운데 섰는데 굉장히 외롭고 쓸쓸하고 허무했어요. 어, 청춘드라마에서 본 대학생활은 이렇지 않았는데, 어, 어, 혼잣말만 반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남들은 다 어디론가 갈 곳이 있나보다, 라는 추측이 혼자인 저를 더 비참하게 했지요. 어쩌면 그때 어디론가 바삐 사라지던 그들이 실은 하나하나 다 갈 곳이 없었다는 것, 나름대로 어딘가에 ‘짱박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상하게도 문학이라는 곳에 마음이 이끌리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해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기억된다. 공통의 합의가 쉽게 이루어지는 해도 있다. 1979년은 대통령이 총 맞아 죽은 해,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라는 명명에 보통 한국인이라면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어떤 해는 그렇지 않다. 이를테면 1994년. (101쪽)

 

반디 | 《안녕, 내 모든 것》 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등 여러 매체를 통틀어 90년대가 회자되는 시기입니다. 90년대만의 분위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어느 때나 현재로 소환되는 과거란 있다고 봐야 할까요? 작가님께서는 일련의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정이현 | 90년대가 이런 저런 문화 장르에서 소환되고 있을 뿐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이론적으로 정리하려는 성숙한 노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90년대와 관련해서만은 아니지만, 문화 텍스트 안에서 하나의 시대가 다만 소재주의적 입장에서 호명되고 소비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반디 | 90년대와 더불어 소설의 키워드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서울입니다. 소설 속 서울의 풍경은 조악합니다. 그럴싸하지만 부서지기 쉬운 과자집을 다닥다닥 세워 놓은 곳 같아요. 어른들은 그런 서울을 닮아가고 있고요. 하지만 세미, 준모, 지혜는 어른들과 달리 그곳에서 저마다의 단단함을 가지고 살았는데요. 이들 삶의 무대를 서울로 정한 이유가 있다면요?

 

정이현 | 저는 한국사회의 90년대가, 여러 가지 면에서 십대 후반의 시간과 닮아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미숙하지만 열정과 에너지로 부글부글 끓던 시기였다는 면에서도 그렇고, 그럼에도 불길한 어떤 징후들이 곳곳에 나타났다는 면에서도 그렇고요. 제 인물들을 그 세속의 한복판에 놓아두고 싶었습니다.

 

반디 | 세 아이는 결말에 이르러 비밀의 공모자가 됩니다. 이것을 공유하게 된 데에는 단순한 우정 이상의 공감대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컨대, 더 이상 (삶에) 모욕당하지 않겠다는 마음 같은 것이요. 물론 저의 오독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작가님께 여쭙고 싶습니다. 삶에 대한 세미, 준모, 지혜의 마음이 교차하는 대목을 읽어주신다면요?

 

정이현 | 그렇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는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들 무언가를 직접  한다는 것. 그 의지가 중요한 것이겠죠. 원하시는 것과 가까운 답일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장들이 떠오릅니다.  

 

“내가 끔찍이 두려워 한 것은 혼자 남겨지는 게 아니었다. 이 세상에 혼자인 사람이 오직  나 혼자 뿐인 거였다.” (228쪽)

 

   스무살이 되는 해는 1997년이다. 가깝지만 머나먼 숫자였다. 유리잔 밑바닥에 남은 우유 찌꺼기처럼 희뿌옇고 탁했다. 1998년에는 1991년이, 1991년에는 1994년이 그렇게 느껴졌었다. 시간은 늘 체력장 오래달리기 같았다. 눈을 감고 뛰다보면, 저 앞에 도무지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속도로 달리던 아이가 어느 순간 내 뒤로 처져 있는 거다. 늙어간다는 건 따라잡을 아이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 아무도 없어진다는 거겠지. 앞만 보고 뛰는 일도 뒤를 돌아보는 일도 두려울 것이다. 그러면 좀 쓸쓸할 것 같기도 하다. (63쪽)

 

반디 | 작중인물은 어른이라면 제 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거나, 아이라면 제 속에 어른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성장’을 바라보는 작가님의 가치관이 소설에 반영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안녕, 내 모든 것》을 성장담으로 볼 수 있고, 그 ‘성장’이 여러 가지를 뜻할 수 있다면, 작가님께서는 ‘성장’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고 싶으신지요?

 

정이현 | 네. 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소설은 인간(들)의 성장에 대한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성장이란, 마음의 키가 확 자란다거나 ‘성숙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요. 저에게 ‘성장’은 어떤 변화를 뜻합니다. (사실 저는 비관주의자에 가까운 편이라, 인간은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만) 그래도 출근길에 나무가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휙 지나던 사람이 소설의 말미에서 ‘아 저기 나무가 있었구나. 잎이 다 졌네’라고 혼자 생각하게 되는 만큼의 변화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면에는, ‘성장’이란 세상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비밀을 갑자기 이해하게 되는 한 순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반디 | 소설과 소설 사이. 모든 작가는 그러한 공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시기가 작가님께는 요즈음일 것 같은데요. 한 편의 소설을 마무리하고 다른 한 편의 소설을 시작하기 전의 공백을 어떻게 보내실지 궁금합니다. 《안녕, 내 모든 것》을 출간한 이후의 근황을 들려주신다면요?

 

정이현 | 공백이기는 한데, 사실 완전히 빈 상태는 아니에요. 《안녕, 내 모든 것》과 관련된 이런 저런 인터뷰나 행사들이 아직 남아 있어서요. 이미 내 손을 떠난 작품에 대해, 특히 그 내용에 대해 이런 저런 자리에서 자꾸 이야기하게 되는 것이 어쩐지 민망하기도 하고 간혹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또 자꾸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타인에게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 한 작품을 떠나보낸 뒤에 필연적으로 들이닥치는 어떤 슬픔과 허망함을 잊게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8월 중순에 휴가를 다녀온 뒤로는 정말로 칩거하며 일상인의 생활에 충실할 계획입니다. 읽고 싶은 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기도 하고요. (집에 정말로 산처럼 쌓아놨어요 ㅎ)

 

반디 | 소설을 쓰지 않을 때는 책을 읽기도 하실 텐데요. 90년대의 어느 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즐겨 보고 여전히 영향을 받는 책이 있는지요? 그것은 작가님의 스테디셀러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요. 독자 분들에게 몇 권 소개해주신다면요?

 

 

정이현 |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그리고 오정희, 이청준 선생님의 모든 소설들.

 

반디 | ‘작가의 말’을 통해 살기 위해 소설을 쓴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한때는 소설을 쓰기 위해 산다고 믿던 때도 있으셨다고요. 지난 십여 년 동안 작가님께 삶이 갖는 의미가 보다 묵직해졌다는 느낌입니다. 소설 쓰기를 통해 그것이 가능했을 텐데요. 계속해서 소설을 쓰는 작가님의 삶을 그려본다면 10년 후, 20년 후, 30년 후의 모습은 또 어떨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정이현 |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모습들입니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부터, 미래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편이었습니다. 제 관심은 언제나 현재 뿐입니다. 10년, 20년, 30년 후에도 그 각각의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한때는 소설을 쓰기 위해 산다고 믿었다. (…) 그런데 나는 어느 때보다 열심히 썼다. 쓰기 위해 산다는 선언이 얼마나 오만했는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수많은 작가들이 더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도, 내가 운이 썩 좋은 편이며, 어떤 소설도 삶보다 귀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 또한. 그렇다. 나는 살기 위해 쓰는 사람이었다. 아직 모르는 게 더 많다. (251쪽, ‘작가의 말’ 중에서)

 

반디 | 지금까지 한 이야기보다 앞으로 할 이야기가 더 많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님의 차기작을 궁금해 하는 독자 분들이 많을 텐데요. 일종의 ‘업무기밀’이겠지만 살짝 들을 수 있을까요? 근래의 관심사나 구상 중인 소설에 관한 이야기, 혹은 별도의 연재 계획 등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정이현 | 장편 계획은 아직은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출판계약도 없어요^^) 지금껏 네 편의 장편을 내놓았는데 하나하나 다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착상을 조금 더 묵히지 못하고 이런 저런 사정에 의해 서둘러 집필에 들어갔다는 아쉬움이 공통적으로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런 아쉬움이 들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움직여 볼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제 마음이 가는 방향대로 몸을 맡겨볼 작정이에요.

 

대신 당분간은 단편 작업에 충실할 계획입니다. 개인적으로 단편 쓰기도 좋아하고 남의 단편 읽기도 좋아하는데 그 좋아하는 일을 오랫동안 하지 못해서 힘들었거든요. 빠르면 내년, 아니면 후년 쯤 지금부터 새로 쓸 단편들을 모아 단편집을 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너의 아이가 살고 있는 아침의 집에 너는 꿈에도 들어가지 못하리라.’
   서른을 며칠 앞둔 어느날,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나는 나직하게 중얼거려보았다. 안녕, 아침의 집. 안녕, 내 모든 것. (228쪽)

 

반디 | 나이가 들면서 그 숫자만큼 더해지는 것도 있지만 시시각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를 아는 독자 분들이 《안녕, 내 모든 것》에 감응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언젠가 작별한 것들을 떠올리면서요. 작가님의 그것은 소설에 담겨 있을 텐데요. 마지막 질문을 통해 직접 듣고 싶기도 합니다. 지금, 작가님께서 ‘안녕’이라는 전언을 보낸다면 그 대상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이현 | 그럴 수 있다면, 세상에 내보낸 제 소설들에게, 안녕,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이’와 ‘바이’의 의미가 함께 담겨 있는 안녕일 거예요. 미안하고 또 고맙다는 말도 괄호 안에 담아서요.

 

 

정이현

 

서울에서 태어나 2002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 <낭만적 사랑과 사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는 《낭만적 사랑과 사회》와 《오늘의 거짓말》, 장편소설로는 《달콤한 나의 도시》, 《너는 모른다》, 《사랑의 기초: 연인들》이 있다. 이효석문학상, 현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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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여름의 소설가, 그 소설가의 여름 - 소설가 김유진

 

 

편집·정리·사진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여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발바닥이며 겨드랑이에 땀이 차는 것, 빨래처럼 자질구레한 집안일이 느는 것, 하루 전에 끓여 놓은 보리차가 쉽게 상하는 것, 뼛속까지 축축하게 젖어드는 장마 기간, 만원버스를 가득 채운 정체불명의 냄새, 아름답지 않은 맨살을 무방비하게 드러내야 하는 일상에 넌더리가 나거든요. 싫은 꼴을 조금이라도 덜 보기 위해 저는 부지런해집니다. 옷을 꼬박꼬박 갈아입고, 수시로 빨래를 널고, 물을 자주 마시고, 우산을 잘 펴서 말리고, 평소보다 출근을 서두르고, 퇴근하면 깨끗하게 씻기부터 합니다.

 

그저 개인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름은 누구에게나 바쁜 계절이니까요. 사람들은 겨우내 굳어 있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곧잘 생깁니다만, 바꿔 말하면, 움직이기 좋은 계절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작년 여름을 돌이켜 보세요. 많은 사람들이 다음 계절을 향해 온몸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다다를 수 있었고요. 이를테면 소설가 김유진처럼 말입니다.

 

주로 여름에 소설을 써 왔다는 그녀는 올 여름을 앞두고 《여름》을 선보였습니다. ‘김유진’ 이름 석 자가 박힌 세 번째 발표작이자, 두 번째 소설집이자, 서른 이후 첫 번째 결과물이죠. 이 정도로 의미 있는 책의 제목이 ‘여름’이라니 궁금합니다. 김유진, 그 소설가의 여름이요.

 

작품집을 묶을 때면, 한 시절의 마디를 지나는 기분이 든다.

지난 3년간의 기록이다.

그동안 이십대에서 완연한 삼십대로 접어들었다.

조바심이 난다.

 

-《여름》 255쪽, <작가의 말> 중에서

 

《여름》에 수록된 작품을 쓰는 동안 서른이 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집의 출간 소감은 전작들과 좀 다를 것 같습니다.

 

《여름》은 작품집으로는 두 번째고, 나이로는 삼십대가 된 후에 낸 책인데요. 솔직히 첫 번째 단편집 낼 때는 경황이 없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잘 안 오고 내는 것 자체에 급급했죠. 그런데 두 번째 책을 낼 때는 그 사이 나이를 좀 더 먹으면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나에게 어울리는 것을 생각하며 내가 생각하는 내 책에 대해서도 구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고요.

 

그런 의미에서 삼십대가 되고나서 달라진 게 스스로 긴 머리가 안 어울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머리 기르는 걸 완전히 포기한 거예요. 이전까지 가장 큰 고민 중에 하나가 머리를 기르고는 싶은데 안 어울린다는 것이었거든요. (웃음)

 

한 권의 책으로 완성돼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단편집의 특성상, 《여름》은 인간적으로나 작품적으로나 어떤 분기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더 의미가 있고 애착이 가는 책이기도 하고요.

 

그러면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도 작가님의 의견을 보태신 건가요?

 

표지도 그렇고, 책의 순서를 결정하는 데도 제 의견이 반영됐어요. 첫 책의 경우는 순서대로 엮었는데, 이 또한 시간 안에서 생겨난 생생한 변화의 과정을 담는다는 나름의 의미가 있었어요. 그런데 두 번째는 단편들이 모인 또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는 차원에서 처음과 끝을 정해 열고 닫는 느낌을 주고 그 사이에 놓일 작품들을 조율해갔죠.

 

한때, 전대미문, 전인미답이라는 단어에 홀린 적이 있었다.

소설을 시작하기 전 그 두 개의 압도적인 풍경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가능한 한 평범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단번에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옅은 것, 미묘한 것, 그러나 이곳에 있는 것에 대해.

사는 것이란 쉽게 경계를 나눌 수도 없고, 때때로 지루하며, 대부분 소박한 채로 흘러간다는,

더 이상은 외면할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사실을, 그것을 노래할 수 있다면.

 

-《문학과사회 2012년 봄호》, 387쪽, <멀어지는 것,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기존의 서사를 따르기보다는 특유의 화법을 만들어 가고 계십니다. 《여름》에 이르러서는 삶과 일상에 한 발짝 밀착하는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전작이 주는 낯선 느낌과는 다른 인상을 받았는데요. 이처럼 문학관이 변화하게 된 계기나 배경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자연스러운 과정인 것 같아요. 이십대 때는 마치 어린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거의 없는 단계여서, 당시에는 나의 격렬한 감정과 그 감정을 형상화하는 왜곡된 이미지들에 집중했었어요. 그런데 살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영향을 받으면서 관심사가 차츰 옮겨갔고, 이전까지와 달리 좀 더 미묘한 것, 소소하지만 중요하게 느껴지는 것들에 시선을 두게 된 거죠.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변하지 않았어요. 단지 말하는 방식에 차이가 생겼을 뿐이죠. 그리고 비교적 등단을 일찍 한 제 입장에선 이렇게 나의 질풍노도의 시기와 이후의 변화해가는 과정 모두를 작품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게 의미 있어요. 동시에 부끄럽기도 하고요. 

 

물론 이런 얘기는 사후적으로 분석한 것에 지니지 않아요. 글을 쓸 때는 사실 변화를 잘 못 느끼는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첫 번째 소설집에서 썼던 것처럼 다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나는 그런 K에게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곁에서 그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여름》 31쪽, <바다 아래서, Tenuto> 중에서

 

《여름》에 실려 있는 작품들 중에 특별히 애착이 가는 게 있으신가요?

 

<바다 아래서, Tenuto>가 그래요. 이 작품이 전작과의 분기점이 되었다는 느낌도 들고, 무엇보다 쓸 때 기분이 좋았거든요. 이미 머릿속에 있는 걸 문자화하는 건 굉장히 지난하고 힘든 과정이라 사실 글을 쓰면서 짜증을 많이 내는 편인데, 이 소설은 오히려 쓰면서도 끝내는 게 아쉽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쓰는 게 그렇게 힘들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소설이었어요. 무겁지 않는 소설이기도 하고요.

 

그 소설에 대해 조금 더 얘기를 듣고 싶은데요. 이를테면 등장인물이 피아노를 치는 설정에 특별히 영감을 주었던 경험이 있으신가요? 

 

많은 분들이 동네 피아노 교습소에 다녀본 경험이 있으실 텐데요. 저도 어렸을 때 오래 피아노를 치다 그만 두었고, 다 커서도 손이 너무 굳는 것 같아 소설 쓰기 몇 년 전에 교습소를 잠깐 다닌 적이 있어요. 제가 피아노를 치고 싶을 때마다 가서 쳤는데, 아이들이 엄청 많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 곳이었죠. 그래서 한 달 정도 다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만뒀는데 그 경험들이 예전에 제가 처음 피아노를 쳤을 때라든가 피아노를 그만둔 후의 상실감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하고, 재고해볼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그게 <바다 아래서, Tenuto>의 바탕이 된 것 같고요. 

 

그런데 사실 이 제목은 원래 소설쓰기 전부터 있었어요. 소설을 자꾸 생각하다 보면 소설에 관한 꿈을 꾸게 되는데, 어느 날 제가 꿈속에서 얕은 바닷물 아래에 잠겨 있던 ‘바다 아래서, Tenuto’라는 글자가 적힌 종이를 주워들었거든요. 그 꿈을 꾸었을 땐 너무 오랫동안 피아노를 치지 않은 상태라 Tenuto가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저 적어두었다 다음에 써먹어야지 라고만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이 말이 음악 용어였다는 게 다시 생각났어요. 결국 소설의 제목으로 붙이게 됐고요.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소설을 쓰실 때는 가사가 없고, 길지 않고, 단조로운 곡 듣기를 선호한다고 들었습니다. 그 중 몇 곡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이 소설집은 단편 하나하나마다 그 소설을 쓸 때 들었던 음악들이 정해져 있었어요. 그래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음의 전개가 단조롭다는 점은 비슷했고요. 예를 들어, 제가 많이 들었던 레이 첼스나 아르보 파르트 같은 경우 음의 미묘한 차이를 가지고 감성을 내는 음악이거든요. 음의 고조가 너무 심하거나 목소리가 들어가면 아무래도 소설 쓰는 데 방해가 되니까요. 그러니까 작가로서 글을 쓸 때 제가 듣는 음악은 그 자체가 아니라 소설을 위해 이용하는 부수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볼 수 있어요. 종종 음악적 구조에서 영감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 음악에 헌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아니라는 거죠.

 

그런데 또 소설을 안 쓸 때는 음악을 거의 듣지 않아요. 특히 소설 쓸 때 들었던 음악은 절대 듣지 않고요. 한 달 내내 같은 음악을 들으며 소설을 쓰다 보니, 그 음악만 들어도 소설 썼을 때의 괴로움 같은 게 생각나거든요. 그래서 이전에 들었던 음악은 소설과 함께 묻어두고 다시 새로운 음악을 찾죠. (웃음)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면 연유처럼 희고 끈적끈적한 물이 흘렀다.

그것이 나무의 피였다.

 

-《여름》 205쪽, <나뭇잎 아래, 물고기의 뼈> 중에서

 

음악만큼이나 작가님에게 영감을 주는 게 나무라고 생각하는데요. 《여름》 안에도 후박나무, 체리나무, 무화과나무 등 다양한 나무들이 등장하는데요. 작가님에게 나무는 어떤 의미인가요?

 

다른 인터뷰에서도 했던 말인데요. 제가 학교 다닐 때는 시를 썼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어떤 자연이나 아름다운 대상체를 묘사하는 게 익숙한 상태였어요.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게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성향도 있었고요.

 

어느 날 앉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있었는데, 나무가 나로 하여금 굉장히 기묘한 감정을 갖게 했어요. 약간 초월적인 느낌도 들면서 저것만큼 아름다운 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자꾸 그런 쪽으로만 노래하다 보니까 인간과의 격차가 더 커지게 되고, 도리어 인간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지고 불신하고 경계하게 되는 것들이 심해졌어요. 하지만 저 또한 인간이라는 종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 글을 쓰면서 보냈던 시간이 저에게는 먼 길을 돌아 다시 인간에게로 다가가는 과정이었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도 여전히 나무를 끌어다 쓰게 되긴 해요. 저에게 나무는 영감을 주었던 대상체고, 나무를 보면서 아름답고 뭔가 성스럽다고 느꼈었기 때문에 자꾸 옆에 두고 싶은 거죠. 그래서 소설에서도 자주 쓰게 되는 것 같고요. 나무의 감정이라든가, 사시사철 바뀌는 것, 열매를 맺는 것들이 저에게는 큰 감흥을 주거든요. 

 

그런가 하면 《늑대의 문장》의 <마녀>에도 나무가 등장하는데, 그 나무는 독자로 하여금 일종의 두려움을 갖게 하는 느낌이 강해요. 혹시 이 나무와 작가님이 말씀하신 인간과 다소 거리를 두었던 태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을까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대체로 그걸 아름답다고 느끼는 좋은 감정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져다준다고 생각해요. 죽음과 맞닿은 부분이 함께 가는 게 아닐까 하는 거죠.

 

<마녀>에 나오는 나무에게는 제가 알량한 인간들과 대비되는 압도적인 존재로서의 느낌을 갖고 있었던 것 같고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이십대 때는 뭔가 되는 일이 별로 없는 것 같고, 뜻대로 안 되는 것도 너무 많다고 느꼈는데, 전체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을 크게 느끼는 질풍노도의 시기였어요. 그게 소설에 반영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B는 마뜩잖아 하는 Y에게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집은 아름다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 《여름》 69쪽, <여름> 중에서

 

《여름》에서 나무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이 있습니다. 특정한 공간인데요. <바다 아래서, Tenuto>의 피아노학원이나 K의 방, <여름>의 톱밥 날리는 집, <나뭇잎 아래, 물고기의 뼈>에서 선희 언니를 마지막으로 본 육교 등은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요. 이와 같은 소설 속 공간을 구상하는 관점을 듣고 싶습니다.

 

일단 이 소설집은 작품 하나하나가 모여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느낌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간이 중요해졌어요. 그래서 제가 눈으로 보듯 그려낼 수 있는, 제어 가능한 공간을 찾게 됐고요. 이를테면 좁거나 익숙한 곳들이요. 소설 속에 나왔던 대부분의 공간이 그렇고요. 저한테 익숙한 공간이기 때문에 그 안의 감정들이 조금씩 배어나왔던 게 아닐까. 또 그게 손쉬웠던 게 아닐까 생각해요.

 

제가 전체적인 풍광을 보여주는 걸 좋아해요. 그걸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그래서 글을 쓸 때 그림을 그리듯이 전체적으로 구상해놓고 조금씩 디테일들을 갖다 쓰죠. 이런 습관은 첫 번째 작품집 쓸 때도 있었고, 오래 가는 것 같아요.

 

집 앞에 다다랐을 때, L은 물었다.

취직하니까 어때?

그 목소리가 지나치게 상냥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발끝을 이용해 바닥에 널브러진 우산대를 들어 올린 후 손으로 집었다.

차 안에서 내내 짓밟힌 우산은 축축하고 더러웠다.

응, 점점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아.

 

-《여름》 200쪽, <물보라> 중에서

 

이 소설집에서 <물보라>라는 작품이 거의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사회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회적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부닥쳐야 하는 문제적 상황이 참 많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요즘 주목하고 있는 이슈가 있다면요?

 

특별하게 어떤 한 사건을 중심으로 하진 않고요. 요즘 주로 생각하는 건 불안이에요. 사람들은 왜 불안해하는가, 라고 질문하죠. 이건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안정을 추구하는가, 이기도 하고요.

 

제 주위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어요. 몇 년 씩 투자해 시험 준비를 하는데, 그렇게 공무원이 돼서 그들이 얻는 게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들 대부분이 정말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한다기보다는 짤리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는 안정적인 구조를 원하는 것일 테니까요. 다들 안정성에 너무 목을 매는 게 아닌가 싶은 거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같은 걸 꿈꾸고 있는 게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물론 이런 현상의 원인은 사회가 개인을 책임져줄 수 있는 지지 기반이나 구조 자체가 불안하다는 데 있겠죠. 그래서 개인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지나치게 크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회가 불필요하게 부과하는 불안감이죠. 그렇게 사회보장이 미약하고 경쟁의식이 심화되면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도대체 왜 안정을 추구하려 하는가, 그게 가능하긴 한가를 질문해보는 거죠.

 

사실 불안은 제 전공 분야이기 때문에 (웃음) 몇 년간 끊임없이 생각해왔어요. 그래서 조금 더 심도 있게 파고들 수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 쓰고 있는 단편도 그런 내용을 약간 담고 있고요.

 

‘불안’과 ‘분노’라는 키워드로 《숨은 밤》을 비롯한 작가님의 소설을 읽은 독자 분이 있었습니다. 더불어 ‘미완의 인생’이라는 화두도 생각해 보셨다고 하고요. 《숨은 밤》을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작가님이 생각하는 ‘불안’과 ‘분노’는 어떤 상태인가요?

 

연구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웃음) 진행 중에 있는 생각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데요. 《숨은 밤》은 어떤 미완의 감정, 즉 이제 막 촉발되는 감정에서 출발한 소설이었어요. 그러니까 미완의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불안이 생기게 되고요. 또 미완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분노가 촉발되었다고 생각했고요. 청소년이나 사회적인 변방에 있는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이나 분노는 그런 식으로 촉발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나는 왜 불안에 떨면서 마감을 하지 못하는가(웃음), 미리미리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까지 궁지로 몰아넣는가, 생각하죠.

 

그런데 사실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존재들, 이를테면 예술가라든가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런 불안을 그냥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어요. 자기 자신이 완벽하게 세계와 합일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이 세계의 어떤 결핍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결핍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불안은 창조를 촉발하는 데 필요한 감정으로, 창조력을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죠. 그런데 짜증나죠. 불안하면. (웃음)

 

 

 

나는 사랑의 전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채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사라지는, 혹은 사라지는 미완의 감정에 대해 적었다.

 

-《숨은 밤》 207쪽, <작가의 말> 중에서

 

《숨은 밤》은 ‘불안’ 이외에 ‘사랑’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소설에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어도 표출하지 않거나 할 줄 모르는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바다 아래서, Tenuto>에는 ‘감정을 배운다’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하고요. 이 부분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떤 대상체에 애정을 갖는 것,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겨 관계를 맺는 것, 쉽게 말해 연애하는 것은 그 자체가 매번 다시 태어나는 과정인 것 같아요. 그러면서 감정 또한 다시 겪게 되고요. 아이가 태어나 이런저런 감정들을 배워 나가듯이요.

 

개인적으로 사람과의 교류가 단절된 상태에서 오랜 시간을 자라다 보니까 어떤 감정에 있어서 무지한 경우가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나한테만은 글을 배우는 듯이 배워야 하는 것들, 사회적 감정이라고 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죠. 그래서 사회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부딛히면서 그들도 황당해 하고 나도 황당한 경우가 많았고요. 그런데 이게 또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식으로 배우게 되는 감정들이 있고, 《숨은 밤》의 경우에도 감정이 촉발되고 서서히 실체를 알아가는 과정이 재밌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가장 격렬한 게 애정이고요. 이미 감정이 생기고 난 다음에 관계에서 벌어지는 불화나 사건사고들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 이전에 관심이 많았던 거죠. 막 생기려고 하는 감정, 스스로 알아챌까 말까 하는 순간들에요.

 

제가 항상 뭔가를 시작할 때 차근차근 하는 걸 되게 좋아하는데, 언젠가는 연애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고, 써보기도 할  테지만 그 전에 어떤 전조에 대해서 소소한 이야기를 해보자 싶었던 거죠.

 

언젠가는 연애소설을 쓰고 싶으시다는 말씀인 거죠?

 

작가들의 소망은 궁극적으로 연애소설에 가 있다고 생각해요. 대상체를 사랑한다는 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A의 배낭끈을 잡고 걸으며, 나는 열 살의 A를 떠올렸다.

문득 그때의 A는 지금의 A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이내 지워버렸다.

 

-《여름》 156쪽, 중에서

 

작품에 아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요. 유년 시절을 궁금해 하는 독자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 또한 자전소설로 알고 있는 <나뭇잎 아래, 물고기의 뼈>를 읽고 비슷한 궁금증을 가지게 되었는데요. 작가님은 유년 시절에 어떤 아이였나요? 서른 살의 ‘나’를 만든 그 시절의 ‘나’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나뭇잎 아래, 물고기의 뼈>에 나오는 아이와 거의 유사한데요. 언젠가 제가 학적부를 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초등학교 3학년 담임선생님이 가정통신란에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나 협동심이 없다’라고 적어 놓으셨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이게 저의 지금 모습과 너무 닮아있는 거죠.

 

혼자 자랐고,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어요. 게다가 전학도 자주 다니는 편이었는데, 환경이 지속적으로 바뀌니까 사람은 도리어 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더라고요. 나를 중심으로 세계의 변화가 지나치게 빠르면 사람은 오히려 가만히 있게 되고 무던해지는 면이 생기면서 내적으로 더 파고들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외부의 폭력성과 마주쳐야 하기 때문에 피하는 것도 많고요. 그래서 약간 사회성이 떨어지게 되죠. 

 

지금도 유년을 생각하면 항상 기억나는 게, 전학 가서 맨 처음 반 아이들한테 인사했을 때 그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에요.

 

그냥 가만히 있었지요. 학교 다닐 때 (웃음) 어린 시절에 크게 뭔가를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밖에 나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서 대게는 그냥 집에 있었고요.  

 

그런 유년 시절이 있어 자연스럽게 글을 쓰고 문학을 하시게 된 건가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면 딴 생각을 하게 되잖아요. 시간이 많으니까 혼자서 뭔가를 하게 되고요. 그렇게 나도 모르게 혼자 있는 시간에 혼자 할 수 있는 일들을 꾸준히 해왔던 것 같아요.

 

사실 학창시절에는 글쓰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일기는 늘 써왔지만, 일기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평가받는 게 아니니까, 제가 글을 쓰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죠. 인생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구나, 이런 생각 정말 많이 했어요.

 

8년 전 당선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여름,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이 놀라운 소식을 믿을 수가 없어서, 정말로 믿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장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에서 벗어난 후에야 그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그러자 막연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두 손으로 쥐어도 휘두르기 어려운 큰 칼을 받아든 병사가 된 기분이었다.

 

-《문학과사회 2012년 봄호》, 387쪽, <멀어지는 것, 남아 있는 것> 중에서

 

본격적으로 ‘내가 글을 쓰고 있구나.’라고 인지하게 되신 건 언제였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도 궁금하고요.

 

제가 문창과를 다녔는데, 사실은 뭐 하는 곳인지 잘 모르고 들어갔어요. 그냥 은연중에 글을 쓰는 것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비슷한 과들을 다 지원했는데, 그냥 문창과가 특별하게 느껴져서 선택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까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문청이었던 학생들이 많아서 어리둥절했죠. 

 

그때 제가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이 시를 썼었고, 시가 뭔지도 모르고 같이 어울리면서 자연스럽게 시를 쓰게 된 것 같아요. 시에서는 특별히 재능이 부각되지 않았고요. 그런데 이렇게 소설가가 되어 있으니, 재미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영향을 받았거나 롤모델로 삼고 있는 작가가 있으신가요?

 

영향을 받은 작가는 너무 많은데요. 극과 극의 작가들을 다 좋아하는 것 같아요. 대학 다닐 때는 오정희 선생님이나 김승옥 선생님 같은 분들의 작품을 많이 봤고, 중간에는 파스칼 키냐르처럼 시적인 소설을 쓰는 작가도 좋아했다가, 갑자기 오르한 파묵이 좋아지기도 하고,또 한 때는 박상륭 선생님이 좋아서 진짜 훌륭하신 분이라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말하고 다니기도 했고요. 그때그때 바뀌었죠. 

 

그러니까 따로 롤모델이라고 할 만한 작가는 없지만, 너무나 다양한 스승들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직장에 들어가 일을 배우려면 누군가 물어야 할 존재가 있고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글을 쓰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책 속에 있는 스승들에게 물어보면 되니까요. 그런 면에서 풍요롭다고 생각하고요.

 

 

요즘 특히 스승으로 삼고 계신 작가가 있으신가요?

 

누가 스승일까요. 요즘은 그게 별로 없네요. 막 글을 쓰기 시작했던 이십대 때는 어떻게 쓸가, 생각이 많았기 때문에 스승도 많았는데요. 지금은 좀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예전처럼 ‘이게 정말 최고인 거 같아, 진짜 잘 써’ 이런 건 줄어들고, 더 많은 것들을 보게 되고요. 

 

사실 요즘 제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가란 오래 쓰는 소설가에요. 그래서 거의 죽기 전에 펜을 놓는 그런 분들을 스승으로 삼고 있죠.  

 

작가님께서도 오래 쓰고 싶다는 말씀이기도 한 것 같은데요. 어느덧 8년차 소설가입니다. 이십대의 반을 소설가로 살았고, 어쩌면 인생의 반 이상을 소설가로 살지도 모릅니다. 이 순간, 작가님을 사로잡는 태도나 대상이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가가 되기 전에 A가 중요했는데 지금은 B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말씀해주신다면요?

 

학교 다닐 때는 반짝이는 것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어떤 영감을 주는 천재성이라든지, 한 번에 발현되는 것들이요. 그리고 특히 나, 나 자신, 내가 하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관심이 집중되었죠. 그래서 ‘내가 지금 당장 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라는 태도도 있었고요. 그런데 지금은 좀 변한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 다른 사람도 아름답게 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생기고요. 좀 알량하긴 하지만 삼십대가 넘고 보니 앞으로 긴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사람들과 화합하며 살아야겠다 싶은 거죠. (웃음)

 

사실 작가로서 글을 쓴다는 것은 단순히 글을 쓰는 행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읽는 사람들을 같이 끌고 가야 하는 면이 있는데, 이렇게 생각한 지가 얼마 안 됐어요. 최근에서야 내가 쓰는 것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 사람들이 어떤 걸 느끼며 나와 같이 갔으면 좋겠는지 생각하게 됐고, 그걸 오래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요. 저도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누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오래오래 글을 써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방향성일 수도 있고요.  

 

예전처럼 내가 내 감정에만 치우쳐서 쓰다 보면 감정이 지나치게 앞서니까 그게 어떤 폭력성으로 드러나는데, 쓰는 사람이야 자신이 만들어낸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지 않지만, 읽은 사람들은 그걸 훨씬 더 세게 받아들인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좀 더 사려가 깊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고요. 

 

제가 작품에서 어린 친구들이 나오는 유년의 기억을 많이 썼던 건 저 스스로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내 내면에 대해서, 내가 왜 이렇게 컸는가, 어떻게 지금의 내가 되었는가에 대한 내부적인 질문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그걸 해소할 만한 과정이 필요했던 거죠. 그리고 그게 어느 정도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이 되니까 이제는 자연스럽게 눈이 바깥으로 열리는 것 같고요. 좀 더 많은 것들을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처음에 《늑대의 문장》이라는 단편집을 내셨고 그 다음이 장편인 《숨은 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소설집 《여름》인데요. 혹시 또 장편 계획이 있으신가요? 

 

다음에는 장편을 써야 될 것 같아요. 부지런히 책을 쓰고 싶다는 마음도 있고요.

 

지금 구상하고 있는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요즘에는 제가 첫 번째 단편집을 쓸 때 마구 벌려놨던 이미지들을 좀 수습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생각을 계기로 다음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고요. 사실 이 이외도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어요. 아직 확실한 것은 없고 쓰고 싶은 마음만 있어요. 맨날 얘기만 하죠. 장편 쓸 거라고. (웃음)

 

 

소설 쓰지 않을 때는 주로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는 규칙적으로 살고 있어요. 술자리가 아니라면 보통 소설가들이 저처럼 조용하게 살 거라고 생각해요.

 

요새는 강의를 하고 있어서 그걸 준비하는데 시간이 꽤 드는데, 그게 아니라면 운동하고 산책하고 집에 와서 책 읽고, 아주 단조로워요. 밥 해먹고 집 치우고 그러면 하루가 금방 갑니다. (웃음) 이렇게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이유는 몸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오래 글쓰기가 힘들기 때문이에요. 글을 쓸 때면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데 건강하지 않으면 짜증이 나거든요. (웃음) 몸이 따라주지 않으니까, ‘아, 신경질 난다. 왜 아픈 것인가’ 자꾸 이런 생각이 들죠 (웃음) 어렸을 때는 맨날 술 마시고 아파야 뭐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결핵 같은 낭만성이 약간 있었는데(웃음), 지금은 건강한 신체에서 ‘글발’이 나온다, 라는 생각으로 몸을 열심히 만들고 있어요.

 

혹시 영화도 좋아하세요? 앞서 그림을 그리듯이 소설을 구상하신다고 하셨는데, 회화나 영화의 이미지에도 관심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많이 보진 않아요. 최근에 끝까지 봤던 영화가 브레드 피트가 주연인 ‘생명의 나무’ 였는데, 성경을 차용한 이미지가 굉장히 독특하고 시각적으로 충격적이었어요. 영화 자체는 지루한데, 그 이미지 하나만으로도 끝까지 보게 됐었고요. 

 

그거 말고는 주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영화를 보는 편이에요. 액션 영화나 무협영화요. 예술 영화는 너무 머리를 쓰게 되고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니까 가끔 보고요.

 

물론 나는 내가 태어난 해의 여름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집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해 여름의 풍경에 대해서는 조금 말할 수 있겠군요.

 

-《여름》, 84쪽, <여름> 중에서

 

날씨가 벌써부터 후덥지근합니다. 《여름》은 여름을 앞두고 출간된 책이기도 한데요. 작가님에게 ‘여름의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여름의 책이라고 하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책 제목이 있는데요. 《아서의 섬》이라고, 작가 이름은 생각이 안 나는데, 어떤 소년의 유년기를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담은 책이에요. ‘여름’이 주는 어떤 청량한 느낌을 담고 있는 소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작가님에게 다가올 계절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합니다.

 

일단은 마감을 얼른 하고 (웃음) 여름을 좀 더 창조적으로 맞이하고 싶어요. 지금 이 마감이 끝나야 나의 봄이 끝날 것 같거든요. 이미 여름이 와 있는 느낌도 들지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여름에 더 많은 걸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장편 《숨은 밤》도 여름에 시작했고요. 그래서 이번 여름에도 새롭게 뭔가 쓰고 싶어요. 제가 하는 일이 이런 것이다 보니 새롭게 뭔가를 시작한다고 하면 신작 쓰는 거 이외에는 크게 떠오르는 게 없어요. 

 

끝으로 긴 여름을 살아갈 이들에게 한 말씀해주신다면요?

 

좀 상큼하게 사셨으면 좋겠어요. 여름이 덥고 그래서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장점이 많은 계절인 것 같아요. 혹독한 겨울보다는 낫다는 생각도 들고요. 나름대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많으니까, 즐기면서 지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책도 많이 보시고. 사실 글을 쓰는 입장에서 ‘문학을 사랑해주세요’ 같은 이런 얘기는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잘 안 하게 되는데, 많은 것들을 보고 소소한 재미를 누리면서 조금 덜 빡빡하게 살았으면 해요. 이 계절의 장점이 있잖아요?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좋은 그늘도 있고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 소설가는 종종 나무들을 보았습니다. 노천카페의 뜰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갓 새잎에 난 듯 했습니다. 작은 이파리가 모여 소설가의 얼굴에 연둣빛 그늘을 만들었습니다. 이 여름이 싫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 건, 아마 그 순간이었을 겁니다.

 

 

 

 

 

김유진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명지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단편소설 「늑대의 문장」으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늑대의 문장』『여름』, 장편소설 『숨은 밤』, 번역서 『마마의 성을 습격하라』가 있다. 2011년 단편소설 「여름」으로 제2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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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달토끼의 책방앗간] 오정희, <내 마음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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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이름은 가을 여자

 

오정희, <가을 여자>, 랜덤하우스, 2009


<재즈피플> 안민용 기자의 책과 음악 이야기 No. 10 - ‘엄마’의 이름은 가을 여자

「Woman」

하루 세 번은 사랑해 말해줘
선물과 꽃은 항상 잊지 말고
와인잔 만큼 깨지기 쉬운 게
그게 바로 여자야 my name is woman
W-O-M-A-N

* Album from 웅산 『Miss Mister』「Woman」 중

소품집 같은 소설

인생을 물리적인 나이로만(언제나 청춘인 분들도 많기 때문에!) 사계절로 나눠본다면 유년기는 봄, 청년기는 여름, 중․장년기는 가을, 노년기는 겨울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우리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은 가을인 셈이다. 때로는 우수에 젖고 때로는 영생에 벅찬 가을. 소설가 오정희는 그런 가을을 살아가고 있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두껍지 않은 분량에 25편을 넉넉히 담아낸 <가을 여자>는 소설과 에세이, 콩트 어느 중간쯤에 분류할 수 있을 법한 ‘소품집 같은 소설’이었다. 아니, 출근길에 종종 듣게 되는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 시대’에서 막 길어 올린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듯했다. 

엄마도 어머니도, 가을 여자

이야기의 중심에는 자식 교육에 골몰하는 어머니, 내 마음도 몰라주는 남편이 밉살스러운 아내, 누리고 비린 것만 찾는 시어머니가 얄미운 며느리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이름과 모습을 잊어가는 우리 ‘엄마’들이었다. 

나는 ‘엄마’의 모습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10살이 조금 넘었을 무렵부터 ‘엄마’는 어머니가 되었다. ‘엄마’에게도 눈부시게 젊었던 시절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에게는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젊은 ‘엄마’보다 주름살이 하나하나 늘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다(어머니에게도 젊었던 시절이 있다는 걸 이해한다면 살이 찌고 주름이 늘어 ‘늙어간다고’ 푸념하는 어머니에게 절대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된다!). 

<가을 여자>의 띠지에는 “비탄, 원망, 환멸의 지겹고 숨 막히는 반복, 겨우 고개를 드니 생의 주름만 남은 당신에게”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런 당신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오정희는 작가의 말에서 그 답으로 이렇게 적는다. “어느 책을 읽다가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랑이다’라는 구절을 대하고 어려운 문제를 푼 듯 속이 후련하고 기뻤다. 그 어떤 불행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인생은 바래지 않는 순정한 꿈’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환멸과 슬픔과 쓸쓸함 또한 우리의 생을 살게 하고 봐 높이 들어 올리는 힘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며 또 한 번의 아름다운 가을을 맞는다.”(p. 5)

오정희의 힘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눈이다. 자칫, 해마다 돌아오는 어머니의 푸념처럼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들은 발랄함으로 풀어낸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땠을까, 우리 엄마는 어땠을까, 하고 돌아보게 만드는 것은 분명 오정희가 지닌 공감의 힘이다. 당신은 어느덧 가을의 인생을 살고 있지만 이 가을만큼이나 아름다운 ‘가을 여자’라고, 그러니 우울해하지 말라고. 

가끔씩 공책에 식대를 적는 어머니는 보지만 어머니 손에 책이 들려있는 걸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어머니의 소일거리는 TV 보기, 그것도 주말 드라마 보기다. <가을 여자>를 어머니에게 권해주고 싶지만 어느 순간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는지) 깨닫는다. 어머니 이젠 TV만 보지 말고 책도 좀 보세요, 라고 어머니에게 책을 선물하는 건 내 자의적인 만족일 뿐이라는 걸. 대신 <가을 여자> 속 몇몇 에피소드를 어머니와 함께 나눌 예정이다. 어머니 친구들 모임 이름은 무엇인지, 만나면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지, 혹시 아버지가 밉살스러울 때는 없는지 할머니가 누리고 비린 것을 좋아하지는 않으셨는지. 그나저나 우리 어머니가 가을을 좋아하셨던가? 아무래도 그건, 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였던 것 같다. <재즈피플> 안민용 기자 [<재즈피플> 보러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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