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에 해당되는 글 9건

  1. 2015.02.16 『카프카 평전』 - 밤이 오면 글을 쓸 것이다
  2. 2015.02.04 『달콤한 로그아웃』 - 이제 좀 꺼져줄래
  3. 2015.02.03 『남자의 자리』 -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4. 2015.01.30 《왜 고전을 읽는가》 - 왜 읽냐건 웃지요
  5. 2015.01.28 《공룡 이후》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
  6. 2015.01.23 《소비를 그만두다》 - 왜 사는데
  7. 2015.01.22 《느릅나무 아래 욕망》 - 원하고 욕망하죠
  8. 2014.09.24 [반디앤루니스] 펜벗을 모집합니다!
  9. 2011.12.26 [반디 행사 수첩] 2011 반디가 글로 지은 집.ZIP

『카프카 평전』 - 밤이 오면 글을 쓸 것이다



이주동 | 『카프카 평전』 | 소나무 | 2012


나는 삶에 어떠한 확신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별들의 풍경은 나를 꿈꾸게 한다.

For my part I know nothing with any certainty, but the sight of the stars makes me dream.
- Vincent Willem van Gogh

카프카의 『소송』을 처음 읽었을 때, 참고 다 보는 게 힘들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운 헛소리가 나열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전 서울 고서점가를 나돌던 카프카 책의 뒷면에는 “이것도 문학이냐?”, "이런 X새끼를 내가 읽다니!" 라는 욕과 낙서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기괴하고 이상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품 안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굉장한 게 숨어 있다고 믿었다. 밀란 쿤데라를 포함한 수많은 훌륭한 작가가 극찬한 작품이 별 게 아닐 리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반복해서 읽었고, 마침내 카프카가 표현하려 했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글 맨 위에 옮겨 놓은 네덜란드 화가 반 고흐의 말은 카프카를 이해하는 데 좋은 암시가 된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심상은 고독, 소외, 불안 같은 것들이다. 삶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빠질 수 밖에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별들의 풍경이 있기에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쓴다. 카프카도 외롭지만 아름다움을 믿었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고흐와 카프카의 공통점은 또 있다. 생전에 전혀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흐의 유명 작품인 < 별이 빛나는 밤 >은 현재 천억 원이 넘는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고흐 생전에 그의 작품은 팔린 것도 몇 개 없었을 뿐 더러, 팔려도 당시 가치로 이 백 만원 남짓했다고 한다. 카프카도 비슷한데 장편 소설 『실종자』의 첫 장인 「화부」가 단편 소설로 출간되어 폰타네 문학상을 받은 것 외에는 평단의 평가가 없다시피 했다. 그가 현재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친구 막스 브로트가 사후에 출판한 유고로 인한 것이다. 카프카는 후두 결핵으로 죽기 전에 유작들을 모두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글을 그렇게 열심히 썼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카프카가 작품을 쓴 목적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의미 자체로 글쓰기를 생각했던 것 같다. 카프카는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 다니며 밤늦은 새벽 시간에 글을 썼다. 이 시간의 경험은 신비할 정도여서, 때때로 자신이 쓴 구절에 스스로 감동한 나머지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한밤중에 옆 방에서 자고 있는 부모가 깰까 두려워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서 울었다.

『카프카 평전』 같은 책을 통해 이런 배경을 알고 작품을 읽으니 글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그가 적은 글은 문장과 논리 그대로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 평범한 삶의 감각을 뛰어넘게 해주는 매개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프카는 문학이 줄 수 있는 아주 새롭고 특수한 미학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그게 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카프카의 작품을 열렬히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CamomileForever'님은?

책과 꽃과 풍경을 좋아하는 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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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로그아웃』 - 이제 좀 꺼져줄래

 

 


 


알렉스 릴레 | 『달콤한 로그아웃』 | 나무위의책 | 2013


“모두 그러라는 것은 아냐. 하지만, 적어도 한 집 정도는 조명을 끄고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말이야.” 이것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의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에는 또 이런 아름다운 문장도 실려 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대부분 지극히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28쪽)

나는 종종 2G 폰으로 오해받는 폴더 폰을 사용한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난생처음 휴대폰이라는 것이 생겼고, 그 휴대폰을 대학 졸업하고도 한참을 쓰다가 지금의 휴대폰으로 바꾼 지는 5년이 넘었다. 스마트폰 안 쓰는 사람 찾기가 힘든 세상이다 보니 “아직도 이런 폰 쓰는 사람이 있어요?”라며 가끔씩 ‘미개인’ 취급을 받기도 하고, “이제 그만 스마트폰 장만하지.” 하는 구슬림도 없지 않다. 스마트폰이 유용할 때가 있다는 건 안다. 그래도 이상하게 내키지가 않는다. 시대 변화를 역행하고픈 반항 심리 따위가 아니다. 소심하고 은근 모범생병이 있는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회사 출근하고 반나절이 지나서야 집에 휴대폰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예전 경험을 미루어 볼 때 휴대폰은 나에게 그리 중요한 물건이 아닌 듯하다. 지금 쓰는 휴대폰만 하더라도 와이파이 접속이 가능하고(실제로 접속해 본 적은 없지만), 음악, 게임이며 여러 기능을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통화하고 문자 주고받는 정도의 기본 중의 기본 기능만 충실히 쓰고 있으니, 이런 사람에게 스마트폰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스마트폰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과 끈기와 수고로움을 요구하지만 컴퓨터라는 기기가 있는 한 언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으니 스마트폰 없이도 당분간은 살아갈 수 있지 싶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차치하고 인터넷 없이도 살 수 있을까?

지금껏 잘 써 온 ‘블랙베리’를 휴대폰 가게 점원에게 맡겨둔 것도 모자라 회사와 집에서 쓰는 컴퓨터에 인터넷 연결 프로그램을 모두 삭제한 남자가 있다. 그의 직업은 신문기자. 최신 정보에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할 신문기자가 과연 휴대폰과 인터넷 없이 살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달콤한 로그아웃』은 아날로그 생활로 돌아간 한 남자의 182일간 기록이다. 제목과 달리 디지털 세계와 로그아웃을 선언한 남자의 생활은 솔직히 그리 달콤해 보이지 않다. 아날로그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남자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시행착오를 겪고, 심지어 금단현상까지 보인다. 이런 남자 말고도 이 책에는 자유롭게 밖을 나다니지 못하는 것보다 스마트폰을 빼앗긴 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호소하는 교도소 수감자,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 와서도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는 한 엄마, 남자가 무엇을 묻든 “구글에서 찾아봐!”라고 대답하는 직장 동료들이 등장한다. 내 모습을 연상시키는 인물들의 등장에 괜히 속이 뜨끔하다.

남자는 이 기록을 통해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거나 지금 당장 디지털 네트워크를 끊으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남자 역시도 실험이 끝난 뒤 집에서만은 웹 브라우저를 설치하지 말자고 마음먹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감히(?) 그런 주장을 할 수 없었으리라. (남자의 친구가 비밀번호를 몰래 바꿔놓는 바람에 웹 브라우저 설치는 순간 미수에 그치지만, 뒷이야기는 알 수가 없다.) 남자는 그저 몸소 아날로그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느낀 매 순간의 감정을 솔직히 적고 있을 뿐이니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편리한 문명의 기기를 거부하고 굳이 아날로그 생활로 돌아가 보는 남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다가는 도태되고 고립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 시스템 역시 많은 부분을 디지털 네트워크에 의존하면서 인터넷 없이는 살기 어려운 구조로 변모해 버렸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그런 이유 혹은 변명 한 가지씩은 가슴에 안고 문명 기기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나는 책에 나온,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 왔다는 그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이들과 스마트폰 중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하고. 그러면 그녀는 분명 (어쩌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들이요.”라고 답하지 않을까. 그녀 자신도 분명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그 순간이 둘도 없이 소중한 시간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머리로도 알고 가슴으로도 아는 일인데 눈은 스마트폰 화면을 향하고 손은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기 바쁘다. 참 이상한 일이다.

구글 창립자인 에릭 슈미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컴퓨터와 휴대폰을 꺼라.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그런데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살짝 바꿔보려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컴퓨터와 휴대폰 때문에 놓치지는 마라. 남자가 하고 싶었던 말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새벽하늘'님은?

나무에게 부끄럽지 않을, 좋은 책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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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아니 에르노 | 『남자의 자리』 | 열린책들 | 2012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윤덕수(황정민)는 피난길에 잃어버린 아버지와 여동생을 기억하며 스스로 가장이 된다. 그는 홀로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핀다. 그게 자신의 의무라 여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학업도 포기한다.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파독 광부에 지원하고 여동생의 결혼 자금을 위해 베트남에 간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그에게 남은 건 장애가 난 한쪽 다리와 계속 돌봐야 하는 가족뿐이다. 이러한 삶이 당연한 거라 믿으며 그는 의지를 꺾지 않는다. 시간이 흘렀고 그도 늙었다. 자녀들은 자라서 가정을 꾸렸고, 그에겐 손자들도 생겼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장통의 오래된 가게를 왜 끌어안고 사는지, 왜 오래전 시간을 붙잡고 놓지 않는지를.

아니 에르노가 『남자의 자리』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되짚으며 말한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고백 같은 아버지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 보편적인 개념의 아버지였다. 가족을 위해 애쓰면서도 애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함, 점점 자신의 영역이 좁아지고 자녀가 자라면서 거리감이 생기는 순서까지 똑같았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역사를 적었다. 어떤 감정보다 지극히 객관적인 순서의 기록이었다. 작가가 직접 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까지 적을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 사이가 어떤 교감으로 이루어졌을 한때의 시간이 준 기억.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순간부터 봐 왔던 모습. 늙어가던 아버지의 생활과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쌓이는 서로의 삶. 그렇게 아버지의 크기가 달라져 갔다.

이 무렵, 그는 벌컥 화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증오감에 입가에 뒤틀릴 정도로 심하게 화를 냈다. 나는 어머니와 어떤 공모 의식으로 맺어지고 있었다. 달마다 찾아오는 복통, 골라야 할 브래지어, 화장품 같은 것들을 통해서였다. (…) 우리에겐 그가 필요 없었다. (91쪽)

투병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조금씩 달라졌다. 얼핏 추측하기에 육체의 노쇠함보다 정신적인 피폐함이 더 삶을 짓눌렀을 듯하다. ‘나는 이제 상자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가족들에게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어. 나는 혼자야…… 그에 반해 자식들은 점점 자라 다른 세계로 편입하고 세상을 알게 되어 자주적으로 살아간다. 아버지는 관심 혹은 간섭의 기회까지 사라진 영역을 오롯이 혼자 지킨다. 늙고 나약해져, 그만의 세계를 산다.

픽션을 거부하는 그녀의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써지고 있지만, 그 개인적인 경험이 그녀만의 기억은 아닌 것 같다. 애틋했던 부모와 자녀 사이도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덤하고 건조해진다. 살아가는 방식과 시간이 달라 서로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벽이 쌓인다. 보통의 가족이 이런 시간을 거친다.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의 모습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와 나 사이는 그 '보편적'인 범주에조차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아버지와는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대화로 시작된 말은 싸움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자동으로 차단되는 마음. 서로에게 타인이 되어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우리'라는 표현은 없다. 아버지에 관한 이러한 책은 나에게 늘 넘어야 할 거대한 산으로 자리한다. 보편성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모르는 시간을 알기 위해 부딪혀야만 하는 전쟁 같은 도전이다.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그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어른이 되었고, 어떤 마음으로 부모가 되었으며, 어떤 바람으로 늙어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아니 에르노가 하는 말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그녀의 글을 통해,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하는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오갔을 대화를 그려봤다. 아버지의 유년기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듣고 있을 딸의 눈빛, 몰랐던 시간이 오고 가며 쌓였을 애틋함과 이해, 아직 멀어지기 전인 부녀의 관계. 나는 바람 같은 시선을 던지며 이 짧은 소설을 꾸역꾸역 삼켰다.

아버지가 화두가 되는 이야기 앞에서 나는 늘 답답하다. 애써 피해가고 싶고, 쉽게 건너가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다행이었던 건, 그녀가 이 글을 참 담담하게 썼다는 점이다. 감정의 파도가 지극히 일렁일 것 같은 사건 앞에서도 아니 에르노는 기록 의무자처럼 객관적이다.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래야 쓸 수 있었던 그녀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기억, 정리, 기록이 차례차례 가능해지는 순간에 비로소 찾아오는 안도감과 같이. 언젠가 나의 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는 시간이 오면 나도 이런 기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 가슴속 말, 이해, 정리를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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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그 남자’를 아버지로 생각한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전쟁 같은 도전'이라고 했는데, 전쟁을 마치고서 아버지의 거대한 산은 좀 작아 보이던가요?

‘그 남자’를 주제로 여러 책의 주인공을 떠올려 봤는데 연인 같은 남자가 많더라고요. 그 많은 남자 사람을 뒤로하고, 언젠가 한번은 마음 다잡고 덤벼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였어요. 펜벗 주제가 아니었더라면, 이 책을 다시 책장 구석에 넣어둘 것만 같아서요.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화나 책은 늘, 저를 힘들게 하거든요. 가까이 가기 위해 아주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늘 제자리에 서 있다가 되돌아가곤 합니다. 평소의 저라면 그런 경우 관계 유지를 포기하는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 단절이 ‘단절’이 되지 않더군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아, 그 거대한 산이 이제는 작아 보이냐고 물으셨죠? 아니요. 작아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힘들어도 다시 산에 오르자 다짐하고 언젠가 또 이런 이야기를 선택할 것 같아요.

● 평소 다양한 장르를 신중하게 소화하는 캔맥주 님의 모습을 보고 노력하는 ‘다독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은 언제부터 즐겨 읽으셨어요?


저 정말 책을 안 읽고 사는 대한민국 사람이었거든요. 대학에 다닐 때도 전공 서적 외 책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말하면, 지금 제 주변의 책 지인들이 놀라시더라고요. ‘정말?’ 하면서요. 네, 정말요. ^^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책을 즐기기 시작한 건 한 5년쯤 된 것 같아요. 우연히 모교 구내서점에 갔다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잠깐 읽었는데요. 서서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바로 사 들고 나왔어요. 그때부터였어요.
지금도 저는 책을 편식하고 많이 읽지도 못하지만, 책을 옆에 두고 늙어가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있어요.


●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와 하이타니 겐지로의 『상냥하게 살기』를 같이 읽고 있어요. 내키는 대로 두 책 중 손에 잡히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스토너』는 한 남자의 평범한 일생을 담았어요. 심심한 듯 들릴 수 있는데, 오히려 그의 평범한 삶이 너무 와 닿아요. 이 책의 홍보 문구에서 ‘사는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다.’라고 하는데요, 딱 그거였어요. 우리 사는 모습과 너무 닮았어요. 그래서 뭉클하게 공감하게 돼요. 『상냥하게 살기』는 하이타니 겐지로가 사십 대에 발표한 육십사 개의 산문집이에요. 나중에 그가 아와지 섬으로 이주한 후의 일상도 들려주는데, 진지하면서 재미있어요. 문득, 하이타니 겐지로가 좀 엉뚱한 아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이런 선생님을 만났다면 조금은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게 돼요.


● ‘펜벗’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펜벗에 선정되고 나서 궁금했어요. 매달 어떤 주제로 새로움을 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처음부터 선정된 주제가 저의 기대만큼 새롭거나 신선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반전이었어요. ‘처음’, ‘겨울’, ‘그 남자 그 여자’ 이런 주제가 어떤 책을 떠올리는데 상당한 고민과 관심을 두게 하더라고요. 어떤 책을 골라 볼지 이렇게 많이 고민해본 적이 정말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보면 참 평범한 주제일 수 있잖아요. 일상에서 늘 떠올릴 수 있는 주제인데, 이 평범함이 비범함을 만들고 있었어요. 책에 대한 느낌과 의미가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의 펜벗이 좋아요.
굳이 소박하게 바라는 점 한 가지라도 말해보라면, 펜벗의 주제가 조금 더 친근해져도 좋을 듯해요. 예를 들어, ‘이 주인공만 보면 욕이 나온다.’ 같은 주제요. ^^


오늘의 책을 리뷰한 '캔맥주'님은?

책을 좋아하고 싶어서, 책을 읽어요. 내일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한 페이지를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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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읽는가》 - 왜 읽냐건 웃지요

 


 

이탈로 칼비노 | 《왜 고전을 읽는가》 | 민음사 | 2008

나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위 말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시를 써 당선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나의 시는 언제나 허공을 맴돌 뿐 다른 이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 전라북도 무주 산골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어느 추운 겨울날 아이들과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편의점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우리와 함께 마치고 내려온 담임 선생님과 그의 오랜 친구였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우리 학교 대표로 지난번 글짓기 대회에 나갔던 아이라고, 자네도 읽어보지 않았느냐며 말이다. 그는 나의 이름을 듣고는 "아~, 너 수필 썼었지?" 하며 아는 체를 해 주었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작가 ‘안도현’이라고.

나는 그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편의점을 떠나 학교 기숙사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가 나의 담임선생님처럼 어느 산골의 교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나는 대학에 진학했고, 그의 이름을 좇아 그의 시들을 읽었다.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후회했다. 오래도록 나의 꿈은 글의 언저리를 따라 있었다. 하지만 수능 점수와 장학금을 따라 진학한 대학은 나에게 오랜 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선물했다. 초, 중, 고를 지나면서 한 번도 꿈꾸어보지 않았던 '교사'라는 삶을. 나는 교사로 살면서 오래도록 꿈을 잊고 살았다.

꿈을 잊고 책을 읽지 않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하루를 보내는 데만 집중하면 됐었다.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잊히고 있었다. 이제 서른 중반을 찍으며 나는 다시 꿈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는 꿈이라기보다 바람에 해당하는 일들을 생각했다.

오랜 질문의 답을 찾기라도 할 듯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를 펼쳤다. 하지만 서문을 제외하곤, 이탈리아의 작기인 칼비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칼비노의 렌즈를 통과한 생소한 '고전'들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역자도 밝히고 있듯, 그가 소개하고 있는 작품들 중 몇몇은 아예 우리나라에는 번역조차 되어 있지 않을 만큼 생소하다. 그러나 칼비노의 렌즈는 그 생소함에 다소 활력을 불어 넣는다. 가끔은 시선을 멈추고 밑줄을 긋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돈키호테의 전신 격에 해당할 만한 ‘티랑 로 블랑’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기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책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갖는 가치이다. 이것은 책과 삶을 구분하지 않고 책 바깥에서도 신화를 찾고자 하는 돈 키호테의 가치관과는 반대되는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91쪽)
라고 말하는 부분이나,

그 순간 삶 자체는 책 안에서 서술되고 있는 형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97쪽)

라고 평하는 부분이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티랑 로 블랑’에서 그가 발견한 돈 키호테의 가치관, 삶과 책의 일치를 푼 문장을 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때로는 고민을 또 때로는 위안을 준다. 그러나 책은 책 밖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혹 순진한 독자가 책 속의 말들을 따라하고 책이 권하는 일들을 그대로 행해도 책에서 말하는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책은 청춘의 아픔을 논하고 따스한 말을 해 줄 수 있지만 청춘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돈 키호테와 같이 책 속의 일들과 책 밖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면 왜 책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 어렵다면, 그 말을 ‘책’으로 바꿔볼 수 있다.

"왜 책을 읽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효율로 또 어떤 이에게는 공감, 또 어떤 이에게는 행동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칼비노가 서문의 마지막에 인용하고 있는 시오랑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어떤 목적이나 유용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냥" 혹은 "그래서"에서 해당될 만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곧 죽음을 선사할 독약이 만들어지는 그 앞에서도 악기를 배우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이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그저 배우고 싶고, 알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강력한 것은 없다.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한때 놓아버렸던 꿈의 언저리로 돌아가려는 이유도 그저 그냥 그러고 싶어서다. 그렇게 해 보고 싶은 열망과 정열 때문일 것이다. 칼비노의 책은 서문을 제외하고는 인내심을 가지고 읽었다. 정확히 나는 읽었다. 글자를 말이다. 어려운 내용이었고, 그가 소개한 책들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어디선가 본 듯한 세르반테스, 톨스토이, 디킨스, 헤밍웨이를 만나면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러니 기억에 남은 것도 많지 않다. 다만, 그가 고전을 읽으며 다가서려 했을 삶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 책을 덮고 나는 올 한 해 여러 엄마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리딩살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한 달에 한 권 책을 읽는다. 나는 엄마들이 왜 그토록 열심히 책을 읽고 고민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한때 놓아버린 꿈과 읽고 싶다는 열정에 이끌렸을 것이다. 여전히 책을 읽는 이유, 읽어야 하는 이유는 고민의 대상이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책을 펼치고 이야기를 나눈다. 언젠가 고민의 결과가 한 편의 글로 태어나는 날이 오길 바란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apranihita'님은?

읽고 보고 듣고 느끼고 쓰는 일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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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이후》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

 


도널드 R.프로세로 | 《공룡 이후》 | 뿌리와이파리 | 2013


1억 년이나 넘게 종을 유지하며 중생대를 대표했던 공룡은 상업적으로나 순수한 지적 호기심으로나 크게 성공한 ‘아이템’이다. 특히 공룡의 멸종이 6,500만 년 전에 있었던 운석 충돌과 연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대중의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고, 관련 책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렇듯 지대한 관심에도 공룡의 직계 후손이 우리 눈앞에서 보란 듯 생존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또한, 거대한 비조류 공룡들이 멸종한 덕분에 우리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가 지구를 점령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의 관심 밖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빙하 시대이며 인류 문명의 역사는 빙하 시대 사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따뜻한 시기인 ‘간빙기’가 1만 년 정도 특별하게 연장된 덕분에 꽃 피웠다는 사실 또한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듯하다. 공룡 덕분에 백악기, 중생대, 고생대라는 지질학 용어는 일반인들의 귀에도 낯설지 않을 정도로 흔해졌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사는 신생대라는 말은 왠지 낯설고, 신생대를 다룬 책도 중생대나 고생대를 다룬 책보다 드물다. 그렇기에 도널드 R. 프로세로의 『공룡 이후』라는 제목은 더욱 눈에 띄며 발견자의 침체한 호기심 세포를 빠르게 자극하기 충분하다.

비조류 공룡이 멸종한 이후 6,500만 년이 지나는 동안, 지구 환경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온난화와 한랭화가 번갈아 찾아오면서 현재의 사막이 사바나나 초원이 되었던 시기도 있었고, 현재 사람이 살기 적당한 곳이 빙하로 뒤덮여 불모지가 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다양한 생명체들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멸종과 진화를 거듭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약 200만 년 전에 시작된 플라이스토세의 빙하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고기후학적 증거에 나타난 바로는, 보통 ‘간빙기’(빙하 시대 중 기후가 따뜻한 시기)는 약 10만 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빙하 주기에서 겨우 1만 년 정도만 지속한다. 지질학적 시간으로는 ‘찰나’에 버금가는 이 ‘1만 년’ 덕분에 인류의 문명은 지금과 같은 화려함을 뽐낼 수 있다. 만약 그 1만 년이 없었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아직도 돌도끼를 들고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을 것이며,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동굴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며 오늘 잡을 사냥감을 위해 열심히 돌을 갈고 있을지도. 믿기 어렵지만 인류의 문명은 우연한 결과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 1만 년의 간빙기 와중에도 소규모의 온난기와 한랭기가 있었고, 그러한 기후 변화는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홀로세에서 가장 따뜻했던 시기인 BC 5000~BC 4000년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계곡, 중국의 위대한 문명(황허 문명)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BC 1200∼ BC 800년에는 기후가 다시 변하기 시작했고 앞서 문명이 꽃피웠던 지역 곳곳에 홍수와 가뭄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자연재해를 신의 분노로 재앙이 닥친 것이라 해석했지만, 사실은 기후변화가 그 원인이었다.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미케네나 마야 문명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중세에도 기후변화는 계속되었다. 기후변화는 역사학자 바버라 터크만이 ‘비참한 14세기’라고 일컬었던 대기근을 불러왔고, 30년 후에는 흑사병을 일으켜 유럽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따뜻해진 그린란드와 래브라도 반도에 정착했던 바이킹족은 다시 찾아온 기후변화 때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전멸했다. 지구의 기후는 19세기 소빙하기를 끝으로 온난화에 들어섰고 이후 거의 2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이 꽃을 피웠던 축복받은 간빙기, 그 1만 년의 짧고도 긴 시간의 끝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문명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다면 우리의 문명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연간 1만 7,000종에서 많게는 연간 10만 종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다. 고생물학자들이 추정한 ‘기본’ 멸종 속도, 다시 말해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때의 멸종 속도는 4년에 1종꼴이다. “심지어 ‘5대 대멸종’의 멸종 속도도 이보다 10배 이상 높지 않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인간이 자연을 무지막지하게 착취한 응분의 결과이다. 리처드 리키와 로저 르윈은 이를 ‘여섯 번째 멸종’이라고 부른다. 정말 영광이지 않을 수 없다.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우리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격변기를 직접 체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 꽃피운 문명을 뒤돌아보며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자부한다. 그러나 시간에는 당할 자가 없듯이 그러한 이들도 우주의 길고 큰 역사 속에 묻혀버렸거나 묻힐 것이다.

우리 또한 지구와 태양의 종말이 오기 전에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지 않는 이상 다사다난했던 인류 역사의 장을 마칠 것이다. 우주가 탄생하고 수많은 은하와 별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긴 역사에서 우리 은하에 적당한 크기와 밝기의 태양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적당한 거리에 지구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혹독한 빙하 시대 중 잠시 따뜻했던 기후 덕분에 번창한 인류 문명을 보면 우리의 존재가 특별하다기보다는 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다름 아닌 ‘우연’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경이로운 우주의 놀라운 모든 것들이 이 ‘우연’ 속에서 탄생하고 ‘우연’ 속에서 죽었다. 우리의 삶 또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 ‘우연’ 덕분에 화사하게 꽃 핀 우리의 문명이, 이번에는 ‘우연’이 아닌 인류의 오만방자함이 불러온 ‘필연’ 때문에 시든다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의 모든 문명은 홀로세라고 하는 짧은 온난기의 산물이고, 우리는 지금 그 홀로세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그 끝은 너무 더울수도, 또는 너무 추울 수도 있다. 우리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자연이 앞으로도 계속 호의적이리라는 가정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본문 중)

오늘의 책을 리뷰한 '노래하는다롱이'님은?

책과 함께 하는 삶은 지루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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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를 그만두다》 - 왜 사는데


 

 


히라카와 가쓰미 | 《소비를 그만두다》 | 더숲 | 2015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참으로 많고 첨예하다. 2015년 1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갑과 을의 논쟁, 그리고 폭력이다. 어린이집 아이를 학대한 보육교사, 땅콩회항으로 불붙은 을을 향한 갑의 횡포. 물론 이 말고도 한둘이 아니지만 거의 모든 현안이 덮일 만큼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 문제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폭력의 문제는 아니다. 유아 학대를 보면 맞벌이 때문에 아이를 맞길 수밖에 없는 가정, 보육교사의 과도한 노동환경, 어린이집 운영에 관한 비리가 얽혀있고 갑, 을 문제 또한 노동과 돈에 대한 문제가 얽혀있다. 이는 비단 어린이집에 CCTV 하나 설치한다고, 가진 자들이 친절함을 장착한다고 해서 해결될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돌아가 보면 '돈', 자본으로 귀결된다. 그럼 돈 문제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돈이 신앙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게 되었는가. 왜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자신들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해석하는 동안 그렇지 못한 자는 늘 박탈감에 시달리고 일자리를 걱정해야 하는가. 많이 '소비'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며, 더 많이 소비할 능력이 있는 자들을 칭송하고 동경하며 떠받드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저자는 이런 우리와 다르지 않은 금전 만능주의의 사회, 자국 일본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이러한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제 더는 생산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가 되어버린 '개인'의 모습을 돌아보며, 소비를 위해 살아가는 일본 사회에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참 비슷하게 변하고 있다. 가족중심의 사회에서 서구사회처럼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로 바뀌었고, 기업들은 '시장창조'라는 이름으로 지역과 가정을 잘게 쪼개 개인을 만들고 개인의 욕망을 환기해 '소비자'를 만들었다. (89쪽)


 

이를 미개 시장으로 확대한 것이 바로 '세계화'다. 우리는 '소비'의 주체가 되어 기업들이 환기한 욕망을 따라 '소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형 상점이 들어서 지역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이를 따라 형성된 시민들의 긴밀한 관계 역시 파괴된다. 우리는 철저하게 노동과 생산이 분리되어 그들을 위해 일하고, 또 소비한다.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저자는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되자고 말한다. 창업이 아닌 '소 상업', 돈벌이가 아닌 '살아가기'가 중심이 된 '탈소비자'를 생각하자고 한다. 싸게 사는 것이 아닌 비싸도 가치 있는 소비를 하는 것, 적게 벌되 잘 순환시키는 것, 상품 경제 속에 '증여'와 '교환'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하지 않는 사회'로 재설계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말한다.

이 책은 오로지 소비 그 자체에만 초점이 맞춰있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욕망만을 좇아 사는 우리 모습에 좋은 충고를 들려준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은 이 모든 것들을 조금 두루 뭉실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책의 3분의 1 정도는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에서 보이는 경험담이 대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수필이나 새로운 대안을 제안한 입문서 정도로 본다면 꽤 괜찮을 책이고, 만일 그전에 이와 관련된 책을 읽었거나 자주 접해 보았던 사람이라면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락아프리카'님은?

밴드 아프리카의 보컬리스트입니다. 역사(고대사)와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소설 분야의 책을 좋아합니다. 우리 부부를 선택하여 함께 살게 된 사연 많은 길고양이 4마리와 정도사라 불리는 드러머 남편과 유유자적, 대책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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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아래 욕망》 - 원하고 욕망하죠

 

 



유진 오닐 | 《느릅나무 아래 욕망》 | 열린책들 | 2011


 

지하철을 탈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늘이 져 있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열심히 일했으니 퇴근길의 얼굴이 어두운 것이고 다음날 출근길 얼굴이 어두운 것도 피로가 덜 풀려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낮에도 객실 안의 사람들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안에서는 어두운 얼굴도 지하철 밖에서 봤을 때는 그늘이 없다. 낮에는 활기가 넘쳐야 하니 피로와는 상관없을 텐데 낮에도 얼굴이 어둡다는 것은 피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전철을 벗어나 밝은 길거리에서 보면 얼굴이 어둡지 않다는 것도 피로가 원인은 아닐 것이다.

조명 때문이었다. 지하철 객차의 불빛은 사람 머리 뒤에서 아래로 내리쬔다. 빛이 닿지 않는 얼굴 면에는 그늘이 지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빛을 많이 사용해서 사방을 밝게 한다면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겠지만, 천장 가운데에 매달린 형광등 하나로만 객차의 밝기를 결정하니 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곳이 생기고 얼굴에 그늘이 서린다.

지하철 창문을 바라보면 내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어둡다. 뭉크의 그림 속 얼굴처럼 얼굴은 늘어져 있고 우울한 기운이 가득하다. 그런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마누라의 뽀뽀를 받으며 출근한들 지하철만 타고 나면 기분이 찌뿌둥한 것이다. 지하철의 조명은 하루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머리 위에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무엇이 되었든 힘이 세든 약하든, 좋든 나쁘든, 어둡든 밝든 힘 아래에 있기 시작한 때부터 힘의 영향을 받는다.

《느릅나무 아래 욕망》에서 등장인물 각자에게 영향을 준 것은 욕망과 어머니였다. 아버지인 이프리엄 캐벗은 탐욕 아래에서 무자비하게 재산을 넓혔고 아이들을 막 대했다. 둘째와 셋째 아들인 시미언과 피터는 욕망이 컸기에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늘 말하고 다녔다. 막내아들 에벤은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복수한다며 아버지의 새 부인인 애비 퍼트넘과 관계를 맺었다. 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욕보여서 어머니의 복수하려는 것이었기에 아이를 낳은 뒤에도 애비 퍼트넘에게 사랑한다 속삭였다.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끊임없이 더럽혔다. 애비 퍼트넘은 농장을 갖겠다는 욕망으로 결혼을 했다. 에벤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껴 에벤을 유혹했지만 에벤이 다가오지 않아 힘들어했다. 그러다 에벤이 자기에게 오지 않는 이유가 에벤에게 깊게 영향을 끼친 엄마의 그림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그림자를 걷어 내고 싶어 했다.

한 가족의 집에 애증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탐욕에 가득 찬 손아귀가 가득했다. 분노로 핏대 선 목에서는 쉬지 않고 고성이 뿜어져 나왔다. 근친상간이 끊이지 않았고 유아살해가 일어났다. 그 집 앞에는 느릅나무가 가지를 길게 뻗고 우뚝 서 있었다.

어쩌면 느릅나무를 찍어냈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느릅나무 가지가 집 위에 길게 늘어져서 햇빛을 막았다면 지하실처럼 집은 퀘퀘했을 것이다. 항상 어둡고 습기 찬 집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니 가족들의 성격도 음울해졌을 터. 느릅나무 주위에서 생긴 벌레가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벌레는 집 안까지 들어왔을 것이고 잠자리를 방해하고 일상을 괴롭혔을 것이다. 집이 안식의 공간이 되지 못하니 사랑의 말은 할 수 없고 증오의 말만 내뱉는 것이다.

책에는 느릅나무에 대한 언급이 두어 번 정도 나온다. 느릅나무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실제 느릅나무는 높이가 20~30미터나 되는 큰 나무라고 한다. 그것을 생각해 보자면 아마 유진 오닐은 느릅나무가 있는 집을 통해 부를 이룬 미국인 가정을 상징하려고 했던 것 같다. 큰 나무가 흡사 큰 재산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느릅나무는 축축한 습기가 있는 산골짜기에서 잘 자란다. 유진 오닐은 큰 부를 이룬 가정이지만 그 가정은 따뜻하지 않고 축축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수많은 나무 중에서도 느릅나무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큰 부를 이루어서 행복한 것 같지만 그 큰 부 아래에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지만, 한편으로는 느릅나무를 떠난 것이다.

유진 오닐이 《느릅나무 아래 욕망》이라는 희곡을 썼을 때 느릅나무는 지극히 상징적이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뭉크의 그림 속 절규하는 사람과 똑같은 것을 목도한 지금, 느릅나무는 상징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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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앤루니스] 펜벗을 모집합니다!

 

 

모집 기간
9월 22일(월) ~ 10월 20일(월) 24:00 까지


모집 인원
40명
모집 인원은 심사 과정에서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활동 기간
2014년 10월 말 ~ 2015년 2월 말 (4개월)


활동 내용
매월 반디펜벗서재에 ‘오늘의 책 테마’가 공지됩니다. 펜벗은 테마와 어울리는 도서의 서평을 씁니다.
함께 참여해 주시는 분들께 매월 적립금 5만원을 드립니다.
여기서 펜벗과 함께 다양한 글을 나누어 봅니다.


신청 방법
이 페이지에서 신청서를 다운로드 한 후, 항목을 빠짐없이 적어서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hyewonjung@bnl.co.kr

 

발표        
10월 24일(금) 14:00
반디앤루니스 홈페이지 및 반디펜벗서재에 발표 / 개별 공지


문의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hyewonjung@bn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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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 행사 수첩] 2011 반디가 글로 지은 집.ZIP




[2011 반디가 꼽은 리뷰 이벤트 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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