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에 해당되는 글 11건

  1. 2014.05.12 [반디 행사 수첩] eBook으로 프로이트 전집을 만나보세요!
  2. 2011.12.01 <만리장성과 책들> - 무한히 이어지는 이야기의 실타래
  3. 2011.07.27 <예루살렘> - 그 밤, 그 거리를 떠도는 권력의 상흔들
  4. 2011.01.13 <밑줄 긋는 남자> - 내게 보내는 메시지 같다
  5. 2010.12.30 <도롱뇽과의 전쟁> - 인류 멸망 예고에 대한 또다른 접근
  6. 2010.12.23 <프랑스 스케치> - 生은 찬란하다
  7. 2010.12.03 <1984년> - '개인', 그리고 '자유'가 없는 곳에는 '인간'도 없다
  8. 2010.11.24 <신> - 신은 바로 당신이다
  9. 2010.10.29 <버마시절> -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0. 2010.03.05 <뿌리> - 뿌리를 잃어버린 자의 삶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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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과 책들> - 무한히 이어지는 이야기의 실타래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만리장성과 책들> | 열린책들 | 2008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란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지럼증과 함께 심한 두근거림을 느낀다. 보르헤스가 그려내는 비상식적인 세계는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던 세계를 송두리째 갈아 엎는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는 시간의 연속성과 공간의 절대성이 보르헤스의 필치 앞에선 엿가락처럼 휘어졌다 이내 사라져버리고 만다. 보르헤스를 읽는다는 것은 친모와의 안녕을 고함과 동시에 바로 계모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충격적 상황과 마주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보르헤스의 충격은 그 내용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나는 프로이트를 읽으며 독일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후회한 적이 있는데 마찬가지로 보르헤스를 읽고 있으면 나의 모국어가 스페니쉬(Spanish)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인이며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한다). 독자를 절망 속으로 빠뜨리는 건 보르헤스의 모호한 알레고리이며 동시에 그 알레고리 앞에서 갈팡질팡,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마는 번역이다. 우리는 이렇게 알레고리와 번역의 사이에서 두 번의 절망을 맞는다. 이제 이 절망들은 보르헤스 포기를 종용하는 암묵적 메시지가 된다. 평생 단편만을 고집하여 결코 두꺼운 법이 없는 보르헤스의 책들은, 그렇게 우리 손을 떠나 영영 찾을 수 없는 바벨의 도서관에 보관된다.

 

 

보르헤스 세계의 특징은 상호반영을 통한 이미지의 무한복제다. 쉽게, 마주보고 있는 거울을 생각하면 된다. 거울이 서로를 비추며 무한의 이미지를 반복하듯이 보르헤스는 '세상의 만물이 그려진 지도', '모든 책이 씌인 책' 등으로 세계를 언어화한다. 만물이 그려진 지도라든가 모든 책이 씌인 책은 그 자체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부분일 수밖에 없는 패러독스를 잉태하므로 그의 문학은 '나는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이라든가 '돈키호테를 읽고 있는 돈키호테' 같은 기이한 불확실성을 마음껏 유희한다. 보르헤스는 이 책의 열 번째 챕터 '돈키호테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마술성'의 마지막을 칼라일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

 

1833년에 칼라일은 말했다. 우주의 역사라는 것은 모든 이들이 쓰고 읽고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그들 스스로가 묘사되어지고 있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한 권의 책이라고.

 

 <듀안 마이클>

 

보르헤스의 또 다른 특징은 끊임없는 이야기와 인용 그리고 그에 따른 방대한 주석이다. 보르헤스는 엄청난 독서가였다. 39세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겪은 뒤 거의 실명 상태로 지내왔음에도 그는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가 살아 생전에 읽었던 책은 무려 2만 권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보르헤스의 글엔 엄청나게 많은 인용구와 책과 작가들이 등장한다. 마치 20세기의 '세헤라자드'가 된 듯이 보르헤스는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끼워 넣고 책 속에 책을 삽입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어김없이 방대한 주석이 뒤따른다.

 

주석이란 보통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나 편집자가 추가하지만 보르헤스의 경우 작자인 자기 자신이 많은 양의 주석을 추가한다. 독자는 이처럼 방대한 주석 앞에서 비선형적 독서를 경험한다. 우리는 여타의 책을 읽어 나가듯 정해진 순서에 따라 편안히 책장을 넘길 수 없다. 독자는 본문을 읽은 뒤 주석을 찾고 때때로 이를 따라 다음장으로 이동하지만 이내 끊어진 본문을 찾아 다시 앞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은 현대의 하이퍼텍스트를 닮아 있다. 특정한 줄거리의 탐색없이 'Back', 'Forward'를 연발하며 정보를 탐색하듯이 보르헤스의 독자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야기 조각을 찾아 부유한다.

 

 <에셔>

 

<만리장성과 책들>은 보르헤스의 산문집이다. 일기를 암호로 쓰는 사람이 없듯이 보르헤스의 산문은 그의 소설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구체적이다. 뿐만 아니라 보르헤스 문학의 원형과 그 원형이 창조되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볼 수 있기에 그동안 그의 소설을 읽으며 불편해했던 독자들은 한층 더 가까이 보르헤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쉽다'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다. 방대한 독서, 무한의 지식, 그리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 차원의 비평들. 인간이란 딱 아는 만큼만 보이기 마련인데 설령 이름이 익숙한 오스카 와일드나 나다니엘 호손을 평했다 한들 이제 막 지식의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네 눈높이에 보르헤스의 사상이 그 털끝 만큼도 보일리 만무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 책을 읽었으나 읽었다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읽지 않았다고도 말할 수 없는 지금의 내 심정과, 이렇듯 얼렁뚱땅 글을 마쳐야만 하는 내 무력함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WiredHusky’님은?
책을 좋아하는 사회적 기업인입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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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 그 밤, 그 거리를 떠도는 권력의 상흔들


 


 

공살루 M. 타바리스 | <예루살렘> | 열린책들 | 2011

 

“바로 그곳, 교회 옆에서 그녀는 두 가지 커다란 고통이 자기 몸속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편에는 그녀를 죽이려고 하는,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못된 통증과 다른 한편에는 착한 통증, 허기, 끊임없이 뭔가를 먹고 싶은 욕망, 즉 살아 있음을 의미하는 고통이자 존재의 고통. […] 짙은 어둠에 휩싸인 바로 그 순간, 위장의 존재가 그녀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것들과 그녀가 맺는 이중적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처럼.” (16-17쪽)

 

과학자인 전남편 ‘테오도르’에 의해 정신 병원에 가게 된 그녀, ‘밀리아’는 그곳에서 ‘에른스트’라는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갖게 된다. 하지만 정신질환자인 그들 사이의 사랑과 임신은 병원의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 될 뿐, 개인의 주체적인 선택과 그에 따른 행위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에 따라 그녀가 낳은 아이 카스는 테오도르의 법적인 아들이 되고, 그녀는 강제로 불임 수술을 받게 된다. 정신 병원에서 나온 후, 불임 수술 후유증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그녀는 교회를 찾아 새벽 밤거리를 나선다. 하지만 그 시각,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굳게 문을 걸어 닫고 있는 교회 옆에서 그녀는 배고픔이라는 "존재의 고통"에 직면한다. 그리곤 육체가 증거하는 권력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낮과 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밀리아가 쓰러진 그 거리에 권력의 또 다른 희생자들이 떠돌고 있다. 정신 병원, 국가, 교회 등으로 상징되는 권력은 그것의 유지를 위해 잠시도 감시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그들이 정해 놓은 틀을 벗어난 이들에겐 폭력을 행사해 처벌하고 규율을 강제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감시와 처벌은 공포와 고통이라는 형태로 개인의 내면에 새겨져 권력을 공고히 하는 기제가 되고, 주체의 자유의지와 자기 결정권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자살하려다 밀리아의 전화를 받고 거리로 나온 ‘에른스트’, 공포와 역사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과학자이지만 밤이 되면 여자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테오도르’, 그런 아버지를 찾아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나선 ‘카스’, 전쟁에 참전한 뒤로 정신적 공황에 빠져 있는 ‘힌네르크’ 등은 모두 권력에 의해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기 자신'을 빼앗긴 인물들이다. 권력의 흔적인 고통과 두려움을 이기고 자신의 생명력을 찾게 해줄 힘으로써의 자기 자신 말이다.

 

그 거리의 인물들은 자기를 잃고 삶과 죽음 사이의 행로를 오간다. 그렇게 권력에 의해 죽음으로 향해 가는 고통과 그것이 파괴하려는 생명의 증거로서의 고통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던 그 밤에, 인물들 각각의 분절된 이야기가 하나씩 모여들어 <예루살렘>이라는 큰 그림을 완성해 나간다. 인물들 내부에 자리 잡은 폭력의 상처와 두려움이 결국 다른 이의 생명을 먹이로 삼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죽고 죽이는 참혹한 그림이 그려진다. 그러므로 마지막에 이르러, 완성된 그림 앞에 선 우리는 정신 병원에서 탈출한 밀리아가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릴 것이다.”라는 성경 구절을 떠올리며, “예루살렘아”를 정신 병원의 이름으로 바꾸어 부르듯, 권력의 상흔이란 결코 잊히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것이라는 비극적인 사실을 대면하게 된다. 작가 공살루 M. 타바리스가 쌓아놓은 <예루살렘>의 비관적인 세계 안에 갇혀 옴짝달짝 못하고 그만, 아뜩해지고 마는 것이다.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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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긋는 남자> - 내게 보내는 메시지 같다

 

 

카롤린 봉그랑, <밑줄 긋는 남자>, 열린책들, 2006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도서관에 관한 에피소드 한두 가지는 있을 것이다. 나는 주로 내 책을 들고 도서관에 가서 읽어서인지 특별한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늘 마음속으로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갈망이 있었다. 결국 그런 갈망을 이루지 못하고 집에서 더 많이 책을 보게 되었지만, 우연히 빌린 책 속에서 누군가 내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면 그 사람을 단숨에 사랑할 것만 같다. 영적인 교류로 서로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짝사랑의 열병에 시달릴지도 모르겠다. 스물다섯 살의 권태에 빠진 콩스탕스처럼 말이다. 

로맹 가리를 무척 사랑하는 콩스탕스는 그의 책을 아껴 읽기 위해, 그리고 다른 작가들을 사랑하기 위해 도서관 회원으로 가입한다. 그리고 가입한 후 빌려온 책에서 한 줄의 낙서를 보게 된다. '당신을 위해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을 보고 콩스탕스는 누군가 규칙을 위반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책을 반납하려다가 사서인 지젤이 책에 낙서를 하면 안 된다며 면막을 주는 바람에 또 다른 글귀를 찾아내게 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노름꾼>이 좋은 책이라며 읽어보기를 권하자 콩스탕스는 <노름꾼>의 내용과 그 책에 있을 낙서가 궁금해 안절부절못한다. 우여곡절 끝에 반납자를 도서관에서 기다려 바로 책을 받은 콩스탕스는 그 책에서 역시 그 사람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콩스탕스에게 말을 걸듯 밑줄이 그어져 있어 그 사람의 흔적을 좇지 않을 수 없었다. 가령 '이런, 나는 당신이 아름다운 여자인지 아닌지 그것조차 모르고 있군요.' 라는 문장의 밑줄을 보게 되면 어느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거라고 착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어지는 밑줄 때문에 혼란스러워 책을 반납했더라도 다른 여자가 그 책을 읽게 된다는 것에 질투를 느끼는 것도 당연하리라.

그렇게 콩스탕스를 한껏 꿈꾸게 만든 밑줄 긋는 사람은 그 이후에도 읽을 책들을 빠뜨리지 않았다. 콩스탕스는 고독하고 진부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밑줄을 찾는 독서가 서서히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미친 듯이 밑줄을 찾아 독서를 했다면 하나의 에피소드로 치부해 버렸을지 모르나 일상과 맞물리는 밑줄 긋는 사람의 존재는 침착하면서도 빠르게 내면으로 침투하고 있었다.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사람의 흔적을 따라 그를 남자라 확신하고, 그 책을 읽으려는 사람을 찾으려고 했던 것도 어쩜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현실적인 사랑을 갈구하기도 하고, 밑줄 긋는 남자를 찾는 게 부질없다는 것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밑줄 긋는 남자의 흔적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 사람을 꼭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도서관에 도움을 청하게 되고, 그 사람은 의외로 일찍 콩스탕스 앞에 나타난다.

그는 도서관에서 그녀에게 대출을 해주던 봉사활동을 하는 대학생이었다. 그러나 콩스탕스는 그의 편지를 받고, 그와 데이트를 하면서 자신이 생각한 밑줄 긋는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읽은 책들 속에서 드러난 밑줄로 볼 때 더 고상하고, 아름답고, 문학적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청년은 너무 평범했고, 콩스탕스가 만난 밑줄 속의 이미지와 너무 달랐다. 결국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거짓으로 밑줄 그은 남자 역할을 했던 청년의 고백이 이어지고, 급기야 청년의 도움으로 밑줄 긋는 남자의 정체를 밝혀내려 한다. 도서관 기록을 이용해 밑줄 긋는 남자의 흔적을 좇으려던 그들은 그 남자를 거의 찾을 뻔 했지만, 그가 최후에 남긴 메시지가 들어있다는 사프로노프란 작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마지막으로 흔적을 남긴 것도 최근이 아니었다.

밑줄 긋는 남자는 끝내 밝힐 수 없었다. 그렇게 멋진 문장들을 남겨놓고(작가가 쓴 것이지만 밑줄로 인해 그의 문장인 것만 같았다.) 콩스탕스를 무척 설레고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그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책 속의 밑줄은 콩스탕스를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데려가 주었다. 소설을 통해 다양한 세상을 보게 만들었고, 사랑하게 만들었으며, 현실에서의 사랑과 이상을 꿈꿀 수도 있었다. 밑줄 긋는 남자와의 이뤄짐이 더 로맨틱하고 애틋하기도 하겠으나, 책 속에 가둬두는 것도 더 좋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진지하고 독특한 독서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볼 때, 그 사람은 어쩌면 부서지고 상처 입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치유해주고 있을지도 몰랐다.

저자는 독특한 방식으로 독자들을 문학 거장들의 작품으로 이끌었다. 거기에 콩스탕스가 밑줄 긋는 남자에 대해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긴장감 있게 펼쳐놓아 무척 흥미로웠다. 콩스탕스 뿐만 아니라 밑줄 긋는 남자를 어느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서 문학과 인생의 고독을 동시에 맛보게 해주었다. 마지막에 그 사람의 흔적이 툭 끊긴 것 같아 조금 아쉽긴 했으나, 그 사람을 현실에서 만날 수 없더라도 책 속에서 만난 그 시간만으로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누구나 느낄 법한 갈망을, 드러내지 못한 희망을 이 책은 충족시켜 주었다. 그래서 밑줄 긋는 남자가 추천해주었던 책들 중에서 아직 내가 만나지 못한 책들을 읽으며 그를 떠올려 보려고 한다. 그가 내게 보낸 메시지도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

 

오늘의 책을 리뷰한 ‘태극취호’님은?
도능독(徒能讀)을 일삼는 자. 책 읽기도 습관이라 생각하며, 책이라면 환장하며 달려드는 서른을 눈앞에 둔 철딱서니. 언제나 머릿속에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하루 종일 책만 보고 살까 꿈만 꾸는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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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 인류 멸망 예고에 대한 또다른 접근

 

카렐 차페크, <도롱뇽과의 전쟁>, 열린책들, 2010

 


때로 할 말이 너무 많으면 되려 말을 하지 않게 되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말을 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여기 존재한다. 적어도 이 책 앞에서만은. 도대체 이런 문학이 어디 숨어있다 이제야 나타난 걸까. 한국 출판계 번역 너무 늦다. 니가 체코어 공부해서 직접 읽으세요, 하면 굳이 할 말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멋드러진 수다의 향연에 체코에서는 존재만으로도 유명하다는 작가 특유의 다재다능한 유머,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다더니 정보 가공 솜씨, 알록달록한 색지 사용 본문 하며 세상에, 이건 문학이라기보단 자연대백과사전의 도롱뇽편이거나 SF소설, 뭐 그런거라 봐도 무방하다. 도롱뇽에 대해 혀를 내두를 만한 막대한 정보의 가공은 전자요, 도롱뇽과 인간의 전쟁을 그리는 가까운 미래의 형상은 가히 후자다.


아하하. 처음에 나는 떼굴떼굴 굴러다녔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책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빠짐없이 읽혀야 한다고. 하지만 또 소심한 여자인간인 나 같은 사람은 아무에게나 덜컥 추천할 수 없을 것 같다. 열린책들 출판사의 문학은 다 이렇더라. 예전에 시배스천 폭스의 <새의 노래>를 어디선가 보고 꽂혀서 페이퍼북으로 덜컥 구입했는데 딱 죽겠는 거다. 두께도 두께지만 글자의 압박 때문에. 못 읽는 언어로 된 원서를 구입했던들 그렇게 막막했을까. 책을 읽을 만큼 읽는다고 자부했지만 글자의 압박은 그저 글자의 압박일 따름이었다. 내가 법학서를 읽고 있는 건 아니잖는가.(이건 하다못해 손으로 짚어가며 읽어야 한다. 흑흑.) 어쨌든 그와는 다른 이유로 그 책은 여전히 책장에서 엑스트라역을 하고 있지만.

그에 비하면 굉장히 세련되고 예쁜 편이라도 압박으로 치면 그 못지 않은 것이 바로 이 <도롱뇽과의 전쟁>이다. 현빈 말대로 한땀한땀 찍어냈는지, 빽빽하다 못해 숨 쉴 틈도 없는 문지기 포본드라가 수집한 도롱뇽에 관한 기사를 읽자면 현기증이 날 정도다. 이건 2부가 특히 심하다. 이 책은 3부 구성인데 2부는 실험적 구성이자 편집의 성격이 다소 쎄다. 이제야 말이지만 가공 기사는 몇 번이나 건너뛰려 했다. 빨강, 초록, 노랑 색지인 게 그나마 다행이라 건너뛰기까지는 안하도록 막아주었으나.(종이신문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익숙한 사람은 괜찮을 수 있음)

이야기는 온 바다를 떠돌아다니는 네덜란드 출신의 선장, '반 토흐'로부터 시작된다. 항해 중 정박한 어느 섬에서 본의 아니게 머물게 된 그는 원주민들이 끔찍하게 두려워하는 어떤 괴생명체와 맞닥뜨린다. 외부인인 그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닷속 깊이 진주조개를 쌓아두고도 바닷물에 발 담그기 두려워하는 원주민에게 약간의 호기심과 답답함이 들었을 뿐이다. 그가 바다에 간 건 오로지 진주조개 때문이었다. 그것이 발단이었다. 도롱뇽은 배를 채워야 할 조개를 쥐고도 열지 못해 낑낑댔고, 선장은 그들이 캐올 수 있는 조개에서 진주를 채취하는 것이 목적.(아참, 원주민이 끔찍히 두려워한 괴생명체는 도롱뇽이었다.) 그는 여기서 굉장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행동하게 되는데 도롱뇽에게 진주조개 여는 방법을 시범보인 것. 이제 그들은 공생의 관계에 놓였다. 도롱뇽은 진주조개를 캐오고 선장은 그것을 열어준다. 진주알은 선장이 가지고 조개껍질의 국물은 도롱뇽이 마신다. 도롱뇽은 그렇게 선장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쌓은 걸로 보인다. 더군다나 선장은 조개를 잡을 수 있는 온갖 도구나 물건을 비롯, 조개를 열 수 있는 칼까지 도롱뇽에게 선물했는데 도구를 이용한 도롱뇽의 수완이 꽤 좋았음은 분명하다. 그가 도롱뇽에게 언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선장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욕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일개 선장인 자신을 도와 도롱뇽을 통한 진주조개 따기 사업에 투자해줄 기업을 물색하다 어릴 때는 멍청해서 줄곧 놀림감이 되던 친구 '본디'가 엄청난 부를 거머쥔 사업가임을 알게 된다. 그를 본디에게 인도해준 것은 본디의 가택 문지기 '포본드라'의 판단이었고, 이런 이유로 포본드라는 마지막까지 자신으로 인해 인류의 삶이 도롱뇽에게 위협받게 되었다며 자책하고 또 자책한다. 하지만 그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겠는가? 선장은 본디가 거절하면 또 다른 사업가를 찾아갔을 것이 분명하고, 선장과 도롱뇽의 기막힌 공생 이후 인류의 삶은 이미 위험하게 흔들리고 있던 셈인 것을. 어쨌거나 여기까지 해서 "이러니 저러니 해서 반 토흐 선장과 사업가 본디, 도롱뇽은 서로 도와 평생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했으면 아름다웠을 것이다. 이쯤에서 막을 내렸다면 아름다운 진주조개와 친근한 도롱뇽, 인생 한 방을 몸소 실천해보인 반 토흐 선장, 그를 도운 친구 본디의 동화 같은 판타지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이기심과 야망은 언제 어느때 파멸을 불러올지 모르는 법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만으로 손바닥 뒤집 듯 변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고 그땐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도롱뇽 사업이 시작되자(도롱뇽이 바닷속에서 진주조개를 잡아준다는 소문이 널리널리 퍼져 너나할 것 없이 도롱뇽과 진주조개를 찾아나서게 된 이후) 도롱뇽은 단지 인간이 진주를 손쉽게 얻는 데 필요한 온전한 도구만으로 기능하지 않았다. 당국은 물론 이웃나라, 기업은 물론 개인들까지 도롱뇽을 사고 싶어했고, 그들은 도롱뇽을 이용해 어떤 이득이라도 취하려 눈이 벌개 있었다. 인간의 손 안에 완벽히 포박한 채로 자신들이 필요한 때에 도롱뇽을 이용하고 또 내다버리고 싶어했단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도롱뇽 신디케이트는 시간문제였고, 판은 곧 그렇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도롱뇽에게 기대한 목표치가 한없이 높았기 때문에 도롱뇽을 이용해 더 많이 얻으려고 투자한 것들로부터 발생했다. 인간의 언어를 가르치고, 인간이 만들어 놓은 환경에서 살도록 만들고, 인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산업에 도롱뇽을 이용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롱뇽은 똑똑해졌다. 인간과 대화가 가능해지면서 그들이 못할 일은 없어졌다.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도롱뇽은 축축한 땅에서 살고 사람에 의해 사람 땅에서 살 수도 있었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했다. 이용가치가 사라져갈 때쯤 인간은 도롱뇽으로 이 세상에서 가능한 모든 실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말을 할 줄 아는 똑똑한 도롱뇽은 잡아먹혔고, 죽임을 당했고, 종종 투쟁을 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집집마다 도롱뇽을 키우지 않는 집이 없었기 때문에 도롱뇽 수요는 치솟을 때로 솟았고 가격 또한 높았다. 유럽 해양과 땅에서 시작된 도롱뇽 전쟁은 점차 다른 대륙으로, 다른 국가로 퍼져 나갔다. 도롱뇽 개체수는 이미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을 초과하고 있었다. 급기야 도롱뇽들은 자신들의 서식지인 해양을 둘러싸고 인간을 향한 전쟁을 선포했다. 문지기인 자신이 본디에게 반 토흐 선장을 데려다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죽기 전까지 괴로워하는 포본드라의 고민은 절대 타당성과 진정성을 잃은 허세 같은 게 아니었다. 아들 내외는 물론 손자, 손녀에게 물려줘야 할 도롱뇽과 전쟁하는 세상을 그는 자기 탓이라 책망하며 무너져간다. 그의 마지막 논리가 타당한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는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반 토흐 선장이 도롱뇽 세상에 침입한 것처럼, 수많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쟁탈을 놓고 싸움을 벌인 것처럼, 인디언 원주민을 몰아내고 아메리카 대륙을 뺏앗은 후 신대륙을 건설한 것마냥 노래불렀던 유럽인들처럼. 인간 vs 인간, 인간 vs 도롱뇽, 도롱뇽 vs 도롱뇽. 그 어떤 전쟁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기자 출신의 체코 작가인 카렐 차페크는 이 소설이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이야기라고 했으며, 심지어 이 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1936년이었다. 이제야 우리는 조금 안다. 그가 왜 이것이 미래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라고 했는지. <도롱뇽과의 전쟁>은 여러가지 코드로 읽힌다. 그래서 더 대단하게 평가받아야 마땅한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각국을 비롯해 비교적 먼 나라 일본까지 관통하고 있던 파시즘을 대입하든, 현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류의 불안하고 위태한 위치를 떠올리든, 여느 다큐에서 본 툰드라 부족들의 삶, 그것도 아니면 사라지는 얼음 조각에 올라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북극곰을 오버랩시키든 당신의 자유다. 다만 욕심 좀 그만 부리며 살자. 언어를 말할 줄 알고,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지능이 좀 더 높다고 인간이 모든 걸 지휘할 권리는 없는 법이다. 비록 식용동물로 길러질지라도 도살에는 순서가 있고, 생명체를 대하는 데에는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인류의 전쟁 역사까지 굳이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구제역 발발에 소와 돼지를 살처분하는 절차도 배제하고 생매장 시키는 어이없는 광경이 자꾸 떠오르고, 굶어죽는 아이들의 눈망울과 에이즈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아픔에도 식량과 치료제를 보급하지 않는 국제적 기업의 보편적 이기심에 치가 떨렸다. 서민복지예산 깎아 나라 발전을 위해 투자한다고 떵떵거리는 것도 못볼 노릇인데, 도대체 이 모든 싸움은 누굴 위한 배불리기란 말인가? 오늘 우리가 주인일지라도 내일 우리가 도롱뇽이 되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지 않은가? 진짜 딱이다. 이 시대에 반드시 읽혀야 하는 필독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감성소녀’님은?
아직 20대인 것이 희망. 자칭 예술애호가. 어느 날 문득 알게 되었다. 몰입과 지속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단 것을. 규격적 인간을 선호하는 세상을 거스르며 살고 싶어 책읽기를 선택했다. 로마 스페인광장에서 하루 종일 사람구경하며 책 읽는 삶을 꿈꾸지만 여의치 않은 현실에 로마로 떠나는 사람들의 여권에 도장 찍어주는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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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스케치> - 生은 찬란하다

 

장 자크 상뻐, <프랑스 스케치>, 열린책들, 2007

 

 

프랑스, 가 보고 싶지만 갈 수 없다면 장 자끄 상빼의 <프랑스 스케치>를 만나면 된다.

이 책, 친구가 아끼는 빌레로이 앤 보흐 그릇 시리즈 같다. 두꺼운 표지를 넘기자마자 목가적인 풍경들에 이내 맘을 빼앗기고 만다. 잘 가꾸어진 전원 풍경과 집들이 사이좋게 옹기종기 붙은 마을이 있고 그림마다 교회 첨탑이 있다. 어떤 우거진 가로수 사이 외길을 지나는 트랙터 뒤로는 자가용들이 줄줄이 다섯이나 따라붙었다. 훗- 웃음이 난다. 그래도 길이 끝날 때까지는 트랙터의 속도를 존중할 수밖에 없겠는데.. ^__^

사람들은 창에 이불을 걸쳐 햇볕에 말리기도 하고 여기 저기서 자전거를 탄다. 그늘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 티타임을 즐기고 자전거로 장을 봐 오는 사람들. 아, 와인이 있는 풍경도 여러 페이지에서 만날 수 있다.
 


 

어두운 저녁, 나무에 등 하나 매달고 정원에서 좋은 사람들과 와인을 즐기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마치 그들이 나누는 즐거운 대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기차가 오지 않는 작은 역을 지키는 역무원.그는 시간을 지켜 기차가 지나갈 때면 건널목 차단바를 내려야 한다. 그래서 이 작은 역에는 시계가 4개나 있다.

거기, 지루하진 않나요?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봄의 정원을 만끽하는 아저씨가 있는가 하면 가을 낙엽을 쓸다가 쓸다가 뾰루퉁 지쳐버린 할머니도 있다. 남자는 먼 길을 달리고서도 결국 기차를 놓쳤지만 그의 표정은 밝다. 상빼식 위트가 즐겁다.

그의 스케치 안에는 상류사회도 보이고, 소박한 삶도 공존한다.남자가 있고, 여자가 있고, 연인이 있고, 부부가 있다. 특별한 인생처럼 보이려는 어떤 장치도 없다. 그저 한 사람의 평범한 인생의 어느 하루ㅡ같다.

그의 스케치를 죽 넘겨보며 마음 속에 크리스마스 트리 하나 세워 보는 것도 좋다. 책을 덮고 나면 드디어 전등에 불이 들어 온다. 사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얼마나 따뜻한가 심호흡을 깊이 하고 그의 생각에 동의해본다.

"그래요. 상빼씨. 생은 찬란하네요."

그의 그림 속에서 모든 순간이 빛을 발한다. 生은 찬란하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커피우유'님은?
나무 좋아하고, 커피 좋아하고, 작은 것, 일상의 반짝거리는 순간들을 사랑합니다. 오늘 허락된 하루치의 행복을 매일매일 모두 맛보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채워서 언젠가는 흘러넘치는 그릇이 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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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 '개인', 그리고 '자유'가 없는 곳에는 '인간'도 없다

 

조지 오웰, <1984년>, 열린책들, 2009

 


1984년의 오세아니아, 그 세계가 더없이 절망적이다. <동물농장>에서 보여줬던 권력의 부패와 전체주의를 향한 비판이 극단으로 치달아 비관을 낳으면 <1984>가 되는 걸까. 삶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통제당하는 암울한 시대, 개인 없는 개인의 합, 전체주의 국가만 덩그러니 남은 <1984>의 세계는 디스토피아, 그 자체이다. ‘빅 브라더’로 대변되는 독재 권력이 그들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극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모든 정책은 탁월(?)하고, 그런 세계를 창조해 인류의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게 한 조지 오웰의 통찰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

<1984>에서 하나의 권력을 위해 부정된 모든 것들이 모두의 삶을 위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이다.

1984년,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라는 전체주의 국가에 의해서 지배되고, 이 세 나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인다. 전쟁에 대한 공포를 통해 내부 권력에 기대게 하는 것, 이 또한 ‘빅 브라더’의 지배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강력한 수단이다. 당원들의 사생활은 철저히 감시되고, 그들을 사상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과거 조작과 ‘신어’ 창조는 계속된다. 권력에 반하는 어떠한 생각과 행동도 용납될 수 없으며, 통제되지 않는 ‘개인’의 삶, 그들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생각 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없다면, 그 질문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을 ‘인간’이라 부를 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고의 주체인 ‘개인’을 말살당하고 반성하는 사고 자체를 차단당한 이들로 가득한 <1984>, 그 어디에도 진정한 의미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의 삶에 대한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모두가 하나의 생각을 기계처럼 반복하며 권력의 유지를 위해 봉사하는 그들에게 내일은 없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罪人)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서정주의 ‘자화상’ 중에서


1984, 어떤 미래의 자화상

세상이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한데, 그 세상이 부끄러운 줄 모르는, 그런 사고의 능력을 빼앗긴 이들이 <1984>에 있다. 진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린 그들이 ‘빅 브라더’를 대신해 타인의 눈에서 죄인을 읽고 그들의 입에서 천치를 읽는다. 그들은 아무것도 뉘우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인간다운’ 내일은 분명, 어떤 뉘우침을 통해, 그 뉘우침의 능력를 양보하지 않으려는 의지, 그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1984년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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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 신은 바로 당신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신>, 열린책들, 2008

 


죽음 너머의 세상은 불확실의 영역이다. 하나의 유기체로 숨을 쉬고 오감을 사용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지금 이 시점에도 나는 불안하다. 그 불안은 두려움이라는 피할 수 없는 외피처럼 막연하기만 하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불안, 존재의 상실에 대한 불안, 알 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 불안의 요소들은 어디에든 산재한다. 인간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초월적인 신을 영접하고 기대었는지 모른다. 신과의 만남. 그것은 불안의 제거를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불안의 정체가 신과의 소통으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 그것은 우주의 존재에 대한 원초적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인간이 무엇인지,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규명작업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불안의 제거는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시도인지 모른다. 죽음에 맞서는 타나타노트의 순항처럼 말이다. 인간에게 죽음과 신은 밀접한 관계다. 죽음을 관장하는 섬뜩한 세계는 불안을 두려움으로 바꾸고 두려움은 다시 털어낼 수 없는 공포로 만든다. 그러나 종교는 말한다. 신을 받아들이고 사후세계에 대한 존재를 믿는다면 그 또한 인간을 움직이고 이끄는 동인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다양한 모습으로 출현한다. 때로는 토템의 형식으로 때로는 정신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의식을 고양시키는 방편으로서 존재한다. 이것은 종교에 대한 짧은 나의 단견에 불과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 단지 신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에 앞서는 서투른 끼적임에 불과하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존재를 합리적으로 규명할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고 본다. 기실 그 합리성이라는 잣대도 인간이 만든 기준에 불과하다는 오류를 생각한다면 어디에도 존재에 대한 마땅한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신은 이 땅의 모든 이를 관장하고 의식을 이루는 모든 유기체를 지배한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뒤따른다. “신, 그 이전에는 무엇이었는가?” 바로 이 물음에 대답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생경한 해답이 대신한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개미>를 통찰하던 그의 놀라운 사유의 흔적과 비범한 능력을 보았을 무렵부터다. 그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상대적인 이야기를 한다. 그러므로 이 책 <신>에 담긴 이야기의 줄기와 근간은 그가 이전에 써내려간 모든 것의 총합이다. 지옥을 탐사하고 죽음에 대한 본질을 파헤치던 <타나타노트>, 천사의 세계를 장엄하게 연출해 낸 <천사들의 제국>, <개미>에서 덮쳐 오던 숨 막히듯 개미세계를 열어젖힌 그의 모든 지식의 총아가 이 책에 담겼다.

베르나르의 이전 작품인 <파피용>은 인간의 본질, 즉 협력하고 대립하고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 본질적인 연구를 하였다면 <신>은 그것의 존재적 완성이라 할 만 하다. 베르나르는 인간이 무리를 이루면 반드시 협력하는 이, 대립하는 이, 무시(중립)하는 이로 나뉜다는 분열의 D, 중성의 N, 협력의 A의 인간의 본성에 렌즈를 맞추었다. 그것은 DNA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로 이해하였으며 이와 같은 단순한 체계로 모든 복잡한 것에 대한 기초를 이룬다는 의미다. 기실 <신>의 곳곳에 포함하고 지탱하는 지지대는 이것으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인간을 추동하는 핵심요소인 것처럼 더 나아가 모든 것은 DNA의 과정을 답습한다. 단순함이다. 단순함은 허무로 싸여 있지만 확고하다. 베르나르가 천재적 영감을 마음껏 이용하며 신선한 발상을 뱉어 내는 주요한 이유 또한 단순함에서다. 단순함은 분명, 모든 것을 명료하게 만든다.

그래서 베르나르의 주파수는 항상 열려있다. 닫힌 편견의 시선을 기존의 사고를 딛고 올라선다. <신>에서 드러난 모든 신들의 역사는 이미 인간의 의식세계에 깊숙이 침투한 모든 것이다. 올림피아의 12신들을 비롯해서 유명 짜한 신들의 일화를 모두 녹여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밝혀진 신들을 재료로 새로운 행성을 건설하고 다시 그 모든 것들을 담아내는 발상의 신기원을 이루었으니 창의적이라 할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무지의 이전의 세계에서 피어 올린 작은 호기심의 열망이 과학의 세계로 다시 가상의 세계를 달리는 동안 베르나르는 한데 뭉치고 버무렸다. 수직, 수평의 세계, 시공간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곳에 동시에 분출하는 새로운 존재의 중심. 평행세계에 대한 체계적이고 진보한 생각의 창출이다.

<신>은 천사들의 제국에서 상승한 미카엘 팽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모험 가득한 이야기다. 신후보생으로 아에덴(Aeden)에 오른 미카엘과 다른 143명의 후보들과 겨루는 인간 사회의 운명적 만남은 여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상상력이 뿜어내는 아우라다. 현재 지구 위에서 펼쳐지는 모든 역사의 기록들이 순환되고 영향을 받아 나가는 모습을 그린 그의 내러티브는 치밀한 기록의 재해석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이 책을 이어가는 스토리텔링의 산실이며 그의 방대한 지식의 분출에 놀랍기만 하다. 마치 마인드맵의 얼개를 짜 나가듯 넓혀 가는 경우의 가지가 모두 망라된다. 그리스신화를 중심으로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토속종교에 이르기까지 신화적 존재는 거의 터치되고 드러난다. 베르나르가 더욱 천재적인 작가라는 표상은 이러한 종교적 패러다임을 통해 하나의 조합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조합의 중심은 인간은 순회하고 내세는 존재하며 선과 악으로 나뉘는 본성의 접근에 부합한다는 윤회설에 가 닿는다.

결국 <신>은 신을 통해 인간을 보는 이야기다. 진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진실의 순간은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모든 것은 순간처럼 돌고 도는 수레바퀴라는 의미다. 베르나르가 3부작으로 총6권에 걸친 방대한 서사구조를 이어가기 위해 스토리의 지지대를 점검하고 흐트러진 알고리즘을 맞추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곳곳에 보인다. 결과는 완벽할 수 없다. 완벽하지 않기에 베르나르가 독자에게 던지는 화두 또한 그곳에 있는지 모른다. 다소 황당무계한 결말에 이르는 베르나르의 종착역이 그의 끝없이 다다랐을 고민을 감내하는 구실이 되었으니 말이다. 기지와 재치가 넘치는 그의 핵심적 가치는 편견의 무덤 속에서 피어난 투명한 결정체다.

아울러 <신>에 등장하는 신들의 배경을 기록된 사실과 가미되고 조정된 의견을 함께 고민해 보는 것도 이 책을 보는 묘미다. 신들의 전쟁을 통해 제우스와 그의 형제들이 세상을 나누고 구획하는 배경,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강박적인 결핍증상, 하데스의 악마적 본질은 인간이 빚은 허상 등은 이전의 지식체계를 흔들어주는 고무적인 장치들이다. 또한 베르나르는 인간 심리에 관한 본질적 접근을 통해 인간을 추동하는 가치들이 무엇인지를 미카엘과 에드몽, 라울 등을 통해 현란하고 다채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베르나르는 이를 위해 신후보생으로 명명된 인물들을 역사에 존재했던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 정치인, 아나키스트, 배우 등으로 채워 보완해 나간다. 이렇게 집결된 그들의 생각은 하나의 빛이 되고 그 빛은 더 높은 차원의 세계를 드려다 보는 프리즘으로 작용하는 결과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에 갈마드는 생각의 총아들은 인간이 밝힌 결과물과도 부합한다. 다층적인 심리세계를 기반으로 평행세계를 넘나드는 기반을 제공한 “초끈이론“에 이르기까지 건강하고 다양한 생각들로 붐빈다. 베르나르는 미카엘을 통해 끊임없이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란 의문을 지속적으로 던지며 현자의 돌을 찾아 나서는 연금술사처럼 비존재를 존재로 바꾼다. 마치 과거에 일어난 시간적 배경을 밝히는 학문인 크로노스(연대학)를 대하는 기분이다. 시간의 학문을 이용해 자아를 찾는 또 다른 여정의 산물인 셈이다.

코스모스로 유명한 유작 <에필로그>에서 칼 세이건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죽는 순간 다시 살아나 나의 일부를 기억하고 생각하고 느끼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이라 믿고 싶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이 강렬한 만큼 나는 그것이 헛된 바람이라는 것 또한 잘 알고 있다. (…) 사후 세계가 있다면 내가 언제 죽음을 맞이하든(…)나의 호기심과 갈망은 충족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이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크고 깊은 사랑과 선으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증거도 없이 예쁘게 포장된 사후 세계의 이야기로 자신을 속일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약자 편에서 죽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생이 제공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회에 매일 감사하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칼 세이건의 생의 도정道程과 베르나르의 그것과 사뭇 일맥상통함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미지의 세계를 알아 가고 깨달음으로서 궁극에는 우리 자신을 알아간다는 필연의 작업이 아니겠는가.

 

오늘의 책을 리부한 '동스파파'님은?
책 속에서 길을 찾고자 끝없이 시작된 호모부커스를 꿈꾸는 몽상가입니다. 현실은 냉정하고 열정은 침잠하였으나 마음만은 뜨겁게 살고자 오늘을 사는, 어느새 늘어나는 뱃살을 옵션으로 장착한 아주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책으로 달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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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시절> -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조지 오웰, <바머시절>, 열린책들, 2010

 


1920년대 중반, 영국의 식민지 버마. 조지오웰의 <버마시절>은 영국에 기생해 권력을 휘두르고,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해 새로운 음모를 꾸미는 하급 치안 판사 ‘우 포 킨’으로부터  시작된다. 개발을 통한 문명화의 논리로 영국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원주민 의사 베라스와미, 이를 부인하며 영국 제국주의의 본질은 사실상 세계 평화를 위한 희생이 아닌 강탈을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플로리. 이 둘 모두는 우 포 킨이 식민지 권력의 핵심인 유럽인 클럽에 들어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에서 희생의 제물로 선택된 인물이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오 포 킨의 사악한 계획은 성공으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사이를 채우고 있는 아이러니, 피지배자의 희생의 제물이 돼버린 지배자의 예정된 파멸. 게임의 승패는 결정났지만, 승자와 패자 그 누구도 해피엔딩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결말.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 그리고 권력을 향한 맹목이 낳은 비극.

<버마시절>은 조지 오웰이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입장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식민주의자들이 문명화라는 논리로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의 불합리함을 여실히 보여주며, 이와 함께 이러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면서도 단호하게 이를 끊어내거나 맞서 투쟁하지 못하는 나약한 한 인간(플로리)의 내면적 고뇌와 절망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한 인간과 제국주의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이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자살이라는 결말로 이어진다. 플로리의 ‘버마시절’은 끝이 났고, <버마시절>의 이야기 또한 끝이 났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그간 인류의 역사에 수많은 비극을 새겨 넣은 인종적 편협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문명이라는 독단적 입장으로 문명화되지 않은 것들의 가치가 매겨지고 있으니. 게다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인간의 욕망은 부와 권력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만족을 모르지 않던가.

결국 모든 비극은 자기 본위 대로 매겨진 우월의 가치가, 차이의 단순함을 지우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것을 채우고 지키기 위해 버려진 것들이 타인의 비극, 혹은 인류의 비극을 지속시킨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부와 권력을 얻고 승리감에 도취된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가 얻기 위해 버린 것이 정작 '인간다움'일지 모르며, 그러므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결말 또한 비극이라는 것을.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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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 뿌리를 잃어버린 자의 삶의 역사

알렉스 헤일리, <뿌리>, 열린책들, 2009

1750년 이른 봄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200년이 넘는 시간을 밟아 글로 발자국을 남긴 이 책은 지금은 감비아로 알려진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한 아프리카인으로 삶을 만들어 나가며 나름대로 치열하게 희로애락을 쌓아나가던 한 소년 '쿤타킨테'의 생으로 시작된다. 

지금은 승자가 된 민족과 문명들의 일반적인 시각으로 쉽게 평가한다면, 원시적이고 무질서하며 비조직적이고 빈곤한 씨족 사회 삶의 모습이겠지만, 각각의 삶의 주체들이 느끼고 누리는 행복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 누구도 그들의 삶을 제 멋대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삶에 대한 선택권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하나의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었던 무위(無爲)의 삶에서 노예사냥이라는 갑작스러운 재앙의 희생자로 전락하면서 시작되는 그의 뱃길은 너무나 비참하다.

먼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아프리카 흑인’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노예사냥의 피해자를 보기 것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을 말해주듯, 흑인이 흑인을 포획해서 노예로 파는 사실에 대해 적잖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단순히 '흑인' 대 '백인'의 대결이었다면 분명 다른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어릴 적의 반공교육의 흔적으로 '인해전술'이라는 공포에 간접적인 경험이 있는 나에게도, 그렇게 많은 흑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야 했던 서글픈 사실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의식이 가지는 힘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권력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게 각각의 개인으로서, 아무리 커도 씨족 사회에서의 공동체적 삶이 전부였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사나운 짐승 취급을 받거나 다루기 까다로운 짐짝 취급을 받으며, 상자에 갇혀 대서양을 건넌다. 시시각각 죽음과 같은 공포에 직면하면서도 '사람'이기를, 하나의 '삶'이기를 바라는 생명을 건 몸부림과 언어로 정제되지 못한 외침은 결국 폭력에 갇혀 버리는 듯 했다. 

'사람 대우'는 커녕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뼈 속 깊은 거부감은 군대에서의 내적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족과 주고 받은 사랑, 친구들과 주고 받은 우정, 이웃들과 주고 받은 애정을 통해,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인 것을 배워나가고 있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분명 자신이 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거나 한 사람으로 취급 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불쾌함이고, 두려움이며, 외로움이고, 아픔이다. 그들은 그렇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것이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 20장 17절)

출애굽기의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에서는 이웃의 소유물을 탐내지 말라고 되어 있다. 그 소유물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소유물은 '집'이다. 그 다음이 '아내', '남종', '여종', '소' 등이다. 이처럼 여자 중에서도 남자에게 가장 가까운 '아내' 마저 하나의 동등한 인격이라기 보다는 '남자'에게 귀속된 소유물로 여겨졌는데, 노예들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마태 14장 21절)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마태 15장 38절)

예수님의 시대에도 여자와 어린이는 사람 수에 넣지 않았다. 과부와 고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그들이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고 열악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여자에게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여자에게 영혼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예들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당시 서구인들의 문화적인 인식을은 '그것밖에 안 되는 게 현실이다.'라고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비참한 역사적 사실이다. 동양 문화가 동물, 식물, 심지어는 산과 강과 하늘까지도 영혼을 가진 하나의 '존재'로 대우한 것이 과연 어리석고 우매하기 때문일까? 왜 이제야 서양 문화가 동물 학대를 반대하고, 자연 파괴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가? 그들의 '힘있는 무지'는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용서되는 것인가?

그렇게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며, 발이 잘리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던 쿤타킨테와 그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사람'이기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 쿤타킨테는 벨을 아내로 맞이하고, 딸 키지를 키우며, 키지는 치킨 조지를 낳고 조지는 마틸다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톰을 낳고, 톰은 아이린을 아내로 맞이하여 유라이어를 낳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삶을 일구어 나갔다. 그들의 삶은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삶이었고, 차별받는 자들의 삶이었으며, 권력은 커녕 권리가 전혀 없는 자들의 삶이었다. 또한 교육받지 못한 자들의 삶이었고, 매번 맨손으로 일어서야 하는 자들의 삶이었으며, 그렇게 뿌리가 송두리채 뽑힌 자들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살아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뿌리를 찾았다. 뿌리를 잃고 다시 뿌리를 찾아내기까지 그들이 살아내었던 삶의 고통과 고난. 그것에 대한 이유와 의미는 차후에 만들어질 뿐이다. 그래도 그들은 그 속으로 던져졌으며, 그들은 살아내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johann2'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고민하다가 결국은 답을 찾지 못하고 살아보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살아보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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