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에 해당되는 글 14건

  1. 2010.11.19 <코끼리를 쏘다> - 조지 오웰, 그 이름으로 느끼는 글맛
  2. 2010.08.27 <컬러 오브 워터> - 흑과 백, 그 어느 것도 아닌
  3. 2009.08.07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의 사랑 - <그 청년 바보의사> (6)
  4. 2009.07.29 날개를 펴고 희망을 날다 - <그건 사랑이었네> (6)

<코끼리를 쏘다> - 조지 오웰, 그 이름으로 느끼는 글맛

 

조지 오웰, <코끼리를 쏘다>, 실천문학사, 2003

 


“오웰의 문학을 논할 때 우리는 그의 삶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작품을 생각할 수 없고, 작품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삶을 생각할 수 없다.” -리처드 리즈(문예비평가)

이처럼 적확한 표현이 또 있을까. 책 뒷표지에 적혀 있는 이 글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문다. 흔히 조지 오웰이라는 작가를 수식하기 위해 등장하는 작품은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동물농장>과 <1984>. 오웰의 후기 작품에 속하는 이 소설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그의 삶의 궤적이 묻어나오는 다른 작품들이 소환되곤 한다.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버마시절>, <위건부두로 가는 길>, <카탈로니아 찬가>, 그리고 그의 산문집 <코끼리를 쏘다>, <나는 왜 쓰는가>까지.

시대의 목격자인 동시에 참여자이기도 했던 그의 삶이 오롯이 담긴 이 책들 속에서 우리는 1920년대 유럽의 제국주의, 30년대 경제대공황과 전체주의라는 역사의 큰 흐름을 만나게 된다. 그 흐름에 휩쓸려 역사의 변두리로 내몰린 개인들의 삶을 대면하게 된다. 부랑자, 식민지 피지배자들, 실업자, 참전 의용군 등, 이념과 사상에 묻혀 지워지기 일쑤인 그들의 숨소리가 시대의 공기처럼 전해져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중간의 어디쯤에서 역사의 큰 흐름과 삶의 세부를 오고가는 ‘비판적 개인’ 혹은 ‘실천적 지성인’으로서의 조지 오웰이 느껴진다.

그리고 바로 그때, 조지 오웰의 작품이 아닌 작가 ‘조지 오웰’이 읽고 싶어진다.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싶어진다. 소설과 르포르타주 이외에, 한국어 텍스트로 읽을 수 있는 그의 또 다른 글을 만날 수 있는 <코끼리를 쏘다>를 읽기 시작한다.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1부는 오웰이 제국주의 식민지 경찰 시절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글들로 실제 그의 ‘버마시절’을 느끼게 하고, 2부는 오웰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정치적 견해를 밝히고 있는 글들로 삶과 작품이 겹쳐져 있는 작가 ‘조지 오웰’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3부는 파리와 런던의 뒷골목에서 최하층 사람들과 생활했던 경험을 담은 글들로 이 또한 그의 작품인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과 이어진다. 그리고 4부는 일상에 스며 있는 정치성에 관한 견해를, 마지막으로 5부는 유럽 문학에 대한 단상들을 피력한 에세이들이 담겨 있다.

그렇게 그의 작품을 읽다 삶으로 눈을 돌리게 된 우리는 그 삶의 일부 혹은 전부일 수 있는 작품들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곤 또다시 삶으로 향하게 되는데, 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삶과 작품의 세계가 교차하는 ‘조지 오웰’을 읽으며 ‘글 속의 세상’과 그 ‘세상 속에 있는 글’ 사이를 오고가는 우리에 대한 발견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조지 오웰, 그 이름으로 우리가 느끼고 이해하게 되는 것은, 세상과 사람 사이를 잇는 견고한 고리, 즉 세상을 스스로 등지거나 혹은 그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이끌어 ‘사람이 세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냉혹한 현실은 생생한 묘사로, 날카로운 비판과 자기 성찰은 위트와 유머로 담은 그의 글이 ‘맛’을 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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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 오브 워터> - 흑과 백, 그 어느 것도 아닌


제임스 맥브라이드, <컬러 오브 워터>, 사피엔스21, 2010  


왜 어릴 적에는 진지하게 의심해보지 않았을까.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면 항상 집어 들었던 그 ‘살색’에 대해. 그 색이 실은 당장에라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내 살색’과 같지 않았다는 것을. 하기야 지금도 나는 ‘내 살색’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게 또 세상에 알려져 있는 어떤 색과도 일치하지 않으며, 인간의 피와 살에 붙여진 몇 가지의 이름들(황, 흑, 백인종)을 더 고려해본다면, 단 하나의 색으로 인간의 피부를 표현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불가능하고 부적합한 것인지는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현재 우리나라의 상황이라는 게, ‘한민족’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다양한 민족과 문화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그 ‘살색’의 무의미를 굳이 강조해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무의미가 의미로 변하고, 그 터무니없는 의미의 연쇄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분명 차별과 억압의 기제로 작용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이 책, 《컬러 오브 워터》는 그것의 구체적인 역사를 한 가족의 삶을 중심으로 보여주고 있다. 

작가이자 재즈 뮤지션인 저자 제임스 맥브라이드는 1957년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폴란드 출신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다. 《컬러 오브 워터》는 그가 자신의 어머니 루스 맥브라이드에 대해 쓴 에세이로, ‘흑인 아들이 백인 어머니에게 바치는 글’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말하자면, 같은 피와 살을 나눠가진 어머니와 아들 사이를 흑과 백으로 인간을 나누는 인종주의가 지나갔을 때, 그 자리에 무엇이 어떻게 남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무의미가 의미로 변하고, 차이가 차별로 이어진 세상, 즉 “피부색을 즉각적인 정치적 진술로 간주하는 세상” (288쪽)에 그들 가족의 이야기가 남았다.

책은 두 명의 화자인 어머니 루스와 아들 제임스의 이야기를 한 장(章)씩 교차해 가며 들려준다. 그 속에 나치스의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 버지니아 서퍽에서 보냈던 루스의 어린 시절과 그 시절의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다. 그리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친구들에게는 괴롭힘을, 억압적인 태도의 아버지로부터는 성적 학대와 노동 착취를 당했던 과거를 피해, 뉴욕에서 시작한 새로운 삶에 아들 제임스의 이야기가 겹쳐진다. 뉴욕 할렘에서 흑인과 결혼해 흑백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던 날들에,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며 피부색에 따른 정체성을 고민하는 아들 제임스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는 어둡고 침울하지 않다. 온갖 차별과 편견에 맞서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온 루스와 그녀의 교육으로 바르게 성장한 아이들이 있고, 무엇보다 힘겨운 삶의 무게까지도 덜어낼 수 있는 그들의 유머감각이 이 책을 읽는 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루스가 “이 모든 시간을 헤쳐 오면서도 자기연민 따위를 우습게 여”기고, “가족을 포함한 일차적 공동체, 나아가 전체 사회로부터 차별과 냉대를 경험한 사람이 가질 법한 집단 일반을 향한 분노, 그리고 그것의 이면을 이루는 자신에 대한 방어적 태도 같은, 흔히 예상할 수 있는 감정의 궤도에서 훌훌 벗어나 있”어, 그들의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가 유쾌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전히 “피부색을 즉각적인 정치적 진술로 간주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흑과 백으로 사람을 가르는 피부색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가치 있는 존재라는 당연하고도 중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이 책의 유쾌함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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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깊은 곳으로부터의 사랑 - <그 청년 바보의사>

 

안수현, <그 청년 바보의사>, 아름다운 사람들, 2009

 

희한한 세상입니다. 먹을 것도, 몸에 좋은 것도 많아졌는데, 아픈 사람을 좀처럼 줄지 않습니다. 병에 걸리면 이만저만 손해가 아닙니다. 병을 다스리려면 돈도 들고, 시간도 듭니다. 힘이 없어 소중한 시간을 망쳐버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가장 큰 손해입니다. 오늘은 좋은 의사 선생님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그 청년 바보의사>를 쓴 안수현 선생이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만 33세의 젊은 의사입니다. 그는 불치병 환자를 고치거나 의학계에서 이름을 날린 인물은 아닙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그를 ‘참 의사’라고 생각합니다. 환자를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하고, 치료하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의사이자 음악 칼럼니스트, 라디오 게스트 등으로도 활동했던 안수현 선생이 쓴 책입니다. 그가 독실한 기독교인인 탓에 책 속에는 신앙인으로서의 삶과 고민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사람을 섬기는 낮은 자세,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노력,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환자들을 바라보며 하는 기도, 바쁜 일상 속에서 치료와 신앙생활 모두 놓치지 않으려는 열정 등 그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또 위기의 순간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곳곳에 녹아 있어 기독교인들이라면 그의 삶 속에서 많은 감동과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책 읽는 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이 책은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동시에 사람에게도 향하고 있고, 그의 글은 사람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수현 선생은 자신을 낮추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꿈 꿔보는 의사에, 교회에서는 리더이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글쟁이이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의사로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면서 느낀 인간의 무기력함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군의관이 되어 혹독한 추위 속에서 훈련을 할 때도,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한계를 가진 인간인지를 고백합니다.

안수현 선생은 끊임없이 베풉니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내’가 작은 것 하나 베풀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가 가장 좋아했던 선물은 책과 음반이었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실의에 빠진 환자들의 병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가만히 들어가 선물을 두고 나옵니다. 그 후 환자가 자신이 준 책과 음반을 보고 들으며 위로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는 아이처럼 좋아합니다. 선물은 비단 물질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실수로 고가의 약을 깬 간호사를 위해 전 병동을 돌아다니며 약을 구하고, 늦은 시간 때문에 성경 공부를 끝까지 못하는 후배를 위해 먼 곳까지 직접 태워다 줍니다.

“안 자요. 생각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아낌없이 주는 것은 비단 물질과 시간만이 아닙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늦은 밤 처소로 돌아오면 그는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아픈 이들이 낫게 해주소서. 그들이 주님을 만나게 해주소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가 되게 해주소서. 그 마음은 병원 밖으로까지 뻗칩니다. 그는 퇴원한 환자들에게 전화를 하고, 편지를 함으로써 끝까지 사랑을 전하고자 합니다. 2000년 의사들에 파업에 나섰을 때 그는 병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규율이 엄격한 의사사회에서 그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애초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정당한 논리도 환자의 고통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게 그의 원칙이요, 하나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이런 그의 모습들로 인해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낯설음을 느꼈던 이들도 결국 그를 신뢰하게 됩니다. 

아쉬운 것은 (총 9장 중) 8장부터는 안수현 선생의 글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05년 12월 18일, 온몸에 출혈반점과 주사를 찌른 자국들로 가득한 그는 자신이 근무했던 고대병원으로 후송됩니다. 책과 음반을 선물하기 좋아하고, 늘 웃으며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었던 이가 눈 뜨고 보기 힘든 모습으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를 본 이들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앰뷸런스 안에서 의식을 잃을까 말을 거는 이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안 자요. 생각하고 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2006년 1월 5일 밤 10시 30분,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전히 33세입니다.

9장 ‘흔적들’은 에필로그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이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사는지 짤막하게 소개돼 있습니다. 안수현 선생이 멀리 데려다 줬던 이는 다른 사람들을 집까지 태워다 주며, 그에게 책과 음반을 받았던 이들은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고 있습니다. 또 그가 열심히 전도했으나 거절했던 수간호사는 지금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고 합니다. 그의 몸은 이곳에 없으나, 그의 흔적은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안수현 선생은 많은 이름표를 달고 있었습니다. 의사, 청년, 바보, 기독교인, 스티그마(필명) 등. 하늘나라에 있는 그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할까요. 한참을 생각해 봐도 답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떤 이름으로 불려도 크게 상관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저 많은 이들이 그의 마음과 닮아진다면 말입니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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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펴고 희망을 날다 - <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 푸른숲, 2009

 

벼랑 끝 100미터 전.
하느님이 날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시나?
10미터 전.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두시겠지.
1미터 전. 더 나아갈 데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겠지?
벼랑 끝. 아니야. 하느님이 날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리가 없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너무나 잘 아실 테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벼랑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내셨다.
…….
그때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p 89)

여고 시절,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한비야에게 격려의 편지와 함께 보내주었던 글입니다. 날개. 평지를 걸을 때 날개는 별 필요가 없습니다. 하늘 높이 날 때나 낭떠러지로 떨어질 때 필요한 것이지요. 우리에게 날개가 있을까요. 그녀는 자신에게 날개가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벼랑 끝에서 떨어지는 극한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깨달은 것이지요. 고난 끝에 날개를 찾은 그녀가 향한 곳은 어딜까요. 그녀는 어느 하늘을 날고자 힘찬 날갯짓을 했을까요.

우리에겐 높은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더 먼 곳, 더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풍경은 말 그대로 장관이겠지요. 장난감보다 작은 고층빌딩들, 일개미처럼 보이는 수많은 사람들. 하지만 한비야가 꿈꾸는 것은 남들 위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통해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날개를 통해 가장 멀리 날아가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려 합니다. “… 굵은 눈물방울이 뺨으로 뚝, 떨어졌다. 그 순간 가슴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면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가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어라..’”(p 141)

목표가 정해진 한비야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상처와 아픔이 있는 곳이라면 ‘지도 밖으로 행군하여’ 어디든 갑니다. 그런데 신의 응답을 받았다고 하여 망설임 없이 행동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수많은 아픔을 보면서 오히려 지치고 상처받지 않았을까요. 그런 그녀를 지탱해주는 것은 구체적인 삶 속에서 체험하는 ‘기적’입니다. 중국어를 배워 한 중국인 아줌마를 도와 ‘천사’라는 말을 들었고, 오지에서 수녀를 차에 태워주면서 스스로가 ‘신이 보낸 사람’이 됐습니다. 또 모든 팀원이 한 몸이 되어 수백 명의 지진 피해자들을 치료해줬을 때 느끼는 감동은 체험해보지 않고는 짐작할 수 없을 겁니다.

일상 속에서 만난 수많은 기적들은 그녀를 끊임없이 걷게 만듭니다. 한비야는 말합니다. “내 경험상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늦게라도 시작하는 편이 백배, 천배 낫다. 시도해보지 않는다면 성공할 확률은 0퍼센트다.”(p 95) 만약 그녀가 먼저 실패 가능성을 생각했다면 우리가 아는 ‘한비야’는 세상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녀가 미리 포기하지 않고 실천하기 때문에 지금의 그녀가 있다는 것을. 한비야의 책이 매력적인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녀는 오늘도 살아 숨 쉬며 또 한 페이지의 책을 쓰고 있습니다.

절망, 마침표, 그리고 희망

한비야는 ‘조증 환자’(躁症患者)로 오해받을 만큼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녀의 책을 읽으며 위안을 받고, 희망을 꿈꾸고자 합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그녀도 때로 지치고, 흔들리기도 한다는 것입이다. “그들 역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할뿐 의도적으로 나를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아니까. 하지만 요즘 같은 내 감정 상태로는 이런 사람들을 대하기가 버겁기 짝이 없다.”(p 74) “믿기 어렵겠지만 나도 누구 못지않게 비틀거린다. 사람들은 나를 어떤 선택 앞에서 흔들림 없이, 거침없이 나아가면서 자유를 한껏 누리는 사람이라고 여기곤 한다. 전혀 그렇지 않다.”(p 91)

우리는 한비야를 그저 열정적이고, 성공한 사람의 표본으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또 그녀에게 의지해 위안 받기 바라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치열한 고민과 노력 없이 달콤한 성공을 맛볼 수 있을까요? 그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그녀가 체험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가장 힘든 시기임을 봐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웃음뿐 아니라 눈물을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공감할 때 그 열정과 기쁨은 온전히 우리의 것이 될 것입니다. 또 세상을 향한 우리의 땀과 눈물은 그녀에게 또 다른 기적이 될 것입니다.

<그건, 사랑이었네>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책을 덮고 바라본 세상은 희망만 가득한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희망 없는 곳에서 희망은 가능할까요. 그 답을 찾고자 다시 한 번 책을 곱씹어봅니다. 그 때 그녀가 걸었던 길이 선명하게 들어옵니다. 전쟁과 기아, 질병 가득했던 곳들, 그녀가 몸담았던 곳 또한 희망이 가득한 공간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열정과 희생으로 ‘희망’이란 말을 선명하게 새겨놓았지요.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 발 딛을 곳이 없을 때 그렇습니다. 한비야는 ‘그건, 사랑이었네’라고 확언하면서 ‘그것’을 희망으로 가는 초석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녀 스스로가 절망의 마침표가 되어 희망으로 날아가고자 함이죠. 우리는 희망을 향해 비상하는 그녀의 날갯짓에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통해 희망을 바라보고 도약할 수 있습니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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