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4.11.20 《밤은 고요하리라》 - 아들아, 나는
  2. 2014.11.05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生》
  3. 2014.01.13 《자기 앞의 생》 - 사랑으로 살아요

《밤은 고요하리라》 - 아들아, 나는

 

 

로맹 가리 | 《밤은 고요하리라》 | 마음산책 | 2014

 

로맹가리의 삶은 보편적인 삶에 비춰 봤을 때 그 출발점부터 남달랐다. 그의 삶은 시작부터 이기심이 아닌 이타심에서 출발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어머니의 ‘해피엔드’가 되어야 했다. 부모 대부분이 양육 과정에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여 대리만족 하기를 원한다. 그 과정 중에 포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로맹가리는 스스로 어머니의 이상향이 되려고 노력했다. 어머니가 슬퍼할 때 그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행동(창문 밖의 높은 곳을 큰 눈망울로 응시했다)을 취했다. 그는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을 위로하고 감싸 안으려 했다. 배려의 마음이 자라나 열린 열매가 그의 작품이다.

 

첫 작품인 《유럽의 교육》부터 마지막 작품인 《연》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모두 이타심이라는 하나의 고리로 연결돼 있다. 그가 글쓰기에서 자아의 검열과 개입을 극도로 꺼려했던 이유도 바로 '이타심'이다.

 

1945년에 내 삶 가운데 하나가 끝났고 다른 삶이 시작되었네. 계속해서 또 다른 삶이, 매번 사랑할 때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자네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면 자네의 새 삶이 시작되는 것이고, 우리는 과거에 죽지 않네. 이것이 얼마나 지극한 사실인지 내겐 내 '자아'만으로 충분하지 않네. 이 결핍이 나를 소설가로 만들었고, 나는 다른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소설을 쓰지. (153~154쪽)

 

내가 소설을 시작하는 건 내가 있지 않은 곳으로 달려가기 위해서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러 가기 위해서고, 나를 떠나 다른 육체에 깃들기 위해서네. (221쪽)

 

그는 자기 작품을 자신의 소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밤은 고요하리라》에서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그의 글은 박애의 산물이다. 환한 대낮이 드러내는 모든 경계를 어둠으로 덮어서 경계를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밤처럼 그는 자신의 글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람과 자연을, 사람과 우주를 연결하는 열린 공간이기를 꿈꿨다.

 

그의 죽음의 열쇠를 지닌 《밤은 고요하리라》는 《새벽의 약속》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새벽의 약속》이 그의 어머니를 기리는 책이라면, 《밤은 고요하리라》는 그의 아들을 위한 작품이다. 로맹가리의 유년시절은 보편성의 기준으로는 불우했으나, 그가 느낀 자신의 삶은 언제나 어머니라는 빛으로 채워진 밝은 세상이었다. 태양빛이 식물을 길러내고 곡식과 열매를 익히는 과정처럼 그는 그 자신을 길러낸 빛이 어머니였다고, 그 안에서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 앞에서 위축된 열세 살 아들을 보면서, 그는 '박애'를 위한 변신을 하기에 아들을 위한 시간이 부족하단 사실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이유란 없어. 무엇보다 나한텐 너무 어린 아들이 하나 있네. 녀석이 나를 만나기엔, 내가 이 모든 것을 말하기엔 너무 어려. 그 녀석이 이해할 수 있을 때가 되면 나는 여기 없겠지. (…) 녀석이 이해할 수 있을 때 이 모든 걸 말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내가 없을 거란 말이네. (…) 그래서 이 자리에서 그 녀석에게 말하는 거네. 녀석이 나중에 읽을 테지. (11쪽)

 

《밤은 고요하리라》는 로맹가리의 인식의 경계선에 놓인 작품이다. 이 작품 이후로도 《솔로몬 왕의 고뇌》와 《연》이 출간되었지만, 이 작품을 기점으로 그는 아들의 성년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맹가리는 이 책을 그 누구도 아닌 아들이 읽기를 바랐을 것이다. 어머니가 인슐린 쇼크로 수없이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도 그는 어린 자식을 위해 하루에도 수십 차례 계단을 오르내리고, 그의 최후 마지막까지 참전 중인 아들에게 전해질 수년 분량의 편지를 썼다. 매일 일곱 시간씩 규칙적으로 글을 쓰던 그가 결전의 날을 앞두었을 때 구상중인 작품이 없었다는 그의 아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아들이 살아갈 삶에 무언가가 따스한 온기로 남기를 바랐다. 《밤은 고요하리라》는 로맹가리의 부정이 낳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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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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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 사랑으로 살아요

 

에밀 아자르 | 《자기 앞의 생》| 문학동네 | 2009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

   “하밀 할아버지, 왜 대답을 안 해주세요?

   “넌 아직 어려. 어릴 때는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게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있는 법이란다.

   “할아버지,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있어요?

   “그렇단다.”

   할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울음이 터져나왔다. (12-13쪽)

 

생(生)은 가차 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맨몸으로 세상에 던져진 누구라도 그 생의 조건에 관해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생은 종종 그 자체로 부당한 것이 되곤 한다. 나로선 어쩌지 못할 현실이 눈앞에 놓여있고 그 결과들 안에서 스스로의 책임을 찾지 못할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전히 자신이 감당해야 할 오롯한 몫으로 남았을 때,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이생과 불화하는 불행한 자기(自己)만을 토해낸다.

 

나는 불행했기 때문에 다른 곳, 아주 먼 곳, 그래서 나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가버리고 싶었다. (33쪽)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채운 인생들이 그렇다. ‘모모’가 우리라고 부르는 이들, 편견과 차별, 멸시의 대상으로, 그러므로 삶은 늘 낯선 것일 수밖에 없는 이방인으로서, 프랑스 멜빌에 모여 사는 가난한 유태인과 아랍인, 흑인들의 삶이 그렇다. “몸으로 벌어먹고 사는 여자들”과 그녀들의 비“위생”이 낳고 생의 밥벌이가 떨어뜨려 놓은 아이들의 나날이 또한 그렇다. (14쪽)

 

   “하밀 할아버지, 하밀 할아버지!”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174쪽)

 

그곳에 그들이 살고 있다고 알아주는 이 없다면, 그렇게 아프면 다가와 돌봐주고 기꺼이 따뜻한 품을 내어줄 누군가마저 없다면, 다만 주저앉아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은, 태어남이 곧 상처인 삶들이 있다. 사람으로, 사랑으로 그 상처를 어루만져야만 그제야 생의 비밀에 조금쯤 다가갈 수 있는 이들이, 그 안에서 숨겨져 있던 기쁨을 찾아 흉터처럼 몸에 새긴 채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이 있다.

 

그렇기에 《자기 앞의 생》에는 아무리 “복통과 발작을 일으”켜도 “끝내 엄마는 오지 않”는 모모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강제수용” 되었다 끝내 병들어 죽어간 로자 아줌마의 관계가, 그 사이를 잇는 사랑이, 그에게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일러준 하밀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그리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살 게 된 아이의 이야기가 부당한 생 대신 아름다운 결말로서 주어져 있다. (15, 307쪽)

 

  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했고 아직도 보고 싶다.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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