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2.10 『아내의 빈방』 -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2. 2013.10.02 [서점에서 만난 사람] 기억되지 못한 삶을 기억함으로 - 《제7일》의 소설가 위화
  3. 2010.04.06 [4월 1-2주 이슈와 추천도서]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의 빈방』 -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버거, 이브 버거 | 『아내의 빈방』 | 열화당 | 2014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오직 나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도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누군가 사라지면 그 자리는 영원히 빈 공간이 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 그곳에서라도 그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말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떤 이는 그런 시간을 오래도록 지속한다. 누구도 그 시간을 방해할 수 없다. 충분한 애도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당신은 사 주 전에 죽었지. 어젯밤 처음으로 당신이 돌아왔다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없어진 자리에 당신의 존재감이 돌아왔다고나 할까.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론도」 2번(작품번호 51)을 듣고 있던 중이었소. 구 분 남짓한 동안 당신은 그 ‘론도’였고, 그 ‘론도’가 당신이었지. 거기에는 당신의 밝음, 당신의 고집, 당신의 치켜 올라간 눈썹, 당신의 부드러움이 들어 있었다오. (10쪽)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존 버거의 글은 부드러운 햇살처럼 쏟아진다. 마치 그 햇살로 아내를 안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사십 년을 같이 산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분명 아내는 죽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곁에 존재한다.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을 때,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함께 있다. 만질 수 없는 형체로, 볼 수 없는 형상으로, 대답이 없는 메아리로.

당신을 유심히 보면, 길을 찾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섬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오. 모자를 쓰거나 코트를 입은 모습, 머리를 만지는 모습, 문을 여는 모습, 돌아서서 나가는 모습. 당신은 길을 찾는 사람이오. (13쪽)

우리는 종종 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 잊는다.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생생했던 세포는 긴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져 꺼내지 않는 옛 이불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당신을 기억하는 일이 새삼 힘들다. 무엇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예정된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존 버거는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뒤돌아보고 있소. 그리고 당신이 그런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당신은 시간을 벗어난 곳에,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으니 말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31쪽)

존 버거와 그의 아내 베벌리 버거가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며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아내의 물건에 담긴 아내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자 노력했을 존 버거. 점점 사라지는 아내를 향한 눈빛은 얼마나 애틋했을까. 화수분 같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잊힐 수 없다. 아들 이브 버거에게 전해졌을 사랑은 감히 그 크기를 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지속된다. 어쩌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나밖에 없다는 말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당신이 살고 있다면 말이다.

엄마가 어디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엄마의 몸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요. 잠시 후면 저희가 고른 돌멩이가 엄마 무덤 위에 놓이겠죠. 흙과 풀 사이에 놓은 텐데, 그러면 아름다울 거라고 믿고, 또 그러기를 바라요. (35쪽)

애도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랑하는 방법이 그렇듯이. 아내의 빈방은 존 버거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이 얇은 책에는 사랑이 전부 담기지 않는다. 부재 속에 존재하는 ‘당신’이라는 사랑을 살 뿐이다.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아내의 빈방』은 어떻게 읽게 되셨어요?

존 버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아내의 빈방』을 만났어요. 개인적으로 제게도 2014년은 죽음과 상실을 벗어날 수 없는 해였기에 더욱 마음이 닿았습니다.

● 오랫동안 서평을 써 온 선인장님에게 ‘서평’은 특정한 활동이 아니라 이미 일상의 일부 같아 보입니다. 서평은 처음에 어떤 계기로 쓰게 되셨어요?

그저 독후감으로 시작된 메모였습니다. 분명 읽었지만 모든 책을 소장할 수 없기에 나중에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책에 대한 애정의 작은 표현이랄까요. 정작 지금은 좋은 책에 대해 쓰지 못하고 있네요.

● 평소 한국문학을 즐겨 읽으시죠. 『아내의 빈방』과 함께 읽으면 좋을 한국문학 작품도 추천해주시겠어요?

같은 주제라 할 수 없지만 이런 책들이 떠오릅니다. 김선우의 『물의 연인들』, 한강의 『검은 사슴』, 윤대녕의 『누가 걸어간다』, 서영은의 『꽃들은 어디로 갔나』, 박범신의 『외등』이요.

●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잡았는데 감기 때문에 쉽지 않네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선인장'님은?

그저 폭넓은 책읽기를 꿈꾸며 책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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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기억되지 못한 삶을 기억함으로 - 《제7일》의 소설가 위화

 

취재·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빈자와 부자, 사람과 삶이 둘로 쩍 갈라져 있다. 그 사이를 자본의 칼이 날카롭게 지나간다. 날에 베이고 피 흘리는 건 안 됐지만 빈자들의 몫. 먹고 살겠다 아등바등 거리던 몸부림의 끝에 고독해서 서글퍼진 죽음들이 남았다. 따뜻한 피 돌고 비릿한 땀냄새 그득한 이 생의 흔적마저 애도해줄 이 없는 이들이 죽음 이후에도 안식에 이르지 못한 채 희뿌연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 창세기

 

그렇게 이승과 저승 사이에 있는 《제7일》에 모여들었다. 그렇게 위화는 죽음 이후의 시간에 다시금 삶을, 현실을 들여다 놓았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깨지고 망가져 너덜거린 채로 죽음으로 내몰린, 말해지지 않고 기억되지 않으나 결코 망각해선 안 되는 인생사들을 움켜쥐고. 고요하고 적막한 사후에야 비로소 기억을 곱씹고 추억을 되새겨 삶을 정리할 수 있게 된 이들로부터 그와 다르지 않은 현실에서 그와 다르게 않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로, 7일의 시공을 전하기 위해 지금-여기에 그가.

 

 

 

항상 현실과 밀착된 이야기를 써오셨는데요. 이번 소설은 사후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사후세계가 배경이긴 하지만 이야기 자체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현실의 시점에서 썼다면 한 각도나 한 단면만을 다루게 되었을 텐데, 사망 이후의 시점을 선택해 사회 전체를 보다 객관적이고 다채롭게 그리고자 했습니다.”

 

흔히 죽음 이후에는 평등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데요. 《제7일》은 사후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빈자와 부자, 그 불평등한 처지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죽은 후에 찾은 화장터에서 그 모습이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고요.

 

   대기실 오른쪽에는 쇠틀에 고정된 플라스틱 의자가 줄줄이 놓여있고, 왼쪽에는 푹신한 소파가 둥글게 몇 겹의 원을 이루며 놓여 있었다. 소파 구역의 중앙 탁자에는 플라스틱 꽃까지 꽂혀 있었다. 플라스틱 의자에는 화장을 기다리는 대기자가 무척 많았지만 소파 쪽에는 다섯 명뿐이었다. 그들은 전부 성공한 명사들처럼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았고, 플라스틱 의자 쪽 사람들은 하나같이 옷깃을 여민 채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귀빈 구역의 화제는 수의와 유골함이었다. 그들이 입고 있는 것은 모두 최고급 명주 수의로, 손으로 직접 수를 놓은 화려한 무늬가 눈에 띄었다. 그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수의의 가격을 말했는데, 여섯 명 모두 2만 위안이 넘었다. (…) 이어서 그들은 자신의 유골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모두 장미목 재질에 정교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으면 6만 위안이 넘는다고 했다.
   우리 쪽에서도 수의와 유골함에 관해 이야기가 오갔다.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인조 견사에 천연 면사가 섞인 1천 위안 이하의 수의를 입고 있었다. 유골함은 측백나무나 잡목 재질에 조각은 없었고 가장 비싼 게 8백 위안, 가장 싼 게 2백 위안이었다. (17-20쪽)

 

“현재 중국에는 경제 발전의 폐해인 불평등 문제가 불거지고 있고, 그 점을 소설 속에서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제7일》에선 화장터에서 화장된 후 유골함에 안치되는 것도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수의와 유골함, 묘지 등을 마련할 만한 경제적 여력이 있고, 죽은 이를 애도해줄 누군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죽고 나서 ‘안식의 땅’으로 가지 못한 사람들은 현실세계에서 잊힌 고독한 사람들입니다. 가족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생사를 알지 못하니, 스스로가 직접 자신을 애도할 수밖에 없는 이들이고요.”

 

   걸음을 옮기려다가 뭔가 잊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어 흩날리는 눈송이 속에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장(喪章)이 떠올랐다. 나는 외톨이라서 애도해줄 사람이 없으니 스스로 애도하는 수밖에.
   다시 셋집으로 돌아가 옷장에서 검은 천을 찾았다. 한참을 뒤졌지만 검은 천은 보이지 않고, 대신 검은 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탓에 검은색에 희끄무레한 색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소매 일부를 잘라 하얀 잠옷의 왼쪽 소매에 끼웠다. 스스로 애도하는 모양새라 부족한 감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이미 만족스러웠다. (16쪽)

 

 

소설 속 모든 이야기는 화자인 ‘양페이’를 통해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는 이승에서의 자신의 삶뿐 아니라 사후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을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제7일》의 서사가 그를 통해 진행되는 만큼, 이 인물의 성격이나 태도 등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것 같습니다.

 

“‘양페이’가 차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건 그가 이미 죽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배경이 사후세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 속 상황들을 더욱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장치이고요.”

 

   앞으로 걷고 또 걸어 시청 앞 광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2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강제 폭력 철거에 항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현수막도 걸지 않고 구호도 외치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불행을 이야기할 뿐이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가면서 나는 그들이 서로 다른 강제 철거의 피해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나는 그 폐허를 바라보았다. 콘크리트 사이로 옷가지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옆으로 지게차 두 대와 트럭 두 대, 경찰차 한 대가 정차해 있고 따뜻한 차 안에 경찰 네 명이 앉아 있었다.

   빨간색 오리털 점퍼를 입은 여자아이가 부러진 철근이 양옆으로 구불구불 튀어나온 시멘트 판에 혼자 앉아 있었다. (…) 아침에 집을 나서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 수업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집이 사라진 것이다. 집도 부모도 보이지 않아, 폐허에 앉은 채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칼바람에 덜덜 떨면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첫째 날’, 30, 34쪽)

 

(…)
“저쪽에서 우리 딸을 보신 적이 있나요?”

 

(…)
“두 분 딸을 보았습니다. 정샤오민이죠.”

 

(…)
나는 그들이 말하는 딸이 누구인지 알았다. 빨간 오리털 점퍼 차림으로 콘크리트 폐허 위에 앉아, 그 차가운 바람 속에서 숙제를 하며 부모를 기다리던 여자아이였던 것이다. (…) 아이는 부모가 바로 밑 폐허 속에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
“샤오민은 두 분 위에 앉아 있었어요.” (‘다섯째 날’, 204, 207, 209쪽)

 

그가 전해준 저마다의 사연에 화가 나고 눈물도 나고 미소가 번지기도 합니다.

 

“소설로 옮기면서 재구성된 면이 있지만, 실제로 모두 중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샤오민’의 부모는 야근 후 새벽에 돌아와 아이를 학교에 보낸 후 잠들어 있었습니다. 강제 철거가 이미 진행된 후에야 잠에서 깨어나고요. 그래서 그들이 무너지는 건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채 폐허 속에 묻히게 된 것이고요. 하지만 이들의 죽음은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권력에 의해 “그들 부부가 업무 중에 함께 순직했다는 이야기로” 엄폐되었으니까요. 소설 안에는 이 같이 사건의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된 뉴스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작가로서 현실을 직시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세대 작가들이 다들 그런 것처럼 저 또한 제 작품을 통해 실제 현실을 일관되게 다루어왔는데요. 요즘은 이 일에 다소 어려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실제 중국사회가 소설보다 더 황당한 경우가 많거든요. 말하자면, 지금 중국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 ‘이거 그냥 현실 이야기지.’ 정도로 받아들인다는 거죠. 하지만 이 소설을 미래의 독자들이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비로소 ‘우리가 정말 황당한 시대를 살았었구나’ 생각할 수 있겠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이 중국 현실을 따라갈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보다 황당한 중국사회, 이 현실을 제대로 알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할 텐데요. 언론의 자유, 실제 중국 상황은 어떤가요?

 

“중국 정부는 매체와 문학에 대한 통제와 검열을 계속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방식이 조금 달라졌죠. 소설의 경우, 독자들이 직접 찾아서 읽어야 하기 때문에 TV나 신문 등의 다른 매체에 비해 영향력이 크지 않다고 봅니다. 그래서 현재 문학은 출판사 사장이 그 소설을 출간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고요. 반면에 매체에 대한 통제는 여전히 강한 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매체를 통해, 놀고 싶어서 문학을 시작하게 됐다고 밝히셨습니다.

 

“일단 ‘논다’는 것은 자유와 관계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 외의 일은 하지 않는 것이죠. 지금도 물론 그 생각은 유효하고요.”

 

놀려고 문학을 한다고는 하셨지만 창작의 고통이 있을 것 같은데요. 작품 쓰시다가 스트레스가 생길 때 어떻게 해소하시는지요.

 

“처음에 글쓰기를 시작했을 땐 굉장히 스트레스가 심했습니다. 무엇을 쓴다는 것 자체가 힘든 일이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기도 했고, 점점 더 글 쓰는 게 재미있어졌습니다. 가장 좋은 건 내가 무엇을 쓰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몰입해서 글을 쓰는 건데, 지금은 거의 내 존재를 잊을 만큼 몰두해서 쓰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한참 글을 쓸 때는 뇌가 각성 상태여서 잠을 잘 못 잡니다. 반면, 글쓰기가 잘 안 될 때는 잠이 솔솔 쏟아지고요. 필요할 때 자고 필요 없을 때 안 자야 하는데 그게 바뀌어있어 고민입니다.(웃음)”

 

 

작가로서 앞으로의 목표가 있으실 텐데요.

 

“단순합니다. 내가 계속해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을 써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죠.”

 

 

위화(余華)

 

1960년 중국 저장성에서 태어났다. 1983년 단편소설 〈첫 번째 기숙사〉를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세상사는 연기와 같다〉 등 실험성 강한 중단편 소설을 잇달아 내놓으며 중국 제3세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첫 장편소설 《가랑비 속의 외침》으로 새로운 글쓰기를 선보인 위화는 두 번째 장편소설 《인생》을 통해 작가로서 확실한 기반을 다졌다. 《인생》은 장이머우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으로 '위화 현상'을 일으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1996년에 출간한 장편소설 《허삼관 매혈기》로 세계 문단의 극찬을 받으며 명실상부한 중국 대표 작가로 자리를 굳혔다.

 

1998년 이탈리아 그린차네 카보우르 문학상, 2002년 중국 작가 최초로 제임스 조이스 기금, 2004년 프랑스 문학예술 훈장 및 미국 반스 앤 노블의 신인작가상, 2005년 중화도서 공로상, 2008년 프랑스 꾸리에 엥테르나시오날 해외 도서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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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2주 이슈와 추천도서] 죽음에서 삶으로 돌아오는 길

안녕하세요. 반디앤루니스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현재의 시간을 얻어 새로운 생(生)으로 태어나고, 다른 누군가는 잠시 빌려온 시간을 반납하듯 영원한 과거로 자리를 옮겨가고 있습니다. 태어나 늙고 병들어 죽어가는 인간의 보편적 역사가, 그렇게 우리의 곁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막 태어난 어린 생의 눈에는 비치지 않는 생사(生死)에 얽힌 순환의 구조가 오늘은 또 오늘만큼 늙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죽음은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갑작스럽고 반갑지 않은 사건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제까지도 들썩이던 내 피붙이의 가슴이 더 이상 세상의 공기를 안으로 들이지 않을 때, 그 단절의 명백한 증거가 온기를 잃고 싸늘하게 식은 그의 육체로 남을 때, 어제를 기억하며 사는 우리 모두에게는 어쩔 수 없는 상실의 고통과 슬픔이 여지없이 찾아오고 맙니다. 그러므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슬퍼질 수 있는 우리는 지나간 어제를 부여잡은 채 온전한 오늘을 미루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는 고(故) 기형도 시인이 말하듯, “이 거리 끝”, 그 인생의 마지막에 있는 “커다란 전당포” “주인의 얼굴”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자각되는 살아있는 자의 무능력, 즉 죽음 앞에 선 인간은 떨어지고 있는 가로수 잎들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놓일 수 있는 접속사는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될 것입니다. “가는 비……”와 같은 죽음은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하다는 사실을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는 비 온다」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 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나는 안다, 가는 비…… 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서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 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04, 50-51쪽- 

그런데 요사이 우리 앞에 나타난 갑작스러운 죽음들은 이전까지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던 어느 날과 달리, 그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김길태에게 희생된 여중생의 어린 목숨이 그랬고, 아직도 그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천안함 침몰 실종자들의 생명이 그랬고, 고(故) 최진영 씨의 자살이 그러하며,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끝내 사망한 고(故) 박지연씨가 그렇습니다. “어느 날 저녁, 지친 눈으로 들여다본 석간신문의 한 귀퉁에서, 거짓말처럼, 아니 환각처럼 읽은 짧은 일단 기사로, […] 한 시인(기형도)의 죽음을 알게” 된 그 누구(김현)처럼, “이럴 수가 있나, 아니, 이건 거짓이거나 환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늙음이나 아픔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육체가 반드시 겪게 되는 한 현상이다. 한 현상이라기보다는, 실존의 범주이다. 죽음은 그가 앗아간 사람의 육체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서 그의 육체를 제거하여, 그것을 다시는 못 보게 하는 행위이다. 그의 육체는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김현,「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04, 135쪽

        

 이와 관련하여 베르크손H. Bergson(1859~1941)은 『창조적 진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억이나 기대를 가지지 않은 존재들은 결코 ‘비어 있음’이나 ‘없음’과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단지 있는 것과 지각되는 것만을 표현할 것이다. 그런데 있는 것과 지각되는 것은 이러저런 사물의 현존이지 결코 어떤 것이든 그것의 부재는 아니다. 기억하고 기대하는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만 무엇이 없다는 것이 가능하다. 아마 그는 어떤 대상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것과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대상을 발견한다. 이때 그는 기대를 좌절시키는 것 앞에서 원래의 기억을 상기하게 되고, 자신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는다고, 자기는 ‘없음’과 조우했다고 말하게 된다."  

-강신주, 『철학, 삶을 말하다』, 이학사, 2009, 214-215쪽에서 재인용  

그러므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에 슬퍼질 수 있는 우리는 지나간 어제를 끊임없이 불러다가 오늘에 앉히고 슬픔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어제의 기억과 그 기대에 집착하는 이유로,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해명되지 않은 죽음의 원인은 ‘있음’의 기억으로부터 오는 좌절된 기대, 즉 ‘없음’의 지각에 더해져 더욱 더 우리를 지난 시간에 묶어놓습니다. 

물론 우리는 마땅히 물어야 합니다. 그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를. 그리고 그것으로 하여금 어제를 정리해야 합니다. 순수한 애도의 시간을 유예시키고 있는 그 불투명을 투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지고 육체의 시간이 다 하면 누구나 서서히 소멸해가는 자연의 순리와 같이 생사의 투명함을 되찾아, 그로부터 애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게는, 영원히 해명되지 않을 죽음의 사건이 남겨져 있습니다. 자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해 자신을 죽인 이들은 흔히 그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한 우울과 절망으로 설명되는 게 대부분이지만, 그것의 진위가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영영 알 길이 없습니다. 이는 설사 그들이 죽기 전에 몇 글자의 유언을 남겨 놓았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자살은 종종 그것이 옳고 그른가의 문제 틀을 갖게 되지만, 그 누구도 죽은 이를 두고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무어라 말하지 못하는 어려움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해명되지 않는 죽음의 이유는 스스로 자살을 겪고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는, 삶에 내재해 있을 어떤 절망의 존재를 상기시킵니다. 더욱이 내 가족이나 친구가 자살을 선택한 경우,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능력에 대한 자책이 사실상 남은 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며, 이와 함께 외롭게 죽음을 선택했을 그들의 마지막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자살』(살림, 2007)에서 저자 이진홍은 ‘거칠고 급하게’ 죽음을 택해 버린 자에 대해 말하는 행위 자체에 뒤따르는 불편함과 망설임을 시작으로, 자살에 대한 사회적 수용의 양태를 다양하게 살펴보고,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장 아메리가 주장하는 것처럼 자살이 자유인의 권리(『자유죽음』, 산책자, 2010)인지, 아니면 불가피한 선택인지에 대해 논의하며, 이와 함께 자살과 관련된 윤리적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다시 말해, “때가 되어 떠나가는 조용하고 포근한 죽음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이 원하는 때에 의도적으로 소멸의 시기를 결정해버리는 ‘자살’”을 고찰하여, "자살이 가지고 있는 ‘터부’라는 묘한 신비감을 제거하고, 우리가 현재 영위하고 있는 삶의 가치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또한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한길사, 2007)을 통해 여러 익명의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의 삶을 보여주며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사람들의 절망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로써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 즉 절망에 빠져 있는 이들에게 현재의 삶의 모습을 다시금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일리치의 죽음』은 “이반 일리치란 한 개인이 자신을 상실한 삶을 살다가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죽음에 의해 삶에 생겨나는 동요와 불안을 독자로 하여금 목격하게 하고, 이를 통해 다시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사건 이후에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들에 대한 충분한 애도를 통해 어제에 대한 기억과 기대를 위로하고, 그런 연후에 이러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철학, 삶을 만나다』의 저자 강신주는 이러한 마음의 고통을 치유하는 방법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우리의 오늘에게, 더 이상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것(있음에 대한 기억과 기대)을 마음 바깥으로 투사하지 말고 외부 사태(없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지나간 어제가 아닌 오늘을 바로 보며, 지금도 서서히 사그라지고 있을 내 생의 역사로 돌아와 나에게 다가올 죽음이라는 사건을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문국진은 『주검이 말해주는 죽음 屍活師』(오픈 하우스, 2009)에서 수많은 죽음을 지켜봐 왔던 의사의 입장으로서 그간 보고 느낀 경험을 토대로 죽음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우어 정리해줍니다. 영생과 부활의 상징인 고대 이집트의 미라에서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존엄사(안락사)까지 포괄하고 있는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의학적, 철학적, 문화적 고찰을 통해 독자 스스로 죽음에 대한 개념과 사생관을 수립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와 함께 소크라테스, 플라톤,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커, 야스퍼스, 레비나스, 들뢰즈, 장자, 유가 등의 철학자들이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철학, 죽음을 말하다』(정동호 외, 산해, 2009)는 죽음 자체에 대한 다양한 사유를 통해 독자가 다시 삶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는 아직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살아있는 자들일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살아있는 자들이 살아가기 위해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종 목적은 죽음을 통해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결국 삶의 일부인 죽음을 긍정하여 웰빙(Well-being)뿐 아니라 웰다잉(Well-dying)를 준비하는 게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요. 



「귀천(歸天)」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미래사, 2002, 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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