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마'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4.01.23 《시간과 권력의 역사》- 달력에 박힌 권력의 자취
  2. 2013.10.28 [요즘 뭐가 잘 나가니?] 아시나요, 《침대위의 신》을?
  3. 2013.07.24 [요즘 뭐 읽니?] 최영재, 《취업을 준비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4. 2011.11.30 <이 팬티는 어디에서 왔을까> - 팬티 너머 펼쳐지는 삶의 풍경
  5. 2011.03.17 <누가 베이컨을 식탁으로 가져왔을까> - 보이지 않는 성, 보이지 않는 편견
  6. 2010.12.01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 책을 태우는 곳에는 결국 인간도 태우게 될 것이다
  7. 2010.08.05 <멀쩡함과 광기에 대한 보고되지 않은 이야기> - 의뭉스런 언어, '멀쩡함'을 희망의 언어로!
  8. 2010.05.13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자기 성찰의 불편함

《시간과 권력의 역사》- 달력에 박힌 권력의 자취

 

 

외르크 뤼프케 | 《시간과 권력의 역사》 | 알마 | 2011

 

“특정한 달력은 권력의 존재를 보여준다. 적법한 지배자든 부당한 지배자든 그들은 자신의 날로 달력을 가득 채운다. 독재자의 동상과 초상화로 공간이 뒤덮이듯 시간도 달력의 모습으로 그렇게 뒤덮인다.”

 

이.럴.수.가! 시간마저 내 것이 아니었다니. 시간까지도 지배하려는 권력의 음침한 욕심은 어디까지일까. 이 책은 달력에 관한 이야기다. 고대부터 시작된 유럽지역 달력의 문화와 역사에 숨겨진 이면을 들여다본다. 사실 고대유럽의 낯선 어원과 용어, 역사가 익숙지 않은지라 책의 초반을 읽어나가는 게 그리 녹록지 않았다. 

 

고대의 달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기록되었다. 연대기로 기록되어 역사적이고 종교적 성격을 띠었고, 황제의 축제일을 모자이크와 그림으로 새기거나, 읽을거리로서의 달력텍스트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고정달력인 파라페그마, 한해의 모든 날이 적힌 파스티, 천문학과 일기예보에 관한 농민력, 다양한 독자층을 지닌 달력이야기라는 문학 장르도 있었다. 성경 이외에 책이 많지 않던 시절 매년 구입하는 달력은 인기 있는 ‘책’이었다. 시간과 작업을 계획하는 도구, 메모와 참고서적, 오락물로서 끊임없이 낭독되었다. 정보를 주고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오락의 기능을 하는 달력의 역할은 중세까지 계속되었다. 계몽주의시대에는 국민계몽과 국민교육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달력의 역사가 권력의 역사다. 매년 반복적으로 거행되는 축제나 왕가행사는 지배자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정치에 큰 효과가 있었다. 지배자들은 달력구성을 독점해서 상류층의 결속을 다지고 축제를 정치적으로 기획해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정치도구’로 달력을 이용했다. 달력의 역사에는 지배 권력의 자취들이 깨알같이 박혀있다.

 

한편 지은이는 달력 사용을 가장 강하게 특징짓는 일주일리듬 이야기와, 평범했던 일요일이 의미 있는 날로 선택된 이유도 풀어놓았다. 현재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이 점진적으로 수용되기까지의 과정과 실패로 돌아간 개혁의 역사도 흥미롭다. 일본의 경우 1872년에 유럽의 산업국가와 미국과의 교류를 위해 급작스럽게 그레고리력을 채택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전의 12월 3일에서 그레고릭력 1월1일로 바꾸면서 급료를 지급하지 않고 국가의 재정부담을 덜려는 경제적의도가 숨어있었다. 또한 황제의 신화적 즉위의 출발점으로도 이용한데서 사회적 행위와 정치적, 경제적인 달력의 다층성을 엿볼 수 있다고 책은 말한다.

 

현재의 달력은 과거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나, 달력 속에서 움직이는 시간의 역사는 모든 것의 속도를 높이는 역사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또한 화요일 오전의 자유시간, 일요일이나 야간의 근무 등 기존관념과 방식에 얽매여 시간에 끌려 다니지 않으면서 다양하고 광범위하게 제각각 이용할 수 있는 ‘달력의 회색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개방적이고 선도적인 일부 기업에선 이미 실행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매일같이 시간과 달력에 쫓기듯 살면서도 정작 다양한 용도로 사회에 깊숙이 스며들어 영향을 끼쳐온 ‘달력의 역사’에 무지했다. 성당에서 받은 달력을 보고 있자니, 성인들의 축일이 만들어졌던 그 옛날의 법석이는 장면들이 눈앞에 어렴풋이 펼쳐진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파란해골13호' 님은?
이런저런 만남이 가득한 책이 좋습니다. 시야를 딱 틔워주기도 하고, 다시 치열하게 살고 싶게 하고, 주변을 돌아보게도 하고,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도 하네요. 무엇보다 제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성찰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은 참 고마운 친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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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가 잘 나가니?] 아시나요, 《침대위의 신》을?

거꾸로 가볼까 합니다. 요즘 뭐가 잘 나가는지가 아니라 뭐가 잘 나가지 않는지를 살펴보려고요. 책을 좋아하는 분들은 대충 알고 계실 겁니다.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출판계의 상황을요. 지난 7월 발표된 ‘2013년 1분기 출판산업 동계 및 경기 동향’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1분기에 책을 한 권도 출간하지 못한 출판사가 446개나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기간 출간된 신간 도서 종수는 지난해에 비해 13.2%가 줄었다고 하고요. 말하자면 독자의  관심과 취향에 따라 도서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얘기인데요.

 

이 같은 위축세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고루 나타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게 인문서적이라고 합니다. 바야흐로 인문학의 부흥을 이야기하는 이때에 뭔소린가 싶지만, 이 역시 일부 베스트셀러에 편중된 도서 구매 패턴과 무관하지 않겠지요. 그리하여 오늘은 다수의 관심과 판매량은 과감히 무시하고 소수를 위한 주목할 만한 인문서적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작은 가장 최근에 나온 것으로부터~

 

 

《침대위의 신Sex & God》, 와우~ 일단 제목이 어마어마하네요. 인간의 성(性)과 신, 절대로 어울릴 수 없는 이 둘이 만났으니, 논란은 불을 보는 뻔한 일일 텐데요. 이 도발적인 책을 낸 출판사의 이름이 또한 흥미롭습니다. 어마마마. 한 번 들으면 잊지 못할 것 같은 이름이죠? 그래서 실제로 저는 잊지 못했습니다.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갈라파코스, 2013),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갈라파고스, 2013)로 유명한 우파 저격수 ‘토마스 프랭크’의 책 《정치를 비즈니스로 만든 우파의 탄생》을 내며 세상에 첫 발을 디딘 어마마마를요. 과연 작명은 중요한 것이로구나 하는 교훈을 되새기며 다시금 본론으로 돌아와 두 눈 번쩍 뜨이게 한 이 책의 저자 대럴 W. 레이를 알아볼 것 같으면 “완고한 근본주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종교학으로 석사 학위를, 조지 피바디 대학에서 상담심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30대 초반에 불가지론자가” “마흔 살 때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호기심 돋는 프로필을 소유하고 계시네요. 국내에는 종교를 일종의 바이러스에 비유한 책 《신들의 생존법God Virus》(돋을새김, 2012)으로 처음 소개된 바 있고요.   

 

 

그런가 하면 ‘무신론’이라고 하니 떡 하고 떠오르는 이름이 있는데요.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역작 ≪만들어진 신≫이 그것입니다. 이와 관련해 출판사가 책 소개를 하면서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이 하나의 서론이었다면  ≪침대위의 신≫은 가장 뜨거운 본론이다!”라고 언급하고 있기도 하고요. 다른 한편으론 《침대위의 신》을 우리말로 옮기신 번역가 김승욱 님을 중심에 두고 ‘신(神)’과 ‘성(性), 각각을 키워드로 한 교집합을 살펴보았는데요. 필 주커먼의 《신 없는 사회》(마음산책, 2012)와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신은 위대하지 않다》(알마, 2011), 조너선 개손 하디의 《킨제이와 20세기 성연구》(작가정신, 2010) 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휴~ 오늘은 이쯤 해둘까요? 작정하고 이어간다면 더 못할 것도 없지만 지금으로서도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인게로, 이제 어떤 책을 시작으로 어떤 경로의 독서를 할지, 그 전적인 선택권은 독자 분들께 맡기고 저는 이만!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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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읽니?] 최영재, 《취업을 준비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최영재 | 《취업을 준비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알마 | 2013

 

지금도, 값비싼 등록금을 '땡겨' 쓴 대졸자들이 '직장인' 되기를 갈망하며 고군분투 중입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이미 '이 정도면 되겠지' 정도의 스펙을 장착한 이들로서, 금쪽같은 젊은 날의 8할쯤은 그 정도가 되기 위해 투자한 청춘입니다.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간의 투자를 보상받을 만한 사회적 지위와 수입일 텐데요. 다들 아시다시피 그들에게 주어진 현실이란 고작 '취업준비생' 혹은 '백수'라는 신분 그리고 그에 따르는 주위 사람들의 염려와 재촉, 스스로가 느끼는 불안, 초조, 자책, 자괴 따위의 감정이 전부인 상황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한 30년 전에 직장인이 된 어르신이 말씀 하십니다. "요즘 애들은 열정이 없어", "중요한 건 스펙이 아니라고." 그러면 화딱지 난 요즘 애들은 꼰대들에의 원망을 가득 담아 대꾸하고요. "스펙 없이는 취업할 수도 없게 만든 게 누구냐." 이 간극을 어쩔까요. '취업'과 '사회생활'을 바라보는 이토록 상이한 관점이라니. 그것도 한편은 뽑는 입장으로 다른 한편은 뽑히는 입장으로 만나야 하는 사이가 아닙니까. 그리하여 《취업을 준비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바로 이 '사이'에 주목합니다. 요즘 애들로선 도저히 알 도리가 없는 기성세대의 사고와 그들이 몸담고 있는 회사라는 조직의 생리를 그들에게 최적화된 방식으로, "지극히 현실적인 정의와 용례를 통해" 핵심만 집어 알려준다는 것이죠. 이를 테면 대리 위에 군림하는 직원, '과장'을 대할 때 신입사원이 지켜야 할 주의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 "힘들지?": 상당수 과장들은 신입사원에게 딱히 할 말이 없으면 "누구 씨 요새 힘들지?"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를 분석하려고 고민하지도 말고, 그 과장이 나를 위한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건 '얄리얄리얄랑셩' 같은 그냥 나오는 말이다. 저 말에 "네, 사실은 이런 게 좀…"이라고 하면 그 과장 입장에서는 "안녕?"이라고 했는데 상대방이 그간의 불만을 얘기하는 황당한 상황이 된다. 문제는 "아니오, 요즘 행복합니다"라고 해도 황당한 건 마찬가지라는 사실. 모범 답안은 "회의 가세요?" 정도 되겠다.

 

? "바쁜가?": 상당수의 과장들은 신입사원에게 일을 시키기 전에 "누구 씨 바쁜가?"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도 실제로 바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한 사실을 대답할 필요는 없다. 바쁘지 않다고 하면 할 일이 없어 보이고, 바쁘다고 하면 일을 시키지 말라는 것처럼 보이므로 좋지 않다. 마치 이름을 불린 것처럼 "네, 과장님 부르셨어요?" 정도로 응하면 일을 시킬 것이다. 여기서 만약에 과장이 "아니, 바쁘냐고 안 바쁘냐고?"라고 되묻는다면 분명히 개인적인 일을 부탁하거나, 자기가 해야 하는 귀찮은 일을 떠넘기는 것이다. 이때는 "언제까지 해야 하는 것 외에는 괜찮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그걸 시킬지 안 시킬지 알아서 결정한다. (131-132쪽)

 

'얄리얄리얄랑셩'이든 '얄라리얄라'든 과장이 입으로 뀌는 방귀에 의연하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자기소개서와 면접에 합격해 일단 신입사원이 되고 봐야 할 게 아니냐구요? 물론입니다. 그 팁도 역시 이 안에, 빠방하게 들어차있고요.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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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팬티는 어디에서 왔을까> - 팬티 너머 펼쳐지는 삶의 풍경

 

 

조 배넷 | <이 팬티는 어디에서 왔을까> | 알마 | 2011

 

 

오늘날 우리에게 ‘Made in China’ 혹은 ‘중국제’라는 말은 싸구려, 저가품, 품질이 떨어지는, 쉽게 망가지는, 유해한, 믿을 수 없는, 짝퉁, 쓸모없는 등등의 온갖 부정적 형용사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이다. 그러나 당장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위를 살펴보자. 거의 24시간 나와 함께하는 아이폰4,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이는 필립스 무선주전자, 책상에 앉아 있는 내내 즐겁게 음악을 들려주는 JBL 소형 스피커, 그리고 이 글을 치고 있는 로지텍 키보드와 마우스. 이 모든 상품에 ‘Made in China’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들쳐보기 귀찮아서 찾아보진 않았지만 지금 내가 쳐다보고 있는 HP 모니터 어딘가에도 분명 똑같은 딱지가 붙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역설 혹은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그토록 하찮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에 걸린 삶. 이 책의 저자 조 베넷은 이 코미디 같은 상황을 이해해보고 싶어 한다.

 

궁금증은 대형할인매장에서 구입한 팬티에서 시작된다. “팬티가 담긴 쇼핑백을 조수석에 싣고 집으로 가다가 문득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 제조된 팬티가 수많은 중간상인들을 거쳐 머나먼 뉴질랜드까지 와서 단돈 5.99뉴질랜드달러에 팔리는데도 이익이 남다니! 게다가 팬티 다섯 장들이 묶음이 겨우 8.59뉴질랜드달러에 팔리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쌔고 쌘 ‘Made in China’를 보면서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을 만한 생각, 그러나 아무도 그 궁금증을 해결해보려 시도하지 않았던 생각을 저자는 직접 실행에 옮긴다. 팬티가 만들어져 소비자의 품에 도달하는 과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렇게 ‘팬티 찾아 삼만리’라는 황당한 여행기가 시작된다.

 

물론 이 책의 기획 의도는 판매처에서 무역업자를 거쳐 팬티 제조공장과 원자재 수급처까지, 다시 말해 중국산 팬티가 생산되어 소비되는 전 과정을 하나하나 역추적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핑계거리일 뿐이다. 이 책은 팬티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 대한 단순한 르포르타주가 아니다. 우리가 베넷의 글을 통해 만나게 되는 건 전 세계 5분의 1이라는 거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저가 노동력을 공급하며 ‘세계의 제조공장’으로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현실과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다. 화려한 네온과 고층빌딩으로 무장된 도시와 그로부터 단 몇 분만 벗어나면 텃밭과 거름과 소떼가 어슬렁거리는 시골의 풍경, 끊임없이 도시와 산업단지로 빠져나가는 젊은 인력들과 농촌을 지키는 노인들 등, 마치 우리의 70년대가 그러했듯이 한참 성장 중인 나라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산업화의 이면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러나 또한 그렇다고 해서 중국의 경제 현실에 대한 단순한 보고에 머무르지도 않는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유인원에 대한 온갖 사소한 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람의 얼굴과 몸짓과 자세를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다. 덕분에 언어 문명의 찰나적인 영향에 흔들리지 않는 인간의 공통점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게 좋았다. 인간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끊임없이 자신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서양인들이 쉽게 가질 수 있는 편견 혹은 선입견에 갇히지 않기 위해 유교, 불교, 도교와 같은 중국의 사상과 각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고, 낯선 여행자가 겪을 수 있는 신기하고 때론 불쾌할 수도 있는 에피소드들을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여행 작가로서의 저자의 매력이 물씬 풍기기도 한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을 유머러스하게 버무려 풀어내는 저자의 뛰어난 감각은 감탄스럽기까지 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책이 가진 매력은 한 서양 여행자의 중국 여행기이면서 이런 종류의 책이 으레 빠지기 쉬운 경멸 혹은 예찬과 같은 극단적인 평가로 일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컨대 중국 정부의 위압적이고 통제적인 정책이나 위구르 인들에 대한 중국인들의 인종차별과 같은 부당한 행위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중국인의 맥락에서 그들을 이해하며 서양이 가지고 있는 중국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 과거 서양이 중국에 가한 역사적 잘못 등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다시 말해 중국이라는 거대하고 신기한 나라 속에 너무 깊이 빠져들지도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그곳도 결국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걸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 황당무계하고 유쾌한 여행기는 경제 성장이라는 신화 속에서 잊혀져가는 인간의 모습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출판사의 요구로 우루무치의 목화 농장에서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 이 사진을 보게 된다면, 저자의 다음과 같은 설명에 고개가 자연스레 끄덕여질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카메라만 갖다 대면 경련을 일으키는 버릇이 있다. (…) 지금은 죄책감 때문에 내 모습을 더욱 의식하게 되었다.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누군가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곳이다. 그런데 나는 호화로운 자동차를 타고 10분 동안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떠난다. 거짓을 말하는 사진, 흥미를 유발하고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사진 말이다. 나는 내가 피상적이고 기생충 같은 존재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etnunc'님은?
자유로운 백수를 꿈꾸며 알바로 연명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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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베이컨을 식탁으로 가져왔을까> - 보이지 않는 성, 보이지 않는 편견

 

 

J.M.애도배시오 | <누가 베이컨을 식탁으로 가져왔을까> | 알마 | 2010


선사시대 인간의 삶은 어떠했을까? 선사시대는 말 그대로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의 시기로 확실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미지의 영역이다. 물론 고고학과 같은 학문이 유적지에서 발굴된 화석이나 뼈, 그리고 각종 유물들을 토대로 당시의 모습을 재구성하려고 노력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재구성이란 것이 결국 수 천 년 혹은 수 만 년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훼손되어 있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에 채워 넣어야 할 빈 공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고고학자들이란 마치 폭풍우가 몰아친 범죄 현장처럼 각종 증거들이 무참히 훼손된 상황에서 범죄의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법의학자들과 같은 처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이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중간에 있는 애매한 학문일 수밖에 없다. 화석이나 유물을 분석할 때 물리학이나 고생물학, 지질학과 같이 어느 정도 확실성이 보장된 과학을 활용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유적지나 유물의 의미를 파악하는 작업에서는 학자들 자신의 추측이 많이 가미될 수밖에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술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다.”(152쪽) 결국 고고학이란 갖가지 편견에 오염되기 쉬운 학문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대규모 유적지에 대한 발굴이 유럽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선사시대에 대한 설명도 유럽 인종을 기준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저자들은 고고학에서 그 무엇보다도 심각한 편견이 바로 남성 중심적 설명이라고 지적한다. 선사시대에 대한 기존의 지식에서 여성은 (책의 원제이기도 한) ‘보이지 않는 성’으로 취급된다. 다시 말해 선사시대에 대한 대부분의 설명에서 여성은 아예 삭제되거나 대단히 부수적인 존재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이와 같은 통념이 편견에 근거한 대단히 그릇된 인식이라고 문제제기 하며, 인류 초기의 역사에 있어 여성의 역할 또한 대단히 중요했다고 주장한다.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들을 바탕으로 언어의 발달과 농업의 진화에 여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또한 석기에 버금가는 도구로서의 끈 혁명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이제야 우리가 알게 된 또 하나의 확고한 사실은 여성과 여자가 인류의 등장과 성공을 이끈 동력으로서 남자보다 훨씬 중요했다고 할 수는 없을망정 남자만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322쪽)

이러한 설명은 얼마나 타당한가? 물론 나는 고고학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저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자료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검토할 능력이 없다. 또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엮어 그럴듯한 추론과 그릇된 추론을 설명하는 저자들의 시도는 대단히 설득력 있다. 그러나 저자들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고고학적 추론은 확실하게 입증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새로운 발견으로 인해 기존의 학설이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고, 극히 제한된 자료를 바탕으로 큰 그림을 그려야 하기에 추측과 편견이 개입될 여지도 많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장도 여성적 편견이 개입된 결과는 아닐까? 다른 과학 관련 도서를 읽듯 단순하게 ‘그렇구나’하고 지나치기가 어려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어려움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보자. 최근까지 지구상 대부분의 사회가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이처럼 남성 중심 사회가 광범위하게 나타나게 된 이유는 인간의 생물학적 특징 때문이라는 설명이 지배적이다. 주로 언급되는 것이 다음 두 가지 특징이다.

첫째, (물론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신장과 근육 등 남성의 신체 조건이 여성에 비해 발달해 있다.

둘째, 여성은 임신과 수유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어 (최소한 출생 전 2~3개월 그리고 출생 후 2~3개월 동안은) 생산 활동에 제한이 있다.

위와 같은 두 가지 특성을 고려했을 때, 남성은 사냥이나 채집 등 생존에 필수적인 식량 생산에 유리한 조건을 점하고 있었을 것이고, 여성은 출산과 같은 한계로 인해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는 당연히 남성 중심으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가부장제는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런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고고학적 증거들은 당시 수렵 활동의 대부분이 매머드 같은 거대한 동물이 아닌 토끼나 여우 같은 작은 동물에 국한된 경우가 많다. 이는 여성이나 아이들의 신체적 조건으로도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는 동물이다. 또한 “고기는 호미니드 조상들이 구할 수 있는 식량 중에서 가장 영양가가 풍부한 음식이 아니다. 예를 들어 캐슈넛 900그램에는 고기 900그램과 맞먹는 지방, 단백질, 칼로리가 함유되어 있다. 게다가 견과류는 굳이 싸움을 벌이지 않아도 구할 수 있는 음식이다.”(106쪽) 그러므로 굳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할 필연성은 부족해 보인다.

더 나아가 이러한 추론도 가능할 것이다. 여성은 출산을 통해 당시의 가장 중요한 생산력인 노동력을 사회에 공급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차지했을 수도 있다. 즉, 여성 주인과 남성 노예와 같은 관계가 이루어졌을 수 있다. 이 경우 당연히 노예가 주인보다 많은 노동을 함으로써 발달된 신체를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첫 번째 생물학적 특성은 오히려 여성 중심 사회의 결과로 이해될 수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설명이 가능한 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모두 극히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큰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에는 보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정밀하고 세심한 유적 발굴로 비교 연구의 토대가 탄탄해지고 있으며, 방사성탄소연대측정법이나 분자생물학의 유전자 분석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전보다 더 정확한 추론의 근거들이 확보되고 있다. 조금씩 그림이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채워 넣어야 할 빈 공간은 여전히 거대해 보인다.

가끔 언론에서 새로운 유물의 발견으로 이러저러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떠들어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고고학이라는 학문의 특성상 언제든 쉽게 편견이 개입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밝혀진 ‘사실’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새로운 발견이 ‘보이지 않았던 여성’ 여성을 드러내주었듯이, 비판적 시선은 ‘보이지 않았던 편견’을 드러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etnunc'님은?
자유로운 백수를 꿈꾸며 알바로 연명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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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 책을 태우는 곳에는 결국 인간도 태우게 될 것이다

 

레베카 크누스, <20세기 이데올로기, 책을 학살하다>, 알마, 2010

 


올해 내가 잘 한 일 중 하나는 아내와 매주 화요일마다 2시간씩 경남도립미술관에서 미술교양강좌를 듣는 거다. 책과 웹으로만 이해하던 단편적 지식들이 여러 선생들의 강의 속에서 엮어지는 것이 여간 즐거운 게 아니다. 내가 공부를 잘 못하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배움 이상의 큰 소득이다. 당나라 제일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사설師說에 "스승이란 도를 전하고 학업을 가르쳐 주며 의혹을 풀어주는 자이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아는 것이 아닌데, 누가 의혹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의혹스러우면서도 스승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의 의혹됨은 끝내 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큰 깨달음을 준 미술 강좌 첫 수업이 '미술이 마음을 담을 수 있는가 - 프랑스 야수파와 독일표현주의'다.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들은 히틀러와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낙인 찍혀 활동이 금지되고 그들의 작품은 몰수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망명의 길을 선택하기도 했다. 더 치욕스러운 것은 '퇴폐미술전'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 일이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책 이야기 하나만 더 하자. 유종필의 <세계도서관기행>에 '독일'편을 보면 분서焚書축제를 벌였던 현장인 베벨광장이 나온다. 악명높은 선전장관 괴벨스는 '반독일 정신에 대항하기 위하여'라는 깃발을 내걸고 당대 최고 학자들의 저서를 전국에서 수집해와 분서축제를 벌인다. 괴벨스는 그것들을 태우면서 "이 불꽃이 새 시대를 환하게 밝혀줄 것이다"라고 선언한다.

<책을 학살하다>, 진시황이 법가 사상으로 중국을 통일하면서 실용서를 제외한 모든 사상서적을 태우고 유학자를 생매장한 사건을 "분서갱유焚書坑儒'라 부른다. 2천년도 더 지난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오래된 과거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20세기에도 분명 일어났고 양이나 내용으로 따져도 진시황의 그것에 모자람(?)이 없다. 아니 넘쳐난다.

책을 학살하는 두 가지 이유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다. 책은 적의 상징물이었고, 피통치자에게는 자기 권리를 깨치게 하는 것이어서 통치자에게는 성가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책은 통치자에게 더 잘 통치하기 위한 지혜를 주는 생명과 영혼의 샘물 같은 것이었고, 잘만 활용하면 피통치자를 길들이는 데에도 어 없이 좋은 도구다. (8쪽)

책을 학살하는 것은 피통치자의 문화를 학살하는 행위다. 나치는 유대인과 유대인의 문화를 함께 없애려 했고 세르비아도 보스니아에서 이슬람의 문화를, 중국은 문화혁명으로 공산주의에 반하는 과거의 자국 문화를, 그리고 티베트를 탄압하면서 티벳의 불교문화를, 이라크는 쿠웨이트 문화를 태워없애려 했다. 책을 학살하는 행위의 동기는 자문화 우월주의일 수도 있고, 열등감일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히틀러와 나치의 유대인 탄압은 우월과 열등감이 동시에 나타난 경우다.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학적으로 변이되어 우생학을 만들었고 독일 제국주의는 아리아인이 적자適者라는 우월주의를 낳았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 배상금 문제와 겹친 경제적 위기의 어려움을 유대인의 음모와 경제적 독식 탓으로 보았고, 그 결과는 참혹했다. 독일 관리들은 유대인 학살 목표 수치를 1,400만으로 잡았고, 실제로 유대인을 학살한 숫자는 600만에 이른다. 폴란드에서는 90퍼센트의 유대인을 죽였고 70퍼센트의 책을 파괴했다. 보존된 책이 독일 학자들의 연구를 위한 것이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 책의 여러 이야기 중에 나치 독일의 인종조의와 민족주의가 빚어낸 비극만 옮긴 것이다. 내가 지금껏 읽은 책 중 가장 긴 역자 서문은 저자의 노력을 대신 전하려는 흔적처럼 느껴졌다. 책, 도서관, 문화 말살에 대한 다양한 고찰이 담겨 있고 독일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 중국, 이라크의 책의 학살도 각 나라의 역사, 정치, 이념적 이유와 함께 설명하고 있다. 책의 학살은 민족의 학살,  문화의 학살이다. 이 책은 역사의 생채기를 더듬는 작업이다. 읽는 내내 안타까운 역사에 대한 아쉬움이 가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광장(괴벨스가 분서축체를 벌였던 베벨광장) 중앙에는 텅 빈 지하 서가를 만들어 투명 유리를 통해 안을 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책이 사라진 공간은 문화와 지성, 이성의 결핍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이 지하 서고에서 조금 떨어진 바닥에는 시인 하이네가 1820년에 쓴 작품에서 가져온 문구가 동판에 새겨져 있다. "그것은 단지 전야제에 불과했다. 책을 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인간도 태우게 될 것이다." 이 구절은 1백여 년 뒤에 벌어질 사건을 예견하고 쓴 것이나 다름없다. 시인의 놀라운 예지력에 소름이 끼친다. 유태계의 이 천재 시인은 지금 몽마르트 언덕의 공동묘지에 누워 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흙장난’님은?
고양이를 끔찍이 좋아하는 아내를 끔찍이 사랑하는 책을 좋아하는 남자입니다. 독서의 첫째 목표를 ‘지식의 함양’이라 믿으며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어대는 남자입니다. 언젠가 아내가 훗날 우리가 다시 태어나면 서로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환생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아내는 내가 아끼는 책이 되고 나는 아내가 사랑하는 고양이로. 그런데 이 환생이 동시에 일어나면 고양이가 책에 부비부비 하고 있겠죠? 아~~! 이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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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함과 광기에 대한 보고되지 않은 이야기> - 의뭉스런 언어, '멀쩡함'을 희망의 언어로!

애덤필립스, <멀쩡함과 광기에 대한 보고되지 않은 이야기>, 알마, 2008


참으로 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는 ‘멀쩡함(sanity, sane)’이란 어휘에 시원찮은 기운을 느끼는 것은 왜지? “멀쩡한 녀석이 왜 그래?” 도대체 어떤 녀석이면 멀쩡하다는 것인지? 그리고 이 표현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사용되었던 기억도 없는 듯하다. 무언가 바르지 못한, 일반의 상식을 가진 이들이 인정하기에 거북한 행위이기에 그 기준으로서 갖다 붙이는 애매한 관습적 언어 같다. 그래서 저자가, 이렇듯 모호하기 짝이 없는 ‘멀쩡함’이란 언어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게 보인다. 기실 이 두루뭉술하고 누구도 정의내리기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기괴한 어휘가 사라지지 않고 불쑥불쑥 일상에서 사용되는 현상을 보면, 분명 우리들(인간)의 내면에 지지하고자 하는 무엇이 틀림없이 존재하리라 여겨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멀쩡한 상황을 벗어난 상태는 무엇이 되는 것일까? 멀쩡하지 못한 녀석이면 어떤 녀석일까? 바로 미친 녀석이 되어버리는 것인가? 멀쩡하지 않은 것은 미치거나 미치고 있는 중이란 이야기다. 저자의 화두는 여기서 시작된다. 미치는 것, ‘광기’는 멀쩡한 것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무수한 도덕적 가치기준을 비롯해서 매 상황마다의 실로 다양한 언어와 행위에 대해 어디까지가 멀쩡한 것이고, 어디서부터 미친 것인가? 우린 이러한 상황마다에 멀쩡함의 정확한 기준을 내세울 수 있는 것인가? 실로 애매하고 모호하기 그지없다.

이렇듯 이 저술은 아마도 ‘멀쩡함’에 대한 인류 최초의 심도 있는 저작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하다는 철학자들도, 언어의 마술사라는 문인들도, 정신의학, 심리학에서도, 인류학에서도, 심지어 자연과학에서도 이 멀쩡함이란 말짱한 단어에 대해 정의를 회피해 온듯하다. 그렇다면 이 언어가 왜 이렇게도 기피되어 온 것일까? 사실 존재감도 없어 보이고 밋밋하며, 고작 흐리멍덩한 기준에 부정적이기만 해서 무언가 불유쾌한 상황에나 사용됨직한 언어에 관심을 가질 까닭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 이 기피되어온 단어의 그 음험한 본질을 찾는 여정이 그 어떤 미지세계의 모험 못지않게 흥분을 자아내고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듯 조마조마한 두려움까지 느끼게 하는 것은 당연하기 까지 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비로소 처음 등장한 멀쩡함(sanity)이란 단어의 사용을 필두로 레잉, 키르케고르(Kierkegaard) 등의 시선을 통해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의뭉스러운” 이 어휘를 해부한다.

이 저술이 관통하고자 하는 본질의 단서가 되는 멀쩡함에 대한 정의로, “멀쩡함을 긍정적으로는 자신의 본성(자신의 과거, 욕망, 두려움)에 현실적인 두려움을 지닌 상태, 부정적으로는 자아 가운데 거짓으로 적응한 유순한 부분을 가리려고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는 견해는 더불어 전개되는 ‘광기’와 대응하여 인간내면의 근원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여기에 따르면 “조화로운 조직,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는 상태인” 멀쩡함은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사용되는 ‘책략주머니(성격)’와 같다는 암시” 로부터 “사람들이 멀쩡함을 언급하거나 요구할 때는 대개 뭔가가 사라지지 직전이다.”라는 성찰에 동의하게 된다.

이처럼 무언가 진실에서 이탈하는 자신을 은폐하는 수단으로서의 멀쩡함에는 인습에서 벗어나는 것, 즉 광기에 대한 인식이라는 점이다. 결국 “스스로 배반해야만 역설적으로 살아남아 번식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인간으로서 적절한 도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미친 사람은 우리가 이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러한 광기야말로 인간을 지탱하는 영적인 영양분에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여기는 모순처럼 보이는 진실을 대하게된다.

멀쩡함에 대한 문화사, 철학, 의학, 문학을 망라하는 이 화려한 저술의 백미(白眉)인 현대의 인간들을 향한 욕망 속에 은폐된 광기와 멀쩡함의 해부는 유아 발달 과정을 통한 인간의 시원적 본성의 탐구를 기초로 성욕에 대해서, 그리고 돈(Money)에 대한 욕망의 뿌리에 대해서 명쾌한 통찰력을 과시한다. 

“아기의 압도적이며 가장 놀라운 점인 신체적 욕구의 즉각적 만족”이란 인내의 불비(不備)에서, 멀쩡함은 바로 창조적인 인내 또는 인내를 창조적으로 만드는 능력임을 간파하고, 발달을 위한 투쟁, 즉 살아남아 번식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선(善)임을 도출한다. 급기야는 영국의 정신분석가 ‘에더’의 “우리는 미친 상태로 태어나 양심을 발전시키고, 불행해진다. 그러고는 죽는다.”를 빌어 “멀쩡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고통스럽게 습득하는 것이며, 사람마다 습득하는 정도가 다름”을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어른이 되는, 즉 “인간이 되는 것에 뭔가 재앙과도 같은 일면이 있으며,”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 유기체로서 지닌 약점 또는 정치적 동물로서 드러내는 잔혹한 부당함, 천연자원의 희소성, 탐욕스런 천연자원 약탈, 낙원에서 쫓겨난 것, 오만함 등. ” 그리고 이러한 재앙들은 우리의 욕망과 연관되어있으며,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결여되어 있는 것을 원하고, 그것에 휘둘리는 욕망.”과의 갈등과 조화로 파악된다.

그래서 성(性)행동의 ‘비인간화’라는 우리들의 잠재하는 의식을 통해 일탈적이고 사뭇 이기적이기까지한 성행위(sex)에 대한 성장과정 속 갈등에서 조정되는 멀쩡함과 광기의 타협을 본다. 상대의 동의도 받지 않고 성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미쳤다는 말, 즉 광기라는 단어는 우리의 혐오감을 정당화해주는 에두름 일 뿐이다. 성장이라는 과정에서 인간이 필히 거치는 ‘사춘기’는 바로 이러한 광기와의 첫 대면이며, 여기서 이 광기의 경험을 이기고 살아남는 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멀쩡함인 것이다.

한편, 멀쩡함은 모든 것을 똑같이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대산업화시대, 자본주의의 본격화에 따라 이 멀쩡함이란 것은 새로움의 적이 되었고 곧, 지혜의 반명제가 되어버렸다. 이제 멀쩡함을 내던지고 광기를 쫓아야 하지만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그래야만 할 멀쩡함, 도덕율을 던질 수는 없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멀쩡함, 이용할 수 있는 멀쩡함은 ‘자기기만적 멀쩡함’ 뿐 이 되었다. “현대의 자아, 즉 두려움보다는 회피 쪽에 맞추어져 있는 자아의 기만 책략은 결국 초조, 무절제, 만족할 줄 모르는 성공 욕구를 낳는다. ”  이 결과는 철학자 노먼 브라운 (Norman O. Brown)이 그의 저서 『죽음에 맞선 삶(Life against Death)』에 피력한 통찰력이 대변한다.

“돈을 향한 욕망이 진정한 인간적 욕구의 자리를 모두 차지한다. 그렇게 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부의 축적이 사실은 인간 본성을 가난하게 만들고, ~ 中略 ~ 그 결과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구체적인 전체를 호모에코노미쿠스라는 추상으로 대체함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비인간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비인간화된 본성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몸,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신의 감각기관, 관능, 쾌락 원칙과의 접점을 잃어버린다. 이처럼 비인간화된 인간 본성은 비인간적인 의식을 낳는데, 이 의식이 유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 즉 근면하고, 냉정하고, 이성적이고, 경제적이고, 산문적인 정신뿐이다. 자본주의가 우리를 너무나 어리석고 일방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소유할 수 있는 물건, 쓸모 있는 물건만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20세기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인간이 안전해 질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불렀던 유토피아적인 프로젝트들의 공동묘지”에 살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의 규범(도덕적 기준)이 되는 멀쩡함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정치적으로 설계된 ‘훌륭한 삶’, 즉 사람들이 지향해야 하는 모습, 원해야 하는 것,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가장 호전적이고 강압적인 청사진이 낳은 끔직한 결과와 다름이 없다. “이른바 정신건강을 묘사하는 단어들, 멀쩡한 사람과 미친 사람을 구분하는 단어들”,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이유로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 나서서 말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이며 입을 막고 쫓아내야 하는 사람은 누구인지를 상징적으로 조작하는 방법으로 정신건강이라는 개념은 정치적 도덕률이 된다.”

도덕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자신이 어떤 종류의 동물인지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단어이다. 이 순간에 멀쩡함이 우리를 안심시키는 그림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씩이나마 자신의 본성과 하나가 되거나 숭고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다. 여기서 멀쩡함은 조화 또는 갈등이 낳은 최고의 수확물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 저술은 ‘멀쩡함’이란 이 구태의연해 보이는 단어에서 시작된 해박하게 망라된 지식과, 그 지향하는 오늘의 인간본성에 대한 자각과 도덕률, 그리고 권력, 부(Money), 섹스 등 욕망을 대신하는 ‘좋은 삶’의 주요 요소가 되어줄 현실적 희망, 종의 번영에 영향을 주는 삶의 정의 안으로 멀쩡함을 끌어들인 지성 넘치는 역작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필리아'은?
세상의 위협이나 추함에서 격리되어 책에 몰입하는 순간을 커다란 위안인 동시에 평온의 시간으로 여기며, 자기격려와 스스로를 고무하는데 독서만큼 유익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 이젠 거의 꺾을 수 없는 신념이 되어버린, 그러나 관계의 매혹을 저버리지 못하는 그런 남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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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 자기 성찰의 불편함


김규항, 지승호 <가장 왼쪽에서 가장 아래쪽까지>, 알마, 2010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어느 정도 모순된 면을 가진 채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순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앎과 삶의 불일치, 앎과 앎의 불일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인텔리들이 특목고 비판하지만 자기 아이가 특목고 들어가면 좋아들 해요. 아이가 여상이라도 가 봐요.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어요.
” (p.34)

우리가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경우는 앎과 삶의 불일치입니다.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신념과 평소의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말합니다. 가령 “시장주의 교육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한테는 시장 경쟁력을 알뜰하게 챙겨주는 그런 모습” (p.64)을 보이거나 “껍질이 주는 기득권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 만날 지배계급들을 욕하는” (p.305) 경우, 그의 앎과 삶은 모순된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우리는 보통 ‘위선’이라고 부르죠.

또한 앎과 앎의 불일치도 있습니다. 이는 한 영역의 앎과 다른 영역의 앎이 서로 상충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운동하는 분들이 집에서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 (p. 121)이거나 “평소엔 좌파연 하다가 선거 때만 되면 고심 끝에 비판적 지지” (p.198)를 한다면, 그는 사회 진보와 가정 진보, 바람직한 정치 전략과 현실적 정치 전략 사이의 상관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은 보통 ‘지적 불성실’ 때문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에 누구나 어느 정도 이러한 모순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가진 모순을 깨닫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모순을 인식했을 때 나오는 반응은 대략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모순을 교정하거나 아니면 회피하거나.

“변한 건 자신인데 세상이 변했다고 말하면서 변화한 세상에서 자신은 여전히 가장 현실적인 진보다, 이런 주장들을 한단 말이에요.”
(p.151)

자신의 모순을 교정하려는 노력, 즉 문제가 무엇이고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하나하나 되짚어 고치려는 시도를 우리는 ‘자기 성찰’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자신의 모순을 이러저러한 외적 조건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회피해 버릴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를 ‘자기 합리화’라고 부릅니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쉽게 자기 합리화에 빠져듭니다. 성찰보다는 합리화가 훨씬 쉽고 편하기 때문이죠. 성찰은 앎이든 삶이든 혹은 둘 모두든 무언가를 바꾸어야 하는데, 앎과 삶 모두 오랜 시간을 거쳐 축적돼 온 것이기에 이를 바꾸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합리화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고서도, 다시 말해 아무런 괴로움 없이도 문제가 간단히 해결된 것처럼 느껴지죠.

김규항이 불편해지는 이유는 그가 바로 이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그의 글은 우리들이 가진 위선과 지적 불성실을 지적하며, 자기 합리화에서 벗어나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하도록 요구합니다. 그래서 인터뷰어인 지승호의 지적처럼, 많은 이들이 그에게 “만날 그 얘기 지겹지 않아? 뒤에서 힘 빼는 거야, 뭐야? 자기 혼자 1등급 한우마냥 명품 진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p.9) 등등의 불평을 터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평 역시 겸연쩍음을 모면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의 한 방식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오늘은 없어요. 만날 미래만 있죠. 보다 나은 내년, 보다 풍요로운 3년 후, 보다 안정적인 5년 후, 그리고 또 내 아이의 10년 후, 늘 이런 것에 사로잡혀 있는 듯 보입니다. 그게 평생 동안이에요.”
(p.302)

아테네의 등에 역할을 자처했던 소크라테스처럼, 김규항은 '돈'과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무력해져 버린, 또한 그렇게 자기합리화에 익숙해져 버린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깨어 있을 것을 요구합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유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러기 위해 '잘사는 게 뭐냐'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질 것을 요구합니다. 그럴 때에만 주변 사람들과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를 맺으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 즉 바로 '지금 여기'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독배를 주었던 아테네인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주는 불편함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etnunc'
님은?
자유로운 백수를 꿈꾸며 알바로 연명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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