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09.07.30 수치심을 1,000원짜리 한 장에 드립니다 - <날아라 잡상인> (4)
  2. 2009.07.10 모든 것이 가능한 키워드, 달리 - <달리와 나>
  3. 2009.06.27 인터월드: 떠도는 우주기지의 전사들
  4. 2009.06.09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 시간의 강을 건너 그대를 만나다 (2)
  5. 2009.05.22 천국보다 아름다운 - 사랑
  6. 2009.05.13 물과 돌의 기억들 - 사랑으로 복원한 오만년의 기억들

수치심을 1,000원짜리 한 장에 드립니다 - <날아라 잡상인>

 

우승미, <날아라 잡상인>, 민음사, 2009


지하철을 타고 가다보면 재미있는 풍경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일단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책을 읽는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 자석마냥 철썩 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연인, 술 한 잔 걸치고 대자로 누워계신 아저씨, 휴대전화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수다를 떠는 아줌마…. 때로는 눈살이 찌푸려지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사람 사는 풍경이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풍경이 잠시 실례하겠다며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들이다.

시각 장애인 부부의 구슬픈 음악소리는 쩔렁거리는 동전 소리와 함께 지나간다. 어떤 이들은 자주 만나 얼굴이 익숙해졌다. 꼭 옆집 아저씨, 아줌마 같다. 한 손에 성경책을 들고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는 이들은 내일 당장이라도 종말이 찾아올 듯 목청을 돋운다. 그러나 주위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하다. 그러다 화들짝! 고객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여 아이디어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소개하는 분들이 계시다. 멘트도, 제품도 각양각색이다. 나도 책을 읽다가 소리가 들리면 안 듣는 척 하면서도 살짝 눈을 돌려 오늘은 어떤 아이디어 상품인지를 살펴본다. 그러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가끔씩 1,000원짜리 한 장을 건넨다. 그 아이디어 상품을 건네는 이들 중에 철이가 있었을까. 이 책의 주인공 철이 말이다.

<날아라, 잡상인>(민음사, 2009년)은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우승미 작가의 소설이다. 개그 프로그램에 잠깐 출연했다가 퇴출당하고 난 뒤,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신을 지금까지 키워준 조지아 여사의 권유에 따라 지하철 잡상인계의 화려한 전설 미스터리의 밑에서 수행(?)중인 철이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임산부 수지를 만난다. 말을 못하는 수지는 조금만 도와달라는 내용의 종이를 돌리며 모금을 하는 중이었다. 철이 입장에서는 비적대적 경쟁자를 만난 셈이다.

무질서해 보이는 지하 잡상인의 세계에도 엄연한 규칙이 존재하는 법. 한 칸에 한 명씩만 들어서야 한다. 그런데 철이는 왠지 수지가 밉지 않다. 급기야 수지의 집까지 찾아들게 되고, 시각 장애까지 지녔지만 인기 만점에 글도 쓰는 동생 효철, 효철의 애인이자 대학생이면서 아예 집을 나와 사는 천방지축 지효와 함께 동거동락(同居同樂)한다.

우울하고 슬픔이 가득해 보이는 캐릭터들이지만, 작가의 손을 거쳐 명랑하게 다시 태어났다. 화는 날지언정 후회는 없다. 남들보다 모자라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주인공 철이만 좀 자성하면 될 듯싶다. 개그도 못하고, 지하철 잡상인으로서도 썩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착해서 봐줄 뿐이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펼치는 포복절도한 이야기들이 소설의 재미를 한껏 끌어 올리고 있다. 작가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밝고 재미있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 코미디 같은 웃음 속에서도 우리는 한 단어를 꼭 되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수치심’이다.

수지가 팔았던, 그리고 이제 철이가 팔려고 하는 수치심. 만 원, 십만 원을 주고라도 꼭 사야 한다. 수치심을 알아야 비로소 수치심을 느끼는 타인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래야 나보다 못한 타인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밝은 웃음 속에 담긴 작가의 의도가 전해져왔다. 뻔뻔한 세상에 외치는 잡상인의 말이, 작가의 말이.

“우리의 한계를 인식하게 해 주고, 우리가 실수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며,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깨닫게 해 주는 건전한 수치심을 1,000원짜리 한 장에 드립니다.” (241쪽)

오늘의 책을 리뷰한 ‘꽃다지’님은?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는 책만 보는 바보.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하나일 때보다는 여럿일 때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꽃다지처럼 살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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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가능한 키워드, 달리 - <달리와 나>


 

스탠 로리센스, <달리와 나>, 랜덤하우스, 2009


책을 선택함에 있어 ‘영화 원작’이란 말을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영화의 장르적 우수성을 논하자는 게 아니다. 가장 상업적 문화예술 장르인 영화가 그 이야기를 택했다면 분명 대중을 사로잡을 구석이 있다는 거다. 영화 만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아무 데나 비싼 돈을 들이겠는가. 그런 면에서 스탠 로리센스의 <달리와 나>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알 파치노, 킬리언 머피가 출연하겠다고 나선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은 키에 넘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알 파치노는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배우다.) 더욱이 ‘어느 천재 예술가의 세기의 스캔들’이라니. 주저 없이 책을 펼쳤다.

<달리와 나>는 20세기 미술은 물론 모든 문화예술 영역에서 ‘핫 아이콘’이었던 살바도르 달리와 그의 작품을 사고파는 브로커 스탠의 이야기다. 이들의 첫 인연은 아름다웠다. 치즈 공장을 거쳐 ‘파노라마’란 잡지에서 싸구려 가십 기사를 써내던 스탠은 우연한 기회에 투자상담회사 MMC에 들어간다. MMC사장은 스탠이 달리와 한 인터뷰 기사를 보고 그를 ‘달리 전문 브로커’로 키우고자 한다. (물론 스탠은 달리를 만난 적이 없고, 그 기사는 허구로 쓴 기사다.) 치즈 공장 노동자에서 최고급 정장을 빼입은 달리 작품의 브로커까지, 스탠은 순식간에 신분 이동을 한다.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이런 횡재는 없을 거다. 스탠이 거래하는 달리의 작품들은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고, 그는 돈을 포크레인으로 퍼 담는다. 그만큼 달리의 유명세가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아니 하늘을 뚫고 올라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다. 하지만 돈이 되는데 사람이 몰려들지 않을 리 없다. 스탠은 고객이 많아져 좋기는 하면서도 작품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시중에서 유통되는 작품들이 원본이 아닌 위작, 혹은 모작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스탠이 자리를 떠나지는 않는다. 왜? 그는 이미 돈의 맛을 봤기 때문에. 자신이 가짜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원해서 파는데 양심의 가책을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듯 스탠도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이제 둘의 인연이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초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 더럽고 차가운 구치소에 쳐 박힐 위기가 자신의 엉덩이를 바짝 쫓고 있는 것이다. 이제 스탠은 어떻게 할까. 자신의 운명을 선택할 수는 있을까?

달리를 둘러싼 민얼굴의 욕망들

<달리와 나>는 달리의 작품을 둘러싼 거대한 욕망관계를 가감 없이 묘사한다. 여기서는 달리의 작품이 아닌 ‘돈’이 더욱 중요하다. 1989년 사망한 달리의 말년을 배경으로 한 이 책에 달리의 작품이 갖는 작품성과 예술성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오로지 돈이다. 돈 많은 사람들은 주식이나 부동산처럼 돈이 되기 때문에 달리의 작품을 사려고 하고, 브로커들은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적게는 몇 배, 많게는 수백 배의 마진을 붙여 물건을 중개한다. 또 달리는 자신의 작품이 어떻게 소비되는지는 관심조차 없다. 그저 돈을 부르는 서명을 하는데 말년을 다 보낸다.

겹겹이 쌓인 욕망관계 속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처음에는 스탠이 사기꾼 같다. 그는 가짜도 진짜처럼 팔고, 감언이설로 고객을 ‘후린다’. 그렇다고 고객들이 선한 사람은 못 된다. ‘짝퉁’ 가방을 팔아 갑부가 된 가방 제조업자, 싸구려 고기, 비계, 심지어 톱밥을 넣어 소시지를 만들어 파는 정육점 주인. 사기를 치며 돈을 모은 이들, 과시욕으로 가득 찬 이들이 사기를 좀 당하면 어떤가. 달리도 마찬가지다. 그를 신으로 만든 것은 언론, 평론가 등 매스 미디어다. 달리는 그들 앞에서 기발한 쇼를 보여주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침묵했을 뿐이다. 이 한바탕 소란에서 잘못은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일까.

천둥번개가 요란하면, 이후 찾아오는 정적의 골이 더욱 깊은 법. 인물들의 욕망이 격하게 충돌한 후에 찾아오는 공허감에서 무게감이 느껴진다. 대표적인 장면이 달리의 주변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를 ‘별 볼 일 없는 인물’로 묘사하는 장면이다.

캡틴 무어가 말했다.
“달리와 함께 있으면 하루하루가 정신병원에 있는 것 같았죠.”
아만다 리어가 말했다.
“솔직히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정말 터무니없어 보였어요. 왜 그런 수준의 화가가 정신박약자들에게 에워싸여 있었을까요?” (p. 241)


화려하고, 창조적인 예술가 살바도르 달리는 없다. 그저 변태 성욕자에 정신병자, 이미 망가진 몸뚱이를 가진 늙은이만 남았을 뿐이다. 달리의 삶을 돈으로 환원한 이들은 그의 삶도, 예술도 진지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이 또 다른 이슈를 낳기는 했지만, 언젠가 스탠이 썼던 가십 기사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존재, 본질에서 미끄러진 슬픈 허상이다. 물론 그게 비단 달리의 초상만은 아님을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달리와 나, 어디까지 진실일까

<달리와 나>는 작가 스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그는 1970년~80년데 언론인으로 활동하고, 달리의 그림을 거래하기도 했으며, 달리와 이웃으로 지내기도 했다. 그는 본격적인 내용에 앞서 “이것은 실화이다. 등장인물 중 이름과 특성을 바꾼 사람도 더러 있지만 사거노가 행동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대로를 옮겨 적었다”면서 ‘사실성’(fact)에 방점을 찍었다.

물론 작가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할지는 온전히 독자의 판단이다. 이 책은 소설이니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달리를 둘러싼 욕망의 관계는 오늘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책 후반부에 나타난 것처럼 달리의 ‘허구성’이 만천하에 폭로됐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돈이 된다는 말에 다시 달리의 작품을 욕망한다. 또 달리의 작품을 얘기할 때마다 전해지는 스탠의 기분 좋은 긴장감을 그 마력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만약 같은 제안이 들어왔을 때 우리는 쉽게 거부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쥐는 순간 우리는 이미 달리의 세계에 빠져든 셈이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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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월드: 떠도는 우주기지의 전사들


닐 게이먼, <인터월드>, 지양사, 2009


기차를 타고 서울을 올라가는 길. 비가 주룩주룩 내리다 못해 억수같이 쏟아지는 창밖을 보며 책을 꺼내 들었다. 감상에 빠지는 것보다 책을 보는 것이 더 좋기에 비가 쏟아지는 날과 조금은 안 어울리는 내용일지도 모르는 <인터월드>를 집어 들었다. <인터월드>는 그야말로 비가 내리는 창 밖, 서울을 향한 기차 안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잠시 고개를 들어 현실을 보면 오히려 더 낯선 곳이 되어 버리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보이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곳의 이야기였다.

종종 심한 길치를 주변에서 보게 된다. 디지털 장애로 인한 길치도 심심찮게 보이지만 이 책의 주인공 조이처럼 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공사 중인 자신의 집에서 길을 잃는가 하면, 사회 체험학습 시간에 길을 잃고 헤맨 일은 조이의 운명을 갈라놓고 말았다. 단순한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 다른 세계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조이가 지구에서 길을 자주 잃은 것은 바로 그런 세계에서 공간이동을 하는 능력 때문이라는 사실과 함께 전혀 평범하지 않은 세계로 편입하게 된다.

처음에 조이는 자신이 공간이동을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여러 군데를 방황한다. 순간순간의 위기에 따라 장소 이동을 할 뿐이었는데 그 자체가 공간이동이 되었다. 조이의 그런 능력을 알아채고 우주를 지배하려는 마법의 제국 헥스와 첨단 과학의 제국 바이너리는 조이를 추적한다. 조이가 '워킹'하면서 공간이동을 한 덕분에 위기를 넘기고 있었지만, 그렇게 헤매다 사회탐구 담당인 디마스 선생님을 만나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자신이 사라진 시점에서 폭포에 빠져 죽었으며 그 소식을 듣던 중 헥스 제국의 마녀 인디고에게 붙잡힌다. 그들은 조이처럼 워킹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연료로 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 와중에 인터월드에서 파견된 제이로 인해 구출되지만, 자신의 실수 때문에 복귀하던 중 제이는 목숨을 잃고 만다. 조이가 그려준 좌표 덕에 인터월드로 돌아온 조이에게 싸늘한 시선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조이는 제이를 대신할 전사가 되어야 했다. 조이 자신도 제이가 얼마나 뛰어난 전사였는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지를 알지만 인터월드에서 필요한 재원이 되기 위해 훈련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신병 기초 훈련 일 단계를 마무리 하는 과정에서 위기에 처하고 만다. 자신을 추적한 인디고의 계략에 빠져 동료들만 남겨 놓은 채 인터월드로 복귀한다. 조이는 동료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요청을 하지만 묵살되고 기억이 지워진 채 고향으로 보내진다.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조이는 또 다른 현실과 마주한다. 며칠 동안 기억 상실증에 걸렸던 고등학생의 조이로 돌아와 평범한 학교생활을 한다. 그러다 막내 동생과 비눗방울 놀이를 하던 중 제이의 목숨을 잃게 만든 원인이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머드러프 ‘휴’를 기억하고 만난다. 분명 자신의 기억은 지워졌는데, 인터월드에서 공부했던 내용과 그곳에서 익혔던 무술들이 드러났다. 결정적으로 '휴'를 기억해 낸 조이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혼란에 빠진다.

파란만장한 조이의 ‘인터월드’ 입성(入成)

그냥 평범하게 삶을 이어가야 할지, 인터월드로 돌아가 동료들을 구해야 할지 혼란스런 가운데 또 다시 디마스 선생님을 찾아간다. 디마스 선생님이야말로 조이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줄 분이며, 조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알려 줄 분이었다. 선생님은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고, 인터월드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은 조이는 가족과의 이별을 해야 했다. 엄마에게 모든 것을 설명했지만 이별은 힘들었다.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엄마는 조이를 믿어 주었고, 그렇게 이별을 하고 인터월드로 돌아왔다. '휴'와 함께 동료들을 잃어버린 곳으로 돌아가 우주를 지배하려는 포부를 가진 헥스 제국을 위기에 빠트리고 동료들과 무사히 탈출한다. 동료들과 힘을 합쳐 결코 만만치 않은 마녀 인디고 일당과 맞선 장면은 조이가 지구를 떠나 그곳으로 돌아온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신뢰가 없었던 동료들과 믿음을 만들어 갔고, 힘을 합쳤을 때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하는 귀한 시간이 되었다.

그렇게 인터월드로 귀환한 그들은 영웅이 될 거라 생각했다. 헥스 제국의 음모를 저지했고, 무사히 돌아왔으니 사령관인 올드맨이 자신들에게 큰 상을 줄줄 알았다. 그만큼 그들은 끈끈한 동료애가 넘쳤고, 자신들의 능력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올드맨은 최악의 팀이었다며 너무 자만하다고 되레 엄포를 놓았다. 그러나 '잘했다'는 칭찬과 함께 팀을 유지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그들은 또 다시 새롭게 태어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새로운 임무를 맡는 것으로 파란만장한 조이의 ‘인터월드’ 입성(入成)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무한한 상상력이 필요했던 책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SF와 거리가 먼 나의 독서 취향에 애를 먹을 거라 생각했지만, 의외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그림은 풍부하고 명확했다. 글을 읽어가면서 조금씩 그림을 완성시켜가는 것이야말로 독서를 하는 묘미였고, 독특한 소재 속으로 독자를 이끌어준 저자의 역량에 감탄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 때로는 무척 쉬울 때도 있고, <인터월드>처럼 힘겨우면서 뿌듯할 때가 있다. <인터월드>가 빛을 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어둠을 나온 순간에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 같은 <인터월드>. 그 세계가 한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태극취호’님은?

도능독(徒能讀)을 일삼는 자. 책 읽기도 습관이라 생각하며, 책이라면 환장하며 달려드는 서른을 눈앞에 둔 철딱서니. 언제나 머릿속에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살아볼까 꿈만 꾸는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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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 시간의 강을 건너 그대를 만나다

  

아사다 지로,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북하우스, 2008


칠흑같은 어둠. 시리도록 푸른 연기. 담배연기라 생각했다. 어떤 사연이 있어 연기를 내뿜지 못하고 저리도 곱게 피워 올릴까. 가슴을 누른 무게를 겨우 뚫고 낸 숨통인가. 책을 읽고 다시 보니 그것은 향이다. 죽은 이를 호출하는 가녀린 외침.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은 산자와 죽은자 간의 사랑, 아픔, 그리움을 그린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집이다. 여기엔 7편의 이야기가 있다.

고백컨대 책을 덮고 글을 쓰기가 무척이나 망설여졌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비밀이 있어 그 비밀을 어느 정도 노출해야 하는지 판단이 쉬이 서지 않았고, 어떻게 건드려도 깨지고야 말 것 같은 유려한 문장의 흐름이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한 페이지 전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하던 격한 감정의 출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모한 도전을 하는 이유는 많은 이들과 함께하기 위함이요, 글쓰기를 통해 나의 바닥을 체험키 위함이다. 한 가지 믿음과 한 가지 기대는 있다. 작품이 좋으면 그에 대한 글도 좋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과 어쩌면 영적인 존재가 나의 손을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다. 행여나 여기서 글 읽기를 중단하는 분들을 위해 한 마디 한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은 정말 슬프고 무섭고 아련하다.

슬프고

“그 남녀 손님은 달도 없는 한겨울 산속 길을 서로 부둥켜안고 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왔었다고 이모님은 말했다.” (p 9, ‘인연의 붉은 끈’)

그 남녀는 누굴까. 누구의 눈을 피해 달도 없는 밤 산꼭대기 신사를 찾았을까. 남자는 명문가문의 대학생이고, 여자는 유곽에서 만나 한 눈에 사랑에 빠진 이다. 청춘을 빼놓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이들의 사랑을 남자의 가족은 축복할 리 없다. 둘은 결심한다. 수중의 돈이 허락하는 곳까지 가서 함께 죽음을 택하자고. 하지만 죽음이 온전히 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겪은 고통이 모자란 탓인지, 최후의 자유의지도 예상을 빗나간다. 이렇듯 사랑을 모티브로 한 ‘인연의 붉은 꽃’, ‘뼈의 내력’, ‘손님’은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차로 인해 비극적 삶을 산 이들의 사랑을 노래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어느 것 하나 의지대로 택할 수 없는 운명. 이는 통속 멜로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하지만 아사다 지로의 것은 독하고 슬프다. 시련 후 찾아오는 달콤한 시간은 없다. 오히려 인물들을 비극적 상황으로 몰아넣고, 온몸으로 그 시간을 견디라 한다. 어린 화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연의 붉은 꽃’은 아픔이 더 크다. 화자가 볼 때 청춘남녀가 사랑을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어른들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둘을 가로 막는다. 사랑이 거절당하고, 남녀가 괴로울수록 화자의 상실감은 더 커진다. 작가는 남녀의 비극적 상황에 어린 화자의 애절한 마음을 더해 차곡차곡 슬픔을 채운다.

무섭고

“어찌할 수가 없어 죽는 건 관두고 벌레를 잡아먹거나 상처에 솟은 구더기를 집어먹거나 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를 뜯어서 먹었어.”(p. 87, ‘벌레잡이 화톳불’)

사업에 실패에 시골로 도망친 쓰야마는 가족들이 자신을 만났다는 얘기를 듣는다. 한창 회사가 잘나가던 시절의 ‘나’를. 쓰야마는 또 다른 ‘나’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 같아 괴롭다. 이때 동네 영감님은 힘든 상황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날 수 있을 있음을 말하며, 자신이 겪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얘기한다. 여기서 그 상황을 극복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오로지 그 체험만이 강렬하게 전해온다.

전쟁은 ‘벌레잡이 화톳불’뿐 아니라 ‘원별리’(遠別離)의 배경이 된다. 이들이 일본인이란 걸 생각하면 그들이 마주한 현실이 얼마나 처절했을지 짐작이 간다. 사랑하는 이를 두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땅, 전우라고 불리던 이들은 한낱 고깃덩이가 된지 오래다. 여기에 삶의 희망이 있을 리 없다. 구두끈으로 목을 매려고 해도 툭 끊어져 그것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키운 것도 아닌데 몸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구더기를 바라봐야 하는 심정, 지독한 외로움도 사치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상실해버린 이들의 상황은 그저 무섭기만 하다.

아련한

“아, 안개 속에서 사신이 다가온다. 검은 외투를 입고 얼굴은 목도리로 둘둘 감고 백합 꽃다발을 안고서. (…) ”오지마, 오지 말라고. 나는 아직 안 죽을 거야. 기어코 돌아가서 요리코를 내 품에 안아봐야 해. 내 자식을 내 품에 꼭 안아봐야 한다고. 그런 다음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지금은 제발 못 본 척 지나가줘.””(p. 286~287, ‘원별리’)

고도 근시로 현역 입대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야노에게도 전쟁의 이별은 찾아온다. 그토록 사랑했던, 임신한 아내 요리코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저 문밖으로 나가면 아내를 만날 수 있을 거 같은데 나갈 수 없다. 또 악질적인 감기에 걸려 파르르 떨리는 몸뚱이로는 아내를 마음껏 그리워할 수도 없다. 칠흑같이 어둔 밤 야노는 근무를 서러 나간다. 대기를 가득 메운 안개, 그 안개를 뚫고 오는 죽음의 신. 아니, 난 이렇게 죽을 수 없다. 사랑과 전쟁은 ‘원별리’에서 교차된다.

좋은 기억도 아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다 추억이라고 했던가. 시간은 비극적 사랑과 죽음의 공포를 아련하게 만든다. ‘인연의 붉은 끈’, ‘벌레잡이 화톳불’ 모두 사건의 발생시점과 발화의 시점의 거리가 없었다면 얘기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사진이 바래는 것과는 달리 이들 기억은 빛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매초의 기억은 더욱 강렬해져 몸 속 깊숙이 파고든다. 그토록 바람, 그리워함이 없었다면 산자와 죽은자는 다시 만날 수 없었을 테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이야기는 시간의 강을 건너 그렇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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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아름다운 - 사랑


 리처드 매드슨, <천국보다 아름다운>, 노블마인, 2009

오래 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그림 같았던 영화 한편을 기억한다.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이 바로 그 작품이다. 유채화로 화폭을 그려 놓은 듯 수놓아진 천국의 화려한 모습과 환상적인 영상들이 감동적인 러브스토리와 더불어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이 작품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아 저곳이 천국이구나! 천국보다 아름다운 사랑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고 가슴속 깊이 느낄 수 있었던...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받기도 했던 그 아름다웠던 영화의 원작을 이제서 만나게 된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이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과 함께...

지금에서야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 개인적으로 스티븐 킹의 작품으로 잘못알고 있었던 <나는 전설이다>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 이름을 처음 만났고, 지난 가을 즈음 <시간 여행자의 사랑>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서 그 이름을 가슴속에 선명히 새겨놓았다. 사실 로빈 윌리엄스의 저 영화 원작이 이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책을 집어 들고서야 알 수 있었다. 영화를 만났던 당시의 정말 화려하고 환상적인 영상과 감동적인 스토리에 마음을 빼앗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원작자가 누구였을까 하고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어찌됐건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활자를 통해 그 화려한 영상까지 떠올릴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앤, 상관없어. 당신이 없는 천국은 천국도 아니야.' '이 지옥을 우리의 천국으로 만들면 돼.'

삶과 사랑, 천국보다 아름다운 이야기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그 제목부터 너무 예쁘다. 사랑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로버트 닐슨은 어느 날 자신이 영매라고 소개하는 한 사람에게 원고 꾸러미는 받게 된다. 그 원고 속에는 1년 전 죽은 자신의 동생, 크리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방송작가인 크리스는 어느 날 교통사고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가족들 주변을 떠돌지만 결국 서머랜드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사촌형인 앨버트를 만나고 차츰 그곳에 적응해나가지만 예기치 못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의 아내 앤이 그의 죽음을 비관해 자살을 했고 지옥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크리스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버리면서도 험난하고 거친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여러가지 난관을 뚫고 그녀는 만나게 되지만...

불륜과 이혼이라는 말이 일상생활 용어가 되어버린 듯한 요즘 같은 시대에 크리스와 앤이 보여주는 이런 숭고하고 순수한 사랑은 너무나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사랑만큼 흔한 말도 없지만 사랑이란 말처럼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고 감동적인 말 또한 없다. 크리스가 보여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과 희생은 어둠속에 반작이는 별빛처럼 그렇게 밝게 빛나고 있다. 지옥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사랑하는 이가 없다면 그곳이 천국이라도 천국일 수 없다는 크리스의 말이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잠이 들면 꿈을 꾸겠지. 육체의 짐을 벗었을 때 이 죽음의 잠 속에서 어떤 꿈을 꾸게 될까 두렵구나.' (<햄릿> 3막 1장)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죽음의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 <사랑과 죽음>이 우리 삶 근처에 있는 사후세계를 보여주었다면 그 세계를 넘어 지옥의 하위세계와 서머랜드와 같은 천상의 세계를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리처드 매드슨이 그려낸 죽음의 세계, 천당과 지옥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대비가 아닌 지금의 삶에 충실한 현세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느끼게 된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 사랑하라' 라는 말처럼 오늘을 꿈꾸고 오늘을 사랑하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진정한 삶은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이야. 죽음은 이 과정에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해. 삶을 뒤따르는 건 끝이 아니야. 존재의 영속성만 있을 뿐이야' 라고 말하는 크리스의 마지막 말이 가슴속에 남는다. 이 말속에서 삶이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음미하게 된다. 죽음이 끝이 아니며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이 아닌 '오늘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 일하고 사랑하고 행복하라'라는 가르침이 이 말속에 녹아있다. 영화 속에서 느꼈던 감동과 책이 전해주는 더 환상적이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감동적이고 고귀한 사랑이야기에 저절로 고개가 숙연해진다. 죽음이 아닌 삶을 이야기하는 '천국보다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색다른 감동과 마주하게 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반토막’님은

들고 있으면 팔이 아프고 내려놓으면 마음이 아팠던 시절, 그렇게 전 반토막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삶을 사랑을 한토막으로 채워가기 위해 노력하는 '한토막 바라기' 랍니다. 한토막으로 채워가기 위해 끊임없이 책을 사랑합니다. 책은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힘들고 지친 삶을 이끌어가는 지지대가 되어줍니다. 더불어 즐거운 재미와 행복을 선물해주죠. 어린 시절의 '세발자전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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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돌의 기억들 - 사랑으로 복원한 오만년의 기억들


현고진, <물과 돌의 기억들>, 포럼, 2009


사랑으로 복원한 오만년의 기억들


성경 <전도서>의 저자는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문명은 역사 속에서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고, 새로운 기계를 발명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고, 그 끝은 상상할 수 없다. 멀게는 우주로 가깝게는 인간의 육체로, 거시와 미시를 넘나드는 인간의 능력은 화려하고 그 자체로 경이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해 아래 새것이 없다’라는 성경의 선언은 곱씹어 볼수록 의미롭다. 길가에 놓인 흔하디 흔한 돌 하나, 소리 없이 강폭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소위 인간의 역사나 인간 자신보다는 오래되었음이 분명하다. 발길에 채이는 돌은 너무나 흔하여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무시해 버릴만한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갖고 있는 시간의 역사와 무게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저 돌은 모진 시간들을 인고하여, 오늘 저 길에 놓여 있다. 그 존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의 폭과 영역을 훨씬 넘었고, 넘어설 것이다.

인간이 자랑 삼아왔던 문명이란 저 돌과 물로 이루어진 지구라는 터전이 없었다면 감히 존재나 할 수나 있었을까?  만물의 영장이란 화려한 자화자찬으로 이 행성을 지배하여 왔다고 생각한 인간은 오직 개발과 발전만이 유일한 선이란 착각으로 물과 돌의 겸손함은 알지도 못한 체, 무지한 삽질만 계속하려 한다. 21세기, 대한민국 이 땅에서 벌어지는 4대강 정비사업, 대운하 프로젝트 등이 자연의 엄숙함과 겸손함을 잊은 오만한 삽질의 대표주자다. 

그들의 리드미컬한 삶

현고진 장편 <물과 돌의 기억들>은 5만년 전 원시 구석기인들의 삶을 리드미컬하게 복원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기록은 그대로 인류가 걸었던 발자국이고, 유전자가 저장하고 있는 원형질의 기억이다. 인류는 오랜 시간 무수한 발견을 이룩해냈다. 진보는 발견 속에서 나왔고, 그걸 통해 인류는 보다 나은 삶을 향해 전진 할 수 있었다. 사랑의 발견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는 감정이야말로 5만년 전 구석기인과 현대인이 함께 공유하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은 그 사랑의 원시적인 형태를 여러 갈래로 보여주고 있다. ‘주름살’은 실연을 당한다. 그가 집단에서 종적을 감춘 것은 곧 실연의 고통이 죽음을 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좋아했던 ‘여우비’란 당사자에게 직접적으로 거부의 응답을 받은 그는 더 이상 살아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 집단을 벗어난다는 것은 곧 죽음과 같다. ‘여우비’의 ‘독뱀’에 대한 사랑은 권력지향적인 사랑이다. 잔인한 성정의 독뱀을 사랑하고, 그의 자식을 낳고자 하는 여우비의 욕망은 권력욕을 교묘하게 사랑으로 포장시킨다. 문명의 역사에서 여우비에 비견될만한 권력욕을 지닌 여인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서사의 중심축은 물보라를 사이에 둔 ‘하늘바람’과 ‘푸른지네’의 관계다. 이미 하늘바람의 아내가 되어서 그의 아이까지 두고 있는 물보라를 사랑하고 있는 푸른지네는 복합적인 사랑의 형태를 보여준다. 집단과 집단의 리더인 하늘바람과 푸른지네의 대립은 곧 연인 물보라에 대한 소유, 곧 사랑의 궁극적 쟁취를 목적으로 한다. 푸른지네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연인이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있음에도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연인을 손에 넣으려는 그는 정적의 아이까지 보듬는 괴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푸른지네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건 종족간의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푸른지네였다. 그는 나뭇가지에 올가미를 매달아놓고 그 위에 걸터앉아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보라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애원했다.
‘나를 하늘바람에게 보내 줘’
푸른지네는 올가미를 끌어올려 그의 목에 걸며 쓸쓸하게 말했다.
“나는 영혼이 없다. 네게 다 줘 버렸기 때문에, 네가 가면 나는 죽는다”
( p.144,  현고진 장편 <물과 돌의 기억들>)


그러나 지고지순함은 맹목성의 다른 이름이며 그 열정의 이면에 냉혹한 양날의 칼을 품고 있다. 그것은 사랑으로 미화된 폭력성이기도 하다. 집단의 리더가 한 여자를 위해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원시나 현대에서나 옳은 일은 아니다. 집단의 리더는 대의를 갖고 행동하고, 판단해야 한다. 푸른지네는 잘생겼고, 용맹하며, 건강하고, 남성미가 물씬 풍기지만 사랑하는 여인을 소유하지 못하는 한 그 모든 능력에도 불구하고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은 삶을 살 것이다. 물보라를 소유하고 나서야 그가 아버지 독뱀으로부터 물려받은 잔혹성을 희석시키고, 종족의 지도자로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주지해야 한다. 푸른지네의 사랑은 목적지향적이고, 이기적이며, 맹목적인 야만성 때문에 결코 아름답지 않다. 

세상의 북쪽 끝을 꿈꾸는 하늘바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늘바람’이다. 하늘바람은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개성이 특별하지 않은 인간이다. 그는 그다지 용맹하지도, 싸움을 잘하지도, 영특하지도, 잘 생기지도 않았다. 그는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 제너럴리스트 같은 인물이다. 어느 특정한 능력을 품고 있진 않지만, 다양한 영역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한다. 그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지만, 종족의 어른인 ‘구름호수’의 불호령에 대의를 살필 줄 아는 자기통제가 가능한 인물이다. 그는 ‘느린소’로 대표되는 원로의 지혜를 존중할 줄도 아는 인물이다.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탐험가의 기질이 있다. 그는 누구도 찾질 않는 ‘세상의 북쪽 끝’을 항상 궁금해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작품 속에서 사랑의 완전한 한 형태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아내와 아이를 뺏긴 남자가 보여줄 행동이란 어느 시대건 몹시 단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늘바람은 푸른지네와 행복하게 아이까지 낳고 살고 있는 물보라를 빼앗기 위한 술수를 부리지 않는다. 푸른지네와 피를 부를 수도 있는 싸움도 포기한다. 여기서 하늘바람의 포기는 겁쟁이의 비겁함이 아니다. 그것은 푸른지네의 맹목적인 목적지향적 사랑과 비교된다. 물보라에 대한 사랑, 자신의 아이에 대한 그리움, 푸른지네에 대한 증오, 이 모든 감정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한발 물러서 한번 더 생각하고, 그들의 평화를 깨려 하지 않고, 뒤돌아 자신의 길을 떠날 줄 알았던 하늘바람의 사랑은 뭔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사랑의 모습이다. 이 사랑을 작가는 외롭고, 비참하지만 아름답다라고 썼다.

 하늘바람은 땅을 보고 걷는 주름살을 돌아보며 뜬금없는 물음을 툭 던졌다.
‘사랑이 뭔지 아나?’
주름살은 그를 힐끗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늘바람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걸으며 자신의 물음을 곱씹고 있었다. 사랑은 외로울 수 있다. 사랑은 비참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p.235, 현고진 장편 <물과 돌의 기억들>)


소설 <물과 돌의 기억들>은 서사의 단순성이 보이며, 내용적인 측면의 흥미로운 요소가 산재해 있진 않다. 그러나 이 소설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왜 사랑이 아름다워야 하는가? 왜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닌가? 남녀간의 사랑이란 그렇게 아름답지 않은 경우가 허다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모두를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당신의, 기억 속 사랑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진정 그것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는가? 독자는 어떤 답을 하게 될까?

그러나 하늘바람이 보여주는 행동에는 남녀간의 사랑이란 단순한 감정을 훨씬 뛰어넘는 요소가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의 사랑은 개인의 욕망을 뛰어넘고, 과거에 연연하지 않으며, 미래까지를 내다보고 있다. 그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랑을 단순히 한 인간의 욕망의 범주 내에 가둬두려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욕망이란 본능에 가깝지만 얼마나 많은 폐해를 불러오는가?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어야 한다

사랑이란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욕망이란 더 나쁜 의미의 탐욕으로 흐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죄악은 탐욕에서 나온다. 브레이크가 없는 탐욕 때문에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국가 모두 곤경에 처하기도 한다. 경제의 계급적 폭력성에 매몰된 신자유주의를 주도하던 미국의 몰락이나 前대통령 측근과 가족의 패가망신은 그 좋은 예이다. 탐욕에 물든 정치인, 경제인들이 넘쳐난다. 모든 것이 경제 제일주의로 흐르는 지금 이 땅의 자연은 훼손의 삽질을 기다리고 있다. 탐욕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이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이란 인간의 본능을 극복할 수 있음으로써, 하늘바람은 덜 진화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라는 원숭이가 아니라, 진정한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였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인다. 5만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주위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나 ‘크로마뇽인’의 마인드를 가진 이들이 널려 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자신이 덜 진화된 원숭이에 가깝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늘바람’처럼, 현재와 미래 그리고 자아와 타자의 관계까지를 고려할 수 있는 그 넓은 성정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자. 사랑을 단순히 자기 욕망의 충족행위로 해석하는 이들은 명심할 일이다. “아름답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어야 한다. 사랑은 호모 사피엔스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개츠비'님은?

잡식성 책 읽기를 즐기는 30대중반의 직장인입니다. 좋은 책을 고르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리뷰를 쓰는 것은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소일거리 입니다. 그러나 그 소일거리 때문에 삶이 정말 행복합니다. 한 권의 양서는 바이러스와 같은 감염성이 있습니다. 단, 행복하고 기쁜 생각들을 사람에게 전파합니다. 책 읽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제 인생의 면역력을 높이고, 생의 다양성을 통해 인생의 아름다움을 선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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