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 해당되는 글 46건

  1. 2009.09.24 살아있음에 잔혹하고, 더 아름다운 - <책도둑>
  2. 2009.09.22 편지로, 그대 숨결을 느끼다 - <A가 X에게>
  3. 2009.09.18 그대의 오늘을 살아나게 만드는 주문 - <무지개>
  4. 2009.09.04 너와 나 사이 흐릿한 끈 - <이효석문학상수상작품집 2009>(토끼의 묘 외) (2)
  5. 2009.08.26 아름답기에 더 비극적인 - <검은 새의 노래>
  6. 2009.08.21 관능적 선율 아래 치명적 잔혹함이 - <소리 수집가>
  7. 2009.08.18 꿈꾸는 나의 슬픈 외딴방 - <외딴방>
  8. 2009.08.17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2)
  9. 2009.08.13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 <렛미인 1, 2>
  10. 2009.08.11 치명적인 유혹, 전혀 다른 뱀파이어 이야기 - <스트레인 1, 2>

살아있음에 잔혹하고, 더 아름다운 - <책도둑>

 

마커스 주삭, <책도둑>, 문학동네, 2008

 

사람의 몸속에는 얼마나 많은 눈물이 있을까? 흘리고 또 흘려도 눈물은 그치지 않는다. 살면서 기쁠 때는 밝은 눈물이지만 슬플 때는 어두운 눈물이 뺨을 적신다. 아무래도 눈물의 양(量)에 있어서는 어두운 눈물이 많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뼛속을 시리게 하는 외로움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를 향한 사무치는 그리움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사는 게 고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눈물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짐작과는 다르게 노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 마커스 주삭의 <책도둑>에 놀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노란 눈물을 담긴 흔적을 찾아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갈비뼈 하나가 부러졌다.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아픔이 눈물에게로 몰려갔다. 그리고 하나의 거대한 슬픔 덩어리로 터지면서 노란 눈물이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 소설에 나오는 아홉 살 소녀 리젤이 그랬던 것처럼….

이 소설에서 리젤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화자는 ‘나’다. 동시에 나는 전쟁 중에 가장 바쁜 사람으로 영혼을 가져가는 죽음의 신이다. 일종의 저승사자다. 이런 저승사자도 리젤 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한마디로 그녀는 ‘운(運)’이 좋았다. 저승사자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면 책 덕분이라고 말해주었다. 말(言)을 사랑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하면 책도둑에 푹 빠지게 만들었다.

아홉 살 리젤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뭔가 극적인 삶을 살게 했다. 그게 바로 이 책의 제목과 같은 ‘책도둑’이라는 사실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여서 리젤은 독일의 작은 도시 힘멜에 사는 한스 후버만 부부에게 양자로 맡겨진다. 그리고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연합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이 휩쓸고 가면서 지하실에서 그녀와 함께 숨어 지내던 많은 사람들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빨간색 폭탄이 터지는 한 가운데서 오로지 리젤이 극적으로 살아남으면서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노란 눈물이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하지만 리젤을 굽어보는 히틀러라는 퓌러(지도자)는 말을 사랑했으나 위험했다.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질투는 이상하고 기이했다. 그는 말을 지휘하면서 유대인들에게 다윗의 별이라는 노란 별을 달게 했다. 그의 광기로 인하여 수많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90% 독일인과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10% 독일인들을 죽음의 도가니로 만들어버렸다.

아픈 가슴에서 피어나는 열정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이 소설의 인물들은 저마다 상실에서 비롯된 아픔을 가슴 한 구석으로 품어내고 있다. 전쟁을 바라보는 그들의 긍정적인 시선을 읽고 읽으면 삶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열정이었다. 왜 이런 불행이 생겼을까 푸념했지만 리젤은 책을 읽으면서 견뎌냈다. 그리고 리젤의 양아버지인 한스는 아코디언을 연주하였고 양어머니인 로자는 거침없이 욕을 했으며 리젤을 좋아했던 루디는 뽀뽀하기를 갈망했다. 한편 권투선수였던 유대인 막스에게는 하늘을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젤은 자신의 허허로움을 감싸주던 말이 히틀러 앞에서는 짓눌리고 있다는 것에 분노했다. 끝내는 말의 무기력함을 참지 못하고 말을 미워하게 되었다. 리젤의 후회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질척거리고 있을 때 시장(市長)의 아내 일자 헤르만는 ‘너를 벌하지마’라고 했다. 마지막에 이르러 책이 아닌 용기를 다독거려주었던 일자 헤르만은 시장 집 서재에서 만난 부인이었다. 이렇게 해서 리젤의 글쓰기는 시작되었고 매일 밤 자신의 삶의 10페이지를 완성해나갔다.

잿빛 가득한 이 소설은 작가의 말대로 우리는 살아있음으로 아름다움과 잔혹함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나는 어떻게 똑같은 일이 추한 동시에 그렇게 찬란할 수 있냐고. 말이라는 것이 어떻게 그렇게 저주스러우면서도 반짝일 수 있냐고’ 물어보고 싶은 심정을 헤아리게 했다. 어쩌면 우리들에게 통증과 설렘이 없다면 저승사자인 ‘나’는 굳이 시달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홉 살 소녀의 책도둑 이야기는 성장의 풋풋함이 독특했다. 무려 800페이지가 넘는 이야기 전체가 10편의 책이야기로 엮어져 있다. 이것은 마치 패치워크 같았다. 10편의 책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조각이었으며 그 조각들이 하나의 작품이 되면서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삶의 진리를 우연히 발견한 기쁨이라고 할까? 기억의 저편에서 사소하거나 보잘 것 없던 것들이 어느 날 소중한 기쁨으로 도둑처럼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혹은 도둑이 되어 내 생애의 불행을 마구 도둑질하게 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오우아’님은?
다독보다는 정독을 좋아하고 버스보다 전철을 좋아하고 집보다 도서관을 좋아하는 독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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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그대 숨결을 느끼다 - <A가 X에게>


 

존 버거, <A가 X에게>, 열화당, 2009


몸이 조금씩 아파오는 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내가 약국을 다녀올 수도 있었지만, 이미 옷을 갈아입은 뒤라 조카들에게 약 이름을 알려주고 심부름을 보냈다. 집 근처에 약국에 세 군데 있어서 설마 못 사올까 싶어서 안심하고 보냈는데, 휴일이라 그런지 모두 문이 닫혔다며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근방의 약국들이 한꺼번에 문을 닫으면 다급한 사람은 어쩌라는 건지, 잠시 푸념을 한 뒤 헐레벌떡 뛰어온 조카들에게 수고비 500원을 쥐어 주고(배분은 알아서 하겠지.), 읽다만 책을 펼쳤다.

굳이 안가도 되겠다 싶은 약국을 조카들을 시켜서 가게 한 것은 존 버거의 소설 속 인물  아이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곳에서 아이다의 환영을 보게 될까봐. 조카의 손을 거쳐 내게 도착한 약에서 혹시나 그녀의 손길을 느낄까 그녀를 나의 현실로 끌어 내렸지만, 그런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다. 다른 약국을 간다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진탕 아파 버렸다. 데굴데굴 구르고, 토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나니 정신이 몽롱했다. 오전 근무만 하고 집으로 돌아와 내리 몇 시간 동안 잠만 잤는데도 아픔은 가시지 않고, 배는 고프고, 생각은 한정돼 버리는 것에 상실감을 느꼈다.

누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에 책을 꺼내 읽었다. 손에 쥔 책을 다 읽었음에도, 어제 읽은 존 버거의 소설 속의 아이다란 인물이 자꾸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다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를 컴퓨터 앞으로 이끌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남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 그녀가 한 남자에게 쓴 편지들이 묻힌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감옥에 갇힌 남자, 편지하는 여자

아이다는 감옥에 갇힌 한 남자에게 편지를 쓴다. 남자는 반정부 테러 조직을 결성했다는 혐의로 이중종신형(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고, 죽은 나이만큼의 기간 동안 시신을 감옥 밖으로 내올 수 없다는 형벌.)을 받을 사비에르라는 청년이다. 새 교도소가 들어서면서 73호 감방에서 머물렀던 마지막 수감자. 협소한 수납 칸에서 아이다가 보낸 편지가 발견된다. 이 책에는 부치지 않은 편지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 경위는 밝히지 않고 사비에르가 정리한 순서그대로 실려 있다.

아이다는 비교적 차분한 어투로 사비에르에게 편지를 쓴다. 격정에 휩싸여 쓴 편지는 종종 붙이지 않았지만, 이중종신형을 당한 남자에게 쓴 편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차분하다. 자신의 일상을 토대로 그와의 추억을 기록해 가는 그녀는 담담해 보인다. 그러나 다양한 언어로 애칭을 바꿔가며 애정을 표시하고, 편지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사랑해요’라는 표현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흔히 볼 수 있는 연애편지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아이다와 사비에르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회도 허락되지 않고, 결국 유일한 교류 수단은 편지 밖에 없다.

돌아올 수 없는 이에게 쓰는 편지란 어떤 기분일까. 오래 전,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그리움을 가득 담아 편지를 쓴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이다의 먹먹한 기분이 조금은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휴가, 면회, 제대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반면 아이다는 그 모든 것이 단절된 상태고, 강제로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밖에 전할 길이 없다. 편지 안의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 내재된 그리움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편지 속의 그리움은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처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사비에르가 어떠한 연유로 잡혀갔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지만, 혼란스러운 국가, 억압당하고 강제성을 띠는 인권,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두려움은 늘 감지된다. 그녀도 어떤 활동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저자의 설명대로 숨겨진 의미를 찾기란 어렵다. 사비에르를 향한 그리움, 거대한 집단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한 인간과 무리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숨이 차오를 지경이다. 
 
오랜 기간 사비에르가 받았던 편지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녀의 그리움은 배가 되어 내 안에 맴도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잠시 책을 덮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아이다의 상실감에 비할 바 못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천연덕스럽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상세히 기록해가는 아이다, 큰 사건을 일상처럼 말해야 하는 아이다, 처절할 정도로 사랑하는 이의 온기를 느끼고자 자신의 손을 그려 나가는 아이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갈라놓은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심마저 생긴다.

아이다의 편지에 상응하는 사비에르의 편지는 없다. 다만 그녀가 보낸 편지 뒤편에 사비에르의 메모가 있는데, 그의 해설이 필요한, 난해하고 짤막한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 글은 아이다에 대한 글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 행해지는 반인간적인 행위에 대한 개탄과 상대성을 그린 것이 많다. 그 낯선 이질감에 몸을 떨면서도 사비에르가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그랬을까. 감옥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그는 아이다의 편지의 뒤편에 세상의 곳곳을 누비며 보이지 않는 활동가다운 호소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더라도 사비에르가 아이다에게 보낸 편지는 상세히 알 수 없었기에 그런 아이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난감해지기도 한다.

감추지 않는 마음, 아니 감출 수 없는 마음
 
아이다가 보낸 편지의 무게가 가벼웠더라면, 사비에르의 메모가 아이다를 향한 것이었다면 편지를 읽는 내 마음은 어떻게 변모돼 갔을까. 아마 조금은 특별한 연애편지로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현재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가볍게 읽고 지나칠 수가 없다. 약국에서 일하는 아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전하며, 때로 활동가로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이 알고 있는 다양한 지식들을 진부하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사비에르 앞에서만큼은 한 사람의 여자이고 싶은 마음 또한 감추지 않는다.

아이다의 편지를 읽으며 사비에르의 메모가 무심하다 싶다가도 그가 한두 마디씩 흩뿌려 놓은 아이다를 향한 마음을 볼 때면 둘의 단절이 피부에 와 닿아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단절이 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져 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하다. 세계화를 빌미로 이루어진 폭력과 자본세계의 병폐와 만인에게 가해지는 불편한 진실을 파악할 힘이 내게 남아있을 리도 없다.

연인(戀人)의 단절된 상황으로 나머지 배경을 파악해 나가는 도리밖에 없다. 아이다의 절절한 편지, 사비에르의 개탄과 비난이 섞인 메모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과연 나는 행복한 것일까, 저들의 모습을 무시해도 괜찮을 것일까란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물론 둘의 단절 앞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이다가 얼마를 기다려야 사비에르가 돌아올지 알 수 없었고, 사비에르가 과연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마지막 편지 뒷면에 그려진 ‘오늘 밤의 탈출 경로’를 통해 둘의 재회를 잠시나마 꿈꿔본다. 먹먹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들의 운명이 어떤 종말을 맞든 그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저자의 말처럼 신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이 처한 상황들이 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크지만, 그 바람은 아주 먼 얘기로만 느껴져, 내 존재가 너무나 미미하게 다가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존 버거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가라 그의 신간이 나왔나 정기적으로 검색해 본다. 우연히 신간이 나온 것을 보고 바로 구입했는데, 그의 소설은 처음이거니와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의 산문과 시, 평론을 주로 읽다 소설을 마주하게 되니 다시 한 번 그의 역량에 감탄하면서도, 허공을 향한 흐릿한 시선을 거둘 수 없는 나를 자주 만나게 됐다.

아이다의 편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사비에르의 메모에 동감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존 버거가 그려낸 세계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이 책을 계기로 그의 소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먹먹한 가슴앓이가 계속 이어지더라도 다른 작품을 탐독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당분간은 아이다란 인물이 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을 갈망하며 그의 새로운 작품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련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태극취호’님은?
도능독(徒能讀)을 일삼는 자. 책 읽기도 습관이라 생각하며, 책이라면 환장하며 달려드는 서른을 눈앞에 둔 철딱서니. 언제나 머릿속에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살아볼까 꿈만 꾸는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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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오늘을 살아나게 만드는 주문 - <무지개>


 

요시모토 바나나, <무지개>, 민음사, 2009


얼마 전, 아침에 집을 나서는데 태양 5cm 옆에 있는 무지개를 봤다. 요즘 아침에 초점이 맞지 않아 세상이 왜곡돼 보이는 기현상을 겪고 있어, 헛것을 본 게 아닌가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그런데 형태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분명 무지개였다. 늘 같은 아침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무지개가 고마워 한참을 바라봤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무지개 너머에는 뭐가 있을까.’ 몸은 만원 전철을 향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무지개 너머의 공간으로 향했다. 그리고 하늘 건너편 타히티 섬에서 무지개를 바라보는 ‘그녀’ 에이코를 만났다.

에이코는 도쿄의 타히티안 레스토랑 ‘무지개’에서 오랫동안 일한 플로어 매니저이자 치프였다.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어머니가 운영하던 가게에서 일손을 돕던 그녀는 식당에서 일하는 것이 좋았다. “도쿄의 여느 장소와 다르게 시간을 두고 자연스럽게 일궈진 그 모습”이 좋았고, “맑은 날에는 투명하게, 비 내리는 날에는 부옇게, 구름 낀 날에는 차분하게, 한꺼번에 밝혀진 불이 귀엽게 빛나”는 것이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에이코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일을 치르느라 피곤했는지 아니면 그 슬픔이 몸에까지 번졌는지, 그녀는 쓰러졌다.

식당에서 일하기 어렵게 된 에이코는 무지개의 오너 다카다의 집에서 가정부로 일할 것을 제안 받는다. 고민을 하던 그녀는 ‘몸이 좋아지면 식당에서 일할 수 있다’는 약속을 받고, 제안을 받아들인다. 오너의 집은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오너의 아내는 남편과 달리 차가웠고, 집의 개, 고양이, 정원은 피폐해질 데로 피폐해져 있었다. 평소 살아있는 것을 좋아하던 에이코는 동물들을 데리고 병원에 가고, 정원을 정성껏 관리하면서 집안 분위기를 바꾼다. 하지만 출산을 앞둔 오너의 아내는 개를 팔아버리고, 에이코는 그 집을 떠날 것을 결심한다. 다카다에 대한 연민을 느끼면서….

에이코는 타히티로 향한다. 자신이 애정을 품고 일했던 식당의 원천이기도 한 타히티는 그녀에게 치유의 공간이다. 섬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산책을 하든, 수영을 하든, 잠을 자든, 그녀를 포근히 안아 주었다.

마치 꿈같다. 마치 무지개를 보는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세계에 일곱 가지 빛깔이 모두 들어 있다. 그리고 그 빛들이 서로 번지듯 가늘고 예쁜 리본 띠가 되어 한들한들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했다. (p. 17)
 


사진제공 민음사


1 대 무한대의 공간

‘타히티’는 ‘1 대 1 대응’이 무의미한 공간이다. ‘내가 하나 주면, 너도 하나 줘’란 세속의 공식이 통하지 않는 공간이란 말이다. 타히티의 하늘, 바다, 햇빛 그리고 무지개는 사람의 꼴에 상관없이 관대함을 선사한다. 타히티에서 에이코는 시공(時空)을 넘어 유년의 기억, 다카다의 정원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 그녀가 경험했던 할머니의 가게는 돈과 음식이 교환되는 공간 이상의 의미였다. “할머니 얼굴만 보아도 마음이 놓인다는 사람”, “엄마가 만든 생선찜이 먹고 싶다는 사람”, “간판 아가씨였던 나를 보러 오는 사람” 등 손님들은 각자의 이야기를 들고 찾아온다. 정원도 마찬가지다.

그 정원에 발을 디디면 나는 힘이 왕성한 장소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중심이 곧추서는 듯한 안정감을 느꼈다. 어느 틈엔가 새싹이 돋아나고 꽃망울이 맺힌 것을 보면 얼굴에 절로 웃음이 피었고, 그런 나날의 변화가 과장스러울 만큼 감수성을 자극한다는 것도 알았다. (…) 더불어 나 역시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보살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p. 69)

지금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주고받는 것’을 뛰어넘는 공간은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위안과 감동을 준다. 에이코가 타히티 섬에서 만난 자연에 대한 풍성한 감상, 그리고 동물, 정원, 다카다와 교감하면서 만난 경이로운 체험은 우리를 판타지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무지개>는 작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남태평양의 화산섬 타히티를 여행하고서 쓴 작품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그녀가 본 것은 바로 이런 위로와 충만함이 아닐까.

에이코가 머물었던 그곳에 가고 싶다. ‘기상’, ‘놀기, ’밥, ‘휴식, ’꿈나라’로 가득했던 유년시절의 생활계획표 달랑 한 장 들고 말이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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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 사이 흐릿한 끈 - <이효석문학상수상작품집 2009>(토끼의 묘 외)

 

편혜영 외, <이효석문학상수상작품집 2009>(토끼의 묘 외), 해토, 2009

 

가산 이효석 선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고, 신진 작가 발굴을 위해 제정한 ‘이효석문학상’이 올해로 10회를 맞았습니다. 그동안 이순원, 성석제, 윤대녕, 정이현, 구효서, 박민규, 김애란 등 주목받는 작가들이 이효석문학상을 거쳐 갔습니다. 10회를 기념하는 <이효석 문학상 수상 작품집 2009 (토끼의 묘 외)>(이하  <작품집>)에는 편혜영, 김애란, 박성원, 조경란, 이장욱, 천운영, 한유주 등이 함께했습니다. 이중 편혜영 작가는 이효석문학상을 수상, 표지에 얼굴이 가장 크게 나오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이번 문학상 수상작은 편혜영 작가의 <토끼의 묘>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6개월짜리’ 파견근무에 나갑니다. 주인공은 도시를 떠나 조금 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고 파견근무를 수락했지만, 그곳에서의 삶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별 의미 없는 일들, 개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무적인 인간관계, 심지어 무단결근을 해도 아무런 일이 없었던 듯 통장에 잔고는 늘어납니다. 이게 배부른 투정 혹은 편안한 삶일까요? 존재의 이유가 무(無)로 사라진 공간에서 주인공은 토끼를 발견합니다. 애정을 주지 않아도, 아무 때나 버려도 되는 애완용 토끼. 주인공은 버려진 토끼에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토끼의 묘>가 흐릿한 인간관계를 건조하게 그린 작품이라면 수상작가 자선작 <크림색 소파의 방>은 그로 인한 인간의 내재적 불안과 공포를 그린 작품입니다. 소도시에서 지방근무를 하던 ‘박’은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아내와 젖먹이 아기와 함께 서울로 이사를 갑니다. 무미건조하기만 했던 소도시를 떠난다는 기쁨도 잠시,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자동차 와이퍼가 고장 나 폐허가 된 주유소로 도움을 청하러 갑니다. 술 취한 청년이 와이퍼를 고쳐주지만, 박의 기분은 좋지 않습니다. 자동차를 고치는 도중 아내의 젖가슴을 쳐다보는 그의 시선, 도움의 대가를 바라는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불청객과의 만남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서울로 향하지만, 차는 갑자기 멈춰 서고 불쾌함은 불안과 공포로 바뀝니다.

김애란의 기수상작가 자선작 <너의 여름은 어떠니>는 청년 실업자로 방바닥과 친분을 쌓고 있는 미영이 주인공입니다. 고향 친구의 장례식에 갈 예정인 미영은 대학 시절 가슴에 품었던 선배의 전화를 받습니다. 도움을 청하는 다급한 목소리에 미영은 선배를 만나기로 하고, 설렜던 한 때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선배의 모습에서 ‘선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선배가 미영을 부른 것은 자신이 만드는 방송의 게스트로 섭외한 것입니다. 미영은 날씬한 여인과 핫도그 많이 먹기 대회를 벌이고 있는 ‘뚱뚱한 여자’가 됩니다. 선배와의 기억, 고향 친구의 죽음, 핫도그를 씹고 있는 지금의 나. 미영은 눈을 감습니다.

듣고 싶어, 아니 말하고 싶어

추천 우수작 <고백의 제왕>(이장욱)은 <너의 여름은 어떠니> 보다 시간이 더 오래 지난 대학 동창들의 이야기입니다. 대학 시절 서양철학을 공부하며 지식을 논하던 이들. 하지만 이제 그런 열기는 세상의 바람에 날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매해 하는 망년회가 지겨워질 무렵 이들은 ‘고백의 제왕’이라 불리던 친구 ‘곽’을 부릅니다. 곽은 자신의 첫 경험, 부친 살해 시도 등 쉽게 상상치 못했던 일들을 ‘고백’해 친해지고, 또 멀어진 친구입니다. 그런데 친구들 모두 곽과의 연락을 끊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개인적으로는 다들 곽과의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곽과 은밀한 고백을 들으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픈 중년 사내들의 욕망. 어쩌면 감정의 농도가 짙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곽의 모습이 부러웠는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추천 우수작 <웃는 동안>(윤성희)은 죽은 ‘나’가 바라본 친구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입니다. 예고된 죽음을 맞은 ‘나’는 친구 영재, 성민, 민기와 함께 자신의 장례식을 바라봅니다. ‘친구의 죽음’이란 비장한 출발이지만, 젊은이들의 여정은 유쾌하기만 합니다. 친구들은 ‘나’와의 약속대로 장례식장에 선글라스를 끼고 가야하는지 고민하고, 예전에 극장에서 훔친 낡은 소파를 들고 차례대로 자신의 집으로 가기도 합니다. 초등학생들에게 ‘이건 움직이는 자동차야’라고 ‘뻥’이나 치면서 말입니다. 누가 봐도 세상이 버린 ‘루저’지만, 그래도 이들의 관계는 따뜻합니다. 한 여자를 두고 누가 대시할까 시합했던, 수험표가 있으면 할인받는다는 말에 수능시험도 안보고 극장을 찾았던 기억이, 비록 한 명이 죽었지만, 여전히 유효하니까요.

언급한 작품들은 속에서 관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흐릿해진 인간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외로움과 불안, 공포(편혜영), 그리 긴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관계를 부정하게 되는 젊은이들(김애란), 냉정한 시간이 멀어지게 한 관계 속에서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는 중년의 사내들(이장욱), 그리고 세상의 버림을 받았지만 함께 있어 기죽지 않는 청년들(윤성희)까지. 또 <너의 여름은 어떠니> <고백의 제왕> <웃는 동안>에는 공통적으로 죽음의 정서가 깔려 있어, 현실의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작품집>에는 이밖에도 추천 우수작 <기타부기 부기우기>(조경란), <남은 교육>(천운영), <장면의 단편> (한유주)등의 단편 소설들과 편혜영의 수상 소감, 문학적 자전, 김애란 등의 ‘내가 만난 편혜영’ 등이 실려 있습니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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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기에 더 비극적인 - <검은 새의 노래>

 

아름답기에 더 비극적인 - <검은 새의 노래>

 

현기증이 날 정도로 눈부신 하늘. 날개를 세차게 퍼덕이며 나는 새들. 그 중 한 쌍은 생의 축복을 온몸으로 느끼듯 아름다운 사랑 놀음을 한다. 그러다 욕정을 참지 못한 수컷은 암컷에게 씨앗을 전하려 하지만, 암컷은 몸을 비틀어 수컷의 노력을 수포로 만든다. 그리고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암컷. 하지만 수컷은 언젠가 다시 그 은밀한 노력을 재개할 것이다. 그들의 날개는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으며, 눈부신 하늘은 그들의 사랑을 관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원주민 청년 씨비야는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또한 한 여성(버로니카)을 가슴 속에 품고, 그녀에게 다가가 사랑(혹은 욕망)을 드러었다. 하지만 암컷이 그랬듯 버로니카는 씨비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씨비야가 바라본 새들과 같은 것은 여기까지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 ‘감히’ 피부색이 다른 버로니카를 탐한 씨비야는 강간범으로 체포되고, 좁디좁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에게 다시는, 버로니카를 처음 만난 해변을 수놓던 눈부신 햇살은 허락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씨비야는 세 번의 소외를 느낀다. 첫 번째는 피부색으로 인한 운명적 소외다. 그는 원주민 치고는 많은 교육을 받지만 운명의 그리 관대하지 않다. 그는 백인 정착촌을 위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고, 대학에서는 흑백 분리 수업을 받았다. 또 바닷가에서는 ‘백인전용’ 팻말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두 번째 소외는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낙인이다. 사람들은 사건의 진위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백인들에게는 ‘금기에 도전한 쳐 죽일 놈’이고, 원주민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여기에 씨비야라는 존재는 없다. 그냥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강간범’만 존재한다.

세 번째 소외는, 앞의 것들보다 사태가 심각한데, 자기감정으로부터의 소외다. 해변을 걷던 씨비야는 ‘마치 고대도시의 유적에 있는 아름답고 부서진 황금 상 같은’ 영국인 소녀 버로니카를 본다. 그녀의 몸에 붙잡힌 그는 가던 길을 멈춰, 그녀의 매혹적인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혼자 마음을 졸이고, 며칠 동안 그녀를 기다리면서 겉잡을 수 없는 내적 충동에 휩싸인다. 그런데 세상이 손가락질 하고, 버로니카가 그 일을 ‘악몽’이라고 하면서 씨비야는 자기감정에 대한 확신을 잃어간다.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

결국 그 사랑은 백인에 대한 분노, 운명의 저주, 일시적인 욕정 가운데 방향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마저 박탈당한다. 남은 건 자신을 관찰 대상으로 보는 스위스계 독인인 범죄학자 에밀 뒤프레와 희망이었던 자식이 절망으로 변한 슬픔에 사로잡혀 눈물범벅이 된 어머니뿐이다.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한 쪽은 사랑이고, 다른 한 쪽은 아니라고 하는데, 이를 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한 쪽이 ‘폭력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사랑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씨비아의 기억은 ‘사랑’스럽다. 이는 온전히 작가 루이스 응꼬씨의 정교한 감정 묘사에 기인한다. 그는 씨비야가 버로니카에게 처음 마음을 빼앗겨 열병을 앓고, 우연히 마주쳐 느끼게 되는 환희의 순간 등을 을 더없이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버로니카와 나는 그저 단순하게 마주친 것이 아니라 우연한 포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의 몸을 향해 거의 쓰러지듯 충돌했다. (…) 그녀가 입은 씰크 옷의 감촉은 물론이고 그녀의 맨팔의 감촉을 느꼈을 때 나는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그때 나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떨어진 물건을 집으려 몸을 굽혔다. 그녀는 낮은 어조로 공손하게, 그리고 백인 여성이 원주민에게 하는 것치고는 아주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그것은 그녀가 오래전부터 마법에 걸린 내 심장에 감아온 모든 욕망의 실타래를 풀어낼 만큼 강령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p. 134 - 136)

이 쓰라린 비극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답은 멀지 않다. 그가 ‘검은 새’이기 때문이다. 근대 백인들은 말했다. 인간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자유롭다고. 단 검은 새는 예외. 백인들은 검은 새의 노래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씨비야와 버로니카의 이야기에 결말만 있을 뿐, 그에 앞서 펼쳐진 이야기가 없다. 물론 씨비야의 이야기에는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다. 그는 금기에 도전할 생각도, 누군가를 해칠 마음도 없었다. 만약 그들이 이 마음을 들었다면, 그리고 그 후회도 지나치게 늦지만 않았다면 비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이 새에게 검은 색을 주었다면, 노래는 허락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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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적 선율 아래 치명적 잔혹함이 - <소리 수집가>

 

트리아스 데 베스, <소리 수집가>, 예담, 2009

 

“오, 지존의 쾌락이여!”

에로스(Eros;사랑) 속에 타나토스(Thanatos;죽음)가 내재화 된 자, 절대적이고 완벽한 쾌락을 소유한 존재, 축복인가, 저주인가? 아일랜드의 전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 사랑이야기,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를 차용한 이 낭만적 작품은 잔혹한 죽음이 즐비함에도 관능적 설렘이 전체를 지배한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흡수하고 저장하는 아이, 소리의 형태, 소리의 정수, 소리의 본질, 그리고 소리의 존재를 놓치지 않는, 더 이상은 해체할 수 없는 소리를 구별하는 천부적 능력의 소년, ‘루트비히’의 경이롭고 절망적이며, 치명적이고 지고한 사랑의 이야기다. 소리에 대한 무한한 영역을 갖춘 소년은 소리를 받아들이는 대상에서 새로운 소리를 창조하는 존재로 성장한다. 독일연방 최고의 성악가로.

모든 이들이 탄성을 내뱉는 천상의 목소리를 들려주지만, 루트비히 자신만은 속이 텅 빈, 무언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함을 채우지 못한다. “간절하고, 경이롭고, 영원한 소리, 완벽한 천상의 소리, 지각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닌 감흥 같은 그 소리”는 바로 자기 내면에 숨겨진 소리이고, 곧 이의 자각은 완벽함, 신으로서의 자신의 발견이다.

그러나 절대적이고 완벽한 것, 불멸의 사랑에는 오로지 죽음만이 존재한다는 ‘영원한 사랑’의 이중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여인들을 사랑의 정염에 휩싸이게 하고, 저항할 수 없는 사랑의 쾌락에 몸을 던지게 한다. 사랑의 묘약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데려간 곳이 삶이 아니라 죽음이듯이, 루트비히의 ‘사랑의 음향’을 품고 있는 정액은 여성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독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죽음으로 내모는 절정, 엑스터시(ecstasy)는 숙명적 절망을 확신시킬 뿐이다. 모든 여인을 마음껏 유혹할 수 있는 힘, 그 완벽한 선율은 곧 저주의 다른 이름일 뿐.

루트비히의 이 원죄적 절망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그루누이’처럼 향(香)으로 모든 인간을 조종하지만, 자신만은 그 향기에 취할 수 없는 그 절대적 부조리와 닮아있다. “음악적 관능성이라는 보호벽 아래 치명적인 잔혹함을 감추고”, 여성들의 생명을 빼앗아 영혼을 섭취하는 도구가 된 육체는 온통 고통이 되어버린다. 이렇듯 사랑과 죽음의 불가분성이란 이야기 구조 속에 삶 최고의 숭고한 명제로서 자기희생의 고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지만, 최고의 선(善)으로서의 지고한 사랑, 절대적이고 완벽한 쾌락이란 뛰어넘을 수 없는 모순, 절망이란 고통과 함께 하고 있음을 포착하고 있다.

한편, 소설 내내 흐르는 관능의 미학 또한 이 작품에서 간과할 수 없는 요소가 된다. “온 몸이 팽팽하게 조여 오는 느낌”, “나는 더 세게, 점점 더 세게 몰아붙였고 급기야 ‘크레센도(점점 더 세게)’의 한계를 넘어, 정점으로 치달아 버렸다.” 육체의 전율과 갈망, 충동, 도발, 황홀경이 장식하고 있다. 더구나 이성(理性)보다 더 상위에, 욕망보다 더 강한, 운명 보다 더 강한, 영혼을 파괴시키는 어떤 힘이, 존재와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 같았다는 두 번째 사랑의 결합인 ‘루도비카’와의 극한적 절정을 향해 달려가는 정사의 묘사는 가히 압권이랄 수 있다.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실제 서신(書信)이 수시로 차용되면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조는 클라이맥스를 치닫는 작품의 긴장감과 흡입력을 더더욱 고조시키고,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3막의 “쾌락에 대한 극단적 욕망과 죽음에 대한 결사적 희구가 동반되는 총체성”의 표현과 같이 상상력과 그 격정적 떨림을 공명시킨다.

“천국의 문에 들어서는 것보다 더 지고(至高)할 수밖에 없는 사랑!”이 숨 가쁘게 흐르는 작품이다. 오페라와 전설이 교묘하게 교차하며, 마치 19세기 낭만주의가 부활한 듯한 불멸의 사랑을 담은, 삶의 충동이 걷잡을 수 없이 분출되는 소설이다. 치명적 죽음을 머금고 우리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사랑의 선율이 어디선가 들여오는 듯하다. <향수>를 넘어설 걸작이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있느니!
오감이 기쁨에 전율하느니!
갈망하는 사랑으로 피어나는 꽃의 자태.
느긋한 사랑이 빚어낸 완벽한 설레임이니!
향락의 충동이여, 나의 가슴을 진정시킬지니!
이졸데! 트리스탄!
세상 먼 곳에서 내 그대를 소유하느니!
도발적인 그대의 지고한 사랑이여.
나, 오로지 그대를 위해 살아 있느니!”   
(p. 284. 트리스탄의 노래中)

오늘의 책을 리뷰한 ‘비의식’님은?
누군가는 독서를 통해 존재론적 변신이니 극기복례를 말하지만, 나에게 독서는 “그저 스스로 사는 것에 대한 희로애락을 좀 더 폭넓게 느끼기”위해서이다.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나 스스로를 격려하고 위무하여 삶을 건강하게 유지하겠다는 정서적 위안이고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절대적 도구이다. 생이란 외로움을 더욱 민감하게 느끼는 중년이란 세월의 풍화에는 책읽기가 더욱 위로가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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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나의 슬픈 외딴방 - <외딴방>

 

신경숙, <외딴방>, 문학동네, 2001


열일곱이 되던 해, 엄마와 처음 단 둘이서 여관에 누웠다. 아주 작은 방이었고, 온돌이었다. 4시간을 서서 시외버스를 타고 도착한 생경한 곳에서 엄마도 나도 긴장하고 있었다. 추웠던 기억은 없고, 엄마의 깊은 한 숨 소리만 기억에 남는다. 열일곱의 나는 좀 더 넓은 세상을 꿈꿨고, 엄마는 내 고집에 못이기는 척 져주었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내게 해장국 비슷한 것을 하나만 시켜 놓고 엄마는 말했다. 자취방을 얻지 못하면 그냥 내려가는 거라고. 맛없는 밥을 젓가락으로 헤저으며 고개만 끄덕였던가. 아니, 엄마는 말뿐이며, 꼭 자취방을 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나이의 곱절의 시간이 훨씬 지났고, 엄마는 이제 내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집을 떠나야 했던 이유는 달랐지만, 외딴방 열여섯 소녀를 만나는 내내 가슴이 아팠다. 아니다, 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자전적 소설인 <외딴방>에 등장하던 엄마는 여전하게 살아 있는데, 나에게는 엄마라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열여섯, 작가가 되고 싶었던 소녀는 작가가 되었고, 그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여전하게 그 무언가를 동경한다. 내게 주어진 방은 주인집 거실을 돌아 계단을 터고 옥상으로 열린 문을 열면 만나는 작은 옥탑방이었다. 우연하게 집을 구하다 처음 만난 S와 고등학교 졸업까지 3년을 살았고, 대학에 입학을 하고도 몇 달을 혼자 더 살았다. 물론 내가 살았던 시대는 소설 속 열 여섯의 소녀와는 다르다. 그 시절에도 산업체라 해서 야간학교가 있었지만 가난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컸다.

그러나 소설을 통해 나를 보는 것은 감성적인 것이다. 표정이 많지 않았던 시절, 밥물을 맞추지 못했던 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밥을 해서 노랗게 색이 변할 때까지의 밥으로 도시락을 쌓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난 밤 조심조심 설거지를 했던 시간이었다. 외사촌과 번갈아 밥을 했던 것처럼 S와 밥을 나누어서 했다. 공부에 대한 열정도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내 지식의 크키는 곧 바닥을 드러냈다. 꼭 학교를 가야 했던, 그래서 작가 되어야 했던 열여섯의 소녀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웠고, 부스스한 퍼머머리에 낡은 외출복뿐이었던 엄마에게 ‘참 못된 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아마도 외딴방은 지금 쪽방촌이라 불리는 곳이었을 것이다. 열여섯에서 시작해 열아홉 까지 살았던 그 공간을 잊고 싶었던 것은 그 시절을 함께했던 사람들에 대한 아픔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산업현장을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노조에 가입하면 가고 싶었던 학교를 가지 못했던 그 시절, 어린 소녀가 회사를 얼마나 두려워했고, 직장 동료인 노조원에게 얼마나 미안한 마음을 가졌을지 온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소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도 짐작 할 수 없다. 유명한 소설가가 되어 그 시절의 지인들은 그저 반가운 마음에 연락을 취하고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워 또 하나의 외딴방으로 숨어버린 그 마음을 알지 못한다. 다만, 혼자이고 싶은 순간이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오로지 나 혼자만 숨 쉬고 싶은 순간을 경험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살아갈 수 있는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녀에게 소설은 무엇이었을까? 살아갈 수 있는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소설에서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아파하고, 더 많은 눈물을 흘리며 나 아닌 다른 이로 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신경숙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글쓰기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이 갖는 의미, 소설을 통해 딱지가 내려앉지 않은 상처가 딱딱한 딱지가 들어앉아 나아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파업이 일어나고, 임금이 체불되고, 동료가 떠나고, 데모에 참여했던 오빠가 다치고,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던 사람들 속에 대학이 가고 싶어 학원으로 학교로 바빴던 자신이 때론 밉고 싫었을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었던 시절, 그 무엇을 위해 자신을 다독였고, 꿈을 향한 걸음이라 여기며 참아왔던 시간들. 그러나 소설 속 소녀가 사랑했던 희재 언니의 죽음은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 될 수 없고, 자신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희재 언니의 운명이고 선택이었다 해도 소녀는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그림자와 평생 함께 살아갈지도 모른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순간을 끄집어내어 글로 태어나게 하는 과정이 그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소설이니까 하며 살을 붙였다가 다시 떼어내기를 반복하며 그 시간 내내 열여섯의 소녀로 살았을 그녀를 만나는 게 아프다. 고단한 삶을 살았을 그녀가, 편안 자세로 잠들지 못하는 그녀가, 희재 언니의 목소리를 듣는 그녀가 아프다. 

그 시절, 권력이란 이름으로 약자의 삶을 농락한 그들에게 화가 난다. 그저 웃고 싶었고, 그저 공부하고 싶었고, 그저 합당한 권리를 누리고 싶었을 뿐인데.  2009년, 지금은 어떤가? 여전히 공권력은 시민 앞에 겁을 주고, 여전히 외딴방은 존재한다. 외딴방이 아니더라도, 열여섯의 소녀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나는 슬프다.

신경숙의 소설은 슬퍼서 때로 주저하게 된다. 눈물을 삼키게 하고 가슴에 바람의 길을 만든다. <외딴방>은 <엄마를 부탁해>와 나란하게 고백의 글이다. 해서 더 슬프다.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그녀의 삶이라서 더 슬프고, 우리들의 삶이라 더 아프다. 열일곱, 그 겨울을 생각한다. 점점 더 희미해지는 엄마의 슬픈 표정을, 마흔을 바라보는 내가 닮아가고 있다. 내가 동경하는 그 무언가를 다시 꿈꿀 수 있는 나만의 외딴방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자목련’님은?
저는 그저 폭넓은 책읽기를 꿈꾸는 사람이며, 책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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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문학동네, 2007

새들, 페루, 죽다. 이 세 가지는 하루를 살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낯선 단어들이다. 눈에 보이는 새라고는 왠만하면 날지 않는 비둘기, 어디에 위치해있는지도 헷갈리는 페루, 아직은 멀게 느껴지는 죽음. 그런데 세 단어의 한 데 모였을 때, 묘한 매력을 느꼈다. 로맹 가리의 단편 소설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낯선 것들에 대한 동경일까, 아니면 ‘새들이 페루에 가서 죽는 이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까, 답은 잠시 뒤에 찾기로 하고 책을 먼저 손에 쥐었다.

책을 편 것은 일상의 긴장이 풀린 주말, 덜컹이는 전철 안. 지구 먼 곳으로부터 온 햇빛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늘 타던 전철이었지만 환상의 공간에 머문 듯 했고, 종이 위 문자들은 어지러이 망막에 박혔다. 표제작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읽는 동안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어지러움은 잠시, 소설에 짙게 배어 있는 고독이 밀려왔다. 인적 드문 해변에서 자신의 이름보다 고독이 더욱 친숙한 사내. 그는 우연히 해변에서 자살하려는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를 구한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여인을 보며 사내는 연민 혹은 애정을 느낀다. 그녀를 안을까? 고독을 선택한 그에게 불쑥 찾아온 뜨거운 감정은 그를 괴롭힌다.

그녀의 중얼거림은 너무나도 절박했고, 그녀의 눈빛에는 애원이, 그의 어깨에 매달린 그녀의 연약한 두 손에는 약속이 깃들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삶이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순간에 성공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를 가슴에 꼭 안고 그는 이따금 자신의 두 손 안에 묻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포시 들어올렸다. 불현 듯 수십 년간의 고독이 한꺼번에 몰려와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아홉 번째 물결이 그를 쓰러뜨리고는 그녀와 함께 먼 바다로 그를 휩쓸어갔다. (p 28.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인간, 그 알 수 없는 허울

사내는 왜 외로울까. 그는 어째서 벗어날 수 없는 고독에 스스로 투신했을까.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2차 대전에 로렌 비행중대 대위로 참전한 로맹가리는 역사의 격동 속에서 삶의 모순을 느꼈을 테다. 그가 공부한 것은 명확한 법학인데, 그가 마주한 현실은 새벽녘 안개길 만큼이나 불투명하다. 더욱이 유태계 프랑스인인 그는 유태인 학살을 지켜보며 인간 생명의 나약함과 잔인함을 동시에 목격했다. 그가 목격한 인간의 몸뚱이에 희망이란 뜨거운 피가 흐를 수 있었을까.

“운전사는 번들거리는 얼굴의 반점을 다시 한번 처녀 쪽으로 돌려 그녀를 한동안 바라본 다음 다시 눈앞의 길을 주시했다. 그래요, 이 어린 것은 금간 유리처럼 연약하지요. 폭격, 폐허 속에서의 생활, 그리고 그 딱한 군인들…… 오! 물론 그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었겠지만, 전쟁이란 다 그런 것이라며 당연하게 여겼겠지요. 문제는 그때 이후 이 어린 것이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아 버린 겁니다.”(p253. <지상의 주민들>) 전쟁의 충격으로 눈을 감아버린 이 여린 여인은 흰 눈 가득한 크리스마스를 보기 위해 눈을 뜨고 싶어 하지만, 그녀의 순수함은 이내 훼손된다.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는 여러 작품 속에서 반전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예술의 고결함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떤 대가든 치러야 한다는 미술품 애호가 S(<가짜>), 사랑하던 옆방 여인의 교성을 듣고 자살을 선택한 청년(<벽>), 문명의 손이 묻지 않은 곳에서 우연히 만난 위대한 그림에 희열을 느끼는 남자(<도대체 순수는 어디에>) 등은 마지막 순간 배신을 당한다. 사건의 전말이 드러났을 때 당혹스러운 건 비단 소설 속 인물뿐만이 아니다. 이성으로 예측한 방향대로 흐르지 않는 인간관계. 언제 깨질지 모르는 그 관계를 붙잡고, ‘이건 안전해’라고 ‘능동적인 착각’을 하고 있는 나는 안. 전. 한. 가.

위태롭지 않은 곳이 없는 현실, 작가는 환상으로의 탈주를 꿈꾼다. “마부석에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자체로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수많은 비둘기들이 거리에서 똥을 쪼아 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충격적인 것은 비둘기의 태도였다. 그 비둘기는 마부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그 비둘기는 고삐에 매여 있지 않았고, 옆좌석에는 가는 끈이 늘어뜨려진 작은 종이 달려있었다. 비둘기는 이따금 부리로 줄을 잡아 끌어당기곤 했다. 한 번 잡아당기자 말이 왼쪽으로 돌았고, 두 번 잡아당기자 오른쪽으로 돌았다.”(p179. <비둘기 시민>)

환상으로의 탈주

이 상상이 미쳤다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불에 태워죽이고, 누군가를 등쳐먹기 위해 최고의 지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미치지 않은 거라 할 수 있을까.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속 16편의 단편들을 읽으며, 사내는 왜 외로운지 원인을 밝히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짐작은 간다. 하지만 그건 단지 내 생각일 뿐이다. 이성과 논리의 틀로 광기의 시대를 재단한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일지도 모른다. 또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면 프랑스의 대문호 로맹 가리가 차가운 권총으로 자신의 생을 날려버리지 않았겠지.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 그들의 주검은 바닷물에 쓸려 이리저리 뒹굴고, 그나마 숨이 붙어 있는 새들은 어린 아이들의 발에 짓이겨져 골수를 쏟는다. 그래도 그들은 돌아갈 곳을 알고 있다. 인간은 어디로 돌아갈지 모른다. 차가운 길바닥에서, 소음 가득한 공장에서, 총탄이 비행하는 전장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새들을 부러워하지 않더라도, 새들을 동정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명횡사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제 돌아갈 곳을 찾아봐야겠다. 

안늘(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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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 <렛미인 1, 2>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렛미인>, 문학동네, 2009

 

뱀파이어 소녀의 헌신적 추종자인 남자가 피를 얻기 위해 죄 없는 소년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목을 베고 피를 받는다는 살인 장면이 초입에 나오기에, <렛미인>의 첫인상은 극도로 혐오스러웠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장르를 불문하고 힘없는 아이가 학대받고 상처받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기에 <렛미인>의 도입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설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얼마 읽지도 않은 채 책을 권해준 이에게 책에 대한 혹평을 퍼부었다. 이게 뭐냐고, 뱀파이어 소녀 엘리를 사랑하는 늙은 남자 호칸은 결국 비겁한 변태 살인마와 다를 게 뭐냐고 말이다.

차라리 혈액은행을 습격하든 자기의 피를 뽑든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엘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해 봐야 비겁한 변명이라고 말이다. 책을 넘어 책을 권한 이에게도 싫은 소리를 했는데, 너는 너무 로맨티스트라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게 어디까지일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조폭영화가 의리니 뭐니 아무리 당의정마냥 감싸고 포장해도 결국 깡패새끼들 얘기 아니냐고, 희생된 아이의 부모는 마음이 찢어지는데 사랑 타령이 나오느냐고 윽박질렀다. 심히, 흥분했다. 그리고 흥분한 내 앞에서, 책을 권한 이는 조용히 답했다.

“이 이야기는 어쩔 수 없어요. 정말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전 이야기에 설득이 됐어요. 그리고 소녀와 소년의 사랑을 응원해요.” 라고.

두 권짜리 결코 만만치 않은 분량을 끝까지 참고 읽었다. 과연 네가 날 설득하는지 두고 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정말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인정했다. 나 역시, 우정이든 사랑이든 소녀 엘리와 소년 오스카르의 인연을 응원한다.
 


인정 안 할 수가 없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동화 <빨간 모자>를 보면
빨간 모자를 쓴 소녀는 어머니의 말씀을 안 듣고 늑대 출몰지역인 숲속으로 들어간다. 지극히 계몽적인 목적을 위해 쓰인 이 이야기는, 한 마디로 ‘남자를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가서는 안 될 길을 가서 늑대-남자-를 만나, 결국 순결을 잃는다고나 할까? 처녀의 흔적인 빨간 피는, 빨간 모자와 연결되어 섬뜩한 구석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뱀파이어 역시 조심해야할 늑대나 남자일지 모르겠다. 불로불사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희생자를 습격하기 위해선 별 수 없이 창밖에 매달려 ‘나 좀 들여보내 줘!’라 말해야만 하는 뱀파이어.

상대가 ‘들어와, 널 초대할게’라 말해야 겨우 상대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줄리엣이고 상대가 로미오가 아닌 이상 남자, 또는 뱀파이어를 함부로 들였다가는 쪽쪽 빨린 후 내쳐지는 신세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조심해라, 쯤 될까? 해서 전형적인 뱀파이어는 에로틱한 면모가 많다. 순진한 처녀가 냉큼 자기 방에 들일 정도로 미끈한 남자 내지는 키스마크 남길 엉큼한 눈빛으로 목덜미를 탐닉하는 뱀파이어라. 피가 모자라 헐떡이지만 왠지 끈적이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것만 같다.

그런데 <렛미인>은 전형적인 뱀파이어 이야기를 부정하고 나선다. <렛미인>에 어울리는 건 <빨간 모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전거 레이서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이다. 결국 뱀파이어도 ‘먹고 살자고’ 흡혈을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어찌 보면 김훈의 <남한산성>일지도. 뱀파이어 소녀 엘리는 ‘너 같은 애들이 많니?’란 오스카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아무리 배고파도, 사람이 사람을 물어뜯을 수는 없다는 일말의 양심 때문에 대부분의 뱀파이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말이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뱀파이어에게 에로티시즘과 관음이 빠진 대신 실존이 들어찼다.

그리고 일견 어울리지 않을 듯한 뱀파이어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그저 거리에 나앉아도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사회보장제도가 훌륭한 이야기의 배경, 스웨덴의 그림자 드리워진 상황과 기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알코올 중독자, 약물 중독자, 왕따 소년, 흔한 이혼과 고양이에게 둘러싸인 악취 풍기는 사람. 사람들은 뱀파이어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삶을 구걸할 필요가 없지만, 절실함을 버린 대신 비루한 삶과 소외를 선물 받았다. <렛미인>은 기존 뱀파이어 소설에서 에로티시즘만 빼고 끝난 게 아니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관찰까지 덤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백미는, 뱀파이어 소녀 엘리와 왕따 소년 오스카르의 우정, 또는 사랑이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이 작품은, 뱀파이어의 삶에 대해서도 다큐멘터리처럼 밀착 취재하여 디테일을 살렸지만, 두 소년소녀의 우정과 감정을 바늘귀에 꿴 명주실로 거미줄을 자아내듯 연약한 듯, 위태로운 듯, 안타까운 듯, 하지만 사랑스럽게 풀어냈다. 먹잇감인 인간의 종에 속한 ‘친구’를 지키고자 하는 엘리와, 자기보다 훨씬 강한 소녀 엘리를 지켜주고자 하는 달팽이집 속의 오스카르. 오스카르는 엘리를 구하고, 엘리는 오스카르를 구한다. 엘리의 정체를 알게 된 오스카르는 <렛미인>에 대해 선입견을 지녔던 나처럼 엘리를 혐오스런 눈길로 바라보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건 어찌할 수 없다.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상대의 공간에 들어간 뱀파이어는 어찌되느냐는 오스카르의 짓궂은 질문에 엘리는 바로, 그 즉시, 초대가 없었음에도 문턱을 넘는다. 온몸으로 피를 쏟으며 힘이 빠져가는 엘리. 다급한 오스카르는 어서 오라고, 환영한다고,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오라고 애타게 부르짖는다. 소년이 소녀의 절실함을 이해 못하고 살인귀, 괴물 취급을 했음에도, 소녀는 소년에게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바다의 깊이를 알기 위해 바다로 걸어 들어간 소금인형처럼 엘리는 오스카르에게 들어가고자 했고, 그를 알고자 했고, 그의 위로와 사랑이 간절했던 것이다.
 


렛미인. 들어가도 되겠니? 쯤 이다만, 나는 이렇게 읽었다.

내가, 너에게, 다가가도 되겠니? 너의 삶으로, 내가, 들어가도 되겠니?


뱀파이어보다도 더 끔찍한 인간이라는 괴물이 인간의 탈을 쓰고 판치는 세상에서, 존엄이나  인권과는 거리가 먼 지점에서 비루한 삶을 좀먹듯 연명해가는 비겁한 삶 속에서, 살기 위한 본능과 흔들리는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진짜 괴물이 있다. 하지만 인간들 틈에 끼어있는 그 ‘괴물’은 오히려 더 ‘인간적’이기에 아련하다. 뻣뻣한 종이 책장에 여린 손가락을 베인 듯  엘리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쓰리고 안타깝다. 오스카르와 엘리가 우정인지, 사랑인지 애매하게 만드는 엘리의 정체성, 상처 역시 쓰리고 안타깝다. 위선과 거짓으로 상대의 삶에 발을 걸친 듯하지만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온몸으로 피를 쏟아낼 지라도 너에게 다가가겠다는 소녀가, 너무 안타깝고 애틋하다.

혐오와 선입견으로 시작했지만 괴물에게서 인간을 배웠다. 외로움 속에서, 거절당함의 두려움을 안고서 창밖에서 떨고 있는 소녀, 또는 뱀파이어에게서.

나는, 그녀만큼 절실한가? 삶이, 사랑이, 세상이, 그녀만큼 절실한가?

렛미인.

내가, 당신에게로, 들어가도, 될까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짜가록키’님은?
외국어는 한 줄도 못하지만 한국어 듣기, 말하기, 쓰기를 좋아합니다. 이야기 배틀 형식의 교양 프로그램 ‘KBS 스토리텔링클럽 이야기 발전소’에 7회 출연, 5승을 거두었습니다. 블로그에 ‘찬이 아빠의 육아일기’를 연재하던 중 ‘EBS 라디오 멘토 - 부모’의 ‘고수 아빠 따라잡기’에 등장하기도 했지요. 여성조선에 ‘프렌디 아빠가 들려주는 그림책 세상’을, 유아독서신문 책둥이에 ‘책으로 만나는 아빠의 육아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 외 전적은 서울시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 2전 1승 1패, 하지만 현재는 다이어트를 목표로 격투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네 살 찬이의 아빠이자 동갑처럼 보이는 다섯 살 연상의 아내와 살고 있으며, 생김과는 다르게 판화를 전공했습니다. 글과 그림과 가족, 약간의 알코올만 있으면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행복할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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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유혹, 전혀 다른 뱀파이어 이야기 - <스트레인 1, 2>

 

기예르모 델 토로, 척 호건, <스트레인 1, 2>, 문학동네, 2009


에드워드의 달콤함에 빠져 있던 독자들은 꿈에서 깰지어다. 여기 색다르고 기괴한 뱀파이어 소설이 있다. <트와일라잇>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나온 어떤 뱀파이어 이야기와도 다르다. <스트레인>의 뱀파이어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끌리지 않고 유혹하지도 않는다. 또 몇 분 만에 2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의 피를 흡수할 수 있고 굳이 이빨을 사용하지 않고도 손쉽게 인간의 피를 얻을 수 있다. 그의 존재는 인간들에게 있어 질병이자 재앙이며 이야기는 이 순수한 포식자로부터 인간의 멸종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자네는 지금 검은 공단을 걸친 우울증 환자나 어금니를 숨긴 꽃미남정도를 생각하고 있겠지. 아니면, 바깥세계를 향한 저주에 갈등하는 실존적 존재라든가, <벨라 루고시, 애봇과 코스텔로를 만나다> 정도쯤 되는 영화를 떠올리고 있을 거야.”(<스트레인> 2권, p 26)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을 알게 된 건 그의 영화 <판의 미로>에서였다. 개봉 첫 날, <해리포터>나 <나니아 연대기>를 연상시키는 극장 홍보용 포스터를 본 친구와 나는 주저 없이 <판의 미로>를 선택했고, 우는 아이들의 소음과 극장을 뛰쳐나가는 아이와 엄마들 속에서 영화 관람을 마쳐야 했다. 홍보로 인한 실패였다지만 누구도 그 영화의 매력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아이가 볼 영화는 아니었지만) 시종일관 어두운 영화 분위기와 소름끼치는 형상의 요정, 괴물들은 우리가 가진 판타지 정석의 틀을 부숴버릴 정도로 강렬했고 또 인상적이었다. 그런 그가 뱀파이어 소설을 들고 돌아왔다. 전 세계에 밀어닥친 뱀파이어 열풍에 편승한 소설이라는 생각을 한 독자들도 있겠지만 난 전적으로 기예르모 델 토로란 이름에 의지했다.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올 책은 그 이상의 뭔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어떤 뱀파이어를 창조했을 지 궁금하기도 했고.

깊은 밤, JFK 공항에 한 비행기가 착륙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착륙한지 몇 분 만에 여객기 불이 모두 꺼진 채 움직이질 않는다. 기계결함을 의심하는 관제탑 직원들. 하지만 이어 들어간 특공장교들에 의해 승객들이 모두 죽었음을 알아낸다. 착륙한 지 불과 6분 만에 일어난 일이라 관계자들은 테러로 인한 바이러스를 의심하게 된다.

연락을 받고 온 질병관리센터의 에프와 노라는 그 속에서 생존자 4명을 발견하고 격리한다. 그리고 화물칸에서 흙으로 속을 채운 커다란 직육면체 나무상자 또한 발견하는데, 화물목록에 기록이 없는 이 나무상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생존자들의 변화와 함께 시체 보관실에서 시체들이 전부 없어지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곧 엄폐이자 일식이다. 나는 인간을 마시기 위해 왔노라.

책에서 ‘마스터’의 존재감은 엄청나다. 큰 키에 말라비틀어진 검은 피부, 날카로운 노란 이빨에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의 투명한 피부로 묘사되는 그의 모습은 세상에 이치에 맞지 않을 뿐더러 누구보다도 막강한 존재감을 자랑한다. 또 그와 마주치는 살아있는 존재들은 어떤 이는 경외감으로, 어떤 이는 절대적 공포심으로 무릎을 꿇게 된다. 이와는 달리 다소 실망스러웠던 인물은 질병관리센터의 에프였다. 비행기의 이변을 빨리 알아채고 ‘마스터’에게 대항하는 인물이지만 여느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주인공처럼 전형적인 인물이다. 할리우드 재난영화를 보면 대부분의 주인공이 각 분야의 전문가인 과학자나, 교수, 의사 등인데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상황을 헤쳐 나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스트레인>의 에프도 다르지 않았다. 아들 ‘잭’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감동적이지만 진부했다. 아마도 나중에 할리우드에서 영화로 제작되는 게 아닌가 생각 되는데 그걸 의식한  듯한 에프의 캐릭터가 아쉬웠다.

<스트레인>에서는 과거 스페인 독감에서부터 최근의 SARS나 신종플루까지 요즘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바이러스에 대해 말한다. 또 책 곳곳에 9.11에 대한 공포의 잔재가 깔려 있는데 비행기의 이상에 제일 먼저 테러 의심을 한 것도 이와 상통한다. 결국 뱀파이어라는 소재를 빌려 현대 사람들의 근원적 공포심을 자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제일 무서운 건 공황상태라고 했던가. 믿을 수 없는 사실에 사람들은 대항할 힘조차 잃고 마는데 바로 조금 전까지 친절한 이웃이었고 주말이면 교회에서 만나던 친구들이 피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찢는 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거대한 재앙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족조차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나타낸다.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고 점점 변화하는 인간들이 피를 빨기 위해 귀소본능처럼 집부터 찾아간다니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 모든 상황과 기존의 뱀파이어의 틀을 깬 자잘한 설정까지 창조해 낸 기예르모 델 토로에겐 역시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척 호건과 공동작이지만) 

2권의 끝에 ‘마스터’와 같은 고대의 존재들이 더 나온다. 이어지는 얘기에서 뱀파이어와 인간의 전쟁이 될지 협정을 깬 뱀파이어와 그렇지 않은 뱀파이어와의 전쟁이 될지 궁금하다. 전쟁은 누구의 승리가 될 것인가. 이미 경고의 등은 켜졌다. 일주일이면 맨해튼이, 석 달이면 미국이, 반년이면 전 세계가 그들의 손아귀에 떨어 질 위기에서 인간들은 다음 세대를 맞이할 수 있을까? 이야기는 아직 1부만을 보여줬을 뿐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삶의 향기’님은?
여러 해 책을 멀리한 시절을 후회하며 열심히 책을 읽고 있습니다. 지금가지 읽은 책보다 앞으로 읽을 책이 훨씬 많다는 것에 감사함과 즐거움을 느끼며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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