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학'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0.12.07 <의지와 운명> - 운명인가 숙명인가
  2. 2010.10.29 <버마시절> -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3. 2010.03.05 <뿌리> - 뿌리를 잃어버린 자의 삶의 역사
  4. 2010.01.07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2)
  5. 2009.12.31 <죄와 벌> - 짙은 안개를 뚫고 들어온 하나의 빛 (4)

<의지와 운명> - 운명인가 숙명인가

 

카를로스 푸엔테스, <의지와 운명>, 민음사, 2010

 


잘린 머리가 '이제서야' 잔혹하게 잘려나간 몸뚱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성의 대명사인 머리는 감성, 감정, 욕구, 혹은 욕망의 대명사인 육신(몸뚱이)을 저급하고 더러운 것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이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지배하는 왕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선험적으로 인식하고 그것들의 형식을 통해 모든 사물을 인식하는 이성. 그는 '인간은 이성적 존재'라는 권위 있는 명제를 앞세워 우리 신체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고 모든 이치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성은 어디까지나 현상과 원인을 설명하는데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지 사물의 본질에 대해서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오성에 의해 파악한 자료와 직관을 풀어헤치는 설명서. 바로 이성은 추상적 개념간의 관계를 완성하여 그것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렇다. 머리는 단지 존재의 한 부분일 뿐이다. 여호수아의 잘린 머리는 멕시코 게레로 주 연안, 태평양 바닷가에서, 몸뚱이가 떨어져 나가고 나서야 그것에 대한 기억을 더듬고 있다.

밤에 대한 묘사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는 마치 인류의 역사를 그려내는 듯하다. 여명이 밝아 오고, 대낮이 되었을 때 한 덩어리였던 모든 사물을 명확하게 분리시킨 빛처럼, 인간은 이성의 눈을 떴으며 만물의 영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하지만 머리가 잘린 지금, 머리는 몸뚱이를 기억하고자 한다. 마치 구조주의에서 해체주의로 나아갔듯이, 합리주의에서 실존주의, 생철학 등으로 뻗어나갔듯이, 이제는 다른 무엇을 찾고자 한다. 과연 몸뚱이는 무엇이었을까? 의지? 감정? 운명? 숙명? 나, 여호수아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내 머리가, 오로지 내 머리가 진술하는 것이며, 머리에서 떨어져 나간 내 몸뚱이는 이제 하나의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기억에 대해서는 현명한 독자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1권 19쪽)

잘린 머리가 밝히듯이, 이 이야기는 몸뚱이가 '직접적으로' 기억하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이차적으로' 기억하는 것을 추상적 언어로 펼쳐 보인다는 한계 때문에 확실성과 불확실성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든다. 잘린 머리가 '기억'하는 이성과 감정들, 그리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왔다갔다 하는듯한 표현, 예언자 에제키엘과의 만남, 죽은 안티구아 콘셉시온(Antigua Concepcion)과의 대화, 죽은 마키아벨리와의 대화, 모호한 진실. 이 모든 것이 나를 애매모호한 경계로 몰아세웠다(이렇게 추상적으로 쓴 이유는 이것 역시 이 소설에 대한 나의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다).

1. 운명

 ▷ 이름, 명칭에 의한 운명
'여호수아 나달(Josue Nadal)'과 '예리고(Jerico)'. 1부에서 등장하는 그들은 고아이다. 예리고는 성이 없다. 여호수아의 경우도 나달이라는 성이 있으나 그것은 하나의 장식품일 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마치 스페인어 중 nada(아무것도~아니다 혹은 無라는 의미)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나달이라는 姓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姓이 있다는 것은 특정 부모로부터 태어났음을 의미하며 이는 그들로부터 특정 성향을 물려받았음을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것은 마치 손님들의 과거사 한 꼭지만 들어도 손님의 미래를 분명하게 상상할 수 있는 헤타라 창녀의 능력과 같다. 따라서 성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간섭받지 않음을 상징한다. 바로 그들의 인생, 운명은 그들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 그래서 예리고는 무척 독립심이 강하고 그와 어울리는 여호수아 역시 그렇게 변해갔다(아니 그런 것처럼 보였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리라).

무엇보다 이러한 운명적 상징성은 29쪽부터 34쪽까지 삽입되어 있는 여호수아의 구약성서의 내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여호수아'는 '최초'의 도시인 '예리고'를 점령한다. 이러한 성서의 내용대로 여호수아는 예리고와 최초로 친구로 만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이름이 부여한 운명 그대로였다. '본능적인' 그들의 우정! 기억하라. '본능적이다!'

또한 이름에 의한 운명은 1부의 '카스토르와 폴룩스' 그리고 4부의 '카인과 아벨'의 제목에서도 상징적으로 부여된다. 이들 각각은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성경에서 차용한 것인데, 알다시피 이들은 형제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전자는 우애가 매우 돈독하다는 점에서, 후자는 증오심에 사로잡혀 살인한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저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의 관계가 카인과 아벨의 관계로 변한다는 운명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작품 곳곳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다음의 예를 보자.

"창녀들은 자신들을 '여성'이 아니라 '늙은이'라고 부르는 남자들에게 화를 내기 마련이다. 늙은이라는 것은 창녀, 잡동사니, 쓰레기통, 반죽냄비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부인이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애인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권 329쪽)

이는 인간이 얼마나 '언어' 즉 '추상적 개념'에 의한 운명이라는 굴레의 수레바퀴에 짓밟히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릇 존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존재임에도 언어에 의해 일정한 모습으로 고착되어 버리고 만다. '이름' 혹은 '명칭'은 그 존재의 일부분일 뿐임에도 그것이 거꾸로 존재 자체가 되어버리는 식이다. 늙은이로 불리는 순간 그녀들은 창녀, 잡동사니의 운명이 되어 버리고, 여성으로 불리는 순간 그녀들은 희망을 보게 된다.

▷본성, 성격에 따른 운명
그러나 이러한 이름, 명칭 즉 추상적 개념에 의해 결정된 운명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크게 흔들린다. 아무리 화려한 미사여구로 어떠한 존재를 장식한다한들 본질, 본성에 따른 운명의 힘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리 사라 페레스가 상류층 여자들의 몸가짐을 완벽하게 모방했다 하더라도, 하류층 여자들의 추잡스러운 행실을 그대로 실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힘 때문이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냄새는 지워버릴 수 없는 법이다.

▷거대한 '힘'에 따른 운명
하지만 무엇보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고 개척해 나간다는 자만심, 자신만만함을 세상에 드러내 보일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사회, 국가, 관습, 규범, 역사와 같은 가장 강력한 보이지 않는 '힘', '흐름'이다.

이러한 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제1부 <카스토르와 폴룩스>에서 필로파테르(Filopater) 신부와 관련된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의 대화에서는 베네딕투스 스피노자에 대한 이야기가 항상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의 인생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의지와 운명>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이다.

스피노자가 기거하는 방에는 거미 한 마리가 '자신만의 의지'로 만든 세계의 왕으로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내 스피노자가 길거리에서 동종의 거미를 구해와 그만의 세계에 개입시킨다. 자신의 의지와 타인의 의지와의 충돌이 일어나고 하나의 세상에서 '왕'이 되기 위해 그들은 싸움을 벌인다. 스피노자는 이에 그치지 않고 파리 한 마리를 거미줄의 세계에 집어 던진다. 그 거미들은 파리를 잡아먹고 다시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싸움을 벌인다.

인간은 위의 거미처럼 자유의지로 자신의 세상을 만들며 살고 있다(아니 그렇게 믿으며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인가의 의지와 대립하며 충돌하게 되고 그것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비극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그 무엇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위의 '동종의 거미'와 같이 타인일 수도 있고, '스피노자'와 같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일 수도 있다. 그것은 유행, 관습, 규범, 제도, 사회, 국가라는 운명의 울타리이다.

2. '필연'과 의지와 운명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인과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정한 가정, 사회, 국가, 관습, 규범에의 구속. 특히 부모, 자식 간의 관계는 혈연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각자 부모로서, 자식으로서의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 그것은 굳이 윤리, 도덕, 의무라는 이름을 가져다 붙일 필요도 없는 당연한 것이다.

"저는 지금 필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받는다는 느낌, 내가 필요한 존재라는 기분, 육신의 정, 따뜻한 애정…" (2권 206쪽)

필연을 전제로 하지 않은 의지와 운명이란 어떠한 것일까? 마치 어린 시절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여호수아와 예리고처럼 자신이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간다고 '착각'하며 살지 않을까? 그렇다. 그야말로 착각이다. 이 소설의 비극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머리가 잘려나갔기 때문에 비극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직접 읽어보시라. 얼마나 비참한지. 얼마나 개인의 의지에 따른 인생이 하나의 착각에 불과하였는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를!)'에 의해 놀아났다는 점 때문에 말이다.

필연을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자신만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려는 자, 안티구아 콘셉시온(Antigua Concepcion)! 옛 개념, 옛 관습, (멕시코의) 역사, 늙은이, 혹은 인마쿨라다 콘셉시온(Inmaculada Concepcion, 무원죄 성모의 수태)을 의미하는 추상적 개념의 실체화! 어디에 묻혀 있는지 알 수 없는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모순적인 존재. 모든 땅을 소유하고 자신의 게걸스로운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거의 역사이자 현재의 권력자! 마녀! 모든 것에 자신의 의지를 반영시킨 지상의 신! 타인의 운명은 그녀에 의해 숙명이 되도록 하는 악의 근원. 권력욕의 상징! 세대를 이어 하나의 역사가 되어버린 법칙! 안티구아 콘셉시온 그리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 이들을 위해 감춘다). 필연을 무시한 의지와 운명은 고통과 고뇌가 뒤따를 뿐이다. 누구에게나 말이다.

"우리는 결국 의지의 이름으로 필연에 충실했던가? 우리의 그 어처구니없는 우연의 일치가 바로 그것, 필연과 의지를 하나로 묶는 것이었단 말인가?" (2권 207쪽)

3. 의지와 숙명

스피노자가 유대인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데다 교회라는 엄청난 사회의 압박 속에서 '독립'을 쟁취하고자 스스로 파문당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스스로 그 어떤 교리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고독'을 '선택'한 것처럼, 인간은 의지와 숙명의 끊임없는 싸움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선택을 하는 이단자가 되느냐 운명에 굴복하며 체념하느냐(숙명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타협한 것에 불과하다고 자위하며 사느냐는 그러한 의지와 숙명의 다툼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하나의 모습인 것이다. 잘린 머리는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어린 시절에는 … 우리를 얽매이는 어떤 시기보다 우리는 그 시기에 보다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 우리를 생존하게 하기 위해, 직업적인 삶의 리듬에 우리를 맞추기 위해, 전반적인 합의에 의해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우리를 받아들인 규범에 우리를 끼워 맞추기 위해 우리가 순응해야 하는 모든 연령층에서 벗어나서 살 수 있도록 허용한다 …" (1권 96쪽)

어쩌면 우리네 '어른들'은 잘 길들여진 가축 떼 혹은 의지가 없는 인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생은 다 그렇고 그런거야."하며 입버릇처럼 말한 예리고, "그냥 그런 줄 알아."하며 여호수아의 의지를 묵살한 상히네스 변호사의 말을 인생의 법칙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안전하게 있으니까!' (안전하게 있다는 표현은 제2권에서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미겔 아파레시도의 경우처럼 우리는 자신만의 감옥에 갇혀 끊임없이 자위하며 사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호랑이와 같은 눈으로

"나는 내가 원해서 이곳(감옥)에 있는 거야. 감옥이 나 자신으로부터 지켜주니까 … 내가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는 세상이 이곳에 있으니까." (1권 286쪽)

"이 안에 있다 보면 내가 아닌 나를 만들어 낼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내 모습을 꾸밀 필요도 없어. 여기서는 예절과 같은 모든 관습을 비웃어 줄 수 있거든. 여기서는 어느 계층에 속하지 않아도 되니까." (1권 248쪽)

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신만의 운명을 만들었을까? 글쎄.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무시무시한 숙명의 굴레에서 그의 의지의 보잘것없음이란 얼마나 극명히 드러나는가 말이다.

이처럼 우리 어른들이란 안티구아 콘셉시온, 막스 몬로이, 늙은이처럼 두려움에 벌벌 떠는 존재여서 자신이 만든 세계가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세계라며 착각하며 위선적으로 살아간다. 모든 것을 의지가 아닌 숙명으로 변모시키면서 말이다. 왜냐하면 '안전하게 있으니까'.

4. 의지와 운명

무엇이 의지이고 무엇을 운명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단 말인가? 설령 듣기 좋은 말로 우리에게 의지가 있으며,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설계해 나갈 수 있다손 치더라도,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더욱 거대한 힘에 의해 놀아나고 있지 않느냐 말이다. 손오공이 온갖 능력과 재주를 발휘해 가며 활약했다고 스스로 '믿고' 있었지만, 결국 그곳은 부처님 손바닥이 아니었던가! 여호수아와 예리고. 그들은 '존재'하였던가? 이 모든 것이 배후자의 손바닥 위에서 단지 놀아난 것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난 다음과 같이 위안을 삼기로 하겠다.

인간은 원형 광장이다. 원형 광장에서 뻗어 나가는 수많은 길들 중 선택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행하여진다(그 의지는 복합적인 개념이어서 그 안에는 사상, 감성, 감정, 지성 등의 요소가 종합적으로 담겨있다. 마치 니체처럼). 하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전제조건이 따르는데, 바로 원형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것들. 어차피 인생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패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른 의지적 삶이다. 만약 자신의 의지대로 인생을 산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자신이 개척한 '운명'이 될 것이요, 그러하지 않다면 그건 '숙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불멸의 죽음을 맞이한 뒤에야 여실히 드러나게 될지도 모른다. 여호수아처럼 말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고 있다(현재가 없으면 과거와 미래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은 매순간 선택할 때마다 역사, 관습, 규범 등의 이름으로 강력하게 작용한다. 하지만 그 힘이라는 것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그 힘이 무엇인지 안다면 말이다. 여호수아와 예리고,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비극적이고 불쌍해 보이는 이유는 그것을 간과하고 숨기고 가면을 씌우고 속였기 때문이다. 왜 숙명이라는 감옥 안에 자신을 가두는가? 시간을 재촉하지 말고 자신의 의지대로 현재를 살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오늘의 책을 리뷰한 'crazyforb'님은?
꿈을 향해 발을 내딛으며 자신의 존재를 찾고자 하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인간'. 철학, 정치, 역사, 법, 고전문학 그리고 경험을 통해 세상의 이치, 인간의 본질에 대해 사색하는 작은 '인간'. 독서를 위한 독서가 아닌 삶을 위한 독서를 하는 뼈와 살을 가진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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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시절> -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조지 오웰, <바머시절>, 열린책들, 2010

 


1920년대 중반, 영국의 식민지 버마. 조지오웰의 <버마시절>은 영국에 기생해 권력을 휘두르고,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해 새로운 음모를 꾸미는 하급 치안 판사 ‘우 포 킨’으로부터  시작된다. 개발을 통한 문명화의 논리로 영국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원주민 의사 베라스와미, 이를 부인하며 영국 제국주의의 본질은 사실상 세계 평화를 위한 희생이 아닌 강탈을 위한 속임수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플로리. 이 둘 모두는 우 포 킨이 식민지 권력의 핵심인 유럽인 클럽에 들어가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에서 희생의 제물로 선택된 인물이다. 그리고 결국, 이러한 오 포 킨의 사악한 계획은 성공으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 사이를 채우고 있는 아이러니, 피지배자의 희생의 제물이 돼버린 지배자의 예정된 파멸. 게임의 승패는 결정났지만, 승자와 패자 그 누구도 해피엔딩의 주인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결말.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 그리고 권력을 향한 맹목이 낳은 비극.

<버마시절>은 조지 오웰이 1922년부터 1927년까지 버마에서 제국주의 경찰로 근무하면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입장에서 백인 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식민주의자들이 문명화라는 논리로 원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억압하는 제국주의의 불합리함을 여실히 보여주며, 이와 함께 이러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반대하면서도 단호하게 이를 끊어내거나 맞서 투쟁하지 못하는 나약한 한 인간(플로리)의 내면적 고뇌와 절망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렇게 한 인간과 제국주의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사이의 해결되지 않는 갈등이 자살이라는 결말로 이어진다. 플로리의 ‘버마시절’은 끝이 났고, <버마시절>의 이야기 또한 끝이 났지만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그간 인류의 역사에 수많은 비극을 새겨 넣은 인종적 편협함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문명이라는 독단적 입장으로 문명화되지 않은 것들의 가치가 매겨지고 있으니. 게다가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인간의 욕망은 부와 권력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만족을 모르지 않던가.

결국 모든 비극은 자기 본위 대로 매겨진 우월의 가치가, 차이의 단순함을 지우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의 것을 채우고 지키기 위해 버려진 것들이 타인의 비극, 혹은 인류의 비극을 지속시킨다. 그러나 지금 이순간, 부와 권력을 얻고 승리감에 도취된 누군가가 있다면, 그가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가 얻기 위해 버린 것이 정작 '인간다움'일지 모르며, 그러므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결말 또한 비극이라는 것을.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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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 뿌리를 잃어버린 자의 삶의 역사

알렉스 헤일리, <뿌리>, 열린책들, 2009

1750년 이른 봄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200년이 넘는 시간을 밟아 글로 발자국을 남긴 이 책은 지금은 감비아로 알려진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한 아프리카인으로 삶을 만들어 나가며 나름대로 치열하게 희로애락을 쌓아나가던 한 소년 '쿤타킨테'의 생으로 시작된다. 

지금은 승자가 된 민족과 문명들의 일반적인 시각으로 쉽게 평가한다면, 원시적이고 무질서하며 비조직적이고 빈곤한 씨족 사회 삶의 모습이겠지만, 각각의 삶의 주체들이 느끼고 누리는 행복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 누구도 그들의 삶을 제 멋대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삶에 대한 선택권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하나의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었던 무위(無爲)의 삶에서 노예사냥이라는 갑작스러운 재앙의 희생자로 전락하면서 시작되는 그의 뱃길은 너무나 비참하다.

먼저 우리가 소위 말하는 ‘아프리카 흑인’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노예사냥의 피해자를 보기 것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을 말해주듯, 흑인이 흑인을 포획해서 노예로 파는 사실에 대해 적잖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단순히 '흑인' 대 '백인'의 대결이었다면 분명 다른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어릴 적의 반공교육의 흔적으로 '인해전술'이라는 공포에 간접적인 경험이 있는 나에게도, 그렇게 많은 흑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야 했던 서글픈 사실에 대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민족'이나 '국가'라는 의식이 가지는 힘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권력 그 자체인 것이다.

그렇게 각각의 개인으로서, 아무리 커도 씨족 사회에서의 공동체적 삶이 전부였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사나운 짐승 취급을 받거나 다루기 까다로운 짐짝 취급을 받으며, 상자에 갇혀 대서양을 건넌다. 시시각각 죽음과 같은 공포에 직면하면서도 '사람'이기를, 하나의 '삶'이기를 바라는 생명을 건 몸부림과 언어로 정제되지 못한 외침은 결국 폭력에 갇혀 버리는 듯 했다. 

'사람 대우'는 커녕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뼈 속 깊은 거부감은 군대에서의 내적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가족과 주고 받은 사랑, 친구들과 주고 받은 우정, 이웃들과 주고 받은 애정을 통해, 한 사람으로서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인 것을 배워나가고 있는 각각의 사람들에게, 분명 자신이 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거나 한 사람으로 취급 당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든 불쾌함이고, 두려움이며, 외로움이고, 아픔이다. 그들은 그렇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 것이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 20장 17절)

출애굽기의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에서는 이웃의 소유물을 탐내지 말라고 되어 있다. 그 소유물 중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소유물은 '집'이다. 그 다음이 '아내', '남종', '여종', '소' 등이다. 이처럼 여자 중에서도 남자에게 가장 가까운 '아내' 마저 하나의 동등한 인격이라기 보다는 '남자'에게 귀속된 소유물로 여겨졌는데, 노예들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마태 14장 21절)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마태 15장 38절)

예수님의 시대에도 여자와 어린이는 사람 수에 넣지 않았다. 과부와 고아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그들이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고 열악한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중세까지만 해도 여자에게 영혼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여자에게 영혼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예들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당시 서구인들의 문화적인 인식을은 '그것밖에 안 되는 게 현실이다.'라고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비참한 역사적 사실이다. 동양 문화가 동물, 식물, 심지어는 산과 강과 하늘까지도 영혼을 가진 하나의 '존재'로 대우한 것이 과연 어리석고 우매하기 때문일까? 왜 이제야 서양 문화가 동물 학대를 반대하고, 자연 파괴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가? 그들의 '힘있는 무지'는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고 용서되는 것인가?

그렇게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몸부림치며, 발이 잘리는데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던 쿤타킨테와 그들.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 '사람'이기를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 쿤타킨테는 벨을 아내로 맞이하고, 딸 키지를 키우며, 키지는 치킨 조지를 낳고 조지는 마틸다를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톰을 낳고, 톰은 아이린을 아내로 맞이하여 유라이어를 낳고...

그렇게 그들은 자신이 처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삶을 일구어 나갔다. 그들의 삶은 가진 것 없는 자들의 삶이었고, 차별받는 자들의 삶이었으며, 권력은 커녕 권리가 전혀 없는 자들의 삶이었다. 또한 교육받지 못한 자들의 삶이었고, 매번 맨손으로 일어서야 하는 자들의 삶이었으며, 그렇게 뿌리가 송두리채 뽑힌 자들의 삶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으며, 살아내었다. 그리고는 마침내 뿌리를 찾았다. 뿌리를 잃고 다시 뿌리를 찾아내기까지 그들이 살아내었던 삶의 고통과 고난. 그것에 대한 이유와 의미는 차후에 만들어질 뿐이다. 그래도 그들은 그 속으로 던져졌으며, 그들은 살아내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johann2'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고민하다가 결국은 답을 찾지 못하고 살아보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살아보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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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가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현대문화, 2009 


시간은 어찌 이리도 빨리 흐르는지. 올 한해도 벌써 다 지나가고 한 달여 밖에 남지 않았다. 솔직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정도로 초조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서른 중반에 접어들면서 부터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아,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구나 라고 느끼는 순간 허무함이랄지 말로는 정확하게 표현 못할 수만 가지 생각들이 교차한다. 거기서 나아가 가끔씩은 내 나이를 깜박할 때도 있다. 좋은 의미에서 '나이를 잊고 산다'가 아닌 의식적으로 기억에서 지워버리게 되는 것 같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이 책은 꽃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의 이야기다. 그의 이름은 도리언 그레이, 사람들은 그의 부와 명성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사랑하고 칭송했다. 이토록 잘 생겼으니 마음도 따뜻하고 예의 바르며 순수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엔 사람들이 생각하던 도리언의 모습과 실제 그의 모습이 일치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도리언은 화가 바질이 그려준 자신의 초상화를 보는 순간 스스로의 모습에 깊이 빠져버렸고 젊음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포기할 수 있다고 말해버린다. 

그후 18년 동안 도리언 그레이는 주름 하나도 늘지 않을 만큼 젊음을 유지하는 행운을 누렸다. 도리언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그의 매력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그렇게 그는 사교계에서 손꼽히는 인사가 된다. 하지만 도리언의 화려함 뒤에는 쾌락을 쫓아 헤매는 어두운 면이 함께 있었다. 그는 젊음을 이용해서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으며 그를 흠모하는 다른 사람들까지 파멸로 이끌었다. 그가 행했던 일들은 무성한 소문으로만 떠돌다가 도리언을 비껴갔으나 초상화 속의 '그'는 점차 추악한 몰골로 변해가고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도리언 그레이의 실제 모습은 어떠했을까 상상해 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책에 묘사된 것만으로 그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어렵다면 표지 그림을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 또한 책장을 넘기기 전 한참 동안이나 마음을 빼앗겼었다. '잘생겼다' 라는 말보다는 '아름답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미소년이다. 외적인 아름다움이 무가치하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썩어 없어질 육체를 위해 영혼을 포기했던 도리언의 선택은 분명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그토록 원했던 젊음으로 방탕한 생활만을 일삼았다는 사실이 더 안타깝다. 어쩌면 그가 영혼을 파는 순간, 양심이나 죄책감 같은 선한 마음까지도 함께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시대에 따라서 미의 기준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어느 시대나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은 비슷한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인간중심의 문화를 꽃피웠으나 '나이 듦'이 죄악시 되던 시대였다. 여인들은 흰 얼굴을 유지하기 위해 중금속에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으며 갑갑한 코르셋으로 몸을 감싸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훤칠한 키와 성형에 집착하는 것도 그 시대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이 어떠하든 내적인 면이 채워지지 않는 아름다움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껍데기일 뿐이며, 채워지지 않은 갈증만 느끼게 할 뿐이다. 

어린시절 읽었던 <행복한 왕자> 라는 동화가 생각난다. 멋진 모습을 한 왕자(동상)는 제비에게 부탁해서 자신의 몸에 붙은 장식물들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 사람들은 왕자의 모습이 보기 흉해지자 동상을 녹여버리는데 심장은 녹지 않고 제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다. 이 동화를 쓴 작가도 오스카 와일드다. 같은 작가가 쓴 책이지만 완전히 다른 형식, 다른 내용이다. 하지만 '행복한 왕자와 도리언 그레이 두 사람 중 과연 누구의 삶이 가치 있으며, 누구의 삶이 진정으로 행복했을까?' 라는 질문을 떠올린다면 작가가 의도한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푸른바다’
님?
책 읽는 것이 좋고 글 쓰는 것을 즐기는 직장맘 입니다. 정신없이 바빴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온 세상이 고요해진 즈음에 읽는 글로 내일의 에너지를 충전한답니다. 푸른바다 저 멀리 넘실거리는 새 희망을 향해 하루하루 노 젓는다는 마음으로 살며, 행복은 늘 손 뻗으면 잡을 수 있는 곳에 있다고 믿는 낙천주의자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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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짙은 안개를 뚫고 들어온 하나의 빛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키, <죄와 벌>, 열린책들, 2009


수평선 아래로 지지 않는 태양, 밤이 돼도 눈을 감지 못하는 대지. 한여름 밤의 더위가 영원할 것 같아 불길하다. 상의를 거의 벗어젖힌 채 순찰을 돌고 온 경비원의 발에 도끼 한 자루가 밟힌다. 이건 뭐지. 아무 생각 없이 도끼를 잡는 순간, 끔찍한 환영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 도끼를 높이 들고 전당포 노파의 머리를 가격하는 라스꼴리니꼬프. 노파는 큰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는 시뻘건 피와 뇌수를 쏟아낸다. 피비린내에 구역질이 먼저 날 것 같지만, 그의 이성은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 그렇게 그는 살인자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온 라스꼴리니꼬프는 실신하듯 침대에 쓰러진다. 잠을 자는 것일까.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고 오지 않았다. 하지만 피 냄새가 그의 몸에 묻은 것 같고, 사나운 사내들이 피 냄새를 맡고 그를 쫓아올 것 같다. 얼마 후 그의 신실한 친구 라주미힌과 사랑하는 어머니, 여동생 두냐가 찾아온다. 반갑지 않다. 애초 삶의 무게가 무거웠던 그는 살인을 통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강 건너 홀로 서있는 그는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그들을 대할 수 없다. 그는 걷잡을 수 없는 광기와 혼돈에 휩싸인다.

한 가지 극복할 수 새로운 감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마주치는 모든 것,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끊임없는, 거의 생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혐오감이었다. 그것은 집요하고 사악한, 증오에 가득 찬 혐오감이었다. 그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이 혐오스러웠다. 그들의 얼굴, 발걸음, 행동거지, 모든 것이 그랬다. 만일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면,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에게 침을 뱉든지, 그를 물어뜯어 버렸을 것이다…….
(163쪽)

작품 속 인물들은 안개 속을 헤맨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노파를 살해한 동기가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리대금업자란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해, 먼 미래에 세상을 밝힐 자신이 지금 필요한 돈을 구하기 위해서라 하지만 자신에게조차 확신을 주지 못한다. 자신도 노파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이며, 더욱이 살인자란 생각은 그를 끝없이 괴롭힌다. 라주미힌과 두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라스꼴리니꼬프가 왜 힘든지 알 수 없다.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괴로울 뿐이다. 마침표를 찾을 수 없는 지독한 고뇌의 순환 고리다.

안개 속에 도사리는 위협

라스꼴리니꼬프 앞에 예심 판사 뽀르피리가 나타나면서 혼돈은 극한의 긴장감으로 전이된다. 뽀르피리는 쥐를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라스꼴리니꼬프를 괴롭힌다. 뽀르피리는 휴학 중인 법대생이 범인이라고 확신하면서 그를 전방위로 압박한다. 무척이나 재밌는 놀이처럼 말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처음에는 큰 충격을 받지만 혼미한 정신을 다잡고 뽀르피리와의 일전을 준비한다. 승산도 있다. 뽀르피리는 물증이 없다. 이제 이야기 전개는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설전을 벌이는 양상으로 변하고, 긴장감을 배가된다. 또 본능적인 자기 방어를 위해 눈에 독기를 품을 라스꼴리니꼬프의 모습에서는 인간의 잔인함마저 느껴진다.

“당신은 온통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그는 입술을 비틀어 창백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또 내가 한 장난과 내 대답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 거지요.” 그는 벌써부터 자기가 어떤 말을 해야 되는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 말했다. “당신은 나를 겁주거나…… 아니면 그냥 나를 가지고 노는 거겠지.” 이 말을 하면서도 그를 노려보는 라스꼴리니꼬프의 눈에서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증오심이 번뜩였다.
(507~508쪽)

여기서 작가의 진가가 발휘된다. 상대방이 손에 쥔 패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두 인물이 펼치는 머리싸움은 숨 쉬기조차 힘들게 만든다. 특히 작가의 탁월한 사건, 심리 묘사는 독자마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안개 속으로 몰아 넣는다. 안개 속 발걸음은 느리다. 하지만 앞에 뭐가 있는지 몰라 무척 조심스럽다. 작품도 마찬가지다. 대사와 심리 묘사 중심으로 느리게 전개되는 것 같지만, 매우 단단한 결을 가지고 있어 매 순간 상황 속으로 몰입하게 만든다.(살인자가 노파가 살아나는 환상을 보는 장면은 눈앞의 것처럼 생생한 공포를 전한다.)

모든 게 혼란한 상황에서 ‘죄와 벌’이란 제목만큼은 명확해 보인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게 당연한 이치니까. 하지만 이 또한 명확하지 않다. 이미 더러운 세상에서 무엇이 죄이며, 누가 죄를 벌할 수 있단 말인가. 가난한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노파를 죽인 건 죄인가.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여인 소냐와 가족을 위해 루쥔의 청혼을 받아들인 두냐 중 누가 더 순결한가. 또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음식에만 탐욕스런 눈길을 보내는 이들은 정당한가. 그 눈길로 인해 한 여인이 미치고 결국엔 죽음을 맞이했는데 말이다.

지독한 안개 속, 출구는 없을까. 빛은 그 두터운 안개를 뚫지 못할까. 작가는 라스꼴리니꼬프에게 빛이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바늘구멍 하나를 만들어 준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의 장례를 도와주면서 그녀와 가까워진다. 소냐는 자신을 길거리 여인이 아닌 그냥 여인으로 바라보는 라스꼴리니꼬프를 사랑하고, 그 또한 여인을 만날 때는 세상에 대한 적개심을 거둔다. 신, 구원이라는 이상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순간이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한 사람’으로 인해 ‘그의 세상’은 조금씩 변한다.

지옥 같은 세상을 살게 하는 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외롭지 않게 하는 건, 단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반디의 한 마디 더!

‘<죄와 벌> 도전’은 이번이 두 번째다. 3음절이 넘는 이름을 외우기 싫어 첫 도전에서는 100쪽도 넘기지 못했다. 10년이 지난 지금은, 재.미.있.었.다. 삶, 구원에 대한 작가의 깊은 고민과 치밀한 묘사를 통한 이야기 전개는 책 잡기보다 놓기를 더 힘들게 했다. <죄와 벌>은 지난 11월 14일 ‘책을 좋아하는 사람’(‘ 책좋사’) 정모에서 선물로 받은 책이다. 좋은 책을 선물해주신 블로그 이웃 오우아님과 항상 책과 함께 즐거운 책좋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그리고...
                                                                                                                                                                       -                                                                     - 반디 (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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