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2.23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나 요즘 진짜 엉망이야
  2. 2013.06.13 《김수영 전집 2 산문》 - 김수영 대 김수영
  3. 2012.04.10 《느낌의 공동체》 - 자신에게 보내는 연서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나 요즘 진짜 엉망이야

 



제프 다이어 |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 웅진지식하우스 | 2014


여행 산문집이라는 말 때문에 손을 내밀었다. 여행서가 맞으나, 장소에 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다는 말도 상당히 유혹적이었다.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는 장소를 이야기하지 않는 여행기다. 정말 그렇다. 작가가 어디론가 떠나기는 했으나 이 책에는 그곳에 관한 소개가 없다. 그는 작정하고 떠나지도 않았다. 일삼아 떠났을 뿐이고 마음이 내켜서 가방을 꾸렸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지리적 배경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만 몇 안 되는 배경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빼곡히 적혀 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풍경이 이채로웠다. 이 책은 여행이라는 게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니라고, 어떤 장소에서 느끼는 것들이 모두 여행의 한 쪽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해 준다. 파리에 가서 베르사유 궁전과 루브르 박물관만 보고 왔다면 그것은 파리에 가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여행을 갔다 왔다고 말할 수 없는 거라던 어떤 이의 말에 공감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없다. 하지만 ‘진짜 여행’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앎에도 그 목적이 있을 테지만, 짐작은 언제나 앎보다 재미있다. (39쪽)
사람들은 왜 여행을 하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51쪽)

저자 제프 다이어는 "이 책에 적은 일들은 모두 실제로 있었던 일이지만, 그중 몇몇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어났다."고 말한다. 분명 책을 읽다 보면 이게 진짜로 일어났던 일인지, 상상인지 헷갈린다. 신비로운 일이다. 그가 어디를 갔는지, 왜 갔는지는 묻고 싶지 않다. 그저 카메라 하나 둘러매고 가뿐하게 떠났을 것 같은 그의 여행길에 조금이라도 공감하고 싶은 욕심이 난다.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던 곳에 다시 가본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좋았던 곳은 다시 가도 좋을까?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다시 가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바다에 가면 해파리에 쏘이거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멀찍이 수영하는 사람만 바라보고, 논두렁길을 걸으며 상대를 앞지르거나 넘어질까 서로를 잡아 주면서 나무에 관해 얘기하고, 성지에 가면 유적지가 뿜어내는 성스러움에 나를 동화시키려 애쓰고, 공놀이할 때는 온전히 공놀이에만 빠져든다거나. 사소한 일들이 여행이라는 이름표 밑에서 속살거린다. 캄보디아 프레룹 사원에서 콜라를 파는 소녀와 작가의 신경전은 정말 흥미로웠다. 별것 아닌 일이라고 넘어갈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나는 옆에서 지켜봤던 것처럼 이상한 쾌감이 느껴졌다.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는 혼자만의 철저한 독백이다. 하지만 그 짧은 이야기에서 함께 여행을 느끼고 싶은 여운이 남는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아이비'님은?

책과 우리 문화유산을 사랑합니다. 답사를 다닐 때마다 소망합니다. 그곳에 머물던 이들과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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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2 산문》 - 김수영 대 김수영

 

 

김수영 | 《김수영 전집 2 산문》 | 민음사 | 1981

 

‘시 창작 이론’을 수강한 적이 있다. 학생 때의 일이다. 문예창작학과 학기 중에는 창작이니 비평이니 하는 필수 전공과목이 허다했다. 나는 모범생이 못 돼 놔서 그 허다한 전공과목을 허다하게 빠졌고, ‘시 창작 이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각인된 것은 한 시인의 이름 석 자다. 김수영. 시를 가르친다면, 아니 시를 가르치는 교수가 아니라도 대개의 창작 강의에서 자주 거론하는 이름이었다. 김수영이 누구기에? 그는 1921년에 태어나 1968년 6월 16일에 생을 마감했다. 해방, 한국전쟁, 4·19, 5·16으로 격변했던 현대사의 한때였다. 김수영은 시대에 발언하는 시(詩)를 썼고, 시(詩)에 반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자 했다. 이러한 삶을 나는 꽤나 간편하게 정의했다. 김수영은 저항시인이다, 그가 온몸으로 맞서 싸운 적(敵)은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다, 라고.

 

하지만 오늘에 와서는 정정하고 싶다. 단지 시대를 말하는 것은 피상적인 표현에 그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을 옥죄는 시대라는 것이, 그 억압자가 외부에 있지만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 극장에, 이 거리에, 저 자동차에, 저 텔레비전에, 이 내 아내에, 이 내 아들놈에, 이 안락에, 이 무사에, 이 타협에, 이 체념에 마비”된 자신이, “마비되어 있지 않다는 자신에 마비되어 있는”(131쪽) 자신이 바로 적(敵)의 본진임을 김수영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렇다. 오만하게 독단했던 김수영을 이제야 읽어 나간다. 처음 집어든 책은 《김수영 전집 2 산문》이다. 여기에서 그를 마주한 한 편의 산문이 있다.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이 없는가는, 따라서 나는 내 정신을 갖고 살고 있는가로 귀착된다. (…) <제정신>을 갖고 산다는 것은, 어떤 정지된 상태로서의 <남>을 생각할 수도 없고, 정지된 <나>를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엄격히 말하자면 <제정신을 갖고 사는> <남>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것이 <제정신을 가진> 비평의 객체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창조생활(넓은 의미의 창조생활)을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창조생활은 유동적인 것이고 발전적인 것이다. 여기에는 순간을 다투는 어떤 윤리가 있다. 이것이 현대의 양심이다. (…)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 이에 대한 처방적인 나의 답변은, 아직도 과격하고 아직도 수감 중에 있다. (186쪽)

 

김수영의 펜은 최후에 자신을 겨눈다.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산문에서 일관되는 태도다. 정치며 예술이며 당대의 갖은 면면을 문제시할 때, 자신도 같은 문제에 속한 자다. 그는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안 잡히고, 쥐어도, 쥐어도, 안 잡힌”(112쪽) 자신의 벽을 직시했고, “우리 집 안에 있고 내 안에 있는 적”(131쪽)을 직시했고, “가장 민감하고 세차고 진지하게 몸부림을 쳐야 하는”(186쪽) 자기의 죄를 직시했다. 김수영이 그토록 벽과 적(敵)과 죄를 끊임없이 의식한 이유는 “시를 쓰는 사람, 문학을 하는 사람의 처지로서는 <이만하면>이란 말은 있을 수 없”(177쪽)음을 몸소 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만하면 괜찮은 시(詩)랄지, 이만하면 괜찮은 정치랄지, 이만하면 괜찮은 자유랄지 하는 식의 주장과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이것은 시대와의 싸움보다 먼저 김수영을 꿇어앉히려는 김수영과의 싸움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싸움을 되새기자면 생생한 매개로 《김수영 전집 2 산문》과 같은 책이 있다. 그의 시(詩)를, 그의 산문을 내 안의 건재한 적(敵)에게 겨눈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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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공동체》 - 자신에게 보내는 연서

 

신형철 | 《느낌의 공동체》 | 문학동네 | 2011

 

책을 함께 읽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은 소설이다. 사전에 한 편을 정하고 한 달 후, 우리는 둥그렇게 둘러앉아 감상을 나눈다. 발언 순서가 오기를 기다리며 말을 고른다. 주제와 문장에 대해, 작가의 세계관과 화법에 대해, 소설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머리를 굴릴수록 입을 떼기는 난감해진다. 이 소설에 느끼는 사랑 혹은 미움을 설명해야 하는 자리인데, 일련의 애증을 말로 풀자니, 어머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차라리 밑줄 그은 대목을 내보이는 편이 안전할 터. 그러나 우리는 결국 위험해진다. 사람들은 스스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말을 떠들고 또 듣는다. 모임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 사람들은 분명 다음 중 한 마디를 중얼거릴 것이다. 내 말은 그게 아닌데, 이 말을 하는 거였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데. 사람들이 어떻게 들었을지 애끓는 사이, 느낌은 그렇듯 쉽게 흩어지고 만다.

 

비관하기는 이르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명확히 표명될 수 없는 느낌들의 기적적인 교류, 그러니까 어떤 느낌 안에서 두 존재가 만나는 짧은 순간,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너를 사로잡고 있는 느낌을 알 수 있고 그 느낌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한 사람을 알고 있다. 평론가 신형철이다. “읽고 쓰는 일은 내 삶의 거의 전부”라며 정체를 밝힌 이 사람이 자신의 느낌을 보존하는 방식은 글쓰기다. 그 증거로 삼 년 간 쓴 글을 엮은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가 있다. 2005년에 문학평론을 쓰기 시작한 이래, 신형철의 두 번째 책이다. 1~6부로 구성된 이 산문집에 담긴 글은 2006년부터 2009년까지 《한겨레21》, 《시사IN》, 《풋》 등에 기고한 것으로 시인, 시집, 세상, 소설,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다. 공통분모라면 신형철이 전부다. 그럼에도 《느낌의 공동체》를 권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 때문이다.

 

신형철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게 사랑이지만, 더 많이 아파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 시”라고 말하며 시집을 덮은 후에도, “새해 벽두에 가장 참혹하고 치명적인 시는 시집이 아니라 용산에 있었다. 그래서 시가 아니지만 시이기도 한 문장들을 읽는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행간을 읽어 나간다. “‘무이자’를 수도 없이 부르짖는 대부업체 광고가 혐오스럽다. (…) 어디 광고뿐인가. 정치인들이 덜떨어진 상호 비방의 현장에서 ‘존경하는 국민’을 운위할 때, 연예인들이 학예회를 벌이는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감히 ‘사랑’ 운운할 때, 제 본래 뜻을 잃어버린 말들의 황사에 우리는 숨이 막힌다.”라거나, “나는 늘 문학은 천박한 ‘성공’을 찬미하는 세계에 맞서 숭고한 ‘몰락’의 의미를 사유하는 작업이라고 믿어왔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인간 노무현의 몰락이 내게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문학적이다.”라거나, “고뇌는 공동체의 배수진이다. 그 진지가 무너지면 우리는 괴물이 되고 말 것이다.”와 같은 사유는 그런 독서의 결과일 것이다.

 

이 중에서도 신형철의 문장이 빛나는 순간은 역시 문학에 빠져 있을 때다. 자신과 같은 평론가에게 “연적(戀敵)을 바라보는 질투 같은 것”을 느끼고, 좋은 문장을 읽으면 “동일한 대상을 달리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그 문장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할 만큼 그는 문학을 사랑한다.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다.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라고 일갈하면서도, “그래,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은 가장 숭고해진다.”라며 절망의 역설을 지지한다. 이 책은 “열린 마음으로 문학 작품의 넓이를 가늠해보시기 바란다. 그것이 곧 우리 삶의 넓이이기도 할 것이다.”라는 당부로 끝을 맺는다. 문득 나는 모임 날의 귀갓길을 떠올린다. 매번 중얼거림의 시간을 오간다는 점에서 평론은 위험해지는 길이기도 하겠다. 그 위에 신형철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쓴다. 사람들이 듣는 바는 논외다. 이 사랑을 그저 자백할 뿐. 이상한 일은 다음부터다. 그의 느낌과 만나진다는 것. “서로 사랑하는 이들만이 느낌의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말을 곱씹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는 아닐 테니, 사랑하는 대상이 같다고 해석해도 될까. 그런데 나에게는 아직 이 연적(戀敵)을 이길 방도가 없다. 여전히 홀로 중얼거리고만 있으니.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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