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해당되는 글 37건

  1. 2009.11.17 <사랑이, 내게로 왔다> - 이들처럼 사랑하고 싶으세요?
  2. 2009.10.23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 상처받은 이의 쉼 없는 노래 (2)
  3. 2009.09.22 편지로, 그대 숨결을 느끼다 - <A가 X에게>
  4. 2009.09.02 환경지식의 재발견 -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2)
  5. 2009.08.26 아름답기에 더 비극적인 - <검은 새의 노래>
  6. 2009.08.13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 <렛미인 1, 2>
  7. 2009.07.23 키스하듯 읽어야 할 사랑 -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2)
  8. 2009.06.15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9. 2009.06.10 [들블] ‘Can"T Smile Without You’ - 사랑하니까 좋아!
  10. 2009.06.09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 시간의 강을 건너 그대를 만나다 (2)

<사랑이, 내게로 왔다> - 이들처럼 사랑하고 싶으세요?

 

이주향, <사랑이, 내게로 왔다>, 시작, 2008


‘이주향의 열정과 배반, 매혹의 명작 산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대학에서 철학을 흥미롭고 쉽게 가르치는 인기 높은 교수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철학을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많은 호응을 얻었다는 작가의 평판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사랑에 관한 성찰적 보고서로 보입니다.

총 33편의 문학 작품 속 사랑이야기를 그녀만의 해석으로 싣고 있고, 거기에 가상 인터뷰를 통해 작품 속 주인공들(주로는 여성)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는 형식으로 책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그 작품들을 읽으며 느꼈던 것들이나 궁금했던 것들을 그러한 형식으로 꾸며 자신의 생각들을 드러낸 듯한데, 참신하면서도 공감되는 부분이 꽤 많았지요.

물론 여기 나오는 33편의 문학 작품들을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대부분은 읽었던 작품들이지만 그 중 또 대부분은 이미 희미한 기억의 저 편에 머물러 있어 그것들을 되살리기가 쉽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네요) 작가가 들려주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덧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상기되기도 했고, 또 작가의 친절한 해석으로 이미 한 편의 작품을 다시 읽어본 듯한 착각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랍니다.

갖가지 사랑의 유형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바로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우리가 꿈꾸는 황홀한 사랑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실체를 직면하는 듯한 느낌에 휩싸이기도 하고, 또 믿어왔던 사랑의 본질이 어느 순간 흔들리고, 해체되는 고통을 맛보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렇게나 찬란했던 사랑이 그보다 더 깊은 증오로 변하는 걸 보면서 우리는 사랑에 회의를 품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들이 왜 그저 문학 작품 속 이야기들로만 여겨지지 않고,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내가 원하는, 혹은 원하지 않는 나의 이야기라는 착각이 드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 존재하는 사랑에 대한 환상, 다시 말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염원을 우리 모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하기에 아프더라도 사랑을 하고 싶고, 찢어지더라도 가슴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난 후에 찢어지고 싶어 하는 거 아닐까요? 또 소멸할 지라도 그 단 맛을 단 한 번이라도 맛보고자,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전부를 거는 도박을 감수하는 게 아닐까요?

바로 작가가 프롤로그에서 밝혔듯이 고전 속의 주인공들은 사랑이 일깨운 열정과 기쁨과 슬픔과 질투와 분노와 두려움으로 자신을 배우고 생을 배워간 사람들이고, 그들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사랑 없는 평화보다 사랑 있는 갈등이 낫기 때문에, 우리들 또한 그러한 사랑을 맛보고 싶어 하는 그들과 똑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깨지더라도 기꺼이 사랑에게 다가가는 모험을 하는 거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니 이 책의 많은 부분을 공감하지만 제목만큼은 이렇게 고치는 게 어떨까란 생각을 해 봤지요. ‘내가 사랑에게로 갔다’로 말이죠.

결국 사랑이란 나 아닌 타인을 향한 나의 끊임없이 샘솟는 갈망과 열정의 표현, 또는 자신을 키우는 영양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상기시켜 주지만, 동시에 그 갈망과 열정이 늘 아름답거나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때론 희생과 용기, 결단을 요구하고, 우리들에게 아픔을 주고,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러니 이 가을 사랑에 목말라 하는 이들, 사랑에 목숨 걸고 싶어 하는 이들은 바로 이들처럼 사랑을 배워나가고 생을 배워나갈 용기로 사랑에 직면해 보시죠. 세상에서 내려주는 사랑의 해석을 두려워 말고 각자의 방식대로 용기 있게 말입니다. 사랑의 실체를 직시하고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밤비’님은?
저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살고 있고 책 읽기, 영화 보기, 사색하기,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곳 캐나다 몬트리올 한인학교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고,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캐나다, 또는 제가 살고 있는 몬트리올에 관한 소식을 고국에 계신 분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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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 상처받은 이의 쉼 없는 노래

 

박후기,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창비, 2009


여린 사내가 있다. 지나간 사랑을 잊지 못해 깊은 밤 그녀를 노래한다. 지금은 어둠과 찬바람만 가득하지만 어느 시절 그의 사랑은 그저 떨렸을 것이다. “떨림이 없었다면 / 꽃은 피지 못했을 것이다 / 떨림이 없었다면 /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 그러나 떨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할 때, / 한시절 서로 끌어안고 살던 꽃잎들 / 시든 사랑 앞에서 툭, 툭, 나락으로 떨어진다”(92~93쪽, ‘꽃기침’에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십일 넘어 붉게 아름다운 꽃은 없다. 그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미 시든 자신의 사랑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슬프다. 사랑은 꽃이 아니기에. 꽃은 내년에 다시 피지만, 사랑은 언제 다시 필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피지 않을지도….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나간 시간에 편지를 보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그녀를 향해 소리쳐볼까. 스스로 위로도 해본다. “너를 생각하면 / 얼어붙은 뺨보다 가슴이 더 시리지만, / 사랑을 잃고 산길을 헤매는 사람끼리 / 체온을 나누어갖는 밤도 슬프진 않다 / 어차피 네게로 가는 길도 지워졌으리라” (14~15쪽, ‘비박’에서)

하지만 사랑은 빠지는 것. 이성의 방식대로, 심장의 충동대로 사랑에 빠질 수 없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었기에, 이별은 더더욱 선택이 아니었기에, 위로는 가슴 속 깊은 상처에 닿지 못한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 위로되지 않는 아픔. 아직 사랑이 다 지나가지 않아서 그런 걸까. 여전히 숨 쉬고 있는 사랑 앞에서, 차라리 거짓말을 사랑하리라.

침묵은
말 없는 거짓말,
내 귀는
거짓말을 사랑한다
살아야 하는 여자와
살고 싶은 여자가 다른 것은
연주와 감상의
차이 같은 것
건반 위의 흑백처럼
운명은 반음이
엇갈릴 뿐이고,
다시 듣고 싶은 음악은
다시 듣고 싶은
당신의 거짓말이다.
(66쪽, ‘사랑-글렌 굴드’)

여린 사내의 여행

여린 사내가 여행을 떠난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듯 세상을 사랑해, 몸을 자리에 쉽게 누일 수 없다. 그는 분명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다. 세상의 화려한 불빛이나 문명의 풍요로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로등 밑 공중전화에서 전화카드 돈 떨어지는 소리고 눈 덮인 히말라야 산맥 아래 고향집 대문을 두드리는 불법체류자들’과 ‘간수 같은 누런 오줌을 가랑이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요양원의 치매 걸린 노인’이다. 아픔은 그렇게 아픔을 알아보나 보다. 그리고,

  저개발지구에서는 꽃들도 난간 위에서 피고 진다. 버려진 꽃들이 생사의 경계 위에서 목을 길게 빼고 망을 본다. 가끔, 발을 헛디딘 꽃잎이 난간 아래로 추락하기도 한다.
  지상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난간 위에 망루를 세웠다. 망루가 서 있던 난간은 무너진 하늘의 일부였다. 그곳은 철거민들의 소도(蘇塗)였지만, 관리들은 용산 4지구라고 불렀다. 누군가 망루에 불을 질렀고, 시커멓게 타버린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급하게 이승을 빠져나갔다.
(44쪽, ‘난간에 대하여’에서)

그의 여행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마음이 산 너머 먼 이국으로 향했는지, 아니면 그곳의 절규가 바다 건너 이곳으로 왔는지, 그는 다시 아픔을 노래한다. 노래는 멈추지 않는다. 두 눈 부릅떠 아픔을 바라보며, 노래를 멈추지 않는 걸 보니, 그는 여리지 않다. 다만 아픔을 외면할 수 없어, 슬픔을 노래할 뿐이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죽은 자도 검문소를 통과해야 비로소 죽음에 닿을 수 있다. 포탄에 맞아 이마가 함몰된 도로를 우회하는 것은 산 자나 죽은 자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다. 앰뷸런스는 죽음보다 늦게 도착하고, 소녀는 무너진 발전소를 지나 집으로 간다. 살랑거리는 촛불을 사이에 두고 동생과 숙제하는 밤은 행복하다. (59쪽, ‘소녀들’에서)

‘살랑거리는 촛불을 사이에 두고 동생과 숙제하는 밤은 행복하다’는 이 거짓말 같은 현실. 사내는 ‘당신의 거짓말’을 사랑한다. 아마 그는 ‘세상은 평화롭다’는 거짓말도 사랑할 거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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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그대 숨결을 느끼다 - <A가 X에게>


 

존 버거, <A가 X에게>, 열화당, 2009


몸이 조금씩 아파오는 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내가 약국을 다녀올 수도 있었지만, 이미 옷을 갈아입은 뒤라 조카들에게 약 이름을 알려주고 심부름을 보냈다. 집 근처에 약국에 세 군데 있어서 설마 못 사올까 싶어서 안심하고 보냈는데, 휴일이라 그런지 모두 문이 닫혔다며 허탕을 치고 돌아왔다. 근방의 약국들이 한꺼번에 문을 닫으면 다급한 사람은 어쩌라는 건지, 잠시 푸념을 한 뒤 헐레벌떡 뛰어온 조카들에게 수고비 500원을 쥐어 주고(배분은 알아서 하겠지.), 읽다만 책을 펼쳤다.

굳이 안가도 되겠다 싶은 약국을 조카들을 시켜서 가게 한 것은 존 버거의 소설 속 인물  아이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직접 가지는 않았지만 왠지 그곳에서 아이다의 환영을 보게 될까봐. 조카의 손을 거쳐 내게 도착한 약에서 혹시나 그녀의 손길을 느낄까 그녀를 나의 현실로 끌어 내렸지만, 그런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허전하다. 다른 약국을 간다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잠이 들었는데, 새벽에 진탕 아파 버렸다. 데굴데굴 구르고, 토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나니 정신이 몽롱했다. 오전 근무만 하고 집으로 돌아와 내리 몇 시간 동안 잠만 잤는데도 아픔은 가시지 않고, 배는 고프고, 생각은 한정돼 버리는 것에 상실감을 느꼈다.

누워 있으면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기에 책을 꺼내 읽었다. 손에 쥔 책을 다 읽었음에도, 어제 읽은 존 버거의 소설 속의 아이다란 인물이 자꾸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이다는 결국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나를 컴퓨터 앞으로 이끌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남기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 그녀가 한 남자에게 쓴 편지들이 묻힌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 견딜 수 없었다.

감옥에 갇힌 남자, 편지하는 여자

아이다는 감옥에 갇힌 한 남자에게 편지를 쓴다. 남자는 반정부 테러 조직을 결성했다는 혐의로 이중종신형(죽을 때까지 감옥에 있고, 죽은 나이만큼의 기간 동안 시신을 감옥 밖으로 내올 수 없다는 형벌.)을 받을 사비에르라는 청년이다. 새 교도소가 들어서면서 73호 감방에서 머물렀던 마지막 수감자. 협소한 수납 칸에서 아이다가 보낸 편지가 발견된다. 이 책에는 부치지 않은 편지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 경위는 밝히지 않고 사비에르가 정리한 순서그대로 실려 있다.

아이다는 비교적 차분한 어투로 사비에르에게 편지를 쓴다. 격정에 휩싸여 쓴 편지는 종종 붙이지 않았지만, 이중종신형을 당한 남자에게 쓴 편지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차분하다. 자신의 일상을 토대로 그와의 추억을 기록해 가는 그녀는 담담해 보인다. 그러나 다양한 언어로 애칭을 바꿔가며 애정을 표시하고, 편지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 ‘사랑해요’라는 표현은 읽는 이의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흔히 볼 수 있는 연애편지로 볼 수도 있겠지만, 아이다와 사비에르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면회도 허락되지 않고, 결국 유일한 교류 수단은 편지 밖에 없다.

돌아올 수 없는 이에게 쓰는 편지란 어떤 기분일까. 오래 전, 군대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그리움을 가득 담아 편지를 쓴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이다의 먹먹한 기분이 조금은 전해지는 느낌이다. 그러나 휴가, 면회, 제대라는 기다림이 있었던 반면 아이다는 그 모든 것이 단절된 상태고, 강제로 헤어진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편지로 밖에 전할 길이 없다. 편지 안의 그를 볼 수도, 만질 수도 없어 내재된 그리움은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편지 속의 그리움은 아이다와 사비에르가 처한 현실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다. 사비에르가 어떠한 연유로 잡혀갔는지 자세하게 나와 있지 않았지만, 혼란스러운 국가, 억압당하고 강제성을 띠는 인권, 불안에 떨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두려움은 늘 감지된다. 그녀도 어떤 활동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저자의 설명대로 숨겨진 의미를 찾기란 어렵다. 사비에르를 향한 그리움, 거대한 집단 앞에 힘없이 무너지는 한 인간과 무리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내겐 숨이 차오를 지경이다. 
 
오랜 기간 사비에르가 받았던 편지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밤이 깊어갈수록 그녀의 그리움은 배가 되어 내 안에 맴도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그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잠시 책을 덮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아이다의 상실감에 비할 바 못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천연덕스럽게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상세히 기록해가는 아이다, 큰 사건을 일상처럼 말해야 하는 아이다, 처절할 정도로 사랑하는 이의 온기를 느끼고자 자신의 손을 그려 나가는 아이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갈라놓은 보이지 않는 힘에 저항심마저 생긴다.

아이다의 편지에 상응하는 사비에르의 편지는 없다. 다만 그녀가 보낸 편지 뒤편에 사비에르의 메모가 있는데, 그의 해설이 필요한, 난해하고 짤막한 글들이 대부분이다. 그 글은 아이다에 대한 글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 행해지는 반인간적인 행위에 대한 개탄과 상대성을 그린 것이 많다. 그 낯선 이질감에 몸을 떨면서도 사비에르가 그런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 그랬을까. 감옥 밖으로 한 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그는 아이다의 편지의 뒤편에 세상의 곳곳을 누비며 보이지 않는 활동가다운 호소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더라도 사비에르가 아이다에게 보낸 편지는 상세히 알 수 없었기에 그런 아이다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난감해지기도 한다.

감추지 않는 마음, 아니 감출 수 없는 마음
 
아이다가 보낸 편지의 무게가 가벼웠더라면, 사비에르의 메모가 아이다를 향한 것이었다면 편지를 읽는 내 마음은 어떻게 변모돼 갔을까. 아마 조금은 특별한 연애편지로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사랑이 현재에도 세계 어느 곳에서 지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냥 가볍게 읽고 지나칠 수가 없다. 약국에서 일하는 아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전하며, 때로 활동가로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이 알고 있는 다양한 지식들을 진부하게 늘어놓는다. 하지만 사비에르 앞에서만큼은 한 사람의 여자이고 싶은 마음 또한 감추지 않는다.

아이다의 편지를 읽으며 사비에르의 메모가 무심하다 싶다가도 그가 한두 마디씩 흩뿌려 놓은 아이다를 향한 마음을 볼 때면 둘의 단절이 피부에 와 닿아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들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단절이 왜 그들에게 일어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져 보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하다. 세계화를 빌미로 이루어진 폭력과 자본세계의 병폐와 만인에게 가해지는 불편한 진실을 파악할 힘이 내게 남아있을 리도 없다.

연인(戀人)의 단절된 상황으로 나머지 배경을 파악해 나가는 도리밖에 없다. 아이다의 절절한 편지, 사비에르의 개탄과 비난이 섞인 메모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진다. 과연 나는 행복한 것일까, 저들의 모습을 무시해도 괜찮을 것일까란 질문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물론 둘의 단절 앞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이다가 얼마를 기다려야 사비에르가 돌아올지 알 수 없었고, 사비에르가 과연 감옥에서 나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마지막 편지 뒷면에 그려진 ‘오늘 밤의 탈출 경로’를 통해 둘의 재회를 잠시나마 꿈꿔본다. 먹먹한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그들의 운명이 어떤 종말을 맞든 그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저자의 말처럼 신께서 그들을 지켜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더 이상 그들이 처한 상황들이 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크지만, 그 바람은 아주 먼 얘기로만 느껴져, 내 존재가 너무나 미미하게 다가와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존 버거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가라 그의 신간이 나왔나 정기적으로 검색해 본다. 우연히 신간이 나온 것을 보고 바로 구입했는데, 그의 소설은 처음이거니와 두껍지 않은 책임에도 묵직한 무게감을 지니고 있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의 산문과 시, 평론을 주로 읽다 소설을 마주하게 되니 다시 한 번 그의 역량에 감탄하면서도, 허공을 향한 흐릿한 시선을 거둘 수 없는 나를 자주 만나게 됐다.

아이다의 편지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사비에르의 메모에 동감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존 버거가 그려낸 세계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 이 책을 계기로 그의 소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먹먹한 가슴앓이가 계속 이어지더라도 다른 작품을 탐독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당분간은 아이다란 인물이 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을 것 같다. 좀 더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인물을 갈망하며 그의 새로운 작품을 향해 손을 내밀어 보련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태극취호’님은?
도능독(徒能讀)을 일삼는 자. 책 읽기도 습관이라 생각하며, 책이라면 환장하며 달려드는 서른을 눈앞에 둔 철딱서니. 언제나 머릿속에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서 살아볼까 꿈만 꾸는 몽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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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지식의 재발견 -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이진아,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책장, 2008


책 소개에 앞서 쉽고 재밌는 퀴즈를 풀어볼까요?
 
질문1: 콜럼버스가 북미 대륙에 도착하고 200년 동안 감소한 원주민 수의 비율은?

질문2: 일제 식민지 시대 36년 동안 파괴된 우리나라 삼림의 비율은?

질문3: 중국산 한약재에 중금속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이유는?

질문4: 먹을거리 오염 문제 해결의 실마리는?

어떤가요. 주관식 문제라 풀기 어렵지는 않았는지요. 혹자는 몇 초 안에 다 풀고 ‘이게 무슨 문제라고’하며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릅니다. 또 혹자는 ‘이게 무슨 쉽고 재밌는 문제야’라며 저를 미친 사람 취급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도 답을 몰랐습니다. 그럼 여기서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저자 이진아가 밝힌 답을 살짝 들여다볼까요? 

답1: 95%(16세기 유럽인 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갑자기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인구가 95%씩 감소된 곳에서는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 p 96)

답2: 90%(그 36년 동안 우리나라 삼림의 90% 이상이 파괴되었다. 자국에서, 그리고 2차 대전 중 군수 용도로 필요해서 일본이 대대적으로 벌채를 해갔기 때문이다. - p 160)

답3: 한약재를 채취해 철망 같은데 올려놓고 밑에서 석탄을 때문.(중국산 석탄에는 중금속과 유황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편에 속한다. - p212)

사실 이 문제들은 쉽지도 재밌지도 않습니다. 열 식구 중 아홉 식구가 죽어버린, 시체가 강 같이 흐르는 아비규환의 풍경, 남의 산이라고 사정없이 도끼질을 한 일본인의 이기심과 힘없이 발가벗겨진 산들, 몸에 좋다고 먹었는데 독약을 먹은 격이 된 이 현실은 상상할수록 복잡하고, 슬픕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지구 온난화 등 환경의 역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란 제목만 보면 지금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환경 파괴와 ‘환경을 살리자’는 구호가 나올 법도 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런 외침은 ‘이제 충분하며, 외침만으로 환경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대신 역사 속으로 들어가 인간이 살 수 있는 지침을 찾고자 하는데, 저자가 눈을 돌린 곳은 소빙하기였던 14세기 유럽입니다. 저자는 이 시기 유럽을 ‘슬픈 유럽’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 유럽은 전쟁, 질병 등으로 참 힘들게 살았는데, 이들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바다 건너 대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지요.

옛날 옛적에 유럽에서는

책 중반까지 등장하는 유럽 곳곳의 풍경과 유럽인들의 만행, 그리고 그 속에서 벌어진 환경 파괴 사례들이 빠르게 전개됩니다. 1500년부터 노예무역을 금지한 19세기 초반까지 약 1천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이 유럽인들에 의해 노예가 되었고, 대규모 농장에서 생산된 차, 커피, 설탕 등의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 디저트, 후식 문화가 발전했으며, 생산력을 늘리기 위해 많은 숲이 황폐해졌습니다. 물론 ‘유럽인은 우월하다’는 이성주의와 ‘과학은 발전된 것이다’라는 과학주의가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지요. 저자의 서술은 바다 왕국들이 거침없이 타 대륙을 정복해나간 것처럼 거침이 없습니다. 이는 150개가 넘는 참고문헌을 바탕으로 한 광범위한 지식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협지의 고수가 어려운 초식을 쉽게 펼치는 그 느낌입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상 이변, 석유 에너지가 만든 수많은 독성물질들, ‘개발 중국’에서 날아오는 독한 미세먼지들, 환경 호르몬으로 인한 인간의 생식 기능 감퇴 등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그래도 인간은 산다”고 말합니다. 중세 이후의 유럽인들이 소빙하기의 고난을 뚫고 살아남은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 효율적으로 실천해가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그 흔한 말이

이제 앞서 제기한 네 번째 질문의 답을 들여다볼까요? 저자가 밝힌 답은 ‘사랑’입니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라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너무도 상투적인 답에 실망했으니까요. 하지만 저자의 말을 듣다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집니다. “사랑이나 감사의 마음을 갖는 상태에서 인간의 뇌 파동은 알파-파를 보이는데, 그러면 우리 몸이 만드는 쾌감 물질인 엔도르핀 등이 다량으로 분비되면서 몸 안의 독성물질이 해독되고 혈액순환이 좋아져 모든 세포의 기능이 활발해진다.”(p 249) 먹을거리를 만드는 사람이나 먹는 사람이 사랑과 감사의 마음으로 먹으면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얘기입니다. 생명은 기계가 아니니까요.

‘사랑’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는 전통의 지혜공생의 삶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침 일찍 물을 뜨러 가는 가족의 마음, 장독대를 소중히 아끼며 많은 미생물과 평화롭게 공존하려는 마음, 그리고 텃밭에서 길러 많은 손을 거쳐 식탁에 오르는 김치까지. 예전에는 뜨거운 물을 땅에 버리지 않았다고 하지요. 곰곰이 생각하다 보니 요즘 한국사회에까지 생각이 뻗칩니다. 학창시절부터 몸에 밴 경쟁의식, 경제성을 높인다고 늘어만 가는 비정규직, ‘나와 다르면 잘못된 것’이라는 경직된 사고. 가장 많은 사랑이 필요한 환경이 바로 인간사회 아닐까 합니다. 오늘(6월 5일)은 환경의 날입니다. 새삼스레 환경에 대해 생각해 보자거나, 공존의 삶을 모색하자고 하는 건 아닙니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책 속에 등장한 히말라야의 앵무새 이야기를 소개하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어느 날 히말라야 산에 큰 불이 난다. 수많은 동식물의 삶의 터전이었던 숲은 빠르게 잿더미로 변해갔다. 무서운 기세로 타오르는 불을 피해 모든 동물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 물은 불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렸지만 앵무새는 호수와 불타는 숲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결국 숲에 쓰러지고 만 앵무새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보신 부처님은 앵무새를 불쌍히 여겼고, 앵무새의 눈물 한 방울을 호수만큼의 물이 되게 했다. 숲의 불길은 잦아들기 시작했고, 숲은 다시 푸르게 회복되었다.” (p 171)

안늘(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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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기에 더 비극적인 - <검은 새의 노래>

 

아름답기에 더 비극적인 - <검은 새의 노래>

 

현기증이 날 정도로 눈부신 하늘. 날개를 세차게 퍼덕이며 나는 새들. 그 중 한 쌍은 생의 축복을 온몸으로 느끼듯 아름다운 사랑 놀음을 한다. 그러다 욕정을 참지 못한 수컷은 암컷에게 씨앗을 전하려 하지만, 암컷은 몸을 비틀어 수컷의 노력을 수포로 만든다. 그리고 미친 듯이 웃어젖히는 암컷. 하지만 수컷은 언젠가 다시 그 은밀한 노력을 재개할 것이다. 그들의 날개는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으며, 눈부신 하늘은 그들의 사랑을 관대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원주민 청년 씨비야는 이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또한 한 여성(버로니카)을 가슴 속에 품고, 그녀에게 다가가 사랑(혹은 욕망)을 드러었다. 하지만 암컷이 그랬듯 버로니카는 씨비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씨비야가 바라본 새들과 같은 것은 여기까지다. 그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 ‘감히’ 피부색이 다른 버로니카를 탐한 씨비야는 강간범으로 체포되고, 좁디좁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에게 다시는, 버로니카를 처음 만난 해변을 수놓던 눈부신 햇살은 허락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씨비야는 세 번의 소외를 느낀다. 첫 번째는 피부색으로 인한 운명적 소외다. 그는 원주민 치고는 많은 교육을 받지만 운명의 그리 관대하지 않다. 그는 백인 정착촌을 위해 삶의 터전에서 쫓겨났고, 대학에서는 흑백 분리 수업을 받았다. 또 바닷가에서는 ‘백인전용’ 팻말을 넘어설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두 번째 소외는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낙인이다. 사람들은 사건의 진위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백인들에게는 ‘금기에 도전한 쳐 죽일 놈’이고, 원주민들에게는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여기에 씨비야라는 존재는 없다. 그냥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강간범’만 존재한다.

세 번째 소외는, 앞의 것들보다 사태가 심각한데, 자기감정으로부터의 소외다. 해변을 걷던 씨비야는 ‘마치 고대도시의 유적에 있는 아름답고 부서진 황금 상 같은’ 영국인 소녀 버로니카를 본다. 그녀의 몸에 붙잡힌 그는 가던 길을 멈춰, 그녀의 매혹적인 매력에 빠져든다. 그리고 혼자 마음을 졸이고, 며칠 동안 그녀를 기다리면서 겉잡을 수 없는 내적 충동에 휩싸인다. 그런데 세상이 손가락질 하고, 버로니카가 그 일을 ‘악몽’이라고 하면서 씨비야는 자기감정에 대한 확신을 잃어간다. 사랑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인가.

결국 그 사랑은 백인에 대한 분노, 운명의 저주, 일시적인 욕정 가운데 방향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마저 박탈당한다. 남은 건 자신을 관찰 대상으로 보는 스위스계 독인인 범죄학자 에밀 뒤프레와 희망이었던 자식이 절망으로 변한 슬픔에 사로잡혀 눈물범벅이 된 어머니뿐이다.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한 쪽은 사랑이고, 다른 한 쪽은 아니라고 하는데, 이를 사랑이라 명명할 수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특히 한 쪽이 ‘폭력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사랑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씨비아의 기억은 ‘사랑’스럽다. 이는 온전히 작가 루이스 응꼬씨의 정교한 감정 묘사에 기인한다. 그는 씨비야가 버로니카에게 처음 마음을 빼앗겨 열병을 앓고, 우연히 마주쳐 느끼게 되는 환희의 순간 등을 을 더없이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버로니카와 나는 그저 단순하게 마주친 것이 아니라 우연한 포옹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가 서로의 몸을 향해 거의 쓰러지듯 충돌했다. (…) 그녀가 입은 씰크 옷의 감촉은 물론이고 그녀의 맨팔의 감촉을 느꼈을 때 나는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노래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그때 나는 말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세요!” 그리고 떨어진 물건을 집으려 몸을 굽혔다. 그녀는 낮은 어조로 공손하게, 그리고 백인 여성이 원주민에게 하는 것치고는 아주 부끄러운 듯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 그것은 그녀가 오래전부터 마법에 걸린 내 심장에 감아온 모든 욕망의 실타래를 풀어낼 만큼 강령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p. 134 - 136)

이 쓰라린 비극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답은 멀지 않다. 그가 ‘검은 새’이기 때문이다. 근대 백인들은 말했다. 인간은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이 자유롭다고. 단 검은 새는 예외. 백인들은 검은 새의 노래를 듣고자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씨비야와 버로니카의 이야기에 결말만 있을 뿐, 그에 앞서 펼쳐진 이야기가 없다. 물론 씨비야의 이야기에는 모든 감정이 다 들어있다. 그는 금기에 도전할 생각도, 누군가를 해칠 마음도 없었다. 만약 그들이 이 마음을 들었다면, 그리고 그 후회도 지나치게 늦지만 않았다면 비극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이 새에게 검은 색을 주었다면, 노래는 허락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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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도 된다고, 말해줘 - <렛미인 1, 2>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렛미인>, 문학동네, 2009

 

뱀파이어 소녀의 헌신적 추종자인 남자가 피를 얻기 위해 죄 없는 소년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목을 베고 피를 받는다는 살인 장면이 초입에 나오기에, <렛미인>의 첫인상은 극도로 혐오스러웠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서 장르를 불문하고 힘없는 아이가 학대받고 상처받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기에 <렛미인>의 도입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설정이었다. 그런 이유로 얼마 읽지도 않은 채 책을 권해준 이에게 책에 대한 혹평을 퍼부었다. 이게 뭐냐고, 뱀파이어 소녀 엘리를 사랑하는 늙은 남자 호칸은 결국 비겁한 변태 살인마와 다를 게 뭐냐고 말이다.

차라리 혈액은행을 습격하든 자기의 피를 뽑든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엘리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해 봐야 비겁한 변명이라고 말이다. 책을 넘어 책을 권한 이에게도 싫은 소리를 했는데, 너는 너무 로맨티스트라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되는 게 어디까지일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조폭영화가 의리니 뭐니 아무리 당의정마냥 감싸고 포장해도 결국 깡패새끼들 얘기 아니냐고, 희생된 아이의 부모는 마음이 찢어지는데 사랑 타령이 나오느냐고 윽박질렀다. 심히, 흥분했다. 그리고 흥분한 내 앞에서, 책을 권한 이는 조용히 답했다.

“이 이야기는 어쩔 수 없어요. 정말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있어요. 전 이야기에 설득이 됐어요. 그리고 소녀와 소년의 사랑을 응원해요.” 라고.

두 권짜리 결코 만만치 않은 분량을 끝까지 참고 읽었다. 과연 네가 날 설득하는지 두고 보겠다,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정말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인정했다. 나 역시, 우정이든 사랑이든 소녀 엘리와 소년 오스카르의 인연을 응원한다.
 


인정 안 할 수가 없다. 인정하기 싫었으나.

동화 <빨간 모자>를 보면
빨간 모자를 쓴 소녀는 어머니의 말씀을 안 듣고 늑대 출몰지역인 숲속으로 들어간다. 지극히 계몽적인 목적을 위해 쓰인 이 이야기는, 한 마디로 ‘남자를 조심하라!’는 내용이다. 가서는 안 될 길을 가서 늑대-남자-를 만나, 결국 순결을 잃는다고나 할까? 처녀의 흔적인 빨간 피는, 빨간 모자와 연결되어 섬뜩한 구석이 있다. 어떤 면에서는 뱀파이어 역시 조심해야할 늑대나 남자일지 모르겠다. 불로불사의 몸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희생자를 습격하기 위해선 별 수 없이 창밖에 매달려 ‘나 좀 들여보내 줘!’라 말해야만 하는 뱀파이어.

상대가 ‘들어와, 널 초대할게’라 말해야 겨우 상대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줄리엣이고 상대가 로미오가 아닌 이상 남자, 또는 뱀파이어를 함부로 들였다가는 쪽쪽 빨린 후 내쳐지는 신세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조심해라, 쯤 될까? 해서 전형적인 뱀파이어는 에로틱한 면모가 많다. 순진한 처녀가 냉큼 자기 방에 들일 정도로 미끈한 남자 내지는 키스마크 남길 엉큼한 눈빛으로 목덜미를 탐닉하는 뱀파이어라. 피가 모자라 헐떡이지만 왠지 끈적이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올 것만 같다.

그런데 <렛미인>은 전형적인 뱀파이어 이야기를 부정하고 나선다. <렛미인>에 어울리는 건 <빨간 모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전거 레이서 김훈의 <밥벌이의 지겨움>이다. 결국 뱀파이어도 ‘먹고 살자고’ 흡혈을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어찌 보면 김훈의 <남한산성>일지도. 뱀파이어 소녀 엘리는 ‘너 같은 애들이 많니?’란 오스카르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아무리 배고파도, 사람이 사람을 물어뜯을 수는 없다는 일말의 양심 때문에 대부분의 뱀파이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말이다.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살 것인가, 뱀파이어에게 에로티시즘과 관음이 빠진 대신 실존이 들어찼다.

그리고 일견 어울리지 않을 듯한 뱀파이어의 실존에 대한 고민은, 그저 거리에 나앉아도 굶어 죽지 않을 정도로 사회보장제도가 훌륭한 이야기의 배경, 스웨덴의 그림자 드리워진 상황과 기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알코올 중독자, 약물 중독자, 왕따 소년, 흔한 이혼과 고양이에게 둘러싸인 악취 풍기는 사람. 사람들은 뱀파이어처럼 그렇게 절실하게 삶을 구걸할 필요가 없지만, 절실함을 버린 대신 비루한 삶과 소외를 선물 받았다. <렛미인>은 기존 뱀파이어 소설에서 에로티시즘만 빼고 끝난 게 아니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관찰까지 덤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백미는, 뱀파이어 소녀 엘리와 왕따 소년 오스카르의 우정, 또는 사랑이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탄탄한 이 작품은, 뱀파이어의 삶에 대해서도 다큐멘터리처럼 밀착 취재하여 디테일을 살렸지만, 두 소년소녀의 우정과 감정을 바늘귀에 꿴 명주실로 거미줄을 자아내듯 연약한 듯, 위태로운 듯, 안타까운 듯, 하지만 사랑스럽게 풀어냈다. 먹잇감인 인간의 종에 속한 ‘친구’를 지키고자 하는 엘리와, 자기보다 훨씬 강한 소녀 엘리를 지켜주고자 하는 달팽이집 속의 오스카르. 오스카르는 엘리를 구하고, 엘리는 오스카르를 구한다. 엘리의 정체를 알게 된 오스카르는 <렛미인>에 대해 선입견을 지녔던 나처럼 엘리를 혐오스런 눈길로 바라보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건 어찌할 수 없다.

초대받지 않았는데도 상대의 공간에 들어간 뱀파이어는 어찌되느냐는 오스카르의 짓궂은 질문에 엘리는 바로, 그 즉시, 초대가 없었음에도 문턱을 넘는다. 온몸으로 피를 쏟으며 힘이 빠져가는 엘리. 다급한 오스카르는 어서 오라고, 환영한다고,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오라고 애타게 부르짖는다. 소년이 소녀의 절실함을 이해 못하고 살인귀, 괴물 취급을 했음에도, 소녀는 소년에게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다. 바다의 깊이를 알기 위해 바다로 걸어 들어간 소금인형처럼 엘리는 오스카르에게 들어가고자 했고, 그를 알고자 했고, 그의 위로와 사랑이 간절했던 것이다.
 


렛미인. 들어가도 되겠니? 쯤 이다만, 나는 이렇게 읽었다.

내가, 너에게, 다가가도 되겠니? 너의 삶으로, 내가, 들어가도 되겠니?


뱀파이어보다도 더 끔찍한 인간이라는 괴물이 인간의 탈을 쓰고 판치는 세상에서, 존엄이나  인권과는 거리가 먼 지점에서 비루한 삶을 좀먹듯 연명해가는 비겁한 삶 속에서, 살기 위한 본능과 흔들리는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진짜 괴물이 있다. 하지만 인간들 틈에 끼어있는 그 ‘괴물’은 오히려 더 ‘인간적’이기에 아련하다. 뻣뻣한 종이 책장에 여린 손가락을 베인 듯  엘리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쓰리고 안타깝다. 오스카르와 엘리가 우정인지, 사랑인지 애매하게 만드는 엘리의 정체성, 상처 역시 쓰리고 안타깝다. 위선과 거짓으로 상대의 삶에 발을 걸친 듯하지만 이기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온몸으로 피를 쏟아낼 지라도 너에게 다가가겠다는 소녀가, 너무 안타깝고 애틋하다.

혐오와 선입견으로 시작했지만 괴물에게서 인간을 배웠다. 외로움 속에서, 거절당함의 두려움을 안고서 창밖에서 떨고 있는 소녀, 또는 뱀파이어에게서.

나는, 그녀만큼 절실한가? 삶이, 사랑이, 세상이, 그녀만큼 절실한가?

렛미인.

내가, 당신에게로, 들어가도, 될까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짜가록키’님은?
외국어는 한 줄도 못하지만 한국어 듣기, 말하기, 쓰기를 좋아합니다. 이야기 배틀 형식의 교양 프로그램 ‘KBS 스토리텔링클럽 이야기 발전소’에 7회 출연, 5승을 거두었습니다. 블로그에 ‘찬이 아빠의 육아일기’를 연재하던 중 ‘EBS 라디오 멘토 - 부모’의 ‘고수 아빠 따라잡기’에 등장하기도 했지요. 여성조선에 ‘프렌디 아빠가 들려주는 그림책 세상’을, 유아독서신문 책둥이에 ‘책으로 만나는 아빠의 육아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그 외 전적은 서울시 아마추어 복싱 선수권 대회 2전 1승 1패, 하지만 현재는 다이어트를 목표로 격투기를 수련하고 있습니다. 네 살 찬이의 아빠이자 동갑처럼 보이는 다섯 살 연상의 아내와 살고 있으며, 생김과는 다르게 판화를 전공했습니다. 글과 그림과 가족, 약간의 알코올만 있으면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행복할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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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하듯 읽어야 할 사랑 -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문학동네, 2008

 

3분 뒤
Aw:
잘 자요.

2분 뒤
Re:
굿나잇.

1분 뒤
Aw:
굿나잇.

50초 뒤
Re:
굿나잇.

10초 뒤
Aw:
굿나잇.

20초 뒤
Re:
굿나잇.

2분 뒤
Aw:
세벽 세시예요. 북풍이 부나요? 굿나잇

15분 뒤
Re:
세시 십칠분이네요. 서풍이에요. 쌀쌀하고요. 굿나잇.

(p 264~265)

“당신의 기억 속에도 있나요? 어느 밤, 먼저 전화 끊기가 아쉬워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던 일. ‘잘자요, 굿나잇, 당신도요, 좋은 꿈 꿔요.’ 를 반복해 문자로 찍어 보내던 일. 아니면 이들처럼 메일함 앞에서 딩동 소리를 기다리며 초 단위로 메일을 보낸 일 말이에요.”

사랑의 시작은 다 그렇지 않을까. 말 한마디 더 듣고 싶고,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고. 두근거리는 안타까움. 그 마음을 잘 표현해낸 책이 있다. 제목부터 알싸한 사랑의 내음이 맡아지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책의 주인공은 가정주부인 에미 로트너와 언어심리학자인 레오 라이케. 잘못 보내진 메일 한 통으로 이어진 이 두 사람. 메일을 주고받는 어느새 사랑에 빠져버린다. 어떻게 메일만으로 사랑에 빠져? 라고 묻는 당신. 사랑엔 정답이 없다는 말은 들어보셨는지. 어쩌면 실제로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지 못했기에 그들은 더 열정적으로, 아련하게 서로를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말했던가.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이 주고받은 메일로만 이루어져있다. 아니! 전후 사정 설명도 없이 메일로만? 그러나 때론 말보다 행동. 구구절절 늘어놓는 설명보다 메일 한 통 한 통은 더 격정적으로 그들의 감정을 내보여준다. 마치 사랑이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알려주듯.

그래서 감히 이 책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지금 사랑에 빠져드는 사람에겐 ‘마치 내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 란 달콤함을. 지나간 사랑을 추억하는 사람에겐 ‘아, 나에게도 저런 날이 있었지. 이제 나도 새로운 사랑을 찾아야겠어!’ 란 의지를. 사랑이 고픈 사람에겐 ‘나도 얼른 사랑에 빠져들어야겠어. 에미와 레오처럼 말야.’ 라는 기대감을. (더해서 로맨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남정네들에게도 추천 꾹. 그대로 옮겨만 적어도 연인의 가슴을 떨리게 할 명구가 많다.)

어느 메일에선가 에미는 당차게 외친다. ‘저는 당신과 사랑에 빠지지 않아요!!! 로맨스든 불륜이든 외도든, 그런 건 생기지 않을 거예요! 그냥 만남이 있을 뿐이에요.’ 그러나 사랑이란 게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거면 얼마나 좋을까. (혹은 얼마나 세상이 각박해질까.) 자기도 모르는 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에미, 마지막 이메일에서 그녀는 말한다. ‘레오, 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어요. 제 감정이 모니터를 벗어난 거예요. 전 당신을 사랑해요. ... 이제 우리 어떡하죠?’ 라고. 아, 지독히도 아픈 사랑!

여기서 그들은 어떻게 되었습니다, 라고 떠벌려 그들의 사랑을 한낱 이야깃거리로 만들 수는 없기에 그 몫은 다음 독자에게 남겨두고. 책에 대해 마지막 평을 하자면. 한쪽 가슴이 아련해지는 소설, 뇌의 1퍼센트가 사랑에 중독되는 소설, 입술이 촉촉해지는 소설, 잠시 이성적인 머리는 침대 구석에 내려놓게 만드는 소설, 그 정도일까.

레오의 말을 빌리자면 ‘키스하듯’ 읽어야 할 책.

 
오늘의 책을 리뷰한 ‘굼실이’님은?
어쩌다 보니 하루라도 책과 만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불치병에 걸려버린, 북홀릭 청춘. 책 속에서 사랑도, 지혜도 찾고픈 그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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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조진국,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해냄, 2008


#  사랑을 놀이기구로 표현한다면 아마 롤러코스터가 아닐까?


사랑은 롤러코스터와 닮았다. 아무런 감정이 없던 두 사람이 공통점을 발견하는 순간, 둘이 함께 탄 롤러코스터는 가속 페달을 밟으며 빠른 속도로 정상으로 올라간다. 올라갈 때의 스릴과 즐거움이 큰 만큼, 딱 그 높이만큼 내려올 때의 공포를 느껴야 한다. 사랑의 크기만큼, 외로움과 두려움도 함께 커져가는 위험한 놀이이다. 설렘과 추억의 순간이 있기에, 무섭고, 처음 시작의 위치로 돌아올 수 밖에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매일 사랑을 꿈꾼다. <고마워요, 소울메이트>에서 만났던 공감의 글이 많았기에, 저자의 새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읽으며, 사랑의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다면, 아직 연애세포가 죽어있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잃어버린 연애세포를 찾는 마음으로, 저자가 들려주는 사랑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 사랑의 시작에서 헤어짐,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과정까지

20편의 러브레터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책의 내용이 채워진다. 빨리 뛰어가는 토끼와 토끼를 바라보며 느리지만 꾸준히 걷는 거북이의 달리기는 더 많이 사랑하는 자와 더 많이 사랑 받는 자의 모습과 닮아있다. 사랑에 빠질 때 생각하게 되는 운명적인 우연의 합리화, 작은 숫자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설렘, 내가 더 사랑 받았으면 하는 본심, 함께 있어도 생각까지 함께 공존할 수 없는 현실, 사랑하기에 빠져드는 오해와 갈등까지, 사랑의 순간에 느끼게 되는 질투, 행복함, 기쁨, 원망 등의 다양한 감정을 저자의 글을 통해 다시 돌아본다.

사랑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듯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은 때론 아픔과 상처를 감내하는 일을 필요로 한다.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지 않기에 행복하지 않는다고 할까. 머리로 계산해서 할 수 일이 아니기에, 그 끝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둘 사이의 게임. 예측 할 수 없기에 행복의 순간이 소중함과 함께 상실의 불안감이 함께 한다. 글을 따라 마음을 맡기다 보면, 사랑에 상처를 심하게 받아 사랑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더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만나고 싶지 않기에 사랑에서 도망치는 이의 마음이 이해가 된다. 젊었을 때는 감정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기에, 빠져드는 마음에 집중해, 내 기분, 내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세월을 경험할 수록, 상대의 기분까지 고려하기에, 사랑에 더 조심스러워진다 생각한다. 알면 알수록 더 잘할 수 있다는 마음과 더 조바심 내며 주춤거리는 마음을 안고 있기에, 사랑에 관한 글들이 독자들에게 여전히 사랑 받는다 생각한다.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된다는 말과 울어도 변하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쓸쓸함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딱 내가 좋아하는 그만큼, 상대도 나를 좋아하면 좋을 텐데, 더 많이 좋아하기에 더 자신이 없어지고, 더 많이 사랑 받기에 더 상대가 힘들어하는 미묘한 차이가 연애에 늘 발생한다. 사랑의 정의는 모두에게 각자의 의미로 정답이고, 사랑을 지속시키는 과정도 각자 다르다. 객관식 정답이 아닌, 서술형 답을 써야 한다고 할까. 내 가치관의 정답이 아닌, 상대의 마음에 드는 정답을 쓸수록, 더 좋은 점수를,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시험문제를 푸는 기분이다. 정답을 알면서도 쓰기 싫어지거나 다른 답을 쓰게 되었을 때, 연애는 끝이 난다.

달콤한 연애를 하는 연인보다는 외사랑을 하고 있거나, 솔로인 독자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더 연애를 잘 할 수 있는 비법을 알려주지는 못하지만, 연애의 순간들에 대해 고민하게 해주는 힘은 충분히 지니고 있다. 사회의 대인관계는 적당한 선을 지키는 일이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지만, 연애는 개인의 내밀한 콤플렉스와 사소한 일까지 부딪치기에 더욱 어렵다.

사랑에 관한 글을 읽으면, 마음이 설레고, 여행에 관한 책을 보면 여행이 떠나고 싶어진다. 책을 읽고, 감정의 변화가 느껴진다면, 아직 충분히 사랑할 능력이 있다 생각한다. 책을 읽으며, 마음의 움직임이 느껴진다면, 책에 웅크려있지만 말고, 사랑을 시작해보길 권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비이’님은?
문학이 주는 삶의 감동의 숲과 인문학이 주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산, 과학이 주는 정확한 사실과 호기심의 바다를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초보 독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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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블] ‘Can"T Smile Without You’ - 사랑하니까 좋아!

 
안녕하세요. DJ 반디입니다. 유난히 조용한 아침입니다. 어제 오늘 새벽에 비가 와서 그런가 봅니다. 저는 비온 다음 날 아침을 좋아합니다. 가 세상의 뿌연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씻어준 느낌이 들어서요. 오늘도 기분이 참 좋네요. 오늘은 6.10민주화항쟁 기념일이지요? 노래를 소개하기 앞서 잠시 20여 년 전 광장에 모였던 뜨거운 청춘들을 생각해봅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제가 지금 있을 수 있겠지요.

오늘 들으실 곡은 배리 매닐로우의 ‘Can'T Smile Without You’입니다. ‘당신 없이는 웃을 수 없어요’란 제목이 참 예쁘지요? 가사 또한 그렇습니다. ‘그대 없이는 웃을 수 없어요. 웃을 수도 노래할 수도 없어요. 그대가 기쁘면 나도 기쁘고, 당신이 슬프면 나도 슬프답니다.’ 살짝 닭살 돋는 가사지만 눈에 뭐가 덮인 분들은 이 곡 만큼 좋은 노래는 없을 겁니다.

혹시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헬보이 2: 골든 아미>를 보셨나요? 제가 이 곡을 들은 건 바로 이 영화였습니다. 영화에서 못난이 헬보이(론 펄먼)와 물고기 남자 에이브(더그 존스)가 맥주를 마시며 이 노래를 부르죠. 그들은 사랑에 빠진 겁니다. 참 못난 얼굴들이지만, 그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게 바로 사랑의 힘일까요? 

아래 '음악 들으러 가기'를 클릭하시면 들리는 곡이 ‘Can'T Smile Without You’입니다. 음악을 들으며 사랑했던 어느 순간을 떠올려보세요. 아프지 않았던 기억들이요. ‘Can'T Smile Without You’는 반디앤루니스 다음 블로그 (http://blog.daum.net/bandinbook)에 올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0^ [음악 들으러 가기]

*음악 신청은 반디앤루니스 네이버 블로그((http://blog.naver.com/bandinbook) -> 메모 -> 들리는 블로그에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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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 시간의 강을 건너 그대를 만나다

  

아사다 지로,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북하우스, 2008


칠흑같은 어둠. 시리도록 푸른 연기. 담배연기라 생각했다. 어떤 사연이 있어 연기를 내뿜지 못하고 저리도 곱게 피워 올릴까. 가슴을 누른 무게를 겨우 뚫고 낸 숨통인가. 책을 읽고 다시 보니 그것은 향이다. 죽은 이를 호출하는 가녀린 외침.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은 산자와 죽은자 간의 사랑, 아픔, 그리움을 그린 아사다 지로의 단편 소설집이다. 여기엔 7편의 이야기가 있다.

고백컨대 책을 덮고 글을 쓰기가 무척이나 망설여졌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비밀이 있어 그 비밀을 어느 정도 노출해야 하는지 판단이 쉬이 서지 않았고, 어떻게 건드려도 깨지고야 말 것 같은 유려한 문장의 흐름이 부담스러웠다. 무엇보다 한 페이지 전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하던 격한 감정의 출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모한 도전을 하는 이유는 많은 이들과 함께하기 위함이요, 글쓰기를 통해 나의 바닥을 체험키 위함이다. 한 가지 믿음과 한 가지 기대는 있다. 작품이 좋으면 그에 대한 글도 좋을 수밖에 없다는 믿음과 어쩌면 영적인 존재가 나의 손을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다. 행여나 여기서 글 읽기를 중단하는 분들을 위해 한 마디 한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은 정말 슬프고 무섭고 아련하다.

슬프고

“그 남녀 손님은 달도 없는 한겨울 산속 길을 서로 부둥켜안고 이 산꼭대기까지 올라왔었다고 이모님은 말했다.” (p 9, ‘인연의 붉은 끈’)

그 남녀는 누굴까. 누구의 눈을 피해 달도 없는 밤 산꼭대기 신사를 찾았을까. 남자는 명문가문의 대학생이고, 여자는 유곽에서 만나 한 눈에 사랑에 빠진 이다. 청춘을 빼놓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이들의 사랑을 남자의 가족은 축복할 리 없다. 둘은 결심한다. 수중의 돈이 허락하는 곳까지 가서 함께 죽음을 택하자고. 하지만 죽음이 온전히 신의 의지에 달려있는 탓인지, 아니면 그들이 겪은 고통이 모자란 탓인지, 최후의 자유의지도 예상을 빗나간다. 이렇듯 사랑을 모티브로 한 ‘인연의 붉은 꽃’, ‘뼈의 내력’, ‘손님’은 극복할 수 없는 신분의 차로 인해 비극적 삶을 산 이들의 사랑을 노래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그 어느 것 하나 의지대로 택할 수 없는 운명. 이는 통속 멜로드라마의 단골 소재이다. 하지만 아사다 지로의 것은 독하고 슬프다. 시련 후 찾아오는 달콤한 시간은 없다. 오히려 인물들을 비극적 상황으로 몰아넣고, 온몸으로 그 시간을 견디라 한다. 어린 화자의 시선에서 바라본 ‘인연의 붉은 꽃’은 아픔이 더 크다. 화자가 볼 때 청춘남녀가 사랑을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어른들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둘을 가로 막는다. 사랑이 거절당하고, 남녀가 괴로울수록 화자의 상실감은 더 커진다. 작가는 남녀의 비극적 상황에 어린 화자의 애절한 마음을 더해 차곡차곡 슬픔을 채운다.

무섭고

“어찌할 수가 없어 죽는 건 관두고 벌레를 잡아먹거나 상처에 솟은 구더기를 집어먹거나 내 피를 빨아먹는 거머리를 뜯어서 먹었어.”(p. 87, ‘벌레잡이 화톳불’)

사업에 실패에 시골로 도망친 쓰야마는 가족들이 자신을 만났다는 얘기를 듣는다. 한창 회사가 잘나가던 시절의 ‘나’를. 쓰야마는 또 다른 ‘나’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 같아 괴롭다. 이때 동네 영감님은 힘든 상황에서 또 다른 자신을 만날 수 있을 있음을 말하며, 자신이 겪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얘기한다. 여기서 그 상황을 극복했는지 그렇지 못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오로지 그 체험만이 강렬하게 전해온다.

전쟁은 ‘벌레잡이 화톳불’뿐 아니라 ‘원별리’(遠別離)의 배경이 된다. 이들이 일본인이란 걸 생각하면 그들이 마주한 현실이 얼마나 처절했을지 짐작이 간다. 사랑하는 이를 두고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땅, 전우라고 불리던 이들은 한낱 고깃덩이가 된지 오래다. 여기에 삶의 희망이 있을 리 없다. 구두끈으로 목을 매려고 해도 툭 끊어져 그것조차 할 수 없다. 자신이 키운 것도 아닌데 몸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구더기를 바라봐야 하는 심정, 지독한 외로움도 사치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상실해버린 이들의 상황은 그저 무섭기만 하다.

아련한

“아, 안개 속에서 사신이 다가온다. 검은 외투를 입고 얼굴은 목도리로 둘둘 감고 백합 꽃다발을 안고서. (…) ”오지마, 오지 말라고. 나는 아직 안 죽을 거야. 기어코 돌아가서 요리코를 내 품에 안아봐야 해. 내 자식을 내 품에 꼭 안아봐야 한다고. 그런 다음에는 죽어도 여한이 없으니, 지금은 제발 못 본 척 지나가줘.””(p. 286~287, ‘원별리’)

고도 근시로 현역 입대는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야노에게도 전쟁의 이별은 찾아온다. 그토록 사랑했던, 임신한 아내 요리코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 저 문밖으로 나가면 아내를 만날 수 있을 거 같은데 나갈 수 없다. 또 악질적인 감기에 걸려 파르르 떨리는 몸뚱이로는 아내를 마음껏 그리워할 수도 없다. 칠흑같이 어둔 밤 야노는 근무를 서러 나간다. 대기를 가득 메운 안개, 그 안개를 뚫고 오는 죽음의 신. 아니, 난 이렇게 죽을 수 없다. 사랑과 전쟁은 ‘원별리’에서 교차된다.

좋은 기억도 아픈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다 추억이라고 했던가. 시간은 비극적 사랑과 죽음의 공포를 아련하게 만든다. ‘인연의 붉은 끈’, ‘벌레잡이 화톳불’ 모두 사건의 발생시점과 발화의 시점의 거리가 없었다면 얘기할 수 없었으리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사진이 바래는 것과는 달리 이들 기억은 빛을 잃지 않는다. 오히려 매초의 기억은 더욱 강렬해져 몸 속 깊숙이 파고든다. 그토록 바람, 그리워함이 없었다면 산자와 죽은자는 다시 만날 수 없었을 테다. 슬프고 무섭고 아련한 이야기는 시간의 강을 건너 그렇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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