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1.05.27 <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 속, 흔들리는 당신에게
  2. 2011.05.24 [이슈와 추천도서]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3. 2010.12.22 <불안> - 지금, 불안하십니까?
  4. 2010.01.06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 배회하는 시선의 주인, 소외된 구경꾼 (4)

<모두스 비벤디> - 유동하는 세계 속, 흔들리는 당신에게


 

  

지그문트 바우만 | <모두스 비벤디> | 후마니타스 | 2010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 그 위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칼날이 번뜩이고 있다. 순식간에 끊어져버릴 것 같은 불안이 엄습해오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치닿는 불온한 상상이 이어진다. 언제 어떻게 끝날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는 ‘유동하는 근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실업, 전쟁, 테러 등 도처에 산재하고 있는 위험은 번뜩이는 칼날과 같이 팽팽히 당겨진 현대인의 목숨 줄을 노리며 삶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동하는 공간과 시간 속의 삶의 양식, <모두스 비벤디 Modus Vivendi>. 지그문트 바우만는 이와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현대인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의 실체를 파헤치고 이로부터 유동하는 세계 속, 흔들리는 당신을 향해 조언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그 메시지는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새로운 생활환경의 양상을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에 따르면, 근대성은 이전의 ‘견고한’ 국면에서 ‘유동하는’ 국면으로 바뀌었으며, 국민국가의 단위에 머물러 있던 권력과 정치의 영향 범위가 달라지며 권력의 상당 부분이 정치적으로 규제 받지 않는 전지구적 공간으로 이전된 반면 정치는 여전히 지역 차원에만 머물러 있어 정치적 통제가 존재하지 않는 해방된 권력이 생겨나고 이것이 또한 불확실성의 근원이 된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는 과거에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개인에 대한 보호의 역할을 약화시켜 개인에게 일어난 불행은 ‘선택하는 자유인’으로서의 개인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세계는 점차 경계를 뚫고 해체하는 ‘지구화’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물질적·지적으로 개방되어 있는 사회에서의 개인은 ‘유연하게 대처하는 능력’만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 개인은 “무역과 자본, 감시와 정보, 폭력과 무기, 범죄와 테러 등의 선별적 지구화가 낳은, 계획에도 없었고 예상치도 못한 부작용”이라는 ‘부정적 지구화’의 불의와 혼란에 맞서 스스로 ‘유연하게’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실패나 패배의 책임을 떠안고 곧장 사회의 생산 영역 밖으로 밀려나 ‘잉여 인간’도 되지 못한 영원한 ‘쓰레기’로 전락하는 수밖에.

 

쓰레기가 되는 삶, 그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일상의 근저에서 현대인들을 위협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끊임없이 형성되는 과정에 놓여 있는, 미완성 상태의, 취소될 수 있고, 폐기될 수 있는 순간들의 모음”으로서의 ‘유동하는 근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국경 없는 시장과 경계 없는 지구는 권력을 쥐고 흔드는 소수 엘리트들에게 더 넓은 행동 범위를 제공해줄 뿐, 본질적으로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힘없는 개인에게 전지구화는 오히려 사회로부터 배제된 ‘인간쓰레기’가 되어 떠돌고 흘러 다녀야 할 불안정한 공간이 늘어난 것을 의미할 뿐이다. 지금, 이곳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그렇게 불확실성의 시대, 지옥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겨진 바우만의 메시지가 들려온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지옥은 미래의 어떤 것이 아니라 이미 이곳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옥에서 살고 있고 함께 지옥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많은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옥을 받아들이고 그 지옥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의 일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끊임없는 경각심이 필요하고 불안이 따르는 위험한 길입니다. 그것은, 즉 지옥의 한가운데서 지옥 속에 살지 않는 사람과 지옥이 아닌 것을 찾아내려 하고, 그것을 구별해 내어 지속시키고 그것들에 공간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민음사, 2007, 207-208쪽)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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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추천도서]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2001년 9월 11일,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납치된 미국 민간 여객기가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워싱턴 펜타곤으로 돌진해, 3000여 명의 무고한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9·11 테러, 그후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최근 그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국제 테러리스트 조직 알카에다의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에 의해 사살됐습니다.

 

10년 전 테러의 충격에 상응하듯, 많은 사람들의 이목은 빈 라덴의 죽음에 집중됐습니다. 사건 이후 각종 미디어들은 빈 라덴의 죽음, 그 전후 시점의 사실 확인과 관련된 기사들을 쏟아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당초 미국이 발표한 내용을 번복하거나 이와 다른 사실이 밝혀지는 등, 사살 작전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문제제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테러에 대한 대응으로, 무고한 인명에 대한 죗값을 물을 요량으로, 빈 라덴에 대한 사살을 선택했습니다. 

 

9·11 테러 이후 10년간 지속돼온 미국의 연대기는 이렇게 종결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오는 법. 빈 라덴 사살 이후 예견되었던 그리고 실제로 벌어지기도 한 보복 테러는, 비극으로 시작된 대(對)테러 전쟁 서사극에 새로운 비극을 추가하고 있을 뿐입니다. ‘도덕적·상징적 승리’이자 ‘정의의 실현’이라는 빈 라덴의 죽음이 국가의 안보와 평화라는 해피엔딩을 끝내 가져오지는 못한 것이죠.

 

그러니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계속되어야 하고, 누군가는 또 죽음에 직면해야 하며, 세계를 잠식하는 불안과 공포는 또한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비극이 다음으로 내달리고, 대테러 전쟁은 결국 사람은 죽여도 테러 자체를 죽이진 못할 거라는 사실이 자명해지는 순간입니다.

 

그렇다면 ‘테러’는 과연 무엇일까? 비타 악티바 <테러>는 바로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테러는 공포를 만드는 기술”, 즉 “다른 사람들에게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심리적으로 영향을 끼칠 의도를 가지고 특정한 사물이나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듣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극장과 같은 장소를 필요”로 합니다. 이는 이러한 장소를 매개로 “누군가에게 행사되는 폭력이 보는 이들에게 ‘상상으로’ 전해져 그들을 공포로 사로잡을 때” 비로소 테러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공포의 심리적 확산이라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폭력을 ‘테러’라고 부르고, 이러한 테러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무고한 사람들을 향한 수단으로서 사용될 때, 그러한 폭력의 사용을 ‘테러리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테러를 생각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테러와 정치가 결합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됩니다. 이 책의 저자 공진성은 이와 같은 방향 설정을 통해, ‘테러’가 지배와 저항이라는 정치적 목적과 어떻게 결합했는지, 그 테러리즘이 정치적 목적의 변화와 함께 어떻게 변화했는지, 테러리즘을 도덕적으로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이 테러이고 테러리즘인지 생각해볼 수 있도록 합니다.

 

이와 함께 <테러리즘, 누군가의 해방 투쟁>“당신에게 테러리스트는 다른 누군가에는 해방의 전사일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관점을 바탕으로 서구 강대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주창하며 전제하는 선악의 이분법에 숨어 있는 모순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테러리즘에 보복하는 강대국의 논리의 치명적인 위험성을 경고하고, 분노와 안보의 불안 앞에서 기꺼이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려는 형태가 민주주의에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불러오는지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이 책의 저자, 찰스타운센드는 테러리즘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테러리즘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서구 중심의 근대화에서 소외되고 배제돼온 약소국이나 제3세계 국가의 눈물과 고통을 치유하는 것”이라 말합니다. 문득 현재의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으며, 필요한 경우 ‘제2의 빈 라덴 작전’을 벌일 거라고 공표한 기사가 떠오릅니다. 다시 한 번 비극은 끝나지 않았으며, 그러므로 불안과 공포는 언제 어디에서든 출렁이고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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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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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지금, 불안하십니까?

 

알랭 드 보통, <불안>, 이레, 2005

 


2010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몸과 마음은 어느새 바빠지기 시작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이맘때가 되면, 으레 찾아오는 것들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우선 송년회, 동창회 등 그동안 게을리 했던 지인들과의 모임에 나가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우리는 인연의 끈을 재정비한다는 이유로, 각자가 살아온 한 해를 공개적으로 되새김합니다. 고등학교 동창 누구는 결혼을 했고, 누구는 취직을 했으며, 또 누군가는 여전히 백수라고 합니다. 그리곤 크고 작은 지인들의 신상 변화, 타인의 성공과 실패에 스스로를 비추어 보며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그동안 잘 살아왔는가, 내 인생은 지금 어디쯤 와 있는가.

빠르게 세상을 관통해가는 시간이, 그 변화의 결과물을 들이밀며 우리를 다그칩니다. 사회가 기대하는 (나이에 맞는) 삶의 모습이, ‘~하더라’로 전해지는 성공과 실패담이, 점점 더 우리를 옥죄어 옵니다.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 위험에 처했으며, 그 결과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너무 낮은 단을 차지하고 있거나 현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걱정.”이 헤어 나오기 어려운 불안의 늪으로 우리를 내팽개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고통스러운 버둥거림 속에서 또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불안에 잠식당하기 전에.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느끼는 불안이란 결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사회적 지위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 지위란,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뿐 아니라 세상의 눈으로 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현재 사회의 사다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이 매겨지고, 그 사람에 대한 대우(존중 혹은 멸시, 비난) 또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안은, 사회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와 같은 불안은 시대의 흐름에 따른 사회 환경의 변화, 특히 지위에 부여되는 의미와 가치의 변화로 인해 더욱 심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됩니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 성장에 따른 물질적 진보 그리고 사회·정치적 변혁을 통한 신분의 타파는 개인의 능력에 따른 지위 상승의 기회를 누구나에게 제공해주었지만, 이와 동시에 지위 상승의 기대감에 비례하는 상대적 박탈감과 수치심 또한 안겨주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하에서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사회적 지위란 결국 경제적 부유함을 의미하고, 이러한 맥락에서 가난이란 개인의 무능력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어 그들에게 물질적 궁핍 뿐 아니라 사회적 무시와 외면이라는 고통까지 부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안은 부유한 자들이라고 해서 비껴가는 법이 없습니다. 현대사회의 극심한 변화는 그들이 능력으로 이룩한 사회적 지위라고 해도 언제까지나 보장해줄 수는 없으며, 인간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은 끊임없이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경쟁을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진 사람은 더 갖기 위해 혹은 그것을 잃을까 두려워하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무능력과 패배라는 사회의 낙인에 대한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결국 불안은 욕망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조건’과도 같은 것으로, 이와 관련하여 알랭 드 보통은 현대사회의 “불안은 욕망의 하녀”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욕망이 작동하는 한, 불안 또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불안이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고, 이러한 욕망이 사회적으로 규정된 ‘지위’를 향해 있는 것이면, 얼핏 보기에 우리가 사회 밖에서 홀로 존재하지 않는 한 불안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불가능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원인 분석에 이은 해법의 논의에서 “인간의 삶에서 ‘철학’, ‘예술’, ‘정치’, ‘종교’ 그리고 ‘보헤미아’의 존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효능을 누릴 줄 안다면 불안을 치유하거나, 최소한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사회를 지배하는 관념을 무조건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회의하고 검토하는 과정을 거쳐 자신을 중심으로 독자적 가치를 추구한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불안 또한 줄어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태도는 실제로 역사 속의 많은 인물(쇼펜하우어, 샹포르,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마르셀 뒤샹, 사를 보들레르)들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불안하십니까? 그런데 불안이 무엇인지, 왜 불안한지 모르고 있진 않은가요? 매순간 우리 삶에 끈덕지게 달라붙는 불안에 괴로워하고 있는 분이라면,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읽어보길 권합니다. 불안과의 보다 편안한 동거는 그것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는 데서부터 시작될 테니까요.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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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 배회하는 시선의 주인, 소외된 구경꾼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2009


축구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사실상 골키퍼에게 주어진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골키퍼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키커들이 공을 쫓는 그라운드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그를 향한 관중의 시선 또한 그가 차지하고 있는 조그만 공간 안으로 상대방의 공이 침입해 들어오는 그 순간뿐이다. 이는 축구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모든 이들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어느 누구도 의식하지 못했던 골키퍼의 소외된 존재 방식은 수면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잠겨 있게 된다. 

그리고 여기, 공격수의 슈팅을 재주 좋게 막아내거나 페널티킥의 방향을 예견해 관객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골키퍼의 환희에 가려진 ‘소외’로부터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은 전직 골키퍼였던 ‘요제프 블로흐’가 건축 공사장에서 해고된 아침에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고통지는 현장감독의 말이 아닌 시선에 대한 블로흐 자신의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한다. 그렇게 스스로 해고통지를 받아든 블로흐는 이제 경계가 정해지지 않은 공간 속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 사이를  ‘배회’한다. 따라서 이러한 그의 행동은 이전까지 관중 혹은 구경꾼의 시각적 대상이 되었던 블로흐가 시선의 주인이라는 자리로 옮겨와, 스스로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소설은 블로흐의 시선이 써내려가는 일기체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길거리에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는 일상의 세부를, 그 속의 사람들을, 그 모두를 담고 있는 신문과 영화를 말 그대로 끊임없이 ‘본다.’ 그의 시선은 골키퍼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공에 집중하는 것처럼 기민하고, 페널티킥의 방향을 예견할 때만큼 갈팡질팡하며, 경기 내내 공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블로흐는 삶을 살기보다는 그저 바라보기만 하며, 철저하게 관객 혹은 구경꾼의 자리에 머무른다. 사건 사고를 기록하고 있는 신문을 보듯, 영화 안에서 흘러가는 가공된 삶을 목격하듯, 그저 보기만 할 뿐 예민한 시선이 잡아낸 삶의 순간들은 그의 의식 안에서도 여전히 배회하며 끝끝내 의미로 남지 못한다.

블로흐는 자주 가던 극장에서 만난 여자 매표원과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그녀를 죽인다. 이유는 아마도 아침에 나눈 그녀와의 대화가 그를 불쾌하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대답하려고 하면 그녀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지레짐작했”고, 안정을 찾지 못하고 방안을 서성거리던 그녀가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라고 묻는 순간, 블로흐는 그녀의 목을 졸라 삶의 의미를 지우고 그녀의 죽음은 '사건'이 아닌 단순한 '사실'로 무감하게 받아들이는 데 그친다. 

시선에 의해 생겨난 의미는 다른 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남겨 놓은 자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자국을 남기며 살아간다. 이는 김춘수 시인이 ‘꽃’이라는 시를 통해 표현한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고,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는 욕망의 자연스러운 발로이다. 그러므로 블로흐의 배회하는 시선은 누군가에게 ‘하나의 눈짓이고 싶고 무엇이 되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며, 그에게 와서 꽃이 되어 줄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 절절한 몸짓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구경꾼으로 남을 수밖에 없는데, 그가 현장감독의 모호한 시선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고정시킨 것처럼, 그의 내부로 들어온 다른 것들은 고립되어 있는 블로흐 자신을 재생산해낼 뿐, 그에게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며 외부로 나아가지도 못한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공이 라인 위로 굴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무기력한 골키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소외되어 있는 골키퍼의 존재를 문제시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소외라는 문제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 같은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흘러간 역사만큼 축적되어 무게를 더하고 있을 뿐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고독과 우울은 블로흐가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 속에 자국을 남기지 못하는 구경꾼의 습관에서 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추운 겨울밤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취객을 지나쳐, 지하철 바닥에 누추한 잠자리를 펴고 있는 노숙인을 신문 읽듯 훑어보고, 지하철 안에서 들여오는 삶의 소리들을 영화 사운드처럼 흘려보내며 무사히 집으로 들어가는 우리는 ‘무기력한 골키퍼’이거나 ‘무심한 구경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이 던지는 질문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모두에게로 향해 있다. 

당신은 플레이어인가, 구경꾼인가? 
                                                                                
                                                                                                                                                                 
                                                                            -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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