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그림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12.29 [서점에서 만난 사람]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희진입니다!
  2. 2010.07.09 <百의 그림자> - 쓸쓸함이 쓸쓸함을 만났을 때

[서점에서 만난 사람] 반디앤루니스 컨텐츠팀 희진입니다!

 



* 자기소개를 간단하게 해주세요.

 
반디앤루니스 인터넷사업부 컨텐츠팀에서 근무하는 오희진입니다. 오늘은 일을 시작한 지 사흘째랍니다. 일주일도 안 된 애송이로서 이렇게 인사를 드리려니 참 쑥스럽습니다. 아직은 모든 것이 낯설지만, 책을 매개로 둘러보면 교집합이 있는 분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서 괜스레 친한 척을 하고 싶네요. 하지만 지금은 자제하고 있습니다. 차츰 본성을 드러내도록 할게요. 


저는 여전히 문학소녀(‘소녀’에 집중해주세요. 하하.)로 불리고 싶은 청년(?)입니다. 좋은 글을 읽고, 또 쓰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평소에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 것을 즐깁니다. 최근에는 우쿨렐레를 연습하고 있습니다. 비루한 자작곡을 만드는 무리수를 범할 지경에 이르렀지요. 식물을 키우거나 요리를 하는 것도 좋아하지요. 상꼬맹이처럼 보여도 취미는 꽤 여성에 가깝답니다. 이거 책과 관계없는 수다가 된 것 같지만, 끝까지 들어주세요. 저는 이야기를 가진 것에 폭 빠져드는 편입니다. 영화, 드라마, 음악, 식물, 요리…… 고유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들이잖아요. 책에서 시작된 이야기 예찬은 이렇듯 영역을 넓혀 가고 있답니다. 말하자면 책은 저에게 이야기의 고향이지요. 어이쿠, 새끼 치느라 주절주절 소개가 길어졌네요.

 

* 서점에서 일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반디앤루니스는 서울에 올라와 살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책을 좋아하니까 책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다. 이렇게 답하는 것이 정확하겠지요.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 부작용이 있다지만, 저는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면에 더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일단은 제가 생각하고 행동하기 나름이니까요!

 

* 일을 하면서 의미 있는 순간이 있었나요?

 

일을 한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사흘간의 기억 중에서 하나 꼽아 보자면 역시 댓글! 제가 올린 서평에 ‘저도 이거 읽었어요.’ 혹은 ‘읽고 싶어집니다.’와 같은 반응을 해주시면 보람을 느낍니다. 이게 바로 소통의 묘미일까요?

 

* 책 읽는 설렘에 대해 한 마디 해주세요.

 

유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네요. 당시 살던 집에는 구형 라디오가 있었습니다. 녹음 기능이 있어서 옹알이나 노래 같은 것을 공테이프에 담고는 했지요. 그 중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녹음된 것도 있습니다.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두 딸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입니다. 그때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남겨진 녹음이나마 듣고 있자면, 아마도 독서의 시작은 그때쯤이 아니었을까요? 글을 읽게 되기까지 저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었겠지요. 어떤 주제를 통찰하기까지 몇 번이고 책을 읽어 내리는 지금과 마찬가지로요. 독서를 지속한다면 설렘은 어떤 식으로든 따라온다고 생각합니다.

 

* 책을 고르는 기준으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좋아하는 작가나 선호하는 출판사에 대한 신뢰가 기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저는 윤성희 작가의 책은 주저 없이 골라듭니다. 한국 문학을 즐겨 읽기 때문에 문학과지성사와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된 신작을 별도로 살펴보기도 하지요. 일상적으로는 믿을만한 이들의 추천을 따라갑니다. 예를 들면 눈이 밝은 독서 친구나 진중하게 활동하는 블로거가 있겠지요. 문예지를 꾸준히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어떤 작품이 주목 받는지 동향을 알 수도 있고, 게재된 작품을 보며 추후 지형도를 그려볼 수도 있으니까요. 한국 문학에 한해서 주로 이야기했지만 (이쪽이 나름 저의 필살기라서요. 허허.) 분야가 달라져도 맥락은 비슷하다고 봐요. 누군가의 추천으로 시작하여 내가 추천하는 취향을 가지게 되기까지, 그리고 취향을 넘어서는 또 다른 책을 만나기까지, 기준은 성장합니다. 나 책 좀 읽어, 하는 순간에도 안 읽은 책이 무수하게 줄을 서지요. 지금 저의 앞에도 수만 권쯤 있습니다. 이쯤 되면 기준도 기준이지만, 언제든 기준을 뒤엎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네요. 어떤 책이든 받아들이는 마음 말이죠. 아아, 말이 또 길어졌습니다. 일단은 여기까지!

 

* 지난 일 년 간 읽은 책 중 '베스트 5'를 말해주세요.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끝과 시작>, 바스티앙 비베스, <염소의 맛>, K.C.콜의 <우주의 구멍>, 강신주의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까지 다섯 권을 꼽겠습니다. <百의 그림자>는 자주 언급하게 되는데요.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무감하게 지나치고 마는 동시대의 현상과 하찮게 여겨지는 관계들을 섬세하게 그려낸 장편소설이지요. 황정은은 한국 문단에서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앞으로의 작품도 기대가 됩니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폴란드 시인입니다. 1980년과 1996년, 두 번에 걸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지요. 우리나라에는 출간된 시집이 많지 않은데요. <끝과 시작>은 그 중에서도 시선집이라서 소설책 한 권 분량의 시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쟁 속에서 삶의 극단을 경험한 시인의 시선은 서늘합니다. 그 냉기는 어쩌면 온기로 향하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시를 다 읽고 나면 느껴지지요. 바스티앙 비베스는 프랑스 만화가입니다. <염소의 맛>에서 ‘염소’는 수염 난 동물이 아니라 소독제로 사용되는 ‘Cl'을 이르는 말이지요. 수영장이 배경인 이야기로, 사랑에 빠진 인물의 내면을 온전히 그림으로만 보여주는 표현력에 낮은 탄성이 연달아 뱉어집니다. 최근에는 <사랑의 혈투>라는 신간이 나왔더군요. 이 만화 역시 수작입니다. K.C.콜의 <우주의 구멍>은 말 그대로 구멍에 관한 이론과 잠언을 방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영(0), 공(空), 무(無), 진공, 무한, 무중력, 부재, 침묵 등으로 표현되는 구멍은 철학과 과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문에서 풀지 못한 문제라고 합니다. 그런 만큼 앞으로도 풀이는 계속되리라는 여지를 남기며 책은 끝을 맺습니다. 깊이 있지는 않지만 유머 있고 폭넓은 시선이 인상적입니다. 자연과학 전문지 기자라는 저자의 성향이 드러나는 대목이랄까요.

 

무의 이중성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는 텅빈 구멍이다. 구멍은 항상 양면적이다. 구멍은 존재인가, 부재인가? 정의에 따라 구멍은 부재이다. 그러나 구멍이 없으면 빵은 부풀지 않고, 탄산수는 쏘는 맛이 없고, 피 속의 헤모글로빈은 산소를 운반할 수 없고, 벌은 집을 지을 수 없고, 우리는 도넛을 먹을 수 없다. 스위스 치즈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문장에는 밑줄을 그을 수밖에 없지요.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은 앞서 언급한 <우주의 구멍>처럼 다양한 이론을 소개하지만 깊이 있게 다루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인 것 같습니다. 강신주는 온오프라인에서 왕성하게 강의 활동을 하는 철학자입니다. ‘인문학의 부재’라는 말이 유령처럼 떠도는 우리나라에서 철학의 일상화를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요. 시에 곁들여 철학을 이야기하는 책의 말미에는 다량의 철학 서적 추천 목록을 삽입했습니다. 그야말로 친절한 철학입문서지요.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문학이 무엇인지 고민해 봅니다. 프롤로그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만 마무리할게요.

 

시와 철학은 인문학의 양극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시와 철학은 모두 이성복의 말처럼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해" 친숙한 세계를 낯설게 하는 인문학의 본령에 충실한 것들입니다. 앞서 말한 뇌과학의 현대 이론이 타당하다면 시는 정서와, 철학은 사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와 철학에도 두 종류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한편으로 독자들의 기존 정서와 사유를 거스르지 않는 시와 철학이 있을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 독자들의 정서와 사유에 충격 혹은 자극을 주는 다른 부류의 시와 철학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진정한 시인과 철학자는 후자의 길을 가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할 겁니다. 새로운 실천, 새로운 삶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유와 새로운 정서가 불가피한 법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인문학이 시와 철학의 힘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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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같은 계절과 잘 어울리는 시 한 편을 추천해주세요.

 

박서영 |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 천년의시작 | 2006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점자책

 

 


흰 종이의 땅을 뚫고
출토된 글자들이 방울방울 솟아 있다

 

이 책은 어둠을 켜놓고 읽어야 한다
무색무취 글자의 근육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는 글자들은
조금 쭈그리고 앉아 있기도 하다

 

후각과 청각과 시각과 미각을 열고서도
마음의 감각까지 동원해야
차가운 너의 몸을 만질 수 있다
이것이 눈송이 같은 너의 몸을
다치게 하지 않는 방법이다

 

나는 어두워지면 불을 켜는 습관이 있어
영원히 이 책을 읽지 못하리라
어둠을 켜놓고도 환한 세계의 한 공간을
내 몸이 엿볼 수 있다면

 

아,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 같은
책 한 권을 나는 읽을 수 없다

 


* 눈보라가 휘날리던 바람찬 흥남부두: <굳세어라 금순아>에서 빌림


같이 글을 쓰던 선배에게 선물 받은 시집입니다. 안쪽에는 오늘을 기억하자는 글을 남겨져 있지요. 읽을 수 없는 책 한 권이 또 있다면 '오늘'일 것 같습니다. 저는 겨울마다 어제가 되어 버린 '오늘'을 기억합니다. 시집에 대한 답례로 가지고 있던 형광펜을 농담처럼 건넸었지요. 선배는 '오늘'에 몇 번이나 밑줄을 그었을까요?

 

* 마지막으로 세상의 모든 독서가에게 한 마디 해주세요.

 

책이라는 고향이 있어서 저는 마음이 든든합니다. 삶의 변두리에 있더라도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요. 저에게 책이 어떤 의미인지 되짚을 수 있었네요. 이제는 여러분에게 물어 볼게요. 나에게 책이란? 앞으로 그 답을 듣고 싶습니다.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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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의 그림자> - 쓸쓸함이 쓸쓸함을 만났을 때

황정은, <百의 그림자>, 민음사, 2010


시간은 무엇에게나 흔적을 남긴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평생 동안 혹은 그 이상으로. 이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사이, 필시 무언가는 사리지고 또 무언가는 생겨난다. 수많은 밤과 낮을 오고가며 이루어진 생멸(生滅)의 축적이 다름 아닌 시간의 흔적일 것이다. 그렇게 어제를 지나 오늘에 이르는 우리에게 아픈 상처의 기억을 남기는 것도, 그 고통을 이겨낼 또 다른 기억을 심어주는 것도 결국 시간이다.

이 소설, <百의 그림자>은 그 시간의 흔적들을 생각하게 한다. 처음 책을 폈을 때, 우리에게는 숲을 헤매고 있는 ‘은교’와 ‘무재’가 걸어들어 온다. 쓸쓸한 그들의 기억, 그들에게 새겨진 시간의 흔적이 함께 따라 들어온다. 그 안에 집 나간 어머니, 무뚝뚝한 아버지, 왕따와 폭행을 당했던 은재의 학창시절과, 아홉 명의 식구, 개연적으로 혹은 필연적으로 빚을 지게 된 무재의 부모, 아버지의 죽음 등이 들어 있다.

그들의 일상이 이어진다. 은교와 무재를 만나게 했던 장소, 도심에 있는 전자상가가 이야기 속에 들어온다. “가동과 나동과 다동과 라동과 마동으로 구별되는 상가는 본래 분리되어 있었던 다섯 개의 건물이었으나 사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기저기 개축되어서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얼핏 봐서는 알 수 없는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그곳. (29쪽) 그 자체가 시간의 흔적이고, 그 안에 수많은 이들의 삶을 담아냈을 그곳, 전자상가의 역사가 함께 들어온다. 가족들에게 외면당한 기러기 아빠, 공사장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유곤 씨, 전구를 파는 ‘오무사’ 할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전자상가 철거가 시작된다. 그렇게 사십여 년의 시간 동안, 수많은 이들의 삶을 품어 주었을, 그 ‘시간의 흔적’을 참 쉽게도 지워버리는 철거가, 또 한 번의 쓸쓸함을 남기며 또 다른 '시간의 흔적'으로 새겨지고 있다.

“이 부근이 슬럼이래요. […] 나는 슬럼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어도, 여기가 슬럼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으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113-115쪽)

전자상가의 가동을 밀어내고 들어선 깔끔한 공원 벤치에 앉아 은교와 무재는 말한다. “다들 어디로 갔을까요. […] …… 어디로 갈까. ……조용하네요. 네. 예쁘네요. 예쁘지만, 이상한 기분이 드네요.” (112-117쪽)

그러나 여기에 한 번의 눈물로 타인(그들)의 불행을 쉽게 지나쳐 가게 하는 상투적 표현은 없다. 그들은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그림자가 일어섰다’고, 말하자면 언제고 우리 옆에 들러붙어 있는 어둠이 결국 일어서고야 말았다고 말할 뿐. 헤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둠 속을 걷고 또 걷는 그들이, 모두에게 남겨진 ‘시간의 흔적’처럼 시간을 걸어 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실컷 울고 난 후, 어렵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나는 없다. 내 옆에도 그림자(어둠)는 언제든지 달라붙어 있으니까.

그러나 삶의 어느 순간에 “달려온 방향과 가야 할 방향이 모두 어둠에 잠겨 있”을지라도, 은교의 쓸쓸함과 무재의 쓸쓸함이 만나 그랬던 것처럼, “걸어갑시다”라고 말하며 손을 이끌어주는 누군가를 만나 “어둠에 잠겼다가 불빛에 드러났다가 하며 천천히” 시간을 걸어 나가면 되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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