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에 해당되는 글 30건

  1. 2014.12.09 《픽션들》 - 처음에서 영원으로
  2. 2014.01.29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한국사를 알고 싶다!
  3. 2014.01.15 《천년 벗과의 대화》 - 대화가 필요해
  4. 2014.01.09 《스윙》- 담백한 슬픔
  5. 2013.07.25 《스무 살의 사회학》- 나를 바꾸는 공부
  6. 2012.09.20 [詩로 물드는 오후] 서효인, 가정집
  7. 2011.07.22 <철수 사용 설명서> - 사용전 반드시 참고할 것
  8. 2011.05.18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 유형진
  9. 2011.04.13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 기상천외한 동물이야기 혹은 우리들 이야기
  10. 2011.01.26 <식량의 종말> - 식량의 반란

《픽션들》 - 처음에서 영원으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픽션들》 | 민음사 | 2011

 

거울, 백과사전, 미로, 도서관, 무한, 알렙, 삐에르 메나르, 푸네스, 그리고 나침반. 이 정도면 짐작하셨으리라 봅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혹자는 말하지요.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20세기 현대문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고. 보르헤스는 그처럼 많은 이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작가들의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랭 로브그리예(lain Robbe-Grillet)부터 토머스 핀천(Thomas Ruggles Pynchon, Jr), 존 바스, 주제 사라마구(Jos? de Sousa Saramago), 살만 루시디(Ahmed Salman Rushdie)를 비롯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 제라르 주네트(G?rard Genette) 또한 보르헤스라는 이름에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표했지요.

 

물론 저 같은 한낱 독자에게도 보르헤스라는 이름은 각별하고 소중합니다.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저의 닉네임 역시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 바벨의 도서관 〉에서 따온 것인데요. 도서관 사서 출신이라 그런지 보르헤스 하면, 저는 이 단편소설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바벨의 도서관, 거기에는 무한한 육각형의 방이 있고 각 방에는 두 면을 제외한 네 면마다 다섯 개씩, 모두 스무 개의 책장이 들어서 있다고 하지요. 이 방과 방 사이에는 거대한 통풍 구멍이 나 있는데, 덕분에 어떤 방에서든 끝없이 뻗어 있는 위층과 아래층을 훤히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상상해 보세요. 낭하와 층계, 육각형 모양을 한 방들이 무한하게, 영원히, 고귀한 책으로 가득 찬 채, 그러나 매우 비밀스러운 모습으로 감춰져 있는 세계를. 거기에는 쓸 수 있었으나 쓰지 않았던 책, 소실된 책이 보관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지요. 상대의 갈피에서 어느 한 줄을 인용하고, 참조하는 동시에 반론하고 지시하는 겁니다. 그 속에서 하나의 문장은 이전의 다른 문장을 기반으로 생산됩니다. 문장의 해석은 읽는 자에 따라 저마다 다른 의미로 개방됩니다. 문학비평가 헤럴드 블룸(Harold Bloom)은 보르헤스를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했지요. “체호프에게 셰익스피어는 《햄릿》의 저자이지만 보르헤스에게 셰익스피어는 모든 사람인 동시에 아무도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곳에 간다면 서가와 서가 사이를 거니는 것만으로 인생의 시간을 잘 탕진하고 낭비할 수 있을 겁니다. 이 책에서 저 책으로, 그 책에서 다시 다른 책으로. 완결되지 않은 여행을 할 수도 있겠지요. 궁극의 해답을 기록한 단 한 권의 책을 발견하기 위해서든 그저 영원한 순례 그 자체를 위해서든.

 

저는 민음사에서 나온 다섯 권짜리 보르헤스 소설 전집을 지니고 있습니다. 월급으로 산 첫 전집이었지요.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한 달을 바친 대가를 보르헤스로 풀었던 셈입니다. 요즘 나오는 밀란 쿤데라나 로베르토 볼라뇨 전집, 이탈로 칼비노 전집에 비하면 보르헤스 소설 전집의 분량은 상당히 소박한 편에 속합니다. 압축과 함축을 중요시했던 보르헤스에게는 이마저도 많게 여겨질지 모르겠습니다. 보르헤스가 단편소설 〈 알렙 〉 첫머리에 햄릿의 대사를 옮겨놓은 까닭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천만에, 나는 호두껍질 안에 웅크리고 들어가 있으면서도 나 자신을 무한하기 그지없는 어떤 공간의 ‘주인’으로 여길 수 있네. (207쪽, 보르헤스 소설 선집 제3권 < 알렙 > 중)

 

지름 2, 3cm의 작은 구체에 모든 각도에서 본 지구의 모든 지점이 존재한다는 '알렙'처럼 보르헤스는 동시적인 것에서 영원을 발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영국 포병대 위치를 베를린에 교신하기 위해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을, 그 미로들의 미로를 헤매던 ‘유춘’과 같이 어스름 짙은 들판에 서서 “무한한 이야기들, 무한히 가지가 갈라지는 이야기들”(본문 중에서)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분명한 것은 그에게 글쓰기란 고통에 자신을 투신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거울과 백과사전으로 ‘우크바르’라는 상상의 지역을 발견해내는 일이란 매우 즐거운 유희일 수밖에요. 보르헤스는 환상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현실을 제게 처음 알려준 소설가였습니다. ‘텍스트’에 참여하고 그것을 만지며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기쁨을 말입니다.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12월의 서평 주제는 '처음'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각자의 '처음'을 책과 함께 떠올려 보세요.

'오늘의 처음'으로 생생히 떠오르길 바랍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월급으로 산 첫 전집이 민음사에서 출간한 보르헤스 전집이라고 하셨죠. 첫 월급으로 샀던 책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세요?


이것저것 꽤 많이 구매했던 것 같은데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가 기억나요. 보르헤스 전집의 검은 표지 위에 한강 소설집의 오렌지빛 표지가 겹쳐 있던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걸까요. 《내 여자의 열매》에 나오는 “겨울에는 견뎠고 봄에는 기쁘다.”라는 문장이 좋아서 그걸 제목 삼아 짧은 리뷰 한 편을 썼던 기억도 납니다.

 

● 생각하고 계신 꿈의 도서관은 어떤 모습인가요? 이를테면, 도서관의 위치, 서재의 구성에 관한 구체적인 모습이랄까요?


만약 제 마음대로 장서 구성을 할 수 있는 도서관이 생긴다면, 십진법에 따른 분류 외에도 책 한 권 한 권마다 ‘보라 참조(see ~ )’나 ‘~도 보라 참조(see also ~)’ 목록을 표로 붙여 두고 싶습니다. 본래 ‘보라 참조’나 ‘~도 보라 참조’는 도서관에서 키워드를 통일하고 연관어를 안내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인데요. 이걸 이용해서 한 권의 책이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도록 설계하는 거죠. 그러면 특정 작가의 책을 파고드는 전작주의 외에도 다양한 방식의 독서가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합니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막막한 독자라도 일단 그 도서관의 책 한 권을 집어 드는 순간,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 책 지도를 발견하는 셈이 될 테고요.

 

● 프로필의 구절이 인상 깊습니다. '오랫동안 찾던 책을 발견하기를.' 아직 발견하지 못한, 마음속에 늘 품고 다니는 책은 무엇인가요?


오랫동안 찾던 책을 발견하고 싶다는 말은 그 책을 읽는 첫 번째 독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정말로 그 책을 찾아내 읽는 첫 독자가 될 수도 있고, 염치없게도 그 책을 씀으로써 제일 처음 그 글을 읽어나가는 이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오랫동안 찾던 책을 발견한다는 건, 그 책을 만나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될 것 같아요. 무수한 책들을 거쳐 이제 여기에 이르렀구나 하면서.

 

● 요즘은 무슨 책을 읽으세요?


피터 비에리의 철학 에세이 《삶의 격》과 여러 사상가의 에세이를 수록한 《우리는 매일 슬픔 한 조각을 삼킨다》를 최근 다 읽었고요. 지금은 돈 드릴로의 《마오 2》 초반부를 읽고 있습니다. 《리브라》를 읽다가 덮은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기필코 성공해 보려고요. 12월 중으로는 버지니아 울프와 플래너리 오코너의 몇몇 작품을 찬찬히 읽을 계획입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바벨의 도서관님은?

오랫동안 찾던 책을 발견하기를, 그 일로 주어진 인생의 시간을 잘 탕진하고 낭비할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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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한국사를 알고 싶다!

 

 

 

강문식 김범 문중양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민음사 | 2014

 

요즘은 일본 수상이 일급전범이 안치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다는 발상과 행동을 뉴스를 통해 흔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물론 한반도 침탈과 태평양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국에서도 일본의 자숙적인 분위기를 극히 상식적으로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제적인 힘을 발판으로 일본의 세계적인 입김이 거세지면서 그들의 숨겨졌던 마각이 서서히 들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독도를 국제적인 분쟁지역으로 만들어 자신들의 유리한 카드로 사용하려는 의도가 짙게 나타나고 있고, 중국 및 러시아와의 영토분쟁 등 그야말로 역사의 추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려는 속내를 만천하에 공표하고 나셨죠.

 

그러므로 우리는 한 번쯤 왜 이들이 이런 망발을 거두지 않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론 대내외적으로 많은 이유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듯 일본이 국제적인 언론 플레이에서도 당당하게 그들의 의도를 밀고나가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국의 역사에 대한 철저한 교육(비록 그 역사가 사실과는 거리가 한참이나 멀다 해도 말이죠.)을 통해서 자국민들에게 나름의 긍지감을 심어왔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자, 그렇다면 여기서, 대한민국은 과연 자국의 역사를 위해 무엇을 했을까 라는 극히 상식적인 질문이 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정말 한국사다운 한국사를 접해보지 못한 듯합니다. 학계의 파벌이나 정치적인 색채와 무관하게 말이죠. 한국사를 제대로 정립하는 시도 또한 미비했다고 볼 수 있고요. 이런 면에서 작금의 역사관련 문제는 어쩌면 예견된 사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역사문제로 어수선한 시점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역사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민음사의 한국통사 시리즈 《민음 한국사》는 여러모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우선 그동안 <세계문학전집>으로 문학 분야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민음사가 한국사에 비중을 둔 논픽션을 선보였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출간된 논픽션은 많았지만 한국사를 집중적으로 다룬 기획물이 없다는 점에서 여타 메이저급 출판사들을 더욱 독려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도 같고요.

 

《민음 한국사》는 크게 두 가지 독특한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역사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라면 이번 시리즈의 연대기적 분류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상고사, 삼국시대(열국시대), 남북국시대(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감정기, 근현대 등으로 한국사를 분류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어찌 보면 당연시 받아들였던 이와 같은 연대기적 분류를 과감히 탈피하여 100년이라는 세기의 단위를 기준으로 한국사를 조명하고 있기에 뭔가 색다른 한국사를 접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합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20세기니 21세기이 하는 세기의 표현방식이 오히려 역사를 인식하는 데 도움이 더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역사란 모년 모월 모일에 아무개가(대개의 역사가 군주를 위주로 하지만요.) 무엇을 했다더라는 식의 사건 서술이 대부분이죠. 그러다 보니 역사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는 외울 것 많고 어렵고 고리타분한 영역으로 비쳐지기 쉽고, 실제로 그동안의 역사교육이 이렇게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그나마 최근 들어 일부 소신 있는 소장파 학자들의 테마성 역사평설이 선보이면서 역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는 했지만요. 대부분의 역사서가 딱딱한 문체와 사건 중심의 나열로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번 《민음 한국사》의 경우 일단 부담 없이 책장을 술술 넘길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우선 정말 다양한 화보와 사진, 도표 등 시각적인 자료가 여타의 한국사보다 훨씬 많아 독자의 부담감을 덜어주고 있습니다. 내용도 상당히 깊이가 있고요. 여기에 해당 연대기와 연관된 세계사 부분을 같이 언급하고 있어 한국사와 세계사를 동시에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왜 그 당시 우리는 이런 결정을 했을까 라는 의문에 대해 세계사와 연동하여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죠.

 

우리가 한국사에 빠져들어 독서할 때 생기는 단점이 역사를 보는 시각 자체가 한국사로 좁아진다는 것인데요. 이점에 대해서도 새롭게 보완장치를 마련해놓았다는 것입니다. 해당 세기 중에서 핵심 키워드만 몇 가지 간추려 그 세기의 흐름을 세계사적 관점과 비교할 수 있도록 언급하고 있어 한국사와 더불어 같은 시기의 세계사 흐름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여타의 한국사 서술 방식과 차별화된 점이고, 이와 같은 키워드를 통해 결국 그 세기를 집중 조명한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1488년(성종 19년)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했다'와 같은 작은 부분도 왕조사에 익숙한 독자들을 위해서 한국사와 세계사를 연동케 하는 배려가 눈에 띕니다.

 

그럼 이제 15세기 한국사의 소프트웨어적인 측면을 살펴볼까요? ‘조선의 때 이른 절정’이라는 부제를 통해 직감할 수 있듯이 조선은 다른 국가의 삶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혼탁한 개국 시기를 거쳐 중세에 이르러 그 꽃을 피우는 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라는 기본단위가 지닌 궤도라면 조선이라는 국가는 이미 개국초창기인 태종과 세종시대에 조선 500년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개화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리학이라는 개념이 군주와 사대부 사이에서 큰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는 점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태종이라는 강력한 왕권지향주의 군주가 출현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태조 이성계나 정종의 시기에는 여타의 신생국가가 보이는 권력누수의 현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태종이라는 카리스마 강한 군주가 출현하면서 조선은 급속도록 정권의 안정화를 취하게 되었고 혼란의 시기를 최대한 절약하는 효과를 보여줍니다. 여기에 태종의 후계자 선택(물론 많은 우여곡절이 있지만요)은 한국사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기 때문에 세종조의 르네상스가 꽃을 피울 계기를 마련해주는 발판 역할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점에서 재조명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돋보이고 독창적인 게 바로 이점인데요. 한국사 15세기를 시작하는 도입부에 명나라 정화의 대항해를 등장시킨 집필진의 의도가 색다르게 보인다는 것이죠. 이 부분은 뒤에 바로 이어지는 조선의 최초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탄생 배경과 지도 속에 담겨진 신생국 조선의 국가관(사실 처음으로 이 지도에 대해서 상세한 내막과 배경을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리고 이후 세종조에 펼쳐지는 화려한 성장과 좀 더 멀리 눈을 돌려 세조 이후 하락세로 돌아선 조선의 실상을 보여주는 복선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세계적인 석학인 니얼 퍼거슨은 자신의 저서에서 동양세계가 서양세계에 헤게모니를 빼앗긴 시점을 정화의 대항해 포기(혹은 중단) 시점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비단 명나라뿐만 아니라 신생국 조선에도 적용될 수 있는 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사를 시작하면서 굳이 정화의 대항해와 그동안 단순하게 언급되었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부분을 상세하게 서술한 것이 향후 조선 500년 역사의 변화를 서두에 깔아놓았다고 봐도 되겠고요.

 

그동안 우리는 조선의 정치사를 언급하면서 훈구파 대 사림파라는 구도를 보수와 진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등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인식해왔는데요. 이번 저서에서는 색다른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조선후기 족보의 일종인 <양공양문 외예보>를 통해서 훈구파와 사림파가 적대적인 관계 내지는 권력의 헤게모니 관계라기보다는 같은 줄기에서 파생된 그들만의 리그일 확률이 오히려 더 높다는 점을 검증하게 합니다. 이러한 논거는 그동안의 이미지를 새삼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또 다른 볼거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쉬운 점은 집필진들이 예종의 갑작스런 죽음을 "인위적인 사고는 아니지만"이라고 단정하면서도 예종 사후 자을산군이 보위에 오르는 과정이 마치 정해진 수순에 의거하여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이는 이덕일이 주장하는 예종암살론을 오히려 더 신빙성 있게 보여주고 있거든요. 차라리 이러이러한 설도 있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정황상 인위적인 사고로는 보여지지 않는다는 식으로 논거를 펼쳤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이러한 부분은 향후 출간 예정인 세기에서 한국사 논쟁거리와 비교해볼 수 있다는 흥미를 자아내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해 그동안 한국사는 정치사에 그 비중이 굉장히 높게 두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모든 역사가 사실 정치사의 비중이 높을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그 한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지만요. 이렇다 보니 독자들은 역사하면 상당히 고리타분한 영역으로 받아들 수밖에 없기도 한 거죠. 그래서 이번 민음 한국사 시리즈가 기존의 틀을 탈피한 독특한 구조의 한국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생활 문화사, 사회사, 과학사 등 그동안 군주 중심의 정치사에서 외면당했던 일반 민중의 역사가 새롭게 수면위로 부상했다는 점도 상당히 의미가 있고요. 또한 정치사와 문화사가 절묘하게 융합되어 역사서를 읽는 가독성과 이해도를 높여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여기에 다양한 시각적 자료가 가미되어 시너지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존의 역사서를 버겁게 느꼈던 많은 독자들이 보다 쉽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고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서향'님은?
모든 것에 미혹(迷惑)되지 않는 불혹의 뜻만큼 진실한 독서는 40부터라고 생각하기에 요즘 부쩍 책을 더 가까이 하게 되는것 같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느낄 수 없는 소통을 책과의 만남에서 찾고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저 책을 읽어나갈 뿐이다. 행복이 동사이길 바라듯이 독서 또한 타인과의 소통행위로 인식하면서 삶의 새로운 이정표를 향해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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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벗과의 대화》 - 대화가 필요해

 

 

 

 

안대회 | 《천년 벗과의 대화》 | 민음사 | 2011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건 초코파이밖에 없다. 뭐든 말해야 안다. 친구라면 더 그렇다. 대화를 통해야만 정(情)도 쌓인다. 《천년 벗과의 대화》는 한문학자 안대회가 서재를 통해 사귄 벗들의 이야기다. 안대회는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친구들이 하는 얘기에 귀 기울였다. 주로 삶의 구석진 부분을 얘기한다. 불평불만도 다 들어줬다. 친구니까. 그리고 약 10년 동안 쓴 칼럼을 모아 《천년 벗과의 대화》에 친구들로부터 들었던 얘기들을 친절하게 풀어놓는다. 

 

《천년 벗과의 대화》에는 안대회가 바라본 면면이 있다. 이름 정도 들어봤을까 싶은 조선 후기 문인들, 이름조차 낯선 노비의 일화, 대다수가 고리타분한 고전이라고 팽개쳐둔 이야기들. 안대회는 어떤 사람이든 자세히 본다. 누군가가 외면한 삶은 한 번 더. 할 일 없는 시골 생활 중에, 눈에 보이고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설마 남이 보겠나 하고 써서 모은 것. (세이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중에서, 221쪽)까지. 덕분에 독자는 시대를 초월하여 친구가 생기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 새삼 ‘교훈’이라는 걸 얻는다. 

 

“책상 위로 책을 높게 쌓아 놓을 처지가 못돼 머슴 어깨에 한 짐 얹어 오느라 몸이 바스러진다. 멋진 손님 모셔 오기가 왜 그리 더딘가? 이름난 꽃을 옮겨 달라 애걸하기 어렵구나. 부자 놈들 서재에 가득 쌓아 놓은 것 얄미우나 해를 넘겨 읽게 해 준 우정에는 정말 감사하네. 신령한 마음과 지혜를 키우려 하는데 석양빛은 너무 쉽게 마루 아래로 내려가네.” (‘서오생의 책 사랑’, 98쪽) 

 

친구들 사이에선 ‘서오생(書娛生)’이라고 불렸던 정조~순조 때의 시인 이명오의 시다. 《천년 벗과의 대화》에서 애서가 친구들이 ‘책’을 말할 땐 저마다 물 만난 고기 같다. 책이 귀했던 시대이니 만큼 그들에게 책은 ‘멋진 손님’이고 ‘이름난 꽃’이다. 읽을 책이 넘쳐나는 오늘날, 나는 ‘멋진 손님’을 모시기 위해 애쓴 적이 있었던가, ‘이름난 꽃’을 몰라보고 함부로 꺾어 버리진 않았나 반성해본다.   

 

“선조 때 일본에서 공작새 한 쌍을 진상하여 서울 사람들이 새를 구경한다고 남대문에서 한강까지 도로를 메운 소동 사건이 일어났다.”
“명의 장수와 일본의 중이 안경을 쓰고서 가는 글씨를 잘 읽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조선에는 안경이 없다.”
“태종 때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의 섬에 방목하자 수초를 먹지 않고 울어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세상 사람들이 보고 들은 것에만 사로잡혀 작은 지식으로 천하의 온갖 이치를 다 파악하려 하니 될 일인가?” (‘잡학의 발견’, 185쪽)

 

학자 이수광(1563~1628)이 편찬한 《지봉유설》에 등장하는 기사들이다. 무심코 ‘좋아요’를 누를 뻔했다. 양질의 문장으로 ‘타임라인’을 채운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사실 당대 순수 학자들에게는 외면받은 책이다. ‘잡학’이라고 치부됐었다. 《천년 벗과의 대화》에서 안대회는 《지봉유설》을 명저로 소개한다. 눈 밝은 친구가 자신 있게 추천했던 책들은 대부분 훌륭했다.

 

- 컨텐츠팀 에디터 정혜 (hyewonjung@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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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윙》- 담백한 슬픔

 

여태천 | 《스윙》| 민음사 | 2008

 

종종 삶이라는 게 선명해질 때가 있다.

 

아무리 발버둥 하며 자맥질을 해봐도 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서 맴돌았을 뿐. 백석이 그랬듯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구르기도 하며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으로 얼룩진 삶을 소처럼 연신 새김질할 때 내 삶의 궤적은 나와는 무관하게 이미 정해진 것이고 나보다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로선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 결국 나는 앙금이 되어 가라앉지 못하고 부유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떠다니도록 그려진 삶의 궤적을 좇아가는 게 아닌가, 승패와 관계 없는 몇 게임을 그저 치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듯이 삶은 선명한 것이 아닌가.

 

머리 위로 우기(雨期)의 바람이 불었다.
물은 오랫동안 컵 안에 무겁게 담겨 있었고
승패와 관계없는 몇 개의 게임이
남아 있었다.

 

애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처럼
불펜에서 노닥거리거나
구경 나온 다른 그녀를 위해
우리는 희생번트를 댔다.

 

스파이크, 스타킹, 발목

비어 있는 스탠드를 보며
우리는 전력 질주하지 않았고
홈으로 돌아오는 걸 잊었다. ('더블헤더' 중에서)

 

여태천이 포착한 삶도 다르지 않다.

 

그에게 매일은 "쓰레기봉투처럼 자꾸만 쌓이는 요일들"이며, 그래서 이 아침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패배가 선명한 "고전적인 아침"이다. 어느덧 나는 서른 후반의 중년이 되었으나 그 중년이란 과연 시인의 말대로 "나아질 게 없는 우리의 중년/ 우리는 조금씩 정상인을 닮아 가"는 거겠지.

 

반복되는 일상의 스냅 사진, 이 지루하도록 뻔한 삶의 관성에서 잠깐의 유예된 시간을 나는, 그리고 그대는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슬픈 일이다.

 

나는 생명을 다해 꽃을 피우려 했으나, 내가 피운 꽃은 본질적으로 꽃인가, 하는 물음표를 대했을 때 자신이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저무는 강변을 보듯 그렇게 무심히 응시하는 것 뿐이리라.

 

노란 약물을 척추에 꽂고
빨간 꽃을 피웠는데
동백이라고 부를 수 없다.
꾹꾹 눌러쓰고 싶었던 말은
흔적이 없다.

 

()

 

길고 오래 지속되는 밤과 낮들은
그렇게 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중독' 중에서)

 

삶은 그렇게 또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스윙은 "역전 홈런"이 아니라 "마이볼"에 의해 아웃 카운트로 기록될 "플라이 아웃", "국자 들고 우아하게 스윙"해 봤자, 우리의 스윙은 예고된 패배의 수순을 영리하게 밟는다.

 

그러나

 

이 시집의 마지막은 "이미 끝난 게임/ 9회 초 마지막 공격에서 터지는 장외 홈런."으로 끝나는데, 시인은 과연 희망의 단서를 포착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장외 홈런이 터져도, 우리가 전력을 다해서 베이스를 돌고 또 돌아도, 그것은 이미 끝난 게임. 삶은 완벽한 구도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력을 다해 질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룰이고 규칙이라면 어쩌란 말인가. 그러므로 삶은 더욱 슬픈 것이다. 지는 태양을 잡을 수 없듯, 새벽빛이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을 고이 담아 둘 수 없듯. 다만 조용히 응시하고 바라볼 뿐이다.

 

마감 뉴스

 

오늘 밤 내가 사는 이곳은 조용하다.

 

막 피어난 꽃, 향기가 날 듯 말 듯

 

바람은 불어

 

그 바람에 가는 비 조금 오고.

 

내가 사는 작은 동네에

 

아주 조금 비가 와서

 

버스는 제때 오지 않아

 

버스를 타지 않으리라고

 

굳게 마음먹는 그런 밤이다.

 

사실은 저 혼자 떨어져 내린 명자꽃 때문이다.

 

먼저 간 마음 같은 이름 때문이다.

 

사실은 아무 일도 없다는

 

오늘의 마감 뉴스 때문이다.

 

어처구니없는 사실에

 

먼 타지에 마음을 부려 버린 남자처럼

 

오늘 밤은 조용하다.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어

 

저물지 말았으면 하는 밤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가림토’님은?
가림토(加臨土) 또는 가림다(加臨多) : 상징적 장치. 음모설의 신봉자. 배후와 모략 있음과 없음. 가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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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의 사회학》- 나를 바꾸는 공부

 

랠프 페브르, 앵거스 밴크로프트 | 《스무 살의 사회학》| 민음사 | 2013

 

 

공부해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일 게다. 이후의 공부는 보통 갓 스물 먹은 본인의 재량이다. 입시 때문에 감수했던 천편일률적인 공부를 끝내고 나를 위한 공부를 마음대로 시도할 수 있다. 여기까지,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지나가던 스무 살이라면 냉소적인 어투로 받아칠지도 모른다. 나를 위한 공부? 마음대로? 글쎄요. 달라진 건 없어요. 공부가 입시스러운 건 여전하죠. 대입이었던 목표가 취업으로 바뀌었을 뿐. 학교만 비난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보기에 이런 현실이 바뀌지 않는 데에는 모두가 한몫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학생과 교수 모두 아무한테도 득 될 게 없는 제도 속에 갇혀 있는 듯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없고 정말로 뭔가를 배우는 사람도 없죠. 제도 밖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을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16쪽)라고 말이다. 여기부터, 나는 말문이 딱 막힐 것이다. “제도 속”에 머문 사람으로서 다른 가능성을 운운할 확신이 없는 탓이다.

 

그런데 “제도 속”에 있었기에 다른 가능성을 본 사람이 있다. 공부의 무대를 강의실에서 타인의 삶으로 옮겨온 ‘이마’다. 《스무 살의 사회학》은 ‘이마’가 한 교수에게 쓴 메일 한 통으로 첫 장을 연다. 사회학 강의를 수강하는 3학년 학생인 그는 “사람들이 정말 어려워하고 (…) 배우는 사람과 가르치는 사람 사이에 가장 큰 간극이 존재하는”(27쪽) 이 학문이 사실은 누구나 드나들기 쉬운 영역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마’에게 사회학은 현실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개개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이를 느끼게 하기 위한 시도로 《스무 살의 사회학》은 ‘밀라’의 삶을 통해 주요한 사회학 이론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렇다. 이 책은 소설이다. ‘밀라’를 그려낸 ‘이마’ 또한 저자가 상상해낸 인물로 현실과 닮은 면면이 있는 이들 삶은 사회학을 보다 가까이에서 접하게 한다. 예컨대, 사회학은 사랑이라는 익숙한 관계를 통해서도 이야기된다.

 

   “누군가 너를 사랑하더라도 네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그 사람은 너에게 아무 영향도 못 줘. 이게 바로 비밀을 갖는다는 것의 요점이야.”
   “그럼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남자들이 많더라도 내가 상상하지 못하면 영향을 못 미친다는 거야?”
   투니가 말했다. 밀라는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야. 우리가 상상 속에서만 서로 관계를 맺는 한 사회는 마음속에 있어. 그게 모두가 기억하는 쿨리의 말이야. 재스민, 마지막 쪽지 밑에 있는 다음 두 인용구도 읽어 줄래?”
   “사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어디선가 모여야 한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하는 개인적인 생각으로만 한데 모인다. 다른 곳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하는 상상은 곧 사회의 확고한 사실이다.” 재스민이 무시하듯 덧붙였다. “그럼 사회학의 주요 개념을 탐구하려면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연구해야 한다는 거야? 사회학은 인간이 삶을 ‘사유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밀라는 재스민이 이 모임 안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밀라의 상상 속에서 모두가 다시 만나고 있었다.
   “사회학은 둘 다에 관한 거라고 생각해. 쿨리의 이론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얘기고.” (174쪽)

 

이렇듯 사랑의 관계에 투영하는 질문부터 “우리가 정말 우리와 아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 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진짜로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가 정말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431쪽)와 같은 고민에 이르기까지 ‘밀라’는 콩트, 쿨리, 푸코, 부르디외, 마르크스 등 사상가의 여러 사회학 이론을 삶에 적용하여 이해한다. 또한 자신을 둘러싼 관계와 이전에 처한 문제의 양상이 하나둘 달라져 있음을 깨닫는다. 사회학이라는 공부가 자신을, 사회를 마주한 제가 자신을 바꿔 놓은 셈이다. 실제의 삶에서 얼마나 가능한 일일지는 모른다. 이 소설은 다만 가능성일 것이므로. 그러나 현실을 바꾸자면 외면하기보단 먼저 말을 걸어 볼 일이다. 사회에 내 삶의 고민을 비추어 볼 일이다. 이것이 냉소의 대안일 수는 없을까. 스무 살이 되고부터 다시 공부를 시작한 ‘밀라’가 그랬듯.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hebong200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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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물드는 오후] 서효인, 가정집

 

 

서효인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민음사 | 2011

 

가정집

 

  그런 게 있습니까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한 집

 

  그곳에는 가정집이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집주인 아줌마, 요크셔테리어, 부동산 중개업자, 형광등, 길 고양이, 마을버스가 모두 그랬다 잠 속에서 나는 용달차를 불렀고 귀히 여기던 양장본들을 버렸다 게슴츠레한 요의에 잠의 손을 뿌리치면 창이 없는 방에서 또 다른 골목이 둥그런 지도를 그렸다 습기였다 나는 최대한 건조해지기 위해 입을 다물고 기지개를 켰다 겨울은 늦여름 엿처럼 늘어지고 있다

 

  오래오래 잘 수 있는 방이었다 골목에 줄을 긋고 있노라면, 엎드린 자세 뒤로 누가 쫓아오는 것 같았다 잠이었다 잠에서 깨어나면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해진 칫솔처럼 머리가 아팠다 어둠의 호위를 받는 그를 방으로 쫓아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잠과 잠이 손에 손을 잡고 방과 방을 차지했다 집이 아니기 때문일까 나는 잠자코 있어야만 했다 늦은 눈이 내린다 골목의 뒤가 퉁퉁 붓고 있다

 

  이 모든 게 가정집 때문이다 앞으로는 불가능에 관해서만 논하기로 한다 역에서 걸어 3분, 공화당의 금연 선언, 착한 어린이, 수리한 싱크대, 단식하는 개, 친절한 이웃, 그런 게 있습니까?

 

  겨울은 진득하게 늘어지고 더위는 엿같이 풍성할 것이다
  가정집을 찾아야 하는데
  대답이 없다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세상은 더 가혹한 법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더 서럽게 느껴지는 건, 다름 아닌, 내 집에서다. 바깥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줘야 할 내 보금자리 말이다. 세가 싸면 쌀수록 집은 더 밑으로 혹은 더 위로 올라가기 마련이다. 반지하, 지하, 또는 옥탑. 가파른 오르막 길 양옆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게 더 신기해 보이는 집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그 길을 오르고 또 오른다. 그래야 비로소 내가 살 집이 나온다. 하늘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낭만적 언사는 때려치우자. 길고 긴 여름과 겨울, 그 어디에도 낭만이 비집고 틀어갈 틈이란 없다. 생활은 재미가 아니다. 특히 온도와 습도가 엉망이다. 겨울은 춥고 건조하고 여름은 덥고 습하다. 도무지 중간이란 게 없다. 그냥 극에서 극이다. 가정집이 되지 못한 방들이 그렇다. 그 방에서 누군가는, 억지로 물속에 처박힌 듯, 깨어나지 못한 채 연거푸 잠의 무게에 짓눌리고 있다. '불가능에 관해서만 논'해야 하는 현실, 그 안에서, 그 누군가는, 가능하지 않은 것들만이 가능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싸구려 커피가 생각난다.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 붙었다 떨어진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어/ 바퀴벌레 한마리쯤 쓱 지나가도/ 무거운 내일 아침엔 다만 그저 약간의 기침이 멈출 생각을 않는다/ 축축한 이불을 갠다/ 삐걱대는 문을 열고 밖에 나가본다/ 아직 덜갠 하늘이 너무 가까워 숨쉬기가 쉽지를 않다 수만번 본 것만 같다/ 어지러워 쓰러질 정도로 익숙하기만 하다/ 남은 것도 없이 텅빈 나를 잠근다 (장기하와 얼굴들, 싸구려 커피)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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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수 사용 설명서> - 사용전 반드시 참고할 것




 

전석순 | <철수 사용 설명서> | 민음사 | 2011

 

*
철수를 사용하기 전에 반드시 사용 설명서를 읽고 상황에 맞게 정확하게 사용해 주십시오.
*
사용 설명서를 읽지 않아서 생기는 고장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철수’와 ‘사용 설명서’가 만났다. 제품을 사용하기 전에 그 규격과 사양, 기능과 주의사항 등을 확인할 때 쓰이는 ‘사용 설명서’가 사람의 이름 뒤에 버젓이 붙어 나오다니. 사람이 물건도 아니고, 이게 도대체 뭔가, 싶었다. 그런데 잠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사회가 그렇지 않던가. 일명 스펙이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가 하면, 자기계발이라는 그럴 듯한 명분하에 기능상의 업그레이드를 요구하기 일쑤인 데다, 기준에 못 미친다 싶으면 가차 없이 선택지에서 제외시키고 중도에 내다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한 게 바로, 현재 한국사회의 현실이니 말이다. 그 현실 안에서, 오늘도 밥벌이를 위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작성에 매달리고 있는 ‘철수와 영희’들은 모두, 소비자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한낱 제품에 불과할 뿐이다. 

 

<철수 사용 설명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철수로 말할 것 같으면 서울에서 출생해 지방 국립대를 졸업하고 집에서 논지 이제 1년 가까이 되어가는 취업준비생이다. 학창 시절, 공부는 그리 잘 하지 못했고, 그 외의 다른 부분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점 없이 평범하게 살아온 29살의 청년. 성격은 다소 소극적이고 우유부단하며, 특이할 만한 사항으로는 긴장하면 온몸에 열이 올라 뜨거워진다는 것 정도다. 말하자면 별 문제없이 살 수 있는 대한민국 평균 남성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에게 ‘평범’이나 ‘평균’조차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평균은 이미 대학 졸업 후 회사에 취직할 정도의 스펙를 소유했는지의 여부로 판가름 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서류 전형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아직 인턴 한 번 해보지 못한 철수는 그저 평균 이하의 열등한 실패자, 즉 ‘루저’ 취급을 받을 수밖에. 

 

그리하여 청년 ‘철수’, 거듭된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된다. 회사, 여자친구, 가족들은 모두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 진짜 문제인 것은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그러므로 “철수가 불량품이 되지 않을 방법은 딱 하나, 사용 설명서를 만드는 것뿐”이다. 사용 설명서를 통해 ‘제품 규격 및 사양’을 정확하게 알리고, ‘취업’, ‘학습’, ‘연애, ‘가족’ 등 모드별로 숙지해야 할 사항을 안내하는가 하면, ‘설치 방법’과 ‘전원 공급’, ‘청소 방법’ 그리고 ‘소비자 피해 보상 기준’과 ‘제품 보증서’까지 철수에 관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해 놓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외부의 기준과 평가에 의해 끊임없이 소외되고 상처받는 자신을 지키고, 스스로도 자신을 제대로 이해해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능동적으로 소통을 이끌어낼 수 있을 테니까.

 

“철수 사용 설명서가 완성되었다. […] 하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완벽한 제품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건 철수도, 철수를 사용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 사용 설명서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앞으로 계속 고쳐 나갈 뿐이다. 그러니 철수를 사용하려는 사람은 항상 최신판 철수 사용 설명서를 보아야만 한다. 그것이 고장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다. 철수는 자신도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그 사람의 최신판 사용 설명서를 꼼꼼하게 읽고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누구에게나 아무 이상 없는 제품이 될 것이다. 사실 모두가 비정상이니 결국 모두가 정상인 셈이다. 정확한 사용서는 사용되는 제품에게도, 사용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상처를 주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다.” (215-218쪽)

 

사람이 제품처럼 취급받는 사회, 그 속에서 화려한 스펙을 뽐내며 유명한 대기업에 취직하고 억대 연봉을 받으며 능력 있는 청춘으로 인정받는 이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더 업그레이드된 기능을 찾아 신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처럼, 사람을 쓸모로 평가하는 사회 또한 지금보다 더 많은 스펙을 지닌 인물을 찾아 이미 어딘가로 시선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능적으로 인간이 소비되는 사이, 우리의 인간다움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온전한 자신으로 이해받는 길 또한 요원해져만 갈 것이다. 그러니 사용 설명서는 비단 '루저' 철수만이 아닌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지 모른다. 사람에게도 사용 설명서가 필요한 세상이라니, 그냥 웃어넘기고 싶지만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는 게 있다. 서글픔이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고,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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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 유형진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

 

너를 생각하면서 이 문장을 쓴다.

 

생, 이라고 쓰면 나는 생강의 톡 쏘는 쓴맛,
그리고 비닐하우스 안의 정사를 생각한다.
겨울날, 경험해 보지 못한 것들은
나를 가두거나 풀어 준다.

 

생, 이라고 쓰면 나는 질긴 고무줄.
빚을 지고 허덕이다 젖먹이를 버리고 떠나는
누군가의 뒷모습.

 

너를 생각하지 않으면 이런 문장도 떠오르지 않겠지
바보, 라고 말해 버리면 그 순간 나는 바보.
똥개, 라고 말해 버리면 그 순간 나는 똥개다.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을 얻기 위해
나는 지금 너를 생각한다.
너는 오늘 밤, 빛나는 오리온을 생각했을까?

 

그런 생각도 한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누군가 사정하며 생을 빌릴 때도
오리온자리에서 알 수 없는 빛이 흘렀지.
그 빛을 평생의 빚으로 누군가는 허덕이며 간다.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을 향해.

 

생, 헐떡헐떡.

 

-유형진,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민음사, 2011

 

 

지난날이 덕지덕지 붙어, 나는 이미 단정하지 못하다. 기억은 종종 지나치리만치 잔인한 데가 있어, 새날을 맞은 육체 곳곳에 익숙한 부끄러움들을 박아 놓는다. 나는 그 늦은 저녁, 너를 앞에다 세워두고 목 놓아 울었었다. 콧물이 줄줄 흘렸었다. 외롭다고 투정 부려 불러다 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로워져 너라는 존재를 욕보였었다. 그렇게, 너를 통해 나에게 새겨진 공허를 메우려던 몸부림은 언제나 비릿한 냄새를 풍겼던 것 같다.

 

끈덕지게 따라붙는 욕망의 그늘을 헤매다, 이토록 질긴 것이 생, 이라고 되뇌여 본다. 헐떡헐떡 생의 고개를 넘어가는 지리멸렬. 그래. 그런 와중에, 너는,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너는, 나를 가두고 나를 또 풀어 주었다.

 

나는 지금 너를 생각하고, 너를 생각하는 나를 다시 생각해 보니, 나는 이미 단정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다. 허덕이며 가는 길, 그 끝에 놓인 단정하지 못한 단 하나의 문장을 향해. -현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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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 기상천외한 동물이야기 혹은 우리들 이야기

 

 

알렉산드로 보파 |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 민음사 | 2010

 


"독자가 믿을 만한 거짓말을 하는 것이 소설가의 일"이라고 말한 마거릿 애트우드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작품이다. 아니 더 솔직하게 거짓말의 수준을 뛰어넘어 기상천외할 정도의 상상력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표현이 이 정도는 되어야 알레산드로 보파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 되지 않을까 라는 감정이 들게 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의 최고 덕목이 재미라고 한다면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는 그야말로 최고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읽는 내내 그저 희희낙락하면서 아무런 생각없이 책장을 넘기게 하는 것만도 아니다. 아주 짧은 우화를 통해서 정체성, 나르시시즘, 동성애, 권력과 부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메세지를 내포하고 있어 작품성을 중시하는 독자들에게도 노벨상 수상작 못지 않은 내공을 느낄 수 있게 한다. 

흔히 이솝우화를 비롯한 우화들은 인간사의 모든 것을 다소 우스꽝스러운 동물 캐릭터에  비유해 권선징악이라는 익숙한 주제를 다르며, '삶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이정표를 제시하는 게 통상적인 관례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독자들의 뇌리속엔 이렇듯 정형화된 공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고착화된 일련의 메세지에 선과 악을 구분하고 도식화하는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읽으며 독자들은 이러한 일련의 사유와는 결별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깨끗하게 티끌 하나 없이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권선징악이라는 획일적인 주제와 이분법적인 사고의 고착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바로 이 소설의 매력을 더 극대화시킨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는 분명 우화임에 틀림없지만 단순히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생물학자라는 작가의 특이한 이력이 만들어 낸 유니크하고 시니컬한 생물학 보고서이자 인간행동 보고서라고 하는 것이 이 작품에 맞는 올바른 표현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비스코비츠와 리우바(상어,전갈,개미,벌,경찰견 등 다양한 형태의 동물)의 모습을 보며, 굳이 철학적인 교훈을 지향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들의 삶을 읽어나간다는 자체만으로도 상당한 메리트를 가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 동물들에게 우리의 모습을 투영해 보거나, 이러한 감정이입이 다소 거추장스럽다면 그저 동물의 세계를 음미해보는 것만으로도 또 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생물학자 출신인 작가의 정확하고 과학적인 고찰은 또 다른 동물의 세계로 독자를 이끌어 나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Cool한 작품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장을 덮고 나서, 가슴 속 깊이 민트향이 퍼져 나오듯 시원하고, 그 기억이 오래도록 이어지는 작품이라고 해야 겠다. 개인적으로 요 몇 년 사이에 읽은 소설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평하고 싶다. 작품성에 비중을 두는 독자들과 흥미 위주로 독서를 하는 독자층 모두를 이만큼 거리감 없이 하나로 충족시켜주는 소설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품에 등장하는 유니크한 프레임과 시니컬한 뉘앙스, 다소 그로데스크한 소재와 시크한 등장인물(동물이라고 해야겠지만)이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데, 이처럼 조화롭게 내러티브를 끌어가는 작가의 필력이 그저 대단하게 느껴질 뿐이다. 게다가 부담스럽지 않은 짧은 에피소드를 통해서 그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대게 유명 리뷰어지에서 평가하는 멘트를 보고 독자들이 살짝 실망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 소설만큼은 제대로된 평가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이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물잡이'님은?
모든 것에 미혹(迷惑)되지 않는 불혹의 뜻만큼 진실한 독서는 40부터라고 생각하기에 요즘 부쩍 책을 더 가까이 하게 되는것 같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느낄 수 없는 소통을 책과의 만남에서 찾고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저 책을 읽어나갈 뿐이다. 행복이 동사이길 바라듯이 독서 또한 타인과의 소통행위로 인식하면서 삶의 새로운 이정표를 향해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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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의 종말> - 식량의 반란

 

 

폴 로버츠 | <식량의 종말> | 민음사 | 2010

 


현대 자본주의의 정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다방면에 걸쳐 편리하고 풍족한 삶을 지향한다. 물질적인 풍요로움은 인류가 첫발을 내디딘 이후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단계에 이르렀다. 특히,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에게 필수적인 식량(식품,음식)의 문제 역시 이제는 생존을 위한 1차적인 욕구충족의 시대를 벗어난지 오래다. 오죽하면 좀 더 미각과 정신적인 달콤함을 달래기 위한 요리법이 등장하겠는가. 현재의 식품이란 풍요로움이 만들어낸 산출물 중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불과 1만 전만 해도 수렵과 채집으로 하루를 연명해야 했던 인류에겐 먹거리 즉 식량의 의미는 절대적이었고 지금도 10억명에 이르는 어떤 이들에게는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생존방식이기도 하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산업개발국은 넘쳐나는 칼로리로 인해 성인 인구의 절반 가량이 비만과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쪽인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절대빈민국에서는 기아와 영양결핍으로 삶의 의욕마저 잃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그동안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상반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연구해왔으며, 대부분의 연구결과는 기아의 방지와 예방이라는 측면에 촛점을 맞추어 진행되어 왔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연구들은 거의 각론적인 시각으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고 특정인구 특정지역에 국한된 경향이 있었다.

이번 <식량의 종말>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식량, 식품 전반에 걸친 시스템을 고찰하고 앞으로 우리에게 닥쳐올 위기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특히 현재 대한민국의 전 국토를 강타하고 있는 구제역과 조류독감, 미국산 쇠고기와 관련된 광우병 파동 등 동물과 인간의 건강을 위협하는 고병원성 전염병이 발생하는 원인을 다시금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이러한 전염병의 창출, 비만으로 인한 각종 성인병의 급증, 죽음 직전으로 내몰리는 기아와 영양결핍의 원인이 다름 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식품 산업 시스템라고 지적한다.

산업혁명은 인류에게 하드웨어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만을 가져온 게 아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운송수단과 기계화의 급진적 발달은 식품 생산의 도화선으로 작용하였고 식량의 증대는 다시 인구의 증가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에 대해 1798년 멜서스는 <인구론>에서 그 유명한 말로 인구와 식량간의 위험한 상관관계를 제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멜서스의 경고는 산업화의 흐름에 따라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탈바꿈한 2차 변혁 앞에서 그저 기우로만 치부되었다. 식품, 식량은 이때부터 다른 재화처럼 하나의 상품으로 인지되었으며, 이는 식품이 조리라는 노동력을 투여하지 않고서도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식품 또한 획일화된 몇몇 브랜드와 소매업체의 선반에서 취사 선택만 하면 되는 간편성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편리함과 풍요로움의 이면에 현재 인류가 봉착해있는 식품 시스템의 커다란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는 게 저자의 일관된 논지이다.

<식량의 종말>는 식품 산업 시스템 전반에 걸쳐 식품이 음식에서 상품으로 전화하는 과정, 독점적인 식품생산업체와 식품가공업체, 식품소비업체들의 자본주의적 논리에 의한 식품 권력의 창출 과정, 기아와 영양결핍의 원인, 육류소비 증가의 패해, 곡물생산 증대를 위한 각종 인위적인 간섭과 유전자 변형이라는 문제의 심각성 등 식품과 관련된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또한 저자는 앞으로 전개될 인구증가와 발맞추어 이들의 입을 해결할 수 있는 식량의 증가가 과연 지속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 지금의 식품 산업 시스템으로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단호한 답변을 들려준다. 다시 말해, 비록 식품 산업에 종사하는 행위자들과 시스템에 메스를 가하더라도 식품의 최종 소비자인 주류 소비자들의 의식과 식단의 변화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식품 구조의 패해와 개선의 방향을 알면서도 자신의 입으로 들어오는 편리하고 달콤한 음식을 거부할 실천의지가 없는 한, 향후 인류의 미래는 멜서스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불편한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물론 저자는 현재의 식품 시스템을 타개할 방책으로 대안농업, 청색(바다자원)혁명, 지역농업, 다양성의 확보 등을 제시하고 있고 현재 몇몇 국가(대표적으로 쿠바의 성공 사례가 주목 받고 있다)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례들을 통해 그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문제의 원인에 있어 최고 정점에 해당하는 육류 소비의 절감이 없는 이러한 대안들은 그 빛을 보기가 힘들다. 이는 앞으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경제발전이 가져올 육류소비의 증가는 그  예측자체가 무의할 정도의 파괴력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수렵/채집 시대에는 먹거리를 찾기 위해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투여한 데 비해 지금 우리는 적은 시간을 들이고도 간단하게 음식을 구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먹거리에 부여되었던 가치와 중요도 자체도 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먹거리 식품은 인류의 생존에 불가피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전반적으로 <식량의 종말>은 지금 우리의 식탁에 올라오는 다양한 먹거리에 대한 심오한 고민거리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제시해주고, 그 해결방안에 대한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식품 시스템 전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그 내막은 경악을 금치못할 정도의 충격을 던져주며, 결국 이러한 시스템이 굴러가게 하는 데 우리와 같은 소비자들이 일조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식단에 대한 심각한 고민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갖고 독자에게 다가온다. 더불어 기아와 영양결핍으로 인한 인류의 심각한 이질성 회복과 지구 생태적인 차원의 회귀 모색 또한 함께 생각해야 할 여지로 남겨둔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숲으로 들어가 열매를 따 먹으며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효율성 낮은 전근대적 식품 경제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음식 만들기를 타인의 손에 넘겨주고 우리의 먹거리(식량)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자체을 자본주의적 경제 모델에 내맡겼던 우리의 행동이 결국에는 식량의 종말을 불러왔을 뿐 아니라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한 것을 잃게 했는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음식에 대한 주권을 회복하는 데서부터 희망의 작은 시작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물잡이'님은?
모든 것에 미혹(迷惑)되지 않는 불혹의 뜻만큼 진실한 독서는 40부터라고 생각하기에 요즘 부쩍 책을 더 가까이 하게 되는것 같다. 사람과의 만남에서 느낄 수 없는 소통을 책과의 만남에서 찾고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저 책을 읽어나갈 뿐이다. 행복이 동사이길 바라듯이 독서 또한 타인과의 소통행위로 인식하면서 삶의 새로운 이정표를 향해서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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