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에 해당되는 글 52건

  1. 2010.12.02 <브리다> - 소울메이트를 만나야 한다는 신비한 사명을 아세요?
  2. 2010.11.18 <빵과 장미> -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여전히 필요한 그것, 연대
  3. 2010.08.10 <올리브 키터리지> - 살아는 있었네!
  4. 2010.07.21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현대사회
  5. 2010.06.29 <순교자> - 그때,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6. 2010.06.01 <칼 같은 글쓰기> - 글을 '쓰고' 글을 '살다'
  7. 2010.05.25 <쥘과의 하루> - 이별을 위한 의식에 감동의 목이 멘다
  8. 2010.04.28 또 다른 숨겨진 이야기 (2)
  9. 2010.02.24 다르다고 놀리지 말아요 (4)
  10. 2010.01.08 <너는 모른다> - 너는 내가 알고 싶기는 하니? (8)

<브리다> - 소울메이트를 만나야 한다는 신비한 사명을 아세요?

 

파울로 코엘료, <브리다>, 문학동네, 2010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으로 아내가 묻습니다.
" 당신 내 눈 좀 똑바로 봐봐요. 내 눈에 빛이 보여요? "
늦은 밤 책을 읽던 아내가 뜬금없습니다.
" 으응? 갑자기 무슨 빛? "
" 아이참, 한 번 잘 보라니까요! "
" ? "
" 당신, 나중에 이 책 좀 잘 읽어봐야 해요. 흥! "
"..."


 어젯밤 아내의 느닷없는 야단에, 오늘밤 저는 몰래 졸은 맘으로 책을 읽습니다.

<브리다>.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파울로 코엘료의 2010년 새 책이에요.여러분, 혹시 '소울메이트(Soul-Mate)'라고 들어보셨나요?

때는 1983년 8월부터  1984년 3월까지, 장소는 아일랜드 더블린 근처, 주인공은 마법을 배우고 싶어하는 21살의 예쁜 브리다, 등장인물은 태양 전승 마스터(일명 마법사), 달 전승 마스터(일명 마녀) 위카, 물리학과 조교로 일하는 브리다의 연인 로렌스, 그리고 브리다의 엄마, 기타 잠깐씩 등장하는 등장인물 ①, ②, ③ 등등.

제가 '소울메이트'라는 말을 꺼낸 이유는, 이 책의 줄거리가 소울메이트를 찾아가는 브리다의 이야기기 때문이에요.

“ 우리는 연금술사들이 '아니마 문디', 즉 '세상의 영혼'이라 부르는 것의 일부를 이루고 있지. [...] 사실, 아니마 문디가 분화만 계속한다면 그 수는 늘어나겠지만, 또 그만큼 점점 약화되기도 해.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나뉘는 것처럼, 다시 또 서로 만나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재회를 ‘사랑’이라 부르지. 영혼이 분화할 때 언제나 남자와 여자로 나뉘기 때문이야. [...] 매번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한다는 신비로운 사명을 지니지. 적어도 나뉜 조각들 중 하나는 꼭 만나야 해. 그것을 여러 조각으로 나눈 ‘위대한 사랑’은 그것들을 다시 하나로 결합하는 ‘사랑’에 기쁨을 느끼지. ” (59쪽)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에서는 항상 영혼과 사랑을 읽을 수 있었어요. <연금술사>에서는 꿈을 좇아 여행하는 주인공 ‘산티아고’의 영혼과 사막 아가씨의 사랑이 있었고, <오 자히르>에서는 베스트셀러 작가인 주인공의 타락한 영혼과 에스테르의 사랑이 있었잖아요. 또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도 마찬가지죠. 마침내 죽기로 결심한 방황하는 영혼, 베로니카와 순수한 청년 에뒤아르와의 사랑이 있었죠.

이번 책 <브리다>에서는 사랑과 영혼의 본질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려는 파울로 코엘료의 노력을 느낄 수 있어요. 물론 작정하고 등장하는 태양 전승이니 달 전승이니 하는 마법 수련의 방식들, 엘레우시스(Eleusis) 비의(秘儀)를 떠올리게 만드는 마녀들의 안식일 집회 등은 어떤 분들에게 ‘이거 소설 맞아? 신비주의 아니면 마법 입문서 아냐?’ 라는 느낌을 줄 수도 있겠어요. 하지만 영혼에 깊이 접근해보려는 서양의 한 방법이라 편히 읽어 넘기신다면, 사랑과 영혼, 종교와 신비주의를 넘어 내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말을 건네는 파울로 코엘료, 그만의 독특한 언어를 다시 만나실 수 있답니다.

하여튼 아내의 야단과 코엘료의 속삭임에 단번에 책장 덮은 깊은 밤, 곤히 잠든 아내를 깨워 꽉 안아주고 싶지만, 살며시 잠든 얼굴에 뽀뽀 한 번 해줍니다. 여러분, 주인공 브리다는 자신의 사랑을 가득 채울 수 있는 소울메이트를 과연 만날 수 있을까요? 행여 소울메이트를 만난다면 어떻게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아참! 눈빛! 아내는 아마 모를 거에요.
지금 자기 왼쪽 어깨 위에 얼마나 크고 환한 별 하나가 빛나고 있는지... ^^*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세상다담'님은?
책... 그 속엔 수많은 분들의 꿈과 생각이 담겨 있잖아요. 여러분, 우리 함께 자신을 보다 깊게 만들 수 있는 보석을 찾아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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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여전히 필요한 그것, 연대

 

캐서린 패터슨, <빵과 장미>, 문학동네, 2010

 


11월 7일, G20이라는 커다란 행사를 앞둔 서울한복판에서 전태일 40주기 전국노동자 대회가 열렸다. 5만 명 이상이 참가해 인근 도로까지 꽉 채운 그야말로 40주기라는 이름에 걸맞은 행사였다. 그날 광장에 선 사람들은 결의문을 통해 외쳤다. 오늘날의 노동현실은 전태일 열사가 스스로의 몸을 분신한 그 40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이다. 정말 그럴까?
 


2010년 노동자 대회의 모습 출처: 프로메테우스 신문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9월 7일, 20대의 한 청년이 실족으로 인해 뜨거운 용광로에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다. 아름다운 청춘이 시커먼 공장 안에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인터넷 인기검색어는 ‘4억 명품녀‘와 도박을 했다는 한 연예인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추락 사고에 대한 기사가 난 것은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대책을 외치는 목소리는 작다. 언론은 조용하고 정치인들은 잠잠하다. 어느 누가 기업인에게 받았다는 몇 만 달러에는 지진이라고 날 듯 소리치던 이들답지 않게 너무나도 조용하였다. 하긴 세상은 20대의 꽃 같은 처녀가 백혈병으로 죽어갈 때도 조용했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1위 기업으로 거듭 태어나야 하는 삼성이 무서워서였다. 무릇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를 대하는 자세는 그러하다. 철저한 무관심이거나 아니면 원색적 비난으로 그들을 폭도로 몰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40년 전 청년 전태일의 분신, 노동기본법을 보장하라는 그의 외침, 그리고 실족사와 백혈병,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 로렌스 파업은 참으로 닮았다. 100여년의 시간이 지났건만 노동자를 위한 세상은 여전히 멀고 노동자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소설 <빵과 장미>에서도 우리는 이와 같은 슬픈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파업을 결의하고 파업한 사람들을 폭도라고 선전하고 이 파업에 외부 운동가들이 참여하고 파업이 확대되면서 공권력이 투입되는 상황들이 상세히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소설이 멈췄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현실을 반영한 슬픈 노동문학으로 여겨야 했겠지만 소설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이전의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문학과 달리 아이들의 시선에서 파업을 바라봄으로서 파업에 대한 외부시선과 내부시선을 자연스럽게 교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로사는 이탈리아 노동자의 아이이다. 이 소녀는 누구보다 반듯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영어를 익히고 미국의 역사를 익히고 그리고 하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늘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사는 곳에서 파업이 일어나고 소녀의 어머니마저 파업에 동참하게 된다. 소녀는 선생님이 파업노동자들이 폭도이며 부모님이 혹시 파업에 참가하거든 이를 말려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엄마와 언니의 파업을 방해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파업에 나선 사람들이 나쁜 것이 아니며 그들이 폭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갈팡질팡하면서 아이가 파업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일반대중의 시각과 그리 다르지 않다.

또 하나 이 소설의 특별함은 소설의 중심에 성장과 연대가 있다는 것이다. 로사는 파업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선생님이 말하는 것과 달리 노동자가 아니라 고용주의 문제가 더욱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서히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실제 삶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게 된다. 이는 우연히 로사와 만난 제임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그저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학대받으며 하루하루 공장에서 일하던 제임스에게 파업은 새로운 공간과의 만남이었고 자신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렇듯 아이들의 파업을 겪으면서 성장을 한다. 스스로의 내적성장은 물론이거니와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커진다. 이 아이들이 파업을 통해서 성장하게 된 것은 연대의 힘이 크다. 소설의 후반부의 감동을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연대이다. 로렌스의 파업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로렌스의 사람들에게 식량과 돈을 보내준다. 그리고 아이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아이들을 파업기간 동안 맡아 양육하기도 한다. 빵을 보냄으로서 그들이 편하게 파업을 할 수 있는 물질을 제공해주고 아이들을 맡고 파업을 응원함으로서 정서적 지지를 보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연대 아래 실제 “빵과 장미의 파업”은 성공하게 된다. 연대가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책은 이제 우리에게 묻는다.  21세기가 들어서고 10년이 지난 지금 그대들은 충분히 연대하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노동자들이 외치는 빵과 장미에 얼마만큼 동조하고 지지하며 그들을 돕는지 묻는 것이다. 그저 파업이라고 하면 폭력이나 빨갱이와 같은 단어들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눈을 돌리진 않았는지? 11월 7일 열린 노동자대회를 G20을 반대하는 시위로만 여기지는 않았는지 또한 젊은 청춘들의 서글픈 죽음 앞에서도 그들의 죽음에 분노하기 보다는 연예인 스캔들이나 한 일반인의 말실수에 분노하여 그들을 비난하느라 미처 청춘의 죽음조차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이다. 

연대,  노동자가 탄생하고 그들이 노동자 운동을 하면서 누차 들었던 말, 아니 인류의 역사에서 민중에게 주어지는 단 하나의 힘, 그래서 연대는 이상적이며 연약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혹은 신자유주의의 거친 경쟁의 물결 속에서 연대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만큼 막연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캐서린 페터슨의 소설 <빵과 장미>는 그 연약하고 이상적인 외침으로만 들리는 단어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소설이 실화인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가슴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도 그리고 21세기에도 우리에겐 여전히 연대가 필요함을 말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참좋다'님은?
매일 밤마다 수면장애에 시달리면서도 책과의 연애를 그만둘 수가 없는 극단적 낭만주의자이며 작은 울림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아직은 어설픈 이상주의자.
트위터 http://twitter.com/goto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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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 살아는 있었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올리브 키터리지>, 문학동네, 2010


아스팔트에 스며들다

흙냄새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계절에 따른 아스팔트의 냄새나 날씨에 따른 건물냄새엔 민감하고 세밀하다. 가령, 장마가 오기 전 유월의 밤꽃향이 짙어지는 저녁 해질 무렵 주차장이나 아직 기온이 오르지 않은 아침 출근길의 텅 빈 버스 정류장 같이 살아있는 자연을 제외한 온갖 인공적인 것에 내 신경들이 숨을 쉰다. 시멘트 혹은 플라스틱, 콘크리트, 유리와 대리석, 도시를 이루는 모든 소재는 언제나 코끝을 자극하고 감각의 기억을 만들어왔다. 그러다가 가끔은 예기치 않게 젖은 나무들이 뿜어대는 벌레를 부르는 향에 놀라 보면 흠칫 눈물이 난다. 하나의 생명체대 유기체의 극적인 해후라도 이룬 듯 나는 살아있음이 반가웁다. 같이 살아는 있었던 거다.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가야 할 나는 생명 그 자체로도 기쁠 일이지만 왜 이리 기쁘기도 힘든 것일까.

나는 이 책을 '내일은 많은 비가 예상된다'는 일기예보를 접했던 저녁 무렵 비릿한 아스팔트향이 반가워 잠시 감각이 일렁일 때 만났다. 자기 일 들이 바빠 몇 남지 않은 여고 동창생 중에 유일하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그 친구는 남편이 해외대사관에 근무를 하는 터라 이삼년에 한번 꼴로 외국으로 타향살이를 가야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1년이 채 안되어 또다시 태국으로 발령을 받았다고 통화를 한 것은 한 달 전 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기는 했지만 나 역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해 그 친구가 돌아오면 나는 떠나고 내가 돌아가면 그 친구가 떠나던 얄궂은 인연으로 십여 년을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정작 얼굴보고 떠들었던 기억은 손꼽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내가 컴백을 했더니 그 친구가 떠날 차례였던 것이다. 지난번 미국으로 떠날 땐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촌스럽지만 기념사진까지 박았다. 이번엔 그때만큼 아쉬움이 무뎌진 탓도 있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만 이별식의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녀석 답지 않게 '책'을 보내 온 것이다. 그것도 짧은 손 편지와 함께.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이별의 징표처럼 보내온 선물 이전에 나 역시 다른 이에게 이 책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선물만 보내고 읽어보지는 않은 상태였었는데 결국 그 친구로 인해 다시 내 앞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자신은 돌아가서 읽을 테니 나는 책 읽으며 돌아올 때까지 자신 생각을 많이 하라는 이제 갓 마흔이 넘은 아줌마의 열일곱과 똑같던 글씨체가 연락도 안하고 떠난 서운함을 일시에 녹여주기는 했다. 친구가 적어준 내 이름 석자도 비온 뒤 아스팔트에 막 스며든 풀향기처럼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 녀석은 이 책의 내용을 잘 파악했고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기 위한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틀림없이 서점직원에게 두어마디 들어보고 별 고민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있을 법한 일이지만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닌 채로 뜻밖에 전달된 책인지라 나는 그냥 이렇게 책하나 던져주고 떠나버린 그 친구와 여느 택배상자와 다름 없이 건네받은 그때 그 순간이 이 작품의 주제이자 작가가 이렇게 멀리 있는 나에게도 끝내 전하려한 메시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남의 이야기가 구체적인 내 사건으로

헨리가,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아내 올리브를 두고 일터에서의 동반자 데니지를 마음으로만 사랑한 이야기인 <약국>은 죽도록 지겨워도 결국 제 다리 한쪽과도 같은 올리브와 긴긴 시간을 견디는 이야기로 들렸다. 어렸을 때 살던 집, 그러나 그 집에서 한 번도 행복한 기억은 없어 불행의 추억만 남겨진 그 집에 가보고 싶었던 케빈의 어머니와 그의 선생님었던 올리브 아버지가 자살한 이야기, <밀물>은 그들이 얼마나 生에 대한 애착이 절실했는지에 관한 고백으로 들렸다.

눈가의 부드럽게 잡힌 오십줄의 잔주름이지만 혹독한 일이라고는 일어난 적이 없어 보이는 앤지의 옛사랑과 지금의 사랑에 대한 상처는 네 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生의 일부로 피아노를 만져온 <피아노연주자>의 변함없이 소중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 날 박학다식한 며느리를 얻으며 느껴야 할 '큰 기쁨'이 자신보다 아들에 대해 결코 아는 것이 많지 않아 보이는 그녀로부터 상실감이 되어 되돌아 왔을 때, 결국 그녀의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자신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만 <작은 기쁨>은 누구의 며느리가 되어본 적 있는 내가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할 '큰 슬픔'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또한, 사람 좋은 인형 같던 남편 헨리와 투덜거리며 나누던 대화는 그녀 그리고 내가 남편에게 그만큼 하지 않고 묻어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세 네 편을 읽고 나서 부터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해안가 마을과 이웃들이 마치 우리 동네 와 내 이웃인 것처럼 적응이 되었고,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작가만의 방식에도 완전히 익숙해져 한편 한편의 이야기가 내 몸처럼 내 목소리인 것처럼 내 눈과 손과 귀 같은 감각에 아주 가깝게 밀착되는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이야기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회상되던 '나'의 일상이었다. 그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난처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굶주림>의 경우, 내면적 상처로 인한 거식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어이없이 죽어버린 소녀의 죽음과 외로움에 공감하기 보다는 엉뚱하게도 둘 다 공부가 끝나지 않아 생활비가 없어 부모님에게 의지하던 신혼 초, 남편이 사들고 온 몇 개 안되던 도너츠를 나누어 먹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목이 메이기도 했다. 분명 앞 작품에서도 등장한 '도넛'인데 기어이 내 기억속의 한자락을 끄집어 내고 만 소설 속 한 장면들은 큰 주제와 상관없이 늘 그 자리에 위치하던 올리브처럼 내 인생 어딘 가에서도 의미있게 자리를 차지했던 시간들 이었던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극적인 순간에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의 생각, 같이 듣거나 보았던 분명 같이 겪은 일임에도 서로의 관점차가 상반되는 사실을 깨닫게 된 <다른 길>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나에겐 통째로 펀치를 날려대는 가장 적절한 자화상과도 같았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보게 된 헨리의 털없는 허연 정강이에 핀 검버섯은 늘어난 잔주름과 한웅큼 빠지던 내 머리카락 보다 더 잔인했고, '결혼하고서 당신은 무슨 일에도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는 것 같다'는 헨리의 푸념은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라는 내 비판보다 훨씬 더 정당했다. 배우자의 생각을 알고, 그 생각이 영원히 불변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찬가지로 상대 또한 나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의 외로움은 언제나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은 자의 그것보다 막강하리라 믿는다. 이 소설에선 거의 모든 편에 올리브를 비롯한 부부나 연인으로 존재하는 인물들이 상대를 어떻게 사랑하고 또 어떻게 상처를 주는 지에 대해 친절히 이야기 하고 있었다. 옮긴이는 이 작품이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이라는 수식어로 헌사하였지만 나는 '부부를 위한 치유소설'이라는 조금은 덜 세련될지 모르는 또 하나의 날개를 기꺼이 달아주고 싶다.

남의 불행으로 내 상처를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부터는 그런대로 평정심을 찾아 보려던 나에게 좀 더 예리하게 직접적인 면도날을 그어대고 하얀 포말이 부숴 지는 아름다운 바닷가 작은 마을이 아니라 한명 한명 끊임없이 파도가 몰아치는 고독한 섬에 난파된 듯한 고립감마저 느끼고 말았다. 제인부부의 <겨울음악회> 나들이에서 만난 딸 친구 엄마의 뭔가를 아는 듯한 '세상 참 좁기도 하지' 이 한마디는 결국 무덤까지 가지고 갈수 있었던 남편의 말하지 않은 실수로 밝혀지고, 방금 전까지 같이 보았던 크리스마스 전구 불빛을 삼켜버리는 듯했지만 앞으로 남은 生의 시간에 서로를 뺀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신의 손만큼이나 친숙한 상대의 손을 잡고 결국 서로를 바라본다. 남의 걱정이나 불행을 부러 접하는 것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이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올리브의 처절하고 참담한 현실 속으로 당당하게 침입한다.

헨리가 급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올리브는 한때 학교동료이기도 했던 루이즈를 찾아가 살인범 아들을 둔 부모로서의 고통이나 그로인해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불행해진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그러한 속내만 들켜버리고 결국은 조롱까지 당하게 되는 <튤립>에서는 작품이 끝난 후라도 올리브가 차라리 땅이 얼어버리기 전에 튤립을 심지는 말기를 바랬었다. 남의 자식의 치명적인 허물을 보고 내 자식의 잘못에 안도한다거나, 배우자의 어린사진을 보고 내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던가, 간병인 엄마보다 늘 입원한 아버지의 안부만 궁금했던 내 자신도 튤립을 심을 자격은 없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여행바구니>에서도 올리브는 남편을 잃은 옛 제자 말린의 장례식을 도와주러 간 자리에서 크나큰 슬픔에 닥친 그녀의 실의에 찬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의외로 무너지지 않은 제자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의 상처만 더 커지고 제자가 생전 남편과 같이 여행을 약속하며 간직해온 속절없는 바구니처럼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다.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자기 허물보다 남의 약점이나 실수를 발견하고 관찰해 내는데 보다 특출나다. 하지만 남의 불행으로 운 좋게 얻은 안도감은 정작 내가 불행해졌을 때 나와 똑같을지 모를 상대들로부터 주지도 않은 상처를 덤으로 받게 되는 악순환의 씨가 된다는 점에서 묻지도 받지도 말아야할 것임에 틀림없지만 작가는 올리브를 감정의 始原을 상대에게서 찾은 우범의 결과로 상대적 감정의 피해당사자이자 자기 감정의 가해자로 만들어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꽤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이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기에. 

세상에 자리 발견하기

올리브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던 젊은이가 등장하는 <병속에 든 배>와  <범죄자>는 그 나이가 비켜간 입장과 시각으로 주인공과 올리브와의 거리만큼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어짜피 아빠가 각각 다른 비현실적인 가족관계속에서의 줄리, 위니자매(병속에 든 배)와 아빠는 죽고 엄마로부터는 버림받은 레베카(범죄자)의 이야기는 그래도 그들에게 앞으로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의 상처와 그들만의 치유방식에 공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친구에게 총구를 겨누던 미인대회출신의 엄마나 하루 종일 지하실에서 물에 떠보지도 못할 것 같은 배를 만드는 아빠가 오히려 안쓰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들에게 팬케?을 만들어 같이 먹자는 아빠의 일상이 비오던 날 부쳐주시던 어머니의 부침개처럼 그리웠다. 레베카가 옛 남자친구를 못잊고 헤어짐에 슬퍼하던 것 보다는 나이가 들어 버터를 더 찾는 아버지를 보고 버터가 아버지를 끝장 낼 거라 아버지의 버터사랑에 기대를 걸었다는 레베카의 애증에 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의 병환이 길고 깊어지자 긴병에 효자 없다고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기다리곤 했던 내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줄리나 레베카는 가출과 물건을 도난 하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려했지만 훗날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역할과 자리를 발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올 것이라 믿고 싶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올리브의 심리묘사가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진 <불안>과 마지막 수록작품인 <강>역시, 죽을 땐 제발 숨이 금세 끊어졌으면 싶다가도 끝까지 포기 할 수 없었던 인간관계 속에서의 역할과 자리에 관한 물음을 조용히 던져 주었다. 앞선 단편들에서 올리브는 가끔씩 '말풍선'으로만 등장하는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주인공의 이웃으로 등장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바닷가 마을 한 자리에 선생님으로 부인과 어머니로 위치해 있었다. 하찮아 보이는 주변인 혹은 어엿한 사건 속에서도 그렇게 모여진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말하는 올리브의 이야기였고, 남들이 말하는 올리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올리브는 도와달라는 아들의 부탁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고는 비로소 희망이 무엇인지 기억났고, 소박해 보이는 아들의 새 부인과 부인이 낳아온 두 명의 아이들 틈 속에서 일상을 같이 하며 작지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행사할 때 가족이라는 기쁨을 다시금 맛보기도 했다. 어디든지 같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던 마흔 넷에 만난 사랑을 지키기 위해 헨리와 헤어지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아들 내외가 아침에 나누던 대수롭지 않은 대화에 마음이 상한 올리브는 아들과 해묵은 서로의 상처를 긁어대며 작품들 중에서 가장 크게 화를 내고는 쓸쓸히 돌아선다. 9.11로 야기된 미국시민의 불안을 글 속에 투영하였다는 <불안>에서 드러난 올리브의 분노는 '불안감은 분노'라는 새 며느리 앤과의 대화에서 암시하듯 자신의 역할이 필요한 것으로 희망을 느꼈던 감정과 평행을 이루며 역할이 사라진 가족관계에서 분노로 남겨진 올리브를 더욱 애처롭게 만들었다.

<강>이라는 마지막 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유독 제목이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에 집착하도록 했다. <종합병원>이나 <전원일기>같은 매주 주제는 다르지만 같은 형식의 틀과 뼈를 이루는 주인공들로 구성된 주간드라마의 마지막 회 같았다고나 할까. 이야기의 시점이 헨리가 죽은 후이기도 하고 일흔둘의 올리브가 죽음을 앞둔 노년으로서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슬기롭게 정리하는 듯한 메시지를 곱게 접어 우리에게 전달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혼자는 죽고 싶지 않다는 잭에게 사람은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다는 올리브의 대답이나 올리브가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친구와 전화를 할 때엔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먼저 과부가 된) 어머니가 이따금 친구들과 나누던 전화통화를 엿듣는 기분도 들었다. 올리브는 잭이 병원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 그 곳에 작지만 아직도 세상의 자리가 존재함에 다시 희망을 느끼고 이른 아침의 산책을 이어간다. 올리브의 자리(노년-silver)는 강변에 다시 봄이 오고 그런 봄이 오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견딜 수 없을 지라도 계속 흘러가는 금빛 강물(Gold)과도 같았고, 강물이 흘러가는 한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일상인으로 다시 만나

이 책은 사실 나에게 비일상으로 다가왔던 뜻밖의 감사와는 달리 이야기에 빠져 몰두하기는 어려웠다. 주인공들의 일상 속에서 유난히도 개인적인 '잡념'이 많이 떠올라 생각의 가지치기를 극복하느라 힘겨웠다. 그래서 더더욱 어떠한 한 문장이라도 놓칠 수 없었고, 책을 덮고 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늘 과식을 한 것처럼 머리가 더부룩했다. 아침에 펼치면 산책이 하고 싶었고, 낮에 읽으면 누군가와 맛난 점심을 먹고 싶었고, 밤에 덮으면 일기라도 쓰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배우의 경우라면 실제 극중에서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를 만나면 물 만난 듯 잘 표현해 내겠지만 독자인 나는 거울같은 이야기에 합체 되지 못하고 그저 '같다는 것', '같을 것'이라는 무거운 공감만 껴안은 채 며칠을 끙끙대었다. '죽도록 지겨워', '하루가 또 갔네요', '난 괜찮아' 와 같은 짧은 한마디는 잘 구워진 생선을 맛있게 먹다가도 갑자기 목에 가시가 걸리는 순간과도 같았고 바로 내입에서 나온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녀석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똑같이 자신의 엄마와 아버지와 동생과 남편과 시어머니를 그리고 한번은 친구인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그녀석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었을 것이고, 행복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과 내가 똑같을 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힘겨움 없는 같음'은 일회적인 행운이나 우연일지 모르지만 이토록 '힘겨운 같음'이 일상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새삼 벅차고 감격스럽다.

오늘아침 신문에서 '늙으면 엄살이 심해지고 원래 요구가 많은 것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간호사들끼리의 주고받던 무심한 한마디 때문에 대장암을 견디고 끝내 이겨버린 어느 老교사의 사연을 접했다. 나이가 들수록 일상에서 접하는 감정의 씨줄날줄간의 간격이 더 촘촘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나이로부터 얻을 거라 생각되는 관용, 포용이나 후덕함은 커녕 오히려 사소한 먼지 같은 것들도 일단 들어오면 잘 빠져나가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고 튕겨져 나가는 순간을 맞이할 때가 많다는 것에 얼마나 놀라곤 하는지 모른다. 한해 두해 나이를 먹을수록 어머니에 대한 경외감은 그래서 더 커져만 간다. 내 어머니는 일평생 하루의 시작과 끝이 얼마나 경건한지 그리고 그것을 변함없이 지켜가는 일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것인지 몸소 실천하는 '최고의 일상인'이었다. 이 책의 서두에 작가는 '삶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이야기꾼인 어머니에게'라고 밝혔다. 아마 작가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나는 어머니가 가신 후에야 일상을 존중하고 신념하며 그로부터 얻은 힘으로 가족의 일상을 지원해주신 내 어머니께 비로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것이 내 삶의 마법이자 지팡이였음을 너무 늦지는 않게 깨달았던 것이다.

한여름이 시작되기 전, 유월의 밤꽃향기와 함께 비일상적 기쁨을 선사한 친구의 분주한 일상도 눈에 그려진다. 내가 보지 않아도 여전히 열심일 것이다. 우린 서로가 손꼽는 '최고의 일상인'이 되어 만날 것이고 늘 그렇듯이 적지 않은 세월 어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건 서로를 등지지 않은 것에 수줍은 한마디를 건낼 날이 올 것이다.

살아는 있었네 !
 

오늘의 책을 리뷰한 '아느미애'님은?
한편의 책을 읽는 것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혹시나 얻었을지 모르는 실망이나 상처 한 모금을 씻어주는 일이라 생각하며,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것은 책을 쓴 사람이 어떻게 상처를 극복했는지 그 조용한 한마디를 애써 기억하려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읽고 쓰는'일을 가슴으로 작성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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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현대사회

 아즈마 히로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문학동네, 2007 

 

보통 오타쿠라는 존재나 그들의 서브컬쳐는 주류 사회와는 거리가 먼, 정반대의 이질적인 무언가로 치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오타쿠포비아들에게서 강하게 나타나죠.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조금은 그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책의 저자 아즈마 히로키는 가라타니 고진, 아사다 아키라같은 일본의 거물 지성인들의 뒤를 잇는 신예 비평가로 주목받는 인물입니다.(뒤를 잇는다는 표현은 사상적인 연관에 따른 평가라기 보다는, 그들만큼이나 훌룡한 지식인이라는 평가에 가까운 거 같습니다.) 그의 비평 활동에서 가장 돋보이는 특징이라면, 바로 그 대상이 서브컬쳐라는 것입니다. 보통 '고상한' 학계에서는 오타쿠 서브컬쳐에 관해 진지한 담론을 내놓는 것을 꺼려하고, 오타쿠 서브컬쳐를 향유하는 인물들도 그런 진지한 담론에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 책과 같은 텍스트는 흔치 않습니다. 특히나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는 더욱 더 그렇고요. 일본에서 생산되는 오타쿠 서브컬쳐들이 이미 전세계의 서브컬쳐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것은 한국에서도 예외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타쿠를 일본적인 현상으로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한국에는 오타쿠에 관한 진지한 담론은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죠. 상황이 이러니만큼 이 책은 더욱 더 귀중한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서브컬쳐에 대한 관심으로 인문학에 대한 지식이 없이 이 책을 접하려 하시는 분들 중에는 포스트모던이라는 단어나 리오타르, 코제브, 지젝같은 철학자들의 이름을 보고 지레 겁먹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 대중적으로 읽혀지는 책인만큼 어려운 용어와 개념을 빌려올 때는 어김없이 친절한 설명이 따라붙습니다. 따라서 현대 철학에 대해 문외한일지라도 이 책을 읽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인문학적 지식보다는 서브컬쳐에 대한 관심과 배경지식이 있는 쪽이 이 책을 훨씬 더 쉽게 읽어나갈 수 있죠.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모델, 즉 데이터베이스 모델과 데이터베이스 소비는 90년대 이후의 오타쿠계 문화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모에 요소'의 부상, 갈수록 작품들이 캐릭터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경향, '일상물'이니 '치유물'이니 하는, 극단적으로 작은 이야기들로만 채워진 작품들이 부상하는 것과 같은 현상들은 모두 이 책이 제시하는 문화소비 모델에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잘 이해가 되죠.  물론 이 책의 논의가 최근의 흐름을 모두 설명해주진 못합니다. 한국에는 2007년 발간되었지만, 원저는 2001년에 발간된 책입니다. 때문에 그 이후 나타난 가장 최근의 경향과는 다소 맞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되곤 합니다. 하지만 서브컬쳐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는 이 책의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이것이 단순히 오타쿠에 한정된 '오타쿠론'을 넘어서는 힘을 발휘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부제에도 드러나있듯 이 책의 본래 의도는 서브컬쳐의 분석을 통해 사회 전체를 조망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 의도대로 아주 잘 쓰여져있습니다. 비록 오타쿠론으로서는 조금 낡았을지도 모르지만, 오타쿠들을 사회 변화의 흐름을 선행하여 반영하는 존재로 파악하면 이 낡은 오타쿠론은 오히려 지금 시점에서는 시의적절한 사회 '일반론'으로 읽힐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최근의 걸그룹 열풍은 모에 요소에 치중한 캐릭터 비지니스와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후크송 열풍도 비슷한 선상에 놓여 있죠. 후크를 모에 요소에, 노래 전체를 캐릭터에 대입하면 아주 딱 들어맞습니다. 또한 이 책이 이야기하고 있는 오타쿠들의 사교성이 가지는 특징 즉 필연성에 의한 인간관계가 아닌, 언제든지 물러날 수 있는 필요에 의한 자발적인 인간관계는, 밥 먹을 친구 한 명만 있으면 된다는 우리네 대학가의 일그러진 풍경과 맞닿아있죠.

결론을 대신하여,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2'라는 부제가 달린 후속 저서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이 국내에 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밝히며 이 글을 마칩니다. 부탁해요! 문학동네!
 

오늘의 책을 리뷰한 'The Revanchist'님은?
영화 이론을 공부하는 21살의 대학생. 하라는 전공 공부는 안하고 서브컬쳐에 탐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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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 그때,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김은국, <순교자>, 문학동네, 2010 


1960년대, 어느 한국계 작가는 미국의 출판사들을 찾아다닌다. 그는 영어로 쓴 소설을 보여주지만 출판사들은 문전박대한다. 그 시절, 한국계 작가가 쓴 영어소설이라는 것은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출간하게 된다. 김은국의 <순교자>는 그렇게 탄생했다.

소설은 미국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가? 미국에서 20주 동안 베스트셀러에 오른다. 펄 벅 같은 거장이 극찬하기도 한다. 뿐인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다. 한국계 작가 최초의 노벨문학상 후보가 등장한 것이다. 1960년대에 말이다. 1960년대에 한국계 작가의 데뷔작 <순교자>가 그 같은 일들을 만들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11월, 육군 정보처의 장대령은 이대위를 불러 공산당에 납치됐던 목사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평양에 있던 14명의 목사가 납치됐는데 그 중 12명은 처형당했고 2명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살아남은 2명이라고 해서 무사한 건 아니었다. 그 중 한 명은 미치광이가 되어 동네와 교회를 떠돌고 있었다. 그나마 신목사라는 사람은 제정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공산당에게 납치된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

육군의 장대령이 이대위에게 원하는 건 간단했다. 목사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본 뒤 그 내용을 갖고 북한 주민들에게 선전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 인천상륙작전 뒤 파죽지세로 북진하던 한국군은 평양 일대를 점령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건 무력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공산당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계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살해당한 목사들을 ‘순교자’로 만들어 선전하는 것이었다.

명령을 받은 이대위는 신목사를 접촉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달라고 한다. 하지만 신목사는 묵묵부답이다. 왜 그런 것일까. 사람들이 하는 말처럼, 처형당한 이들이 순교한 반면에 신목사는 또 다른 유다가 되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이대위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그러기에 신목사는 너무 굳건해보였던 것이다.

진실이 알려지지 않는 사이, 장대령은 12명의 목사가 공산당에게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대규모 집회를 준비한다. 북한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물론이고 불안해 하는 주민들까지 한편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대위도 그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잘 될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대위는 불안하다. 어째서 불안한 걸까? 혹시 처형당한 목사들이 순교자가 아니라 배신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중공군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소문이 평양 시내를 불안하게 만들수록, 이대위의 고민은 깊어진다. 도대체 목사들이 납치된 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도대체 진실은 무엇인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순교자>는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과 다른 문제를 짚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극렬한 대립 사이에서 ‘남이냐, 북이냐’를 두고 고민했던 것과 다르게 ‘신앙’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존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추리적인 기법으로 그것에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묵직함에 새삼 놀랄 수밖에 없다. 1960년대, 한국계 작가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우리의 아픈 과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인가. 소설 곳곳에서 느껴지는 전쟁의 상흔이 마음을 할퀸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구축한 문학적인 성취감을 목격한 건 뜻밖의 행운이다. 이제야 알았다는 것이 후회될 만큼, 그 행운의 값어치는 꽤 큰 것이었다.

그 시절을 배경으로 했던, 많은 소설들이 말했던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따른 고뇌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는 <순교자>,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의 것을 볼 수 있다.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것, 그것이 있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정군'님은?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믿으며 그 책을 찾아 다니는 30살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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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같은 글쓰기> - 글을 '쓰고' 글을 '살다'

아니 에르노, <칼 같은 글쓰기>, 문학동네, 2005


맨 처음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를 접했을 때 당황했었던 경험이 있다. 오직 자신의 체험만을 쓴다는 소설가라니. 모든 글에는 작가의 자전적 경험이 녹아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그리고 어떤 소설을 읽을 때 나도 모르게 작가의 자전적 경험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나도 모르게 품으면서도, 나는 그러한 글쓰기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당돌함을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하는 작가에 대한 존경이었을 수도 있다. 자신의 말하기 힘든 부분까지 글로써 표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나는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칼 같은 글쓰기>는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와 그러한 글쓰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대한 대담집이다. 평론가이자 작가인 프레데리크 이브 자네는 이메일을 통해 점진적으로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에 접근해 나간다.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두 개의 글쓰기 방식이 일기쓰기와 계획된 텍스트라 말한다. 계획된 텍스트는 우리가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로 알고 있는 글들이다. 그녀는 그것들이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자전적 이야기에 우리가 흔히 부여하는 이미지,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어떤 고정된 이미지에 우려를 표시한다. 그녀는 그러한 글들이 자신에 대한 발견이 아니라 보다 일반화되고 보편적인 것에 대한 분석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나는 그녀의 대답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내가 그동안 그녀의 글들에 대해 품은 오해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 그녀의 글들을 단순히 자신의 삶을 폭로하듯 써내려간 일기로 치부해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처럼 한 가지 독특한 방법으로 사물을 경험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편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싶다.”
p.57

그녀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과 생각들을 타인 속에 용해시키는 것이다. 거리두기를 통해 객관화시키거나 가장 정확한 단어와 문장을 찾아냄으로써 그녀는 그러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글쓰기의 가장 강렬한 기쁨을 자신이 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녀. 결국 그녀의 글쓰기는 (흔히 그녀에 관해 알고 있는 많은 독자들이 하는 오해처럼)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은밀한 '기록'이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치열한 '탐구'인 셈이다.

수치심을 불러 일으켰던 출신계층, 그리고 교직 생활을 통한 계층의 이동, 낙태라는 여성적 경험 같은 일련의 일들을 글 속에 담아내면서 그녀는 자신의 글들이 단순히 그녀 개인의 내밀한 것이 될 수 없음을 말한다. 글쓰기는 그녀가 겪었던 그러한 삶의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작업이 되었고 그것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성격을 자연스럽게 표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신계급을 변절한 데서 오는 죄책감, 여자라는 조건에 주어지는 사회적 무게는 그녀에게 글을 쓰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 무엇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글들이 언론과 비평가들을 아주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을 얼핏 알고 있었지만 이번 대담집을 통해 그들(대부분 남성)이 그녀에게 들이댄 잣대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이중적인지를 새삼 알게 되었다. 언론들과 비평가들은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소재와 글쓰기의 방식에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들이댐으로써 그녀의 말대로 “아주 부당한 이중적 비방”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녀가 토로하는 것처럼 이런 일들이 남성 작가라면 가능했을까? 문학의 장 내부에서 일어나는 성 투쟁에 대한 그녀의 언급을 그냥 공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이유다.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문학의 장 내부에서도 성 투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나는 일명 ‘여성적 글쓰기’나 여성들의 글쓰기가 가지고 있는 대담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문학에 접근하는 현상에 대한 남성들의 무의식적 전략이자 그동안 있어온 수많은 전략의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자신들이 ‘여성적’이라는 형용사의 수식을 받지 않는 그 자체로서의 ‘문학’을 장악함으로써 여성들을 배제시키려는 것이죠.”
p.137

나는 그들의 대화가 깊어질수록(물론 한 사람은 전적으로 질문만을 하고 있지만)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와 글쓰기의 방식에 대해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는 것을 말해야겠다. “삶과 글쓰기라는 두 차원을 동시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그녀. “글쓰기 이전에는 현장에 없던 것을 발견하는 것, 바로 거기에 글쓰기의 희열이 있다.”고 말하는 그녀. 위험하지만 그만둘 수 없는 어떤 일종의 사명처럼 가능한 더 멀리 나아가야 하는 임무를 짊어진 것처럼 글쓰기를 생각한다는 그녀. 그녀는 ‘글을 쓰고’ 그렇게 쓰여진 ‘책들을 살고’ 있다. “오직 삶만이 있는 삶, 그 삶은 충분하지 않기”에.

칼 같은 글쓰기. 그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글들은 칼 같다. 자신의 삶에서 가차 없이 끄집어내는 그 무엇들에 나는 자꾸만 아프다고 느낀다. 나는 그 칼이 그녀에게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게로 향하고 있다는 생각에 아픈 것이다. 내 삶 속의 어떤 조건들을 그녀가 주저 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소설들이 닿아 있는 어떤 진실들 때문에.

오늘의 책을 리뷰한 '아린'님은?

『독서일기』의 저자 알베르토 망구엘처럼 열정적인 독서가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고, 미국의 대표적인 서평가 마이클 더다처럼 그동안 읽어온 책으로 자서전을 쓰고 싶다. 서점에서 새로 나온 책을 처음으로 만나게 될 때나 고요한 도서관 서가를 누비며 알지 못했던 책을 만나는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그렇게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듯,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 잠시 현실을 잊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사거나 읽는 방법 대신, 언젠가 내가 한 권의 책의 주인공이 되는 일을 꿈꾸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가장 멋진 도피처를 제공해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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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과의 하루> - 이별을 위한 의식에 감동의 목이 멘다


디아너 브룩호번, <쥘과의 하루>, 문학동네, 2010


어느 날 평생을 함께 해 온 반려자가 나보다 이른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래서 그 주검이 문득 나의 앞에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막 끓인 커피향이 감돌고 따뜻한 체온이 머무는 침대의 안락함에서 벗어나 일상의 반복되는 습관이 주는 안정감으로 하루를 시작하려는 그 때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남편을, 바로 그의 죽음을 비로소 인식하는 순간, 이별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살아있는 자의 당혹스러움, 그 혼란의 시간을 우린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소파에 반쯤 감긴 눈을 하고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온기를 잃어가는 남편 ‘쥘’의 주검을 두고 ‘알리스’는 쥘과의 이별을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되뇐다. 오십 여년을 함께 해 온 동반자를 선뜻 자식들에게, 친지에게, 장의사에게, 목사에게 내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쥘의 죽음이 그녀의 뼛속까지 스며들기 전까지는 그는 진정으로 죽은 게 아니다.” 아마 오랜 세월 그 둘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것들이 그녀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저장될 수 있는 그런 시간, 그녀에게 남편이 온통 흘러들어올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소설은 차마 남편의 죽음을 주변에 알리지 못하고 차갑게 굳어가는 남편의 주검을 두고 자신만의 이별의 시간을 보내는 하루의 이야기다. 이는 “일상이라는 이름에 묻혀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털어놓고 용서하는 화해의 시간이 된다. 남편의 외도로 인한 고통과 증오, 그러나 그때만큼 사랑했던 적이 없노라고 고백하며, 살아있는 당신보다 죽은 당신을 떼어버리는 게 나한테는 더 쉽다고 말하는 알리스의 떠나보냄의 수긍은 시큰거림과 슬며시 흐르는 눈물을 동반케 한다. 익숙한 체취,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고 삶에 대한 충동이자 현실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쥘과 함께 얼음이 되어버렸으면. 그와 함께 빛을 꺼버렸으면.”하는 상실의 아픔으로 갈등하는 여인의 사무침이 내내 가슴에 울린다.

한편 남편과 규칙적으로 체스를 두던 아파트 아래층의 자폐증 소년 ‘다비드’의 극도로 제어된 언어와 행동이 알리스의 혼란과 망설임의 시간에 개입하여, 그 어떤 죽음에 대한 위로의 수다보다 이별을 위한 완벽한 배경이 되어준다. “쥘 할아버지 껍데기”라고 죽음을 이해하는 소년의 표정, 두 명의 산 자와 하나의 주검이 마치 “세 명의 성좌가 확정되어 있는 삶과 죽음 사이의 지대”처럼 나란히 앉아있는 광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며 괜스레 목이 메어지기도 한다.

날이 기웃기웃 저물어가는 눈 내리는 밤이 오고, 정말 이별을 위한 완벽함이 도달한 시간, “눈은 밖에 있고 안은 따뜻해요”하는 소년의 무심한 듯한 한 마디는 삶과 죽음과 대비되어 산 자가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일상의 평온함이 되고, 그래서 “밤이에요. 이제 자야겠어요.”라며 쥘의 자리에 누워 잠에 빠져드는 소년을 바라보는 알리스의 표정에서는 삶의 안식을 본다.

죽음이란 삶의 가장 큰 상실을 극복하는데 요구되는 다독거림의 의식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부부의 연을 맺고 세월을 같이하는 동반자의 증오와 사랑의 실체가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애틋하고 아름다운 감동적 작품이다. 단숨에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짤막한 소설이지만 그 감동의 여운은 쉬이 가시지 않고 오랫동안 가슴에 맴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필리아'은?
세상의 위협이나 추함에서 격리되어 책에 몰입하는 순간을 커다란 위안인 동시에 평온의 시간으로 여기며, 자기격려와 스스로를 고무하는데 독서만큼 유익한 수단이 없다는 것이 이젠 거의 꺾을 수 없는 신념이 되어버린, 그러나 관계의 매혹을 저버리지 못하는 그런 남자입니다.

2010/05/24 - [책, check, 책] -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에 대하여> - 사람으로 향하는 시선의 울림
2010/05/20 - [블로거, 책을 말하다] - <사과가 가르쳐준 것> - 자연으로부터 배운 소중한 깨달음
2010/05/19 - [이슈와 추천도서] - [5월 3-4주 이슈와 추천도서] 어둠 속에 몸을 섞는 우리의 방법
2010/05/19 - [민용 in 재즈피플] - 너는 삶의 이유를 찾아냈니?
2010/05/18 - [블로거, 책을 말하다] -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 - 영혼을 깨우는 저항의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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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숨겨진 이야기

<재즈피플> 안민용 기자의 책과 음악 이야기 No. 30 - 또 다른 숨겨진 이야기

「자유혼」

너는 이제 오지 않는가
여기 이 침잠의 포구에
꿈꾸던 자, 이젠 더 꿈을 꾸지 않는다 

* Album form 김두수, 『자유혼』 「기슭으로 가는 배」 중

2009년 노벨상 수상작가 헤르타 뮐러

해마다 많은 문학상들이 수상작 또는 수상작가를 발표한다. 반디앤루니스 인터넷 서점에도 ‘문학상 수상작’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인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노벨문학상, 퓰리처상, 아쿠타가와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비롯해 32개나 된다. 물론 실제로는 더 많다. 그런데 문학상이라는 것이 곧 문학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문학상마다 의도나 성격이 달라서 그에 부합하는 작품을 선정하기도 하고(가령 같은 작품으로 여러 신춘문예 응모해도 당선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고 한다) 또 문학상이라는 의미 자체가 갖는 한정된 범주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정된 범주는 다른 의미에서 ‘평균 이상’이라는 범주를 보여주기도 한다. 

문학상 중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벨문학상도 분명 문학적 ‘진리’는 아니다. 간혹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역사의 재인식과 인류애의 강조는 과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렇지만 언론의 관심이나 출판사의 홍보 등으로 그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들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또 실제로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만나기도 했다. 2000년부터 수상자로는 가오싱젠(프랑스), V.S. 나이폴(영국), 임레 케르테스(헝가리), 존 맥스웰 쿳시(남아프리카 공화국), 엘프리네 옐리네크(오스트리아), 해럴드 핀터(영국), 오르한 파묵(터키), 도리스 레싱(영국), 르 클레지오(프랑스)이며 2009년 헤르타 뮐러가 수상했다. <숨그네>는 그녀의 최근작이다. 

또 다른 숨겨진 이야기

헤르타 뮐러는 ‘끔찍하도록 가난하고 외진 마을’의 이야기를 전한다. “누군가가 마을을 떠날 때 바깥세상에는 언제나 재앙이 있었다. 조부는 일생에 단 한 번 그 마을을 떠났다. 일차대전에 징집된 것이다. 부친도 단 한 번 그 마을을 떠났다. 이차대전에 징집된 것이다. 부친은 나치 무장친위대였다. 어머니도 단 한 번 그곳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자 단지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소련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것이다. 누군가 마을을 떠날 때마다 바깥세상에는 언제나 재앙이 있었다. 세상의 재앙이 그들을 고향 밖으로 불러낸 것이다.” (<헤르타 뮐러에게 다가가기> 66쪽) 가해자는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이들은 직접 해를 가하지 않아도 가해자가 되고 어떻게 해도 피해자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한다.  

<숨그네>에서 2002년 노벨상 수상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의 단면을 발견했다. <운명>은 아우슈비츠와 부헨발트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15세 소년 죄르지의 이야기이며,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숨그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단지 히틀러의 동족인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소련군에 끌려가 강제수용소에서 노역한 17세 소년 레오의 이야기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죄르지와 레오’들에게 죄과를 치르게 했다. 같은 모습으로 대척점에 있는 이들에게, 강제수용소를 만든 주체가 소련이든 독일이든 큰 의미가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필자의 요지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군이 자행한 끔찍한 참상을 소련이 같은 방법으로 복수할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헤르타 뮐러를 통해 전후 또 다른 강제수용소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소련의 강제수용소는 홀로코스트 같은 대참사를 빚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인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보복한다고 피해가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자체로도 또 다른 잘못을 만드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제 끝났으니 잊고 잘 살자 라는 식으로 응수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피해자는 그 고통을 감수하며 살아야 하느냐고, 65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역사를 그 당시에 털어버릴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피해자의 입장이 되지 않고서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겠다 싶어 다른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이성을 앞세워 이야기하기에는 고통이 너무 큰 역사다. 

다 잃어도 인간임을 잊지 않기를

한편 <숨그네>가 <운명>을 떠올리게 한 이유 중 하나는 표현에 있다. 강제수용소에서 겪은 삶을 분노나 공포 등 직접적인 언어로 드러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세한 언어와 객관적인 표현으로 드러내고 있다. 헤르타 뮐러의 표현법은 직설적이면서도 우회적이고, 거칠면서도 우아했다(개인적으로는 그녀의 독특한 조어법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궁금했다). 문학의 유용성이 행동하는 것에 있다면 뮐러의 언어는 문학적 유용성을 잘 보여준다. <숨그네>를 읽는 동안 가려웠던 머리, 그리고 허기진 듯 글을 읽고 밥을 먹어야 했던 감정은 뮐러의 언어가 전해주는 감동의 다른 표현이었다. 

올해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65년이다. 65년이 지났지만 역사는 아직도 고통 속에 시름한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드러나지 않은 채 숨그네(죽음과 삶 사이를 드나들면서 가쁘게 흔들거리는 것을 의미하는 뮐러의 조어)를 탄다.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하지만 그건 지워지는 게 아니라 가려지는 것이다. 그들이 시간 속으로 사라질수록 우리는 더 허기진다. 허기진 이유를 잊어가며 채워지지 않는 허기로, 늘 배고플 것이다.   

“배고픈 천사는 이제 뇌 속이 아닌 목덜미에 올라앉았다. 그리고 배고픈 천사는 기억력이 좋았다. 아니 특별히 기억력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수용소의 유행 역시 일종의 배고픔, 눈(目)의 허기였다. 배고픈 천사가 말했다. 그렇게 가진 돈을 모조리 써버리지마, 앞일은 모르는 거야. 올 것은, 이미 다 왔어. 나는 생각했다.”(<숨그네> 282쪽) 

 <재즈피플> 안민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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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고 놀리지 말아요


<재즈피플> 안민용 기자의 책과 음악 이야기 No. 21- 다르다고 놀리지 말아요

「소녀시대」

날 아직 어리다고
말하던 얄미운 욕심쟁이가
오늘은 웬일인지
사랑해 하며 키스해 주었네

* Album form 이승철, 『Part 2』「소녀시대」 중

같은 글, 다른 해석

이승철이 부른 ‘소녀시대’와 소녀시대가 부른 ‘소녀시대’는 다르다. 같은 곡이라 해도 누가 부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곡이 될 수 있다. 특히 재즈에서 자주 연주되는 스탠더드는 오히려 같은 곡을 통해 그 연주자만의 개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바탕이 된다. 문학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옮긴이의 생각이 더해진 글은 원본과는 다른 글이 된다. 물론 우리가 읽는 글은 원본과도, 옮긴 글과도 또 다른 ‘우리가 이해한 글’이 되기 마련이다.  

글의 유동성을 따르다보면 번역에 대해서는 다소 관대해진다. 작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그 문장들을 하나하나 살펴볼 게 아니라면 전달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번역을 그저 그런 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번역은 그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만날 수 있게 하는 일이며 잘 된 번역은 작가의 머릿속으로 한발 더 다가설 수 있게 한다. 최근 읽게 되는 책들의 절반은 번역서라서 전문서적일 경우 역자의 전문지식(혹은 감수)을 고려하고, 문학서적일 경우 그동안의 번역을 살펴보기는 하지만, 사실 옮긴이를 골라가며 읽을 수 있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고전, 특히 저작권이 만료된 작품일 경우 여러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경우가 있어 출판사 또는 번역자를 선택할 수 있다. 반디앤루니스에서도 <위대한 개츠비>를 검색하면 민음사를 비롯해 문학동네, 펭귄클래식코리아 등 50권이 넘는 책을 확인할 수 있다. 

젊고 발랄해진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를 읽게 된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덕분이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기만 하면 책꽂이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꺼내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부분을 한바탕 읽는 것이 습관처럼 돼 있었는데, 단 한 번도 실망을 맛본 적이 없었을 만큼 단 한 페이지도 시시한 페이지는 없었다. 이렇게 멋진 소설이 또 있을까 싶었다.”(<상실의 시대>, 문학사상사, 80쪽) 이 문장만 있었다면 <위대한 개츠비>는 소설 속에 나오는 좋은 책일 뿐이었을 것이다. 사망 후 30년이 지나지 않은 작가의 책은 읽지 않는다는 나가사와의 말에 와타나베는 대답한다. “하지만 스코트 피츠제럴드는 죽은 지 아직 28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요?”(같은 책 81쪽)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게 되었다. 이제는 그가 사망한지 70년이 지났고(1940년에 사망했으니 꼭 70주년이 되었다) 세 번쯤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다른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멋진 소설이라는 것도 사실이었다.

필자는 소설가 김영하씨를 잘 모른다. 필자의 취향을 아는 이들은 ‘김영하씨 소설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어쩐지 연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신문에서 김영하씨가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가 번역한 소설, 그것도 소설가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앞서 읽었던 두어 권의 문고판에 비해 김영하씨의 개츠비는 ‘캐주얼’했다. 데이지의 “나 보고 싶대?” (21쪽)라는 간결한 외침이나 “하여간 아랫것들은 정말.” (46쪽)이라는 머틀의 말투는 인물에 ‘캐릭터’가 더해졌다. 대부분의 책에서 개츠비와 닉이 ‘형씨’라는 애매한 호칭으로 존대하는 것에 비해 김영하씨 버전에서는 반말로 ‘친구 먹고’ 있었다. 

번역은 단순히 옮김을 의미하지 않는다. 번역을 할 때 외국어 보다 모국어를 더 잘해야 한다는 말은 번역이 또 하나의 창작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김영하씨도 해설을 통해 “번역의 속도는 언제나 창작의 속도보다 느렸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최종 결정권자인 내 소설은 누구의 재가도 필요 없이 그저 내 상상력의 속도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데 반해, 번역은 이미 저세상 사람인 작가의 의도를 가늠하고, 문맥을 살피고, 사전을 뒤지며, 그러고서도 못내 미심쩍어 다시 앞뒤를 살피는 일의 반복이었다. 창작이 전차부대라면 번역은 지뢰제거반이었다. 전진한다고 전진이 아니며 제거했다고 제거가 아니다. 다시 돌아가는 길에도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뇌관을 제거한 후에도 다른 뇌관이 남아 있을 것을 염려하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문학동네, 229쪽)

본연의 <위대한 개츠비>보다 김영하의 <위대한 개츠비>가 된 것에 대해 호․불호(好不好)가 갈릴 수 있지만 50여권 이상의 번역본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면 이런 번역 하나쯤은 있어도 좋을 듯했다. 아니, 고전마다 하나씩 소설가들이 번역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언제나 독자의 욕심은 저자를 넘어서는 법이다. <재즈 피플> 안민용 기자 [<재즈 피플> 보러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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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른다> - 너는 내가 알고 싶기는 하니?

 

정이현, <너는 모른다>, 문학동네, 2009


너는 모른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말 중 하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뭐가 문제인지 물었을 때 상대방이 ‘너는 몰라’라고 하면, 둘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긴다. ‘그 어떤 말을 해도 너는 이해할 수 없으니 우린 끝’이라 선언하는 잔인한 말. 이 말을 들으면 해결을 위한 뜨거운 의지도, 지금껏 함께한 시간도, ‘나는 소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심연으로 한없이 처박힌다. 만약 사랑하는 이들 간에 이 말이 오고간다면, 사랑은 거기까지다. 정이현 작가는 무슨 독한 마음을 먹었기에 ‘너는 모른다’는 제목을 택했을까.

강남의 고급 빌라에 사는 혜성의 집은 남들보다 잘 산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를 거 없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다. 아버지 상호는 돈을 잘 벌어다 주고, 화교 출신의 새엄마 옥영은 모나거나 별나지 않게 가정을 돌본다. 배다른 동생 유지는 엄마 옥영을 닮아 조용하고, 문제는 일으키지 않는 초등학생이다. 의대에 합격한 혜성 또한 집안 분위기를 잘 맞출 줄 아는 만 스무 살 성인이자, 상호의 자랑거리이다. 가족 중 문제를 일으키는 이는 혜성의 친누나 은성. 다행히 그녀는 따로 살아 집안에 별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어느 평범한 일요일, 유지가 사라진다. 상호는 사업 파트너를 만나러 나가고, 옥영은 친정어머니를 만난다는 핑계로 옛 연인을 만나러 대만에 가고, 혜성은 남자친구에게 차이고 난동을 부리는 은성을 진정시키러 간 사이, 유지는 바이올린 과외 선생님에게 줄 레슨비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동안 옥영의 품에 쌓여 바이올린밖에 모르던 아이 유지. 그 아이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유지가 사라지고 잔잔하던 가정에는 큰 파문이 밀려온다.

당연히 있어야할 곳에 부재가 자리 잡자 가족은 불타듯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 불안감은 아이를 잃은 슬픔과 자신들이 어린 유지를 혼자 집에 방치했다는 죄책감에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뭔가 뒤가 구린 일을 하는 아버지, 가족들 몰래 옛 연인을 만나는 어머니, 한때 동생을 납치해 상호에게 돈을 뜯어내자고 했던 은성, 뭔지 모를 상실감에 타인과 소통하기를 꺼려하는 혜성까지. 사건을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하는데 각자 다른 생각과 방식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옥영의 눈동자에 피로와 불안, 도탄과 고통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럼에도 절망의 깊다란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의지가 느껴졌다. 상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바짓주머니를 뒤져 답배갑을 찾았다.
“내 얘기 좀 들어요.”
아내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녀는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경찰을 더 이상 못 믿겠어. 그 사람들은 조그만 아이 하나 없어진 일에는 큰 관심이 없어. 하긴 그 사람들한텐 그게 당연하겠지만.” (…) “딴 방법이 일을 거야. 오늘부터 같이 찾아봐요. 이대로 경찰 손에만 맡겨두었다가는 정말로 어떻게 될지 몰라.”
“에이 썅, 그만하라고 했지!”

(206~207쪽)

사라진 아이를 찾는 과정에서 가족들이 ‘너는 모르는’ 사실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갈등은 커진다. 네가 알아서는 안 되는 사실들과 또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사실들은, 판도라의 상자에 봉인됐던 온갖 불행이 되어, 사람의 마음을 긁고 또 할퀸다. 여기서 정이현 작가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사실과 사실이 밝혀져야만 사건이 해결되는 모순된 상황이라면 우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답을 내리기 쉽지 않다. 더욱이 그것이 가정의 해체와 딸아이의 실종이라는 정면충돌이라면, 답은 진실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로 남겨진다.

작품은 이처럼 ‘앎’과 ‘모름’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우리의 숙명을 드러내는 한편,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민낯을 주저함 없이 까발린다. 돈을 위해서라면 인륜을 저버리는 냉혹한 어른들의 세상, 화교라는 낙인으로 숨 한 번 크게 쉬지 못하는 우리 사회, 애정 결핍으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굴곡이 커져버린 젊은이, 지나친 기대와 관심으로 인터넷 공간 속으로 침전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아이들. ‘나’는 ‘너’를 얼마나 알려고 했을까. 아니, 알고 싶기는 한 걸까.

1월 4일, 폭설이 내려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던 날, 뉴스를 보는데 <너는 모른다>가 떠올랐다. 예상치 못했던 상황 속에서 우왕좌왕하며 갈 길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유지를 잃은 가족의 모습과 같았다. 정이현 작가는 쉽게 벌어지지는 않지만 분명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건을 시작으로 불안 가득한 세상을 솜씨 좋게 재구성한다. 사건의 원인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형식 때문인지, 그들의 이야기가 감추고 싶은 우리네 삶을 보여줘서인지, 가슴이 아프면서도 책장은 잘도 넘어간다.

                                                                                                     -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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