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5.02.16 『카프카 평전』 - 밤이 오면 글을 쓸 것이다
  2. 2015.02.06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 헤르만 헤세의 독후감
  3. 2015.02.05 『도시의 시간』 - 도시의 멜로디
  4. 2015.02.03 『남자의 자리』 -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5. 2014.01.17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절망의 구렁텅이에 있다면
  6. 2013.09.24 [서점에서 만난 사람] 닫히지 않는 이야기의 문 -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소설가 에트가르 케레트
  7. 2011.09.28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 화가의 꿈, 인간의 욕망
  8. 2009.12.02 [나감책 No.2] 책과 사람, 그리고 반디&루니스(반디) (2)
  9. 2009.11.25 <유리로 변해가는 슬픈 소녀 아이다> - 상상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
  10. 2009.11.17 <사랑이, 내게로 왔다> - 이들처럼 사랑하고 싶으세요?

『카프카 평전』 - 밤이 오면 글을 쓸 것이다



이주동 | 『카프카 평전』 | 소나무 | 2012


나는 삶에 어떠한 확신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별들의 풍경은 나를 꿈꾸게 한다.

For my part I know nothing with any certainty, but the sight of the stars makes me dream.
- Vincent Willem van Gogh

카프카의 『소송』을 처음 읽었을 때, 참고 다 보는 게 힘들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두운 헛소리가 나열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예전 서울 고서점가를 나돌던 카프카 책의 뒷면에는 “이것도 문학이냐?”, "이런 X새끼를 내가 읽다니!" 라는 욕과 낙서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기괴하고 이상한 작품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품 안에는 틀림없이 무언가 굉장한 게 숨어 있다고 믿었다. 밀란 쿤데라를 포함한 수많은 훌륭한 작가가 극찬한 작품이 별 게 아닐 리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반복해서 읽었고, 마침내 카프카가 표현하려 했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이 글 맨 위에 옮겨 놓은 네덜란드 화가 반 고흐의 말은 카프카를 이해하는 데 좋은 암시가 된다. 카프카의 작품에서 두드러지는 심상은 고독, 소외, 불안 같은 것들이다. 삶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이 빠질 수 밖에 없는 감정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별들의 풍경이 있기에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시인은 시를 쓴다. 카프카도 외롭지만 아름다움을 믿었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그것도 아주 처절하게.

고흐와 카프카의 공통점은 또 있다. 생전에 전혀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고흐의 유명 작품인 < 별이 빛나는 밤 >은 현재 천억 원이 넘는 가치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고흐 생전에 그의 작품은 팔린 것도 몇 개 없었을 뿐 더러, 팔려도 당시 가치로 이 백 만원 남짓했다고 한다. 카프카도 비슷한데 장편 소설 『실종자』의 첫 장인 「화부」가 단편 소설로 출간되어 폰타네 문학상을 받은 것 외에는 평단의 평가가 없다시피 했다. 그가 현재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모두 친구 막스 브로트가 사후에 출판한 유고로 인한 것이다. 카프카는 후두 결핵으로 죽기 전에 유작들을 모두 불태워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렇다면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글을 그렇게 열심히 썼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카프카가 작품을 쓴 목적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살아있음을 느끼는 의미 자체로 글쓰기를 생각했던 것 같다. 카프카는 노동자재해보험공사에 다니며 밤늦은 새벽 시간에 글을 썼다. 이 시간의 경험은 신비할 정도여서, 때때로 자신이 쓴 구절에 스스로 감동한 나머지 흐느껴 울기까지 했다. 한밤중에 옆 방에서 자고 있는 부모가 깰까 두려워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서 울었다.

『카프카 평전』 같은 책을 통해 이런 배경을 알고 작품을 읽으니 글이 완전히 새롭게 다가왔다. 그가 적은 글은 문장과 논리 그대로 느끼는 게 아니라는 것, 평범한 삶의 감각을 뛰어넘게 해주는 매개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카프카는 문학이 줄 수 있는 아주 새롭고 특수한 미학을 열었다고 생각한다. 그게 많은 위대한 작가들이 카프카의 작품을 열렬히 좋아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일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CamomileForever'님은?

책과 꽃과 풍경을 좋아하는 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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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 헤르만 헤세의 독후감


 



헤르만 헤세 |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 김영사 | 2015


서평 또는 평론을 쓰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무엇보다도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들기. 나는 둘 다 안 되기에 항상 내가 유의하는 부분이지만 쉽지 않다. 다작만이 글쓰기 실력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인데, 때마침 이 책 서문에 인용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답이 될 듯싶다.

글로 쓰인 모든 것 중에서 나는 오로지 글쓴이가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글을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정신임을 알 것이다. 타인의 피를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글을 읽으며 게으름 부리는 자들을 미워한다. (9쪽)

‘피로 쓰고, 피로 읽어라.’ 글을 쓰는 자라면 신조처럼 여겨질 것이다. 헤르만 헤세도 그랬다. 헤세의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잠깐 글쓰기의 방식인 비평, 평론, 서평에 대한 단상을 꺼내보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비평가와 평론가의 펜을 통해 독자들이 따라간다. 평론가의 필력은 독창적인 해석에 도움을 준다. 문단에 대한 철저한 비판도 결국 비평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평론이나 비평이 아니라 서평에 가까운 주제를 얘기할 것이다. 서평가로 알려진 ‘로쟈’는 독자에게 지적 유희를 보여준다. 그에게 가장 높이 평가할 부분은 성실함이다. 그가 매일같이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은 독자에게 책을 고르는 좋은 정보가 된다. 이러한 성실함의 원조는 사실 따로 있다. 바로 오늘 말할 헤르만 헤세다.

그는 살면서 삼 천여 편의 서평을 썼다. 이 책은 73편의 글을 담고 있다. 직업으로서 평론, 비평, 서평을 쓴 사람은 있지만, 문학가 즉 작가가 서평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이러한 작업은 보통 철학자들이 유희적으로 자신의 지적 발산을 위해서나 이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담을 때 행해지는데, 헤르만 헤세는 소설가로서 소설가를 소개한 것이니 재미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니체가 문학적 글을 쓰기 위해 빨간 피를 뿜었다면, 그는 이번 작업을 쓰기 위해 파란 펜을 들었다. (이 부분은 책 전체가 파란색으로 인쇄된 것에서 찾아낸 것이지만) 내가 본 헤세의 글쓰기는 『데미안』에 대한 일화에서 알 수 있듯 독자를 위한 성실함이었다고 본다. 가명으로 출간한 의도가 이 책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지고 있는데, 그가 지속해서 서평을 쓴 이유 또한 세상의 젊은이들을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헤르만 헤세가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헤세의 주관적인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 한 편 한 편 마다 자신의 영향을 받은 작가나 그가 비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시 시대적 상황이나, 그 소설이 나왔던 이유가 적혀 있었다. 이 책이 제법 가볍게 읽히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서문에서도 헤세의 성실함을 두고 ‘읽지 않은 책들의 더미’에 쌓여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의 생각이 모인 이 책이 나에겐 또 하나의 소설로 다가왔다. 내가 알던 헤세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책이기도 했다. 그의 흥분과 숨소리를 듣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해안'님은?

세상을 읽고, 세상을 쓰고, 세상을 그리고 싶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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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시간』 - 도시의 멜로디


박솔뫼 | 『도시의 시간』 | 민음사 | 2014


박솔뫼 작가의 『도시의 시간』을 읽으면서 내가 지나온 시간을 떠올려 본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나는 '서울 토박이'라고 말하지만 서울은 왠지 '토박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 도시다. 많은 사람이 그리는 '고향'은 없지만 서울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면 포근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언젠가부터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올리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고 내려가는 '광장'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같은 특색이 드러나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살지만 저마다의 색깔이 빛나는 곳.

서울의 이질적인 면을 깨닫게 된 것은 지방에서 살던 친척 오빠가 잠시 우리집으로 와서 대학을 다녔을 때였다. 아마도 내가 중학교에 다녔을 때였는데, 그때까지도 난 내가 살던 곳이 무척이나 익숙했고, 내가 사는 도시가 좋았다. 그러나 오빠의 입장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대학교를 입학하기 이전에는 잘 올라오지 않았던 서울에서 부모와 형제들 없이 생활해야 했을 어려움과 익숙하게 살았던 그곳과 달라 도시의 이면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함께 이야기하던 중 '서울은 참 차가운 도시'라 했던 오빠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엄마가 있고, 들어갈 집이 있는 나에게는 이 도시의 차가움과 흐린 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오빠에게는 도시의 시간이 삭막하고, 사람들이 어디든지 많은 곳이지만 고독하여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도시의 시간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은 나와 우미, 우나, 배정이 보냈던 십 대 시절이 아닌 지금이다. 박솔뫼 작가가 느릿느릿 리듬의 속도를 내며 한창 순수했고, 발랄했고, 때론 감수성이 짙었던 시절에는 그 시간의 막막함을 몰랐던 것 같다. 어른이 된 후에 이 책을 읽으니 그들이 느꼈던 암흑과 그들이 함께 보냈던 제니 준 스미스의 음악이 위로가 되고, 꿈이 되었던 시절을 깨닫는다.

나는 나에 대해 별생각이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정작 뭐가 되어 가는 것은 없었다. 뭐가 될 리가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다. 지금 같은 대학생이 직장인이 될 것이다. 그마저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 것이다.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되는 것 없이 변하는 것 없이 완성되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깨닫고 나아가는 것도 없다. 그것만 꼭 그렇게 될 것이다. (46쪽)

박솔뫼 작가가 그리는 『도시의 시간』은 회색빛이다. 음울하고 차가운,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감이나 들뜬 기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그리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인류는 대단한 미래를 그렸다. 그리고 정말 시간이 지나면 달나라에 갈 것처럼 더 발전되고, 안정된 사회를 생각했을지도. 그러나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글 속에서 느껴지는 차가움과 무심함은 어쩌면 청춘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고민했을 흔적이자 동시에 회색빛 아래에서 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나와 우나는 십 대인데 중고생은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일 뿐이었다. 우리는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낀 채로 타는 냄새를 지나쳤다. 우나가 가져온 음악은 도서관 휴게실보다 한밤의 미분양 아파트와 더 어울렸다. 밤이라 조용한 곳을 돌아다니기가 긴장되었지만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잡은 채로 시멘트 덩어리 사이를 걸었다. 우나는 기타 하나가 중심이 되는 음악을 좋아했고 그 노래들은 모두 먼 곳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연기가 향해 가는 곳, 웃음소리가 떨어지는 곳, 그보다 먼 곳을 노래했다. 우리가 어두운 밤과 음악에 집중하는 사이 우우우 우우우 시멘트는 그렇게 노래했을지도 몰랐다. (55쪽)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네 명의 청춘들의 이이야기는 시작과 끝도 없이 도시의 시간 속으로 스며드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들이 어떻게 무슨 일을 하며 삶을 살아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책을 읽은 독자들이 스스로 그들의 삶을 유추할 뿐이다. 『도시의 시간』은 경장편에 속하는 짧은 소설이지만 호흡이 굉장히 느리다. 책 속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들을 그리는 것 같지만 세밀하게 한 글자 한 글자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삶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삶의 흔적들이 엿보인다. 동시에 그들의 감정선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무엇 하나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청춘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명확한 고조가 드러나면서도 진중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다소 그 호흡이 느려 무엇을 이야기하기에 이처럼 모호하고 단조로울까 싶었다. 어느새 작가의 호흡으로 들어가 까마득했던 그 시간을 기억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물방울'님은?

책도 하나의 인연이라 생각하며,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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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아니 에르노 | 『남자의 자리』 | 열린책들 | 2012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윤덕수(황정민)는 피난길에 잃어버린 아버지와 여동생을 기억하며 스스로 가장이 된다. 그는 홀로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핀다. 그게 자신의 의무라 여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학업도 포기한다.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파독 광부에 지원하고 여동생의 결혼 자금을 위해 베트남에 간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그에게 남은 건 장애가 난 한쪽 다리와 계속 돌봐야 하는 가족뿐이다. 이러한 삶이 당연한 거라 믿으며 그는 의지를 꺾지 않는다. 시간이 흘렀고 그도 늙었다. 자녀들은 자라서 가정을 꾸렸고, 그에겐 손자들도 생겼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장통의 오래된 가게를 왜 끌어안고 사는지, 왜 오래전 시간을 붙잡고 놓지 않는지를.

아니 에르노가 『남자의 자리』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되짚으며 말한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고백 같은 아버지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 보편적인 개념의 아버지였다. 가족을 위해 애쓰면서도 애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함, 점점 자신의 영역이 좁아지고 자녀가 자라면서 거리감이 생기는 순서까지 똑같았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역사를 적었다. 어떤 감정보다 지극히 객관적인 순서의 기록이었다. 작가가 직접 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까지 적을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 사이가 어떤 교감으로 이루어졌을 한때의 시간이 준 기억.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순간부터 봐 왔던 모습. 늙어가던 아버지의 생활과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쌓이는 서로의 삶. 그렇게 아버지의 크기가 달라져 갔다.

이 무렵, 그는 벌컥 화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증오감에 입가에 뒤틀릴 정도로 심하게 화를 냈다. 나는 어머니와 어떤 공모 의식으로 맺어지고 있었다. 달마다 찾아오는 복통, 골라야 할 브래지어, 화장품 같은 것들을 통해서였다. (…) 우리에겐 그가 필요 없었다. (91쪽)

투병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조금씩 달라졌다. 얼핏 추측하기에 육체의 노쇠함보다 정신적인 피폐함이 더 삶을 짓눌렀을 듯하다. ‘나는 이제 상자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가족들에게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어. 나는 혼자야…… 그에 반해 자식들은 점점 자라 다른 세계로 편입하고 세상을 알게 되어 자주적으로 살아간다. 아버지는 관심 혹은 간섭의 기회까지 사라진 영역을 오롯이 혼자 지킨다. 늙고 나약해져, 그만의 세계를 산다.

픽션을 거부하는 그녀의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써지고 있지만, 그 개인적인 경험이 그녀만의 기억은 아닌 것 같다. 애틋했던 부모와 자녀 사이도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덤하고 건조해진다. 살아가는 방식과 시간이 달라 서로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벽이 쌓인다. 보통의 가족이 이런 시간을 거친다.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의 모습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와 나 사이는 그 '보편적'인 범주에조차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아버지와는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대화로 시작된 말은 싸움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자동으로 차단되는 마음. 서로에게 타인이 되어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우리'라는 표현은 없다. 아버지에 관한 이러한 책은 나에게 늘 넘어야 할 거대한 산으로 자리한다. 보편성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모르는 시간을 알기 위해 부딪혀야만 하는 전쟁 같은 도전이다.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그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어른이 되었고, 어떤 마음으로 부모가 되었으며, 어떤 바람으로 늙어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아니 에르노가 하는 말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그녀의 글을 통해,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하는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오갔을 대화를 그려봤다. 아버지의 유년기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듣고 있을 딸의 눈빛, 몰랐던 시간이 오고 가며 쌓였을 애틋함과 이해, 아직 멀어지기 전인 부녀의 관계. 나는 바람 같은 시선을 던지며 이 짧은 소설을 꾸역꾸역 삼켰다.

아버지가 화두가 되는 이야기 앞에서 나는 늘 답답하다. 애써 피해가고 싶고, 쉽게 건너가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다행이었던 건, 그녀가 이 글을 참 담담하게 썼다는 점이다. 감정의 파도가 지극히 일렁일 것 같은 사건 앞에서도 아니 에르노는 기록 의무자처럼 객관적이다.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래야 쓸 수 있었던 그녀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기억, 정리, 기록이 차례차례 가능해지는 순간에 비로소 찾아오는 안도감과 같이. 언젠가 나의 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는 시간이 오면 나도 이런 기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 가슴속 말, 이해, 정리를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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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그 남자’를 아버지로 생각한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전쟁 같은 도전'이라고 했는데, 전쟁을 마치고서 아버지의 거대한 산은 좀 작아 보이던가요?

‘그 남자’를 주제로 여러 책의 주인공을 떠올려 봤는데 연인 같은 남자가 많더라고요. 그 많은 남자 사람을 뒤로하고, 언젠가 한번은 마음 다잡고 덤벼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였어요. 펜벗 주제가 아니었더라면, 이 책을 다시 책장 구석에 넣어둘 것만 같아서요.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화나 책은 늘, 저를 힘들게 하거든요. 가까이 가기 위해 아주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늘 제자리에 서 있다가 되돌아가곤 합니다. 평소의 저라면 그런 경우 관계 유지를 포기하는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 단절이 ‘단절’이 되지 않더군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아, 그 거대한 산이 이제는 작아 보이냐고 물으셨죠? 아니요. 작아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힘들어도 다시 산에 오르자 다짐하고 언젠가 또 이런 이야기를 선택할 것 같아요.

● 평소 다양한 장르를 신중하게 소화하는 캔맥주 님의 모습을 보고 노력하는 ‘다독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은 언제부터 즐겨 읽으셨어요?


저 정말 책을 안 읽고 사는 대한민국 사람이었거든요. 대학에 다닐 때도 전공 서적 외 책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말하면, 지금 제 주변의 책 지인들이 놀라시더라고요. ‘정말?’ 하면서요. 네, 정말요. ^^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책을 즐기기 시작한 건 한 5년쯤 된 것 같아요. 우연히 모교 구내서점에 갔다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잠깐 읽었는데요. 서서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바로 사 들고 나왔어요. 그때부터였어요.
지금도 저는 책을 편식하고 많이 읽지도 못하지만, 책을 옆에 두고 늙어가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있어요.


●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와 하이타니 겐지로의 『상냥하게 살기』를 같이 읽고 있어요. 내키는 대로 두 책 중 손에 잡히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스토너』는 한 남자의 평범한 일생을 담았어요. 심심한 듯 들릴 수 있는데, 오히려 그의 평범한 삶이 너무 와 닿아요. 이 책의 홍보 문구에서 ‘사는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다.’라고 하는데요, 딱 그거였어요. 우리 사는 모습과 너무 닮았어요. 그래서 뭉클하게 공감하게 돼요. 『상냥하게 살기』는 하이타니 겐지로가 사십 대에 발표한 육십사 개의 산문집이에요. 나중에 그가 아와지 섬으로 이주한 후의 일상도 들려주는데, 진지하면서 재미있어요. 문득, 하이타니 겐지로가 좀 엉뚱한 아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이런 선생님을 만났다면 조금은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게 돼요.


● ‘펜벗’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펜벗에 선정되고 나서 궁금했어요. 매달 어떤 주제로 새로움을 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처음부터 선정된 주제가 저의 기대만큼 새롭거나 신선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반전이었어요. ‘처음’, ‘겨울’, ‘그 남자 그 여자’ 이런 주제가 어떤 책을 떠올리는데 상당한 고민과 관심을 두게 하더라고요. 어떤 책을 골라 볼지 이렇게 많이 고민해본 적이 정말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보면 참 평범한 주제일 수 있잖아요. 일상에서 늘 떠올릴 수 있는 주제인데, 이 평범함이 비범함을 만들고 있었어요. 책에 대한 느낌과 의미가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의 펜벗이 좋아요.
굳이 소박하게 바라는 점 한 가지라도 말해보라면, 펜벗의 주제가 조금 더 친근해져도 좋을 듯해요. 예를 들어, ‘이 주인공만 보면 욕이 나온다.’ 같은 주제요. ^^


오늘의 책을 리뷰한 '캔맥주'님은?

책을 좋아하고 싶어서, 책을 읽어요. 내일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한 페이지를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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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절망의 구렁텅이에 있다면

 

에밀 시오랑 |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 챕터하우스 | 2013

 

걸을 때마다 절망과 고통에 부딪히는 시대다. 하여 많은 이들이 환멸의 삶을 살고 있다. 길을 잃은 양처럼 목자를 찾는다. 불안과 허무로 채워진 삶의 의미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인문학과 철학을 향한 관심의 급증을 보면 그곳에 무언가 해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에밀 시오랑의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는 어쩌다 읽게 된 책이다. 그러니 나는 에밀 시오랑의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 알지 못한다. 때문에 그의 사색에 더 쉽게 흡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에 쫓기는 듯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유를 선물하는 책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무한 긍정이나 행복에 대해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죽음, 고통, 허무, 슬픔, 우울로 가득하다. 그것이 모두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고통에 대해 생각하고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에밀 시오랑은 ‘유’가 아닌 ‘무’ 를 통해 존재를 말하는 듯하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던 시절, 살아내기 위해 살았던 시절에는 죽음을 두려워했을까? 이런 구절을 마주하면서 죽음은 삶의 동의어구나 생각한다. 

 

삶의 구조 자체에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의 구성 속에 없음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을 없음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삶을 삶의 부정이라는 원칙 없이 생각할 수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곧 없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죽음은 ‘없음’ 이 결국 삶을 누르고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없음을 향하는 도정을 현재화한다. ('죽음에 대한 소고'중에서, 45쪽)

 

누군가의 죽음을 통해 나의 삶을 생각하니 말이다. 아니, 슬픔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는 여지없이 죽음을 생각하며 살고 있다. 다만 그것을 누가 알아차릴까 두려울 뿐이다. 하지만 슬픔의 얼굴은 표가 난다. 점점 깊어지고 넓어지는 슬픔에 표정은 잠식당하고 만다. 그리하여 결국엔 슬픔의 주제를 잃어버리고 에밀 시오랑의 말처럼 슬픔은 신비로 교체된다. 아무도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는 슬픔이라니...  

 

깊은 슬픔으로 충격을 받은 사람의 얼굴에서는 너무도 많은 외로움과 체념을 읽을 수 있어, 슬픔에 찬 얼굴은 곧 죽음이 밖으로 드러난 형상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슬픔은 신비로 향하게 된다. 그 신비는 너무도 깊어 슬픔을 수수께끼로 남긴다. 만일 신비의 등급을 매긴다면 슬픔은 무한하고 끝없는 신비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슬픔에 대하여' 중에서, 73쪽)

 

어제와 다르지 않는 오늘을 살면서 우리는 때로 수많은 어제를 그리워한다. 그때는 좋았는데, 그때가 행복했는데,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에 속한 삶이 아니라 오늘을 느껴야 한다고 에밀 시오랑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순간은 오늘인 것이다. 현재를 기억하고 현재의 나를 사랑하라는 말이다.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과거의 상처가 남긴 환부를 지켜보며 살기 때문이다. 그는 이별했던 순간, 무시당했던 순간, 부끄러웠던 순간을 현재의 순간으로 채울 수 있어야만 충만해질 수 있다는 걸 각인시켜 준다. 

 

영원한 현재는 실존이다. 영원한 현재를 경험하면서 실존은 자명해지고 확실해진다. 순간의 연속에서 떨어져 나온 현재는 없음을 벗어나 존재를 생산한다. 순간의 기쁨 그리고 사물의 온전한 있음이 주는 매력에만 관심을 쏟는 사람, 순간 속에 살 수 있고, 현재를 빈틈없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순간 속의 절대' 중에서, 155쪽)

 

모든 구절에 밑줄을 긋고 싶다. 아마도 이 책을 만나는 모든 이가 그럴 것이다. 주제마다 우울과 허무가 산재해 있지만 분명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 왜 나만 불행할까, 왜 나만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절망하는 이에게 나의 심연과 마주하게 만든다. 산다는 건, 그 자체가 고행이다.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지만 내가 느끼는 고통은 세상의 전부가 당연하다. 그럼에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감당해야 할 고통의 몫이 줄어든다. 안다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에밀 시오랑은 그것을 아는 사람이다. 

 

고통이 아무리 크더라도, 외로움이 아무리 깊더라도,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는 세상을 더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객관적 의미나 초월적이고 궁극적인 목표를 찾을 수 없지만, 존재의 다양한 형태들은 내게 언제나 슬픔과 희열의 원천이다.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이 우주의 궁극적 목적을 충분히 보상해주듯, 청명한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구름 조각이 나의 우울한 염세주의를 즐겁게 해주는 순간들을 경험했었다. 내면에 깊이 빠진 사람들은 지극히 미미한 자연의 광경에서도 상징적 의미를 발견한다. ('고통의 저주스러운 원칙' 중에서, 198쪽)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 는 제목처럼 곧 해가 뜬다는 명징한 사실을 잊고 살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만 살아갈 것이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어둠이 길어질수록 마주할 빛은 크고 눈부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고통과 절망의 삶에 지배당하는 게 아니라 삶을 지배하고 이끌 수 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선인장'님은?
그저 폭넓은 책읽기를 꿈꾸며 책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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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닫히지 않는 이야기의 문 -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소설가 에트가르 케레트

 

 

취재·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주변에 하나쯤은 이야기를 참 맛갈나게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똑같은 사건과 줄거리일지라도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라면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해지고 쫀득쫀득해집니다. 살을 더하거나 빼고 강약과 완급을 조절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하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음은, 그 다음은? 하고 성마르게 이야기를 재촉할 수밖에 없는데요. 이런 이야기꾼에게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려, 강도처럼 이야기를 요구한다면 어떨까요? “이야기 하나 해봐.” 라며 권총으로 위협하고 윽박지르면서 말이죠. 

 

“평소처럼 하면 되잖아.” 수염은 투덜대며 권총의 공이치기를 당긴다. “이야기를 하느냐, 두 눈 사이에 총알이 박히느냐야.”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수염은 농담하는 게 아니다. 나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11쪽,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중에서)

 

‘나’가 시작한 그 이야기가 궁금하시다고요? 그렇다니까요. 바로 그거거든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에 담긴 모든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다음은, 그 다음은?’이라는 마음의 소리를 반복하게 만들고, 그렇게 기발하고 통통 튀는 상상력으로 현실 안에서 초현실을 꺼내고, 초현실 안에서 현실이 떠오르게 하는 재주가 바로, 낯선 나라 이스라엘에서 건너온 작가 ‘에트가르 케레트’의 매력이라는 거죠. 그의 이야기,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반디| 작품은 그것의 태생적 배경, 즉 작품이 쓰인 시기의 역사적 상황, 작가의 성장 환경 등을 지니게 됩니다. 작가님의 작품 또한 이스라엘의 현대사라는 배경과 연관해 독해되곤 하는데요. 2013년, 한국 현대사의 자장 안에 있는 독자들에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로 묶인 작가님의 “주관적인 이야기”가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다가가길 바라시는지요?

 

에트가르 케레트| 지리적으로 멀리 사는 독자들이 최고인 것 같아요.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나라에서 살고 있는 저자신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그 분들이 소설에서 발견하시거든요. 저는 독자들한테 이스라엘의 어떤 면을 가르치고 싶은 게 아니라, 스토리를 같이 나누고 공감하고 싶을 뿐입니다.

 

반디 | 표제작인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작가의 집에 괴한들이 들이닥쳐 이야기를 해 보라며 종용하는 내용의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첫 번째 순서로 하여 나머지 각각의 소설들이 배치된 점이 흥미롭습니다. 꼭 ‘천일야화’ 같기도 하고요. 다른 점이라면 책에 실린 이 소설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개별의 이야기라는 것이겠죠. 그 중에서도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이 이야기들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모든 이야기들을 시작하게 한 작가님의 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이 책이 쓰여진 때는 개인적으로 제 삶에서 매우 특별한 시기였습니다. 소설을 쓰는 사이에 결혼도 하고, 담보대출로 아파트도 얻고, 아이도 생겼거든요. 이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글을 쓰는 새로운 방식을 찾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써나갈 이야기가 과연 독자들에게 충분히 다가갈 지를 확신하는 데에도 시간이 조금 걸렸고요. 

 

표제작은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계기가 된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이야기를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는 인물이 처한 환경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인물의 복잡미묘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됐거든요. 말하자면, 객관적인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는 거죠. 객관적인 사건일지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니까요. 동일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트라우마로 남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살게 되는 것처럼요. 그렇기 때문에 저는 삶에서 특정 사건이 일어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 사건을 통해 주인공이 어떤 강렬한 감정을 느꼈느냐에 더 주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글에서 사냥을 하는 사람보다 아파트를 파는 부동산 중개업자들의 삶이 훨씬 흥미로울 수도 있고요.  

 

제목인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은유합니다. 이 변화가 인물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고요. 예컨대, 잘 살아가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제 삶의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누구인지는 몰라요. 그저 문을 여는 순간 눈앞에 또 다른 삶이 펼쳐지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제가 부모가 되면서 다른 생명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한 변화가 이 책에도 반영되었다고 봅니다. 

 

반디| 그런가 하면, 모든 이야기의 시작에는 이야기 자체가 지닌 힘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는 누군가의 삶에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될 테니까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를 읽으며 무엇보다 강하게 남은 인상 또한 그것이었는데요. 직접 이야기를 만들고 쓰시는 작가님께서도 이 이야기의 힘을 느끼신 경험이 있을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은 일화가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사실 저는 작가로서 책을 출판하기 전부터 이야기에 힘이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어렸을 때의 일인데요.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주먹으로 남자를 때리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몰랐지만 저는 그 상황에 대한 저만의 이야기를 지어냈습니다. 얼굴을 맞은 남자가 여자의 이복동생이었는데 어머니가 죽고 화가 나서 때린 거라는 식으로 맥락을 만들면서요. 이야기를 지어냄으로써 폭력을 중화시켰던 경험이죠.

 

 

반디|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의 단편들에선 일상이 재기발랄하게 묘사되는 상황에서도 삶의 비의가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삶이란 땀을 흘리는 것, 삶이란 지랄맞게 잊을 수 없는 아픔”(190쪽, <치핵>)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하지만 인물들은 이런 삶일지라도 거부하지 않고 희망에 좀 더 가까이 가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픔을 “살아 있는 느낌”(58쪽, <아침을 건강하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도 보이고요. 아픔 자체인 현실에서 문학의 역할, 작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사람들은 보통 기쁨과 고통, 두 가지로 감정을 구분하곤 하는데, 저는 뭔가를 느끼는 상태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한 상태로 구분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놀이공원을 갔다가 그곳을 나서면서, 누군가는 기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아무 감정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의 시간으로 아무것도 느낀 게 없다면 티켓을 낭비한 게 되겠고요. 물론 저 또한 삶에서 기쁨을 느끼는 편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어떤 일로부터 고통을 느낀다고 해서 제 삶 전체를 고통이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에서 기쁨만을 따로 분리해 살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제가 아들한테 늘 하는 이야기가 ‘네가 원하지 않는 음식은 먹을 필요가 없지만 항상 모든 것을 맛보도록 하라’는 겁니다. 음식의 다양한 맛을 느끼듯, 삶이 가진 다양성을 충분히 활용하라는 의미죠.

 

반디| 많은 단편들에서 ‘거짓말’이 나오는데요. 기본적으로 허구인 소설 속에 거짓말로 이야기를 꾸며내는 인물이나 그 거짓말로 만들어진 또 다른 세계가 등장하는 순간, 독자의 입장에선 허구인 이야기와 거짓말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야기와 거짓말에 대해, 작가님께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저에게 있어 소설(fiction)은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이야기(story) 혹은 거짓말을 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거짓말이 있는데요. 어떤 상황을 모면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이 있는가 하면, 동정이나 연민 같은 인간적 감정이 작용해 타인을 보호하기 위한 거짓말도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우리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면, 누군가에게 그 삶은 지금보다 조금 더 쉬워질 수 있지만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에게는 삶이 더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살면서 거짓말을 하지만 의도는 거의 선한 것이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허구인 이야기는거짓말로 점철되어 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제가 가장 진실해질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제가 쓰는 이야기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이때 거짓말과 진실,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경계를 두기보다는 그 뒤에 있는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선한지 악한지에 대해 더 중점을 두는 편이고요.

 

반디| 개인적으로 <거짓말 나라>나 <문예 창작> 같은 경우는 결말에 이르러 아쉬울 만큼 더 보고 싶은 소설이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이어질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는데요. 그만큼 이야기 내에 또 다른 이야기가 가지를 치는 식으로 쓰인 것이 꽤 있습니다. 특히 이것을 아주 짧은 단편 소설 안에서 시도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아무래도 단편소설은 형식상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기에 한계가 있을 텐데, 그럼에도 단편소설 쓰기를 선호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개인적으로 ‘선호’한다는 말은 쓰고 싶지 않아요. 저도 기꺼이 장편소설을 쓸 용의가 있긴 합니다. 출판업자도 좋아하고, 제 은행잔고에도 도움이 될 테니까요. (웃음) 하지만 단편소설을 쓰는 이유는 그것이 제가 이야기를 쓸 줄 아는 유일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결말은 작가인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 스스로가 결정한다고 느끼는데요. 예컨대, 어떤 문을 향해 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 문이 제 앞에서 닫히면서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있는 이야기가 끝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르는 거죠. 이렇듯 저는, 소설이 끝나도 끝나지 않는 이야기의 느낌을 갖는 게 독자들에게는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쓰기-읽기가 작가와 독자의 지성이 만나는 관계라고 본다면, 독자 나름대로 다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스스로 생각해보는 게 엄격한 틀에서 쓰여진 이야기를 접하는 것보다 좋을 테니까요.

 

반디| 이야기를 쓰는 게 어떤 방식으로든 진실에 다가가는 작업이라면,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독자가 글로 쓰인 소설을 경유해 작가님께서 전하고자 하는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시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독서는 작가와 독자가 매우 친밀해질 수 있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제가 타인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다면 사람들은 그 경험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처럼(작가님께서 실제로도 이 말씀을 하실 때 통역해주시는 여성 분의 얼굴에 본인의 얼굴을 아주 가까이 들이미셨더랬습니다^^) 독자들 또한 자신만의 상황이나 감정을 갖고 책을 읽을 겁니다. 그래서 같은 책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독자마다 달라질 수밖에 없고요. 예를 들어, 제가 쓴 한 편의 이야기를 두 명의 감독이 각각 로맨스와 호러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같은 이야기인데도 로맨스 영화를 만든 감독은 흥미롭고 재미있게 느꼈고, 호러 영화를 만든 감독은 무서웠다고 해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는 진실은 외부에서 보는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라 독자들 각자가 자기 삶과 관련해 질문을 이끌어내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진실인 거죠. 

 

반디| 소설집 안에는 작가님의 번뜩이는 상상력이 가득합니다. 평소에도 상상이나 공상을 많이 하실 것 같은데요. 불시에 찾아든 어떤 상상이 한 편의 소설로 완성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작가님만의 작업 방식을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소설 쓰실 때의 습관이라든지, 작업하시는 공간의 분위기 같은 것도 궁금하고요.

 

에트가르 케레트| 저는 항상 다른 것들에 대해서 상상합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다른 이미지를 상상하기도 하고요.어떤 장소에서 무엇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 하는 생각들이요. 어릴 때도 공상이 많은 편이었는데, 제가 공상한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불편해하거나 당황스러워 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은행을 턴다든지,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다든지 하는 공상들은 점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게 되고, 제 사적인 감정으로만 남게 되었죠.

 

글쓰기 규칙 같은 걸 따로 정해 놓지는 않습니다. 매일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글을 쓰려면 저 혼자만의 장소가 필요합니다. 아들이나 아내가 있으면 글쓰기에 집중하기 힘들어서요. 장소만 있다면 그곳이 깔끔한 곳인지 지저분한 곳인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더운 나라다 보니 속옷 차림으로 쓸 때도 있고, 소설을 쓰면서 관련된 것들을 큰소리로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한 가지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예전에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외부 지원금을 받고 작가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작업을 한 적이 있습니다. 창밖에 숲이 보이고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는데요. 한 번은 그곳에 초대된 친구가 저한테 묻더라고요. ‘네가 글쓰기를 할 때 창밖의 아름다운 숲은 보지 않고 변기를 쳐다보더라. 왜 그랬니?’ 그 질문을 받고 제가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닌데 글을 쓸 때는 물리적인 실제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글을 안 쓸 때는 저도 아름다운 경관 안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글을 쓸 때만큼은 물리적인 장소가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반디| 이스라엘은 세계에서 가장 뜨겁고 민감한 곳 중 하나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래서 타국의 사람들에겐 이스라엘의 문학작품보다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사건이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것도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소설가로 산다는 것이 작가님께 어떤 의미일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이스라엘이 분쟁과 갈등이 많은 지역이긴 하지만, 살기에는 나쁘지 않은 곳이고 글쓰기에는 더없이 좋은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이야기는 갈등관계와 다양성에 기반을 두고 쓰여지는데, 이스라엘만큼 갈등관계가 많은 곳도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야기를 쓰려고 하는 사람에게 이스라엘은 천국과도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가끔 상상을 하게 되는데, 공항에서 여권 검사를 할 때 좋은 이야깃거리가 있는지를 보고 통과를 시켜주는 겁니다. (웃음)

 

반디| 살만 루슈디, 아모스 오즈, 조너선 사프란 포어, 얀 마텔 등 동시대 각국의 작가들에게 호평을 받으셨습니다. 작가님께도 한 사람의 독자로서 호평을 보내고 싶은 작가가 있을 텐데요. 동시대에 주목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면, 해당 작품과 그 이유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에트가르 케레트| 동시대 유대계 작가들과 매우 인상적인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와 ‘마이클 샤본’ 등인데요. 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정체성입니다. 상대적으로 이스라엘 작가들에게서는 이와 같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별로 없는데, 저의 경우는 오히려 외국에 사는 유대계 작가들에게 더 친밀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반디 | 정체성의 문제를 말씀해주셨는데요. 자국 내 작가들이 느끼는 정체성과 이주한 작가들-디아스포라-이 다른 나라에서 고민하는 정체성은 그 본질에 있어 차이가 있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정체성 문제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디아스포라 유대인에게는 정체성의 문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질문을 항상 하게 되니까요. 만약 내가 유대계 미국인이나 유대계 프랑스인이라면 어느 쪽 정체성에 더 가까운지, 자신을 규정하는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문학에서도 자연스럽게 그런 주제를 쓰게 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죠. 이스라엘인이 곧 유대인이니까요. 그래서 이스라엘 문학에서는 개인적인 정체성 문제보다 집단적인 이슈, 어떤 것이 국가에 이해득실을 가져오는지를 고민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제 경우에는 심리적으로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더 가까이 느끼는데요. 굳이 정체성을 구분하자면 제 자신이 이스라엘인이라기보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더 강하게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어떤 그룹에 속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스라엘에 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어떤 측면에서 나와 맞지 않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동질감을 느끼는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디|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서 비롯되는 개인의 감정을 중요시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정체성 문제에 대한 작가적 관심이 국가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의식과 이어진다고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에트가르 케레트| 대개의 사람들이 국적에 따른 정체성을 당연시하지만, 제가 쓰는 이야기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국적이 본질적으로 내재적으로 설정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늑대는 그저 한 마리의 늑대로 살아갈 뿐, 자기가 어떤 군락에 속해 있는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요. 사실상 국가라는 형태가 역사에 등장한 지는 얼마 안 됐고, 그 전까지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부족 형태로 살았잖아요. 이 국가라는 개념을 아파트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파트에 사는 세입자들이 공용 구역 청소를 얼마나 자주 하고, 침입자로부터 어떻게 사람들을 보호할 지 다같이 고민하는 것처럼, 국적을 선택하는 일도 같은 식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거죠. 유대인은 꼭 이스라엘계가 아닌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이와 같이 국가와 연관된 자기 정체성 문제에서 보다 자유롭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제가 디아스포라 유대인에 대해 감정적으로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그들의 문화가 개별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코스모폴리탄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고요.

 

반면에 이스라엘처럼 국적을 중요시 여기는 나라에 사는 것은 심리적으로 부담이 됩니다. 제가 ‘텔아비브’의 작은 동네에서 살았는데요. 여섯 살 때 축구 토너먼트 경기를 보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게 태어나 처음 보는 축구경기였는데, 저희 동네 팀과 다른 동네 팀이 겨루는 경기였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보다 보니 다른 동네 팀이 신사적인 태도로 경기를 더 잘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쪽을 응원했는데, 선생님이 왜 다른 쪽을 응원하느냐고 해서 반발심을 느꼈었습니다.

 

또 제게는 형 한 명과 누나 한 명이 있는데, 형은 무정부주의자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건국이 정당화될 수 없고, 그래서 아랍 국가들 사이에서 소수인종으로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누나는 신앙심이 굉장히 깊어서 종교지도자가 곧 정치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고, 열한 명의 아이와 열 명의 손자를 갖고 있는 분이죠. 그런데 이렇게 형제 자매와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제 형제 자매는 모두 친절하고 따뜻하고 똑똑한 사람들이니까요. 오히려 제가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는 제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탈세를 하기도 하니까요. 말하자면, 사람을 볼 때 개인을 바라보지,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죠.

 

반디| 소설뿐 아니라 영화도 연출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작가님의 상상을 구현하는 데 있어, 소설과 영화 각각의 매력이 무엇인가요? 

 

에트가르 케레트| 영화의 매력은 여러 사람이 협업한다는 데 있습니다. 애초에 제가 글쓰기를 시작한 것도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 것인데, 글쓰기 자체는 작가가 혼자서 해야 하는 외로운 작업이잖아요. 그래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할 수 있는 연극이나 영화에 관심이 생기고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본질적으로 저는 다른 사람과 일하면서 느끼는 연대감을 원했고, 그런 측면에서 영화가 큰 매력으로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일하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갖을 수 있저는 일하는 사람들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기.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사람과 일하기를 선호하는데, 재능이 부족하더라도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과 일하고 싶습니다. 

 

반디|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만큼 다양한 영역에 관심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한국의 소설이나 영화, 혹은 그 밖의 문화를 접해보셨나요?

 

에트가르 케레트| 부끄럽게도 한국에 대해 거의 모른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책을 읽은 적은 없지만, 굉장히 훌륭하고 유명한 한국영화 제작자들이 만든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호기심도 생기고 한국문화에 대해 배워야 할 필요성을 느껴져 앞으로 한국에 대해 더 배워볼 생각입니다.

 

에트가르 케레트(Etgar Keret)

 

이스라엘 젊은 세대의 가장 큰 지지를 받는 단편의 귀재이자 <뉴욕 타임스>로부터 '천재'라는 찬사를, 살만 루슈디, 아모스 오즈, 얀 마텔, 조너선 사프란 푸어 등 동료 작가들의 극찬을 받은 동시대 가장 독창적인 작가. 1967년 이스라엘 텔아비브에서 태어났다.

 

1992년 소설집 《파이프》로 데뷔했다. 두번째 소설집 《미싱 키신저》로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후 정체성과 사랑에 대한 고뇌, 고독감 등을 초현실적으로 그려낸 단편들을 발표해 카프카에 비견되었다. 《신이 되고 싶었던 버스 운전사》를 비롯해 《냉장고 위의 소녀》《네 편의 이야기》 등 문학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여러 소설집이 35개국 32개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는 여덟번째 소설집으로 기발하고 독창적인 스타일이 무르익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스라엘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2012년 미국에서 여섯번째로 번역 출간되어 그해 아마존 '올해의 책'에 선정된 것은 물론, 전 세계 22개국에 판권이 팔리는 등 세계적인 작가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밖에도 몇 권의 만화책을 공동 집필하고 어린이책을 썼으며 본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영화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다른 예술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어 몇몇 단편이 그래픽 노블 《시차증》《가미카제 피자집》으로 묶여 나왔고, <리스트 커터스―어떤 사랑 이야기>의 원작인 중편소설 〈크넬러의 행복한 캠프 생활자들〉을 비롯해 40여 편의 작품이 영화화되었다. 그 자신도 영화에 조예가 깊어 아내와 공동 연출한 <젤리피시>가 2007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했고 지금까지 영화 작업을 계속해오고 있다.

 

이스라엘 출판협회에서 수여하는 플래티넘 상, 총리상 문학 부분, 문화부장관상 영화 부분을 수상했고 프랑스 문화예술 공로훈장 슈발리에를 수훈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미란다 줄라이가 수상하기도 한 국제적 권위의 단편문학상 프랭크 오코너 국제 단편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현재 네게브의 벤구리온 대학교와 텔아비브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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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 화가의 꿈, 인간의 욕망




 

볼프강 카이저 |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 아모르문디 | 2011

 

현대의 다양한 예술분야를 접하다 보면 '그로테스크(grotesque)'라는 용어와 심심치 않게 마주치게 된다. 그런데 그로테스크하다는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 정도 특성을 파악할 수 있어도 막상 느낀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할라치면 조금 난감해지는 게 사실이다. 비록 사전은 '그로테스크'에 대해 '터무니 없는', '기괴한'이라 정의하고 있지만 그로테스크한 작품들을 감상한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정의 역시 충분치 못함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반갑게도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는 그로테스크의 발생에서부터 현대적 의미로의 정착까지 수세기에 걸친 성장 과정을 미술과 문학 작품 속에서 추적하고, 이를 통해 그로테스크가 내포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포착해 그 의미를 구체화해 나가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다소 어렴풋하게나마 이어져 온 용어의 역사에 기대어 그로테스크가 과연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것이다. (26쪽)

 

그로테스크는 15세기말 이탈리아 곳곳에서 발굴된 고대 장식미술을 지칭하던 용어로 이탈리아어 '그로타(grotta, 동굴)'에서 유래했다. 당시 바사리(Vasari)를 위시한 여러 비평가들은 자연의 원리에 어긋난 이 장식물들에 대해 혹평을 했지만 예술가들의 새로움을 향한 의지를 제어할 수 없었으며 이후에도 혹평과 예찬의 대결구조를 유지하면서 어엿한 예술 양식의 하나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로테스크의 기원에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것이 아름답고 화려한 아라베스크와 뚜렷이 구분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각자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때로는 모호하게 동일한 양식인 것처럼 간주되다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독립된 양식으로 정착되었는데 이즈음 그로테스크를 미학의 범주로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의 그로테스크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그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으며 과격한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변화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다듬어졌다.

 

그로테스크가 미학적 대상으로 탐색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고급 예술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자연을 닮은 것을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15~18세기 사람들, 이후 19세기 헤겔에게는 반인반수나 동물에서 식물로 변이되는 기이한 이미지들이 저급한 예술적 유희로 비춰졌을 법도 하다. 더욱이 그로테스크는 한때 섬뜩함 보다는 '우스꽝스러운'의 뉘앙스를 주는 의미로 사용된 적도 있으며 미학의 범주로 고려된 배경에도 캐리커처의 활성화에 힘입은 바 있어 호응도와 위상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그로테스크가 유럽 각국으로 전파되면서 발생한 미세한 사전적 의미와 연극(특히 질풍노도 드라마라 불리는 것)이나 기타 예술영역을 통해 대중과 친숙했던 그로테스크의 일면을 상세히 언급해 나간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저자의 견해와 더불어 다른 학자들의 견해도 함께 들을 수 있어 그로테스크에 대한 지식의 기본을 갖추는 데는 더없이 훌륭한 저술이다.

 

그로테스크는 미술분야의 라파엘로를 필두로 악마숭배주의의 보스, 보스에게서 영향을 받은 브뤼헐 등의 화가들을 거쳐 현대의 데 키리코, 달리 등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왔고, 문학에서는 괴테, 위고, 포우, 호프만, 뷔히너, 카프카, 토마스 만 등 이른바 대 문호들을 통해 그 맥을 이어왔다. 이렇게 예술의 거장들이 그로테스크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데에는 인간의 힘(상상력)만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려는 욕망이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16세기 그로테스크를 지칭하던 또 다른 이름이 '화가의 꿈(sogni dei pitton)'인 것을 보면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를 벗어나 기괴한 이종교배를 시도하고 꿈같은 비현실적 공간을 추구하는 주체가 '화가', 더 나아가서는 인간임이 뚜렷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저자인 볼프강 카이저는 그로테스크의 창작이 "현세에 깃들어 있는 악마적인 무언가를 불러내어 그것을 정복하는 일"(309쪽)이라고 정의하고 그로테스크가 공포와 동시에 은밀한 해방감을 맛보게 해준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악마적인 것을 극복하겠다는 용기는 가상하지만 인간의 창조가 삶의 공포에서도 비롯될 수 있다는 서글픈 측면도 발견된다.

 

공포로 가득한 인간 내면의 모습은 볼프강 카이저가 설명하는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에는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상 미술분야는 그로테스크의 태동기와 개념의 확장 부분에 집중적으로 언급되며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낭만주의 시대부터는 문학 및 연극 작품들, 그리고 미학이론들을 위주로 하고 미술은 간헐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저자가 문학비평가인 덕에 각 문학작품은 그로테스크의 측면에서 상세히 분석되는데, 이를 통해 그로테스크 개념의 구체화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담긴 인간 본성에 대해서도 심도있는 해설을 들을 수 있어 유익하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만한 작품은 모든 종류의 그로테스크를 작품세계에 담았다는 그로테스크의 대가 호프만의 작품과 뷔히너의 <보이첵>이다. 그 중 뷔히너의 <보이첵>은 그로테스크의 전성기인 낭만주의 시대의 작품으로 현대문학(희곡)과 비교해 손색이 없는 세련미와 비상함을 갖췄는데, 단순히 그로테스크한 모습을 문학적으로 (외양)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구조, 인물의 성격과 심리에 활용하고 있어 조금은 난해하겠지만(작품 '전체'를 읽으면 난해하다) 저자의 발췌부분만 읽는다면 크게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그로테스크 문학의 백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그로테스크는 그 안에 내포된 다양한 요소들이 역사 속에서 축소 또는 확장되는 가운데 유동적으로 존재해 왔지만 이 용어를 하나의 단어로 귀결시키는 것은 합당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현재 대중문화에까지 파고든 그로테스크의 위세를 보면 이것이 또 어떤 의미로 변형되어 다가올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통해 그로테스크의 근원과 본질을 이해하고 여기에 반영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한다면 향후 미적 체험이 더 깊어지는 것을 느끼리라 확신한다.

 

그로테스크에 관한 한 매우 밀도 있는 책이었고, 예술가들에게 지적 호기심과 영감을 불러일으킬만한 소중한 자료들이었다.

 

 

- 종교적 색채가 보이는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천년왕국>, 창백하고 영혼이 마취된듯한 느낌이다(좌)
- 그로테스크가 장식미술로 태동할 시기의 작품, 성당의 벽화이다, 루카 시뇨렐리의 <엠페도 클레스>(중상좌)
- 장식미술에서 좀 더 발달한 일명 만곡 그로테스크(중상우)
- 인상파풍으로 그려진 제임스 앙소르의 <음모>, 색채는 밝고 화려하만 우스꽝스러움과 사악함이 결합해 묘연하다(중하)
- 마리오네뜨(꼭둑각시)를 연상시키는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불타는 기린>(우)

 

* 상기 이미지는 본 도서에서 전체 혹은 부분 발췌하여 재조합 하였으므로 원본과는 구성과 사이즈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이향*'님은?
일흔살까지 1만 권의 책을 읽고 1백 권의 책만 소장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로 출발했지만 아직은 5천 권을 읽고 1천 권을 추려내기에도 벅찬 평범한 햇병아리 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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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감책 No.2] 책과 사람, 그리고 반디&루니스(반디)

나감책 두 번째 주자는 바로 반디입니다. 반디 가족을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에, 제가 먼저 쑥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많은 분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은 날이기도 하고요. 나감책의 열기가 두 번째 순서에서 식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ㅋㅋ. 자 그럼, 고고씽! ~~~/(^0^)/

달력 한 장 남겨놓고 한 해를 돌아보면 의미 없는 해는 없습니다. 07년에는 바르고 열정 넘치는 영화기자를 꿈꿨고, 08년에는 오리무중 현실에서 10년 이후의 미래를 ‘처음’ 상상했습니다. 앞의 두 해 모두 소중한 시간이지만, 2009년은 조금 더 특별합니다. 생명이 움트는 계절 사월, 반디앤루니스에 입사를 하게 됐고, 그때부터 책과의 인연은 더욱 소중해지기 시작했습니다.  

2009년을 시작하며 ‘책을 열심히 읽자’고 마음먹었습니다. 1월부터 매달 10권 이상의 책을 읽으며 미래의 어느 순간을 꿈꿨습니다. 입사 후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담당하는 북에디터로서 매달 10권 가량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4월 전후의 독서 모습은 좀 다릅니다. 이전에는 ‘공부’에 초점을 맞춰 인문, 사회, 철학, 경제 책을 읽었다면 이후에는 (복합적 의미로서) ‘재미’를 위해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알지 못하던 책 읽는 재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알게 된 건 책 읽는 재미뿐만이 아닙니다. 책을 통해 세상을 만나고, 사람을 만나게 됐습니다. 기계치임을 별로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던 반디는 입사 후 처음 블로그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재밌습니다. 내가 쓴 글을 남이 봐주는 것도 즐겁고, 이웃 블로그를 찾아가 좋은 글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또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위해주고, 용기를 불어줍니다. 이렇게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줄 수 있는 게 무언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주는 기쁨’이란 거,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즐거움이 폭발(?)한 게 카페 ‘책을 좋아하는 사람(책좋사)’ 정모였습니다. 모두가 처음 만나는 사람들, 처음엔 어색하기도 했지만, 모두 반갑고 또 반가웠습니다. 다른 공간에 있지만 같은 시간 책을 읽는 사람들은 따뜻했습니다. (북크로싱에서 오우아님이 선물해주신 ‘도(스또예프스)끼’의 <죄와 벌> 지금 숨넘어갈 정도로 엄청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만남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날을 계기로 서울이 아닌 부산, 전주, 대구 등에서 새로운 만남을 약속합니다. 평생 만나지 못할 사람들, 가보지 못할 곳들이 책을 통해 소중한 인연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책에게 하고 싶은 말, 반디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없네요. “고맙습니다.”

글 휴게소!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보시면 ‘컨텐츠팀 에디터 안늘’이라고 나오는데, 그거 접니다. 제 성이 ‘안’(安)이고, ‘늘’은 필명(?)쯤 되는데, ‘늘’은 시골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입니다. 어머니가 ‘늘아~ 늘아~’하면서 부르는 소리가 좋아, ‘늘’로 했습니다. ^^;

[나를 감동시킨 책 5]

 

 


<책과 노니는 집>, 이영서, 문학동네, 2009
- 동화라 생각하고 가볍게 책장을 열었다가, 책을 덮을 때 즈음 가슴이 묵직해진 작품입니다. ‘필사쟁이’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위고, 책을 통해 세상을 배워가는 소년 장이. 그는 책을 통해 운명을 넘어선 사람에 대한 사랑을 배웁니다. 책방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 작가의 책 사랑이 각별해서 그런지, 책장 사이사이 책 향기가 가득합니다.

 

 

<푸코 & 하버마스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하상복, 김영사, 2009
- 철없고 객기도 없던 시절, 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도서관을 들락거릴 때가 있었습니다. 이 책을 들었을 때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났습니다. 책은 푸코와 하버마스의 철학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으며, 그들의 철학이 지금 여기에 어떻게 살아 숨 쉬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김영사의 ‘지식인마을’ 시리즈로,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무척 기대가 됩니다.

 

 

<검은 새의 노래>, 루이스 응꼬씨, 창비, 2009
-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바로 저기 있는데,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얼굴이 까만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사랑을 했고, 사람들은 나를 ‘강간범’이라 부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흑인의 비참한 삶과 작가가 묘사하는 아름다운 사랑이 극렬한 대비를 이뤄 더욱 슬픈 소설입니다.

 

 

<내 인생의 만화책>, 황민호, 가람기획, 2009
- ‘애냐? 만화 보게?’라고 말하는 어른들의 필독서입니다. 만화 주인공들은 사랑받기 전에 먼저 독자들을 웃게 하고,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또 민중의 대리인이 되어 부정한 권력을 꼬집습니다. 이런 만화의 재미를 모르는 건 무조건 손해입니다. 저자의 각별한 만화 사랑은 절로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듭니다.   

 

 

<고등어를 금하노라>, 임혜지, 푸른숲, 2009
- ‘바닷가에 살지 않으니 고등어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당찬 가족. 처음에는 그들의 환경 사랑, 에너지 절약 정신에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돈, 물질보다 가족과의 시간을 택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르게 사는 삶’에 대해 꿈꿀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주체적이면서도 몹시 따뜻한 자녀들의 풍경은, 눈물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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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로 변해가는 슬픈 소녀 아이다> - 상상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

 

알리 쇼, <유리로 변해가는 슬픈 소녀 아이다>, 살림출판사, 2009


<유리로 변해가는 슬픈 소녀 아이다>. 제목을 보며 ‘아니 어떻게 사람이 유리로 변해? 말도 안 된다’라고 현실적인 생각을 먼저 한다. 표지를 보니 온통 하얀색이다. 어린 소녀의 모습도 전체적으로 하얀색이고, 뿔이 커다란 순록도, 새장 안의 나비도, 나무의 잎사귀도 모조리 하얀색이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 책장을 넘기기도 전에 표지만으로 내 기분은 이미 우울하고 슬퍼졌다. 영국의 안데르센으로 불리는 알리 쇼는 이 책에 어떤 동화 같은 이야기를 풀어 낼 것인가? 두근두근 가슴이 떨려온다.

세인트 하우다 랜드에 사는 마이다스 크룩은 친구의 꽃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취미로 사진 찍는 것을 즐긴다.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사진 찍는 것이 본업이고, 꽃집의 일이 취미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빛을 쫓아 사진을 찍는 것을 즐긴다고 말하는 마이다스이지만, 내 생각에는 빛과 함께 자신의 마음을 사진 속에 가둬 두는 듯하다. 마이다스가 숲에서 사진을 찍다 우연히 만난 아이다 맥클레어드는 아주 커다란 아빠 부츠를 신고 할머니처럼 조심스레 걷는다.

어린 시절의 우울한 기억으로 친구 구스타브와 그의 딸 덴버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서 마음을 닫고 살아가는 마이다스는 아이다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아이다가 항상 신고 다니는 큰 부츠의 비밀이 궁금해진다. 발가락 끝부분에서부터 서서히 유리로 변해가는 아이다는 자신의 병을 치료하고자 몇 년 전 잠깐 만난 한 남자(헨리 푸와)를 찾아 도시를 떠나 세인트 하우다 랜드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세인트 하우다 랜드는 차가움이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연 환경과 주인공들의 삶은 우울하기 그지없다. 책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 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관심하다. 심지어 가족마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삶을 나라면 과연 견딜 수 있었을까? 외지에서 섬으로 들어 온 아이다만이 밝고 활발한 성품으로 따듯함을 전해 준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지만 유리로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두려웠던 아이다는 자신의 치료를 위해 도움 주는 마이다스에게 마지막 연정을 품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섬 세인트 하우다 랜드에는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그 섬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모르는 일들이 아주 많이 일어난다. 깊은 숲 속의 연못에는 온 몸이 유리로 변해 버린 시체도 있고, 작은 나방의 날개로 열심히 날아다니는 작은 소도 있으며, 온 몸이 하얗다 못해 눈동자까지 하얀 새도 존재한다. 많은 비밀들이 일어나고 있는 이 섬에서 마이다스와 아이다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쉽게 술술 읽히던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책은 단순한 마이다스와 아이다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친구에게 무한한 응원을 보내는 구스타브와 마이다스의 우정이야기이고,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많은 것들을 보여주는 판타지이며, 마이다스와 아이다의 사랑이야기이다. 끝내 겉으로 표현되지 않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추리해야 하는 심리 소설이 될 수도 있겠다. 온통 비밀들로 둘러 싸여 있는 세인트 하우다 랜드의 이야기가 궁금할 것이다. 동화 같은 이야기 속으로 빠져 보자.

“아저씬 아저씨 머릿속 깊은데 들어 있는 걸 모른 척한 거야.
그리고 나는 머릿속 깊은 곳에서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이 놀이도 그래서 하는 거야.”   

- 덴버가 마이다스를 위로하는 말 中

오늘의 책을 리뷰한 ‘파란구름’님은?

제2의 사춘기인 30살 방황기를 보내고 있는 여자. 나를 위한 책읽기를 시작으로 가르치는 아이들을 위한 책읽기를 하고, 지인들을 책읽기에 빠트리는 여자. 누구나 편한 마음으로 들어와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쉼이 있는 공간(도서관)을 만드는 게 꿈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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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내게로 왔다> - 이들처럼 사랑하고 싶으세요?

 

이주향, <사랑이, 내게로 왔다>, 시작, 2008


‘이주향의 열정과 배반, 매혹의 명작 산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대학에서 철학을 흥미롭고 쉽게 가르치는 인기 높은 교수로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철학을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많은 호응을 얻었다는 작가의 평판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사랑에 관한 성찰적 보고서로 보입니다.

총 33편의 문학 작품 속 사랑이야기를 그녀만의 해석으로 싣고 있고, 거기에 가상 인터뷰를 통해 작품 속 주인공들(주로는 여성)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는 형식으로 책은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그 작품들을 읽으며 느꼈던 것들이나 궁금했던 것들을 그러한 형식으로 꾸며 자신의 생각들을 드러낸 듯한데, 참신하면서도 공감되는 부분이 꽤 많았지요.

물론 여기 나오는 33편의 문학 작품들을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대부분은 읽었던 작품들이지만 그 중 또 대부분은 이미 희미한 기억의 저 편에 머물러 있어 그것들을 되살리기가 쉽지 않았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이겠네요) 작가가 들려주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덧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상기되기도 했고, 또 작가의 친절한 해석으로 이미 한 편의 작품을 다시 읽어본 듯한 착각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랍니다.

갖가지 사랑의 유형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따라가다 보면 바로 그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우리가 꿈꾸는 황홀한 사랑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크게 착각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실체를 직면하는 듯한 느낌에 휩싸이기도 하고, 또 믿어왔던 사랑의 본질이 어느 순간 흔들리고, 해체되는 고통을 맛보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렇게나 찬란했던 사랑이 그보다 더 깊은 증오로 변하는 걸 보면서 우리는 사랑에 회의를 품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경험들이 왜 그저 문학 작품 속 이야기들로만 여겨지지 않고,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또 내가 원하는, 혹은 원하지 않는 나의 이야기라는 착각이 드는 걸까요? 그것은 우리 자신 안에 존재하는 사랑에 대한 환상, 다시 말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염원을 우리 모두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하기에 아프더라도 사랑을 하고 싶고, 찢어지더라도 가슴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난 후에 찢어지고 싶어 하는 거 아닐까요? 또 소멸할 지라도 그 단 맛을 단 한 번이라도 맛보고자, 우리는 기꺼이 우리의 전부를 거는 도박을 감수하는 게 아닐까요?

바로 작가가 프롤로그에서 밝혔듯이 고전 속의 주인공들은 사랑이 일깨운 열정과 기쁨과 슬픔과 질투와 분노와 두려움으로 자신을 배우고 생을 배워간 사람들이고, 그들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사랑 없는 평화보다 사랑 있는 갈등이 낫기 때문에, 우리들 또한 그러한 사랑을 맛보고 싶어 하는 그들과 똑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깨지더라도 기꺼이 사랑에게 다가가는 모험을 하는 거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니 이 책의 많은 부분을 공감하지만 제목만큼은 이렇게 고치는 게 어떨까란 생각을 해 봤지요. ‘내가 사랑에게로 갔다’로 말이죠.

결국 사랑이란 나 아닌 타인을 향한 나의 끊임없이 샘솟는 갈망과 열정의 표현, 또는 자신을 키우는 영양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책은 상기시켜 주지만, 동시에 그 갈망과 열정이 늘 아름답거나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때론 희생과 용기, 결단을 요구하고, 우리들에게 아픔을 주고,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러니 이 가을 사랑에 목말라 하는 이들, 사랑에 목숨 걸고 싶어 하는 이들은 바로 이들처럼 사랑을 배워나가고 생을 배워나갈 용기로 사랑에 직면해 보시죠. 세상에서 내려주는 사랑의 해석을 두려워 말고 각자의 방식대로 용기 있게 말입니다. 사랑의 실체를 직시하고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밤비’님은?
저는 캐나다 몬트리올에 살고 있고 책 읽기, 영화 보기, 사색하기, 여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곳 캐나다 몬트리올 한인학교에서 현지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있고,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캐나다, 또는 제가 살고 있는 몬트리올에 관한 소식을 고국에 계신 분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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