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에 해당되는 글 43건

  1. 2009.05.29 회의주의자 사전 - 이 땅에서 똘똘하게 사는 법
  2. 2009.05.28 노무현 내 마음의 대통령
  3. 2009.05.26 불멸의 신성 가족: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4. 2009.05.26 만화로 보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와인
  5. 2009.05.22 천국보다 아름다운 - 사랑
  6. 2009.05.20 [음반] 70-80년대를 풍미했던 뉴웨이브, 그 풍요했던 성찬의 재연
  7. 2009.05.20 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2)
  8. 2009.05.19 그늘의 발달 - 생의 태초의 순간을 갈망하며
  9. 2009.05.18 우리들의 하느님 - 평안하신가요?!
  10. 2009.05.15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 도서관에서의 한 때

회의주의자 사전 - 이 땅에서 똘똘하게 사는 법


로버트 T. 캐롤, <회의주의자 사전>, 잎파랑, 2007


skeptic : 회의주의, 회의주의자, 의심하는 사람

우리는 평소 많은 것들을 무심하게 믿고 넘긴다. 권위 있는 사람의 한 마디에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도 금세 수긍하고, 알쏭달쏭 믿기 힘든 일들도 언론기사가 나오면 그것이 사실인양 받아들인다. 그래서인가. 세상에는 비합리적 주장과 억지가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 오컬트나 미신, 특정 종교에 대한 맹종 등은 그 일부일 뿐이다. 정치나 경제, 심지어는 비이성적인 모든 것과는 거리가 있을 법한 과학에서도 터무니없는 설명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Sacramento City College의 철학교수인 로버트 T. 캐롤은 1994년부터 인터넷에 초자연적 현상, 미신, 오컬트, 초과학 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항목별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항목에는 그들의 핵심적인 주장을 소개하고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 비과학적인 사고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것이 회의주의자 사전의 시작이었다. 15년이 지난 지금은 700여 개가 훌쩍 넘는 엄청난 양의 진짜 사전이 되었다.

왜 회의주의자가 되어야 할까?

회의주의란 증거가 불충분한, 범상하지 않는 주장의 진실성에 의문을 가지고 엄격한 과학적 방법으로 검증 혹은 반증하려는 과학적 태도를 뜻한다. 즉 어떤 사건이나 이론이 엄밀한 과학적 방법, 특히 경험적인 관측이나 실험을 통해 증명되지 않고서는 그 사건의 사실여부나 이론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일반적으로 오컬트나 미신과 같은 비과학적인 설명이 그 타겟이 된다.

회의주의자 사전의 1차적 목표도 바로 UFO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 인류는 외계인에 의해 생겨났다는 라엘리안, 카드점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타로나 점성술 등 과학적 설명과는 거리가 먼 비합리적인 주장이다. 서양문화 속의 다양한 미신도 많은 항목을 차지한다. 기독교의 성물이나 기적의 존재, 마녀와 관련된 여러 가지 설명, 13일의 금요일과 같은 미신, 점성술과 타로점, 폴터가이스트와 같은 심령현상 등 이러한 이야기들이 그 어떤 문헌보다도 충실하게 수록되어 있다. (비록 그 신자들에게는 매우 불편한 이야기들로 가득하겠지만 말이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얼핏 과학적인 설명처럼 느껴지는 다양한 비과학적, 초과학적 주장들도 수록되어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일견 과학적인 설명처럼 들려 사람들을 현혹하고 순진한 믿음을 악용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 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모차르트 효과이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세 살 미만의 아이들에게서 뇌 발달이 증가한다는 솔깃한 이야기로 한 동안 국내에서도 그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음반이 쏟아져 나왔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효과를 입증할 어떤 증거도 찾지 못하고 있다.

 “모차르트 효과는 오늘날 과학과 매체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가지 사례다. 과학 저널에 실린 몇 문단의 암시가 불과 몇 달 사이에 보편적인 진리로 바뀌면서 결국에 가서는, 처음에 대중매체에 의해 자신들의 연구가 왜곡되고 과장되었다고 여기던 과학자들까지도 그 사실을 믿기에 이른다. 그런가 하면 돈 냄새를 맡은 다른 사람들까지 시류에 편승해서 그 혼란에 다시, 자신들만의 신화와 의심쩍은 주장과 왜곡을 더함으로써 대중을 농락한다... 그러고 나면 책과 테이프, CD, 연구소, 정부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 신화를 과학적 사실이라고 믿는다.” (모차르트 효과 Mozart effect, p.425)

확실하지 않은 정보와 이를 악용하는 상술에 이용당하는 모습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각종 다이어트 용품, 건강보조제의 효과를 설명하는 화려한 문구들은 잘 따져본다면 대부분 근거가 빈약하거나, 조작된 실험을 통해 나온 결과라는 것이 금세 눈에 띌 것이다.

최근에는 취업상담에도 많이 쓰이는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 성향측정법도 과학적인 설명과는 거리가 멀다. 칼 융이 제시한 네 가지 심리유형법을 근거로 사람의 성향을 총 16가지로 구분한 이 심리테스트는 일종의 오락을 될 수 있지만, 과학이라고 주장하기에는 그 근거가 너무 빈약하고 비합리적인 가정들로 채워져 있다. 대부분의 심리검사가 그렇듯이 애매모호한 설명은 누가 보아도 "이 것이 바로 내 모습이다." 라고 느낄 것이다.

과학적인 설명이란? 꼼꼼하게 따져보는 것!

회의주의자가 된다면 세상에 믿을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 대체 무엇을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과학(science, p.649) 항목을 보면 그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

"과학이론은 그 이론에 근거한 예측이 경험적 사실들에 의해 검증될 수 있는 논리적 결과물이어야 한다."

캐롤이 주장하는 회의주의자의 바람직한 태도는 바로 이 논리적 사고와, 검증가능성이다. 제대로 된 검증이 가능해야만이 과학으로 인정되는 이런 태도야 말로 진정 회의주의자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물론 이러한 태도가 지나치게 엄격하고 과학주의로 흐를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믿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 무엇보다도 과학적인 사고방식은 우리가 미신에 현혹되지 않고, 터무니 없는 주장에 흔들리지 않을 탄탄한 기초를 제공해 준다는 큰 장점이 있다.

회의주의자 사전의 이용법

가장 먼저 읽어야 할 것은 핵심적인 개념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다. 과학(science), 사이비과학(pseudoscience), 형이상학(metaphysics), 창조론(creation science) 같은 중요개념을 먼저 살펴본다면 훨씬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

잊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사전"이다. A 부터 Z 까지 알파벳 순서에 따라 나열된 이 사전을 꼭 처음부터 읽어내야 할 필요는 없다. 마음 내키는 대로 책장을 넘기다 흥미로운 항목에서 눈길을 멈추고 천천히 음미하면 된다. 한 항목을 읽고 나면 관련된 또 다른 항목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때로는 낄낄거리면서, 터무니없는 주장에 어이없어하면서 보는 사이에 어쩌면 회의주의자의 태도에 물들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말이다.

                                                                                                 - 도서팀 서현철(
babelfish@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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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내 마음의 대통령

 

이재영, <노무현 내 마음의 대통령>, 대청, 2002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이 땅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 당신을 그리며 눈물짓는 이들을 보며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요. 당신의 진심을 알아주는 이들의 눈물을 보면서 미소 지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눈물짓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곱절을 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이 땅의 대통령이었습니다. 당신의 영정사진 앞에서 오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 쉬고 있는 대통령입니다.

저는 당신을 좋아했습니다. 다른 이의 아픔에 울어주던 따뜻한 마음이 좋았고, 격 없이 툭툭 던지는 농담이 좋았습니다. 그런 당신을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당신 이름 뒤에 대통령이란 말이 따라붙을 무렵, 고통 받는 이들의 울분을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당신이 생의 끈을 놓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밀려왔습니다. 애정과 애증. 말 한 번 해본 적 없는 당신의 죽음이 왜 서글펐을까요. 그 이유를 찾고자, 당신을 쉽게 잊지 않고자 <노무현 내 마음의 대통령>을 들었습니다.

같이 아파함

당신은 제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했습니다. 부림(釜林) 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성공의 포장도로를 뒤로하고 약하고 상처받은 이들의 편에 섰습니다. 1987년 부산 2·7 집회 때는 시민을 보호하고자 군중과 군중 사이에서 연좌시위도 벌였습니다. 그리고 “박종철군의 죽음은 대공요원 한두 사람의 죄가 아니라 불의를 허용한 우리 모두의 죄”이며, “민주 정치 쟁취하자”고 외쳤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신은 경찰에 붙잡혀 갔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기죽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천성인가요. 아니면 굳은 의지였던가요.

사람들은 당신이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고 합니다. 중학교 1학년이었던 1960년 2월, 학교는 전교생을 대상으로 ‘우리 이승만 대통령’을 주제로 작문을 시켰습니다. 이때 당신은 “아무것도 쓰지 말자”며 ‘백지동맹’을 주동했다지요. 그리고 작문지에 ‘택도 없다’는 취지에서 ‘이승만 택통령’이라는 제목과 이름만 썼다가 교무실에서 벌을 서고, 끝내 정학을 받았습니다. 훗날 당신이 “어렸지만 부정한 일로 봤다”고 회고한 일입니다.

뜨거운 2002년의 기억

이 책은 당신이 새천년민주당 경선후보로 당선된 2002년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노사모를 중심으로 온/오프라인상에서 불었던 노란 바람, 그리고 극적인 경선후보 당선, 하지만 곧 찾아오는 당 안팎에서의 ‘노무현 흔들기’. 이 때 상황은 당시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던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당신을 지지하고 나설 때 썼던 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칼럼니스트로서의 활동을 접는 것은 칼럼니스트가 중립을 지켜야 하느냐, 마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갑론을박하며 시간을 보내기에는 지금 정치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장판이 너무나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노무현 후보의 사퇴를 둘러싼 민주당 내부의 정치적 공방은 민주주의라는 게임의 룰 그 자체를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어서 칼럼니스트이기 이전에 민주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더는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p 200, 유시민, ‘시사카페를 닫으며’)

노사모 회원들과 네티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생각도 했습니다. 당신의 경선 당선을 위해 평생 할 인사를 하루에 다 한 대학 교수, 광주에서 경선을 지켜보면서 눈물범벅이 된 노사모 회원들, 당신이 있기에 세상이 변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투표를 기다리는 이들까지. 그들의 이야기에는 눈물이 있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였겠죠. 광주 공항에서 나오는 길가에 매달린 리본과 풍선을 보면서 당신은 ‘가슴이 찡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당신은 많은 이들과 함께했습니다. 당신의 열정에 사람들은 희망으로 화답했습니다. ‘노무현’이기 때문에 NO가 YES가 됐습니다.

You have a dream

당신은 꿈꾸었습니다.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당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민 여러분! 당원 동지 여러분! 우리 함께 꿈을 현실로 만들어 봅시다.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봅시다. 불신과 분열의 시대를 끝내고 개혁의 시대, 통합의 시대로 갑시다. 우리 아이들에게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를 물려줍시다.”(p 228 '불신과 분열을 넘어 개혁과 통합의 시대로') ‘정의가 승리하는 역사’. 이것은 당신의 꿈이자 많은 이들의 꿈이었습니다.

아쉽고 슬픈 것은 이 책의 시계는 2002년에, 그리고 당신의 시계는 2009년 5월 23일에 멈췄다는 것입니다. 전 당신에게 궁금한 게 아직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당신이 이라크 파병을, 한미FTA를 추진한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제가 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이유를 들을 수는 없겠지요. 한 네티즌의 바람이 들려옵니다. 더 이상 바랄 수 없는 슬픈 바람.

“끝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부디 최선을 다해주십시오. 당신의 행보에 우리 서민들의 미래가 걸려있습니다 하나밖에 모르는 바보이지만 우직한 뚝심과 줏대가 자리 잡고 있기에 영원한 바보가 아닌, 그래서 아름다운 바보로 불리는 노무현 씨에게 가슴 속 한 표 던집니다. 부디 이 표가 5천 만의 기적으로 이어지기를…….”(p 33.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담배 한 대

그곳에는 담배가 있나요. 당신은 마지막으로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어 했습니다. 담배 한 대가 타들어가는 시간 5분. 당신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볼 수 있었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못합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경륜도, 용기도 갖지 못한 제가 어찌 그 짧은 시간에 당신을 다 추억할 수 있겠습니까. 대신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이 누린 영광뿐 아니라 그곳까지 가기 위해 견딘 힘겨운 시간들까지. 당신이 바랐던 모두가 행복한 삶도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이것이 당신을 고이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안늘(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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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신성 가족: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김두식, <불멸의 신성 가족>, 창비, 2009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개입 논란이 확산되고, 사법부의 신뢰가 떨어진 때라 사법부의 현실을 다룬 <불멸의 신성 가족>에 관심이 갔다. <불멸의 신성 가족>은 판사, 검사, 변호사에서 브로커, 기자, 경찰, 마담뚜까지 법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나라 사법현실을 재조명한 책이다.

저자는 의뢰인은 대부분의 판사가 돈을 받고 판결한다고 믿고 법조계에선 과거에는 소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 그런 일은 없다며 양극단의 견해를 보인다. 일반화와 주관성이라는 한계에서 자유로울 순 없지만 이런 견해의 차이가 우리 사법의 현재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법관평가의 사례에서 판사나 변호사 모두 ‘불공정한 재판’보다 ‘의사소통의 문제’를 지적한다. 재판받는 사람들은 ‘과정의 공정성’이나 ‘충분한 의사소통’을 중요시하고 재판하는 사람들은 ‘과정의 중요성’이나 ‘과정의 효율성’을 이야기한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라고 농담 삼아 얘기하지만 사실 법은 멀고 포기는 쉽다.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자신의 과실로, 잘못으로 돌리는 사람들이 많은 이면에는 사법에 대한 강한 불신이 깔려 있다. 법은 ‘잘 지켜져야 할 대상’이었을 뿐, ‘현실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는 아닌(51쪽) 것이다. 어떤 변호사들은 의뢰인의 이익보다는 자기 이익을 챙기거나 법조계 내부의 논리에 충실하다. 이런 이유들로 인해 의뢰인들은 송사를 함으로서 경제적,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느끼기보단 일찌감치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다.

불멸의 신성 가족, 그들은 누구인가?

맑스는 “비평가는 절대로 몸소 사회와 어울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우어 일파를 신성가족이라고 부르며 “불경스러운 대중과 모든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투쟁을 겪어온 비판적 비판주의는 마침내 고독하고 신을 닮았으며 자기만족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로 되는 데 성공했다”고 묘사했다(146쪽). 다른 시험들보다 사법시험에 합격하면 많이 친인척들이 기뻐한다. 그들은 사법시험 합격자들을 ‘든든한 대변자’이자 언제 당할지 모르는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전화 한통이라도 해줄 사람’이라고 기대한다. 미국의 보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우리나라를 가족주의가 지배하는 ‘저신뢰사회’라고 규정했다. 가족주의 사회에서는 혈연관계로 엮이지 않으면 신뢰할 만한 토대를 갖기 어렵다.

직장을 다니다 뒤늦게 전공을 바꿔 내가 다닌 대학이 아닌 타학교 대학원을 다녔다. 강의실로 가던 중 전공교수님 한 분을 만났다. 교수님은 내게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물으셨다.  00대학을 나왔다고 말씀드리자 고향은 어디냐고 물으셨다. 서울이라고 대답하자 어느 고등학교를 다녔냐고 물으셨다. 그 뒤로도 몇 가지를 더 물으신 후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네와 난 공통점이 하나도 없군.” 공통점이 있다면 도와줄 수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는 말로 들렸다.

검사의 세계는 조직 사회다. 조직에 한 번 찍히면 성공을 보장받을 수 없다. 더 많은 삶의 기회를 얻으려면 사소한 불의를 볼 때마다 문제제기를 하는 것보단 눈을 감고 못 본 척하고, 귀를 막고 못들은 척하는 것이 현명하다.

가끔 시간이 나면 TV법률 프로그램을 본다. 그때마다 드는 공통된 생각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같은 법률을 놓고 해석하면 같은 결론이 나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건의 실체보다는 대리인이 누구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믿는 사람들은 전관대우의 변호사, 영향력 있는 변호사를 찾고 그들에게 많은 돈을 쓴다. 영향력이 없는 변호사들이 사는 법은 거액의 브로커를 통해 의뢰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런 현실에는 의뢰인의 무지 또한 한 몫을 한다.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하다가 경제적 사정으로 그만 둔 사람들은 브로커의 길을 걷는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주는 보수는 적고 의뢰인을 직접 상대해야 하며 신성가족의 제사장 노릇도 해야 한다. 검찰에 붙들려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떨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사법에 희망은 없는 것일까?

저자는 부당함에 대한 판사들의 조용한 저항, 신성가족 시스템을 해체하기 위해 진행 중인 여러 개혁 작업들, 두려움을 버리고 끊임없이 판검사에게 말을 걸고 변호사에게 권리를 요구하는 일들을 통해 작은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많은 법조인들은 정치인으로 변신을 한다. 판검사, 변호사의 지위가 예전만큼 높지 않다고 하더라고 그들의 영향력은 대한민국에서 무시할 수 없다. <불멸의 신성 가족>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사법계의 얘기를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말을 아껴야 하는 시대, 목소리를 낸 그들이 있어 대한민국은 그래도 희망은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빨간바나나’님은?

목적 없이 길을 걷다 상점에 진열된 빨간 바나나를 본 이후로 닉네임으로 삼았다. 생각해 보면 꿈이었던 것 같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없는 어린 여자아이는 다른 아이들이 인형과 소꿉을 가지고 놀 때 책을 갖고 놀았다. 그 여자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책과 노는 일이 제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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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와인


다지마 미루쿠,<만화로 보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와인>, 바롬웍스, 2005


대학 졸업 후 회사에 들어가게 됐다고 옛 은사님을 찾아뵈었을 때, 선생님은 나를 레스토랑에 데려가 오리 샐러드에 화이트 와인을 사주셨다. 모젤 어쩌고의 알지 못할 외국어가 쓰여진 황금빛 술. 별 맛도 모르고 그저 달달하구나 느끼면서 잔을 홀짝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 뒤로 와인을 만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렵게 빚을 내 대단지 아파트로 전세를 옮기고 나서 생전 처음 대형마트란 곳에 가면서부터였다. 꼭 뭘 산다는 이유보다는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다양한 상품을 구경하느라 매주 빠짐없이 마트 구석구석을 기웃거리곤 했다. 동네 슈퍼에서는 팔지 않는 외국 맥주를 두루 사보다가, 바로 옆 코너에서 목이 긴 포도주병이 일렬로 늘어선 것을 보게 되었다.

6개들이 병맥주 한 팩이 7천원 내외였는데, 살펴보니 와인 코너의 가장 저렴한 와인도 5천원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이번엔 와인을 한 번 마셔볼까? 과일주라니 향기도 좋을 것 같고 말이지.

그렇게 와인과 처음 만났다. 5천원대 와인을 종류 별로 마시는 걸로 시작해, 맛을 알게 되고, 품종에 따른 특성을 구별하게 되었다. 등급 표시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며 좋아하는 라벨도 생기기 시작했다. 와인은 그 개성이 뚜렷해 골라 마시는 재미가 있었다.

무엇보다 와인이 좋았던 것은 누군가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마시는 데 적합한 술이라는 점이었다. 소주는 금방 취기가 돌고, 맥주는 너무 배가 불렀다. 와인은 13도 내외의 적당한 알코올 도수를 지니고 있어 서너 시간 동안 두셋이서 두어병을 비우면서도 얼굴이 너무 달아오르거나 만취하지 않게끔 만들어 주었다. 병마다 다른 향취와 맛, ‘피니쉬finish’라 불리는 특유의 여운은 이야깃꺼리를 풍부하게 하는 데도 도움이 됐다. 술이 약한 사람들에게도 한두 잔 정도는 부담이 없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는 매력이었고.

포도주에 관심을 가지고 마트의 와인 코너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할 무렵, 이 책을 만났다. 독학과 눈썰미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이 책은 만화의 이점을 빌어 친근하고도 유쾌하게 설명해준다. 와인 초보자들이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라벨 읽는 법이라거나 최고급 와인의 맛, 나라별 와인의 특성에 대해서도 자세하지만 어렵지 않게 제시해 놓았다.

저자는 우연히 와인에 빠지게 된 만화가로, 이 책에서는 와인 이야기뿐 아니라 그 자신의 소박하지만 유머러스한 생활의 일면이 드러나 있어 읽는데 감칠맛이 생긴다. 가끔씩 등장하는 코믹 컷은 이 책이 어쨌든 와인의 세계를 알려주는 설명서라는 약점을 부드럽게 감춰주는 역할을 한다. 책 자체는 두껍지 않지만,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입문’의 코르크는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작고 가볍지만, 상당한 내용과 잔재미를 가진 만화다.

단점도 몇 있다. 이 책에 소개된 상당수의 와인은 이제 마트에서는 구경하기도 힘들게 된 1등급(그랑 크뤼) 와인들이다. 따라서 책에서 소개하는 에피소드를 실생활에 적용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 프랑스 와인 위주여서 지금과 같이 칠레, 아르헨티나, 이태리 등 다양하고 품질좋은 와인이 들어오는 현실에 비춘다면 다소 고색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를 제외한다면 이 책이 가진 장점은 무궁무진하다.

와인은 어렵다, 고급이다라는 이미지가 물씬 풍기는 술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와인도  다른 술처럼 기호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된다. 좋아하는 이와 함께 마셔도, 가벼운 파티에서 여럿이 건배를 할 때도, 혼자 잔을 기울이는 일에도 다 어울리는 훌륭한 음료다. 각각의 와인이 가진 독특한 향기와 맛, 산지를 반영하는 특성을 입과 눈과 머리로 맛보며 즐긴다면 인생이 좀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파스칼은 말했다. 한 병의 와인에는 세상의 어떤 책보다 더 많은 철학이 담겨있다고. 한 병의 포도주가 우리 앞에 놓이기까지는 몇 십 년의 세월과 수백 명의 손이 필요하다. 당신 앞에 자리한 술잔 속의 찰랑거림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월과 추억과 신념과 생활이 배어있는 그 농밀한 이야기를 듣는 법을 당신에게 알려주겠다.

충분히 잔을 회전시킨 후, 천천히 마셔라. 그저 행복하게. 그리하면 모든 것이 바뀌리라. 

 

오늘의 책을 리뷰한 '전영우언'님은?
학교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학생 겸 강사. 영화와 비평과 빠져 있고, 거기서 헤어나오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단다. 두루 많이 아는 것보다 하나에 깊게 파고드는 일에 큰 매력을 느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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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보다 아름다운 - 사랑


 리처드 매드슨, <천국보다 아름다운>, 노블마인, 2009

오래 전에 보았던 아름다운 그림 같았던 영화 한편을 기억한다.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천국보다 아름다운>이 바로 그 작품이다. 유채화로 화폭을 그려 놓은 듯 수놓아진 천국의 화려한 모습과 환상적인 영상들이 감동적인 러브스토리와 더불어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이 작품을 아직까지도 기억한다. '아 저곳이 천국이구나! 천국보다 아름다운 사랑이 바로 저런 것이구나' 하고 가슴속 깊이 느낄 수 있었던... 아카데미 시각효과상을 받기도 했던 그 아름다웠던 영화의 원작을 이제서 만나게 된다. 그때는 미처 몰랐던 이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과 함께...

지금에서야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 개인적으로 스티븐 킹의 작품으로 잘못알고 있었던 <나는 전설이다>라는 작품을 통해서 그 이름을 처음 만났고, 지난 가을 즈음 <시간 여행자의 사랑>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소재로 한 작품을 통해서 그 이름을 가슴속에 선명히 새겨놓았다. 사실 로빈 윌리엄스의 저 영화 원작이 이 작품이었다는 사실을 책을 집어 들고서야 알 수 있었다. 영화를 만났던 당시의 정말 화려하고 환상적인 영상과 감동적인 스토리에 마음을 빼앗겼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한데 원작자가 누구였을까 하고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을까? 어찌됐건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활자를 통해 그 화려한 영상까지 떠올릴 수 있어 더욱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앤, 상관없어. 당신이 없는 천국은 천국도 아니야.' '이 지옥을 우리의 천국으로 만들면 돼.'

삶과 사랑, 천국보다 아름다운 이야기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그 제목부터 너무 예쁘다. 사랑이 바로 그렇다는 말이다. 로버트 닐슨은 어느 날 자신이 영매라고 소개하는 한 사람에게 원고 꾸러미는 받게 된다. 그 원고 속에는 1년 전 죽은 자신의 동생, 크리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방송작가인 크리스는 어느 날 교통사고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가족들 주변을 떠돌지만 결국 서머랜드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사촌형인 앨버트를 만나고 차츰 그곳에 적응해나가지만 예기치 못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의 아내 앤이 그의 죽음을 비관해 자살을 했고 지옥에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크리스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버리면서도 험난하고 거친 여정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는 여러가지 난관을 뚫고 그녀는 만나게 되지만...

불륜과 이혼이라는 말이 일상생활 용어가 되어버린 듯한 요즘 같은 시대에 크리스와 앤이 보여주는 이런 숭고하고 순수한 사랑은 너무나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온다. 사랑만큼 흔한 말도 없지만 사랑이란 말처럼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고 감동적인 말 또한 없다. 크리스가 보여준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사랑과 희생은 어둠속에 반작이는 별빛처럼 그렇게 밝게 빛나고 있다. 지옥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사랑하는 이가 없다면 그곳이 천국이라도 천국일 수 없다는 크리스의 말이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죽는 것은 잠드는 것. 잠이 들면 꿈을 꾸겠지. 육체의 짐을 벗었을 때 이 죽음의 잠 속에서 어떤 꿈을 꾸게 될까 두렵구나.' (<햄릿> 3막 1장)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죽음의 세계가 어떤 모습인지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 <사랑과 죽음>이 우리 삶 근처에 있는 사후세계를 보여주었다면 그 세계를 넘어 지옥의 하위세계와 서머랜드와 같은 천상의 세계를 자세하게 그려내고 있다. 리처드 매드슨이 그려낸 죽음의 세계, 천당과 지옥을 통해서 죽음에 대한 대비가 아닌 지금의 삶에 충실한 현세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느끼게 된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 사랑하라' 라는 말처럼 오늘을 꿈꾸고 오늘을 사랑하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듯 보인다.

'진정한 삶은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이야. 죽음은 이 과정에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해. 삶을 뒤따르는 건 끝이 아니야. 존재의 영속성만 있을 뿐이야' 라고 말하는 크리스의 마지막 말이 가슴속에 남는다. 이 말속에서 삶이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음미하게 된다. 죽음이 끝이 아니며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마음이 아닌 '오늘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 일하고 사랑하고 행복하라'라는 가르침이 이 말속에 녹아있다. 영화 속에서 느꼈던 감동과 책이 전해주는 더 환상적이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야기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감동적이고 고귀한 사랑이야기에 저절로 고개가 숙연해진다. 죽음이 아닌 삶을 이야기하는 '천국보다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색다른 감동과 마주하게 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반토막’님은

들고 있으면 팔이 아프고 내려놓으면 마음이 아팠던 시절, 그렇게 전 반토막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삶을 사랑을 한토막으로 채워가기 위해 노력하는 '한토막 바라기' 랍니다. 한토막으로 채워가기 위해 끊임없이 책을 사랑합니다. 책은 아름다운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힘들고 지친 삶을 이끌어가는 지지대가 되어줍니다. 더불어 즐거운 재미와 행복을 선물해주죠. 어린 시절의 '세발자전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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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70-80년대를 풍미했던 뉴웨이브, 그 풍요했던 성찬의 재연


 

Nouvelle Vague - Nouvelle Vague

 
70-80년대를 풍미했던 뉴웨이브, 그 풍요했던 성찬의 재연.

그런데...

그냥 재연만 하지 않았다.
나른한 향내 가득히 보사노바향을 첨가한 채 돌아왔다. 어떤 식으로?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의 Love Will Tear Us Apart 을 기억하는 그대라면, 누벨 바그(Nouvelle Vague)의 첫 번째 트랙 Love Will Tear Us Apart 을 들어보라. 까무라칠지도 모른다. 조이 디비전 뿐이랴? 디페시 모드(Depeche Mode), 데드 케네디스(Dead Kennedys), XTC, 큐어(The Cure)까지, 당시 내로라는 뮤지션은 본 앨범 안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누벨 바그는 1인칭이 아니다.
This is not a Love Song의 마크 콜린(Marc Collin)과 올리버 리벅스(Oliver Libaux)가 만든 절대 프로젝트에 무려 8명의 양념 다른 보컬이 첨가됐다. 그것도 자국 프랑스를 넘어 브라질에서 공수해올 정도로. 그 색다른 양념은 청자를 눈앞이 아찔할 정도로 유혹한다. 8명의 보컬이 풀어내는 양념은 Too Drunk To Fuck 처럼 지독하기도, Teenage Kicks 처럼 상큼하기도, In A Manner Of Speaking 처럼 눅눅하기도 하다. 원작의 맛도 살린 채, 보사노바의 나른함까지 유지했다. 일품이다. 그제 알던 뉴웨이브는 버려도 좋다. 이제는 새로운 뉴웨이브, 누벨 바그다. 글. 피아노매직

01 Love Will Tear Us Apart (Feat. Eloisia)

02 Just Can’t Get Enough (Feat. Eloisia)
03 In A Manner Of Speaking (Feat. Camille)
04 Guns Of Brixton (Feat. Camille)
05 (This Is Not A) Love Song (Feat. Melanie Pain)
06 Too Drunk To Fuck (Feat. Camille)
07 Marian (Feat. Alex)

08 Making Plans For Nigel (Feat. Camille)
09 A Forest (Feat. Marina)
10 I Melt With You (Feat. Silja)
11 Teenage Kicks (Feat. Melanie Pain)

12 Psyche (Feat. Sir Alice)
13 Friday Night, Saturday Morning (Feat. Daniella D’Ambrosio)  

※ 굵게 칠한 곡들은 꼭 데리고 다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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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 빨강머리 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루시M.몽고메리, <빨강머리 앤>, 세종서적, 2008


얼마 만에 앤을 다시 만난 것일까? 언제 앤을 만나기는 했었던가?


어린 시절, 내 기억과 추억의 일정부분은 앤과 함께한 시간들로 채워져 있다. 그 당시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어떤 공상을 나누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앤을 떠올리면 언제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친구, 알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마음 든든해지는 앤은 그런 친구다.

지난 해 10월, 앤이 다시 우리들 곁으로 돌아왔다.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빨강머리 앤>이 재출간된 것이다. 이 책은 앤 시리즈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로 앤이 커스버트 남매를 만나는 순간부터 교사가 되기까지의 성장 기록을 담고 있다. 묵직한 책의 두께와는 상관없이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경쾌한 운율이 살아난다. 그 옛날처럼 앤의 발랄함에 두 눈과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앤은 여전히 나를 설레게 한다.

행복을 전하는 특별한 소녀

때로는 원치 않는 인연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 삭막한 고아원에서 벗어나 초록색 지붕 집으로 앤의 삶이 옮겨지던 날. 매슈 커스버트와 마릴라 커스버트 남매가 입양을 원한 건 앤과 같은 ‘여자 아이’가 아니라 일을 도와 줄 ‘남자 아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열한 살,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는 동안 쉬운 게 하나도 없었던 앤 셜리. 온 몸에 실수를 장전하고 과도하게 감정을 남발한다.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상의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기도 한다. 이런 앤에게도 타인을 사로잡을 만한 특별한 매력이 있다. 정교하게 닫혀있던 마릴라의 마음을 열게 만든 이 필살기는 차차 소개하기로 하겠다. 원치 않는 인연도 ‘인연’인 법. 다소 불편한 이들의 동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앤이 이렇게 수다스러웠었나? 분명 책을 읽고 있는데도 바로 옆에서 조잘대는 것처럼 귀가 윙윙 거린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마음을 놓는다. 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무던하던 마음이 싱숭생숭 설레기 시작한다. 조금 더 파릇하고, 조금 더 경쾌하고, 조금 더 자연스러운 세상을 볼 줄 아는 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미세한 부분에도 앤의 눈이 가닿으면 어김없이 생동감이 흘러넘친다. 모난 구석이라곤 없다. 두려움도 없고, 상상에도 끝이 없다. 앤에게 이 세상은, 오늘은, 환희 그 자체인 것이다. 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어느 순간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가 있다. 그래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된다면 당신도 이미 ‘앤의 폐인’ 일지 모른다.

빼빼 마른 몸에 도드라진 주근깨, 무엇보다 눈에 띄는 빨강머리는 ‘앤’을 무심코 지나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 타고난 이야기꾼 기질까지 선보이는 앤.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이 없다. 앤의 풍부한 상상력은 과연 어디에서 생겨난 것일까. 이미 서너 살 때부터 힘든 일을 겪어왔던 앤은 공상을 통해 모진 상황들을 이겨내곤 했다.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상상 속에서라면 행복한 아이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준 것은 초록색 지붕 집을 둘러싼 캐번디시의 수려한 자연 경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치 그림 속 풍경처럼 아름답게 자리한 고즈넉한 시골 마을. 앤은 숲 속 작은 동물들을 바라보며 꽃과 나무 사이를 거닐곤 했다. 그러는 동안 마음가득 상상이 차올라 감수성은 한없이 풍부해졌으리라. 앤은 보이는 모든 것에 가장 어울릴만한 이름을 새롭게 지어주기도 한다. 이것 역시 뛰어난 상상력의 산물인 셈이다.

대책 없는 긍정, 맑고 밝은 기운

앤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가끔 대책 없을 정도로 ‘긍정’적이라는 데 있다. 원망과 고통이 생길 법한 자리를 앤은 온통 긍정으로 무장한다. 그 맑고 밝은 기운 때문일까. 누구라도 앤을 만나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가녀린 몸의 작은 아이 한 명이 어른의 마음까지 다독여주다니 그 재주 한 번 놀랍다! 앤의 하루는 진실하고, 절실하며, 축복으로 가득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앤 스스로가 그런 날들로 만들어 버린다. 그녀가 발산하는 해피 바이러스를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을지, 앞으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꿈을 간직하며 살아가게 될 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수줍음 많지만 극진한 사랑을 보여준 매슈 커스버트, 앤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늘 노심초사하며 감정을 절제했던 마릴라 커스버트에게 ‘앤’을 사랑스런 아이로 키워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다이애나와의 추억, 길버트와의 아련한 기억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 하나다.

누구나 저마다의 마음 어디쯤 품고 있을 고향, 영원히 변치 않기를 바라는 그 낙원 같은 고향이 <빨강머리 앤>을 펼치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지치고 힘들 때 어디서든 어깨를 내어주는 단짝 친구처럼 앤도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누구보다 희망차게 삶을 살아내는 경쾌하고 명민한 작은 아이 한 명이 늘 우리를 반겨주는 책. <빨강머리 앤>이 100년이 넘도록 사랑 받아온 비결은 루시M. 몽고메리가 그리고자 했던 세상이 앤을 통해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가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꿈 사랑 희망을 노래하며 상처를 치유해주는 <빨강머리 앤>은 앞으로도 영원히 기억에 남을 명작중의 명작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soulnote'님은?

다독보다는 정독의 묘미를 즐길 줄 아는 진정한 슬로 리더(slow reader). 문예창작학을 전공하고 카피라이터로 활동하다, 전업독서가로 전향 후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soulnote라는 닉네임처럼 영혼의 진실한 언어로 인생의 페이지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것이 목표. 현재, 생활의 일부이자 전부인 독서와 서평쓰기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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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의 발달 - 생의 태초의 순간을 갈망하며


문태준, <그늘의 발달>, 문학과 지성사, 2008

2009년 5월. 이 땅에서 호사를 누리는 방법. 하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서 밤경치를 감상한다. 둘.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에 와인을 마신다. 셋. 자동차를 타고 한적한 교외로 데이트를 떠난다. 음, 몇 가지 방법을 적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하지만 외롭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내가 캔디라서가 아니라, 호사를 누릴 다른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책 한권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간다. 편하게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그늘을 찾는다. 10분이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렇지 않으면 우린 너무 슬픈 세상에서 사는 거다.

봄날의 호사를 누릴 때는 시집이 좋다. 싱그런 봄바람을 맞으며, 시 한 편 읽고, 파란 하늘 바라보면 이런 호사가 어디 있겠는가. 그늘을 찾아 떠났으니, 전혀 연관성은 없지만, 문태준 시인의 <그늘의 발달>을 꺼내들었다. 그늘이 무슨 발달을 할까. 책을 펼치자마자 ‘시인의 말’이 나온다. “한 짐 가득 지게를 진 아버지가 / 굴을 빠져나와서 혹은 길가 비석 앞에서 / 지게를 진채 한쪽 무릎을 세워 앉아 / 잠시 잠깐 가쁜 숨을 고르시던 게 생각난다. // 시집을 내자고 여기 숨을 고르며 앉아 있는 나여, / 너는 얼마나 고되게 왔는가.” 시인도 잠시 숨을 고르며 앉아 있다고 한다. 지금 책을 읽고 있는 우리처럼.

가까이 하지 못한, 그래서 그리운

4부로 구성돼 있는 <그늘의 발달>은 각 장에서 다른 정서를 환기시킨다. 1부는 ‘나’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가을밤 뒷마당에서 서서 풀벌레 소리를 듣는 ‘나’(<혼동>), 돌담을 걷고 집에 돌아와 아무 까닭도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아무 까닭도 없이>), 와병 중인 당신을 두고 어두운 술집에 와 빈 의자처럼 쓸쓸히 술을 마시는 ‘나’(<百年>). ‘나’에게선 다가갈 수 없는, 손에 쥘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 가는 곳마다 떠오르는 당신의 얼굴(<두꺼비의 빗댐>), 지난 기억을 품고 있는 듯한 감나무를 베지 말라고 청하는 슬픈 ‘나’(<그늘의 발달>).

내 걸음 가다 멎은 곳 당신 얼굴 들썽들썽해
천천히 오직 천천히
당신의 집과 마당을 다 둘러 나왔소

습한 곳에 바쳐질 조촐한 나의 목숨
나의 서정(抒情)
(p 20. <두꺼비에 빗댐 - 詩>)

아버지여, 감나무를 베지 마오
눈물은 웃음을 젖게 하고
그늘은 또 펼쳐 보이고
나는 엎드린 그늘이 되어
밤을 다 감고
나의 슬픈 시간을 기록해요
나의 일기(日記)에는 잠시 꿔온 빛
(p 31. <그늘의 발달> 중 일부)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2부로 접어들면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세상을 바라본다. 마치 시인이 숨을 고르며 앉아 있는 것처럼. 그런데 가만히 둘러보니 나와 세상은 별개인 듯하다. 아무 것도 싣지 않은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나’(<손수레인 나를>), 폐원이 된 과수원을 상속해 주신 ‘아버지’(나와 아버지의 폐원>), 그리고 다시 누군가 나를 은하처럼 길게 부르지만 내가 왜 이곳으로 벌써 돌아왔는지 알 수 없는 ‘나’(<동산>). 코스모스를 바라보던 ‘내’가 중심이었지만, 곧 코스모스에게로 중심이 넘어가고, ‘나’와 코스모스는 흔들리며 서로 바라본다(<흔들리다>). 그 때 그가 마주한 것은 ‘배를 내 눈알처럼 달고 다니는 올챙이’다(<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아주 어둡고 덜 어두울 뿐인
둥근 배 속
다리 넷이
한데 엉켜 있다.

한 통이다
한 통이 통째로 움직인다
마음 가면 마음이 전부 간다

속으로 울 때
손발이 모두
너의 눈물을 받아준다
(…)
이별이라는 말에 태동(胎動)이 있기 전
(p 46. <이별의 말이 생겨나기 전>)


생(生)의 태초의 순간을 갈망하며

어쩌면 ‘나’는 나와 너가 구분되기 전인 생(生)의 태초의 순간을 갈망하고 있는지 모른다. 3부에서 등장하는 ‘아이’는 태초를 갈망하는 ‘나’의 소망이다. 아이가 공을 몰고 가고, 공이 아이를 몰고 가는 기이한 상황, 공과 아이는 등을 구부려 둥글게 껴안는다(<공과 아이>). 또 ‘나’는 언젠가 “비밀을 갖고 가 / 저곳서 / 혼자 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였다(<조금씩 자꾸 웃는 아이>). ‘나’는 태초 모든 것이 하나 된 순간에서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젖을 빨다 유두를 문 채 선잠든 아가처럼”(<사랑>).

이후 ‘나’는 세상을 자유롭게 유영한다. 아마도 그곳의 ‘나’는 조금은 달라졌을 테지. “아무도 없는 빈 들판에 나는 이르렀네 / 귀 떨어진 밥 그릇 하나를 들고 / 빛을 걸식하였네 / 풀치를 말리듯 내 옷을 말렸네 / 알몸으로 누워있으면 / 매미 허물 같은 한나절이 열 달 같았네 / 배 속의 아가처럼 귀도 눈도 새로이 열렸네 / 함께 오마 하는 당신에겐 저 들판을 빌려주리”(<극빈 3 - 저 들판에>)

봄날의 호사가 꽤나 만족스럽다. 여느 때보다 더위가 일찍 찾아왔다고는 하지만 바람은 아직 상쾌하다. 누구나 행복할 권리를 갖는 민주주의와 가장 닮은 계절 봄. 그리고 여름이 온다. 문명의 이기가 없으면 쉽게 호사를 느낄 수 없는 계절. 지금, 문태준 시인은 우리에게 또 한편의 시를 선사한다.

오늘은 탈이 없다
하늘에서 한 움큼 훔쳐내 꽃별에 넣어두고 그 곁서 잠든 바보에게도

밥 생각 없이 종일 배부르다

나를 처음으로 스다듬는다

오늘은 사람도 하늘이 기르는 식물이다
(p78. <봄볕>)

안늘(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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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하느님 - 평안하신가요?!

 
권정생, <우리들의 하느님-개정판>, 녹색평론사,2008

권정생 선생님, 안녕하세요. 너구리입니다. ‘왠 너구리가 편지를 보냈나’ 하셨죠?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제 별명은 선생님께서 지어주셨어요. 선생님이 쓰신 동화 <아기너구리네 봄맞이> 기억하시죠? 거기 보면 아빠 너구리, 엄마 너구리, 언니 너구리, 동생 너구리, 그리고 장가 못간 삼촌너구리가 나옵니다. 열심히 책을 보던 네살배기 큰 조카가 “우리 집에도 장가 못간 너구리 삼촌 있는데”라고 했고, 저는 그때부터 너구리가 됐어요. 어느덧 서른 줄에 접어들었어도 조카들은 집에 들어올 때마다, “너구리 집이 있니?”라며 문을 엽니다. 장가는 아직... 흑...

서가를 둘러보던 중에 선생님의 <우리들의 하나님>이 눈에 들어왔어요. 반가운 마음에 책을 들었고, 이렇게 펜을 듭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5월 17일)가 선생님이 세상을 떠나신지 벌써 2년이 되는 날이네요. 2년 전 소식을 듣고 ‘좋은 곳으로 가시겠지’ 생각했었는데... 선생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 초판이 나오던 1996년, 이 책의 출간이 반갑지 않다고 하셨어요. “바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씌어졌는지 걱정부터 앞서기 때문”이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저는 책머리에 있는 선생님의 글과 이름만 보고도 반가웠습니다. 더 이상 같은 땅에 발을 딛고 있지 않아서인지, 반가운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더 크네요.

그곳, 평안한가요

지금 선생님 계신 그곳은 평안한가요. 누구보다 따뜻한 동화를 쓰고, 희망을 노래했지만 이 땅에서 선생님의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어요. 열아홉살 때부터 결핵을 앓으시고, 인생의 가장 밑바닥 생활인 걸식을 하셨지요. 또 6·25 전쟁도 겪으셨지요. “백만명이 넘는 목숨을 잃었고 집과 재산을 잃었다. 천만 이산가족이 생기고 남북은 돌이킬 수 없는 적이 되었다. 온 나라가 쑥밭이 된 것이다.”(p 214. <분단 50년의 양심>) 1세기 전 한국을 살았던 모든 어른들이 힘든 시기를 보냈을 거라 생각하지만, 선생님을 생각하면 남들보다 조금 더 아파하셨을 것 같아요. 선생님은 조금 더 섬세한 감성을 갖고 계셨으니까요.

선생님은 이래저래 고민이 많으셨어요. 날로 생명을 잃어가는 자연을 보며 안타까워하셨고, 피폐해져가는 농촌을 보고 눈물 흘리셨어요. 그중 선생님이 가장 속상하셨던 건 사람이 차별받는 것이었을 테죠. 지도 위의 경계 하나로 사람을 차별하고, 통장의 잔고를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험한 세상. “기름진 고깃국을 먹은 뱃속과 보리밥을 먹은 뱃속의 차이로 인간의 위아래가 구분지어지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이다.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 아닐까.”(p 21. <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자신이 내뱉은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선생님은 실천하시고, 끝없이 채찍질 하셨어요. 1975년 ㅅ 선생님에게 선물로 받은 누런 똥색 나일롱 셔츠를 15년 이상 입으시고,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돼야 낫는 예배당 부속건물의 토담집에 사셨죠. 또 선생님이 쓰신 글로 상을 받을 때에는 상패와 상금을 돌려보내기도 하셨어요. 그리고는 말씀하셨죠.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돌려줘야 하는 것이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평등의 원칙이며 그게 평화로 이어지는 자연의 질서입니다. 구태여 돈을 잔뜩 벌어 남을 구제한다는 마음보다 내가 좀더 가난하게 덜 차지하기만 해도 그게 바로 이웃을 위하는 일인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이런 물질의 평등에서 시작해야 합니다.”(p 79. <사람다운 마음으로>)

‘사람다운 마음’을 지키기 위해, 선생님께서는 가진 것을 모두 내어 주셨어요. 10억이 넘는 인세를 북녘의 어린이들을 위해 써달라고 유언을 남기셨으니까요. 음,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네요. 애초 그건 내 돈이 아니었다고. 그건 원래 그 아이들의 것이었다고. 문득 걱정이 됩니다. 선생님 계신 그곳은 돈이 필요 없는 곳이지요?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만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건 아니지요? 만약 그렇다면 선생님은 이 땅에서처럼 또 찬바람 가득한 곳에서, 남 걱정을 하실 테니까요. 부디 그곳은 돈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곳이 아니길 바라요. 아니 믿어요.

바보 같은 ‘사람’들의 세상

<우리들의 하나님>에 있는 단편소설 <용구 삼촌>이 생각나네요. ‘건넛집 다섯살배기 영미보다도 더 어린애 같은 바보 용구 삼촌’이 어느 날 집에 들어오지 않지요. 삼촌을 데리고 나갔던 소는 혼자 돌아오고, 마을 사람들은 삼촌을 찾느라 온 마을을 뒤지네요. 바보지만, 새처럼 깨끗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용구 삼촌.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슬퍼졌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어요. 이게 선생님이 말씀하신 사람에 대한 애정이겠지요. 사람의 능력이 아닌 사람 자체로 사랑 받는 세상.

책을 다 읽고 보니, 책 중간중간에 책갈피가 가득하네요. 세상을 살면서 흔들릴 때마다 다시 보려고 꼽아놓은 것들이에요. 그런데 조금 두려운 마음도 들었어요. 처음 선생님 말씀 들을 때는 그저 ‘맞아, 이렇게 살아야해’라고 감탄했지만, 책을 다 읽을 무렵 ‘내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걱정이 들었거든요. 행여나 선생님의 말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선생님처럼 살고 있다는 걸로 착각하고 싶지는 않아요. 또 선생님 말씀에 감동 받았다고 하면서, 몸으로는 전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저를 보게 될까 두렵습니다. 선생님과 너구리.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차이가 있으니, 변화가 생기는 것이겠지요. 가만히 희망을 품어봅니다.

선생님께서는 “징검다리를 위태위태 몸을 가누며 직접 건너온 아이와 자동차를 타고 훌쩍 다리를 건너온 아이 중에 어느 쪽이 진정한 강을 건너왔다고 느낄까?”라고 물으셨죠. (p 144. 쌀 한 톨의 사랑) 아직 뭐라 대답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좁은 길을 위태로이 걷겠습니다. 욕심 부리거나 남의 것을 빼앗지 않겠습니다. 또 지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겠습니다. 선생님이 희망을 끈을 끝까지 놓지 않으셨던 것처럼. 선생님, 제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선생님께서 ‘네가 너구리니?’라고 반갑게 맞아주실 거죠? 선생님은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테니, 제가 먼저 인사드릴께요. 그럼 그날을 기대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그때까지 좋은 곳에서 평안하시길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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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 도서관에서의 한 때



최정태,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한길사, 2006

그때 나는 시간이 많았다. 회사를 그만두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도시락에 밥을 담고, 사진기를 챙겨 정독도서관에 다녔다. 문학실에 앉아 하루에 네 권 씩 책을 읽었다. 시집 두 권, 평론 한 권, 소설 한 권 식이었다. 배가 고프면 식당으로 가 싸온 밥을 먹었고, 심심해지면 자판기에서 차를 뽑아 관내를 천천히 걸었다. 눈이 시리면 정원 벤치에 누워 발을 까닥거렸다. 저녁 6시까지 거의 매일, 나는 도서관에 있었다. 책 읽고 밥 먹고 차 마시는 팔자 좋은 인생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회사를 그만두더니 하고 싶었던 일이 기껏 도서관에 가는 거였어? 언제 다시 일할지 모르겠다구? 대체 뭘하고 있는 건데? 물음들이 내게 쏟아졌지만 나는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랬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그것 뿐이었다. 원고를 쓰기 위해 책을 읽지 않아도 되고,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 어딜 가지 않아도 되고, 멍청한 얼굴로 회의실에서 괴로운 지시를 받아적거나 사람들 앞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발표하지 않아도 되고... 그때 그 시간은 내가 싸워 얻은 평화였다. 나는 간신히 멈춰 서서,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세상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거기서 읽었던 책 가운데 루이스 세풀베다의 소설들이 기억난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 귀향,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준 고양이, 세상 끝으로의 항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도서관은 마치 숲처럼 온화한 빛과 쾌적한 향내로 나를 감싸안았다. 그런 가운데 나는 와인을 마시듯이 그의 소설을 음미했다. 글자 하나하나가 내 안 깊숙한 곳에 부드럽게 쌓여갔다. 그의 책은 속도에 치여 망가졌던 감각들을 하나하나씩 다스려 낫게 해주었다.

그때 내 스승은 누구였을까. 세풀베다를 비롯한 수많은 소설가, 문성해와 같은 신인이지만 찬란한 빛을 뿌리는 시인들, 수잔 손택처럼 대담한 담론을 제시하는 평론가들…수많은 이들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그 당시, 내 참스승은 정독도서관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도서관에서의 한 때

정독도서관은 휴무일에도 관내를 산책하는 것이 가능하다. 건물 안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세심한 손길로 꾸며둔 도서관의 정원을 평소처럼 거닐 수 있다. 아무런 부담도 없이, 한낮의 햇볕과 바람, 공기를 온통 누리는 사치…그것은 정독도서관만이 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환희였다.

돌이켜 보면, 정독도서관은 우리 땅에서 흔치 않은 도서관이다. 경기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옮겨가면서 그 터와 건물을 그대로 도서관으로 전용된 덕분에, 운동장에는 나무가 심겼고, 벤치가 놓여졌으며 분수대와 연못이 생겼다. 단순히 책만 읽는 독서실 같은 답답한 건물이 아니라 넓다란 정원을 가진, 풍요로운 장소로 재탄생된 것이다.

볕 좋은 가을날에 문학실에서 책을 읽고있으면 창밖의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새의 웃음소리가 들린다(그렇다, ‘울음소리’가 아닌 ‘웃음소리’다). 청명하고 더운 여름날이면 분수대에서 물보라 소리가 터져나온다. 눈 오는 겨울날, 눈밭을 밟아오는 이용객들의 뽀드득 소리는 또 어떤가. 정독에서 책을 읽는 것은 다른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좁고 긴 복도, 차가운 대리석 바닥, 낡고 허름한 건물이 주는 묘한 음영감은 툭 터진 정원, 무성한 녹음(綠陰), 강남까지 보이는 호쾌한 풍광과 더불어 독특한 향취를 풍긴다.

이 책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은 제목 그대로, ‘미학적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세계의 도서관을 소개하고 있다. 세상은 넓고, 도서관은 많아서 지구의 곳곳에는 사람들의 깊은 생각과 세련된 솜씨가 어우러진 수려한 도서관이 적지 않다. 책에 담긴 몇몇 도서관의 사진만 보더라도, 경탄을 넘어 ‘숭고’할 정도다.

그와 같은 유수의 도서관들에 비하면 정독도서관이 주는 감흥이란 보잘 것 없는 수준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서관의 매력이란 결국 그 도서관 자체뿐 아니라 그 도서관을 이용하는 사람들, 책을 다루는 당대의 관점을 함께 포괄하는 무엇이다. 아직 한국도서관의 역사는 일천하고, 장서의 규모뿐 아니라 관리의 전문성, 도서관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 역시 안타까운 데가 많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꾸준히 나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방에 세워진 ‘기적의 도서관’ 몇 군데는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수준을 갖춘 곳들도 있다.

정독도서관은 효율성의 측면에서 보면 한심한 도서관일지도 모른다. 그 넓은 면적을 사각형의 외벽으로 덮어 책만 채웠다면 훨씬 더 많은 장서량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정원 관리에 들이는 비용을 건물에 투자한다면 인텔리전트 빌딩으로 탈바꿈해 훨씬 더 쾌적하고 편안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독도서관은 뜰을 품으면서 비로소 ‘한국의 아름다운 도서관’이 된 것이다. 효율성과 속도라는 단일하고 무자비한 가치에서 벗어나, 오직 ‘책’이라는 단순한 몰입에서 벗어나 책과 책 읽는 이와 책 읽는 환경을 함께 만들어준 그 여유로운 마음가짐이 도서관을 아름답게 만들었다.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은 좋은 책인 한편 또 아픈 책이기도 하다. 한국 도서관의 현실을 자연스레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망할 것은 없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우리 식대로의 도서관이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정독도서관이 있으니까.

도서관을 사랑하는 이, 도서관에 절망한 이들에게 모두 추천한다.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언젠가는 ‘이 땅의 아름다운 도서관’이란 책도 발간되지 않을까. 그 날을 기다려본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sirian님'은
IT 모바일 업종에서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책을 쉰 적이 없지만, 매번 책이 모자라다고 느끼곤 한다. 한 때는 터부가 없는 세상을 꿈꾸었으나 이제는 그저 서로 인정하고 관대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꿈을 품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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