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인돌'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4.09.25 《어쩌다 중학생 같은 걸 하고 있을까》 - 나는 중2다
  2. 2013.05.13 [사이언스 북 카페] 토머스 트웨이츠, 《토스터 프로젝트》
  3. 2013.02.05 [서점에서 만난 사람] 잃어버린 내 삶의 끝, 죽음을 찾아 -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저자 김형숙
  4. 2010.12.29 <너의 의무를 묻는다> - 진정한 의무를 지키고 있는가
  5. 2010.09.07 <섀클턴 평전> - 불완전한 인간을 넘어선 어느 탐험가의 초상

《어쩌다 중학생 같은 걸 하고 있을까》 - 나는 중2다

 

 

쿠로노 신이치 | 《어쩌다 중학생 같은 걸 하고 있을까》 | 뜨인돌 | 2012

 

그러게, 어쩌다 중학생 같은 걸 하고 있을까? 소설의 주인공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중학생 같은 걸' 하고 있는 건 너뿐만이 아니란다.

 

중2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니다. 주인공 스미레는 중학교 2학년이다. 특별히 예쁘거나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닌 평범한 여학생이다. 초등학생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중학교에 가면서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부모님의 이중적인 모습 같은 것이다. 엄마는 기분에 따라 스미레의 잘못을 혼내기도 하고 봐주기도 한다. 아빠는 자식 교육에 신경도 쓰지 않으면서 어쩌다 한 번씩 관심 있는 척을 하지만, 스미레가 밤늦게까지 게임을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는구나.'라고 말해 스미레의 속을 뒤집어 놓는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스미레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 코스프레도 했지만, 점점 이런 부모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별로 친하진 않지만 친구가 있어 1학년 때는 학교생활도 그럭저럭 했다. 하지만 2학년은 달랐다. 모두 그룹을 만들어 어울리고 남자아이들의 관심은 음담패설뿐이다. 스미레는 본의 아니게 혼자가 됐다.

 

반에서 스미레에게 관심을 보이는 아이는, 곧 이 세계가 멸망할 거라고 말하며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이카뿐이다. 함께 점심 먹을 친구도 없고, 수학 시험엔 2점을 받아 선생님께 찍히고. 이대로는 학교생활이 위태로울 것 같다고 판단한 스미레는 반에서 가장 예쁜 아오이의 그룹에 들어가기로 한다. 아오이처럼 교복 치마도 짧게 줄이고 아오이 주변에서 얼쩡거리며 아오이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아오이에게 준다. 심지어 편지지를 접을 때 하트 모양으로 접어야 할지도 고민한다. 정성이 통했는지 스미레는 드디어 아오이 그룹에 들어가게 되고 다른 아이들의 선망을 받는다. 스미레는 아오이 그룹의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멋도 내고 남자도 만난다. 어느 날, 스미레는 아오이 그룹의 아이들이 부족한 용돈으로 새로운 화장품과 옷을 어떻게 갖게 되는지 알게 된다. 도둑질이다. 도둑질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스미레는 뭔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국 스미레는 절도 현장에서 붙잡히고 아오이 그룹의 아이들이 했던 절도 행위까지 모두 밝혀지게 된다. 아오이 그룹에서 쫓겨난 스미레는 왕따를 당한다. 다시 혼자가 된 채 험난했던 스미레의 중2가 끝난다. 한바탕 홍역을 앓듯 2학년 이 지나가고, 3학년이 되어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보통의 아이들처럼 중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스미레의 험난했던 사춘기 시절을 마치 명랑만화 보듯 낄낄거리고 웃으며 읽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결코 가벼운 건 아니다. 그 시절을 지났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스미레의 고민과 걱정과 비슷한 것을 해봤을 것 같다. 그룹에 들어가지 못해 혼자 밥을 먹는 스미레는 ‘나는 괜찮아’라며 스스로 위로한다. 나도 친구를 금방 사귀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학기 초가 되면 항상 ‘누구와 밥을 먹어야 하나’가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 나이에는 친구가 부모나 가족보다 중요했기에 친구를 사귄다는 건 그 시절 내내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것 같다. 그러다 마음에 맞는 친구를 만나면 학교생활이 몇 배나 즐겁고 재미있었다.

 

이 책은 부모님이 읽어도 좋고 (읽다 보면 ‘뜨끔’한 부분들이 많을 것 같다) 학창 시절이 그리운 이들이 읽어도 좋다. 읽고 나면 '나의 사춘기는 어땠더라?' 하고 지난 그 시절을 떠올릴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커피한잔'님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동 문학이나 청소년 문학을 접할 기회가 좀 많습니다. 책을 읽다보니 쓰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기회가 될 때마다 도전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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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 북 카페] 토머스 트웨이츠, 《토스터 프로젝트》

 

 

토머스 트웨이츠 | 《토스터 프로젝트》 | 뜨인돌 | 2012

 

■ 오늘은 어떤 책인가요?

 

‘토머스 트웨이츠’라는 영국의 한 디자이너가 맨손으로 토스터를 만드는 과정을 담고 있는 《토스터 프로젝트》입니다.

 

 

■ 토스터는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가전제품인데 왜 굳이 만들게 된 거죠?

 

이 ‘토스터 프로젝트’는 당시 영국 왕립예술대학 석사과정에 있던 저자가 졸업전시회 작품으로 기획한 것인데요. 그 시작은 우리가 일상에서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물건들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그저 돈을 주고 사면 그만일 뿐, 그 물건이 무엇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죠.

 

같은 맥락에서, 현대인들은 무언가를 직접 제작할 수 있는 실용적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소비자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토스터는 이와 관련된 하나의 상징입니다. 사용하긴 하지만 꼭 필요한 건 아닌, 갖고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아쉬울 것 없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갖고 있기도 쉬워서 하나 샀다가 고장 나거나 더러워지거나 낡으면 쉽게 내버리는, 그런 물건들의 대표인 셈이죠.

 

■ 기술 발전에 따라 대량으로 생산되는 물건을 직접 만들어봄으로써 우리의 현재 생활을 지탱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얘기인데요. 앞서 저자가 토스터를 ‘맨손으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이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이 프로젝트를 통해 얼추 토스터와 비슷한 물건이 만들어지긴 했습니다. 실제로 빵을 굽는 토스터다운 기능은 갖추지 못했지만요. 그런데 여기까지 만드는 과정이 실로 우여곡절의 연속입니다. 우선 싼 토스터일수록 부품이 적게 들어 있으리라는 짐작에 가장 값싼 토스터를 분해했는데요. 그 안에서 나온 개별 부품이 무려 총 404개에 달했고, 그 부품을 다시 재료에 따라 분류해내는 게 또 일이었는데, 그러고도 그 많은 부품들이 다 어디서 왔는지, 원재료를 알아낼 방법 때문에 막막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자가 택한 방법은 여러 가지 재료들을 토스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최소한으로 축소하고 그렇게 남겨진 강철, 운모, 플라스틱, 구리, 니켈 등의 재료를 구하기로 한 것이죠. 결과적으론 단돈 3.94파운드로 당장에 살 수 있는 토스터를 제작 기간만 총 9개월, 비용은 1,1187.54파운드, 한화로는 대략 200만원을 웃도는 금액에 겨우 만들어냈고요.

 

정말 어마어마한 차이네요. 현대산업의 규모의 경제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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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잃어버린 내 삶의 끝, 죽음을 찾아 -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저자 김형숙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

 

죽음을 읽습니다. 스스로 죽거나 누군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 관한 기사입니다. 양미간을 찌푸리고 혀를 끌끌 차며 원인과 결과 사이에 놓인 간략한 사실 관계를 확인합니다. 그러고는, 그만입니다. 사건?사고가 된 죽음이 잠시나마 내 삶을 스쳐가는 방식입니다. 사람도 삶도 이야기도 없는 타인의 죽음입니다. 죽음을 봅니다. 재빠르고 위생적으로 죽음이 처리되는 장례식장에서입니다. 정확히는 죽음 이후의 광경이고, 구체적으로는 낯설고 불편한 타인의 슬픔입니다. 이렇듯 죽음은, 아직 내 것이 아닌 채로 타인의 것으로만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게 삶의 끝에 가서야 나는, 나와 무관해진 내 죽음을, 내가 잃어버린 내 죽음을, 비로소, 눈치채게 되겠지요.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이 찬찬히 말해주듯이 말이죠.

 

저녁

 

 

새의 그림자가 길게 끌고 가는 것은 누구일까

 

땅거미가 야금야금 갉아 먹는 것은 무엇일까

 

붉은 옷의 승려가 사는 서녘에서는

 

마지막 시체가 연기를 피워 올리고

 

떠난다거나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이미 먼 세상의 일이다

 

서른세 번, 망자를 거두는 종이 울리면

 

어렵사리 네가 붙잡은 나마저 사라진다

 

- 송기원, 《저녁》, 실천문학사, 2010

 

반디 |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먼저,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출간을 축하 드립니다. 이 책에는 오래도록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셨던 그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데요. 그런 만큼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어떠신가요?

 

김형숙 | 개인적으로는 책을 쓰는 과정이 간호사 생활 전반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간에 산발적으로 오고 가던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확인하고 통합할 수 있었고, 간호사로 일하는 동안 쌓인 상처를 스스로 치유 받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어린 아이를 오래 업어주는 꿈, 누군가(아마도 남매의 아버님이었을 듯)의 무덤 앞에 고개 숙이고 서있던 꿈을 꾸게 했던, 오랜 죄의식에서도 좀 자유로워진 것 같고요.

 

그러나 출판 사실은 여전히 부끄럽고 부담스럽습니다. 저 자신을 너무 적나라하게 내보인 것 같고, 또 짧은 소견으로 내가 이런 글을 써도 괜찮을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글은 아닐까 하는 염려를 떨쳐버리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출판 후에도 사람들이 몰랐으면, 되도록 책이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가까운 이들 몇 분 외에는 출판사실을 알리지도 못했죠.

 

다행히 책을 읽은 분들이 각자 가까운 이들을 보내면서 느낀 점을 말씀해주시며 필요한 책이었다고 격려해주셔서 조금씩 용기를 내고 있습니다.

 

반디 | 책을 읽으며, 때마다 저자 님의 어린 시절과 그 기억을 마주하는 듯했습니다. ‘병원에서 맞이하는 현대의 죽음’과 대비되는 ‘자연스러웠던 죽음’의 추억에서뿐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을 이해하려는 저자 님의 마음 씀씀이에서 특히 그러했고요. “이제 삶의 내용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의 그것과 더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며 삶을 돌볼 작정”이라고도 말씀하셨는데요. 저자 님께 어린 시절은 어떤 의미로 남겨져 있나요?

 

김형숙 | 저는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읍내로 나가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어린 시절 그 고향마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듯이 제겐 그 시절이 단순히 기억이 아니라 늘 현재와의 연장선 상에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그곳에 살고 계신 덕택인지, 친구나 선후배, 사제 관계 외에 도시에서 맺기 힘든 일상의 관계들은 여전히 그곳을 통해 보고 있었던 것 같고요. 그곳을 떠난 후 제 삶은 늘 도시와 그곳,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고 있었다는 기분이 듭니다. 일상에서 수시로, 걷거나 하늘을 볼 때, 현재의 삶이 무거워 도망가고 싶을 때, 현재의 문제를 확인하고 싶을 때,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거나 다음을 준비할 때 등 저는 습관처럼 그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때로 너무 과거에 고착되어 있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때도 있죠.^^

 

어쨌든 제게 그곳은 출발점이면서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는 어떤 기준선 같기도 합니다. 

반디 | 어린 시절 경험하신 ‘자연스러웠던 죽음’이 있었기에,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의 실상을 더욱 잘 보실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는 과거와 현재, 시골과 도시라는 시?공간의 차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죽음이 이전의 그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과거 고향 마을의 어떤 점을 이어가야 할까요?

 

김형숙 | 굉장히 중요한 질문 같아서 분명히 답하기는 부담스럽습니다만, 저는 ‘죽음에 직면하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든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런 삶의 과정이라는 것. 과거 고향 마을에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일상의 곳곳에서, 수시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든 혹은 서서히 예고하고 다가오든 사람들은 피할 방도가 없었기에 늘 죽음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어른들뿐 아니라 아이들까지, 사람들은 수시로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할 기회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현대 의학의 발달로 사람들은 그 기회를 잃어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 우리는 죽음을 피하거나 유예할 가능성, 혹은 죽음이 병원으로 격리되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유로 자꾸 임박한 죽음조차 외면하거나 부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병원 안에서는 정확히 언제 사망할 지 모른다는 이유로 또 자명한 죽음을 입에 올리기를 꺼리고요. 고향에서 저절로 가능했던 ‘죽음에 직면하기’가 이제는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가능한 일이 되었고, 그래서 ‘죽음준비교육’, ‘웰 다잉 운동’ 같은 노력들이 생기지 않았을까 합니다.

 

최근 들어 나이 들고 약해지는 것을 반드시 질병이나 문제로 봐야 하나? ‘정상’적인 삶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팔순이신 저희 아버지께선 최근까지 과중한 농사를 감당하시느라 발목관절이 심하게 상하셨는데요. 통증도 심하고 잘 걷지도 못하셨죠.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할 때 저는 두 가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통증과 예전같이 농사일을 감당하실 정도로 잘 걸으시는 것. 통증은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더 이상 예전처럼 일을 하실 수 없다는 것은 정상적인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죽음에 있어서도, 피해갈 방법을 찾을 때와 불가피하게 받아들이고 직면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죽음에 대한 제 주장은 모두 후자를 전제로 하는 것이고요.

 

반디 | 현대인에게 죽음은 기피와 터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죽음에 대한 경험은 병원, 장례식장 등, 특화된 공간에 한정되어 있고요. 말하자면 죽음이 일상적 공간으로부터 내쫓긴 것인데요. 병원에서 오래도록 근무하시면서 이에 대한 고민이 없지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

 

김형숙 | 저는 여전히 가능하다면 일상적인 삶의 공간 안에서 죽음을 맞는 것이 가장 자연스런 마지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생활하던 가정에서 죽음을 맞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적, 인적 지원방안이 마련되기를 희망하고 있고요. 호스피스 케어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시점에 이런 희망이 너무 꿈 같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생각으로 가정 호스피스 활성화에도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병원에서조차 죽음이 기피와 터부의 대상이 되어 서둘러 처리할 문제로 다루어지는 데 있다고 봅니다. 중환자실에서 환자가 사망하거나 임종이 예상되는 경우 간호사로서 가장 난감한 점은 바로 옆 병상 환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사망한 환자의 가족들이 소리 내어 울지 못하도록 제지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반병동에서 다인실 환자 중 사망이 임박하여 ‘처치실’이라고 하는 곳으로 이동해 사망을 기다리는 경우를 보면 그야말로 죽음이 ‘은폐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병원에서 죽음이 기정사실이 된 환자조차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가족이나 가까운 지인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돕지 못하고, 환자의 죽음을 확인하는 절차로서 가족의 마지막 면회가 이루어지는 현실입니다. 중환자실이나 암병동뿐 아니라 일반병동에도 큰 비용 부담 없이 임종환자와 가족들이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격리방을 준비하는 등 병원 안에서 죽음을 대하는 태도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반디 | ‘연명치료 중단’과 ‘존엄사’ 논쟁은 오래 전부터 있어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혹 병원과 보호자 사이에 벌어지는 법정투쟁이 기사화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이 일반으로까지 확대되지 않고 있습니다. 저자 님께서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김형숙 | 잘 모르겠지만, 죽음에 대한 우리사회의 태도와 맥락을 같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좀 불순한 생각이지만)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논의를 전개시킬 만한 당사자들은 모두 사망했고, 살아있는 이들에게 죽음은 자신의 문제로 여겨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각자 살아내기도 벅찬데 ‘먼 훗날에나 잠깐 거쳐갈 삶의 마지막’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또 우리사회가 워낙 급격히 변하는 중이라 몇몇 사건을 계기로 불거진 문제들이 학계에서 논쟁이 되는 것과 일반인들의 경험으로 체화되는 데 시간 차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연명치료중단과 존엄사 논쟁을 불러일으킬 만큼 첨단의학의 발달이 가져온 문제들이 우리사회에 불거지기 시작한 것도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체감하기로는 그래도 최근 들어 전문가집단을 중심으로 이러한 문제의식을 확산하기 위한 움직임이 꽤 활발해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반디 |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은 경험에서 비롯된 사례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가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진 알기 어려웠던 ‘중환자가 된다는 것’과 ‘중환자실에서 죽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실상을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었고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쓰시는 동안 어려운 점도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책을 쓰면서 특히 염려되거나 마음이 쓰이셨던 부분이 있었나요?

 

김형숙 | 책을 쓰면서 뿐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마음 쓰이는 부분이 있습니다. 많이 일반화시켰다고는 하지만 구체적인 사례를 사용하고 있고, 대부분 가슴 아픈 경험을 사례를 쓰다 보니 (환자와 가족뿐 아니라 연관된 의료진들까지 포함하여) 당사자들이나 유사한 경험을 한 분들의 상처를 건드리면 어떡하나, 독자들에게 등장하는 상황이나 사람들에 대하여 엉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면 어쩌나 하는 것. 또한 민감한 이슈들이 많은 의료현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니 제 주제와 능력을 벗어나는 것까지 논의가 확대되는 것은 아닌지…… 등등

 

다행히 출판 후 만난 분들이 구체적인 사례에 집중하기보다는 전반적인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이를 확산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주셔서 안심하고 있습니다.

 

반디 | 자신의 죽음으로부터 주변화되어 있는 현대의 죽음과 관련하여, 그 문제의식과 고민을 이어가는 데 참고가 될만한 책이 있을까요?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처럼 일반인들도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책으로요. 더불어 그 동안 읽으신 책 중, 책이 전하는 마음과 생각이 참 좋더라, 하는 책이 있다면 몇 권만 추천해주세요.

 

김형숙 | 먼저 제가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며, 일반인들에 비해 독서량이 많은 편도 아니라는 점을 염두에 두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참고로 이 주제와 관련하여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간호사로서 대학과정에서 ‘퀴블러로스의 죽음의 5단계’에 대하여 들은 적이 있었고, 《인간의 죽음》(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분도출판사, 2000)을 읽은 것이 ‘죽음을 앞둔 이들의 심리상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자신에게 임박한 죽음을 알지 못하고 사망하였기에 책의 내용이 우리 현실의 구체적인 환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내 삶의 마지막이 어떠했으면 좋겠다, 혹은 나는 어떤 자세로 죽음을 맞고 싶다는 생각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던 책으로는 너무나 유명해서 모두들 한번쯤 읽어보셨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미치 앨봄 ·모리 슈워츠, 살림, 2010),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헬렌 니어링, 보리, 1997)

 

그리고 우리는 왜 이렇게 죽음을 터부시하나, 다른 사회에도 마찬가지였나 하는 의문으로 재미있게 읽은 책들은 《죽음 앞에 선 인간》(필립 아리에스, 동문선, 2006), 《춤추는 죽음》(진중권, 세종서적, 2005)이 있는데 사진과 그림이 많아 모두 두 권짜리인데도 쉽게 읽혔습니다.

 

 

고전 작품에선 죽음이 어떻게 그려졌나 했을 때 《이반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을 다시 읽었고, 한 여성 철학자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가 어머니의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쓴 《편안한 죽음》(함유선 역, 아침나라, 2001)*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현대적 의료환경에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죽음과 함께 춤을》(베르트 케이제르, 마고북스, 2006)을 인상에 남습니다. 저자는 안락사가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한 요양원에서 일하는 의사랍니다. 의학, 죽음, 인간에 대해 그렇게 건조한 시선으로, 유머러스하게 관조할 수 있는 눈이 부러웠습니다.

 

* 편집자 주 :《편안한 죽음》는 현재 《죽음의 춤》(성유보 역, 2010)으로도 번역되어 한빛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반디 | 최근 서점에선 셸리 케이컨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이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죽음의 존재론’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심이 사전의료지시서나 호스피스 등, 실제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어떤 연결고리가 필요할까요?

 

김형숙 | 의료인, 일반인들, 학생들을 위한 죽음준비교육이 필요하다는 등의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조금 막연하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죽음에 관한 관심이 일반적인 죽음,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나 ‘막연히 언젠가 닥칠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어야만 실제적인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고, 내가 가족들과 더불어 미리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가 분명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사회적, 제도적인 준비에 대한 논의와 준비가 함께 이루어져야만 사전의료지시서나 호스피스 케어와 같은 개인적 선택이 왜곡되지 않고 인간다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한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는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다는 사전의료지시서가 병상이 부족한 급성기병원과 의료비를 부담하는 가족의 이해관계에 맞물려 대책 없는 치료중단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습니다.

 

저의 경우, 내가 살던 곳에서 마지막까지, 최대한 (도움을 받아가며) 독립적으로 일상을 유지하다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소망에 비추어 보자, 의료인으로 20년 가까이 살면서도 막연하던 의료시스템의 문제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말기상태에서 집에서 의료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상(정상)의 범위를 확장시켜 주고, 마지막까지 나를 일상의 공간에서 돌봐주는 의료나 제도는 없는가? ‘나의 죽음’, ’나의 죽음준비’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이런 사회적 준비, 사전의료지시서나 호스피스 등 실질적인 문제가 논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반디 | 어린 시절 ‘할머니 같은 이야기꾼’,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꿈을 키우셨다고 했는데요. 그래서인지 이 책은 독자가 친근한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처럼 문장을 따라 유연하게 흐르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자꾸만 듣고 싶어지고요. 혹시 아직 풀어내지 않은 이야기를 또 다른 책에서 들려주실 계획은 없으신가요?

 

김형숙 | 지금까지는 특별히 생각해둔 다른 출판 계획이 없습니다.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도 계획하여 쓴 글이라기보다는 좀 급작스런 결정이었습니다. 제가 뒤늦은 공부를 시작한 학생인 만큼 우선은 공부에 집중할 계획입니다. 혹시 마음 속에 차오르는 말들이 있으면 글을 쓰는 건 그때 생각해 보겠습니다.

 

반디 | 마지막으로 반디앤루니스 독자 여러분께 한 말씀 부탁 드립니다.

 

김형숙 | 책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미진한 부분은 논의를 통하여 함께 채워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인간다운 마지막, 준비된 죽음을 맞는 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고, 특히 병원에서의 죽음에는 의료기관, 혹은 의료인들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보니 그들의 전문적인 의견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경험상 ‘나의 죽음’에 대하여 전문가들이 말할 수 있는 부분도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의학적 판단이나 전문가의 의견 이전에 내가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지, 그를 위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할 수 있는지 활발하게 의논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형숙

 

1966년 경남 거창의 가난한 산골에서 태어나 소를 몰고 산을 누비며 자랐다. 1986년 학비가 낮고 취업이 잘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떨결에 서울대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서울의 한 대형병원에 취직하여 중환자실 간호사로 일하면서 의외로 자신에게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연명치료나 장기이식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했고, 답을 찾아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에 진학했다. 거기에서 생명윤리학을 공부하고 「의료상황에서 가족중심 의사결정의 문제점 고찰」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썼다.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다 보면 의식이 저하된 뇌·척추질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하여 그들의 팔다리에 통증을 가하는 일을 종종 하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환자에게 통증을 주는 일이 너무 괴로워 간호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결국 이직을 결심하고 19년 만에 병원을 떠났다.

 

지금은 간호사로 일하면서 겪은 일들을 돌아보고 정리할 겸 지방 도시로 이주해 간호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이제 삶의 내용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의 그것과 더 가까워지기를 기다리며 삶을 돌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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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의무를 묻는다> - 진정한 의무를 지키고 있는가

 

이한, <너의 의무를 묻는다>, 뜨인돌, 2010

 


저자이신 이한 변호사는 시민교육센터(www.civiledu.org)의 공동 대표로서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리기 위해 많은 강의 등을 통해 이를 실천하고 계신 분이다. 그는 이 책 <너의 의무를 묻는다>를 통해 의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접근을 통해 의무를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의무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를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지를 독자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했다. 

얼마전 출간되어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통해 우리는 국제적인 상식이 통하는 선에서 정의란 개념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샌델의 주장이 정의의 국제표준이라는 말은 아니다) 물론 우리 사회는'국제 표준'이 될 정도의 높은 정의감을 가지기에는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오늘날 우리가 민주주의를 향유하면서 '부가적으로' 따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의무라는 것도 때때로는 공동체 구성원들 모두에게 공정하게 부과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에서 꾸준히 그 신뢰성을 의심 받고 있는 국방과 납세의 의무는 어쩌면 이러한 사례를 대변하는 단편적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의무에 대한 논의를 크게 7장으로 나누어 궁극적으로 왜 우리가 의무를 지켜야 하는가로 결론 맺는다. 책은 특히 약자일수록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권리'와 강자일수록 소홀히 하거나 회피하기 쉬운 '의무'의 또다른 성질을 설명하면서 의무와 권리가 떼어 놓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역사적으로도 의무와 권리의 경계는 그 사회의 성숙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특히 서로간의 완력이 작용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불복종의 역사를 어느정도 수용하면서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의무라는 것은 개인의 희생을 담보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상당히 성가시게 하는 측면이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권리는 최대한으로 주장하고, 의무는 최소한으로 수행하고자하는 이기심이 있는 만큼 이것을 탓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엄격한 적용이다. 사회적으로 정의라는 화두가 완전히 정착되기까지는 그 과도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을 조율하는 법률적인 해석과 적용(입법과 집행을 포함해서)의 공정성에 있다고 판단된다.

싫건 좋건 우리는 많은 종류의 의무를 강요 당하지만, 그것이 사회를 존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이러한 의무의 강약보다는 공정성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 즉 아무리 강도 높은 의무라 하더라도 모두에게 똑 같은 기준으로 부과되고 있다면 그것을 수용할 용의는 일정부분까지는 더 커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비슷한 논리가 성립된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소시민의 눈에 비친 의무에 대한 기준은 이토록 협소할 수밖에 없다.

정치철학에 대한 깊은 논의는 독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강의 스타일을 빌어서 쉽게 설명하려는 저자의 시도는 큰 효과를 본 것 같다. 특히 저자가 가지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도 책 전반에 걸쳐 느낄 수 있었는데, 그의 철학과 활동이 일관성을 갖는 대목이라고 보여진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의무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한 번쯤은 생각해 봄직하다. 또 실제로도 지도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구성원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해 왔고, 우리는 그러한 논리에 꽤 익숙해 있지만 어찌된 일인지 실천하는 데는 소극적이다. 그런 이유로 각자가 스스로에게 이 책에서 말한 진정한 의무를 지키고 있는지를 질문해 보는 것으로도 저자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의무의 핵심은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나의 권리에 속하기 떄문에, 이야기를 듣고 다른 사람의 기분이 좀 나빠진다고 해도 의무에 위배되지는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의무란 그런 것입니다. 의무는 공정한 부담을 다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부담을 다하다는 전제 위에선, 누구나 자유롭게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의 고유한 계획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189쪽)

 

오늘의 책을 리뷰한 '정만서'님은?
40 세 직장인이자 학생의 신분으로 과학과 경제 분야의 책을 많이 읽는다. 우주와 생명의 신비를 밝히는 과학자들의 노고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그래픽 디자인을 취미로 배우고 있다. 년간 독서량은 250 권 정도, 특기는 속독법 5 단이다. 독서에 관해서는 "깊게 파기 위해서는 먼저 넓게 파라" 는 말을 신조처럼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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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클턴 평전> - 불완전한 인간을 넘어선 어느 탐험가의 초상

롤랜드 헌트포드, <섀클턴 평전>, 뜨인돌, 2005 


"성공을 거둔 탐험가들. 예컨대 남극까지 1,328킬로미터를 썰매로 달리면서 엄격한 일정에 따라 썰매를 끌던 개들을 잡아먹고, 네 동료 가운데 하나가 치통에 걸린 것 외에는 동상, 괴혈병, 설맹의 근처에도 가지 않고 말짱하게 돌아온 초실용적인 노르웨이인 로알드 아문센 같은 사람에게는 별 관심이 생기지 않는다.

즐비하게 늘어선 영국인 극지방 탐험 실패자들 가운데 아문센에게 패배한 로버트 팰컨 스콧 대령만큼 낭만적인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사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간직해 왔다." 
-앤 페디먼, <서재 결혼시키기>, 46쪽

나 또한 앤 페디먼과 유사한 이유로 남극점 정복을 위한 세기의 경쟁에서, 아문센의 승리보다 스콧의 패배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페디먼 여사의 말마따나 "스콧의 마지막 일기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도 슬프다". 그리고 아문센과 스콧에 대한 탐구는 자연스레 탐험시대의 마지막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어니스트 섀클턴으로 귀착한다.

새클턴의 세 번째 남극탐험이자, 그에게 '위대한 실패자'라는 명칭을 갖게 한 '인듀어런스호의 탐험'에 관한 알프레드 랜싱(<섀클턴의 위대한 항해>)과 캐롤라인 알렉산더(<인듀어런스>)의 저서로, 이미 탐험의 소상한 과정을 쫓은 적이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섀클턴에 관한 저작들을 찾아 헤매다보면 만나게 되는 것은 롤랜드 헌트포드의 <섀클턴 평전>과 어니스트 섀클턴의 자서전 <SOUTH>이다. 물론 탐험대원들의 일기와 증언이 동일하게 인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네 권의 책을 읽다보면 28명의 인듀어런스 대원들의 면면히 상세하게 그려지기까지 한다.

그 중에서 <섀클턴 평전>은 인듀어런스 호의 여정만이 아니라, 섀클턴의 네 차례에 걸친 남극탐험을 모두 만나볼 수 있는 방대한 책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책들과 사뭇 다른 시각에서 섀클턴을 조명한다. 단언하건대, 13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 속에는, 추문과 폭로로 얼룩진 스콧과 섀클턴의 관계가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탓에, 당혹감과 더불어 널리 고착되어왔던 탐험가들의 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까지 제공하고 있다.

스콧의 1차 남극탐험에 동행했던 젊은 날의 섀클턴에 대해, 기존의 책들에서는 '괴혈병으로 인해 남극점 정복에 실패했다'는 간단한 언급만이 나와 있는데, 이때부터 시작된 스콧과 섀클턴의 뿌리 깊은 반목은 스콧이 죽기 전까지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노르웨이인들의 경험과 조언으로도 극지방에서의 썰매개와 스키의 중요성을 전혀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 영국 탐험대의 태도는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다. 썰매개를 조련하지 않고, 스키를 제때 배워두지 않아서 스콧, 윌슨, 섀클턴은 손수 썰매를 끌며 북구의 탐험대들이라면 수월하게 갔을 여정을, 미련스럽다고 할 수 밖에 없는 방법으로 주파하려한다. 추위와 배고픔, 질병에 시달리며 썰매를 끄는 탐험대의 행렬이라니, 그들이 살아돌아 올 수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스콧은 섀클턴이 자신의 부족한 리더십을 위협한다고 느껴지자, 노골적으로 모욕과 수치를 준다. 천식과 괴혈병으로(거기다 섀클턴은 심장에 이상이 있었다)으로 가장 위독한 상태에 이른 섀클턴을 썰매에 태우고 기지로 돌아와야 했던 스콧은 영국으로 귀환했을 때, 탐험의 실패를 섀클턴의 병으로 돌린다. 섀클턴은 분노와 수치에 치를 떨며 스콧보다 약한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2차 탐험을 계획한다.

섀클턴의 2차 남극탐험은 국가적 원조가 아니라 개인적 탐험의 일환으로 추진되는데, 그의 인간적 매력에 빠져든 후원자들이 거금을 내는 형식보다는, 대출보증을 서주는 식으로 진행되기도 한다. 탐험 이외의 모든 분야에서 실패와 빚더미에 허덕이는 그에게 남극을 정복했을 때 얻을 수 있는 명예와 부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스콧은 섀클턴에게 자신의 1차 탐험 당시의 항로의 독점권을 주장하며 각서를 요구하기까지 하는데, 결국 이를 지키지 못한 섀클턴을, 스콧은 죽을 때까지 비방을 멈추지 않고 저주를 일삼는다.

앤 페디먼과 같은 이들이 인간적인 매력이라고 해석하는, 영국탐험대들의 낭만주의적 성향, 즉 썰매개나 스키도 없이 실패한 선례들을 몇 번이고 되풀이할 뿐인 그들의 행적에 대한 저자의 일갈이 인상적이다.

"이러한 상황은 그 이후에도 10여 년 동안 계속하여 되풀이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리석음은 영국 극지방탐험의 역사에서 '영웅시대'라는 낭만적인 이름으로 치장되었다. 하지만 많은 영웅주의가 그러하듯이 그것을 불필요한 낭비였고 무능함을 감추는 껍데기일 뿐, 한 마디로 말해 섀클턴 일행은 스스로 만사를 어렵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201쪽)

섀클턴이 썰매개 대신 말을 이끌고 88도 23분까지 도달했던 기록은 기적이나 다름없다. 아문센을 비롯한 북구의 탐험가들은 섀클턴이 잘 조련된 썰매개와 장비를 구비했다면 분명 남극점을 정복하고도 남았을 거라고 극찬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스콧은 섀클턴의 실패를 거울삼지도 않은 채, 극지탐험에서는 무익할 뿐임이 증명된 말을 이끌고 결국 돌아오지 못할 극점을 향한 탐험을 하게 되는데, 스콧의 일기에는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설과 비방이 가득 적혀있기도 했다고 한다. 스콧의 <남극일지>는 대필 작가의 각색과 스콧 미망인의 편집을 통해, 지금 같은 형태로 출간되었다니, 역시 진실이 가진 힘은 때때로 고약하기 그지없다.

20세기 초, 극지탐험에 관한 유럽 국가들의 각축은 냉전시대의 '우주전쟁', 달에 깃발을 꽂으려는 암투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새로운 항로와 정복자의 이름을 붙여 완성되어가는 극지도, 미지의 대륙에 대한 독점권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엘도라도였다. 무사 귀환한 탐험가들은 당국의 민관외교관으로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동원령에 이용되거나, 단교중인 국가와의 관계회복에 크나큰 영향을 끼칠 정도로 각광받는 인사였다. 당시 극지탐험에 있어 독보적인 업적을 연일 갱신하는 노르웨이에 비해, 스러져가는 대영제국의 황혼을 유예시키기 위해서는 영웅의 존재가 절실했던 영국의 상황을 이해하면, 불멸의 영웅으로 거듭난 스콧의 사례는 그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남극을 통해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한 번도 감추려하지 않았던 섀클턴은, 기사작위와 세간의 명성만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다. 손을 대는 모든 일에 실패한 생활인 섀클턴, 아내 에밀리에게만 충실하지 못한 남편 섀클턴, 이제는 경쟁할 수도 없이 영웅으로 산화해버린 스콧을 뛰어넘으려는 탐험가 섀클턴, 그는 극을 꿈꾸고, 실행하고, 좌초하더라도 살아남으려 애쓰는 그 무한 극한의 상황에서가 아니면 진가를 발휘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세 번째 탐험이자 섀클턴을 불세출의 리더로 인정받게 만든 인듀어런스 호의 남극횡단탐험의 장에 이르자, 아이러니하게도 저자는 남극탐험을 둘러싼 전혀 명예로울 것 없는 폭로와 추문으로 독자의 불편한 오감을 자극하던 것을 잊은 듯 보인다.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의 허장성세와 다를 바 없던 웨들 해를 항해한 후, 남극을 횡단, 로스 해를 통해 귀환하겠다는 섀클턴의 준비되지 않은 탐험에 무엇보다 할 말이 많아 보일 것 같은 저자가 기존의 전기 작가들과 다를 바 없이 섀클턴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찌 보면 무수한 섀클턴 관련저서들이 '인듀어런스'에 이르면 동어반복과도 같은 서술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아무런 불만 없이 수긍해버리고 마는 내가 있다. 약 2년에 걸친 인듀어런스 호의 28명의 대원들의 문명으로의 귀환은 정말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으니.

섀클턴이 얼마나 역경의 상황에서 뛰어난 리더였는지에 대해 이견을 갖거나, 추앙을 보태고 싶지 않다.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목적의식도 없이 네 번째이자 마지막이 된 퀘스트 호를 타고 떠났던 남극탐험에서 고질적인 심장발작으로 생을 마감하는 섀클턴. 우주비행사들이 지구로 귀환한 후, 유명세와 언론의 취재경쟁에서 벗어난 이후, 오히려 자신의 생의 목적을 잃고 좌초해버리고 마는 사례처럼, 섀클턴은 극지방에서의 극한의 도전 속에서만 초신성의 파급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영웅시대'의 마지막 탐험가였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할 뿐이다. 남극을 꿈꾸고, 정복하려했지만 오히려 정복당한 것은 섀클턴 자신이었을지언정.

아마추어에 불과한 급조된 탐험대, 무지와 편견 탓에 영양실조와 괴혈병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던 식단, 선진적인 최신 장비와 기술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던 영국탐험대의 전통, 오로지 결과만이 상쇄시킬 수 있는 투명하지 못한 탐험을 둘러싼 이권다툼 속에서 어니스트 섀클턴이 그토록 분투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각해본다. 준비 부족과 잘못된 계획으로 종종 대원들을 사지에 몰아넣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대장'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충분히 자각하고 책임지려한, 그리고 책임을 완수한 흔치 않은 인간이었다. 그의 불멸은 낭만주의 발로에서 비롯한 영웅시대의 조작된 위안이 아닌, 불완전한 인간의 영역에서 완성된 위업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문차일드'님은?
영혼을 위한 맛깔난 성찬, 독서를 위한 독서에 일상적으로 매진하고자 하는 활자중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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