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07.23 《히틀러의 철학자들》 - 진실의 탈을 쓴 사상을 분별하자
  2. 2011.08.17 <나무들도 웁니다> - 인간에 대한 버릴 수 없는 믿음
  3. 2009.08.03 권위에 대한 복종 (1)
  4. 2009.06.26 존 라베 난징의 굿맨: 전쟁에 영웅은 없다

《히틀러의 철학자들》 - 진실의 탈을 쓴 사상을 분별하자

이본 셰라트 | 《히틀러의 철학자들》 | 여름언덕 | 2014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으로 연일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특히 노약자나 어린아이를 구분하지 않고 살해하는 장면은 사람의 본성 자체를 의심하게 만든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악마로 만드는 것일까? 그들이 믿는 신과 지켜야 할 민족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와 비슷하게 사람이 사람을 학살한 일이 있다. 20세기 제2차 세계대전 주역 중 하나였던 독일이 그 경우다. 히틀러라는 희대의 전쟁광으로 표현되는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유인인 학살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학살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의 주역 히틀러는 무엇을 믿고 만행을 자행했을까? 독재자 한 명의 야심에 의해 그렇게 된 것으로 보기에는 학살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히틀러가 그런 일들을 할 수 있도록 밑바탕을 만들어 준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히틀러와 어떤 관계를 맺었고 그들의 훗날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책이 이본 셰라트의히틀러의 철학자들이다. 본문에서는 히틀러의 독재정치를 철학적, 법률적으로 보장하게 만들어 준 이들의 행보를 따라가며, 철학이 독재정치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밝히고 있다. 당대 최고의 철학자는 물론 동시대 수많은 지식인이 자신을 '철학적 지도자'로 여겼던 히틀러를 지지했으며, 반대자 탄압, 유대인 학살,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온갖 구실을 제공했다.

 

1년여 동안 수감생활을 했던 히틀러는 칸트, 쇼펜하우어, 헤겔, 포이어바흐, 니체 같은 그 이전 세대의 걸출한 철학자들이 철학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곡해하며 자신의 사상적,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다. 이는 단순히 히틀러의 곡해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볼 수 없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들 철학자의 견해가 인종주의적 요소가 많았다는 점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유대인은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주장을 했으며, 게오르크 헤겔은 유대인을 유럽에서 배제했으며, 그들을 인류 문명 바깥의 열등한 존재로 분류했고, 대단히 애국적인 독일 민족주의자인 프리드리히 실러, 독일인은 유일무이하며 그 순수성은 보존되어야 한다고 선언한 요한 피히테 등을 히틀러는 자신의 철학적 기반으로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여기에는 익숙한 독일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법률가로 활동한 카를 슈미트와 강력한 지지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비롯하여 알프레트 보임러와 에른스트 크리크 등이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나치를 옹호했을 뿐 아니라 반대자 탄압, 유대인 대학살,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온갖 구실을 제공했다. 또한 이들에 의해 탄압과 박해를 받았던 발터 벤야민과 테어도어 아도르노, 하이데거의 학생이자 정부였던 한나 아렌트, 백장미단의 일원이었던 쿠르트 후버 등 저항 인사들의 모습을 조명하며, 뉘른베르크 재판과 그 이후까지 담고 있다.

 

역사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학살을 저질렀던 주역들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대부분 자신의 과거를 숨기거나 인정하지 않으면서 대학이나 패전 이전의 자리로 돌아갔으며 이후 더 주목을 받으며 활동하게 된다. 이와 반대로 독재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며 망명했거나 저항했던 학자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린 경우가 많았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슷한 모습이어서 씁쓸하기만 하다.

 

철학은 윤리학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삶에 깊숙이 개입된 윤리는 비윤리적인 문제에 대해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삶에 중요한 순간에 철학은 수준 높은 윤리 의식으로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오직 진실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 시대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 책은 우리의 통념 속에서, 교육 속에서, 문화 속에서, 거짓된 진실의 탈을 쓴 채 행세하고 있는 온갖 관념과 사상을 분별해내고 우리를 둘러싼 사회와 역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통찰력을 키워줄 훌륭한 비판적 잣대 역할을 해줄 것으로 보인다.

 

 

오늘의 책을 리뷰'무진기행' 님은?
한 명의 저자는 곧 하나의 세상이기에 저자의 눈으로 보는 새로운 세상은 언제나 설렘과 더불어 가슴 벅찬 감동을 전해줍니다. 책을 통해 세상과 만나는 행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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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도 웁니다> - 인간에 대한 버릴 수 없는 믿음




 

이렌 코앙 장카, 마우리치오 A.C. 콰렐로 | <나무들도 웁니다> | 여유당 | 2011

 

16살의 짧은 생을 마감한 안네 프랑크. 안네의 삶은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인간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안네. 무참한 어른들의 비인간적 야만 속에서도 안네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책은 150년의 시간 동안 인간과 함께 숨을 쉬었던 한 마로니에 나무가 회상하는 안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안네가 최후의 2년 동안 숨어 살았던 공간. 암스테르담 프린센흐라흐트 263번지 뒤뜰에서 살았던 마로니에 나무는 그렇게 안네를 추억하고 있습니다.

 

안네는 바로 이곳으로 1942년 7월 6일 오게 됩니다. 그리고 1944년 8월 4일 독일 경찰에게 발각돼 체포되었고, 이듬해 3월, 베르겐벨젠 집단 수용소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너무도 짧은 삶을 살아야 했던 안네. 그리고 그러한 안네의 마지막 시간들을 지켜봐야 했던 나무. 나무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안네를 추억하고, 자신 역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낍니다.

 

2010년 8월 결국 벌목의 위기까지 넘겼던 마로니에 나무는 폭풍에 쓰러지고, 베어집니다. 안네의 마지막을 지켜봤던 나무가 사라지고 나면, 이제 아무도 그 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무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넘어뜨리기 전에 내 몸에서 눈 하나를 떼어 낼 거예요. 그리고 내가 남긴 빈자리에 그것을 심겠지요. 그 눈은 똑같이 닮은 쌍둥이처럼 또 다른 나랍니다. 나무는 땅속 깊이 뿌리내리고, 양분을 빨아올리며 자라겠지요.”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안네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아이들이 생명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살육의 지옥에 끌려가기도 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살인을 하고 또한 살해당합니다. 아이들에게 어른은 결코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하지만 때문에 어리석은 결정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으로 전혀 관계없는 이들이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이 인간처럼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영영 꿈일 뿐일까요.

 

답은 안네의 짧았던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을 기억하고 또한 치열하게 삶과 싸워나갑니다. 그리고 인간을 믿습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인간들이 사라지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도 분명 자신의 빛으로 주위를 밝게 하는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세상이 천천히 사막으로 변하는 걸 본다 / 나는 으르렁거리는 천둥소리를 듣는다 / 늘 귓가를 맴도는 이 거센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와 / 우리마저 죽일 터이다 /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느껴진다 / 하지만 하늘을 바라볼 땐, 모든 일이 잘 끝날 거라 생각된다 / 이 모진 시절이 가고, 다시 고요한 평화가 / 세상을 다스릴 날이 올 것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metalkid’님은?
천지간의 좀 벌레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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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에 대한 복종



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에코리브르, 2009

 들리나요, 그 목소리

 소설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의 여주인공 한나는 나치 전범으로 나온다. 온 몸, 인생을 걸고 한나를 사랑했던 소년 미하엘. 그는 우연히 재판장에서 한나를 다시 만난다. 아무 말 없이 떠난 그녀를 다시 만나는 그곳이 하필이면 재판장이라니. 한없이 따뜻하기만 했던 그녀는 참혹한 학살의 현장인 수용소에 감시원이 되었다. 순수한 기억에서 멈춘 미하엘은 눈앞에 서 벌어지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충격이다. 하지만 사랑은 그리 쉽게 멈추지 않고, 둘의 교감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복잡하다. 다시 그녀를 그리워하는 소년의 마음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한나였다면. 만약 나치가 나에게 학살을 도우라고 강요했다면 나는 어땠을까. 지금 같아서야 정의감에 불타 단칼에 거부할 것 같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아.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까 고민하지 말고 해. 그 무엇 하나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역사를 보더라도 그 결정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리라. 만약 그랬다면 나치 학살이나 광주에서의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었다. 사회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이 30년 전에 쓴 <권위에 대한 복종>. 검은 배경에 위압적으로 나를 지목하는 거대한 손. 순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권위에 대한 복종>은 누구나 거북해하지만, 누구나 하고 있는 복종에 대한 이야기이다. 학교에서 배우길 인간은 분명 합리적인 동물인데 우리는 나라, 집단 등이 이해할 수 없는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목격한다. 왜 인간은 권위 앞에서 무기력해질까. 저항은 언제나 힘든 것일까. 복종이 애초 그런 것이라는 답은 별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저자는 답을 찾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한다. 먼저 ‘처벌과 학습’이라는 주제로 실험을 한다고 실험 참가자들을 모은다. 참가자는 질문자와 학습자로 나뉘어 질문을 묻고 답한다. 그런데 학습자가 답을 하지 못했을 때 질문자는 전기 충격을 가한다. 질문자가 망설이면 감시자는 질문자가 실험을 지속하게 한다. 결과? 많은 학습자가 450볼트의 전기 충격을 받게 된다.

사실 이건 트릭이다. 저자가 진짜 실험하고자 했던 주제는 ‘처벌과 학습’이 아닌 ‘권위와 복종’이다. 학습자(희생자)에게 가해지는 전기 충격은 없으며, 그는 단지 충격을 받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질문자(피험자)가 언제까지 실험을 지속하는가이다. 학습자가 고통에 몸부림을 치는 것은 보면서도 질문자가 언제까지 감시자(실험자)의 명령에 따를까. 놀랍게도, 조건과 상황에 따라 변화하기는 하지만, 많은 질문자가 450볼트까지 실험을 지속했다. 울부짖고, 심지어 기절하는 연기를 리얼하게 펼치는데도 말이다. 감시자에 대한 복종이다.

흥미로운 것은, 실험 전에는 많은 참가자들이 그런 상황에 처할 경우 실험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자신은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이게 일상을 사는 우리의 모습 아닐까.) 하지만 결과가 말해주듯 그들은 권위에 복종한다. 물론 이것이 ‘학습과 처벌’을 주제로 하고, ‘전기 충격이 신체에 장기적인 상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약속을 저버린 채, 눈앞에 보이는 타인의 고통 보다 권위에의 복종을 선택했다.

스탠리 밀그램 교수는 실험을 통해 ‘인간이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내재된 폭력성에 기인한다’는 견해를 뒤집는다. 구조적인 폭력은 인간의 내재된 폭력성이 아닌 강력한 권위에서 온다는 것이다. 효율적으로 진화하기 위해 사회적 약속을 맺고, 스스로 권위에 복종을 택하는 인간의 비극적 운명. 이때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정하는 것 같은 양심이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특정한 상황이 발생하면 양심은 가슴 깊은 곳으로 침전하고, 권위에의 복종이 앞서게 된다. ‘이것은 내 의지가 아니야’라고 하면서 개인적인 책임과 자율적 인간을 포기한다.

1974년 이 책이 처음 출간됐을 때, 사람들은 동요했다고 한다. 무분별한 복종이 부르는 폭력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비판도 받았다. 실험 대상이 한정돼 있고,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기에는 정밀하지 못한 실험이라는 것. 하지만 저자의 실험과 유사한 현상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걸 보면, 그의 논리가 일정부분 타당한 것 같다.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내가 언제 양심을 버리고 권위에 복종했을까. 답을 내기가 쉽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책을 덮고 한참을 생각했다. 이미 성인이 된 나는 누구의 말을 듣고 있을까. 부모의 가르침? 학교에서 배운 지식들? 사랑과 평화를 말하는 종교인들? 도서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철학자들? 아니면, 쉴 새 없이 오감을 자극하는 자본주의 마케팅의 결과물들? 순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졌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강요하는 것이 아닌, 순도 100% 내 마음의 말. 위안이 되는 건, 하루에 한 번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 행복을 틔우기 위한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문득 그대가 궁금하다. 그대 행복하시길.

안늘(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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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Lawyer Marketing 2011.08.17 20:23 address edit & del reply

    나는 남성과 여성의 두 종류에 항목이 특정 평가를 갈거야 : 고려의 업그레이 드에 복용한다 최신 Microsoft 준 석사, 그리고 개인은 아이팟 터치와 마이크로 소프트 준에서 결정을 내려야 찾고. (많은 개인 스테레오처럼 주위에 보는 가치가 추가 열렬한 게이머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이 당신과 같은에서 아이팟 범위에서 별도로 열성적인 게이머에 반대하는 마이크로 소프트 준에서 지식 결정을 생성하는 충분한 정보를 당신에게 제공 좋겠 네요 동시에.)

존 라베 난징의 굿맨: 전쟁에 영웅은 없다

 

존 라베, <존 라베 난징의 굿맨>, 이룸, 2009

언젠가 전쟁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수없이 반복된 전쟁을 지켜보면,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지 알 수 있다. 전쟁을 통해 무고한 사람이 고통 받고,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멈출 줄 모른다. 부와 권력이 인간의 눈을 멀게 한 탓일까. 아니면 전쟁을 일으키는 이와 전쟁을 통해 고통 받는 이가 다르기 때문일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전쟁은 신이 준 최고의 저주라는 것이다.” <존 라베 난징의 굿맨>을 읽으면서 이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

<존 라베 난징의 굿맨>은 존 라베라는 독일인이 1937년 일본이 중국 난징을 침공할 때 그곳에서 쓴 일기를 엮은 책이다. 그는 당시 ‘난징 안전구 국제위원회’를 결성해 무고한 중국인들의 안녕을 위해 힘썼다. 독일 기업 지멘스 중국지사에서 일하던 ‘함부르크 상인’인 존 라베가 피로 물든 난징에 머문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외국인들은 일본의 침공이 시작되자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중국은 존 라베라는 이방인에게 30년 동안 잘해줬고, 그는 도망칠 수조차 없는 가난한 이들을 두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7년 9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존 라베의 일기에는 일본군의 침공, 난징 안전구 국제위원회의 활동, 중국인이 겪은 전쟁의 참혹함 등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피난을 가지 못한 중국인들은 그의 집과 안전구로 들어와 ‘생’(生)을 찾는다. 존 라베는 당시 독일의 상징인 나치 깃발을 안전구 곳곳에 세우고 일본군의 공습을 막고자 한다. 그는 500 평방미터인 자신의 집에 650명의 중국인들 피신시켰다. 상상해 보라! 더구나 식량은 떨어지고, 수도와 전기는 끊겼으며, 일본군의 위협은 끊이지 않는다. 그렇게 25만 명의 중국인이 난징 안전구로 모여들었다.

전쟁 속에서 존재할 수 없는 ‘안전구’

이성이 마비된 전쟁이란 시공에서 ‘안전구’는 존재할 수 없다. 일본군은 안전구에 들어와 중국인들을 데려가고, 강간과 폭력을 일삼는다. 또 길거리에 즐비한 시체들은 학살의 잔혹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존 라베, 미국인 선교사 등 외국인들이 폭력의 현장에 당도해 일본군의 폭력을 막고자 하지만, 몇 안 되는 이방인이 모든 현장에 존재할 수 없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 또 외국인이라고 해서 그 폭력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중국 정부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며, 외국 각국의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만 그 또한 녹록치 않다.

상황이 이쯤 되면 존 라베의 일기는 울분과 한 맺힌 절규로 가득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난징의 현실을 차곡차곡 기록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 깊은 고민을 토로하지는 않는다.

“최근의 환자는 어제 왔다. 한 여성은 목이 반쯤이나 잘려서 윌슨 박사 스스로도 이 불행한 여성이 아직 살아있다는 데 놀랄 정도였다. 어느 임신부는 총검창상을 입어 태아를 잃었다. 같은 병원에는 많은 소녀들이 성폭행 당해 들어오고 있다. 한 소녀는 연이어 스무 번이나 성폭행을 당했다.” (p. 207)

상상할 수 없는 참혹한 현장, 현실이지만 그는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영화에 비유하자면 클로즈업과 장중한 음악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영화가 아닌 극사실주의 영화나 다큐멘터리에 비교할 만하다. 어떻게 그는 그토록 침착(?)할 수 있었을까. 책을 보면 답을 찾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만약 그가 매순간 벌어지는 납득할 수 없는 일들에 분노했다면 그는 그곳에 남아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감정이 모두 소진돼 난징을 떠났거나, 아니면 남아있었더라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존 라베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자 하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깊은 슬픔은 사치다.
 

 

(사진 상하이로. 안전구의 중심 교통로. 이룸 출판사 제공)


존 라베, 독일 속의 또 다른 난징 시민

1938년 2월 23일 존 라베는 난징 안전구를 떠났다. 일본군과 중국 자치위원회는 이방인이 난징에 머무는 것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떠나기 얼마 전 난민들은 절을 하며 그에게 “당신은 수십만 사람에게 살아 있는 부처입니다”라며 인사를 했다. 또 독일로 돌아갔을 때 신문과 통신사들은 그를 영웅으로 찬양했다. 물론 그는 이를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그럼 이 살아있는 부처, 영웅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

애석하게도 그는 더 이상 영웅이 될 수 없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독일이 패망의 길로 접어들면서 나치에 가입했던 전력은 그를 ‘전쟁의 가해자’로 만들었다. 25만의 생명을 구한 영웅이 졸지에 살인자가 된 셈이다. 또 난징에서의 비참한 삶이 이제 그의 고향에서 벌어진다. 독일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러시아군은 난징에서의 일본군과 다름없으며,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존 라베 또한 무력한 피해자일 뿐이다. 살아있는 부처 존 라베도 이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존 라베가 중국에서 독일로 건너온 다음의 일기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애초 영웅도, 살아있는 부처도 없다. 그저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영웅, 부처로 비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영웅은 사라진다. 또 가해자와 피해자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비단 일본-중국, 러시아-독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구 선진국은 물론 우리도 가해자다.  ‘정의를 위해’,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살기 위해’란 변명은 이제 유통기한이 지났다.

존 라베는 굿맨(좋은 사람)이다. 그 또한 영웅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 영웅을 꿈꾸는가? 아니. ‘굿맨’이 그저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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