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5.02.09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 - 겨울의 그림자
  2. 2014.01.06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 세상을 깨우는 소리
  3. 2013.06.10 [카라얀의 전설적인 데카 레코딩] - 여름의 노래·브람스 교향곡 3번
  4. 2013.04.29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교향곡 5번] - 중심에 다가서다
  5. 2012.04.02 [멘델스존: 5개의 교향곡, 7개의 서곡] - 꽃피는 봄이 오면
  6. 2011.05.30 <슈만: 교향곡 전집 [말러 편곡판]> - 나는 슈만이다
  7. 2010.10.25 <브람스: 교향곡 2-4번> - 나의 노래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 - 겨울의 그림자

 




에브게니 스베틀라노프 |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전집』 | Aulos Media | 2010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으로 음반 녹음 역사에 길이 남게 될 러시아의 지휘자를 꼽으라면 대략 네 명으로 압축할 수 있다. 예프게니 므라빈스키(1903~1988), 겐나지 로제스트벤스키(1931~), 블라디미르 페도세예프(1932~), 그리고 예프게니 스베틀라노프(1928~2002)가 그들이다. 각자 서로 다른 오케스트라를 맡았고, 국제적으로도 조금씩 다른 장소-본국인 러시아는 기본이었고-를 배경으로 활동했다. 므라빈스키는 레닌그라드(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로제스트벤스키는 빈과 런던을 비롯한 서유럽, 스베틀라노프는 유럽은 물론이고 일본에서 굉장한 인기를 끌었었다.

이들 중에서 가장 확고한 위치를 점한 쪽은 므라빈스키일 것이다. 그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차이콥스키 교향곡 4, 5&6번 음반(DG)은 두말할 나위 없는 위치에 올라있으며, 네 명 중 나이도 가장 많다. 로제스트벤스키는 냉전 시절부터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를 비롯해 꾸준히 서방세계의 미디어에 얼굴을 비춰왔고, 페도세예프는 80년대 후반의 내한공연과 백건우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녹음의 반주를 맡은 덕분에 국내 애호가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하지만 스베틀라노프의 경우는 국내에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조금은 밀린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었는데, 그가 국내에서 제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아마도 일본의 포니 캐년에서 발매된 차이콥스키 교향곡(1990년도 녹음)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 그 시발점이었을 것이다. 서유럽, 미국은 물론이고 아시아의 오케스트라들은 흉내조차 내기 힘든 위력적인 포르티시모와 숨 막힐 듯 내달리는 템포를 자랑하는 이 녹음은 ‘러시아적인 힘’을 동경하던 한국과 일본의 애호가들을 단숨에 열광시켰고, 일본 제작반 특유의 훌륭한 음질까지 등에 업고 단숨에 므라빈스키의 그것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90년대에 녹음된 이 음반들(4~6번이 낱장으로 담겨 있는 형태도 있고, 함께 묶어 발매된 형태도 있다)이 매우 훌륭한 음반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음반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국내 음반사인 아울로스 뮤직에서 기획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여섯 곡 전곡을 리마스터링한 네 장짜리 음반이다. 약 10년 전쯤 발매된 음반이기는 하지만 깔끔한 구성의 패키지에 담긴 훌륭한 연주를 매우 합리적인 가격에 장만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한 메리트를 가진 음반임에 틀림없다. 특히 마지막 세 개의 교향곡에 밀려 디스코그래피에서 소외당하기 쉬운 1, 2, 3번 교향곡들의 연주가 상당히 좋은 편이어서, 별생각 없이 ‘한번 들어나 볼까?’ 하는 마음으로 걸어놓으면 평소에는 잘 몰랐던 이 작품들의 매력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이 음반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곡은 교향곡 4번이다. 스베틀라노프의 녹음은 앞서 언급한 므라빈스키의 DG녹음 보다 훨씬 강렬한 파괴력을 뽐내고 있으며, 1악장부터 귀를 찌르는 호른의 자극적인 포르티시모가 압도적이다. 또한 4악장의 종결부에서 들려주는 충격적인 아첼레란도(점점 빠르게)는 이 음악은 오로지 러시아인들에 의해서만 온전하게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소리 높여 강조하고 있다. 5번 교향곡은 음질의 탓인지 파괴력은 다른 연주들보다 덜하게 들리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곡 전체를 뒤덮고 있는 쓸쓸함과 허무함이 더 잘 드러나고 있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은 눈이 펑펑 내리는 한겨울에 들어도 좋지만, 겨울이 끝나가는 시점에 듣는 것도 나름 잘 어울린다. 그의 어둡고 쓸쓸했던 내면을 가렸던 현악과 금관의 두텁고 쩌렁쩌렁한 소리가 유독 공허하게 느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교향곡을 박력과 웅장함이라는 한정된 키워드로 기억하고 있지만, 그 가면이 벗겨지고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차이콥스키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스베틀라노프의 이 음반은 작품의 이면으로 숨어버린 그를 찾는 이들에게 큰 도움을 주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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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 세상을 깨우는 소리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 DG

 

모든 사람들은 형제가 되리라

 

사실 베토벤 교향곡 9번「합창」이 꼭 연말에만 연주되어야 하는 곡은 아니다. 음악 연주의 역사에  어느 정도의 조예가 있는 애호가들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이제 막 고전음악을 듣기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아, 그래?"와 같은 반응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일본 음악·공연계의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에서는 각 오케스트라들이 12월의 정기연주회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하는 게 일종의 관습처럼 내려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곡이 초연된 것은 연말이나 겨울의 분위기와는 상관없는 5월이었으며 하다못해 가사에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되어 얼싸안고 자유를 위한 노래를 부르며 성역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가슴 벅찬 가사가 한 해를 정리하고 반성하는 연말과 새로운 시작을 위해 희망을 갖고 준비하는 연시에 적합했던 게 아닐까.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행사는 역시 거창하게 해줘야 제격이며 자고로 축제에는 명분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지구상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을 축제일을 하나만 정해야 한다면 큰 이변이 없는 한, 아마 새해를 맞이하는 날이 되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종교·정치·인종을 막론하고 인류 전체의 유산으로 자리 잡은 악성의 이 위대한 음악도 그 축제를 기념하는 자리에 당당히 올라와 있을 것이다.

 

올 12월에 서울시향과 정명훈은 또 하나의 음반을 발매해 자신들만의 축제를 즐겼다. 바로 앞서 말한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순수한 국내 합창단과 독창자들과 함께  발매한 것이다. 도이치 그라모폰이라는 메이저 레이블에서 대작을 녹음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념할 만한 일인데 음반의 질 또한 매우 우수하다. 속된말로 '최소한의 선' 정도를 넘어서 더 높은 수준까지 욕심을 낼 수 있는 음반이 탄생한 것이다. 

             

달려라,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길을!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새 음반을 소개하기에 앞서 일단 그동안 이어져 내려온 9번 교향곡의 중요한 녹음들에 대해서 간략히 정리해봐야 할듯하다. 먼저 이 곡과 관련해 '최고의 명반' 지위를 상당히 오랜 시간 지켜온 음반이 있다. 국내 모 원로 평론가의 책에도 실려 유명해진 푸르트벵글러와 바이로이트축제 관현악단의 1951년 녹음이 그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귀로 듣기에 이 음반은 '명반이라기보다는 그저 오래된 녹음 중에 가장 유명한 음반' 정도로 분류하는 게 나을 듯하다. 최근의 조사결과 이 녹음은 라디오 방송, 리허설 음원, 실황음원 등이 짜깁기되어있는 음반임이 밝혀졌고(물론 이처럼 여러 개의 음원 중 가장 좋은 것들을 재조합하는 방식은 적지 않게 쓰이는 방법이다. 하지만 문제는 푸르트벵글러의 이 음반이 마치 하나의 테이크로 녹음된 실황처럼 알려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한 논란을 감안하고 듣더라도 음질, 연주의 일관성 면에서 큰 점수를 주긴 힘들듯 싶다. 아마 구하기는 힘들겠지만 푸르트벵글러가 사망하기 몇 달 전인 1954년 8월에 루체른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음반이 훨씬 뛰어나다 볼 수 있다.

 

푸르트벵글러의 사후로는 헝가리의 지휘자 페렌츠 프리차이가 1957년에 베를린 필과 녹음한 음반을 첫 번째로 꼽고 싶다. 칼같이 맞아 떨어지는 앙상블과 카라얀에 의해 변화되기 이전의 베를린 필의 카랑카랑한 음색이 어우러진 매력적인 연주이며 1악장부터 4악장까지 지치지 않고 밀어붙이는 추진력과 큼지막한 스케일이 듣는 이를 압도한다.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음반은 1962년도의 CD녹음과 1977년의 영상이 담긴 DVD가 가장 훌륭하며 특히 77년의 영상물은 카라얀 특유의 영상연출법과 맞물려 음악 역사상 또 하나의 금자탑을 세웠다.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조지 셀의 1968년 녹음(BBC)은 활화산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격정이 인상적이며, 아바도와 베를린 필의 2000년도 영상물은 실황연주 특유의 열기와 깔끔하게 닦여진 오케스트라의 음색이 매우 훌륭하다.

 

정명훈과 서울시향의 이번 음반은 전체적인 레코딩 역사의 큰 틀에서 봤을 때 사실 뚜렷한 특징이나 이정표를 제시하진 못한다. 그보다는 거의 새롭게 태어나 몇 년간의 단련을 거친 후 아시아 최고 수준으로 재탄생한 오케스트라의 준수한 녹음기록 정도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얼핏 평가 절하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서구음악(서양인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주하는 그 서양 고전음악이다!)을 연주하는 아시아의 오케스트라로서 보여줘야 할 것은 충분히, 그리고 멋지게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자신이 태어난 곳, 자란 곳에서 체득하지 못한 걸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남들이야 말은 쉽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서구인이 아무리 한국민요를 구성지게 부른다고 해도 한국 사람이 직접 흥얼거리는 그 자연스러움에 비할 수 없듯이, '원조' 혹은 오리지널의 거대한 벽 앞에 겁 없이 도전장을 내미는 그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쇼비니즘에 입각한 칭찬이 아닌, 진정한 노력과 투자로 최선의 결과물을 위해 달려가고 있는 그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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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얀의 전설적인 데카 레코딩] - 여름의 노래·브람스 교향곡 3번

 

Herbert Von Karajan | [카라얀의 전설적인 데카 레코딩] | DECCA | 2008

 

격렬함의 끝은 허무

 

브람스가 작곡한 총 4편의 교향곡 중에서 2번과 3번은 평소에 우리가 알던 브람스의 이미지와 조금은 다른 느낌을 준다. 계절에 비유하자면, 1번 교향곡은 겨울, 2번은 봄, 3번은 여름, 4번은 가을이라 말하고 싶다. 삶의 환희가 느껴지고 따스함과 넉넉함이 느껴지는 D장조의 교향곡(2번)과 여름에 내리쬐는 햇볕처럼 강렬하면서 막힘이 없는 3번 교향곡은 그의 음악세계가 우울 일변도가 아닌, 얼마나 다채롭고 매력적인 색깔들로 가득 차 있는지 보여준다. 그 중에서도 3번 교향곡은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듯한 격정과 뜨거움이 일품인데, 어느 한 부분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함 없이 쏟아지는 선율과 전개의 논리성,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강인한 소리, 그리고 그 끝에 조금씩 느낄 수 있는 작곡가 특유의 씁쓸함까지 생각한다면 이 곡이 가진 카멜레온 같은 매력을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막힘없는 악상 전개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듯이 브람스는 이 곡을 비교적 짧은 시간동안 써냈다. 그가 교향곡 3번의 작곡에 착수한 것은 1883년 5월쯤으로 보이며 여름휴가 기간 동안 중부 독일의 휴양도시 비스바덴(Wiesbaden)에 머무르며 상당 부분을 완성시켰다. 어느 정도 초고가 정리된 것이 그 해 10월이니까 거의 반 년 만에 완성시킨 셈이다. 물론 길이가 짧은 편에 속하고 그 이후로도 몇 군데 수정을 거듭하며 실질적인 작곡기간은 조금 더 길어졌지만, 첫 번째 교향곡을 완성하기까지 21년이 걸린 것을 감안하면 6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은 정말이지 새발의 피 수준인 셈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작품에는 상당히 다양한 텍스처의 악기조합과 조성의 변화, 자연스러운 주제 동기의 전개가 곳곳에 숨어있다. 특히 6/4박자라는, 쉽게 쓰이지 않는 박자로 구성된 1악장이 매우 인상적인데, F-A♭-F로 이어지는 관악기의 화음에 풍성한 현악기의 선율이 뒤를 따르며 듣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3번 교향곡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라면 바로 이 부분부터가 아닐까. 주선율과 반주로 구분은 되지만 이전 세대에 비해 여러 개의 선율이나 모티브가 대위법적으로 얽히는 구조를 좋아했던 브람스의 이전 작품들-특히 교향곡 1번의 1악장-과는 다르게, 이 작품은 선율과 반주의 역할이 비교적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고 한 번 들었을 때 멜로디라인을 잡아내기가 훨씬 수월하다.

 

특히 멜랑콜리한 정서의 극치를 보여주는 3악장은 첼로의 고음역에서 제1바이올린으로 선율이 이행되는 과정의 관현악법이 매우 뛰어나 주목할 만하다. 4악장 역시 브람스의 작품들 중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격렬하고 생동감이 넘치며 패기가 느껴지는 피날레다. 악장의 첫머리부터 시작된 F단조의 선율은 저음역대에서 꿈틀거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용솟음치며 급박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한 가지만 첨언하자면, 4악장의 격렬함이 잦아드는 곡의 종지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다. 후속작품으로 탄생한 교향곡 4번의 회한어린 1악장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던 기세로 달려들던 음표들도 결국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음을 보여주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추천음반

 

카라얀이 1960년도에 빈 필을 지휘, 데카에서 남긴 녹음이 굉장히 훌륭하다. 비교적 젊은 시절의 녹음이고 당시 최고 음질의 기술력을 자랑하던 데카의 화력이 돋보이는 역작이다. 다소 풀어진 느낌이 들더라도 자유롭고 독특한 느낌을 원한다면 오이겐 요훔과 베를린 필의 1956년 브람스 교향곡 전곡 녹음의 일부도 추천할 만하다. 다만 취향에 따라서는 극단적으로 강조되는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유튜브 등에서 미리 감상하고 구매하기를 권한다. 번스타인과 빈 필의 81년 녹음은 폭풍과도 같은 카리스마가 느껴지며 지휘자 자신의 강점을 최대한으로 부각시킨 훌륭한 예술작품이다.

 

최근의 녹음으로는 래틀과 베를린 필의 전집(EMI)과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BR Klassik)의 연주를 꼽을 수 있겠다. 래틀과 베를린 필의 연주는 그 방향점이 분명하여 애매한 곳이 없고, 또렷한 팀파니의 소리가 리듬감을 한층 더해주어서 듣는 사람에게 쾌감을 안겨준다.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연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인다. 래틀과 베를린 필의 연주보다 각진 느낌은 덜하지만 한층 풍성한 잔향을 앞세워서 독일음악의 정통성이 느껴지는 소리를 들려준다. 이 정도 범위 안에서라면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 없는 선택을 하리라 자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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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교향곡 5번] - 중심에 다가서다

 

 

김선욱·정명훈·서울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교향곡 5번] | DG | 2013

 

오케스트라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미국의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자신이 직접 진행했던 '청소년 음악회'의 소제목이기도 하다. 오케스트라의 가장 근원적인 기능과 소리에 대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오케스트라가 있고 형태, 규모도 제각각이다. 가장 기본적인 2관 편성(목관악기를 종류별로 2대씩 사용하는 편성. 수가 늘어나면 3관, 4관이 된다)에 50명도 되지 않는 현악기 주자를 가지고도 최상급의 소리를 들려주는 오케스트라가 있는가 하면, 전체 단원의 수가 100명이 넘어감에도 불구하고  그 규모에 걸맞지 않게 부실하고 불안한 앙상블을 선사(?)하는 곳도 있다. 그렇다면 훌륭한 오케스트라는 과연 어떤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왜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세계음악계에 내놓았을 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음악을 들려주는 관현악단이 손에 꼽을 정도인 것일까?

 

일단 훌륭한 오케스트라라면 기능적인 면과 음악적인 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음악적인 측면도 어떤 면에선 '기능'의 범주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앙상블'만' 기가 막히게 잘 맞추는 오케스트라는 세상에 이미 많은데다가 그런 걸로 따지자면 군인들처럼 칼같이 각지게 악기를 연주하는 북한의 경음악단이 최고일지 모른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악보를 충실하게 재현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들썩이게 하는 그 이상을 끌어내려면 악보에 쓰여 있지 않은 그 너머의 무언가를 찾아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는 펄떡거림과 삶의 환희를 안겨줄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연주자 백여 명을 앉혀놓고 각자의 파트만 충실하게 연주하게 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만큼 단순한 목표도 없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인정을 받는 것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서울시향과 정명훈, 김선욱의 이번 베토벤 레코딩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래서 일지도 모르겠다.

 

정음(淨音), 신중하게 가다듬은 소리

 

서울시향이 낸 이번 앨범의 가장 큰 장점은 소리의 집중력과 밀도다. 위에서 언급한 연주자의 숫자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좋은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는 연주자가 몇 명이 되든 자신들의 소리를 단일한 하나의 음색으로 통일시킬 줄 안다. 저음의 현악기로부터 시작된 정확한 조율-단순한 음정의 정확성을 이야기 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와의 균형감을 위한 음색의 선정을 의미한다-은 개별 악기 각자가 너무나도 개성적인 음색을 갖고 있는 목관 파트의 사운드와 합쳐지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또한 호른 파트 역시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악기 자체가 고른 소리와 음정을 유지하기 꽤나 어려운데다 작품 안에서는 금관과 목관 사이의 연결고리로써 음색 블렌딩에 결정적인 역할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유의 ‘업무분장(?)’을 센스 있게 지키기가 쉽지 않다. 

 

서울시향의 이번 레코딩은 이전에 출시했던 라벨, 드뷔시, 차이콥스키 녹음보다 확실히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극적인 감정의 기복과 풍성한 소리는 인상적이었으나 일부분에서는 울림이 다소 과하게 느껴졌던 차이콥스키에 비해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번 베토벤 녹음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이전의 녹음들에 비해 더욱 선명하고 야무지며 카랑카랑한 맛이 살아있고, 팀파니의 어택이 선명하면서도 다른 악기들과의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섞여있는 점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 또한 젊은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 5번「황제」의 연주도 좋은데, 김선욱 특유의 폭넓은 다이내믹 레인지와 선명한 타건이 돋보이며 특히 2악장에서의 침착한 프레이징은 매우 인상적이다. 느린 악장이라고 해서 필요 이상으로 늘어지거나 흐릿해지지 않으며 목관과 주고받는 부분의 호흡 조절도 훌륭하다.

 

이후에 발매될 서울시향의 음반들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는 무언가를 제대로 해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한국 오케스트라라고 해서 적당 적당히 연주해도 그 놈의(?) 애국심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박수를 쳐주는 시기는 지났다. 애호가들의 귀는 점차 그 수준이 높아져 가고 있고 하향세에 접어드는 음반시장에서 그들이 굳이 돈을 내고 음반을 사야 한다면 반드시 그만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앞으로 이들의 연주가 더 많은 이들의 귀를 수준 높게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 우리도  ‘찰지게’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를 한 번 가져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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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스존: 5개의 교향곡, 7개의 서곡] - 꽃피는 봄이 오면

 

클라우디오 아바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 [멘델스존: 5개의 교향곡, 7개의 서곡] | DG COLLECTORS | 2003

 

내가 바로 엄친아다

 

음악가들의 삶이라는 게 어떤 땐 궁상맞기 짝이 없다. 물론 요즘에는 저작권의 개념이 비교적 분명해진 편이고 음악가들 스스로도 노동자로서의 자각을 갖고 자신의 실력에 합당한 보수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몇 백 년 전의 음악가들처럼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고 집세를 못내 이사 다니기를 밥 먹듯 하는 상황은 드물다. 하지만  여전히 ‘안정적’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보기는 힘든 것 같다. 물론 자기의 능력을 발판삼아 좋은 직장을 얻고 부족한 거 없는 삶을 영위한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양 음악사 전체를 탈탈 털어봐도 은수저 물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제적 걱정 없는 일생을 보낸 음악가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역사적 상황을 봤을 때, 멘델스존만큼 ‘억’소리 나는 집안배경을 가진 음악가의 존재는 참 불가사의하게 느껴진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809년, 함부르크의 은행장으로 일하던 아버지와 아마추어 음악가인 어머니의 밑에서 태어난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F.B.Mendelsshon)의 집안은 그야말로 ‘있는 집’ 그 자체였다. 경제적 풍족함은 물론이고, 어머니는 영문학, 불문학, 이탈리아 문학 등에 박식했고 그의 누이인 파니(Fanny) 멘델스존은 천부적인 재능으로만 보면 오히려 멘델스존보다 한 수 위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문화적으로도 풍요로운 어린 나날을 보냈다. 파니 역시 작곡가로서 작품을 남기기도 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었다. 이래도 멘델스존의 집안 배경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다면? 흠... 자식이 음악에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된 아버지의 어느 해의 생일 선물은 아버지가 직접 조직해준 소규모 오케스트라였다. 이제 좀 감이 잡히시는지?     

 

나 곡도 잘 써요!

 

멘델스존에 대한 부당한 과소평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살아 있을 때는 ‘궁핍한 음악가들의 복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부잣집 도련님’ 취급을 받았고(사실과 다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의 음악 역시 덩달아 ‘심오한 고뇌의 흔적은 없고 오로지 가볍고 듣기 좋은 음악’만 추구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었다. 물론 음악적 측면에 있어서는 듣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갈릴 수 있겠지만, 그의 음악을 조금만 더 유심히 들어본다면 이러한 소리들이 얼마나 수박 겉핥기식의 비난인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특히, 관현악곡을 다룰 때 보여주는 목관의 섬세한 울림과 화사한 색채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기술이며, 그에 대비되는 어두운 텍스처의 표현에 있어서도 상당한 밀도를 자랑한다. 유럽 각지를 여행하던 중에 받았던 인상을 바탕으로 작곡된(곡을 쓰게 된 동기부터가 오오...)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와 4번 「이탈리아」의 첫 부분은 학생들의 관현악법 교재에 단골로 등장할 정도고, 피아노를 위해 작곡된 소품집인 「무언가(無言歌)」는 그 간결한 형식적 아름다움과 압축적인 화성의 표현력으로 인해 작곡을 공부하는 수많은 학생들에게 부러움과 존경의 대상으로 꼽힌다. 자, 멘델스존의 음악적 위치도 이제는 좀 감이 잡히시는지? 

 

햇살은 쨍쨍

 

멘델스존의 교향곡 4번 「이탈리아」는 애호가들의 귀에 익은 명곡이고, 그만큼 실제 연주 횟수도 많은 편이다. 햇살이 반짝이는 지중해의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친숙한 악상도 그렇거니와, 멘델스존의 최전성기에 작곡된 곡인만큼 다채로운 표현방식과 구성적인 면에 있어서 상당히 균형 잡힌 모습을 자랑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 곡을 아주 자연스럽게 연주하려면 높은 수준의 오케스트라가 필요하다. 앞서 말한 이 작품의 첫 부분에는 재잘대는 것 같은 목관악기의 빠른 리듬이 반주형태로 제시되는데, 이것이 깔끔하게 잘 연주되면 매우 효과적인 표현이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몹시 지저분하고 산만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또한 4악장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전통 춤곡인 ‘살타렐로(Saltarello)' 역시 매우 빠르고 격렬하기 때문에 연주자나 지휘자가 자칫 박자를 놓치게 될 경우에는 나머지 뒷부분의 앙상블이 모조리 무너지는 ’대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마에스트로 중 한 명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젊은 시절에 런던심포니를 지휘해 멘델스존의 교향곡 음반을 남겼는데, 이들은 그러한 위험요소들을 가볍게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멘델스존이 의도했던 티 없이 맑은 음색을 마음껏 뽐내고 있다. 제 1바이올린의 자유로운 활놀림과 안정적인 목관의 음색은 기능미에서 최고수준에 오른 런던심포니의 면모를 드러내며, 4악장에서 보여주는 논리 정연함을 갖춘 격렬함은 악단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던 남성적인 음색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매력을 갖고 있다. 다시 봄이 오려하고 있다. 구김살 하나 없이 화창한 남유럽의 모습을 노래한 멘델스존과 투명한 음색을 자랑하는 아바도의 지휘, 이보다 더 봄에 잘 어울리는 음반이 어디 있겠는가. 강력 추천이다.  

 

오늘의 음반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편견없이 음악을 듣고 편견없이 생각하고 싶어하는 음대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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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 교향곡 전집 [말러 편곡판]> - 나는 슈만이다


 

 

리카르도 샤이,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 <슈만: 교향곡 전집 [말러 편곡판]>| DECCA | 2010

  

너희가 오케스트라를 아느냐?

 

서양음악의 꽃으로 불리는 오케스트라. 우주적인 아름다움을 주는 이 분야는 예로부터 모든 작곡가들의 영원한 도전 대상이자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작곡가가 되기 위한 견습 과정에서도 처음부터 섣불리 배울 수 없고, 일정한 공부의 양을 채운 뒤에 도전하더라도 곡을 쓰는 이에게 고차원적인 구성력과 음악적 감각을 요구하는 부분이 바로 이 관현악곡인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안타깝게도, 콘서트홀에 가거나 레코드를 듣는 초보적-혹은 보통-수준의 청중들은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처럼 견고하고 훌륭한 관현악법을 보여주면서 보다 자주 연주되는 레퍼토리들에 대해선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물론, 그 중에서도 어느 악기든 직접 연주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보다 높은 음악적 이해능력을 가졌을 확률이 높지만, 아마도 앞서 말한 수준의 감상자들이 흘려 듣기 쉬운 유명한 오케스트라 작품들에 묻어있는 작곡가들의 노력과 놀라운 영감을 직접 알게 되면 더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실 우리가 ‘흔히’ 듣는 베토벤, 브람스나 관현악법의 귀재로 평가받는 라벨과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은 오케스트라를 ‘정말 정말’, 그러니까 남들이 까다로워하는 복잡다단함 정도는 가볍게 넘어서 수족처럼 다루는 경우에 속한다. 하지만 그들처럼 자주 연주되진 않더라도 작곡가 특유의 관현악적인 개성이 묻어나면서 충분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있다. 오늘 소개할 슈만의 교향곡(말러 편곡 버전)도 그런 작품이다. 특히 때로는 솔직하리만치 순수한 맛이 느껴지는 슈만의 교향곡이 말러의 손길을 거쳤을 때 느껴지는 색다름은 보다 다양한 레퍼토리와 비교 감상거리를 찾는 애호가들에게 충분한 만족을 안겨줄 것이다.

 

말러의 대장간에 어서 오세요.

 

슈만의 교향곡을 듣다보면, 다른 ‘정말 정말’ 뛰어난 교향곡을 쓴 작곡가들(Symphonist)의 작품과는 어딘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며, 베를리오즈나 멘델스존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과 비교하면 세련미나 순발력에서 뒤쳐진다는 인상을 받을 때도 있다. 특히 슈만의 뒤 세대 작곡가인 말러는 슈만의 관현악법을 보다 근대적인 시각에서 접근했고, 필요 이상으로 두터운 소리가 나도록 배치된 악기들과 그 다이내믹에 수정을 가했다. 또한 남발하면 경우에 따라 부담스러운 울림이 생기기 쉬운 목관악기의 옥타브 더블링(동일한 선율을 한 옥타브 위/아래로 중복하는 것)에 손을 댔으며 슈만 시대에는 악기의 기술적인 문제로 연주가 어려운 부분이 있던 호른 파트에도 적당히 가감작업을 하여 보다 색채감 있고 웅대한 호른 특유의 소리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다이내믹 수정의 경우에는 음악적 뉘앙스가 완전히 색다르게 들리도록 바뀐 경우도 있다. 가령 교향곡 3번 마지막 악장 첫 부분의 경우에는, 슈만이 ‘forte(강하게)’로 표기해 놓은 부분을 'pianissimo(매우 여리게)'와 ‘dolce(부드럽게)'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지도록 수정했고, 한술 더 떠 같은 부분의 목관악기 파트는 삭제해 현악기로만 가볍게 연주하게 해서 몇 마디 뒤에 나오는 또 다른 forte의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켰다.

 

한편 슈만의 의도를 살린 것뿐 아니라 말러 자신의 개성을 확연히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4번 교향곡의 피날레에는 말러가 썼던 'fff(포르티시시모-현대음악에서는 종종 ffff도 등장하지만, 현실적으로 낼 수 있는 가장 큰 포르테는 fff이다)’ 표기라든지, 금관악기에 부여된 ‘Schalltrichter auf!'(악기의 나팔부분을 허공으로 향하게 할 것) 지시 등은 슈만의 시대에는 쉽사리 상상하기 힘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러가 자신의 고집만을 믿고 슈만의 스코어에 난도질을 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다면 그런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을 것 같다. 말러의 가필은 슈만시대의 스페셜리스트였던 멘델스존, 베를리오즈를 비롯한 시대적 성향까지 염두에 둔 날카로운 탐구력과 특유의 번득이는 음악적 직감으로, 상상력은 풍부했으되 다소 둔중한 느낌이 들었던 슈만의 악보를 날렵하고 매끈한 창칼처럼 재구성해낸, 또 하나의 명품이기 때문이다.

 

심금을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지난 3월에 내한하여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음향을 들려주었던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Gewandhausorchester)는 환상적인 호흡으로 거침없는 젊음을 연상케 하는 슈만을 들려준다. 그들의 음색은 어딘가 웅숭깊은 곳이 있으며 급격하게 변화하는 최근 음악계의 추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옛것과 새것을 모두 껴안을 수 있는, 전통에서 뿜어져 나오는 중후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때 카펠마이스터(음악감독)로 재직했던 작곡가 멘델스존을 비롯해 푸르트뱅글러, 브루노 발터, 프란츠 콘비츠니, 쿠르트 마주어처럼 최고 수준의 지휘자들이 매만졌던 게반트하우스의 소리는 2006년부터 이탈리아의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를 만나 이전의 단단하고 묵직했던 소리와 함께 보다 민첩하고 섬세한 부분에서도 빛을 발하는 놀라움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교향곡 3번 E♭장조 「라인」은 자전거를 타면서 맞는 초가을 강바람처럼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며, 소리의 원근감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호른의 청량하고 풍성한 소리는 일품이다. 만약, 말러가 손대지 않은 슈만 그대로의 모습을 만나고 싶다면 자발리쉬, 카라얀, 푸르트뱅글러, 번스타인, 쿠벨릭처럼 뛰어난 녹음이 많이 있으므로 샤이의 녹음과 한번쯤 비교하며 들어보아도 좋을 것 같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있으며 지금은 공익근무요원으로서 어정쩡한 신분의 삶을 살고 있는 남자입니다. 남의 연주에 대해 끼적이는 걸 좋아하면서도 음악을 공부하며 생긴 어정쩡한 동업자 정신 탓에 나쁜 연주를 나쁜 연주라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암튼 정체가 수상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트위터 http://twitter.com/brahms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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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 교향곡 2-4번> - 나의 노래

 

MPO, 첼리비다케, <브람스: 교향곡 2-4번>, 2006

 


1945년 베를린, 전쟁이 모든 것을 바꿔놓다

1945년,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그 비극적이었던 전쟁은 유럽 음악계의 권력판도까지 바꿔놓았다.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는 나치의 독일 통치에 협력했다는 의혹으로 인해 베를린을 점령한 연합군의 재판을 받고 지휘를 비롯한 공식적인 활동을 금지당한 상태였으며, 당시 떠오르는 신예였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도 나치협력의 혐의로 활동금지를 선고받은 상태였다. 수장을 잃은 베를린 필이 전쟁 전의 명성을 회복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바로 앙상블을 다듬어 줄, 새 지휘자를 데려오는 방법이 그것이었다.

그 물망에 오른 지휘자는 러시아 출신의 독일계 지휘자 레오 보샤르트(Leo Borchard) 였다. 보샤르트의 지휘 아래 베를린 필은 다시 활발하게 연주회를 열었고 이따금 점령군을 위한 연주회를 열어 자신들의 활동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해 8월, 보샤르트는 점령지구의 초소에서 보초병의 오발탄을 맞는 사고를 당했고 현장에서 사망하게 된다. 또 다시 지휘자를 잃은 베를린 필은 급히 대타를 물색해야만 했다. 하지만 전후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뛰어난 지휘자를 구하는 일은 막막했고, 푸르트뱅글러의 복귀 또한 가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베를린 필의 한 바이올리니스트가 자신이 학생시절부터 알고 있던 유망한 루마니아인 지휘자를 추천했고, 베를린 필은 그 루마니아인과 드보르작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연주했다. 콘서트는 대성공이었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 31살의 젊은 지휘자는 점령군으로부터 베를린 필을 지휘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뒤, 독일 전역으로 연주여행도 다녔다. 그 루마니아인 지휘자의 이름은 바로 세르지우 첼리비다케(Sergiu Celibidache)였다.


방랑자의 이야기

연합군의 ‘예술가 비(非)나치화 위원회’에 불려가 재판을 받았던 푸르트뱅글러는 비교적 혐의가 가벼운 ‘단순 가담자’로 분류되어 (‘무죄’가 아니다) 베를린 필에 복귀했고, 카라얀 역시 복귀해서 빈 필을 지휘하며 활동했다. 1954년, 푸르트뱅글러가 사망하자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 자리를 놓고 두 사람이 경쟁을 하는 입장이 되었다. 한쪽은, 푸르트뱅글러의 음악적 후계자로 인정받았으나 단원들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던 첼리비다케였고 또 하나는, 빈과 잘츠부르크, 런던 등지에서 숱한 음반을 남기며 음악적인 내공과 국제적인 비즈니스 감각을 동시에 쌓아가던 카라얀이었다. 베를린 음악계는 첼리비다케의 승리를 점쳤다. 첼리비다케 역시 베를린 필이 카라얀처럼 음반 녹음에만 열을 올리는 ‘속물’보다는 푸르트뱅글러의  공백기 동안 많은 연주회를 이끌었던 자신을(당연히) 선택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뮌헨 시절의 첼리비다케>


단원들은 음악적으로는 뛰어났으나 지나치게 민감하고 고집스런 성격에다 대외적으로 베를린 필의 단점을 서슴없이 말하던 첼리비다케를 내키지 않아 했고, 운영진 역시 당시 팽창일로에 놓여있던 음반시장에서 금전적인 성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쪽은 카라얀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후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첼리비다케는 베를린을 떠났고 스웨덴, 덴마크,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고 카라얀의 근거지였던 베를린과 빈을 제외한 독일과 오스트리아 각지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나갔다. 마치 하얀 지도에 색칠을 해 나가듯이 유럽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그의 음악은 세월이 흐를수록 훨씬 성숙해져 있었고, 그러던 그가 만년에 정착해 음악인생의 화룡점정을 찍은 곳은 바로 뮌헨이었다.


1979년 뮌헨, 음악이 모든 것을 바꿔놓다.

첼리비다케의 뮌헨시절 녹음을 들어보면 그가 카라얀에게 ‘밀렸다’고 표현하는 것이 과연 적합한 표현인지 의문이 간다. 70세 가까운 나이에 비로소 자신의 음악철학을 관철시킬 곳을 찾은 그는 뮌헨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자신의 모든 예술혼을 쏟아냈다. 젊은 시절부터 악명 높았던 철저한 리허설, 단원들을 옭아매는 카리스마와 독설은 여전했으나 노년의 그는 음악적으로 더욱 단단해져 있었다. 특유의 느리고 깊은 시선으로 작품의 전체를 조망한 뒤 묵직하고도 섬세한 소리로 터져 나오는 클라이맥스의 감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특히 그가 뮌헨 필의 현악기에 남겨놓은 세련되고 담백한 소리는 정말로 매혹적이어서 프랑스 음악과 독일 음악, 러시아 음악에 이르는 광범위한 레퍼토리를 설득력 있게 소화해 낼 수 있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뮌헨 필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집착한 느린 템포에 있다. 물론 평생 동안 모든 작품을 전부 느리게 연주한 것은 아니었지만 선불교의 영향을 받은 그의 철학적인 면모는 어느새 음악에도 적용되어 있었다. 그는 음악을 하나의 작은 우주로 생각했고 그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와 삼라만상의 모습은 느린 템포에서만 오롯이 구현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의 이런 성향은 브루크너나 브람스의 교향곡, 종교음악처럼 거시적 능력을 요구하는 작품에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그의 느린 음악은 축축 처지는 법이 없다. 외려 빠르게 연주된 다른 지휘자들의 동곡 녹음들과 맞먹는 박진감과 음악적 생기, 높은 산에 올라선 듯한 압도적인 음량을 느낄 수 있다.

평생 동안 ‘죽은 음악’이라며 레코딩을 기피했던 첼리비다케는 뮌헨 필 시절에도 상업적 음반 발매가 아닌 방송기록용 녹음만을 허락했으며, 현재 나와 있는 음반들은 그의 사후에 유족들의 허가를 얻어 발매한 것이다. 특히 1980년대에 뮌헨에서 연주한 실황을 담은 그의 브람스 교향곡 전곡 음반은 1999년에 발매되어, 이미 수많은 녹음이 있던 브람스 교향곡  중에서도 당당하게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4번 교향곡은 기존에 있던 다른 연주자들의 녹음과는 차별화되는 경지를 보여준다. 브람스가 말년에 쓴 이 작품은 인생의 막바지에서 느끼는 회한과 한숨, 후회, 고뇌가 얽혀있는 최고의 교향곡 중 하나이다.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지나친 자존심 탓에 마음 줄 곳을 쉬 찾지 못해 이곳저곳을 떠돌았던 첼리비다케. 그는 복잡 미묘하면서도 솔직한 이 곡을 마치 자신의 회고록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슴 깊이 공감하고 있다. 아마 그가 지휘했던 수많은 교향곡들 중에서 그의 인생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곡이 아닐까 싶다. 나는 이 연주가 끝난 뒤에는 청중의 박수도, 감격어린 눈물도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침묵만이 있어야 한다. 다른 지휘자들은 4번 교향곡에서 자신의 음악을 통해 ‘브람스의 인생’을 들려주려 했지만, 첼리비다케는 브람스의 음악을 빌려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있으며 지금은 공익근무요원으로서 어정쩡한 신분의 삶을 살고 있는 남자입니다. 남의 연주에 대해 끼적이는 걸 좋아하면서도 음악을 공부하며 생긴 어정쩡한 동업자 정신 탓에 나쁜 연주를 나쁜 연주라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암튼 정체가 수상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트위터 http://twitter.com/brahms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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