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4.12.05 《주홍글자》 - 난 내가 되겠어
  2. 2014.09.12 《면도날》 - 여보게, 젊음이여
  3. 2014.08.27 《테스 1, 2》 - 고전적인 시선
  4. 2009.07.28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2)

《주홍글자》 - 난 내가 되겠어

 

 

너새니얼 호손 | 《주홍글자》 | 민음사 | 2007

 

1642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난 메이플라워호가 매사추세츠에 첫발을 디딘 지도 20년이 흘렀다. 이상 국가를 향한 초기의 흥분은 가라앉고 경직화된 청교도 신정(神政)체제가 굳건히 자리 잡았다. 자유보다는 속박이, 포용보다는 편견이 보스턴 식민지사회를 짓누르던 시기였다.

 

새 식민지를 건설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인간의 덕성과 행복에 찬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었는지 몰라도 으레 처녀지의 일부를 묘지로, 또 다른 일부를 감옥터로 떼어 두는 것이 실제적으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7쪽)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는 17세기 중반 미국 청교도 사회의 편협성과 부조리를 죄와 벌, 구원과 양심이라는 주제로 담아낸 역작이다. 지금에야 아이들도 아는 유명한 고전이지만, 1850년 출간 후 64년 호손 사망 전까지 판매량은 7,800부에 지나지 않았다. 청교도, 크게 기독교 교리를 폄훼하고 간음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오랜 기간 금서로 묶여있기도 했다. 그러나 작품은 D.H 로렌스, 허먼 멜빌 등 당대 문학가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으며 많은 평론가로부터 《모비딕》(1851년 출간)과 더불어 19세기 최고 미국소설로 뽑혀왔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장문의 설명이 가능하나 공통되는 해석, 이른바 죄와 벌-죄의 본질과 교정의 의미-에 대한 질문, 페미니즘 소설의 효시, 상징주의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살펴보며 글을 이어가고자 한다.

 

서평가이자 고전평론가 이현우는 《아주 사적인 독서》에서 “죄가 먼저 있었기 때문에 벌이 있는 게 아니라 벌이 있기 때문에 죄가 있습니다. (50쪽)”라며, 죄와 벌에 대한 작품의 함의를 멋지게 짚어냈다. 이는 소설 초반 감옥에서 나온 헤스더 프린이 종교적 지탄과 비난에 당당하고 초연할 수 있던 이유다. 세상의 시선에서 그녀는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하고 아이까지 낳은 불륜녀였지만 본인 내부에선 욕망 앞에 솔직하고 양심 앞에 떳떳한 진취적 여성이었다. 자신을 책망하고 부끄러워하지 않기에 수인(囚人)은 되었어도 죄인은 되지 않았다. 주홍 글자는 치욕이 아닌 순교의 상징이 될 수 있었고, 교정의 장치가 교정의 대상으로 바뀔 수 있었다.

 

‘죄는 짓는 것이 아니라 지워지는 것’이라는 소설의 주제는 헤스더의 숨겨진 연인 딤스데일 목사의 고뇌를 통해 명확해진다. 그는 고결한 품성을 지닌 명망 높은 종교인이었지만, 그것이 멍에가 되어 과오를 숨기고 헤스더의 고난을 모른 척했다.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으로 영혼은 파괴되어 갔고 고백을 통해 마지막 구원을 얻었으나 결국 숨을 거두게 된다. 그는 수인이 되지 못했기에 죄인이 된 인물이었다. 가슴속 주홍 글자는 내어 보일 수 없고 떨쳐 낼 수 없었기에 더 큰 치욕이 되었다. 한편, 헤스더의 전남편이자 복수에 눈이 먼 로저 칠링워스는 심판자가 되려 했지만, 오히려 심판을 받게 되는 인물이다. 타인의 삶을 괴롭히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벌충하려던 그는 깊은 파멸에 이르게 된다. 복수의 대상이자 삶의 의미였던 딤스데일이 소멸하자 자신의 인생 역시 소각되는 운명에 처한다.

 

19세기 중반, 전통적 성 관념이 굳건하고 순종적·수동적 여성상이 여전히 장려되는 시기, 헤스더 프린이라는 주체적 여성의 창조와 진취적 삶의 묘사는 여러모로 페미니즘의 기치를 보여준다. 그녀는 신정체제의 청교도이건 가부장적 사회질서이건 누구의 명령이나 권유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다. 스스로 각성하고 정화하는 의지를 지녔고, 꺾이지 않는 신념과 자기 철학을 가졌다. 죄의식으로 고뇌하는 딤스데일이나 복수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칠링워스의 나약하고 편협한 남성성과 대치된다. 건실하고 현실적인 여성이다. 말년에 그녀는 오두막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내며 동네 여인들의 상담사로 자신의 경험과 삶의 혜안을 전하는데, 이는 여성 연대에 대한 좋은 시사점이 된다. 또한 그녀의 분신이자 희망인 딸 펄은 틀에 박히지 않은 사고와 행동을 구가하며 미래의 여성상을 제시한다.

 

또한, 헤스터는 숨 막히는 종교적 계율과 사회적 규범이라는 인위성의 대척점에 서 있었다. 그녀는 육체적으로 아름답고 건강하며 정신적으로 자유롭고 유연했다. 그녀는 주홍 글자라는 형벌을 숲 속 오두막집에서 자연을 벗 삼아 홀로 사는 삶으로 대체했다. 관습과 편견에 구애받지 않고 인류애와 헌신으로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했다. 권위자와 통치자들 앞에서 당당했고 힘없고 가난한 이들과는 동화되었다. 끌려가지 않고 끌어내는 삶을 원한 헤스터의 적극성은 죄악의 징표인 ‘A'를 금실로 화려하게 수를 놓는 모습으로 상징화된다. 이는 주홍 글자의 의미 변화와 자연스레 연결되는데, 원래 간통(Adultery)을 의미하는 A는 능력 있는 여성(Able)을 거쳐 천사 같고(Angel), 경탄할만하며(Admirable), 사랑스러운(Amor), 예술적(Art) 여인으로 나아간다. (411쪽 해설 부분 참조)

 

모든 파도가 잦아든 후 노년의 헤스더는 옛집 오두막을 찾아 스스로 주홍 글자를 다시 가슴에 달았다. “세상 사람들의 조소와 멸시를 받는 낙인이 아니라, 함께 슬퍼하고 두렵지만 존경하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그 어떤 상징”(311쪽)으로 주홍 글자를 완성해내기 위함이었다. 결국 헤스더의 비명(碑銘)은 검은 바탕에 주홍 글자 ‘A’로만 남게 되었다. A는 하나의 가치로만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하고 신비로우며 진취적인 여성성의 상징, 헤스더 그 자체가 될 것이었다.

 

죄와 벌에 대한 깊숙한 함의와 페미니즘·상징주의 문학으로서의 진지한 고찰 모두에서 책은 잊히지 않는 각인이 되어 독자들 가슴 속에 선명한 ‘주홍 글자’를 남긴다. 내면의 왕국에서 도덕률의 창조자는 나라는 것, 개인의 양심과 의지를 초월하는 시련은 없다는 것 등 《주홍 글자》가 주는 가르침은 16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는 다시 50년 전 고전으로 이어지는데,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 속 문구가 좋은 공명을 만들어낸다. 고전은 고전으로 이해된다는 점, 고전을 읽는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 원칙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야. (200쪽, 《앵무새 죽이기》 중에서)


오늘의 책을 리뷰한 '준솔파파님은?

서양사학과 경영학을 전공했으나 진짜 공부는 이제부터라는 열혈 독서가 중년입니다. 금융회사에서 홍보와 연수업무를 담당하나, 사내 책 동아리와 도서관 운영에 더욱 열심입니다. 서평 블로그 ‘준솔파파의 북북긁기’(blog.naver.com/tyworld76)를 운영하며 오늘도 열심히 읽고 쓰고 있습니다. 언젠가 서평집을 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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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 여보게, 젊음이여

 

서머싯 몸 | 《면도날》 | 민음사 | 2009   

 

‘구원’은 날카로운 면도칼을 넘어서는 것만큼 힘든 난제다. 인류가 가장 풍요로운 시기로 접어드는 20세기나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에나 마찬가지다. 1944년 서머싯 몸은 《면도날》을 출간했다. 이 시기 젊은이들은 전쟁과 공황이라는 사회적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 명예, 부, 내적 평화 등 다양한 삶의 가치를 추구했다. 그들이 선택한 가치는 곧 그들의 삶을 대변했다.

 

래리가 ‘정말’ 너를 사랑했을까? (…) 사랑이 열정이 아니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라 다른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거야 (…) 너희 둘 사이엔 열정이 개입되지 않았어. (278-280쪽)

 

노년의 소설가 몸은 《면도날》에서 삶의 어떤 가치가 옳다, 그르다 평하지 않는다. 여러 인간상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뿐이다. 사랑을 버리고 다이아몬드와 모피코트를 택한 이사벨, 삶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유랑하는 래리, 미국인이지만 유럽 상류사회를 갈망하는 앨리엇,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상대를 잃고 방황하는 소피. 몸은 소설에서 여럿의 이야기를 엮어 나가며 그들 각자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물론 ‘자칭’ 지식인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트집을 잡겠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대중은 모두 성공담을 좋아한다. 그러니 나의 결말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끝을 맺은 이 소설의 함의는 제목만큼이나 날카롭다.

 

《면도날》은 삶과 구원이라는 문제에 해답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에게 다시 문제를 제기한다. “인식을 통해 본질인 실재에 도달할 수 있다”는 래리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서머싯 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세계에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구원’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구원으로 가는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가는 것인가.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어. (…) (347쪽)


오늘의 책을 리뷰한 '송기'님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좋은 원두를 찾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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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 1, 2》 - 고전적인 시선

 

 

토머스 하디 | 《테스 1, 2》 | 민음사 | 2009 

 

가끔은 고전을 편하게 읽고 싶을 때가 있다. 고전이라는 이름이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 소설을 소설처럼 읽고 싶을 때 말이다. 테스를 그렇게 읽고 싶었다. 이 작품은 19세기 영국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도전한 역사적 대작이다. 그러나 출간 120년이 지났음에도 사람들이 테스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마치 관습처럼 여겨진다. 비평가들은 하나같이 이 소설을 '19세기적인 체제와 인습에 대한 처절한 항거' 혹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법과 질서가 낳은 비극'이라고 평가한다. 이러한 저항의식이 고전의 중요한 조건이니까. 

 

묻고 싶다. 만약 그러한 주제를 담고 있지 않았다면 이 작품은 그저 통속적인 연애 소설에 그쳤을까? 나는 본질에서 조금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바라본 세 가지, 다른 시각으로 이 작품을 평가하고 싶었다. '토머스 하디의 묘사', '참된 사랑', 그리고 '노동 후에 읽는 테스'가 바로 그것이다. 떨림과 불안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편안한 마음으로 읽은 소설. 이 작품은 내게 '고전 읽는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었다.

 

토머스 하디의 묘사
나는 작품에 반영된 하디의 삶과 선조에 대한 탐구보다 이 아름다운 소설 곳곳에 숨어 있는 명문장과 비유적인 표현에 주목했다. 특히 비유적인 표현은 하디의 후기 작품에 보이는 시적 표현의 시초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기발하고 재치있다. 작가는 23장에서 내게 수수께끼를 던졌다.
"그러나 이 ‘태양의 날’인 오늘은 일상의 용무를 정신적인 것과 뒤섞는 사이 육체가 육체와 희롱하는 허영의 날이기도 했다." "사실 에인절은 옳고 그른 문제를 떠나 화창한 여름에는 교회나 채플에서 하는 설교보다는 ‘돌의 설교’를 더 선호했다."

 

물론 '돌의 설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나온 표현이지만 그러한 어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은 존경할 만하다. 그리고 테스의 명문장은 다음 이야기 할 '참된 사랑'에 대한 암시가 담긴 '어구'이기도 하다.


“그녀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클레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가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녀의 헌신적 사랑의 깊이와 확고부동함, 또 그 사랑의 따스함을 그는 미처 알지 못했고, 그 사랑이 얼마나 긴 사랑의 고통을 의미하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진실한 것인지, 그 사랑이 얼마나 힘든 인내가 있어야 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성실한 것인지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참된 사랑
참된 사랑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이 질문에 대해 각자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토머스 하디가 말하는 참된 사랑이란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이며 나아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테스가 내게 준 결정적 질문 역시 이것이다. "네가 만약 테스였다면, 알렉 더버빌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에인절 클레어를 선택할 것인가?" 전자는 아이를 가졌고 후자는 결혼한 사이다. 아마 많은 이들이 '결혼'을 이유로 후자를 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이유를 제기하고 싶다. 테스는 사회적 시선으로 인해 에인절과 떨어졌을 때 계속 그를 그리워했다. 그녀는 결과가 이별이 되든 죽음이 되든 자신의 마음을 에인절에게 모두 털어놓는다. 나에겐 이렇게 맘 놓고 어떤 이야기든지 들어줄 수 있는 사랑, 또는 친구가 있을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디에게 참된 사랑은 다시 말해 ‘서로 존중하고 보호하는 사랑’이다. 테스와 에인절은 사랑했지만 서로를 위해 이별의 고통을 감수했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주인공 테스는 상처받은 과거를 마침내 용서받는다. 에인절은 처음에는 그녀의 과거를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마침내 용서한다. 그리고 그녀를 보내준다. 이 부분에서 작가가 내게 준 메시지는 ‘이별도 때로는 사랑이 될 수 있다’, ‘이별도 사랑의 일부분이다’라는 깨달음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테스의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자신을 제단에 묶을 수 있는 '이삭과 같은 사랑'이고, 에인절의 사랑은 사랑하는 이의 아픔을 포옹할 수 있는 '박애주의자와 같은 사랑'이었다. 다음 독자에게 묻고 싶다. 과연 이 두 사람의 사랑은 과연 비극으로 끝났을까?


“내가 자기를 만났을 때 과거는 무엇이었죠? 그것은 완전히 죽은 것이었어요.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자기로부터 받은 새로운 인생으로 가득해졌어요.”

 

노동 후에 읽는 테스
역자는 해설에서 "하디는 도싯주 주변에 사는 소박한 사람들의 목가적 생활을 사실적 기법으로 그리면서 생의 애환을 제시한다."라고 적었다. 그래서 하디의 문학은 '웨섹스(wessex) 문학'이라고 불린다. 테스의 고향을 비롯하여 그녀가 노동하는 곳마다 보이는 영국의 문화가 우리나라의 풍습과 매우 유사하다. 특히 51장에 묘사되는 구력 성수태 고지일은 영국의 노동 문화가 낳은 특별한 기념일로 농촌의 소소한 즐거움을 더한다.


나는 어느 날 편찮으신 할머니 집에 가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못 하시는 농사일을 거들었다. 첫날에는 익은 고추를 골라 따는 일을 했고, 둘째 날은 콩밭에서 각종 벌레를 헤치며 콩을 따는 일이었다. 3시간 정도 그 일을 하고 나니 농사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이렇게 땀을 흘리고 난 뒤, 작품에 묘사된 목가적 분위기의 농촌을 감상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마치 내가 작품 안에서 일하고 있는 것만 같은... 나는 단순히 농사일했을 뿐인데, 하디의 생각과 통하게 된 것은 '노동 후에 읽는 테스'가 주는 문학적 교감의 일종이 아닐까. 시골 사람들이 주는 순박한 감정과 전원생활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느껴지는 작품, 테스. 누군가도 자신만의 시선으로 고전을 읽으며 또 다른 해석을 더하는 즐거움을 느껴보길 바라본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고전의 숲'님은?

옛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 싶어 고전을 읽지만 뜻을 알지 못하여 헤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에 임하는 긍정적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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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고미숙,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사계절, 2009

 

자칭, 타칭 고전 읽어주는 여자. 고미숙이 홀딱 반한 책을 들고 나왔습니다. 열하일기처럼 시대를 주유하는 책도 아니고, 들뢰즈니 가타리니 하는 머리 아픈 철학책도 아닙니다.

<임꺽정>은 벽초 홍명희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입니다. 조정이 문정황후와 정난정 같은 여인천하에 농락당하고 조광조가 별처럼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역동적인 조선 중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임꺽정은 화적두목입니다.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나 넘치는 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기도 했고, 결국은 토벌당한 역적이기도 했습니다. 시대의 모순에 맞서다 좌절한 영웅은 어찌 보면 평범한 이야기 입니다. 고미숙은 임꺽정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요?

임꺽정과 7두령, 노는 남자들의 간지

이 책은 임꺽정과 청석골 사람들을 노는 남자들로 규정하면서 시작합니다. 노는 남자, 요즘 말로 백수입니다. 실업자와 일맥상통하고 비정규직이라는 용어와 친숙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고미숙이 보기에 이 노는 남자들의 모습이 가히 유쾌하다 못해 통쾌합니다.

임꺽정은 물론이고, 배돌석이, 청왕둥이 심지어는 양반출신인 봉학이까지 모두 제대로 된 직업이 없습니다. 그럴 의지도 없죠. 정규직의 자리가 찾아와도 걷어 차버립니다. 정착이라는 말과 한 참 떨어져 있어 내일 당장 어디 있을지 감조차 잡을 수가 없습니다. 사연도 제각각이라 하나의 계급으로 묶기도 힘든 이들의 공통점은 그저 논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인생의 낙오자들(Loser)일까요?

고미숙이 보기에 놀랍게도 이 들은 놀면서도 ‘잘 삽니다.’ 놀면서 우정을 쌓고, 사랑을 얻고, 공부까지 해결합니다. 한마디로 놀면서도 할 것은 다 하고 산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임꺽정과 친구들은 당당합니다. 무엇 하나 꿀릴 것이 없습니다. 이미 자유로운 존재들인데 일부러 살림을 꾸려 속박을 당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산다는 것이 꼭 직업을 구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하나의 길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임꺽정과 친구들은 이미 태생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가를 꾸려나가라는 사회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임꺽정의 움직이는 요새, 청석골

이들이 놀면서도 자존심을 뭉개지 않고 잘 살 수 있는 것은 청석골이라는 집단의 독특한 생할 양식 때문입니다. 고미숙이 읽어낸 청석골은 기존 질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만의 꼬뮨입니다. 누구도 노동을 강제하지 않고, 억지로 일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능력에 맞는 배치가 이루어지고, 순환적인 자원배분으로 사적 소유에서 오는 다툼도 안 보입니다. 기회만 생기면 잔치를 하고 바로 그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이기에 재물을 쌓아둘 생각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들의 육신은 한없이 가벼워 보입니다.

그렇기에 청석골은 고정된 싸이트를 가지는 닫힌 공간이 아닙니다. 활짝 열려 주변 마을과도 일상을 공유하고 수시로 사람들이 들락거립니다. 심지어는 하나의 공간일 필요도 없습니다. 관군이 몰려오면 훌쩍 다른 곳으로 떠나 새로운 촌을 만드는 것도 가능합니다. 챙겨야 할 세간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저 한 몸 움직이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고미숙이 찾아낸 청석골은 지명(地名)이 아니라, 일종의 대안적인 삶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청석골의 집과 세간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청석골은 세워질 수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 물질적인 것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깨우치지 못하는 것이지요.

야생의 사고, 근대적 이성의 대항마

임꺽정이 부인을 얻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신선합니다. 이리저리 잴 것 없이 느낀 대로 몸이 움직이고 마음이 동하는 대로 결정합니다. 꺽정이만이 아닙니다. 바둑 두러 갔다가 부인을 얻기도 하고, 떠도는 길 위에서 색시를 찾기도 합니다. 단순 명쾌한 근대 이전의 사랑이 이성적인 요즘 사랑보다 좋아 보이는 건 저자만이 아닙니다. 저자의 지적처럼 “사랑하기 위해 온갖 작전을 세우고서도 정작 사랑이 시작되면 어쩔 줄 모르는” 우리들에 비해 근대적 이성에 얽매이지 않는 꺽정이와 그 친구들의 사랑법은 되새겨볼 만합니다.

이들의 우정도 마찬가지 입니다. 친구의 아버지가 무얼하는지, 어디 사는지, 무슨 학교를 다니는지는 관심 없습니다. 자존심과 자존심이 만나 한차례 자웅을 겨루고는 “그래도 그 놈이 밉지가 않다”는 수줍은 고백이 나오면 그것으로 게임은 끝입니다. 둘은 어느새 삶의 모든 것을 함께 웃고 즐기는 친구가 됩니다. 임꺽정과 7두령의 만남에는 어떤 신격화나 운명의 개입도 없습니다. 온전히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연을 만들어냅니다. 이처럼 순수한 존재와 존재의 만남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현대사회에서 많은 것들이 이성에 의해 규율되고, 움직이면서 많이 편리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는 개별적인 존재들로 부유하게 된 현대인의 쓸쓸함이 묻어있습니다. 타인을 열심히 밀어내면서도 외로움에 사무쳐하는 것이 “남들의 이야기는 드라마를 통해 보고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할 줄 몰라 정신과를 찾는” 것이 현대인의 삶입니다. 고미숙이 임꺽정과 그 친구들을 이야기에서 발견한 것은 바로 이러한 현대의 소외를 해결해줄 새로운 삶의 태도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벽은 높고 말랑한 이성에 길들여진 우리는 그 벽을 넘기는커녕 바라보는 것도 힘겨워합니다. 존재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세상을 향해 자존심과 배짱으로 맞서는 임꺽정과 7두령이 부럽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미숙의 청석골, “연구공간 수유+너머”

청석골을 보면 저절로 떠오르는 이름이 바로 저자가 속한 ‘연구공간 수유+너머’입니다. 제도권에서 벗어난 대표적인 지식인 공동체이자,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담론을 형성하는 지식의 최전선에 속한 집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시작부터 청석골과 많이 닮아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자, 속한 사람들에게는 먹고 자는 것 뿐 아니라, 우정, 공부, 강의, 사랑(?) 까지도 해결할 수 있는 지적 코뮨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현재진행중인 이들의 대안적인 조직체는 이제 임꺽정의 청석골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다양한 공간에 존재하는 네트워크 형태의 연구공간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고미숙의 트레이드마크인 적극적인 고전읽기가 실천으로 이어진 셈입니다. 21세기의 청석골은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죠. 이 책은 그 청석골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선언문입니다. 누구에게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유쾌하게 살아가는 공간이 얼마나 좋은지를, 임꺽정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보여주면서 말이죠. 도서팀 서현철 (babelfish@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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