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0.11.15 <굴다가 연주하는 바흐> - 바흐라는 이름의 고독
  2. 2010.09.27 <2046 + 화양연화> - 소리는 기억을, 기억은 다시 감정을 데리고 온다
  3. 2010.03.30 [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한우진의 「고독」 (2)
  4. 2009.09.23 고독을 걸어, 세계의 속살을 끌어안다 - <소년의 철학>

<굴다가 연주하는 바흐> - 바흐라는 이름의 고독

 

프리드리히 굴다, <굴다가 연주하는 바흐>, DG, 2010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가 바흐의 음악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종교적인 엄숙함? 고도로 논리 정연한 음악에서 느껴지는 지적 희열?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차분함? 어떤 것이라도 좋다.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바흐의 음악에 대해 ‘좀 따분하고 어쩐지 인간적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오해를 가지고 있는 감상자들이 생각보다 많다고 느껴져서다. 이는 비단 애호가들의 생각만은 아닌 것 같다. 몇 해 전, 모 출판사에서 펴낸 바흐가 작곡한 ‘인벤션과 신포니아’ 악보의 서문을 본 적이 있다. 그곳에는 “…바흐의 음악은 정서에 호소하는 곡이 아니므로 리듬을 명확하게 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씌어있었다. 바흐의 음악은 정서에 호소하는 음악이 아니다? 글쎄,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리듬을 명확하게 치기 위해’라는 전제가 깔려 있겠지만, 그동안 우리가 바흐 음악의 금욕적인 측면-특히 몇몇 교육자들에게 있어서는 가히 청교도적인-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조금이라도 ‘즐거워’지는 기색을 보이는 바흐에 대해서는 ‘이단’취급을 내려온 것이 아닌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일이다. 평생을 음악으로서 신을 찬미하려던 바흐지만, 그의 모든 음악이 종교음악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고발한다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프리드리히 굴다(Friedrich Gulda, 1930~2000)는 ‘괴짜’였다.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턱시도를 입고 연주를 할 때, 그는 캐주얼한 옷에 모자를 쓰고 나타났고, 40세 때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빈 음악 아카데미의 교육정책에 항의하는 뜻에서 자신에게 수여된 ‘베토벤 링(Beethoven Ring)'을 반납해버렸다. 1999년에는 자신이 사망했다는 부고를 신문에 내 지인들이 찾아오게 만든 뒤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나 조문객(?)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사회적인 면에서  남다른 모습을 보인 굴다의 음악적 행보 역시 남달랐다. 젊은 시절부터 빌헬름 박하우스와 빌헬름 켐프 같은 독일-오스트리아 피아니즘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그였지만 오히려 칙 코리아, 조 자비눌 같은 재즈 아티스트들과의 연주를 즐기며 자신에 대한 기대를 일거에 날려 버렸고, 베토벤이나 바흐 같은 근엄한 레퍼토리를 연주한 뒤에는 지극히 자유분방한 자작곡의 재즈를 들려주기도 했다. 

그런 굴다가 연주하는 바흐인 만큼 자유롭다. 무게감과 이성에 초점을 두고 연주했던 다른 피아니스트들의 바흐와는 다르게 속도감이 느껴지는 선율과 명랑함이 돋보이는 리듬감이 훌륭하다. 바흐보다는 모차르트를 연상케 하는 생동감은 흡사 ‘여태껏 당신들이 연주한 바흐는 위선!’이라고 고발하듯 외치는 굴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굴다의 바흐는 초상화 속에 그려진 가발을 쓰고 답답한 옷을 입은 바흐가 아닌, 기쁠 땐 거침없이 웃고, 외로울 땐 그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울어버리는, 인간적인 모습이다. 바흐의 음악은 진지하고 담백하게 연주되어야 한다는 통념은 일생을 역발상과 반전으로 살았던 굴다 앞에서 무너지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더욱 신선한 모습의 바흐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이건 내 생각인데, 바흐의 음악이 가장 잘 어울리는 시간은 하루를 시작하는 이른 아침, 그리고 노곤한 몸을 이끌고 잠자리에 들 때다. 특히 야밤에 듣는 바흐의 건반음악들은 정말로 독특한 매력을 자아낸다. 베토벤을 비롯한 고전-낭만시대의 작곡가들과 달리 바흐의 음악은 선(線)적인 매력들로 가득한데, 흡사 복잡하게 엉켜있는 여러 가닥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기분이다. 베토벤이나 쇼팽처럼 왼손의 화음이 음악의 표정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면 바흐의 건반음악은, 따로 노는 것 같은 두 개 이상의 선율들이 합쳐졌다 떨어졌다 하면서 주제의 단편적인 반복과 변주들이 만들어내는 아기자기함, 세련미가 일품이다. 특히 바로크 시대에 단조(minor)로 작곡된 곡들이 풍기는 멜랑콜리는 다른 시대의 곡들에서 들을 수 없는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은 뭐랄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야경을 생각나게 한다. 건물과 다리가 뿜어내는 휘황찬란한 불빛들과 명멸하는 네온사인들, 퇴근길 교통체증에 빼곡히 서있는 자동차들의 헤드라이트와 오렌지빛 가로등불…. 그 어떤 낮의 풍경보다 환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고 지쳐 보이는 도시의 밤은 바흐의 음악을 닮아있다. 겉으로는 화려한 대위법들의 향연이겠지만 따로 떼어놓으면 무소의 뿔처럼 홀로 남아 종지를 향해 달려가야  하는 외로운 선율들이라 그런 것일까. 300년 전의 바흐의 음악은 그렇게 군중속의 고독을 느끼는 현대인을 감싸주고 있었다.
 

 

굴다가 연주하는 Doors, <Light My Fire> 보러가기

오늘의 책을 리뷰한 '박현준'님은?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공부하고 있으며 지금은 공익근무요원으로서 어정쩡한 신분의 삶을 살고 있는 남자입니다. 남의 연주에 대해 끼적이는 걸 좋아하면서도 음악을 공부하며 생긴 어정쩡한 동업자 정신 탓에 나쁜 연주를 나쁜 연주라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암튼 정체가 수상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트위터 http://twitter.com/brahms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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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6 + 화양연화> - 소리는 기억을, 기억은 다시 감정을 데리고 온다



 

 

 


# 1. In The Mood

좁은 골목을 홀로 걸어가는 것.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넓은 세계 속에서, 나에게 허락된 아주 일부분의 공간을 오고가는 것. 그게 인생일지 모른다.

내가 차지할 수 있는 세계는 내 육체의 부피, 꼭 그 만큼에 지나지 않으니, 그 육체의 사라지지 않는 표면이 나와 나 아닌 것을 나누어, 나는 언제나 나이게 하고, 나 아닌 것이 될 수 없게 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인생은, 육체의 표면 안에 갇힌 고립감을 견디며 홀로 걸어야 하는 매순간의 고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걸음마다 따라붙는 긴 그림자의 쓸쓸함은, 그래서 인생의 고독을 떠오르게 한다.
 

 
 

 
# 2. For Love

골목의 한 귀퉁이, 무심한 듯 빛을 쏟아내던 가로등이 있었고, 그 빛으로 드러난 고독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고독이 고독을 알아보는 뜨거운 순간이 있었다. 좁은 골목을 스치듯 지나가며, 홀로 걷는 육체의 설움을 고백하던 그때, 드디어 나는 ‘너’를 갖게 되었고, '우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 순간’은 무능력할 따름이다. ‘지금, 여기’에 '있'지 않고 ‘그때, 거기’에 ‘있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부질없이 영원을 탐하는 마음이 흐른다. 붙잡아두는 것 없이 모조리 흘려보내는 시간의 흐름을 외면하려 애써 몸부림도 쳐본다. 느슨해진 시간 안에서 찰나마저 촘촘하게 새겨 넣으려는 기억이 바로 그 몸부림이다. 하지만 기억은 시간의 배려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잔인함의 증거가 되기 일쑤이다. 모든 기억은 지나간 순간의 아쉬움만을 가지고, ‘지금, 여기’에 도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너를 알아보고 느낄 수 있었던 바로 그 감각으로, 사라지지 않는 너와의 거리를 확인한다. 다시 한 번 고독을 마주한다. 우리 사이, 그 뜨거운 설렘을 만들어낸 것도 결국 그 거리였음을 지독히 알게 된다.

# 3. Yumeji's Theme

소리가 들려온다. ‘그때, 거기’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다. 설렘이 먼저 오고 그 다음이 설움이다. 짧은 순간, 음을 건드리고 지나가는 소리가 서로를 두드렸던 설렘을 닮았다면, 이 음에서 저 음으로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지는 멜로디는 서러운 감정을 타고 북받쳐 흐르는 눈물을 닮았다. 그 소리 안에서, 두드림과 흐름이 함께 하는 걸 들으며, 설렘과 설움이 결국 고독이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이어져 있음을 생각하는 건 지나친 감상일까. 

문득 찾아든 기억이 감정을 데리고 오면, 나는 ‘그때, 거기’에서, 나와 너 사이를 오고갔던 게 있다면, 그게 바로 이 소리였을 거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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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시'에게 말 걸기 - 한우진의 「고독」

한우진, 『까마귀의 껍질』, 문학세계사, 2010 

「고독」

꽃에 의지하고 있는 꽃잎께서
풀뿌리에 의지하고 있는 풀잎께서
탈을 쓰고 탈에 의지하고 있는 그대들
술 마시고 술에 의지하고 있는 그대들
열심히 입 맞추고 열심히 삶에 의지하고 있는 그대들
꽃잎보다도 정교하게
풀뿌리보다도 질기게
질기게, 물방울보다도 견고하게
넥타이를 매고 넥타이를 매고
넥타이에 의지하고 있는 그대들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사기(詐欺)이냐
사기의 고독이냐

 - 93쪽 -

"탈을 쓰고 탈에 의지하고 있는" 내가 나에 대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 시작할 때, 모든 거짓말은 시작된다. 이제껏 의지하고 있었던 견고한 탈은 서서히 일그러지고, 점차 더 큰 틈으로 내맡겨진 균열은 가식과 허울의 이름을 가지고 삶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그러나 사실상 처음부터 그 어디에도 나와 관련된 진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거짓말은 또한 거짓말이 아니며, 모든 거짓말을 시작케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나를 보고 있는 당신이다. 나는 이러고 싶다가 저러고 싶고, 이럴 수도 있는가 하면 저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진실, 그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상상의 산물을 전제하고, 내가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또 다른 거짓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당신이다. 

나는 지금 당신을 거짓말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나를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당신을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나의 모든 걸 거짓말이 아닌 진실로 만들어 온전하게 받아들여지는 나를 기대하고 있다. 결국 이러고 있는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게 바로 당신이다. 그러니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얼마만큼의 사기이냐, 사기의 고독이냐"  -현선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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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걸어, 세계의 속살을 끌어안다 - <소년의 철학>

 

장현정, <소년의 철학>, 호밀밭, 2009

 

“철학을 사랑하는 우리, 결코 고독해도 고독하지 말기.”

누굴까. 고독해도 고독하지 말자는, 모순된 말을 하는 사람이. 고독이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웃고 있어도 문득 찾아오는 날카로운 감정 아니던가. 먼저 이 말을 한 사람이 궁금하다. 장현정. 1997년 시집 <바람 사이로 보다>를 낸 시인이자 1998년 록밴드 ‘앤(Ann)’ 1집을 발표한 뮤지션으로, 2004년에는 산문집 <노골적이며 발칙한, 게다가 즐거운 사전>을 발표했다. ‘바람’ ‘발칙함’ ‘즐거움’, 모두 좋아하는 말들이니 일단 오케이.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우리’는 누구일까.

‘우리’는 ‘소년들’이다. 소년? 아침 일찍 등교해 하루 종일 수업 듣고, 것도 모자라 밤늦게까지 학원에서 시간에 쫓기는 소년들이 철학을 사랑할 리 만무하다. 장현정이 말하는 ‘소년들’은 “희망 없는 시대일수록 기어코 반항하며 희망을 외치는 자들”이다. 소년들의 무기는 철학이다. 저자가 ‘하고 있는’ 철학은 절대 ‘이로움을 따지는 행위’가 아니다. 철학은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 공통의 영혼이 될 꿈과 이상과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것”으로, “모두가 한 입으로 경제와 효율성만을 외치는 이 시대”를 관통할 수 있는 예리한 검이다.

슬픈 현실은 “소년들의 운명이 ‘백전백패’라는 것”이다. 10대 소년들은 이미 ‘상아탑’이란 이름의 아우라를 상실한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시간을 헌납하고, 20대 소년들은 먹고 살기 위해, ‘비정규직’이란 딱지를 붙이지 않기 위해 청춘의 욕망을 억누른다. 혹자는 소년들을 욕한다. ‘돈밖에 모르는 것들’이라고. 더욱 슬픈 일이다. 등록금 천만 원 시대에, 부모들은 맥없이 일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대체 어쩌란 말이냐. 저자는 먼저 슬픈 소년들을 위로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미 우리 자체로 아름답다. 시대와 공간에 따라 아무리 아름다움의 기준이 달라진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각자 한 편의 시이며, 각자 하나의 음악이다.(p. 53)

아, 이 얼마나 감동적인 칭송인가. ‘착하다’ ‘성실하다’는 칭찬은 받아본 적 있지만, 이 작은 몸뚱이가 시이며, 음악이란 칭송은 받아본 적 없다. 시와 음악을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운동’이 필요하다. 저자는 ‘아는 것’을 넘어 직접 ‘걸을 것’을 요청한다. “일상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은 논리적 질서나 배치를 조롱하듯 우연한 순간에 몸을 울리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손과 발에 굳은살이 생기는 사이 몸은 경험과 습관을 구성하는데 이것들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보고 나아가게 느끼게 한다.”(p. 216)

일상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은 우연의 순간에 오기 때문에 낯선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낯설지 않으면 길이 아니고, 낯선 길에서면 경이로움이 찾아오며, 자유는 낯선 곳에서만 숨을 쉰다’고 말한다. 인간은 어항 속에서 먹이를 주기를, 물을 갈아주기를 기다리는 금붕어가 아니다. 언젠가 생각했던 ‘틈’에 대한 생각이 떠오른다. 당시 가지런히 정렬돼 있는 책장에 틈이 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에게 <러브 어페어> DVD를 선물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선물을 전하던 순간의 간절함이 다시금 찾아왔다. 너무나도 잘 정돈된 커튼 사이로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소년들은 어디로 가는가

당연한 말이지만, 길은 그 자체로 이미 목적이다. 어딘가에 닿기 위해 도구로서의 길은 ‘죽은 길’. 그러니 살아 숨 쉬는 길 위에 목적지가 있을 리 없다.
세상에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걷고 있는 ‘하나의 길 a way’이 존재할 뿐이다. 누구나 가야 하는 ‘유일한 길 the way’는 없다. 정해진 길은 없기에 길은 어디로 가든 길이다. 그러니 ‘길눈 어둡다’는 말은 쓸 일이 없고, 오히려 잘 못 든 길이야말로 길이다.
(p. 210)

<소년의 철학>은 목적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오히려 목적지는 없으며, 길을 걷는 순간순간이 삶 자체라고 한다. 주저앉아 길을 찾기보다, 걸으면서 수많은 살아있는 것들과 한바탕 놀이를 벌이야만 ‘우주와의 섹스’를 할 수 있다. 우주와의 섹스는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세계와 타인, 그 밖의 모든 것들과 내밀한 속살을 맞대고 한데 뒤엉키는 열린 철학이다. 저자는 분석과 웅변으로, 때로는 시와 내밀한 고백으로 소년들이 일어설 것을 충동한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머릿속에는 ‘결’이란 말이 떠나지 않았다. 목적지에 도달한 순간에도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을 순간의 기억들,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고 있어 쉼 없이 꿈틀거리고 아름다운 파장을 만드는 호흡으로서의 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어렴풋이나마 ‘시간의 질감’이 느껴진다. 각설하고,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왜 고독해도 고독하지 말아야 할까.

절망 속에서 절망을 얘기하는 건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건 하나마나 한 소리고, 동어반복.
진정한 철학자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말한다.
기쁨에 들떠 행복을 말하는 자 역시 바보다.
진정한 철학자는 기쁨 속에서도 어떤 서늘한 예감을 잃지 않는다.
(…)
인간은 새가 아니기에 결국 주저앉을 수밖에 없더라도
기어코 새를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고 생각하고 동경할 수는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같아질 순 없어도 닮아갈 수는 있는 자다.

그러니 철학자는,
고독을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고독을 피하려는 자다.

철학을 사랑하는 우리, 결코 고독해도 고독하지 말기.
(p. 83~ 85)

반디(ak20@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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