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5.01.15 《백 년 동안의 고독》 - 고독하기 좋은 시대
  2. 2015.01.12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느지막한 사랑
  3. 2011.09.20 [요즘 뭐 읽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백 년 동안의 고독》 - 고독하기 좋은 시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백 년 동안의 고독》 | 문학사상 | 2005


'부엔디아'란 '좋은 시대'라는 의미이다. 맬키아데스는 알았겠지만, 처음부터 그 단어가 반어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가 마콘도 마을을 세웠을 때만 해도 말 그대로 좋은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절은 오래 가지 않는다.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은 이름과 함께 선조의 어리석음과 타락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불면증에 걸려 신의 존재마저 망각하고,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는 만행을 벌인다.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의 흐름을 "개가 꼬리를 무는 듯한 구조"라고 일컫는다. 사실 그것은 당연하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도대체 시간보다 자연스럽고 잔인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맬키아데스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이 기록은 연대기다. 무엇에 관한 연대기인가? 부엔디아 집안의 연대기라 해도 무방하고, 마콘도 마을의 연대기라 해도 무방하며, 콜롬비아, 나아가 이 세상의 연대기라 해도 무방하다.

외부의 간섭이 없었던 평화로운 마콘도 마을에 집시가 찾아온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신비한 물건과 과학을 선사한다. 사람들이 정착하고 마을의 규모가 커지자, 정부에서 이 마을에 군수를 파견한다. 마콘도 마을에는 성당이 지어진다. 어느새 이 마을은 도시로 발전했고, 기차가 들어온다. 마콘도 마을에 바나나 농장이 건설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외부의 자본에 의해 착취당한다. 그들이 파업 투쟁을 벌이자, 군대가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시체를 바다에 던진다. 그 후 4년간의 장마가 찾아오고, 장마가 끝나자 모든 문물이 마콘도 마을에서 사라졌다. 얼마 뒤, 부엔디아 집안의 마지막 사람이 개미에게 잡아먹히자 회오리바람과 함께 마콘도 마을은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었으리라. 죽음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만, 고독은 이름을 통해 유전된다. 고독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죽지 않고 가문을 유지했다면 오로지 고통과 슬픔만 존재했을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최선을 다했다.

《백 년 동안의 고독》과 만날 때는 언제나 의심을 품고 독서에 임해야 한다. 이 소설은 '마술적 리얼리즘(또는 마술적 사실주의)'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법이야말로 소설의 정의다. 소설이란 사실에 마술(상상)을 교묘하게 집어넣은 것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소설이라는 구름 속에 놓인 사실에 허구를 섞어놓은 수법이다. 그리고 역사서 또는 연대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백 년 동안의 고독》에 허구를 집어넣는 일은 아주 수월하다. 연대기에 적힌 일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비판 없이 그 사실을 수용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도 부엔디아 집안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아버지가 행했던 악한 일보다 더 악한 일을 하며, 좀벌레가 들끓는 방 안에서 다시 깨뜨릴 황금 물고기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속에 숨어 있는 거짓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에겐 진위를 구별할 수단도 없으며, 그 증거도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은 소설이니까! 작가에게 따져보자. 흙과 석회를 먹고 사는 인간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200년이나 살아 있는 사람이 창세기 이후 존재했습니까? 개미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현실에서 있을 수 있습니까? 작가는 대답한다. 소설이잖아요! 당신들은 진실과 거짓도 구별하지 못합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아직 소설이 필요한 이유다.

책꽂이에 G.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밀란 쿤데라

고독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외로움이다. 흔히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고독의 역설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많을수록 개인의 고독은 깊어진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이 20명뿐이었던 시절에 마콘도 마을 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갔다. 부엔디아 집안 역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가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며 소통했다. 그러나 마콘도 마을이 커지면서 상호 교류는 사라지고 집단과 집단 간 투쟁이 쉬지 않고 일어났다. 부엔디아 집안 역시, 우르슬라를 제외하고 누구도 자신의 자식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17명의 자식을 낳아놓고, 그들을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아니다. 굳이 소설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고독의 역설은 바로 우리 삶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우리의 상황은 마콘도 마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전반에 고독의 역설이 존재하니까. SNS 기능이 활성화되고,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개인의 고독감은 더 심해진다. 왜냐하면 내 옆에 앉아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으로 나에게 말 거는 사람과 손가락으로 대화하지 않은가? 손가락 대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마술적 리얼리즘, 현실 속의 허구가 아닌가? 어쩌면 가브리엘 마르케스야말로 맬키아데스일지도 모른다. 그의 양피지 문서는 이미 세상에 공개되었지만, 누구도 그의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곧 우리요, 곧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이다.

맬키아데스, 아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는 이제 유령이 되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가족은 어떤가? 반드시 우르슬라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겠다. 다만 밤나무 아래에만 머물지 말아 달라. 누군가는 죽음 이후에도 자식과 대화하고, 자식에게 돈이 아닌 유산을 전해준다. 오늘날 부모의 책임을 떠올려라. 자식 역시 공경을 기억하라. 만약 가족이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어김없이 고독이 찾아올 것이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식까지, 그리고 그 자식까지, 100년이 아니라 대물림되어, 영원히. 부디 고독의 역설을 깨뜨려다오. 나의 예언을 거짓으로 만들어다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고전의숲'님은?

옛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 싶어 고전을 읽지만 ‘뜻’을 알지 못하여 헤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에 임하는, 긍정적인 남자. 현대에 나온 책들도 많이 보니 고전에만 파묻혀 있다고 오해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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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느지막한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민음사 | 2005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첫문장이다. 어쩌면 불쾌할지 모를 이런 말들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해석하진 말아 주길. 소설의 미덕은 소설 안에서 확인해주길. 주인공은 평생 돈을 지불하지 않는 사랑은 해 본 적 없는 90세 노인. 그는 90세 생일 선물로 14세 어린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날 밤, 그는 소녀가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현듯 첫사랑을 시작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랑은, 근 1세기 동안 홀로 견뎌온 사람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사랑은, 반세기 넘게 지켜온 문체를 버리게 만들었고, 열정에 대한 들뜬 칼럼을 쓸 수 있게 만들었고, 욕망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죽음을 코앞에 둔 90세에, 그는 비로소 삶을 예찬하는 사람이 되었다. 삶이여, 영원하여라.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 받았던 것이다."


삶은 90세라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노화와 죽음이 우리 삶에 주어진 절대적인 결말일지라도, 반드시 허무를 담보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마르케스 특유의 낙천적인 힘은, 이제는 낡아 버린 말들 -사랑, 열정, 삶 등- 을 찬란하게 복귀시킨다. 그는 사랑을 믿고, 열정을 간직하고, 삶을 예찬한다.

이미 공언된 사실이지만, 마르케스는 믿을 만한 작가다. 이 책이 《백 년 동안의 고독》만큼 '내 인생의 책'이 돼주진 못 했지만 사랑에 관한 소설로 충분히 아름답고 충실하고 생생한 소설이었다.


설정 자체가 파격적인 만큼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이 사랑이 90세 '여성'과 14세 '소년'의 사랑이라면, 어떨까. 젊은 여성의 육체를 생명력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문학에서 무척 흔한 일이지만 남녀를 역전시키면 여지없이 낯설어진다. 의도치 않아도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 전복된다.


혹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이 세상에 드러난다면, 90세 노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떠했든 간에, 그는 주책 맞고 망령든 노인네가 될 수밖에 없다) 몇 살 차이뿐일 지라도 범죄가 성립된다. 그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흐름과 유려한 결이 존재했다 할지라도, 원래 사랑은 나이와 몸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알지라도.

반드시 법이 없어야 인간의 자유가 실현된다고 생각진 않는다. 미성년자를 보호하는 법의 취지 역시 공감하고 동의한다. 다만, 그것이 전부라고 말해버린다면 삶의 많은 부분이 증발될 것이라는 불안감. 삶의 근거로 법을 내밀기는 싫은. 소설의 미덕은 이런 지점에 있다.


또 하나. 사랑에는 나이가 소용 없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은 상대방의 나이와 무관할 순 있되, 나의 나이와는 무관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 삶의 맥락 속에서 사랑을 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사하라'님은?

끝없는 잡념의 화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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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 읽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백년의 고독> | 민음사 | 2000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미국대학위원회 선정 SAT 추천도서,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 BBC 선정 꼭 읽어야 할 책, <옵저버> 선정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책.

 

굳이 이 엄청나고 화려한 수식을 불러들이지 않아도 <백년의 고독>은 여러 의미로 '유명'한 책이다.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위치가 그렇고, (내 주변에서만 그런지는 몰라도) 읽다 포기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그렇다. 대학 시절 한 선배는 어느 과목의 소논문 과제로 <백년의 고독>을 택하고는 "내가 왜 이런 고행을 자처했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터넷에서 이러저러한 경로로 '읽다 포기한 책 베스트'에 손꼽힌다는 글도 보았다. 어느샌가 나와 <백년의 고독> 사이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자리잡았다. 언젠가는 읽겠지만 지금 당장은 인연이 닿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주 어느 날, 출근길 지하철에서 간신히 시집을 들고 읽고 있었다. 바로 왼편에 선 청년이 책을 읽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분주히 살피는 사람들이 대다수여서 실로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었다. 나도 모르게 가재미 눈이 되어 책의 제목을 흘끔 살폈다. '오, 이럴수가.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그것도 2권을 읽고 있다니!' 책의 표지에서 조금 위로 시선을 옮겼다. 아, 그 청년은 외양도 훈훈하였다. 마르케스 청년은 몇 정거장 뒤 속절없이 환승해버렸고, 내 눈엔 <백년의 고독> 2권 표지 그림의 잔상이 남았다. 사무실에 들어와 서둘러 책을 주문하고, 택배가 오는 그 사이를 못 참고 퇴근길 동네도서관에 들러 <백년의 고독> 1권을 대출했다.

 

책의 첫 장을 펼치자 '부엔디아 집안의 가계도'가 펼쳐져 있다. 그 가계도를 보니 소문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약 5대에 걸친 부엔디아 집안 사람들의 이름은 이렇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 우르술라, 호세 아르까디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아마란따, 아르까디오, 아우렐리아노 호세,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호세 아르까디오(앞에 나온 호세 아르까디오와는 다른 인물로, 그의 증손주 뻘이다), 아마란따 우르술라, 아우렐리아노(이 역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나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다른 인물이다) 등. 가뜩이나 낯선 남미식 이름에도 적응하기 힘든데 비슷하다 못해 똑같은 이름까지 등장하고, 또 등장인물은 왜이리 많은지.

 

그런데 일단 이 이름에 적응이 되면 굉장히 재미있게 읽힌다. 마르케스를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시자'라고 칭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제 1권의 1/3 정도 지점을 넘었는데 슬슬 속도가 붙는다. 한 집안의 100년에 가까운 비극의 역사를 함께 겪어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백년의 고독>에 조금 더 빨리 적응하기 위한 약간의 팁을 말하자면, 책을 읽어나가며 스스로가 부엔디아 가문의 가계도를 그려보는 것이다. 물론 이름 옆에 인물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나 주석에 나와 있는, 인물의 이름이 상징하는 그의 특징 등을 적어두면 몇 배로 도움이 될 것이다. 

 

<백년의 고독>이라니, 어쩐지 갑자기 깊숙이 다가온 이 계절과 제법 어울리는 것 같다.

 

- 컨텐츠팀 에디터 료(fololy@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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