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음반'에 해당되는 글 1500건

  1. 2015.01.26 《Paint It Rock》 - 만화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2. 2015.01.23 《소비를 그만두다》 - 왜 사는데
  3. 2015.01.22 《느릅나무 아래 욕망》 - 원하고 욕망하죠
  4. 2015.01.21 《친구사이》 - 아모스 오즈의 세계
  5. 2015.01.20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시나브로 겨울이 지나간다
  6. 2015.01.16 《사랑에 대한 모든 것》 - 당신은 사랑 알기 위해 태어난 사람
  7. 2015.01.15 《백 년 동안의 고독》 - 고독하기 좋은 시대
  8. 2015.01.14 《풀무질》 - 책방 아저씨
  9. 2015.01.13 《무진기행》 - 서울의 겨울
  10. 2015.01.12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느지막한 사랑

《Paint It Rock》 - 만화라고 우습게 보지 마라

 

 


 

남무성 | 《Paint It Rock》 | 북폴리오 | 2014


한국 어른들은 만화책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다른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니면서 만화책은 그저 아이들이 심심풀이로 보는 ‘유치한 것’으로 꾸짖기 일쑤다. 정치적으로 유독 피곤한 시대를 살아 그런지 우리 부모 세대는 상대적으로 정상적인 문화생활을 누리지 못했고, 문화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사고가 경직된 탓도 있다. 문제는 그다음 세대가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부모 세대 가치관을 그대로 물려받아 만화를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지의 슬픈 대물림이다. 8년 전, 붐비기로 악명 높은 도쿄 지하철 안에서 전과 크기만 한 소년챔프를 정독하는 정장 차림의 일본인 회사원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만화 보는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기는 한국 어른들은 나를 더 한심하게 만든다. 그 어렵다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나 칸트의 《비판》 시리즈, 《논어》와 《맹자》를 만화로 풀어내면 얼마나 이해하기가 쉬워지는지 모르는 것일까. 알면서도 천시하고 무시하는 건 알량한 지적 허영이자, 경험하지 않고 단정 짓는 편견과 선입견 이상 이하도 아닐 것이다.

북 치고 장구 치다

남무성의 《Paint It Rock》도 한국 ‘어른들’은 그저 코흘리개들이 좋아하고 환호하는 일개 만화책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척 베리(Chuck Berry)부터 콜드플레이(Coldplay)까지 록의 60년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 책의 첫 권을 읽었거나 작가의 지난 작품 《Jazz It Up》을 읽어본 사람들은 그 비웃음들이 얼마만큼 어설프고 쓸데없는 것인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만화여서 쉽다는 게 얼마나 큰 장점이고 읽는 사람들에게 축복인지 저들은 아직 잘 모른다. 단지 그 만화를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Paint It Rock》이 좋은 건 글과 그림을 모두 음악평론가인 작가가 직접 쓰고 그렸기 때문이다. 이는 언뜻 가벼운 우연처럼 보여도 매우 중요한 사실인데, 한 장르의 통사를 살피는 과정에서 개인 사유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집필을 위한 자료 찾기와 정리는 누군가 도와줄 수 있겠지만, 생각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고 능력이므로 남이 해줄 수 없다. 생각한 이가 스스로 표현했을 때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을 띠게 되는 건 당연한 일. 그런 면에서 남무성은 남들은 하나도 갖기 힘든 글과 그림이라는 두 재능을 모두 가졌고, 록 역사에 그것을 아주 잘 발휘해 내었다.

웃기니까 만화다?

이 책은 일단 웃기다. 무릇 역사란 어느 장르건 진지한 법인데 이 책은 진지함을 유머로 부드럽게 만든다. 다루는 내용은 의도한 과장과 개그 코드를 빼면 모두 사실(Fact)이어서 웃으면서 록의 지식을 하나하나 자신의 머릿속에 쟁여나갈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만화책의 힘이 있는 것이다. 물론 《Paint It Rock》은 어쩌면 만화책을 가장한 ‘진짜’ 록 역사책일지도 모른다. 작가도 충분히 의식한 듯 “만화책에 글이 왜 이렇게 많으냐”며 “해골 아픈 이야기들”을 원망하는 독자들을 가정한 걸 볼 수 있는데 실제로 이 책은 만화책이라고 쉽게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볼 만큼 ‘글’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수많은 밴드와 뮤지션들이 얽힌 관계, 각종 상황을 한 자리에서 풀어내야 하니 어찌 그림으로만 가능했겠는가. 쥘 베른의 책에서 독자의 숨돌림을 도운 게 삽화라면, 남무성의 책에선 글이 그 역할을 했다.

듣기의 미덕

그림도 많고 글도 많아서 이 3부작을 읽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독자의 시간을 위협할 요소가 바로 음악이다. 작가도 책 속에 언급해두었듯 이 책은 록에 관한 이야기다. 당연히 음악이 먼저고, 이야기는 그 배경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유일한 약점이랄까. 그것은 “자우지장, 두다다다”의 의성어로만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책이라는 매체의 한계와도 직결된다. 책이 다룬 뮤지션들의 대표곡이 담긴 컴필레이션 CD를 한 장씩 부록으로 붙여도 될 법했건만, 역시나 저작권 문제라는 큰 장벽 때문에 포기해야 했으리라. 이 난관은 독자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 방법은 하나, 책에서 언급한 앨범과 곡들을 직접 찾아 듣는 것이다. 요즘 같이 좋은 세상은 이럴 때 활용하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CD를 구하기 힘들면 음원 사이트로 가면 되고 거기에도 없으면 유튜브라는 괴물에게 도움을 청하면 된다. 필자도 해봤는데 웬만한 앨범과 곡은 다 찾아 들을 수 있다. 작가가 이 책을 집필한 취지도 좋은 록 음악들을 함께 듣자는 데 있는 만큼 듣기는 《Paint It Rock》을 완전히 소화하기 위한, 어쩌면 읽기보다 더 본질적인 행위일지 모른다.

입문자용이 아니다

에필로그에서 남무성은 이 책이 “어린 음악 팬들에게는 정보를 주고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중년들에게는 향수를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이 책이 입문자용이면서 입문자용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꾸준히 록 음악을 찾아 들어온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좀 가벼울 수 있는 반면, 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겐 매우 버거운 내용일 수도 있겠다. 우선 등장하는 뮤지션들 수가 엄청나고 그에 따른 앨범과 곡 수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래서 처음에 겨냥했던 독자층(=록 입문자)이 이 책을 제대로 즐기기 위해선 록에 관해 좀 더 아는 사람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할 것이다. 뮤지션 이름도 외워야 하고 그들의 관계도 파악해야 하고 앨범도 찾아야 하고 곡도 찾아야 한다. 찾으면 또 들어야 한다. 그나마 얼터너티브 록은 짧고 명쾌하지만 프로그레시브와 아트록 쪽으로 가면 듣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다. 브릿팝은 감미롭지만 헤비메탈이 만만치 않은 것 역시 기나긴 아트록 러닝타임의 압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책은 단순한 입문자용이 아니다. 록에 관심이 있고 록을 사랑하는 사람 또는 앞으로 그럴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아는 만큼 섭취하고 즐길 수 있는, 굳이 따지자면 ‘중급’ 정도 수준의 서양 록 통사라면 맞겠다. 뉴메탈이 빠진 것에 일부 사람들이 아쉬움을 느끼는데, 저자의 주관이다. 주관이 배제된 저작은 있을 수 없다. 매체가 가진 오래된 특징, 관행을 본다면 그리 큰 오점이라고는 볼 수 없다. 물론 콘과 시스템 오브 어 다운까지 나왔다면 더 재미있었겠지만 그에 비길 만한 재미와 감동이 《Paint It Rock》에 있으므로 더 이상 트집거리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삼국지》를 다시 읽는 기분이었다. 요코야마는 따분한 이문열의 《삼국지》를 내 기억에서 밀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남무성도 마찬가지다. 록에 취하고 싶은 자들은 이 책을 집어라.

 

오늘의 책을 리뷰한 '돗포'님은?

버트란드 러셀을 좋아하고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져 있으며, 록앤롤/ 재즈/ 블루스를 닥치는대로 섭취중인 30대 '음악애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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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를 그만두다》 - 왜 사는데


 

 


히라카와 가쓰미 | 《소비를 그만두다》 | 더숲 | 2015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참으로 많고 첨예하다. 2015년 1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갑과 을의 논쟁, 그리고 폭력이다. 어린이집 아이를 학대한 보육교사, 땅콩회항으로 불붙은 을을 향한 갑의 횡포. 물론 이 말고도 한둘이 아니지만 거의 모든 현안이 덮일 만큼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 문제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폭력의 문제는 아니다. 유아 학대를 보면 맞벌이 때문에 아이를 맞길 수밖에 없는 가정, 보육교사의 과도한 노동환경, 어린이집 운영에 관한 비리가 얽혀있고 갑, 을 문제 또한 노동과 돈에 대한 문제가 얽혀있다. 이는 비단 어린이집에 CCTV 하나 설치한다고, 가진 자들이 친절함을 장착한다고 해서 해결될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돌아가 보면 '돈', 자본으로 귀결된다. 그럼 돈 문제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돈이 신앙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게 되었는가. 왜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자신들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해석하는 동안 그렇지 못한 자는 늘 박탈감에 시달리고 일자리를 걱정해야 하는가. 많이 '소비'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며, 더 많이 소비할 능력이 있는 자들을 칭송하고 동경하며 떠받드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저자는 이런 우리와 다르지 않은 금전 만능주의의 사회, 자국 일본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이러한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제 더는 생산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가 되어버린 '개인'의 모습을 돌아보며, 소비를 위해 살아가는 일본 사회에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참 비슷하게 변하고 있다. 가족중심의 사회에서 서구사회처럼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로 바뀌었고, 기업들은 '시장창조'라는 이름으로 지역과 가정을 잘게 쪼개 개인을 만들고 개인의 욕망을 환기해 '소비자'를 만들었다. (89쪽)


 

이를 미개 시장으로 확대한 것이 바로 '세계화'다. 우리는 '소비'의 주체가 되어 기업들이 환기한 욕망을 따라 '소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형 상점이 들어서 지역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이를 따라 형성된 시민들의 긴밀한 관계 역시 파괴된다. 우리는 철저하게 노동과 생산이 분리되어 그들을 위해 일하고, 또 소비한다.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저자는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되자고 말한다. 창업이 아닌 '소 상업', 돈벌이가 아닌 '살아가기'가 중심이 된 '탈소비자'를 생각하자고 한다. 싸게 사는 것이 아닌 비싸도 가치 있는 소비를 하는 것, 적게 벌되 잘 순환시키는 것, 상품 경제 속에 '증여'와 '교환'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하지 않는 사회'로 재설계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말한다.

이 책은 오로지 소비 그 자체에만 초점이 맞춰있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욕망만을 좇아 사는 우리 모습에 좋은 충고를 들려준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은 이 모든 것들을 조금 두루 뭉실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책의 3분의 1 정도는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에서 보이는 경험담이 대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수필이나 새로운 대안을 제안한 입문서 정도로 본다면 꽤 괜찮을 책이고, 만일 그전에 이와 관련된 책을 읽었거나 자주 접해 보았던 사람이라면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락아프리카'님은?

밴드 아프리카의 보컬리스트입니다. 역사(고대사)와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소설 분야의 책을 좋아합니다. 우리 부부를 선택하여 함께 살게 된 사연 많은 길고양이 4마리와 정도사라 불리는 드러머 남편과 유유자적, 대책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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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릅나무 아래 욕망》 - 원하고 욕망하죠

 

 



유진 오닐 | 《느릅나무 아래 욕망》 | 열린책들 | 2011


 

지하철을 탈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늘이 져 있다. 처음에는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열심히 일했으니 퇴근길의 얼굴이 어두운 것이고 다음날 출근길 얼굴이 어두운 것도 피로가 덜 풀려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 낮에도 객실 안의 사람들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었다. 안에서는 어두운 얼굴도 지하철 밖에서 봤을 때는 그늘이 없다. 낮에는 활기가 넘쳐야 하니 피로와는 상관없을 텐데 낮에도 얼굴이 어둡다는 것은 피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전철을 벗어나 밝은 길거리에서 보면 얼굴이 어둡지 않다는 것도 피로가 원인은 아닐 것이다.

조명 때문이었다. 지하철 객차의 불빛은 사람 머리 뒤에서 아래로 내리쬔다. 빛이 닿지 않는 얼굴 면에는 그늘이 지는 것이다. 지하철에서 빛을 많이 사용해서 사방을 밝게 한다면 얼굴에 그늘이 지지 않겠지만, 천장 가운데에 매달린 형광등 하나로만 객차의 밝기를 결정하니 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곳이 생기고 얼굴에 그늘이 서린다.

지하철 창문을 바라보면 내 얼굴에는 그늘이 져 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도 어둡다. 뭉크의 그림 속 얼굴처럼 얼굴은 늘어져 있고 우울한 기운이 가득하다. 그런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마누라의 뽀뽀를 받으며 출근한들 지하철만 타고 나면 기분이 찌뿌둥한 것이다. 지하철의 조명은 하루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머리 위에 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무엇이 되었든 힘이 세든 약하든, 좋든 나쁘든, 어둡든 밝든 힘 아래에 있기 시작한 때부터 힘의 영향을 받는다.

《느릅나무 아래 욕망》에서 등장인물 각자에게 영향을 준 것은 욕망과 어머니였다. 아버지인 이프리엄 캐벗은 탐욕 아래에서 무자비하게 재산을 넓혔고 아이들을 막 대했다. 둘째와 셋째 아들인 시미언과 피터는 욕망이 컸기에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늘 말하고 다녔다. 막내아들 에벤은 죽은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복수한다며 아버지의 새 부인인 애비 퍼트넘과 관계를 맺었다. 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아이를 낳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욕보여서 어머니의 복수하려는 것이었기에 아이를 낳은 뒤에도 애비 퍼트넘에게 사랑한다 속삭였다.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끊임없이 더럽혔다. 애비 퍼트넘은 농장을 갖겠다는 욕망으로 결혼을 했다. 에벤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껴 에벤을 유혹했지만 에벤이 다가오지 않아 힘들어했다. 그러다 에벤이 자기에게 오지 않는 이유가 에벤에게 깊게 영향을 끼친 엄마의 그림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는 그림자를 걷어 내고 싶어 했다.

한 가족의 집에 애증으로 이글거리는 눈동자와 탐욕에 가득 찬 손아귀가 가득했다. 분노로 핏대 선 목에서는 쉬지 않고 고성이 뿜어져 나왔다. 근친상간이 끊이지 않았고 유아살해가 일어났다. 그 집 앞에는 느릅나무가 가지를 길게 뻗고 우뚝 서 있었다.

어쩌면 느릅나무를 찍어냈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느릅나무 가지가 집 위에 길게 늘어져서 햇빛을 막았다면 지하실처럼 집은 퀘퀘했을 것이다. 항상 어둡고 습기 찬 집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을 테니 가족들의 성격도 음울해졌을 터. 느릅나무 주위에서 생긴 벌레가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는지도 모른다. 많은 벌레는 집 안까지 들어왔을 것이고 잠자리를 방해하고 일상을 괴롭혔을 것이다. 집이 안식의 공간이 되지 못하니 사랑의 말은 할 수 없고 증오의 말만 내뱉는 것이다.

책에는 느릅나무에 대한 언급이 두어 번 정도 나온다. 느릅나무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실제 느릅나무는 높이가 20~30미터나 되는 큰 나무라고 한다. 그것을 생각해 보자면 아마 유진 오닐은 느릅나무가 있는 집을 통해 부를 이룬 미국인 가정을 상징하려고 했던 것 같다. 큰 나무가 흡사 큰 재산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느릅나무는 축축한 습기가 있는 산골짜기에서 잘 자란다. 유진 오닐은 큰 부를 이룬 가정이지만 그 가정은 따뜻하지 않고 축축하다는 것을 말하려고 수많은 나무 중에서도 느릅나무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큰 부를 이루어서 행복한 것 같지만 그 큰 부 아래에선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아들은 아버지를 떠났지만, 한편으로는 느릅나무를 떠난 것이다.

유진 오닐이 《느릅나무 아래 욕망》이라는 희곡을 썼을 때 느릅나무는 지극히 상징적이었을 것이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며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이 뭉크의 그림 속 절규하는 사람과 똑같은 것을 목도한 지금, 느릅나무는 상징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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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사이》 - 아모스 오즈의 세계



아모스 오즈 | 《친구사이》 | 문학동네 | 2013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떠나는 일행에게, 서점에 들를 수 있다면 아모스 오즈 책을 구입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저자의 이름을 스펠링으로 써주고 당부하면서 한 권이라도 나에게 오길 바랐다. 그러나 단체로 떠난 일정인지라 서점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해 책을 사지 못했다는 대답만이 들려왔다. 내심 아쉬웠지만 언젠가 원서를 살 수 있는 날이 있겠지 싶어 열심히 번역서를 기다리게 되었다.

아모스 오즈는 애정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출간 소식 문자가 오면 바로 구매할 정도다. 왜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똑 부러지게 설명을 할 순 없어도 잔잔한 삶의 흐름을 드러내는 섬세한 문장이 좋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는 완성도에서 오는 호감을 뛰어넘은 익숙함이다.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정도로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

이스라엘 집단농장의 한 형태인 '키부츠'를 배경으로 한 8편의 단편 《친구 사이》를 읽는 동안, 온통 저자 생각뿐이었다. 30여 년간 키부츠에서 생활한 아모스 오즈이기에 무엇보다 그곳 생활을 잘 알 터. 작가가 작품 어딘가에 머무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구석구석 허투루 읽히지가 않았다.

한데, 모든 것이 공동체로 이뤄지는 집단농장에서의 사람들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썩 행복하지 않았다. 공동체 생활이다 보니 개인의 자유와 소유욕을 드러낼 수는 없었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점점 자신이 무엇을 원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잃어간다. 사람들이 스스로 그곳에 머무르면서도 왜 스스로 욕망을 거세하지 못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끝내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남편이 이별을 통보하고 다른 여자의 숙소로 들어간 후 그 어떤 분노도 드러내지 않은 여자 오스낫. 키부츠란 공간을 답답해하면서도 삼촌이 모든 학비를 대주겠다며 이탈리아로 오라는 요청에도 머뭇거리는 요탐. 이들은 마치 자신의 색채를 잃어버린, 무채색으로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물론 키부츠의 바깥 세상에서도 또렷한 의지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다.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을 지켜보자니, 규칙과 평등을 가장한 그곳에서의 불평등이 마냥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키부츠라는 거대한 공간에 담긴 8편의 이야기는 독립적이면서도 절묘히 이어진다. 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다른 이야기에서 배경 인물로 등장할 때에는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일까. 그들의 등장만으로 반가움이 일었고 어떤 소식이 들려오는지 예의 주시하게 되었다.

한편, 병든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소년 모시의 이야기는 잔잔하면서도 뭉클함을 남긴다. 후에 에스페란토 어를 배우러 오는 모습만 봐도 그냥 듬직했다. 하지만 하나 남은 열 일곱살 딸이 자신의 친구와 동거하는 이야기며, 공동체 육아 규칙에 따라 부모와 함께 잠들지 못하는 아들이 탁아소에서 왕따를 당하자 가해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모습은 키부츠라는 공간을 더욱 음습하게 한다.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모든 것을 평등하게 배분하는 곳. 기회가 주어지는 그곳이 낙원처럼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늘 불평등에 시달리며 세상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해 허덕이는 내게는 그곳이 갑갑하기만 하다. 무엇을 또렷이 잘할 필요 없이,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에 충실 하는 것만이 성실한 모습으로 인식되는 것 같기에 단일화되기 딱 좋은 곳으로 보여진다. 그럼에도 키부츠를 다른 세상 보듯 무관심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뭘까. 나 또한 사회에서 이미 알게 모르게 경험한 것들이 그곳에 녹아있었기 때문이다. 단체생활의 불편함, 차별, 불평등, 분출할 줄 모르는 열등감과 불합리 등을 이미 겪었다.

하지만 오직 공동체라는 공간에만 얽매야 책을 읽는다면 저자가 그려낸 다양한 '인간 군상'을 놓치기 쉽다. 어느 곳이나 사회가 아닌 곳이 없듯 그곳에 모인 사람들,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현재'를 비추고 대변한다.

삶의 잔혹함을 못 본 척한다는 것은 어리석고도 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최소한 알고라도 있어야죠. (15~16쪽)

리가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문학을 통해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무척이나 소중한 일이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안녕반짝'님은?

아이를 키우면서도 책을 읽을 수 있음에 기뻐하는 평범한 주부입니다. 깊은 밤에만 독서할 수 있지만, 그 고요한 시간이 오로지 나만의 것인 듯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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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시나브로 겨울이 지나간다

 



윤대녕 |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푸르메 | 2010



겨울에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열심히 지내온 한 해를 돌아보는 일은 겨울에만, 그것도 12월이 다 지나간 시점에만 할 수 있다. 지금껏 읽어온 작가들의 산문집은 어딘가 겨울을 닮았다. 그들의 산문집은 아마도 겨울에 시작해서 다음 해 겨울 혹은 다다음 해 겨울에 끝냈으리라. 무덥고 뜨거운 여름에 이렇듯 느리게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책들은 쉬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이 ‘2011년 국립중앙도서관 사서가 추천하는 ‘휴가 중 읽기 좋은 책 80선’에 선정됐다. 휴가 중 읽기 좋아 여름에 이 책을 샀지만, 가슴 깊이 한기가 파고드는 겨울이 되어서야 이 책이 다시 떠올랐다.

산문집은 자기 고백적이다. 윤대녕 작가의 소설을 끝까지 읽어 본 적은 없었다. 어디서든 만나면 조금씩 읽어 볼 뿐이었다. 산문집으로 처음 만난 그는 인간미 넘치는 이웃 글쟁이 아저씨 같지만, 소설가로서 그는 짧고 담담한 문체 때문인지 우울한 분위기와 날이 선 차가운 얼음이 떠오른다. 작가의 성장배경과 생각의 변화, 작가로서 생활하는 모습 등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그만의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적어 내려가면서 보통사람들도 겨울에 느낄 법한 인생 돌아보기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산문집은 작가가 스스로 적는 자서전이라는 느낌이 든다. 한때, 소설보다 산문집을 더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은 허구적이라 나에게는 읽어야 할 당위가 없었다. 진심과 사실이 가득 담겨있던 산문집이 좋았기에 더욱이 산문집 작가를 꿈꾸기도 했었다.

얼마 전 김연수 작가도 산문집으로 처음 만났다. 소설가인 그의 성향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산문집 속 그는 본인이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웃긴 탐정사무소 주인 같았다. 폴 오스터도 마찬가지다. 《겨울일기》를 읽은 후 다른 산문집 《빵 굽는 타자기》와 《선셋파크》를 읽어보았다. 요즘은 산문집만큼이나 소설을 마땅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인간성을 들여다보는 재미만큼 작가의 능력과 노력이 마음껏 담긴 창작물을 읽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더러는 소설을 먼저 읽고 그 후에 작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면 산문집을 읽는다.

삶을 먼저 살아본 이가 해 주었던 이야기 중 가장 많이 공감했었고, 읽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왔던 이 책의 내용처럼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여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여러 번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올겨울은 길었던 것일까, 혹은 짧았던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으나 중요한 것은 누군가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고 바야흐로 봄이 문밖에 당도했다는 것이리라. 곧 온 세상이 꽃과 함께 푸르러지리라. 이제는 더 이상 길을 잃지 말고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밥을 먹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슬그머니 훔쳐 보았다. (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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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1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겨울'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매우 춥지만, 겨울은 ‘따뜻하다’는 감정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계절이에요. Thinkthings 님이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겨울마다 들추게 되는 이유도 ‘따뜻하려고’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올겨울에 또 어떤 책을 읽으셨을지 궁금해져요.

춥고 시린 겨우내의 고민이 끝난 뒤 윤대녕 작가의 산문집을 읽으면, 봄을 웃으며 맞이할 수 있는 용기를 받습니다. 올겨울에는 특히 철학 서적을 동시다발적으로 읽고 있는데, 그중 피터 비에리의 《삶의 격》이라는 책이 기억에 남습니다. 현실의 존엄성에 대해 작가는 확신이 담긴 모범 답안을 이야기해 주지 않습니다. 독자들이 문제를 한 번쯤 생각해 보고 고민할 기회를 준다는 점이 고마웠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인간의 존엄성을 편협하고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저의 생각과 입장을 다시금 돌아보고 재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 펜벗 앨범을 읽고, 자기계발서와 교양서와 같은 직접적인 가르침을 주는 책보다 ‘문학’에서 삶의 지혜와 자세를 얻는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Thinkthings 님과 같은 고민을 겪고 있는 친구가 있다면, 어떤 문학작품을 추천해주고 싶으세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을 권하고 싶습니다. 《마음》은 강상중 작가의 《고민하는 힘》과 《살아야 하는 이유》에도 많이 등장하죠. 일차적으로는 작가에게 더불어 독자에게 의문과 해답을 적절히 던져줍니다. 주인공과 함께 선생님의 비밀을 궁금해하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지러웠던 마음도 안정됩니다.
문학은 자신을 탐구해 가는 과정을 동행해 주는 친구 같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원하는 결론을 얻지 못했더라도, 결국엔 이야기를 읽어온 일련의 과정을 통해 피해왔던 본인의 고민을 마주할 힘을 얻기도 합니다.

● 펜벗 활동의 가장 두드러진 성격은 ‘추천받은 책’이 아니라 ‘추천하고 싶은 책’을 쓴다는 것입니다. 지금 ‘펜벗’은 Thinkthings님의 독서 습관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읽었던 책을 다시 들추어보는 일은 좀처럼 드뭅니다. 읽어야 할 새로운 책들은 좀처럼 줄어들지 고요. 하지만 펜벗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있는 책들의 제목이 떠오릅니다. 책장 앞에서 즐거운 고민을 하며 서성이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또한 혼자 하는 독서가 익숙한 저는 다른 펜벗의 책 안목과 훌륭한 서평을 보고 감탄합니다. 펜벗은 성실한 독서가가 되어야겠다는 바람을 되뇌도록 만듭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Thinkthings'님은?

철학하는 농부를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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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대한 모든 것》 - 당신은 사랑 알기 위해 태어난 사람

 



레오 보만스 | 《사랑에 대한 모든 것》 | 흐름출판 | 2014



최근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국제시장》 이 두 영화의 인기는 정말 놀라울 정도다. 《국제시장》은 정치 쪽에서 벌어진 여러 논란이 더 흥행을 부추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평범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주인공인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는 누적 관객 수 400만 명을 돌파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국제시장》은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그 평범함이 바로 많은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야기 안에 '순수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노부부의 사랑이기도 했고, 연민을 품은 사랑이기도 했고, 한 아버지의 부성애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단순히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수치로 계산된다. 정말 끔찍한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도 인맥, 재산을 따지고, 결혼 전문 회사는 그런 수치를 계산한다. 진짜 사랑이 그리운 사람들이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와 《국제시장》을 찾는 것이 아닐까 싶다. 두 영화에 나타난 사랑은 남몰래 계산기를 두드리는 사랑이 아니라 그저 본연의 있는 모습을 사랑하는 순정이다. 한 세대의 굵은 땀방울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단순히 사람에 대한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화와 음악을 즐기는 것도 사랑이다.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는 대단한 인기를 보여주었다. '토토가'는 단순히 추억과 그리움만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순수한 사랑을 볼 수 있었다. 순수하게 문화를 즐겼던 어린 시절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무슨 수식어를 붙일 수 있을까? 추억이라는 단어도 분명히 그런 모습을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추억에 빠지는 건 그 시절을 사랑한 기억이 있어서다.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토토가’에 열광했다. 여전한 사랑에 감동한 가수는 자신이 사랑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사랑은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게 아니다.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면서도 가장 많이 오해받는 단어다. 사랑에 관한 셀 수 없이 많은 해석이 있지만 사랑은 대체로 긍정적인 에너지이자 힘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랑은 객관적이라기보다 주관적이며, 따라서 느끼는 것이다. 내게 사랑은 최고의 행복이다. 사랑은 행복을 가져오고, 행복은 사랑을 깊게 만든다. (102쪽)

이 책은 상당히 두껍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은 그 두께를 체감하지 못했다. 내가 잘 모르는 감정인 '사랑'에 관한 다양한 해석을 읽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겨우 두 살 많은 형이 벌써 결혼을 한다고 들었을 때 '도대체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기에,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길래 결혼을 하는 걸까?' 생각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은 건 책과 애니메이션, 라이트 노벨 같은 문화적인 사랑밖에 없었다.

이성을 사랑한다는 건 아직도 모르겠다. 대학 시절에는 늘 내 옆자리만 앉는 여학생에게 신경이 쓰인 적도 있었고, 그저 나와 작은 이야기를 나누어주는 여학생에게 신경이 쓰인 적도 있었다. 내 경우에는 '호감'이 아니라 '호기심'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게 궁금해 말을 걸어보기도 했고, 어떤 때는 불편했고, 어떤 때는 바보 같은 짓을 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나는 절대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고 뼛속 깊숙이 생각한다. 뭐, 피해의식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수치로 계산하는 사랑은 끔찍한 사랑이라고 했지만, 솔직히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움직이는 게 아닐까 싶다. 드라마와 종교는 '조건 없는 사랑'을 말하지만, 어디 그게 가능한 일일까?

현대 사회에서 빠르게 증가하는 이혼율과 높아지는 결혼 연령, 점점 낮아지는 출산율, 일회적 성관계의 증가에서 알 수 있듯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낭만적?성적 사랑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동서양을 불문하고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 중요한 원인으로 사랑과 성에 관한 진지하고 실질적인 공식 교육의 부재를 들 수 있다. 학교에서 성교육을 제대로 하는 나라가 거의 없고, 사랑에 대한 교육은 그보다 더 심각하다. 그 이유는 사랑이 교육하기 어렵고 아이들의 장래 직업 훈련이라는 더 중요한 과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에 관한 문제가 성관계로 인한 질병이나 낙태, 성범죄만큼 당장 위험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사랑과 성에 대한 교육은 대부분 비공식적인 교육이다. 대중매체와 동화, 전해오는 이야기, 지어낸 이야기들로 인해 사랑과 성에 관한 근거 없는 통념과 잘못된 생각이 퍼진다. 일례로, 거의 모든 동화와 사랑 이야기가 결혼식 같은 행복한 결말로 끝나며 더는 노력하지 않아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준다. 이런 사랑 이야기들은 질투, 증오, 소유욕, 자살 등을 포함한 사랑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꾸미고 미화한다. 그러나 실제 삶에서는 이런 요인들 때문에 사랑하는 관계가 완전히 파괴된다. (46쪽)

사랑은 드라마와 영화에서 하는 이야기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사랑의 감정을 잘못 생각해 사람을 죽인 일이 언론에 보도되고, 잘못된 욕구로 사랑을 선택하면서 서로가 앙숙이 되어버리는 일도 있다.

과연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나는 그래서 그 감정이 무섭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 사람이 바뀌게 된다.'고 말하는데, 과연 그 사랑이 사람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열의 아홉은 '그렇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아직 그런 경험이 없는 나는 잘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랑을 알고 싶은 사람',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 '지금 하는 사랑을 강하게 만들고 싶은 사람', '지금 하는 사랑을 바른 방향으로 고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제목 그대로 다양한 전문가들이 사랑에 관하여 다양한 해설을 하고, '사랑'이라는 정체불명의 감정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다만, 책으로 '사랑'을 배우더라도 실제 사랑은 알 수 없다. 머리는 알지만, 행동이 따라와 주지 않는 것처럼.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은 사랑의 감정을 여러 방향으로 얘기한다. 좀 더 객관적으로 '사랑'을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갑자기 생겨난 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람에게 그 감정을 좀 더 바로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제목처럼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이 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노지'님은?

블로그 <노지의 소박한 이야기>를 운영, 책과 사는 이야기를 전하는 소박한 블로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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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년 동안의 고독》 - 고독하기 좋은 시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백 년 동안의 고독》 | 문학사상 | 2005


'부엔디아'란 '좋은 시대'라는 의미이다. 맬키아데스는 알았겠지만, 처음부터 그 단어가 반어적인 표현은 아니었다.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가 마콘도 마을을 세웠을 때만 해도 말 그대로 좋은 시대였다. 그러나 이 시절은 오래 가지 않는다.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은 이름과 함께 선조의 어리석음과 타락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마을 사람들은 불면증에 걸려 신의 존재마저 망각하고, 전쟁으로 서로를 죽이는 만행을 벌인다.

많은 이들이 이 소설의 흐름을 "개가 꼬리를 무는 듯한 구조"라고 일컫는다. 사실 그것은 당연하다. 《백 년 동안의 고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 도대체 시간보다 자연스럽고 잔인한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맬키아데스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이 기록은 연대기다. 무엇에 관한 연대기인가? 부엔디아 집안의 연대기라 해도 무방하고, 마콘도 마을의 연대기라 해도 무방하며, 콜롬비아, 나아가 이 세상의 연대기라 해도 무방하다.

외부의 간섭이 없었던 평화로운 마콘도 마을에 집시가 찾아온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신비한 물건과 과학을 선사한다. 사람들이 정착하고 마을의 규모가 커지자, 정부에서 이 마을에 군수를 파견한다. 마콘도 마을에는 성당이 지어진다. 어느새 이 마을은 도시로 발전했고, 기차가 들어온다. 마콘도 마을에 바나나 농장이 건설되었고, 마을 사람들이 외부의 자본에 의해 착취당한다. 그들이 파업 투쟁을 벌이자, 군대가 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고 시체를 바다에 던진다. 그 후 4년간의 장마가 찾아오고, 장마가 끝나자 모든 문물이 마콘도 마을에서 사라졌다. 얼마 뒤, 부엔디아 집안의 마지막 사람이 개미에게 잡아먹히자 회오리바람과 함께 마콘도 마을은 역사에서 완전히 제거된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건대,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말이었으리라. 죽음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만, 고독은 이름을 통해 유전된다. 고독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럽다. 돼지꼬리 달린 아이가 죽지 않고 가문을 유지했다면 오로지 고통과 슬픔만 존재했을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최선을 다했다.

《백 년 동안의 고독》과 만날 때는 언제나 의심을 품고 독서에 임해야 한다. 이 소설은 '마술적 리얼리즘(또는 마술적 사실주의)'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수법이야말로 소설의 정의다. 소설이란 사실에 마술(상상)을 교묘하게 집어넣은 것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소설이라는 구름 속에 놓인 사실에 허구를 섞어놓은 수법이다. 그리고 역사서 또는 연대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백 년 동안의 고독》에 허구를 집어넣는 일은 아주 수월하다. 연대기에 적힌 일들은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에 비판 없이 그 사실을 수용한다. 그렇게 되면, 결국 우리도 부엔디아 집안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아버지가 행했던 악한 일보다 더 악한 일을 하며, 좀벌레가 들끓는 방 안에서 다시 깨뜨릴 황금 물고기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속에 숨어 있는 거짓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에겐 진위를 구별할 수단도 없으며, 그 증거도 없다. 왜냐하면 이 책은 소설이니까! 작가에게 따져보자. 흙과 석회를 먹고 사는 인간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200년이나 살아 있는 사람이 창세기 이후 존재했습니까? 개미가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현실에서 있을 수 있습니까? 작가는 대답한다. 소설이잖아요! 당신들은 진실과 거짓도 구별하지 못합니까? 이것이 우리에게 아직 소설이 필요한 이유다.

책꽂이에 G.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꽂아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밀란 쿤데라

고독이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외로움이다. 흔히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하지만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고독의 역설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많을수록 개인의 고독은 깊어진다."는 것이다. 마을 사람이 20명뿐이었던 시절에 마콘도 마을 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갔다. 부엔디아 집안 역시, 호세 아르카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슬라가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며 소통했다. 그러나 마콘도 마을이 커지면서 상호 교류는 사라지고 집단과 집단 간 투쟁이 쉬지 않고 일어났다. 부엔디아 집안 역시, 우르슬라를 제외하고 누구도 자신의 자식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17명의 자식을 낳아놓고, 그들을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아니다. 굳이 소설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고독의 역설은 바로 우리 삶에 존재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우리의 상황은 마콘도 마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일지도 모른다.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전반에 고독의 역설이 존재하니까. SNS 기능이 활성화되고,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개인의 고독감은 더 심해진다. 왜냐하면 내 옆에 앉아 이야기해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새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 카카오톡과 페이스북으로 나에게 말 거는 사람과 손가락으로 대화하지 않은가? 손가락 대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마술적 리얼리즘, 현실 속의 허구가 아닌가? 어쩌면 가브리엘 마르케스야말로 맬키아데스일지도 모른다. 그의 양피지 문서는 이미 세상에 공개되었지만, 누구도 그의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으면서도 현재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곧 우리요, 곧 부엔디아 집안사람들이다.

맬키아데스, 아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1927~2014)는 이제 유령이 되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가족은 어떤가? 반드시 우르슬라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하지는 않겠다. 다만 밤나무 아래에만 머물지 말아 달라. 누군가는 죽음 이후에도 자식과 대화하고, 자식에게 돈이 아닌 유산을 전해준다. 오늘날 부모의 책임을 떠올려라. 자식 역시 공경을 기억하라. 만약 가족이 그것을 잊어버린다면, 어김없이 고독이 찾아올 것이다.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의 자식까지, 그리고 그 자식까지, 100년이 아니라 대물림되어, 영원히. 부디 고독의 역설을 깨뜨려다오. 나의 예언을 거짓으로 만들어다오.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오.


오늘의 책을 리뷰한 '고전의숲'님은?

옛 사람들의 지혜를 배우고 싶어 고전을 읽지만 ‘뜻’을 알지 못하여 헤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에 임하는, 긍정적인 남자. 현대에 나온 책들도 많이 보니 고전에만 파묻혀 있다고 오해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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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질》 - 책방 아저씨

 



은종복 | 《풀무질》 | 이후 | 2010

성균관대로 가는 길목에 풀무질이라는 서점이 있다. 나는 한때 그 근처를 매일 지나다녔지만, 실제로 풀무질에서 책을 산 일은 거의 없었다. 신입생 때는 놀기 바빴기 때문에 책을 멀리했었고, 복학 이후로는 주로 인터넷 서점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별 인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풀무질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받고 있다. 선배들은 이왕 책을 사려면 풀무질에 가서 사라는 말을 많이 했었다. 그런 얘기에는 분명히 '풀무질 주인이 학교 선배이기 때문에' 혹은 '중소서점을 살려야 해서' 라는 뻔한 이유 이상의 것이 담겨 있으리라 짐작했었다. (물론 짐작만 했을 뿐 선배들이 풀무질 얘기를 많이 한 이유는 정확히 몰랐다.)

나는 어떤 가게든지 주인의 냄새가 밴다고 생각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주인의 세계관, 가치관이 가게에 담기는 것이고, 그것이 가게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또 가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는다. 풀무질은 전국에 얼마 남지 않은 사회과학 전문서점이다. 그러니까, 이 시대에 도저히 돈이 안되는 학술적인 책을 파는 곳이다. 망하기 딱 좋은 형상이지만, 무려 20년 넘게 성균관대 곁을 지키고 있다. 끈질긴 생명력은 서점 주인의 삶과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풀무질의 주인인 은종복 씨는 학생 시절에 친구들과 사회과학 공부를 하며 민주화 운동 시위를 밥 먹듯이 나갔었다. 엄혹한 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에는 취업이나 돈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그 시대의 부름에 응했던 사람 중 상당수는 지금 기득권이 되었고, 자신의 과거를 깨끗이 지우고 현실과 타협했다. 하지만 은종복 씨는 20대 시절의 자신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이 시대의 불온서적이라고 부르는 것들을 팔며, '반자본주의', '평화', '환경'과 같은 가치를 위해 아직까지 고루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서점을 찾은 손님에게 자신이 쓴 쪽글을 나눠주기도 한다. 이 책에는 그 쪽글이 많이 실려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나는 선배들이 왜 그렇게 풀무질 얘기를 많이 했는지 깨달았다. 요즘 누가 타국의 전쟁에 관심을 기울이며, 또한 전쟁의 무고한 희생자를 보며 마음 아파하는가? 요즘 누가 돈에 눈먼 세상을 욕하며, 돈보다 인간이 위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하지만 그런 옛스러운 이야기가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곳이 풀무질이다. 풀무질은 단순히 책을 파는 곳을 아니라 같이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정신을 공유하는 곳이다. (실제로 풀무질은 책 판매뿐만 아니라 책 읽기 모임을 주최하기도 한다.) 참 고맙게도 나의 선배들은 풀무질의 가치와 정신을 귀하게 여겼고, 그 마음을 나에게 전해주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너무나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제라도 알게 되어 다행이다. 부디 풀무질이 이 냉혹한 시대의 파도에 부서지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Lost and Found'님은?

한강과 도서관을 좋아하는 청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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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 서울의 겨울

 

 



김승옥 | 《무진기행》 | 문학동네 | 2004



만약 소설이란 분야에도 신이 존재한다면, 작가가 정말로 접신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책이 있다. 바로 김승옥의 단편 「서울, 1964년 겨울」이다. 해마다 여름이 오면 표제작인 「무진기행」을 꺼내 읽고, 겨울이 오면 그의 또 다른 단편인 「서울, 1964년 겨울」을 꺼내 읽는다. 두 편 모두 고등학생 때 어느 언어영역 문제집에서 처음 만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김승옥의 문학 지문을 읽고 나서 느꼈었던 그 오묘함이란 다른 때와는 뭐가 달라도 확실히 달랐다. 문제는 한참 전에 다 풀었지만, 잔상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 나의 남은 자습 시간을 뒤덮었다. 하굣길에 결국 모의고사 문제집을 사려고 챙겨둔 돈으로 나는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덜컥 사고 말았다. 평소 나다운 선택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무진기행』을 책꽂이에 둔 지 십 년, 그리고 「서울, 1964년 겨울」로부터 무려 오십 년이 지났다. 구청 병사계에서 일을 했던 '나'도 부잣집 아들내미이자 대학원생이었던 '안(安)'도, 지금쯤 살아있다면 벌써 춘추가 근 칠십오 세다. 그들이 따로 또 같이 보냈을 오십 번의 겨울은 그들의 정수리 위에 흰 눈을 뿌렸거나 아니면 검은 뿌리들을 몽땅 뽑아버렸거나 둘 중의 하나는 했을 것이다. 파리는 여전히 하늘을 날고, 손을 뻗어보면 손 안에 잡히기도 하지만, 포장마차에서는 이제 참새구이 대신 출처가 불분명한 닭꼬치를 판다. 젊은 청춘은 일을 마치고 홀로 선술집을 찾지 않고, 길가에 즐비한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가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키거나, 조금 더 여유가 있다 싶으면 근처의 바를 찾는다. 가끔 한 모금씩 홀짝이며 주위 사람들을 눈으로 훑어 보지만, 불필요한 말 따위는 굳이 건네지 않는다. 괜한 오해도 싫고, 괜한 어색함도 싫다. 눈앞에 있는 낯선 누군가 보다 조그만 휴대폰 속 익명의 존재가 차라리 더 편하다. 언제라도 홈 버튼만 누르면 관계에서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옛날 무진의 명산물이 모두를 휘감는 뿌연 안개였다면, 서울의 명산물은 개인을 더욱 또렷하게 분리하는 욕망이었다. 지금, 무진의 명산물은 『무진기행』이라는 소설이 되었고, 서울의 명산물은 여전히 욕망이다. 그러나 서울 밖을 벗어나도 아주 손쉽게 욕망과 마주할 수 있다. 1964년 당시 '나'와 '안(安)'의 청춘은 마치 발밑의 흙물처럼 기온에 따라 녹았다 얼기를 반복했다. 살얼음 같은 개인주의였다. 비정하나 끝까지 모질진 못했고, 모질지 못했지만, 끝까지 인간답지도 않았다. 그들의 인간성은 어는점 0℃를 기준으로 묘하게 꿈틀거렸다. 평온해 보였다. 반면 요즘의 청춘들은 요동의 폭이 남다르다. 이상하다. 평균치를 내어보면 이들이 수렴하는 곳도 분명 0℃가 맞는 듯한데, 움직임은 확연히 다르다. 퍽 격하다. 이러한 세태는 나만 알고 있는 사실도 아니기에 그다지 의미 있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옆집 아저씨의 야구 동영상 취향이 무엇인지 복도 창문 너머로 확인하는 일 따위가 의미 있을 것이다. 그딴 건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고, 또 실제로 나만 아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이야기마저 1964년의 '나'와 '안(安)'을 제외하면 인정해 줄 사람도 없다는 게 함정이다. SNS가 발달하고부터 나만 알고 있는 게 큰 의미가 없어졌다. 남도 알게 하는 것에 오히려 더 큰 의미가 부여된다.

오십 년이 지난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그대로인 것은 오로지 ‘겨울’이다. 날씨가 춥다. 추위는 언제나 외로움을 동반한다. 도시의 청춘들은 여전히 외롭다. 타인의 죽음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서울, 1964년 겨울」의 마지막 장에서 두 청춘은 이렇게 말했었다.

"김형, 우리는 분명히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두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 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린 이제 겨우 스물다섯 살입니다." 나는 말했다.
"하여튼..." 하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여기서 헤어집시다. 재미 많이 보세요."하고, 나도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286~287쪽)

이 겨울이 지나가면 반드시 봄이 찾아오고 또 그다음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칠십육 세를 바라보는 '나'와 '안(安)', 이십 대 후반을 달리는 나와 친구들, 이 두 무리 중 어느 쪽이 더 빨리 늙을까.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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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1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겨울'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서울, 1964년 겨울」로부터 오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서울의 한복판에서 그대로인 것은 오로지 겨울이라는 사실이다.”고 서평에 쓰셨는데요, 서울의 어떤 점이 매해 겨울을 변함없게 만들까요?

사실 그 문장에 그렇게까지 깊은 의미는 없습니다. 요즘 날씨가 매우 춥잖아요. 말 그대로 절기상의 겨울이라는 뜻입니다. 그때 1월도 겨울이었을 테니까요. 덧붙여 서울의 어떤 점이 매해 겨울을 변함없이 만든다기보다는. 제가 생각하기에 서울과 겨울은 그냥 닮아있는 두 가지 형태인 것 같습니다. 읽었을 때 발음도 그렇고. 사람과 사람을 움츠러들게 하는 그 속성도 그렇고요. 오지랖이 넓어지는 것을 허용 안 하죠.

● 이십 대 후반을 나고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라는 김형의 말에 공감하시나요? 공감하신다면, 그때 왜 그렇게 느낄까요?

공감하는 편입니다. 저를 포함한 요즘 세대 중 다수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 때, 최대한 손해 보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이려 하니까요. 직접 경험에서 답을 찾기보다 간접 경험에서 답을 찾죠. 그게 더 안전해 보여서 그럴까요? 그러다 보니 문제에 대해 고를 수 있는 답도 자꾸만 줄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빠른 답이라고 해서 가장 젊은 답은 아닌데 말이죠.

● 펜벗 앨범에 쓰셨던 ‘기계화되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최근엔 무슨 책에 관심을 두고 계세요?

기계화되지 않으려면 그때그때 호기심을 가지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뭐가 됐든 계속 생각을 하게 되니 말입니다. 요즘은 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보통 하루에 4, 5시간 정도 자는데, 어떻게 하면 잠으로부터 몸이 자유로워질지, 그럴 수 없다면 과연 어떻게, 얼마나 자야 건강에 이로운지 궁금합니다. 새해를 맞아 습관도 바꿔보고 싶고요. 최근에는 『24/7 잠의 종말』과 『잠의 사생활』이라는 두 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녹색양말'님은?

자질구레한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저도 그런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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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느지막한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 민음사 | 2005

 

"아흔 살이 되는 날, 나는 풋풋한 처녀와 함께하는 뜨거운 사랑의 밤을 나 자신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첫문장이다. 어쩌면 불쾌할지 모를 이런 말들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해석하진 말아 주길. 소설의 미덕은 소설 안에서 확인해주길. 주인공은 평생 돈을 지불하지 않는 사랑은 해 본 적 없는 90세 노인. 그는 90세 생일 선물로 14세 어린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날 밤, 그는 소녀가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현듯 첫사랑을 시작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사랑은, 근 1세기 동안 홀로 견뎌온 사람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사랑은, 반세기 넘게 지켜온 문체를 버리게 만들었고, 열정에 대한 들뜬 칼럼을 쓸 수 있게 만들었고, 욕망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가능하게 해주었다. 죽음을 코앞에 둔 90세에, 그는 비로소 삶을 예찬하는 사람이 되었다. 삶이여, 영원하여라.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건강한 심장으로 백 살을 산 다음, 어느 날이건 행복한 고통 속에서 훌륭한 사랑을 느끼며 죽도록 선고 받았던 것이다."


삶은 90세라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노화와 죽음이 우리 삶에 주어진 절대적인 결말일지라도, 반드시 허무를 담보해야 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마르케스 특유의 낙천적인 힘은, 이제는 낡아 버린 말들 -사랑, 열정, 삶 등- 을 찬란하게 복귀시킨다. 그는 사랑을 믿고, 열정을 간직하고, 삶을 예찬한다.

이미 공언된 사실이지만, 마르케스는 믿을 만한 작가다. 이 책이 《백 년 동안의 고독》만큼 '내 인생의 책'이 돼주진 못 했지만 사랑에 관한 소설로 충분히 아름답고 충실하고 생생한 소설이었다.


설정 자체가 파격적인 만큼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다. 이 사랑이 90세 '여성'과 14세 '소년'의 사랑이라면, 어떨까. 젊은 여성의 육체를 생명력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문학에서 무척 흔한 일이지만 남녀를 역전시키면 여지없이 낯설어진다. 의도치 않아도 사회적, 문화적 맥락이 전복된다.


혹은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미성년자와 성인의 사랑이 세상에 드러난다면, 90세 노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가 살아온 삶이 어떠했든 간에, 그는 주책 맞고 망령든 노인네가 될 수밖에 없다) 몇 살 차이뿐일 지라도 범죄가 성립된다. 그들 사이에 자연스러운 흐름과 유려한 결이 존재했다 할지라도, 원래 사랑은 나이와 몸에서 분리될 수 없다는 걸 우리 모두 알지라도.

반드시 법이 없어야 인간의 자유가 실현된다고 생각진 않는다. 미성년자를 보호하는 법의 취지 역시 공감하고 동의한다. 다만, 그것이 전부라고 말해버린다면 삶의 많은 부분이 증발될 것이라는 불안감. 삶의 근거로 법을 내밀기는 싫은. 소설의 미덕은 이런 지점에 있다.


또 하나. 사랑에는 나이가 소용 없다고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은 상대방의 나이와 무관할 순 있되, 나의 나이와는 무관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 삶의 맥락 속에서 사랑을 한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사하라'님은?

끝없는 잡념의 화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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