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책/음반/블로거가 말하는 책'에 해당되는 글 752건

  1. 2015.02.10 『아내의 빈방』 -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2. 2015.02.06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 헤르만 헤세의 독후감
  3. 2015.02.05 『도시의 시간』 - 도시의 멜로디
  4. 2015.02.04 『달콤한 로그아웃』 - 이제 좀 꺼져줄래
  5. 2015.02.03 『남자의 자리』 -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6. 2015.02.02 『부모와 다른 아이들』 - 세상에는 이런 부모들도 있다
  7. 2015.01.30 《왜 고전을 읽는가》 - 왜 읽냐건 웃지요
  8. 2015.01.28 《공룡 이후》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
  9. 2015.01.27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달리기가 가르쳐준 삶의 의미에 대해
  10. 2015.01.23 《소비를 그만두다》 - 왜 사는데

『아내의 빈방』 -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버거, 이브 버거 | 『아내의 빈방』 | 열화당 | 2014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다. 오직 나다. 나는 당신이 될 수 없고 당신도 내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도 죽음이라는 이별 앞에서는 무기력해진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누군가 사라지면 그 자리는 영원히 빈 공간이 된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곳을 떠날 수 없다. 그곳에서라도 그를 느끼고 싶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혼자 말하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떤 이는 그런 시간을 오래도록 지속한다. 누구도 그 시간을 방해할 수 없다. 충분한 애도는 어디에도 없으니까.

당신은 사 주 전에 죽었지. 어젯밤 처음으로 당신이 돌아왔다오. 혹은,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이 없어진 자리에 당신의 존재감이 돌아왔다고나 할까. 베토벤의 「피아노를 위한 론도」 2번(작품번호 51)을 듣고 있던 중이었소. 구 분 남짓한 동안 당신은 그 ‘론도’였고, 그 ‘론도’가 당신이었지. 거기에는 당신의 밝음, 당신의 고집, 당신의 치켜 올라간 눈썹, 당신의 부드러움이 들어 있었다오. (10쪽)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존 버거의 글은 부드러운 햇살처럼 쏟아진다. 마치 그 햇살로 아내를 안아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사십 년을 같이 산 아내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분명 아내는 죽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곁에 존재한다. 눈을 뜨고 아침을 맞을 때, 어떤 음악을 들을 때, 어떤 장소에 도착했을 때 함께 있다. 만질 수 없는 형체로, 볼 수 없는 형상으로, 대답이 없는 메아리로.

당신을 유심히 보면, 길을 찾는 일에 익숙한 사람에게 볼 수 있는 섬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오. 모자를 쓰거나 코트를 입은 모습, 머리를 만지는 모습, 문을 여는 모습, 돌아서서 나가는 모습. 당신은 길을 찾는 사람이오. (13쪽)

우리는 종종 잊는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한가에 대해 잊는다. 사랑이 시작되었을 때 생생했던 세포는 긴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져 꺼내지 않는 옛 이불처럼 변해버리고 만다. 단 하나의 사랑이었던 당신을 기억하는 일이 새삼 힘들다. 무엇을 좋아했으며 무엇을 꿈꾸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예정된 이별을 알면서도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존 버거는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로 사랑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계속 뒤돌아보고 있소. 그리고 당신이 그런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당신은 시간을 벗어난 곳에,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으니 말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는 거요. (31쪽)

존 버거와 그의 아내 베벌리 버거가 서로를 얼마나 존중하며 사랑했는지 알 것 같다. 아내의 물건에 담긴 아내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자 노력했을 존 버거. 점점 사라지는 아내를 향한 눈빛은 얼마나 애틋했을까. 화수분 같았던 두 사람의 사랑은 잊힐 수 없다. 아들 이브 버거에게 전해졌을 사랑은 감히 그 크기를 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사랑은 지속된다. 어쩌면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나밖에 없다는 말은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라진 자리에 당신이 살고 있다면 말이다.

엄마가 어디 계신지 모르기 때문에, 엄마의 몸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요. 잠시 후면 저희가 고른 돌멩이가 엄마 무덤 위에 놓이겠죠. 흙과 풀 사이에 놓은 텐데, 그러면 아름다울 거라고 믿고, 또 그러기를 바라요. (35쪽)

애도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사랑하는 방법이 그렇듯이. 아내의 빈방은 존 버거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이 얇은 책에는 사랑이 전부 담기지 않는다. 부재 속에 존재하는 ‘당신’이라는 사랑을 살 뿐이다.


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아내의 빈방』은 어떻게 읽게 되셨어요?

존 버거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었는데 때마침 『아내의 빈방』을 만났어요. 개인적으로 제게도 2014년은 죽음과 상실을 벗어날 수 없는 해였기에 더욱 마음이 닿았습니다.

● 오랫동안 서평을 써 온 선인장님에게 ‘서평’은 특정한 활동이 아니라 이미 일상의 일부 같아 보입니다. 서평은 처음에 어떤 계기로 쓰게 되셨어요?

그저 독후감으로 시작된 메모였습니다. 분명 읽었지만 모든 책을 소장할 수 없기에 나중에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무언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책에 대한 애정의 작은 표현이랄까요. 정작 지금은 좋은 책에 대해 쓰지 못하고 있네요.

● 평소 한국문학을 즐겨 읽으시죠. 『아내의 빈방』과 함께 읽으면 좋을 한국문학 작품도 추천해주시겠어요?

같은 주제라 할 수 없지만 이런 책들이 떠오릅니다. 김선우의 『물의 연인들』, 한강의 『검은 사슴』, 윤대녕의 『누가 걸어간다』, 서영은의 『꽃들은 어디로 갔나』, 박범신의 『외등』이요.

●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잡았는데 감기 때문에 쉽지 않네요.

오늘의 책을 리뷰한 '선인장'님은?

그저 폭넓은 책읽기를 꿈꾸며 책과의 진정한 소통을 원하는 사람이며, 그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글쓰기를 꿈꾸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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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 헤르만 헤세의 독후감


 



헤르만 헤세 |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 | 김영사 | 2015


서평 또는 평론을 쓰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한다. 작품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과 무엇보다도 그 책을 읽고 싶게 만들기. 나는 둘 다 안 되기에 항상 내가 유의하는 부분이지만 쉽지 않다. 다작만이 글쓰기 실력을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 글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인데, 때마침 이 책 서문에 인용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답이 될 듯싶다.

글로 쓰인 모든 것 중에서 나는 오로지 글쓴이가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글을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정신임을 알 것이다. 타인의 피를 이해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글을 읽으며 게으름 부리는 자들을 미워한다. (9쪽)

‘피로 쓰고, 피로 읽어라.’ 글을 쓰는 자라면 신조처럼 여겨질 것이다. 헤르만 헤세도 그랬다. 헤세의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잠깐 글쓰기의 방식인 비평, 평론, 서평에 대한 단상을 꺼내보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비평가와 평론가의 펜을 통해 독자들이 따라간다. 평론가의 필력은 독창적인 해석에 도움을 준다. 문단에 대한 철저한 비판도 결국 비평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평론이나 비평이 아니라 서평에 가까운 주제를 얘기할 것이다. 서평가로 알려진 ‘로쟈’는 독자에게 지적 유희를 보여준다. 그에게 가장 높이 평가할 부분은 성실함이다. 그가 매일같이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은 독자에게 책을 고르는 좋은 정보가 된다. 이러한 성실함의 원조는 사실 따로 있다. 바로 오늘 말할 헤르만 헤세다.

그는 살면서 삼 천여 편의 서평을 썼다. 이 책은 73편의 글을 담고 있다. 직업으로서 평론, 비평, 서평을 쓴 사람은 있지만, 문학가 즉 작가가 서평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이러한 작업은 보통 철학자들이 유희적으로 자신의 지적 발산을 위해서나 이론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담을 때 행해지는데, 헤르만 헤세는 소설가로서 소설가를 소개한 것이니 재미있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니체가 문학적 글을 쓰기 위해 빨간 피를 뿜었다면, 그는 이번 작업을 쓰기 위해 파란 펜을 들었다. (이 부분은 책 전체가 파란색으로 인쇄된 것에서 찾아낸 것이지만) 내가 본 헤세의 글쓰기는 『데미안』에 대한 일화에서 알 수 있듯 독자를 위한 성실함이었다고 본다. 가명으로 출간한 의도가 이 책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지고 있는데, 그가 지속해서 서평을 쓴 이유 또한 세상의 젊은이들을 위한 안내자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헤르만 헤세가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만큼 헤세의 주관적인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 한 편 한 편 마다 자신의 영향을 받은 작가나 그가 비판하는 것이 무엇인지, 당시 시대적 상황이나, 그 소설이 나왔던 이유가 적혀 있었다. 이 책이 제법 가볍게 읽히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서문에서도 헤세의 성실함을 두고 ‘읽지 않은 책들의 더미’에 쌓여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의 생각이 모인 이 책이 나에겐 또 하나의 소설로 다가왔다. 내가 알던 헤세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책이기도 했다. 그의 흥분과 숨소리를 듣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해안'님은?

세상을 읽고, 세상을 쓰고, 세상을 그리고 싶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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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시간』 - 도시의 멜로디


박솔뫼 | 『도시의 시간』 | 민음사 | 2014


박솔뫼 작가의 『도시의 시간』을 읽으면서 내가 지나온 시간을 떠올려 본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나는 '서울 토박이'라고 말하지만 서울은 왠지 '토박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지 않는 도시다. 많은 사람이 그리는 '고향'은 없지만 서울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면 포근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언젠가부터 서울이라는 도시를 떠올리면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고 내려가는 '광장'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같은 특색이 드러나지 않고 삼삼오오 모여 살지만 저마다의 색깔이 빛나는 곳.

서울의 이질적인 면을 깨닫게 된 것은 지방에서 살던 친척 오빠가 잠시 우리집으로 와서 대학을 다녔을 때였다. 아마도 내가 중학교에 다녔을 때였는데, 그때까지도 난 내가 살던 곳이 무척이나 익숙했고, 내가 사는 도시가 좋았다. 그러나 오빠의 입장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대학교를 입학하기 이전에는 잘 올라오지 않았던 서울에서 부모와 형제들 없이 생활해야 했을 어려움과 익숙하게 살았던 그곳과 달라 도시의 이면이 싫었을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함께 이야기하던 중 '서울은 참 차가운 도시'라 했던 오빠의 말이 잊히지 않는다. 엄마가 있고, 들어갈 집이 있는 나에게는 이 도시의 차가움과 흐린 빛이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멀리 떨어져 있는 오빠에게는 도시의 시간이 삭막하고, 사람들이 어디든지 많은 곳이지만 고독하여 따스한 정을 느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 도시의 시간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은 나와 우미, 우나, 배정이 보냈던 십 대 시절이 아닌 지금이다. 박솔뫼 작가가 느릿느릿 리듬의 속도를 내며 한창 순수했고, 발랄했고, 때론 감수성이 짙었던 시절에는 그 시간의 막막함을 몰랐던 것 같다. 어른이 된 후에 이 책을 읽으니 그들이 느꼈던 암흑과 그들이 함께 보냈던 제니 준 스미스의 음악이 위로가 되고, 꿈이 되었던 시절을 깨닫는다.

나는 나에 대해 별생각이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정작 뭐가 되어 가는 것은 없었다. 뭐가 될 리가 없었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다. 지금 같은 대학생이 직장인이 될 것이다. 그마저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 것이다.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되는 것 없이 변하는 것 없이 완성되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깨닫고 나아가는 것도 없다. 그것만 꼭 그렇게 될 것이다. (46쪽)

박솔뫼 작가가 그리는 『도시의 시간』은 회색빛이다. 음울하고 차가운,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감이나 들뜬 기운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그리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인류는 대단한 미래를 그렸다. 그리고 정말 시간이 지나면 달나라에 갈 것처럼 더 발전되고, 안정된 사회를 생각했을지도. 그러나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글 속에서 느껴지는 차가움과 무심함은 어쩌면 청춘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고민했을 흔적이자 동시에 회색빛 아래에서 사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나와 우나는 십 대인데 중고생은 아니고 이도 저도 아닌 사람들일 뿐이었다. 우리는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낀 채로 타는 냄새를 지나쳤다. 우나가 가져온 음악은 도서관 휴게실보다 한밤의 미분양 아파트와 더 어울렸다. 밤이라 조용한 곳을 돌아다니기가 긴장되었지만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잡은 채로 시멘트 덩어리 사이를 걸었다. 우나는 기타 하나가 중심이 되는 음악을 좋아했고 그 노래들은 모두 먼 곳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연기가 향해 가는 곳, 웃음소리가 떨어지는 곳, 그보다 먼 곳을 노래했다. 우리가 어두운 밤과 음악에 집중하는 사이 우우우 우우우 시멘트는 그렇게 노래했을지도 몰랐다. (55쪽)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네 명의 청춘들의 이이야기는 시작과 끝도 없이 도시의 시간 속으로 스며드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들이 어떻게 무슨 일을 하며 삶을 살아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저 책을 읽은 독자들이 스스로 그들의 삶을 유추할 뿐이다. 『도시의 시간』은 경장편에 속하는 짧은 소설이지만 호흡이 굉장히 느리다. 책 속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며 그들을 그리는 것 같지만 세밀하게 한 글자 한 글자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삶이 비슷하면서도 다른 삶의 흔적들이 엿보인다. 동시에 그들의 감정선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무엇 하나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청춘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명확한 고조가 드러나면서도 진중한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다소 그 호흡이 느려 무엇을 이야기하기에 이처럼 모호하고 단조로울까 싶었다. 어느새 작가의 호흡으로 들어가 까마득했던 그 시간을 기억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물방울'님은?

책도 하나의 인연이라 생각하며, 매일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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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로그아웃』 - 이제 좀 꺼져줄래

 

 


 


알렉스 릴레 | 『달콤한 로그아웃』 | 나무위의책 | 2013


“모두 그러라는 것은 아냐. 하지만, 적어도 한 집 정도는 조명을 끄고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말이야.” 이것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에 대하여』의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이 책에는 또 이런 아름다운 문장도 실려 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대부분 지극히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28쪽)

나는 종종 2G 폰으로 오해받는 폴더 폰을 사용한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난생처음 휴대폰이라는 것이 생겼고, 그 휴대폰을 대학 졸업하고도 한참을 쓰다가 지금의 휴대폰으로 바꾼 지는 5년이 넘었다. 스마트폰 안 쓰는 사람 찾기가 힘든 세상이다 보니 “아직도 이런 폰 쓰는 사람이 있어요?”라며 가끔씩 ‘미개인’ 취급을 받기도 하고, “이제 그만 스마트폰 장만하지.” 하는 구슬림도 없지 않다. 스마트폰이 유용할 때가 있다는 건 안다. 그래도 이상하게 내키지가 않는다. 시대 변화를 역행하고픈 반항 심리 따위가 아니다. 소심하고 은근 모범생병이 있는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회사 출근하고 반나절이 지나서야 집에 휴대폰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예전 경험을 미루어 볼 때 휴대폰은 나에게 그리 중요한 물건이 아닌 듯하다. 지금 쓰는 휴대폰만 하더라도 와이파이 접속이 가능하고(실제로 접속해 본 적은 없지만), 음악, 게임이며 여러 기능을 내장하고 있다. 그런데도 통화하고 문자 주고받는 정도의 기본 중의 기본 기능만 충실히 쓰고 있으니, 이런 사람에게 스마트폰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스마트폰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시간과 끈기와 수고로움을 요구하지만 컴퓨터라는 기기가 있는 한 언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으니 스마트폰 없이도 당분간은 살아갈 수 있지 싶다. ……그런데 스마트폰은 차치하고 인터넷 없이도 살 수 있을까?

지금껏 잘 써 온 ‘블랙베리’를 휴대폰 가게 점원에게 맡겨둔 것도 모자라 회사와 집에서 쓰는 컴퓨터에 인터넷 연결 프로그램을 모두 삭제한 남자가 있다. 그의 직업은 신문기자. 최신 정보에 발 빠르게 대응해야 할 신문기자가 과연 휴대폰과 인터넷 없이 살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달콤한 로그아웃』은 아날로그 생활로 돌아간 한 남자의 182일간 기록이다. 제목과 달리 디지털 세계와 로그아웃을 선언한 남자의 생활은 솔직히 그리 달콤해 보이지 않다. 아날로그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남자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 시행착오를 겪고, 심지어 금단현상까지 보인다. 이런 남자 말고도 이 책에는 자유롭게 밖을 나다니지 못하는 것보다 스마트폰을 빼앗긴 것이 더 큰 고통이라고 호소하는 교도소 수감자,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 와서도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는 한 엄마, 남자가 무엇을 묻든 “구글에서 찾아봐!”라고 대답하는 직장 동료들이 등장한다. 내 모습을 연상시키는 인물들의 등장에 괜히 속이 뜨끔하다.

남자는 이 기록을 통해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거나 지금 당장 디지털 네트워크를 끊으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남자 역시도 실험이 끝난 뒤 집에서만은 웹 브라우저를 설치하지 말자고 마음먹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으니 감히(?) 그런 주장을 할 수 없었으리라. (남자의 친구가 비밀번호를 몰래 바꿔놓는 바람에 웹 브라우저 설치는 순간 미수에 그치지만, 뒷이야기는 알 수가 없다.) 남자는 그저 몸소 아날로그 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느낀 매 순간의 감정을 솔직히 적고 있을 뿐이니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의 몫이다.

편리한 문명의 기기를 거부하고 굳이 아날로그 생활로 돌아가 보는 남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다가는 도태되고 고립되지는 않을까 걱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 시스템 역시 많은 부분을 디지털 네트워크에 의존하면서 인터넷 없이는 살기 어려운 구조로 변모해 버렸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그런 이유 혹은 변명 한 가지씩은 가슴에 안고 문명 기기의 혜택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득 나는 책에 나온,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 왔다는 그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어졌다. “아이들과 스마트폰 중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하고. 그러면 그녀는 분명 (어쩌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들이요.”라고 답하지 않을까. 그녀 자신도 분명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그 순간이 둘도 없이 소중한 시간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머리로도 알고 가슴으로도 아는 일인데 눈은 스마트폰 화면을 향하고 손은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리기 바쁘다. 참 이상한 일이다.

구글 창립자인 에릭 슈미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컴퓨터와 휴대폰을 꺼라.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 그런데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살짝 바꿔보려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컴퓨터와 휴대폰 때문에 놓치지는 마라. 남자가 하고 싶었던 말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오늘의 책을 리뷰한 '새벽하늘'님은?

나무에게 부끄럽지 않을, 좋은 책을 찾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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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아니 에르노 | 『남자의 자리』 | 열린책들 | 2012


영화 ‘국제시장’의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윤덕수(황정민)는 피난길에 잃어버린 아버지와 여동생을 기억하며 스스로 가장이 된다. 그는 홀로된 어머니와 동생들을 보살핀다. 그게 자신의 의무라 여긴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학업도 포기한다.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파독 광부에 지원하고 여동생의 결혼 자금을 위해 베트남에 간다. 가족을 위해 희생한 그에게 남은 건 장애가 난 한쪽 다리와 계속 돌봐야 하는 가족뿐이다. 이러한 삶이 당연한 거라 믿으며 그는 의지를 꺾지 않는다. 시간이 흘렀고 그도 늙었다. 자녀들은 자라서 가정을 꾸렸고, 그에겐 손자들도 생겼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시장통의 오래된 가게를 왜 끌어안고 사는지, 왜 오래전 시간을 붙잡고 놓지 않는지를.

아니 에르노가 『남자의 자리』를 통해 아버지의 삶을 되짚으며 말한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고백 같은 아버지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 보편적인 개념의 아버지였다. 가족을 위해 애쓰면서도 애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무뚝뚝함, 점점 자신의 영역이 좁아지고 자녀가 자라면서 거리감이 생기는 순서까지 똑같았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가 죽고 나서 그를 기억하며 아버지의 역사를 적었다. 어떤 감정보다 지극히 객관적인 순서의 기록이었다. 작가가 직접 보지 못한 아버지의 모습까지 적을 수 있었던 건, 아버지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 사이가 어떤 교감으로 이루어졌을 한때의 시간이 준 기억. 아버지가, 아버지가 된 순간부터 봐 왔던 모습. 늙어가던 아버지의 생활과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 쌓이는 서로의 삶. 그렇게 아버지의 크기가 달라져 갔다.

이 무렵, 그는 벌컥 화내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증오감에 입가에 뒤틀릴 정도로 심하게 화를 냈다. 나는 어머니와 어떤 공모 의식으로 맺어지고 있었다. 달마다 찾아오는 복통, 골라야 할 브래지어, 화장품 같은 것들을 통해서였다. (…) 우리에겐 그가 필요 없었다. (91쪽)

투병생활을 하던 아버지는 조금씩 달라졌다. 얼핏 추측하기에 육체의 노쇠함보다 정신적인 피폐함이 더 삶을 짓눌렀을 듯하다. ‘나는 이제 상자 하나도 제대로 들지 못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가족들에게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어. 나는 혼자야…… 그에 반해 자식들은 점점 자라 다른 세계로 편입하고 세상을 알게 되어 자주적으로 살아간다. 아버지는 관심 혹은 간섭의 기회까지 사라진 영역을 오롯이 혼자 지킨다. 늙고 나약해져, 그만의 세계를 산다.

픽션을 거부하는 그녀의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으로 써지고 있지만, 그 개인적인 경험이 그녀만의 기억은 아닌 것 같다. 애틋했던 부모와 자녀 사이도 시간이 흐르면서 무덤덤하고 건조해진다. 살아가는 방식과 시간이 달라 서로 얼굴을 보기도 힘들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벽이 쌓인다. 보통의 가족이 이런 시간을 거친다.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아버지와 자식들 사이의 모습이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아버지와 나 사이는 그 '보편적'인 범주에조차 속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아버지와는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다. 대화로 시작된 말은 싸움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자동으로 차단되는 마음. 서로에게 타인이 되어 살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아버지와 나 사이에 '우리'라는 표현은 없다. 아버지에 관한 이러한 책은 나에게 늘 넘어야 할 거대한 산으로 자리한다. 보편성을 이해하기 위해, 내가 모르는 시간을 알기 위해 부딪혀야만 하는 전쟁 같은 도전이다. 나는 아버지의 시간을 모른다. 그가 어떤 시간을 통과해 어른이 되었고, 어떤 마음으로 부모가 되었으며, 어떤 바람으로 늙어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아니 에르노가 하는 말들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을 그녀의 글을 통해, '이런 걸 어떻게 알고 있지?' 하는 물음표를 띄우며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오갔을 대화를 그려봤다. 아버지의 유년기를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듣고 있을 딸의 눈빛, 몰랐던 시간이 오고 가며 쌓였을 애틋함과 이해, 아직 멀어지기 전인 부녀의 관계. 나는 바람 같은 시선을 던지며 이 짧은 소설을 꾸역꾸역 삼켰다.

아버지가 화두가 되는 이야기 앞에서 나는 늘 답답하다. 애써 피해가고 싶고, 쉽게 건너가지 못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다행이었던 건, 그녀가 이 글을 참 담담하게 썼다는 점이다. 감정의 파도가 지극히 일렁일 것 같은 사건 앞에서도 아니 에르노는 기록 의무자처럼 객관적이다. 이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래야 쓸 수 있었던 그녀의 마음이 보이는 듯하다. 기억, 정리, 기록이 차례차례 가능해지는 순간에 비로소 찾아오는 안도감과 같이. 언젠가 나의 아버지를 더는 볼 수 없는 시간이 오면 나도 이런 기록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는 내 가슴속 말, 이해, 정리를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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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2월의 펜벗 서평 주제는 '그 남자, 그 여자'입니다.


| 펜벗 일문일답

● ‘그 남자’를 아버지로 생각한 것이 인상 깊었습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이 '전쟁 같은 도전'이라고 했는데, 전쟁을 마치고서 아버지의 거대한 산은 좀 작아 보이던가요?

‘그 남자’를 주제로 여러 책의 주인공을 떠올려 봤는데 연인 같은 남자가 많더라고요. 그 많은 남자 사람을 뒤로하고, 언젠가 한번은 마음 다잡고 덤벼 봐야겠다고 생각했던 책이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였어요. 펜벗 주제가 아니었더라면, 이 책을 다시 책장 구석에 넣어둘 것만 같아서요. 아버지를 소재로 한 영화나 책은 늘, 저를 힘들게 하거든요. 가까이 가기 위해 아주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늘 제자리에 서 있다가 되돌아가곤 합니다. 평소의 저라면 그런 경우 관계 유지를 포기하는데,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 단절이 ‘단절’이 되지 않더군요.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입니다.
아, 그 거대한 산이 이제는 작아 보이냐고 물으셨죠? 아니요. 작아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어떤 모습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힘들어도 다시 산에 오르자 다짐하고 언젠가 또 이런 이야기를 선택할 것 같아요.

● 평소 다양한 장르를 신중하게 소화하는 캔맥주 님의 모습을 보고 노력하는 ‘다독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은 언제부터 즐겨 읽으셨어요?


저 정말 책을 안 읽고 사는 대한민국 사람이었거든요. 대학에 다닐 때도 전공 서적 외 책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다고 말하면, 지금 제 주변의 책 지인들이 놀라시더라고요. ‘정말?’ 하면서요. 네, 정말요. ^^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는데, 책을 즐기기 시작한 건 한 5년쯤 된 것 같아요. 우연히 모교 구내서점에 갔다가 『냉정과 열정 사이』를 잠깐 읽었는데요. 서서 읽다 보니 재미있어서 바로 사 들고 나왔어요. 그때부터였어요.
지금도 저는 책을 편식하고 많이 읽지도 못하지만, 책을 옆에 두고 늙어가고 싶은 소박한 바람이 있어요.


● 요즘은 무슨 책을 읽고 계세요?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와 하이타니 겐지로의 『상냥하게 살기』를 같이 읽고 있어요. 내키는 대로 두 책 중 손에 잡히는 책을 읽고 있는데요. 『스토너』는 한 남자의 평범한 일생을 담았어요. 심심한 듯 들릴 수 있는데, 오히려 그의 평범한 삶이 너무 와 닿아요. 이 책의 홍보 문구에서 ‘사는 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누구나 스토너다.’라고 하는데요, 딱 그거였어요. 우리 사는 모습과 너무 닮았어요. 그래서 뭉클하게 공감하게 돼요. 『상냥하게 살기』는 하이타니 겐지로가 사십 대에 발표한 육십사 개의 산문집이에요. 나중에 그가 아와지 섬으로 이주한 후의 일상도 들려주는데, 진지하면서 재미있어요. 문득, 하이타니 겐지로가 좀 엉뚱한 아저씨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학교 다닐 때 이런 선생님을 만났다면 조금은 즐거운 학창 시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게 돼요.


● ‘펜벗’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요?


펜벗에 선정되고 나서 궁금했어요. 매달 어떤 주제로 새로움을 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처음부터 선정된 주제가 저의 기대만큼 새롭거나 신선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반전이었어요. ‘처음’, ‘겨울’, ‘그 남자 그 여자’ 이런 주제가 어떤 책을 떠올리는데 상당한 고민과 관심을 두게 하더라고요. 어떤 책을 골라 볼지 이렇게 많이 고민해본 적이 정말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보면 참 평범한 주제일 수 있잖아요. 일상에서 늘 떠올릴 수 있는 주제인데, 이 평범함이 비범함을 만들고 있었어요. 책에 대한 느낌과 의미가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의 펜벗이 좋아요.
굳이 소박하게 바라는 점 한 가지라도 말해보라면, 펜벗의 주제가 조금 더 친근해져도 좋을 듯해요. 예를 들어, ‘이 주인공만 보면 욕이 나온다.’ 같은 주제요. ^^


오늘의 책을 리뷰한 '캔맥주'님은?

책을 좋아하고 싶어서, 책을 읽어요. 내일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한 페이지를 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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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다른 아이들』 - 세상에는 이런 부모들도 있다

 

 


 


앤드루 솔로몬 | 『부모와 다른 아이들』 | 열린책들 | 2015


 

장애는 질병일까요? 정체성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장애가 질병이라는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자는 장애를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것이 더 나은 사회를 이루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듯 합니다. 이를 위해 저자는 먼저 수직적 정체성과 수평적 정체성에 대해 말합니다. 부모와 동일하게 물려받은 민족성, 피부색 유전, 언어, 종교 등은 수직적 정체성입니다. 반면에 부모와 구별되는 속성, 이를테면 게이, 신체장애, 천재성, 정신병, 자폐, 지적장애 등은 수평적 정체성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 제목 『부모와 다른 아이들』의 그 '부모와 다른'이 바로 수평적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장애가 정체성이라는 사실이 당사자들을 온전히 위로해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겉으로 명백히 드러나는 자식의 장애는 부모의 자부심을 욕보이고 그들의 사생활을 침해한다." (49쪽)라는 저자의 말처럼 장애가 있는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 부모의 그것에 비해 이루 말할 수 없이 무겁겠지요. 심지어 저자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아무리 폭력적인 아버지도 자신의 외모를 닮은 자식한테는 상대적으로 덜 폭력적이다. 혹시라도 불량배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부디 아버지와 닮은 외모를 가졌기를 빌어야 할 것이다." (24쪽)

 

그런데 사실 저자 자신부터가 수평적 정체성으로 고민하고 상처받았던 사람입니다. 저자는 '게이'라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 놓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의 '아들'이란 제목의 1장은 저자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저자는 열일곱 살에 한 남자와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미국 사회가 여전히 동성애에 적대적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저자의 용기에 박수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저자는 이 책 1권에서 청각 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장애에 관해 다룹니다.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고, 쉽게 말할 수 없는 소재입니다. 저자는 자신이 직접 취재해 장애를 지닌 자녀를 둔 부모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실 저는 청각 장애와 소인증, 다운증후군을 각각 다루는 2장과 3장, 4장을 읽을 때만 해도 평정심을 유지하며 읽었습니다. 그렇지만 5장 자폐증 이야기부터는 계속 마음이 흔들리더군요.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자폐증 아이들에 관해 말한다면, '부모가 준 사랑에 반응하기 어려운 아이들'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부모님 주신 사랑의 극히 일부도 갚지 못하지요. 하지만 자폐증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합니다. 치료를 통해 증상이 완화될 수는 있지만, 어느 부모나 그것을 참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폐증 아들을 살해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데브라 윗슨은 경찰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 아이가 '엄마, 사랑해요.'라고 말해 주기를 기대하면서 장장 11년을 기다렸어요." (525쪽) 이 책에는 자폐증 자녀를 살해한 사례가 너무도 많이 열거돼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살해하는 일은 아마도 세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 것입니다. (물론 그 역도 마찬가집니다.) 저자는 자폐증 자녀를 살해한 부모 중 절반가량이 이타적인 행동이었다고 주장한다면서, 법정이 이런 범죄에 대해 관대함을 보이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합니다. 저도 저자의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렇지만 '자폐증 자녀를 두었다면 과연 끝까지 참는 부모가 될 수 있는가'란 질문이 제게 주어진다면, 쉽게 대답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정신분열증은 다른 수평적 정체성과는 달리 늦은 사춘기나 성인 초기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부모에게는 더 큰 아픔으로 다가옵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자기 자식을 영원히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529쪽) 저자는 심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보기에 그들(정신분열증 환자와 그 부모)의 고통은 끝이 없으며, 특이하게도 그 어떠한 보상도 없다." (630쪽) 정신분열증 환자 해리의 어머니 키티의 말을 들어볼까요. 아들 해리를 보살피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심력을 소모하는지 묻는 저자에게 키티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내게 있는 전부요, 모조리 다요. 정말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541쪽) 자신의 전부를 자기 자식을 위해 소모해버리는 부모 앞에서, 저는 부모로서 자식에게 어떤 보상을 바랐던 적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에는 비유적 표현에서가 아니라 정말 자신의 전부를 불태워 자식을 돌봐야 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가슴을 치는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특히 7장의 '장애'에서 '중도 중복 장애'의 사례가 가장 마음을 울리더군요. 중도 중복 장애의 '중도'는 정도가 심하다는 의미고, '중복'은 말 그대로 장애가 겹쳐진 상태를 말하지요. 그러니까 중도 중복 장애는 그 두 상태를 포괄하는 말입니다. 다음은 이러한 중도 중복 장애 아이를 두 명이나 낳았던 데이비드와 세라 해든의 이야깁니다. 첫째 아들 제이미는 지적 장애에다 전신마비 상태입니다. 다행히 둘째 딸 라이자는 건강하게 태어나지만, 아뿔싸! 셋째 샘이 제이미와 같은 증후군을 앍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어머니 세라는 샘의 진단명이 나온 지 이삼 개월이 지났을 때 자신의 상태를 이렇게 회고합니다. "나는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갈등했어요. 그대로 제이미와 샘을 데리고 차고로 가서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다 같이 일산화탄소를 마시고 죽고 싶었죠." (641쪽) 막내 샘은 몇 년 후 욕조에 잠겨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이 먹먹해지지 않기란 불가능합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저는 '너무도 쉽게 부모가 되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부모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네요. 장애를 지닌 자녀들을 위해 끝까지 버티고, 끝까지 사랑해준 부모들에 견주면 제 사랑은 정말이지 왜소한 것이었더군요. 책을 읽으며 계속 제 아이들을 생각했습니다. 제가 자식에게 한 수많은 실수 가운데 부정적 영향을 끼친 것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네요. 이런 저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해줍니다. "부모는 완벽하지 않고 수많은 실수를 범한다. 그리고 나는 선의가 부모의 실수를 감쪽같이 지워 주는 것은 아니지만, (...) 적어도 실수의 무게를 줄여 준다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받는 일은 끔찍한 경험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당신을 도와주려고 그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끔찍함이 줄어들 것이다." (700쪽)

이 말이 그나마 위로가 되긴 하지만, 저는 확실히 진짜 부모가 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부모들처럼 비록 자녀들이 나와 다르고,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해도, 끝까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이 절실한 이야기들을 오래도록 기억해두고 싶습니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캐러웨이92'님은?

바쁘다는 핑계로 책읽기를 미루고 미루다가, 독서하지 않는 자는 평생 무언가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는 진리를 뒤늦게 깨달은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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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읽는가》 - 왜 읽냐건 웃지요

 


 

이탈로 칼비노 | 《왜 고전을 읽는가》 | 민음사 | 2008

나의 어릴 적 꿈은 시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위 말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시를 써 당선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나의 시는 언제나 허공을 맴돌 뿐 다른 이들의 마음을 울리지 못했다. 전라북도 무주 산골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어느 추운 겨울날 아이들과 야간 자율학습을 끝내고 읍내에 하나밖에 없는 편의점을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우리와 함께 마치고 내려온 담임 선생님과 그의 오랜 친구였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우리 학교 대표로 지난번 글짓기 대회에 나갔던 아이라고, 자네도 읽어보지 않았느냐며 말이다. 그는 나의 이름을 듣고는 "아~, 너 수필 썼었지?" 하며 아는 체를 해 주었다. 그리고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그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작가 ‘안도현’이라고.

나는 그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편의점을 떠나 학교 기숙사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가 나의 담임선생님처럼 어느 산골의 교사일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나는 대학에 진학했고, 그의 이름을 좇아 그의 시들을 읽었다.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후회했다. 오래도록 나의 꿈은 글의 언저리를 따라 있었다. 하지만 수능 점수와 장학금을 따라 진학한 대학은 나에게 오랜 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선물했다. 초, 중, 고를 지나면서 한 번도 꿈꾸어보지 않았던 '교사'라는 삶을. 나는 교사로 살면서 오래도록 꿈을 잊고 살았다.

꿈을 잊고 책을 읽지 않는 건 매우 쉬운 일이었다. 아이를 낳고, 기르고, 하루를 보내는 데만 집중하면 됐었다. 나는 스스로에게조차 잊히고 있었다. 이제 서른 중반을 찍으며 나는 다시 꿈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는 꿈이라기보다 바람에 해당하는 일들을 생각했다.

오랜 질문의 답을 찾기라도 할 듯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를 펼쳤다. 하지만 서문을 제외하곤, 이탈리아의 작기인 칼비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칼비노의 렌즈를 통과한 생소한 '고전'들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역자도 밝히고 있듯, 그가 소개하고 있는 작품들 중 몇몇은 아예 우리나라에는 번역조차 되어 있지 않을 만큼 생소하다. 그러나 칼비노의 렌즈는 그 생소함에 다소 활력을 불어 넣는다. 가끔은 시선을 멈추고 밑줄을 긋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돈키호테의 전신 격에 해당할 만한 ‘티랑 로 블랑’에서,

중요한 것은 이제 기사에 관한 신화가 아니라 책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갖는 가치이다. 이것은 책과 삶을 구분하지 않고 책 바깥에서도 신화를 찾고자 하는 돈 키호테의 가치관과는 반대되는 가치관이라 할 수 있다. (91쪽)
라고 말하는 부분이나,

그 순간 삶 자체는 책 안에서 서술되고 있는 형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97쪽)

라고 평하는 부분이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티랑 로 블랑’에서 그가 발견한 돈 키호테의 가치관, 삶과 책의 일치를 푼 문장을 보며,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은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때로는 고민을 또 때로는 위안을 준다. 그러나 책은 책 밖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혹 순진한 독자가 책 속의 말들을 따라하고 책이 권하는 일들을 그대로 행해도 책에서 말하는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책은 청춘의 아픔을 논하고 따스한 말을 해 줄 수 있지만 청춘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러나 여전히 돈 키호테와 같이 책 속의 일들과 책 밖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면 왜 책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에서 고전이 어렵다면, 그 말을 ‘책’으로 바꿔볼 수 있다.

"왜 책을 읽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효율로 또 어떤 이에게는 공감, 또 어떤 이에게는 행동으로 다가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칼비노가 서문의 마지막에 인용하고 있는 시오랑의 이야기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어떤 목적이나 유용성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냥" 혹은 "그래서"에서 해당될 만한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곧 죽음을 선사할 독약이 만들어지는 그 앞에서도 악기를 배우는 소크라테스가 남긴 말이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그저 배우고 싶고, 알고 싶다는 욕망만큼이나 강력한 것은 없다. 나를 포함하여 수많은 사람이 한때 놓아버렸던 꿈의 언저리로 돌아가려는 이유도 그저 그냥 그러고 싶어서다. 그렇게 해 보고 싶은 열망과 정열 때문일 것이다. 칼비노의 책은 서문을 제외하고는 인내심을 가지고 읽었다. 정확히 나는 읽었다. 글자를 말이다. 어려운 내용이었고, 그가 소개한 책들은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끔 어디선가 본 듯한 세르반테스, 톨스토이, 디킨스, 헤밍웨이를 만나면 반가울 따름이었다. 그러니 기억에 남은 것도 많지 않다. 다만, 그가 고전을 읽으며 다가서려 했을 삶의 근원을 다시 생각해 본다.

이 책을 덮고 나는 올 한 해 여러 엄마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리딩살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나, 한 달에 한 권 책을 읽는다. 나는 엄마들이 왜 그토록 열심히 책을 읽고 고민을 하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그들 또한 한때 놓아버린 꿈과 읽고 싶다는 열정에 이끌렸을 것이다. 여전히 책을 읽는 이유, 읽어야 하는 이유는 고민의 대상이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다시 책을 펼치고 이야기를 나눈다. 언젠가 고민의 결과가 한 편의 글로 태어나는 날이 오길 바란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apranihita'님은?

읽고 보고 듣고 느끼고 쓰는 일상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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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 이후》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이야기

 


도널드 R.프로세로 | 《공룡 이후》 | 뿌리와이파리 | 2013


1억 년이나 넘게 종을 유지하며 중생대를 대표했던 공룡은 상업적으로나 순수한 지적 호기심으로나 크게 성공한 ‘아이템’이다. 특히 공룡의 멸종이 6,500만 년 전에 있었던 운석 충돌과 연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대중의 관심은 더욱 증폭되었고, 관련 책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이렇듯 지대한 관심에도 공룡의 직계 후손이 우리 눈앞에서 보란 듯 생존해 있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또한, 거대한 비조류 공룡들이 멸종한 덕분에 우리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가 지구를 점령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우리의 관심 밖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빙하 시대이며 인류 문명의 역사는 빙하 시대 사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따뜻한 시기인 ‘간빙기’가 1만 년 정도 특별하게 연장된 덕분에 꽃 피웠다는 사실 또한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듯하다. 공룡 덕분에 백악기, 중생대, 고생대라는 지질학 용어는 일반인들의 귀에도 낯설지 않을 정도로 흔해졌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사는 신생대라는 말은 왠지 낯설고, 신생대를 다룬 책도 중생대나 고생대를 다룬 책보다 드물다. 그렇기에 도널드 R. 프로세로의 『공룡 이후』라는 제목은 더욱 눈에 띄며 발견자의 침체한 호기심 세포를 빠르게 자극하기 충분하다.

비조류 공룡이 멸종한 이후 6,500만 년이 지나는 동안, 지구 환경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온난화와 한랭화가 번갈아 찾아오면서 현재의 사막이 사바나나 초원이 되었던 시기도 있었고, 현재 사람이 살기 적당한 곳이 빙하로 뒤덮여 불모지가 되었던 시기도 있었다. 다양한 생명체들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멸종과 진화를 거듭하면서 현재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약 200만 년 전에 시작된 플라이스토세의 빙하 시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고기후학적 증거에 나타난 바로는, 보통 ‘간빙기’(빙하 시대 중 기후가 따뜻한 시기)는 약 10만 년을 주기로 반복되는 빙하 주기에서 겨우 1만 년 정도만 지속한다. 지질학적 시간으로는 ‘찰나’에 버금가는 이 ‘1만 년’ 덕분에 인류의 문명은 지금과 같은 화려함을 뽐낼 수 있다. 만약 그 1만 년이 없었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아직도 돌도끼를 들고 여기저기를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고 있을 것이며, 이 글을 쓰는 필자 역시 동굴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며 오늘 잡을 사냥감을 위해 열심히 돌을 갈고 있을지도. 믿기 어렵지만 인류의 문명은 우연한 결과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그 1만 년의 간빙기 와중에도 소규모의 온난기와 한랭기가 있었고, 그러한 기후 변화는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홀로세에서 가장 따뜻했던 시기인 BC 5000~BC 4000년에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계곡, 중국의 위대한 문명(황허 문명)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BC 1200∼ BC 800년에는 기후가 다시 변하기 시작했고 앞서 문명이 꽃피웠던 지역 곳곳에 홍수와 가뭄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자연재해를 신의 분노로 재앙이 닥친 것이라 해석했지만, 사실은 기후변화가 그 원인이었다. 기후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미케네나 마야 문명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중세에도 기후변화는 계속되었다. 기후변화는 역사학자 바버라 터크만이 ‘비참한 14세기’라고 일컬었던 대기근을 불러왔고, 30년 후에는 흑사병을 일으켜 유럽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따뜻해진 그린란드와 래브라도 반도에 정착했던 바이킹족은 다시 찾아온 기후변화 때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전멸했다. 지구의 기후는 19세기 소빙하기를 끝으로 온난화에 들어섰고 이후 거의 2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문명이 꽃을 피웠던 축복받은 간빙기, 그 1만 년의 짧고도 긴 시간의 끝은 우리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문명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다면 우리의 문명은 심각한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연간 1만 7,000종에서 많게는 연간 10만 종이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고 있다. 고생물학자들이 추정한 ‘기본’ 멸종 속도, 다시 말해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때의 멸종 속도는 4년에 1종꼴이다. “심지어 ‘5대 대멸종’의 멸종 속도도 이보다 10배 이상 높지 않았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인간이 자연을 무지막지하게 착취한 응분의 결과이다. 리처드 리키와 로저 르윈은 이를 ‘여섯 번째 멸종’이라고 부른다. 정말 영광이지 않을 수 없다. 46억 년 지구 역사에서 우리는 여섯 번째 대멸종의 격변기를 직접 체험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 꽃피운 문명을 뒤돌아보며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자부한다. 그러나 시간에는 당할 자가 없듯이 그러한 이들도 우주의 길고 큰 역사 속에 묻혀버렸거나 묻힐 것이다.

우리 또한 지구와 태양의 종말이 오기 전에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지 않는 이상 다사다난했던 인류 역사의 장을 마칠 것이다. 우주가 탄생하고 수많은 은하와 별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긴 역사에서 우리 은하에 적당한 크기와 밝기의 태양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적당한 거리에 지구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혹독한 빙하 시대 중 잠시 따뜻했던 기후 덕분에 번창한 인류 문명을 보면 우리의 존재가 특별하다기보다는 이 우주를 지배하는 법칙은 다름 아닌 ‘우연’이란 것을 깨닫게 된다. 경이로운 우주의 놀라운 모든 것들이 이 ‘우연’ 속에서 탄생하고 ‘우연’ 속에서 죽었다. 우리의 삶 또한 ‘우연’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 ‘우연’ 덕분에 화사하게 꽃 핀 우리의 문명이, 이번에는 ‘우연’이 아닌 인류의 오만방자함이 불러온 ‘필연’ 때문에 시든다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우리의 모든 문명은 홀로세라고 하는 짧은 온난기의 산물이고, 우리는 지금 그 홀로세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 그 끝은 너무 더울수도, 또는 너무 추울 수도 있다. 우리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자연이 앞으로도 계속 호의적이리라는 가정은 더 이상 할 수 없다. (본문 중)

오늘의 책을 리뷰한 '노래하는다롱이'님은?

책과 함께 하는 삶은 지루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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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달리기가 가르쳐준 삶의 의미에 대해

 


무라카미 하루키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 문학사상 | 2009


책을 추천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독서를 워낙 즐기는 탓에 한꺼번에 여러 책이 아우성쳐서 골치가 아프다라고 말한다면 뻔한 거짓말이겠지만. 암튼 누군가가 공개적으로 추천한 책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내 경우엔 추천한 사람이 더 궁금해진다. 그래서 책을 추천한다는 건 어딘가 약간은 부끄럽고 겸연쩍은 일이 되어 버렸다. 이럴 때면 가급적 내가 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보편적 성격의 책을 고른다. 아무래도 그런 편이 남 얘기 하듯 책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좋고 솔직하고 편하게 독자 입장에서 책에 대한 인상을 펼쳐놓을 수 있어서 좋다. 내겐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란 그런 책이다.

 

‘적어도 끝까지 걷지 않았다’라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책 말미에 써놓은 자신의 묘비명을 나도 달리기할 때마다 곱씹곤 한다. 그 말을 생각하며 달리면 희한하게도 어떡하든 계속 달리게 되고 지친 와중에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이 책을 읽고 이미 수많은 사람이 달리기를 즐기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니, 사실 들은 바는 없지만 그럴 것이라고 충분히 확신하게 된다. 책을 읽다가 운동화를 신고 밖으로 나가 달리도록 만드니까. 스무 살 이후 동네 운동장 몇 바퀴도 뛰어본 적 없는 게으른 나 역시 달리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2009년 1월이었다. 무척 추웠던 휴일 아침, 아무도 없는 천변을 달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턱이 없던 나는, 달리기를 하면서 스스로 감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느낌은 거창하게 말하면 어떤 내면적 ‘만남’ 같은 것이었다. 그날 이후 달리기를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갑자기 긴 거리를 달리게 된 것은 아니었다. 틈나는 대로 달리면서 점차 거리를 늘려나갔다. 몇 달이 지난 후엔 10킬로미터를 편하게 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엔 하프코스를 완주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건축설계다. 이 일로 말하자면 알려진 만큼 멋있거나 폼 잡는 일이 분명히 아니다. 대신 알려진 것 이상으로 고되고 에너지를 많이 필요로 하는 일임엔 틀림없다. 하루키가 달리기를 자신의 고된 글쓰기 인생을 지속하게 해주는 숭고한 정신적 ‘의식’으로 삼은 걸 보며 나 역시 달리기를 내 고된 직업을 계속 이어나가게 해주는 ‘의식’으로 삼고 싶었다. 그리고 그처럼 달리기를 하며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흉내내다보니 일을 하면서 달리고 글도 조금씩 쓰는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6년이 흘렀다. 여전히 건축설계를 하고 틈나면 달리기를 한다. 글을 쓰다 보니 책도 몇 권 펴냈다. 지금의 삶을 모두 달리기를 시작한 탓으로 전제 할 수는 없겠지만 서른아홉이었던 그 해 1월, 이 책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조금 궁금하긴 하다.

 

특별한 다짐을 위해 며칠간 하루 20킬로미터 이상을 걸었던 2010년 12월 겨울 지리산에서도 이 책은 나와 함께 있었다. 아테네의 폭염을 이기고 마라톤 풀코스를 처음 완주했던 대목을 읽으며 살을 에는 눈보라를 뚫고 산길을 걷는 내 상황이 재밌어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트래킹을 마치고 민박집에 몸을 뉘여 책 몇 꼭지를 읽다보면 기다리고 있는 다음날 행군이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외려 마음이 훈훈해지면서 금새 잠이 들었다. 어디선가 훈풍이 불어오는 듯한 그의 후끈한 이야기가 지쳐있는 심신에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하루키의 언어는 종종 소재로 삼는 이야기를 훌쩍 넘어서서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이야기 하곤 한다. 하루키의 그런 면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을 통해 적잖은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리드미컬하게 팔과 다리가 움직이고 중력을 이기며 땅을 밀어내어 몸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정신을 집중해서 알아간단 건 어떤 삶의 비밀 하나를 이해하는 것과도 같다. 5킬로미터든 10킬로미터든 21킬로미터든 한 발자국씩 달리고 나면 소진된 육체와 정확하게 반비례되는 정신적 충만함이 채워지는 것이다. 긴 거리를 천천히 달려간다는 행위가 신체단련의 차원을 넘어 자기수양의 도구가 된다. 책을 읽으면 누구라도 그런 도구가 하나쯤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겨울의 한복판에서 다가오는 봄을 기다리며 책을 다시 펼친다. 봄을 기다리는 시점에서 새로운 내면의 다짐과 사색이 필요할 때 아주 제격이다. 엊그제도 호수 공원을 달렸다. 어느덧 이렇게 달린 지 6년이 되어가는구나 생각하면서. ‘젊은 날의 믹재거는 마흔다섯이 된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다’라는 책의 구절을 되뇐다. ‘누구든 나이를 먹으며 상상할 수 없었던 세계 속에 몸을 두고 살아가고 있다. 그 세계에 있는 것들을 받아들이면서 일단 살아가야 한다’고 하루키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덧 나도 마흔다섯이다. 강물을 생각하며, 구름을 생각하며 그저 소박하고 아담한 공백 속을, 정겨운 침묵 속을 계속 달려온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여간 멋진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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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과 서평을 나누고자 반디앤루니스 '오늘의 책'을 펜벗과 함께 만들어 갑니다.
펜벗이란 서평을 쓰며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를 의미합니다.
매주 월요일, 성실한 서평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 명예 펜벗 일문일답


 


최준석 | 건축가. 건축사사무소나우대표
건축사. 건축사사무소 NAAU를 운영하면서 주택, 어린이집, 기숙사, 기업사옥 등 다양한 건축설계를 진행 중. 서른여덟 살 때 집이나 글이나 ‘짓는’ 건 매한가지라는 소소한 깨달음을 얻은 후, 본업인 건축설계 틈틈이 글짓기에도 즐겁게 공을 들이고 있다. 건축은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정의를 여전히 신뢰하기에 겉모양이 현란한 외향적 건축보다는 삶을 위해 소소한 배경으로 존재하는 내성적 건축을 좋은 건축이라 믿는다.

첫 책 《어떤 건축》이 2010년, 두 번째 책 《서울의 건축》이 2012년, 그리고 작년에 《서울 건축 만담》이 나왔다. 주기상으로 보면 2년에 한 번 책을 내는 셈이다. 우연한 작업 결과인가. 모종의 ‘자신과의 약속’인가.


자신과의 약속까진 아니지만 첫 책을 내고 대략 2년마다 한 권씩 책을 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 했었다. 하지만 사무소 운영하면서 책을 쓴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될 일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2년 주기로 책이 나오고 있는데 특별히 지키려고 애를 쓴 적은 없다. 우연히 그렇게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취미 이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정신적인 소모가 많은 일이다. 좋은 글에 대한 욕구가 클 때면 더 할 테다. 밥벌이를 위한 노동 이후, 시간을 쪼개 글을 쓰고 있다. 당신은 왜 글을 쓰려 하는가.


처음엔 글쓰기를 노동과 다른 종류의 일로 생각했다. 그렇다고 취미로 여기지도 않았다. 글쓰기를 통해 건축실무에서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표현하면서 스스로 위로받고 싶었던 것 같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대리배설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글쓰기 자체를 통한 자기정화의 의미가 좀 더 큰 것 같다. 글을 쓰고 돈을 받는 일이 많아지면서 글쓰기가 점점 노동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게 조금 유감이다.

프로필 중, 집이나 글이나 ‘짓는’ 건 매한가지라는 표현을 했다. 좋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매칭이다. 지금껏 지은 3권의 책에 대한 리뷰를 한다면. 글이 원하는 설계대로 잘 지어졌는가.


‘짓는다’는 표현이 좋다. ‘만든다’는 그 자체로 완결의 의미가 있고 만드는 사람이 더 중요한 느낌이지만 ‘짓는다’의 의미는 밥이든 집이든 글이든 짓고 나서 그것을 먹고살고 읽는 사람까지를 포괄한다고 생각한다. 책들이 잘 지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건 독자들의 몫이 아닐까.

과거 어떤 책을 읽었고, 현재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 분야든 상세한 제목이든 관계없다.

건축 관련 책부터 소설, 실용서 가리지 않고 보는 편이다. 한꺼번에 여러 권을 보는 스타일이라 일이 바빠지면 마무리가 잘 안 되는 문제가 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세상물정의 사회학》과 《논어》다.

 

추천 책에 대한 한마디.

행동하게 하는 책들이다. 《빵굽는 타자기》를 읽고 무슨 글이든 써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여행의 기술》을 읽고서 생각만 하던 먼 여행을 실행했다. 《집을 생각한다》를 읽으면 내 가족을 위한 집을 짓고 싶어진다. 최근에 읽은 《건축과 감각》은 건축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일반적인 서평이라기 보다, 주제를 정해 책을 고르고 글을 쓰는 작업이었다. 어땠는가. 독자들이 ‘겨울’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작성한 서평을 둘러보았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개인적으로 겨울이라는 계절의 다면성을 좋아한다. 겉으론 추워서 움츠려있는 듯 보이지만 속에는 곧 다가올 봄을 기다리는 열망이 있다. 겨울은 다른 계절보다 사람마다 다양한 느낌으로 기억되고 표현되는 것 같다. 서평을 몇 개 읽으며 겨울이 새삼 참 복잡한 계절이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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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를 그만두다》 - 왜 사는데


 

 


히라카와 가쓰미 | 《소비를 그만두다》 | 더숲 | 2015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는 참으로 많고 첨예하다. 2015년 1월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는 갑과 을의 논쟁, 그리고 폭력이다. 어린이집 아이를 학대한 보육교사, 땅콩회항으로 불붙은 을을 향한 갑의 횡포. 물론 이 말고도 한둘이 아니지만 거의 모든 현안이 덮일 만큼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 문제들을 살펴보면 단순한 폭력의 문제는 아니다. 유아 학대를 보면 맞벌이 때문에 아이를 맞길 수밖에 없는 가정, 보육교사의 과도한 노동환경, 어린이집 운영에 관한 비리가 얽혀있고 갑, 을 문제 또한 노동과 돈에 대한 문제가 얽혀있다. 이는 비단 어린이집에 CCTV 하나 설치한다고, 가진 자들이 친절함을 장착한다고 해서 해결될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돌아가 보면 '돈', 자본으로 귀결된다. 그럼 돈 문제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이렇게 돈이 신앙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살게 되었는가. 왜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자신들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해석하는 동안 그렇지 못한 자는 늘 박탈감에 시달리고 일자리를 걱정해야 하는가. 많이 '소비'하는 것을 미덕이라 여기며, 더 많이 소비할 능력이 있는 자들을 칭송하고 동경하며 떠받드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가. 저자는 이런 우리와 다르지 않은 금전 만능주의의 사회, 자국 일본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이러한 거대한 담론을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제 더는 생산의 주체가 아닌 '소비'의 주체가 되어버린 '개인'의 모습을 돌아보며, 소비를 위해 살아가는 일본 사회에 그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참 비슷하게 변하고 있다. 가족중심의 사회에서 서구사회처럼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로 바뀌었고, 기업들은 '시장창조'라는 이름으로 지역과 가정을 잘게 쪼개 개인을 만들고 개인의 욕망을 환기해 '소비자'를 만들었다. (89쪽)


 

이를 미개 시장으로 확대한 것이 바로 '세계화'다. 우리는 '소비'의 주체가 되어 기업들이 환기한 욕망을 따라 '소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대형 상점이 들어서 지역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이를 따라 형성된 시민들의 긴밀한 관계 역시 파괴된다. 우리는 철저하게 노동과 생산이 분리되어 그들을 위해 일하고, 또 소비한다.

 

이를 해결할 방법으로 저자는 소비자에서 생산자가 되자고 말한다. 창업이 아닌 '소 상업', 돈벌이가 아닌 '살아가기'가 중심이 된 '탈소비자'를 생각하자고 한다. 싸게 사는 것이 아닌 비싸도 가치 있는 소비를 하는 것, 적게 벌되 잘 순환시키는 것, 상품 경제 속에 '증여'와 '교환'을 제시한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을 하지 않는 사회'로 재설계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 말한다.

이 책은 오로지 소비 그 자체에만 초점이 맞춰있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강요된 욕망만을 좇아 사는 우리 모습에 좋은 충고를 들려준다. 그러나 아쉬운 부분은 이 모든 것들을 조금 두루 뭉실하게 제시한다는 것이다. 책의 3분의 1 정도는 일반적인 자기계발서에서 보이는 경험담이 대부분이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리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수필이나 새로운 대안을 제안한 입문서 정도로 본다면 꽤 괜찮을 책이고, 만일 그전에 이와 관련된 책을 읽었거나 자주 접해 보았던 사람이라면 조금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락아프리카'님은?

밴드 아프리카의 보컬리스트입니다. 역사(고대사)와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소설 분야의 책을 좋아합니다. 우리 부부를 선택하여 함께 살게 된 사연 많은 길고양이 4마리와 정도사라 불리는 드러머 남편과 유유자적, 대책 없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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