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디 살롱/서점에서 만난 사람'에 해당되는 글 105건

  1. 2013.06.20 [서점에서 만난 사람] 너 어느 장르에서 왔니? - 《인터뷰》의 만화가 루드비코
  2. 2013.06.13 [서점에서 만난 사람] ‘일상의 삶’이 담긴 서울 음식을 찾아서 - 《서울을 먹다》의 기행작가 정은숙
  3. 2013.05.20 [서점에서 만난 사람] 결혼생활자, 둘 : 이대로 할머니가 되어도 좋아 - 《어쿠스틱 라이프》의 만화가 난다 (7)
  4. 2013.05.13 [서점에서 만난 사람] 결혼생활자, 하나 : 일과 사랑과 삶의 삼종세트 - 《결혼해도 똑같네》의 만화가 네온비 (16)
  5. 2013.05.07 [서점에서 만난 사람] 여전한 과거와 아직인 미래 사이의 공감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김중미 작가
  6. 2013.04.29 [서점에서 만난 사람] 사람을 남기는, 그 사람 -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의 여행작가 변종모
  7. 2013.04.22 [서점에서 만난 사람] 경쟁을 '벗'어나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는 '벗' - 출판사 교육공동체 벗
  8. 2013.04.17 [서점에서 만난 사람] 젊은 시인들, 셋 : 완전히 다른 무엇 되기 - 《에듀케이션》의 시인 김승일
  9. 2013.04.10 [서점에서 만난 사람] 젊은 시인들, 둘 : 만져지지 않는 세계 속으로 - 《보라의 바깥》의 시인 이혜미
  10. 2013.04.03 [서점에서 만난 사람] 젊은 시인들, 하나 : 완성된 문장을 가지기까지 - 《구관조 씻기기》의 시인 황인찬 (4)

[서점에서 만난 사람] 너 어느 장르에서 왔니? - 《인터뷰》의 만화가 루드비코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도서 이미지 제공 | 세미콜론

 

‘은밀하게 위대하게’가 한창 흥행 중입니다. 이처럼 원작 웹툰을 소스로 만든 영화가 꽤 있죠. ‘이끼’라든가 ‘26년’이 그랬고, 앞으로는 ‘신과 함께’와 ‘목욕의 신’ 등이 제작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바야흐로 웹툰이 주도하는 이야기의 춘추전국시대! 이러저러한 웹툰이 영화화되길 바라는 독자 분들처럼 저도 기대를 걸어보는 웹툰이 몇 있습니다. 그 중 루드비코 작가님의 《인터뷰》를 빼 놓을 수는 없지요. 독특한 스릴러물로, 2011년 다음 만화속세상 연재 웹툰입니다. 이후 한동안 차기작을 볼 수 없어 아쉬워하던 차에 작가님의 이름 넉 자를 다시 만난 장르는 무려 코. 미. 디.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를 유머 있는 생활툰으로 그려낸 ‘만화·영화’였어요. 아니, 같은 작가 맞아? 대체 몇 개의 장르를 소화하는 거지? 마침 《인터뷰》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김에 직접 묻기로 했습니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들은 어디쯤에서 온 것인지요.

 

반디 | 《인터뷰》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사실 이 만화는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일찍이 단행본으로 제작한 적이 있었죠. 당시 한정판 이후 공식적인 책으로 시중에 소개된 건 이번이 처음인데요. ‘나의 첫 책’을 받아보신 작가님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루드비코 | 기쁩니다. 물론 전에 한정판으로 판매된 적이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1000부 한정이라 절반쯤 살아 있는 ‘미생’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서가에도 진열되는 공식적인 책이니까요. 평소 호감 있던 세미콜론이랑도 만나게 되어 기쁘고요.

 

반디 | 이미 완성된 웹툰이라고 해도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오려면 거의 처음부터 다시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웹툰과 출판만화의 차이 때문이겠죠. 작가님께서 ‘작가 후기’를 통해서도 언급해 주셨는데요. 《인터뷰》를 만들면서 경험한 양쪽 만화의 각기 다른 매력을 말씀해주신다면요?

 

 

루드비코 | 아무래도 웹툰의 최고 강점은 영상적 연출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 같습니다. 특히 영화의 롱테이크* 기법과 흡사한 효과를 낼 수도 있고요. 웹툰에 흥미를 보이고 붙잡고 있는 건 이 영상적 효과 때문이겠네요. 이 외에 음악이나 실험적 효과를 넣을 수도 있고요.  반면 출판만화는 읽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죠. 간지를 활용한 연출이나 책장의 넘김을 의식해가며 리듬감을 부여해야 하고요. 특히 컷과 컷이 단절되어 영화의 “컷” 효과처럼 무심하게 관객에게 이미지를 뜩! 하고 던져놓는 맛이 가능해서 좋습니다. 웹툰의 경우, 이미지가 점차적으로 스믈스믈 올라오니 뜩! 하고 던지는 “컷”의 맛을 내기가 힘드니 아쉽고요. 그런데 요즘은 N사의 스마트툰 같은 것도 있으니 꼭 그렇지도 않겠네요.

 

* 롱테이크(long take) : 테이크(take)는 카메라를 한번 작동시켜 하나의 쇼트를 촬영하는 것을 뜻한다. 롱테이크(long take)는 1~2분 이상의 장면이 편집 없이 길게 진행되는 것으로 영화의 시간과 공간의 사실성을 증대시키는 장면 구성 방법 중 하나다.

 

반디 | 웹툰과 책 모두를 접한 독자로서 저는 책에 더 깊게 몰입했던 것 같아요. 스크롤을 내리며 볼 때는 놓쳤던 내용이나 구성을 찬찬히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별개의 이야기들이 한 접점에서 만나지는 식의 치밀한 구성이 인상적이고, 일종의 추리극과 닮아 있기도 합니다. 작가님께서는 그보다 ‘부조리극’에 가깝다고 하셨는데요. 이를 위해 구성상에서 특히 공들인 부분이 있다면요? 

 

루드비코 | 사실 인터뷰는 리얼리즘 기반의 추리 장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죠. 물론 추리 요소로 재미를 주려는 의식적인 시도와 보일 듯 말듯 심어놓은 밑밥들이 퍼즐 맞추기의 쾌감을 주기도 하니 어느 정도 추리장르의 속성이 있긴 하지만, 인터뷰에 나오는 작은 이야기들은 현실적인 동시에 비현실적이죠. 이상한 우연이 겹쳐 상황이 꼬이고, 아무런 의도도 없던 미세한 행위들이 나비효과가 되어 부조리하게 희극을 비극으로 비틀어 놓기도 하죠. 작은 이야기와 큰 이야기 모두 그런 말도 안 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처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분명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이지만 저에게 최근에 일어났던 불행들, 저를 힘들게 만들었던 일들에 비춰보면 오히려 이편이 더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네요.

 

사람들은 대부분 제각기 합리적, 논리적, 권선징악, 인과관계에 기반한 사고를 갖췄지만, 그 사람을 둘러싼 외부세계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은 우발적, 비논리적, 가변적일 때가 많아서 거기서 발생하는 혼란들 탓에 조그만 불행도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대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라면서요. 아마 《인터뷰》를 그렸을 땐 그런 부조리함의 부정적인 특성, 어두운 측면만을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졌네요. 우연이 나쁜 쪽의 방향으로 전파될 때도 있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파될 때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또 노력여하에 따라 완전히 필연적인 결과물을 만들긴 물론 힘들겠지만, 좋은 쪽의 우연을 발생시킬 확률을 높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거 굉장히 거창해져버렸네요. 질문은 구성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 답변이 《인터뷰》를 읽는 독자 분들께 더 유효할 것 같습니다.

 

반디 | 만화의 내용은 단 한 권의 소설책으로 유명해진 작가가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삼류 기자에게 여러 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이야기들 중에서 작가님께서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거나, 이 만화를 처음 있게 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그 일부를 독자 분들에게 맛보기로 소개해주세요.

 

루드비코 | 아마도 ‘헝가리 사진사’ 같습니다. 가장 처음 나온 이야기였거든요. 전날에 대학교 판화교수님 작업실에서 기기괴괴한 현상실을 들락날락하며 작업하다 ‘이런 공간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다음날 헤어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다 순식간에 헝가리사진사의 주된 플롯이 조립됐습니다. 이후에 조금 살을 붙이거나 덜기도 했지만 처음에 조립된 플롯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은 것 같네요.

 

 

반디 | 작가가 작품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과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의문점에서 만화를 구상하셨다고요. 실제로 ‘작가(창작자)에게 현실이란? 그 속에서의 창작이란? 그리고 진실이란?’과 같은 묵직한 질문이 만화 속에서 거듭되고 있는데요. 이 작업 이후 의문점에 대한 나름의 답을 얻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루드비코 | 그건 제가 해답을 알고 있거나 구하려 했다기보다 단지 제 스스로가 헷갈렸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답은 이거다! 이것이야 말로 최상의 답변이다! 이자식이 나쁜 놈이다!”라며 해결책을 내놓는 이야기보단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과연 그럴까?”라며 질문하는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건 제 스스로의 개인적 특성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네요. 저는 제 스스로가 피곤할 정도로 회의적이고 의심이 많아 헷갈리는 게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만화를 그릴 땐 좋은 태도 같은데, 정신적으로는 굉장한 스트레스를 주는지라 요즘은 그나마 잠정적인 결론이라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반디 | 창작의 바탕을 영화에 두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작가님께서는 영화광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시죠. 《인터뷰》의 인물들은 각각 특정 감독과 배우를 모델로 하고 있고,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차기작으로 영화를 소재로 한 ‘루드비코의 만화·영화’를 연재하셨을 정도인데요. ‘씨네키드’가 된 데는 부모님이 운영하던 비디오 가게의 영향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습니다.

 

 

루드비코 | 별 건 없는데요. 알려진 대로 어머니가 비디오가게를 운영하셨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영화를 좋아하셔서 신작이 나오면 옆에 앉아서 하루종일 몰아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그 때(약 7살?) 어린나이에 보면 안 되는 영화도 많이 봤습니다. ‘토탈리콜’이나 ‘블레이드 러너’같은 폭력적이고 팔 잘리고 목 잘리는 자극적인 영화도 엄마 옆에서(!) 많이 봤는데, 저는 전혀 폭력적이지도 않고 학창시절 싸움한번 하지 않은 건전한 사람으로 자라났습니다. 고로 폭력적인 대중매체나 웹툰이 폭력적인 학생들을 유발한다는 말은 거짓입니다. 여성가족부 보고 있나?

 

반디 | 영화를 추천해달라는 요청도 종종 받으시겠지요. 이 질문도 역시 비슷한 요청이 되겠네요.^^;; 《인터뷰》에서처럼 유명한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상상을 하는데요. 작가님께서도 그런 상상을 해보신다면 특히 이야기하고 싶은 감독이나 배우가 있나요? 그들의 대표작과 함께 독자 분들에게도 소개해주세요.

 

루드비코 | 음, 우선은 너무 많아서 한명만 꼽긴 힘들지만, 올해 개봉작중으로 한정하자면 ‘문라이즈 킹덤’의 웨스 앤더슨을 인터뷰해보고 싶습니다. 이분 영화를 볼 때면 단연 천재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되죠. 너무나도 독특하고 낯선, 유아틱하지만 결코 유치하지 않은 유머감각, 또 한편으론 쓸쓸한 미장센, 그러면서도 가슴까지 저며 오는 감동을 함께 주는 웨스 감독님의 머릿속을 열어 보고 싶네요. 특히 ‘문라이즈 킹덤’은 이분 영화중에서도 단연 압권입니다.

 

 

 

반디 | 모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위대한 캣츠비》로 웹툰을 처음 접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영화계를 지나 웹툰계로 접어든 시점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그 후에도 《위대한 캣츠비》 만큼의 충격을 준 웹툰을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있었다면, 그 중 몇 편을 독자 분들에게도 추천해주세요.

 

 

루드비코 | 《위대한 캣츠비》 말고도 강도하 작가님 만화는 대부분 좋고요. 조금 색다른 충격이었다면 네온비님의 《기춘씨에게도 봄은 오는가》가 좋았습니다. 유쾌하면서도 뭔지 모르게 사악한 유머감각이 좋았어요. 시니·혀노님의 《죽음에 관하여》도 좋았습니다.

 

반디 | 영화나 웹툰뿐만 아니라 평소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주변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평소 독서도 활발히 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작가님의 근래 관심사라든가, 요즘 읽고 있는 좋은 책이 있다면 반디앤루니스의 많은 독서가 분들과 공유해주세요.

 

 

루드비코 | 다독이라는 게 꼭 책으로만 한정하는 게 아니라 영화나 연극 등을 포함한 다양한 인풋이 중요하단 말이었는데, 제 의도와 조금 다르게 인터뷰가 나가서 제가 무슨 다독왕처럼 포장되어 버렸네요. 뭐, ‘활발히’까진 아니지만 틈나는 대로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하곤 있습니다. 최근엔 과학 서적을 주로 많이 읽고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 같은 진화론 시리즈나 미치오 카쿠의 《평행우주》처럼 대중화된 양자물리학 서적 위주로 읽고 있습니다. 

 

반디 | 많은 독자 분들이 《인터뷰》를 기다렸습니다. 이제는 데뷔작인 ‘크리켓 마스크’와 완결된 ‘루드비코의 만화·영화’의 책 출간을, ‘만화 일기’의 연재분을, 레진 코믹스의 새 웹툰을 기다리게 될 텐데요. 목 빠질 독자 분들을 위해 책 출간 계획을 들려주세요. 더불어 ‘루드비코의 만화·일기’ 이후의 차기작은 어떤 이야기가 될지 살짝 알려주신다면요?

 

루드비코 | 저는 이상하게 차기작 정보를 조금이라도 흘리면 꼭 김 샌 콜라마냥 시나리오쓰기가 싫어지더라고요. 대략적인 정보만 말씀드리면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로 돌아가, 한 남자가 주인공인, 긴박감 넘치는 스릴러를 그릴 생각입니다.

 

반디 | 현재는 ‘루드비코의 만화·일기’로 《인터뷰》와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 모습에 사람들은 ‘작가가 천재다!’부터 ‘작가가 미쳤다!’까지 다양한 반응을 쏟아내고 있는데요. 정작 작가님 본인은 어떤 만화가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루드비코 | 어떤 장르를 해도 본전은 쳐주는 신뢰감 있는 작가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다양한 장르를 해보는 작가가 되고 싶은데, 좀 뒤처지는 작품이 있더라도, 그 수준이 아주 밑바닥까진 떨어지지는 않는, 재미와 질이 균등한 작가가 되고 싶고요. 덧붙이자면 사실 코믹함과 유머라는 영역은 제가 가장 취약한 부분이었습니다. 거의 노이로제가 생길 정도로요. 유머라는 건 가장 까다로운 장르죠. ‘루드비코의 만화·일기’는 가장 취약하고, 어울리지 않는 장르로 들어 가보자라는 취지 아래 그리게 된 작품입니다.

 

반디 | 마지막으로 긴긴 여름을 보낼 독자 분들에게 덕담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루드비코 | 어렸을 때부터 여름이라는 계절을 가장 좋아합니다. 추억도 여름에 관한 추억이 가장 많고, 좀 덥긴 해도 그만큼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계절도 없는 것 같습니다. 역시 이런 여름엔 낮엔 개발에 땀나듯이 뛰놀고 저녁에 집에 들어와선 시원한 과일 먹으며 만화책 보는 게 제맛이죠. 특히 심장쫄깃한 스릴러만큼 여름에 잘 맞는 장르가 없는 것 같아요. 여러분, 호평일색 스릴러 만화 《인터뷰》가 나왔습니다.

 

 

 

루드비코

 

198*년에 태어났다.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크리켓 마스크’로 데뷔했으며 ‘인터뷰’, ‘만화·영화’를 연재했다. 현재 ‘만화·일기’를 연재 중이다. 부모님이 운영하던 비디오 가게를 공부방 삼아 영화를 자습하여 그 결과를 만화에 속속 이용하고 있다. 광주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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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일상의 삶’이 담긴 서울 음식을 찾아서 - 《서울을 먹다》의 기행작가 정은숙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도서 이미지 및 사진 제공 | 따비

 

만화에서 그렇듯, 사람의 속마음이 구름 모양의 말풍선으로 머리 위에 떠 보인다면 정오쯤 그 내용은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뭐 먹지? 오늘 뭐 먹을까? 먹을까? 말까? 대체 뭘 먹자고 하지? 이 비슷비슷한 질문들. 헌데요. 답은 다 제각각이란 말이죠. 술 마셔서 해장국을 먹고 싶고, 출출해서 떡볶이를 먹고 싶고, 날 더워서 냉면을 먹고 싶다고들 하니까요. 서울에서 먹고 살겠다고 아등바등하는 흔하디흔한 사람들. 이 사이에서 ‘나’를 보다 ‘나’이게 하는 힘, ‘나’의 입맛대로 살게 하는 힘, ‘나’의 일상을 중심에 놓는 힘은 한 끼 식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밥상들이 모여 오늘도 우리 사는 곳에 또 다른 색을 더합니다. 《서울을 먹다》에 등장하는 열일곱 가지의 음식이 여태껏 해온 것처럼요. 그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첫 번째 안내자, 정은숙 작가님과 이야기 나눠 봤습니다.

 

반디 | 《서울을 먹다》는 같은 음식을 놓고 두 분 작가님이 각기 쓴 글을 엮은 구성인데요. 두 분의 글은 확실히 그 결과 맛이 다릅니다. 머리글에 보면 황교익 작가님께서는 “인지의 즐거움”을, 정은숙 작가님께서는 “서정의 공감”을 맡았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정은숙 작가님께서는 어떤 면에 주력하여 글을 썼는지 조금 더 부연해 주신다면요?

 

정은숙 | 《서울을 먹다》에는 17가지의 음식이 나오지요. 그 음식들이 있는 공간, 여기서 공간이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뿐만 아니라 그 공간을 아우르는 거리, 골목까지 포함되죠. 공간이 갖고 있는 맛의 풍경, 그리고 그곳에서 음식을 만들어 온 사람들 그리고 그 음식을 먹고 즐겨 왔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중심을 두었지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그 시절에 대해, ‘아 그랬지’, ‘그 땐 그랬구나’라는 서정의 공감을 유발하는 것이 저의 역할이었죠. 추억을 떠올릴 수 있고 그 시절을 상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그곳에 가서 그 음식을 먹고 싶다고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써 내려갔죠.

 

반디 | 《서울을 먹다》에 실린 작가님의 글에서는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일례로 재개발 탓에 흩어져버린 왕십리 곱창의 이야기나 “훗날에, 이 책이 예전 서울의 모습을 찾아보는 사료로만 남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라는 말이 그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데요. 세상 모습이 급속도로 변화하는 이때에 왕십리 곱창과 같은 음식을 지키자면 음식과 그 문화를 대하는 우리들에게는 어떤 자세가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정은숙 | 《서울을 먹다》의 음식을 선정하는 기준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울에 살고 있는 시민들의 ‘일상의 삶’을 담고 있는 음식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우리의 ‘일상의 삶’과 연결된 음식 그리고 공간에 대해 우리는 등한시하는 경향이 있죠. ‘무조건 발전’을 외치던 시대를 지난 간 지금에도 서울사람들이 만들어 낸 공동체의 산물인 음식골목 등이 보잘 것 없다하여 너무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요.

 

잘 갖추어진 관광명소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오롯하게 숨 쉬는 뒷골목, 시장, 그리고 음식골목도 궁궐만큼 매력적이고 관광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아요. 문화는 한 방향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좋죠. 전통도 중요하겠지만 우리 주변의 것들, 일상의 삶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주변음식의 속을 들여 다 보면 책에서 생활사박물관에서 느낄 수 없는 배울 수 없는 나와 밀접한 삶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해요.

 

 

반디 | 《서울을 먹다》는 단순히 유명한 음식점을 나열한 책이 아닙니다. 그 음식에 얽힌 서울의 역사와 문화까지 담아냈는데요. 그렇게 작업하자면 현장 취재 외에도 별도의 공부가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책은 여러 문헌을 인용하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주로 참고하신 책이나 자료는 무엇이었나요?

 

정은숙 | 《개벽》, 《별건곤》, 《삼천리》 같은 근대잡지에는 당시의 생활상을 엿 볼 수 있는 흥미진진한 기사, 수필, 소설 등이 많이 게재되어 있죠. 음식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그리는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서울을 먹다》는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전쟁, 1960~8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죠. 객관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시대별로 맛의 풍경을 담고 있는 소설, 노래, 시, 신문기사 등 찾으려고 노력했죠. 많이 부족하지만요!

 

반디 | 책은 열일곱 가지의 서울음식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는 훨씬 많은 음식을 만나셨을 것 같은데요. 이런저런 이유로 본문에서 빠졌지만 혹시 개인적으로 독자 분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음식이 있었나요? 이야기해주세요.

 

정은숙 | 17가지 음식 이외에 배꽃 아래에서 먹는 태릉갈비, 그리고 조선족 및 중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이 모여 있는 가리봉조선족거리 음식이 취재대상이 되었으나 실제 게재되지 못했지요. 개인적으로 청계천을 배경으로 ‘추어탕’에 대해 쓰고 싶었으나 뒷심이 좀 약했습니다.

 

반디 |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들과의 인터뷰를 곳곳에 인용하고 계십니다.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은 결국 사람의 일임을 실감케 하는데요. 취재원의 입을 여는 것이 어렵지는 않으셨는지, 가장 인상적인 취재원은 누구였는지, 그들과의 만남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정은숙 | 보통 웃음을 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로 취재가 시작되죠. 처음부터 취재라는 것을 알리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취재를 선호하죠. 뭐, 현장주의라고 할까. 보통의 사람들이 다 취재원이죠. 그때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인사에요. 되도록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죠. ‘맛있어요’, ‘이건 뭐죠’ 등의 단순한 표현에서 점점 음식에 관련된 개인사까지 얘기를 나누게 되죠. 취재를 하다보면 유달리 입을 여는데 어려운 분이 계시지만 시간을 두고 말씀드리며 대부분 잘 말씀해 주시지요. 때론 질문에서 벗어나 너무 많은 말씀을 해주셔서 곤란할 때도 있죠. (웃음)

 

 

《서울을 먹다》의 경우는 역시 어머니들이죠. ‘금천교시장 좌판에서 떡볶이를 파는 구순이 넘는 김정연 할머니와 영등포역 근처에서 감자탕을 팔 던 60대의 정순자 어머니가 유독 기억에 남아요. 김정연 할머니는 개성이 고향인 실향민으로 북녘에 두고 온 어린 자식들을 평생 그리며 홀로 떡볶이를 팔아 오셨지요. 좀처럼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위해 같은 실향민인 저의 어머니의 얘기까지 끄집어냈죠.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니까요. 평생 북녘에 두고 온 세 아이를 그리며 그 또래의 아이들에게 떡볶이를 팔아 온 할머니. 할머니의 맘속의 자식들은 아직도 유년의 모습인 듯 했죠. 할머니의 간장떡볶이에는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하죠. 할머니의 인생이야기를 듣는 중 옆에 계시던 황교익 선생님이 갑자기 없어지셨죠. 나중에 알고 보니 할머니의 이야기에 뭉클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할 것 같아 자리를 뜨셨다고 해요. 날카로운 비평으로 냉철하다는 인상이 강한 황교익 선생님은 의외로 감성이 넘치는 분이시죠!^^

 

정순자 어머니는 고생이라면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신데 세상을 보시는 눈이 너무 선하고 순박하시어 작은 감동을 받았지요. 사진 찍히는 것을 어린아이처럼 좋아 하셨는데. 개발이 되면서 웃는 눈매가 고운 어머니가 내놓는 감자탕은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되었지요.

 

 

 

반디 | 음식에 얽힌 사람들의 삶과 기억을 접하다 보면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욕구도 생길 것 같은데요. 이북 출신 어머니와 이남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성장하신 만큼 다양한 음식을 먹어보기도 하셨을 테고요. 《서울을 먹다》에서 신림동 순대를 소개하며 살짝 등장한 유년의 이야기처럼요. 맛에 대한 추억담이 주가 되는 글쓰기(에세이)를 본격적으로 해 나갈 생각은 없으신지요?

 

정은숙| 기회가 있을까요! 지금까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글로 엮는 것이 좋은데! 허나, 기회가 된다면 맛에 대한 기억, 추억을 통해 가족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반디 | 책이 나오기까지 두 분의 필자, 그리고 한 분의 조력자(도서출판 따비 대표 박성경)가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차후에 세 분이 또 합을 맞추어 《서울을 먹다》와 같은 책을 기획할 계획이 있으신지요. 예를 들어 ‘부산을 먹다’라든가 ‘전주를 먹다’와 같은 발상으로 이번 작업이 계속 이어질는지 궁금합니다.

 

정은숙 | 글쎄요! 사석에서 농담으로 ‘먹다’라는 시리즈를 하자라고 얘기가 나오기도 했죠, 아직 구체적인 얘기는 모르겠네요(저만 모를 수도^^). 혹 기획된다면 한국을 두루두루 먹을 수 있겠네요. 멋진 일이네요!!! 그리고 평상시 관심이 있던 중국동북부에 파생된 조선요리, 일본에서 파생된 조선요리까지 ‘먹을 수 있다’면 좋겠네요.

 

반디 | 일본의 출판기획사에 소속되어 활동하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작가님께서는 국내보다 일본에 더 많은 책을 선보이셨죠. 주로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이고요. 일본과 한국을 매개하는 그런 활동을 시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책을 발간하며 경험한 현지의 반응이랄지, 작가님의 소감 같은 것도 함께 들려주세요.

 

정은숙 | 일본에 한국관련 문화를 소개하는 작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라. 처음부터 작가가 되려 한 것은 아니었어요. 1998년, 당시 제가 일본에서 돌아 와 한국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였죠. 그 때, 일본 유학시절에 알게 된 출판관계자께서 아르바이트로 한국 관련 책자에 주석을 다는 일을 부탁하셨죠. 몇 번의 아르바이트를 한 후, 어느 날 ‘서울의 맛집’을 소개하는 책자를 한 번 써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죠. 맛있는 것은 실컷 먹을 수 있겠다 싶어 무조건 승낙을 했죠. (웃음) 그렇게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 본격적으로 기행작가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최근에 일본에서 나온 저의 책을 보면 사실 한국인들도 찾아 가기 쉽지 않은 시골의 풍광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경우가 꽤 있죠. 근데, 책을 들고 그곳을 직접 찾아 가는 일본인들이 꽤 있다는 거예요! 도심에서 느낄 수 없는 한국의 맛과 인정에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더 열심히 발로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디 | 《서울을 먹다》 이전에는 두 분 작가님의 또 다른 책들이 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처음으로 음식에 관해 쓴 글이 있고, 또 맛의 세계를 열어준 음식이 있을 겁니다. 음식기행작가로 불리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음식을 맛보셨을 텐데요. 그 중에서도 현재 작가님들 활동의 기원이 된 ‘첫 번째 음식’이 있다면 무엇이었나요?

 

정은숙 | ‘막걸리와 해장국’이 아닐까 싶네요. 막걸리는 맛도 맛이려니와 막걸 리가 갖고 있는 정서가 좋아서 각 지역의 막걸리를 찾아 마셨지요. 그것이 기회가 되어 《막걸리 기행》이라는 책자도 나오게 되었고요. 막걸리는 사람을 만나는 좋은 매개체가 되었죠.

 

술을 많이 마시는 민족이니만큼 쓰라린 속을 달래주는 해장국 또한 많이 발달했죠. 다양한 해장국문화가 흥미로웠지요. 일본의 경우, 굳이 말하면 해장에 좋은 음식이라고 하면 재첩을 넣은 된장국 정도로 해장에 좋은 음식(해장국)으로서 명확하게 인식되어 있는 것이 없죠. 그래서 그런지 해장국음식이며 숙취드링크제에 대해 굉장히 재밌어 했죠. 자랑할 만한 한국의 특별하고 재미난 음식문화라고 생각하며 ‘해장국’을 즐겨 먹고 기사를 썼죠. 활동의 기원이라기보다 활동의 기운이 됐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네요!(^^)

 

반디 | 절기상 하지를 앞두고 있습니다. 이제는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은 여름인데요. 아무리 철을 타지 않는다는 요즘 음식이라도 실은 ‘그때 그 맛’이 있는 법이죠. 《서울을 먹다》에 등장하는 서울음식 중 여름을 맞는 독자 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요?

 

 

정은숙 | 역발상이라고 할까! ‘이열치열’의 ‘함흥냉면’이 어떨까요! 매콤한 양념에 얼얼해진 혀와 입천장에 뜨거운 육수가 닿은 순간의 짜릿함과 시원함이 오히려 여름의 더위와 스트레스를 한 방에 풀어 주지 않을까요!

 

도심이지만 푸르름이 좋은 계절이죠. 도심 한 가운데 간이탁자에 앉아 서울의 밤하늘을 지붕 삼아 골뱅이무침을 앞에 두고 시원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도 그만이죠. 시원하게 목을 타고 들어가는 맥주에 향긋하고 쫄깃한 골뱅이를 씹고 있다 보면 도심의 더위도 갈증도 낭만이 되죠.

 

 

정은숙

 

1967년 강원도 두메산골 양구에서 태어났으나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논과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 변두리에서 자랐다. 대학원에서 관광경영을 공부하고 뒤늦게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98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문화와 관련된 책을 기획, 취재, 집필, 번역하여 40여 권의 책을 일본에서 출간했다. 이북 출신의 어머니와 이남 출신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남북을 아우른 음식을 접한 까닭으로 음식에 대해 개방적이다. 그 덕분일까, 먹고 마시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며 음식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 이야기를 묻고 듣는 것을 좋아한다. 할 수 있는 한 앞으로도 사람들의 삶과 기억이 담긴 주변의 음식 이야기를 찾아 써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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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결혼생활자, 둘 : 이대로 할머니가 되어도 좋아 - 《어쿠스틱 라이프》의 만화가 난다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도서 이미지 제공 | 애니북스

 

일과 사랑과 삶의 공존은 가능하다, 두 사람이 노력한다면! 우리는 결혼에 관한 네온비 작가님의 대답을 들었습니다. 부럽다, 훈훈하다, 좋은 염장이다…… 긍정적인 반응이 마구 터져 나온 인터뷰였죠. 하지만, 의심 많은 우리 천만(?) 독거생활자들이 팔짱을 딱 끼고 삐딱하게 앉아 묻네요. 결국 자기 삶의 일부분을 서로 포기하고 희생해야 한다는 거잖아. 그게 정말 행복해? 이것은 결혼생활자에게도 찾아드는 의문일 것입니다. 남편, 아이, 시댁 혹은 친정 어른들을 비롯하여 결혼 이후 지지고 볶는 타인들 사이에서 내 삶은 가능한가. 문득 아예 다른 삶, 결혼 이전의 내가 그리워지기도 하겠죠. 그런데요. 난다 작가님은 도리어 이 결혼생활의 미래를 꿈꾼다고 합니다. 지금 이대로, 시간이 지나 할머니가 되는 것을요. 그런 행복을요. 행복의 모양새란 완전하기보다는 조금 삐뚤빼뚤하고 못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속에서 나름의 만족을 얻는다면, 《어쿠스틱 라이프》는 우리와도 그리 멀지 않은 삶이겠죠?

 

반디 | 《어쿠스틱 라이프》는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연재할 때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만화입니다. 2010년에 시작하여 현재는 시즌7로 완결된 상태고, 단행본으로는 4권까지 출간되었는데요. 개인 블로그에서 시작한 만화는 이제 책이 되어 한 권씩 쌓여 가고 있습니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난다 | 1권을 출판하면서 2권도 낼 수 있을까 불안해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4권까지 나오고, 지금은 5권을 준비중이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제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하나밖에 없어서 여전히 신인 같은 기분이에요.

 

반디 | 이 만화로 이름을 알리셨지만, 사실 작가님께서 만화를 그리신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남편 분이신 ‘한군’과의 인연이 고등학교 시절 만화 동아리에서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어쿠스틱 라이프》의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입니다. 평생의 짝과 일, 두 가지를 만나게 한 것이 만화였던 셈인데요. 이 만화와의 인연도 궁금합니다. 《어쿠스틱 라이프》를 처음 그리게 된 계기가 있다면요?

 

난다 | 원래 하고 싶은 만화는 판타지 장르였는데 당시 동아리 사람들이 '너는 니얘기가 제일 재밌다'고 종종 말해주곤 했었어요. 사실 판타지물을 꼭 좋아했다기보다 90년대에 워낙 대유행이어서 휩쓸렸던 거지만요. 아무튼 계속 공모전을 통해 만화가 데뷔를 노리다가 취업 시점이 되면서, 생업(게임회사 디자이너/일러스트레이터)을 유지하면서도 그릴 수 있는 형식의 가벼운 생활만화를 그려보자 싶어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반디 | ‘한군’과의 결혼생활을 소재로 다루면서 웹툰계의 대표 결혼장려만화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습니다만, 《어쿠스틱 라이프》는 결혼생활뿐만 아니라 한 여자의 일상사와 인생관이 담겨 있는 생활만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작가님께서도 결혼만화라고 의식해본 적은 없다고 최근 연재분 후기에서 밝혀주셨는데요. 이런저런 타이틀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부연해주신다면요?

 

난다 | 생활만화다보니 제가 처한 일상이 타이틀이 되는 것 같아요. 처음엔 아무래도 만화가로서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아서 결혼만화로 국한되는 것 같아 부담스럽기도 했어요. '결혼하면 이렇게 행복하단다. 너네도 이렇게 해봐.'처럼 들릴까봐 걱정이 많이 됐거든요. (물론 행복한 건 맞지만) 결혼도 육아도 삶의 한 가지 선택일 뿐이라는 것, 그런 프레임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고 싶어요.

 

반디 | 《어쿠스틱 라이프》의 이야기는 작가님의 임신과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지난 10월에는 ‘쌀이’를 순산하셨고요. (축하드립니다!) 아기가 생기기 이전과 이후의 생활에 다종다양한 변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난다 | 감사합니다.^^ 말씀처럼 정말 변화가 많아요. 생활패턴부터 생각하는 방식까지. 다행히 아기가 잠을 잘 자주는데다, 시터의 도움으로 내 시간을 확보 받고 있어서 금방 적응한 것 같아요. 남편도 육아분담을 잘 해주고 있고요. 더 많은 이야기는 6월부터 시작될 어쿠스틱 라이프 8시즌에서 풀어볼까 합니다.

 

반디 | 드라마와 시트콤을 오가며 인생을 꿰뚫어 보는 시선(저는 관통미라고 부르고 싶어요.^^;)이 《어쿠스틱 라이프》의 매력이라고 생각됩니다. 만화 속에서 인생을 관통하는 테마로 ‘병풍’을 언급한 적도 있으신데요. 요즘 새롭게 발견하신 인생의 테마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난다 | 병풍테마도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겨우 발견한거라……

 

 

 

반디 | 《어쿠스틱 라이프》는 독자 분들 앞에 지금까지 총 4권을 선보였는데요. 웹상에서 연재하던 만화를 단행본으로 엮는 것은 또 다른 새로운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연재 순으로 구성해 나가시겠지만, 그 외에도 어떤 기준이나 콘셉트를 가지고 만들고 계시는지요. 앞으로 몇 권이 더 남았는지 책을 사 모으는 팬으로서도 미리 알고 싶어요.

 

난다 | 웹상에 공개된 만화이기 때문에, 책으로 봤을 때 새로운 재미를 얻을 수 있도록 부록원고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요. 생활정보만화(?)인 리빙포인트를 비롯해, 데뷔 전에 그렸었던 미공개 오리지널 에피소드들도 다시 그려서 싣고요. 4권부터는 미공개 분량이 다 소진되어서 리빙포인트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처음엔 웃자고 시작한 리빙포인트가 권을 거듭하며 매우 진지해지고 있어요.

 

또 웹툰이 책으로 옮겨졌을 때 호흡이 달라지지 않도록-디자이너님과 편집자님이-많이 신경써주고 계십니다. 사실 단행본에 관해서는 애니북스 김지아 편집자님의 노련함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어요. 아이디어도 많이 주시고요. '이런 이런 건 어떨까요' 하고 의견을 물으시는데 '전문편집자의 의견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거의 수긍하는 편이예요. 그렇게 받은 과제 안에서 최대한 재밌게 표현하려고 애쓰는 게 제 몫이고요. 단행본은 일단 지금 연재된 분량까지는 다 출판될 것 같은데 어떻게 될지……

 

 

반디 | 《어쿠스틱 라이프》에서 《자학의 시》를 오마주하는 장면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습니다. 한편, 작가님께서는 마스다 미리의 만화에 추천평을 쓰시기도 했는데요. 이런 경우를 보면 작가님도 독자로서 꽤 많은 만화를 애정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만화 인생에 영향을 끼친 거장들을 소개해주신다면요?

 

 

난다 | 좋아하고 닮고 싶다는 작가들은 많지만, '인생에 영향 레벨'까지 오른 작가는 드문 것 같아요. 자학의 시를 보고 '아이를 가지고 싶다' 고 생각한 게 가장 기억나는 영향인 것 같습니다. 작가로서의 자세는 조석 작가님을 목표로 하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반디 | 작가님께서는 만화뿐만 아니라 여러 책을 꾸준히 읽어 나가시는 독서가입니다. 저는 작가님의 개인 블로그를 통해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라는 책을 접하고 몹시 궁금해지기도 했어요. 이처럼 최근에는 육아와 관련해서 갖가지 책을 섭렵하셨을 것 같은데요. 아기와 만나기를 기다리는 독자 분들에게 몇 권 추천해주시면 좋겠어요.

 

 

난다 | 《윤미네 집》이라는 사진에세이집을 좋아해요. 딸 윤미가 태어나 시집갈 때까지의 모습들을 아버지인 전몽각 선생이 사진으로 남겨 엮은 책인데요. 평범한 가족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가 마무리 되고, 다시 자식이 같은 역사를 만드는 모습을 아버지가 지켜보는 거죠. 마지막 장을 덮는데 눈물이 쏟아지더라고요. 제 딸이 태어난 후 《윤미네 집》을 다시 보니 전에는 못 봤던 '육아'라는 부분도 새로이 보여서 재밌는 데다, 나도 이렇게 우리 가족의 역사를 만들고 있구나 싶어서 펼칠 때마다 기분 좋아져요.

 

반디 | 육아로 바쁘시겠지만 작업도 놓지 않고 계십니다. 요즘에는 작가님께서 참여하시는 ‘창작집단8’의 활동이 무척 활발해 보입니다. 작가님을 비롯하여 다음과 네이버 등 여러 포털에서 연재 중이신 작가 분들을 접할 수도 있고요. 함께하는 분들, 활동 취지, 앞으로의 계획을 난다 작가님께서 ‘창작집단8’을 대표하여 소개해주세요.

 

 

난다 | 창작집단8은 저를 비롯해, 10명의 만화가들이 '손에 잡히는 단편만화집'을 만들어보자는 투지에서 시작한 모임입니다. 각자의 개인적인 활동취지는 다 다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기존의 어쿠스틱라이프 외에 작품영역을 더 넓혀보고 싶은 마음, 학생시절 이후로 내 인생에 다신 없을 줄 알았던 단체 활동에 대한 환상 등등이고요. 텀블벅이라는 창작후원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독자들로부터 선후원을 받은 원고료로 첫 번째 책을 제작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첫 번째 단편집의 주제는 '여행'으로, 10명의 작가들이 같은 주제를 각자의 방식으로 그려 책으로 엮습니다. 실물 단편집은 후원해 주신 분들만 보실 수 있고요, 만화는 창작집단8 블로그*에서 순차적으로 공개되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방문 부탁드립니다.

 

* 창작집단8 공식 블로그 (바로가기▶)

 

반디 | 차기작을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시즌7의 후기를 통해 시즌8 혹은 생활만화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예고해 주셨죠. 둘 다 기대가 되는 작업인데요. 특히 생활만화가 아닌 다른 이야기라면 어떤 만화가 될지 궁금합니다. 조금 더 세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난다 | 사정상 준비하던 차기작은 보류되고 어쿠스틱라이프8시즌으로 복귀할 예정입니다.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막상 결정되니 마음이 편안하네요. 연재를 반년 이상 쉬니 할 이야기가 많이 쌓였었거든요, 풀 수 있어 다행이에요.

 

반디 | 프로필에서 “낮에는 생활인, 밤에는 만화가”로 소개되고 있는 만큼, 이제 만화가는 작가님 인생의 반을 차지하고 있을 텐데요. 그런 만화가로서 작가님의 포부나 소망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난다 | 노후를 자주 생각하는데요. 가족을 이룬 자식들이 주말에 찾아오면, 다 같이 둘러앉아서 어묵탕에 맥주 마시면서 즐겁게 떠들고, 적금은 들고있니, 건강이 최고다, 부모의 잔소리도 좀 해주고…… 그러다 다음 날이면 ‘엄마 이제 마감해야 하니 다들 집으로 돌아가거라.’라고 말하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좀 더 가까운 소망이라면 내년에도 출판사로부터 명절선물을 받고 싶어요.

 

반디 | 마지막으로 독자 분들에게 5월 덕담 한 마디 부탁드려요!

 

난다 | 건강이 최고입니다.

 

 

 

난다

 

개인 블로그에서 연재하던 만화가 주목을 받으면서 2010년 혜성같이 등장했다. 어눌하지만 섬세한 작화, 차분하면서도 유머러스한 감성과 독특한 상황 속에서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정확하게 짚어내는 능력으로 독자들의 인기를 얻고 있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미디어다음 ‘만화 속 세상’에 《어쿠스틱 라이프》를 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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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결혼생활자, 하나 : 일과 사랑과 삶의 삼종세트 - 《결혼해도 똑같네》의 만화가 네온비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도서 이미지 및 사진 제공 | 애니북스·네온비

 

바람 쐬기 좋은 날씨입니다. 많은 사람이 산과 들과 바다를 찾아 떠나겠지요. 그런데요. 요즘 어딜 자주 다녔냐는 질문에 ‘결혼식장’이라고 답하는 분들도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5월이잖아요. 하필이면 ‘오월의 신부’를 명물로 내세우는 가정의 달 5월이요. 결혼이라, 물론 축하해 마땅한 일이지만요, 사실 남몰래 투덜거리기도 합니다. 왜 둘이 살지 못해 안달일까. 어차피 혼자 사는 인생인 것을…… 개인의견이 아니에요.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독거생활자가 곳곳에 서식하고 있다고요!

 

하지만, 이들의 서식지를 교란하는 결혼생활자가 나타났으니, 바로 《결혼해도 똑같네》의 만화가 네온비와 《어쿠스틱 라이프》의 만화가 난다입니다. 일과 사랑과 삶을 와해하는 것이 결혼인 줄만 알았는데요. 이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조금 달라 보입니다. 왜죠? 일과 사랑과 삶의 삼종세트가 가능한 이유는 대체 왜죠? 역시 개인의견이 아닙니다. 많은 독자 분들도 궁금하실 텐데요.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정주행한 웹툰들을 다시 책으로 복습한 제가 독거생활자를 대표하여 질문해 보았어요. 첫 번째로 답을 주실 결혼생활자는 네온비 작가님입니다.

 

반디 | 《결혼해도 똑같네》(이하 《결똑》) 2권이 출간되었습니다. 2권은 벌써 1쇄를 다 소진하고 2쇄에 들어갔다고요. 축하드립니다. 평소 웹툰으로 연재하던 것을 한 권의 만화책으로 만나는 기분은 좀 더 특별할 것 같은데요.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네온비 | 자기 만화에서 파생된 모든 컨텐츠는 소중하고 신기해요. 모바일 이모티콘이나, 문구류나, 어플이나…… 근데 단행본은 다른 2차 파생 상품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요. 이건 정말, 집 없이 살던 사람이 처음 내 집 장만한 기분이랑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요?

 

다른 컨텐츠보다도 만화책은 유일하게, 그 컨텐츠를 ‘사용’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감상’과 ‘소장’하기 위해 사는 거잖아요. 만화책을 사시는 분들은 정말로 그 작품이나 작가를 생각 이상으로 많이 좋아하는 분들이에요. 그렇게 생각하면 단행본을 절대로 대충 만들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다른 컨텐츠를 대충 만든다는 뜻은 아니고요. 절대! (웃음) 단지 단행본을 구매하시는 분께는 그분들만 즐길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해요. 책에만 있는 부록 만화라던가, 사진, 특전 등등이요.

 

만화가 꼭 출간되지 않더라도 제 만화는 온라인상에 존재하긴 하겠지만, 그걸 즐기려면 그 사이에 뭔가 다른 게 필요해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나…… 결국 점점 중요해지는 건 그 ‘컨텐츠’가 아니라 ‘컨텐츠를 볼 수 있는 기기’가 되는 것 같아요. 제 만화는 그 기기가 플레이 할 수 있는 수많은 다른 디지털화 된 문서중 하나가 되잖아요. 하지만 작가의 단행본은 ‘내 만화를 보기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가장 애착이 가요. 전력을 다해 만들고, 좋은 반응을 얻고 있을 때 정말 행복합니다.
 
반디 | 《결똑》은 다음 만화속세상의 대표 웹툰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은 ‘결똑 플러스’라는 제목으로 시즌2.5를 연재 중이신데요. 처음 시작할 때는 결혼생활툰의 후발주자로 차별화에 대한 나름의 고민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당시 정한 작업 방향이 있다면요?

 

 

네온비 | 처음에는 ‘만화가의 집’이 제목이었어요. 하지만 그 전에도 비슷하게 준비했던 게 있어요. 제목은 ‘네온비와 흰새’였는데, 예전에 제 캐릭터는 올빼미였거든요. 그 네온비 캐릭터와 짝꿍인 흰새 캐릭터를 만들었었지요. 그게 지금의 현동이었고요. ‘네온비와 흰새’는 돈 없는 가난한 커플의 이야기였어요. 만화에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었고요. 그런데 주변에 보여주니까 별로 재미가 없다고 하기에 언젠가 쓸 수 있겠지 싶어 그냥 가지고만 있었죠. 그러다가 결혼을 했어요.

 

옛날부터 생활툰을 해보고 싶었는데 결혼해서 제 생활을 그리다보니 자연스럽게 결혼생활툰이 됐어요. 당시에도 《어쿠스틱 라이프》, 《마조 앤 새디》, 《딩스 뚱스 인 아메리카》, 《펭귄 러브즈 메브》처럼 유명하고 재밌고 쟁쟁한 만화들이 많았는데요. 그 중 만화가 부부는 없고 연상연하나 동갑커플이 많으니까 저희 커플과는 조금 차별화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죠. 가정에서 일어나는 주부의 시각으로 보는 일상보다 만화가라는 직업에 대한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그리면 그 자체로 흥미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요. 담당 PD님께서 ‘만화가의 집’이라는 제목이 약하다고 하셔서 “그럼, 결혼해도 똑같네, 이런 느낌으로 가요?”라고 물었는데 좋다고 하셨어요. 그 제목이 지금 결똑의 정체성을 더욱 견고히 만들어 준 것 같기도 하고요.

 

반디 | 사실 제목처럼 결혼해도 똑같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예컨대 마음과 행동이 연애시절과 달라지는 경우를 흔히 접하게 됩니다. 어쩌면 결혼 이후 사랑은 두 사람 노력의 합일 텐데요. 부부 간의 문제를 받아들이고 극복해 나간 작가님만의 비결이 궁금합니다.

 

네온비 | 항상 감정에 솔직한 것? 그런데 마이너스 감정보다는 플러스 감정을 더 많이 표현해요. 이건 확실해요. 마이너스 감정을 다 뿜고 살게 되면 서로 진짜 피곤해지는데, 플러스 감정은 안 그래요. 말할수록 기분 좋아지거든요. 맛있는 걸 먹고 ‘맛있다’라고 한 마디로 끝내기보다는 “와, 진짜 맛있다. 정말 너무 맛있다~”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버릇도 원래 있긴 있어요. 그런데 결혼하고 조금 더 의식적으로 말하니까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오늘 남편이 멋지게 해서 외출하면 “오빠 정말 멋지다.” 이런 말도 자주 하고요.

 

하지만 서로 다르게 오랫동안 살아왔고 각자 버릇이 있으니까 싸우지 않을 수는 없어요. 항상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쌓이지 않도록 조절하고 있죠. 어떤 일에 대해 얘기하더라도 나쁜 것은 있는 그대로만 말하고 좋은 것은 부풀려서 이야기해요. 그리고 서로 밖에서 속상한 일이 생기면 일단 무조건 서로의 편이 되어주는 것. 항상 서로를 1순위로 생각하는 거죠. 그러면 싸우는 일이 별로 없어요.

 

 

반디 | 《결똑》은 염장이라는 비난(?) 못지않게 결혼생활자 분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만화입니다. 폭넓은 독자층의 즉각적인 반응을 확인할 수 있는 웹툰인 만큼, 작가님께서도 여러 감상을 접하고 계실 텐데요. 연재 중 가장 공감 가고 힘이 되었던 팬의 반응을 말씀해주세요.

 

네온비 | 거의 모든 의견을 꼼꼼하게 보긴 하는데 진짜로 많은 응원을 받고 있어서 정말 하나를 꼽질 못하겠어요. 딱 떠오르는 기억에 남는 말은 없는데, 올라오고 나서 리플이 재밌다, 공감된다, 잘 봤다, 빵 터졌다, 이런 것도 너무 좋고요. 그냥 ‘ㅋㅋㅋㅋ’만 남겨도 너무 기분 좋아요. 어쨌든 저는 제 만화로 오늘 그분에게 웃음을 준거니까 너무 좋아요. 전부 힘이 돼요. 결똑 때문에 사랑이 이뤄졌다는 말도 자주 들었어요. 예비 신랑 신부도 많이 보시는 것 같고요. 선플을 자주 남기는 닉네임들, sns에서 자주 말 걸어주시고 글 달아주는 분들을 꽤 잘 기억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자주 보이는 이름은 너무 반가워요. 이번화도 재밌게 봐주셨단 생각도 들고요. 그 분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제가 기억하고 기뻐한다는 걸.

 

 

반디 | 작가님에게 《결똑》은 처음 시도하는 생활툰이기도 합니다. 하나의 세계를 손수 지어야 했던 이전의 이야기들과 달리 일상에서 소재를 건져 올리는 이 작업만의 매력이 있을 것 같습니다. 《결똑》을 그리며 어떤 재미를 느끼고 계신지 들려주세요.

 

네온비 | 힘든 점부터 살짝 이야기하자면 사실 생활툰을 하면서 신경 쓸 게 정말 너무나 많다는 걸 알게 됐어요. 회마다 항상 조심해서 그려야 해요. 댓글에서 불필요한 남녀 싸움이 일어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하고, 사람마다 성향이나 성격이 다 다르니까 제가 그린 만화를 받아들이는 게 여러가지더라고요. 스토리 만화 같은 경우는 한 회가 약간 재미가 덜해도 ‘아, 그냥 이번엔 전개하는 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기도 하는데 생활툰 같은 경우는 그렇게 하면 바로 이제 감이 떨어졌네, 날로 먹네, 점점 재미가 없어지네 이런 말들이 바로 나오기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죠.

 

대신에 저의 이야기를 매주 기다리는 분들이 있어서 너무 감사해요. 사실 20화로 끝내려던 작품 결똑이 50화까지 했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니까요. 오빠와 같이 생활하면서 재밌었던 일들을 여기저기 많이 메모해뒀던 게 큰 도움이 되기도 했어요. 작품과 작가의 인기가 같이 오른다는 것도 대단한 메리트 같은데, 이건 거꾸로 생각해보면 단점도 돼요. 하지만  여태 그린 에피소드들에 후회는 없어요.

 

독자들에게 한 단계 친근한 작가가 된 것도 좋아요. ‘작가님’보다 누나나 언니라고 부르는 팬레터도 자주 오고요. 독자분들이랑 직접 대면하고 만나 얘기하진 않지만 모두 아는 사람같이 친근하게 생각해주시는 점이 재미있어요. 일례로 얼마 전에 동구가 사고로 큰 수술을 했거든요. 그때 sns에 소식을 알렸더니 정말 많은 분들이 내 가족의 일인 것처럼 걱정해주시더라고요. 감동이죠. 다들 너무 착해요. 결똑을 그리면서 저의 스타일이 점점 굳어지는 느낌도 좋아요. 손도 느리고 그림을 잘 못 그리는 편이라 이렇게 조금씩 ‘네온비 만화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게 좋아요.

 

 

 

반디 | 《결똑》은 결혼생활툰이면서 한 편의 개그 만화이기도 합니다. 빵 터지는 영감을 주는 첫 번째 뮤즈는 물론 캐러멜 작가님일 텐데요. 그 다음으로 작가님의 개그감을 자극하는 뮤즈나 참고가 된 만화가 있다면요?

 

 

네온비 | 주변에 개그맨처럼 웃긴 친구들은 거의 없어요. 아, 있긴 있구나. 골드키위새 작가. 이 친구랑 작년에 만화 같이 해보자고 이야기한 적도 있어요. 흐지부지됐지만. 좀 죽이 잘 맞다고 해야 하나. 웃긴 친구들이 아니라도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다보면 또 얻게 되는 게 있어요. 참고가 된 개그 만화는…… 음, 제 만화 취향은 제가 여태까지 한 작품들과는 되게 달라요. 어둡고 잔인하고 인간의 원초적 감성을 자극하는 만화를 좋아하고, 많이 봐요. 작품엔 반영이 잘 안 되죠. 오히려 만화보다 인터넷 잉여생활을 많이 하다보면 웃긴 자료들이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센스를 얻는 부분이 훨씬 큰 것 같고요. 아무래도 남편만한 개그 뮤즈는 없다 싶어요.

 

참, 좋아하는 개그 만화 갑자기 생각났어요. 지금 네이버에서 ‘웃지 않는 개그반’을 그리는 현용민 작가님이요. 《무식아!》나 《영웅강철남》 등을 작업하셨는데 이분 만화를 진짜 좋아해요. 표정 그리시는 거 자체가 너무 웃기고 재밌어요. 이 작가님 책이면 무조건 사요. 근데 제가 영향을 받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현용민 작가님의 필력에 비해 그림 실력이 너무 초라해서요. (웃음)

 

반디 | 네온비 작가님께서는 만화가 지망생 시절에 캐러멜 작가님을 롤모델로 삼았고, 지금도 존경한다고 하셨는데요. 캐러멜 작가님 외에도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만화가가 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그린 전설의 만화를 몇 편 소개해주세요.

 

 

 

네온비 | 영향을 끼쳤다는 게 만화를 좋아하게 만들고,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심어준 작가님들을 말하면 되는 걸까요? 국내 작가님 중 좋아하는 작가님들 작품 위주로 얘기하자면 김진태 작가님의 《황대장》, 김수용 작가님의 《힙합》, 천계영 작가님의 《오디션》, 이충호 작가님의 《마이 러브》가 만화가에 대한 꿈을 꾸게 만들어줬던 작품들이에요. 정말 재밌게 봤었어요. 정말 전설급의 만화들이라고 생각해요. 지금도 이 작가님들 작품은 챙겨 봐요.

 

반디 | 다음과 네이버 등 포털 및 여러 매체에 웹툰 게재가 활발합니다. 작가님도 그 한 축을 맡고 계시죠. 작가인 동시에 독자로요. 웬만한 독자보다 많은 웹툰을 정주행하고 계시리라 예상되는데요. 요즘 애정하는 웹툰이 있다면 독자 분들에게 추천해주세요.

 

네온비 | 사실 예상과는 달리 웹툰을 많이 보지는 않아요. 취향인 장르나 작품 몇 개 정도만 봐요. 나중에 이거 정말 재밌다!! 하고 입소문 난걸 몰아서 보기도 하고요. 최근엔 루드비코님 만화 정말 재밌게 보고 있어요.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만화, 영화》를 연재하셨어요. 영화 리뷰하는 만화인데, 작가님의 살아온 인생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나가서 무척 재밌어요.

 

반디 | 《기춘씨에게도 봄은 오는가》 이후 작가님의 두 번째 개인 작업입니다. 이전에는 주로 캐러멜 작가님과 공동 작업을 해오셨는데요. 혼자 그리는 것과 같이 그리는 것, 각각의 작업에 장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떠신가요?

 

 

네온비 | 우선 공동작업의 장단점은요. 제가 손이 느린데, 공동 작업을 하면 스토리를 맡는 쪽이거든요. 콘티까지만 같이하면 되니까 그림에 대한 부담이 조금 덜하죠. 같이 작품을 하면 서로 회의하면서 초반보다 점점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고요. 좀 덜 불안하다고 해야 하나. 서로가 같은 작품을 계속 매만지면서 상대방이 보지 못하는 점들을 볼 수 있어요. 의지도 되고요. 반면에 단점은 마감에 서로 예민할 때 각자의 작업물이 마음에 안 들 때가 있는데, 그때는 서로 부드럽게 돌려 말하기가 참 어려워요. 공동 작업을 하는 작가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겪을 거라 생각해요. 곧 풀리긴 하지만 항상 의견이 일치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한 명이 너무 주장을 굽히지 않고 밀어붙이면 다른 한명이 기분이 좀 상할 때도 있고요. 그래도 이런 단점들을 잘 조율하고 대화를 많이 나누면 정말 좋은 파트너가 돼요. 서로 주장하는 것도 터무니없이 ‘난 이렇게 하고 싶어!’가 아니라 ‘이러이러하게 연출하면 더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면 내 생각에는……’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섞어서 작업할 때도 있고요.

 

개인 작업을 하면 제 만화고 제가 다 책임을 져야하니까, 시간이 오래 걸려서 힘들 때도 남편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못하는 것이 좀 힘들어요. 제가 남편에게 펜터치나 여러 가지를 배웠던 어시스턴트였었기 때문에, 자칫하면 그림이 완전히 똑같아질까봐 제 작업을 완전히 맡기지 못하는 것도 있어요. 그래도 제가 생각한 걸 100% 표현해서 그릴 수 있다는 점, 원고료도 혼자 받는다는 점. (웃음) 이 부분은 어차피 같이 모으니까 별로 상관없겠네요. 그리고 싶은 장르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공동 작업은 한쪽에서 탐탁지 않다면 그리고 싶은 장르라 해도 시작할 수가 없겠죠.

 

반디 | 동료 작가 분들의 경우, 둘보다 더 많은 그룹을 지어 활동하시기도 하는데요. 작가님께서도 캐러멜 작가님과의 2인 체제 외에 다른 작업 방식을 시도하거나 만화 창작 모임 등을 가져보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네온비 | 아직까지 ‘스튜디오 캐러멜’은 캐러멜과 네온비의 2인 체제예요. 아마 당분간은 쭉 계속 이렇게 가지 않을까 싶어요. 만약 배경이나 채색이 도움이 필요하다면 단기 외주를 맡겨서 메일로 주고받는 식으로 할 것 같아요. 어시스트를 들이는 건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희의 사생활이 다 노출되는 것도 약간 부담스럽고요. 우리는 원고하면서 밥을 대충 먹을 때도 많거든요. 대충 그릇에 밥이랑 반찬이랑 떠서 마감 전날 컴퓨터 앞에 앉아 숟가락으로 퍽퍽 떠먹어요. 하지만 어시스트에게 그렇게 주면 안 되잖아요. 아무래도 더 신경이 쓰이겠죠. 2인 체제가 아직까지 편하고 익숙하지만 나중에 돈도 더 많이 벌고 스케일이 큰 만화를 하게 되면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만화 창작 모임의 경우, 모임을 가지려면 미리 원고작업을 많이 해둬야 해요. 모임을 가지는 시간이 아니면 나머지 시간에 계속 만화를 그려야 되는데, 모임에서까지 만화 창작을 하면 저는 좀 힘들 것 같아요. 그때만큼은 머리를 좀 쉬게 하고 싶어요. 앞으로도 창작모임은 별로 나갈 생각이 없어요. 이 부분은 사람마다 되게 다를 것 같네요. 여러 사람들이랑 아이디어를 나누면서 더 좋은 결과물을 내는 작가도 많으니까요.

 

반디 | 《다이어터》 이후 두 분 작가님의 차기작을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결똑’에서 새로운 웹툰 소재로 부동산을 언급하기도 하셨는데요. 실제로 어떤 이야기를 준비 중이신지, 언제쯤 독자 분들에게 선보이게 될지 살짝 알려주신다면요?

 

네온비 | 부동산은 만화 속에서 서로 그냥 해본 말이고 본격적으로 만화를 그릴 생각은 없어요. 너무 어려운 소재예요. 아마 관련 만화를 그리려면 몇 년 이상은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공부를 하다 재미를 느끼게 되면 이제 공인중개사로…… (웃음) 농담이고요.

 

제가 곧 선보일 작품은 ‘나쁜 상사’라는 작품. 성인만화고 치정극이에요. 단독 작품이고요. 12부작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6월 말에 스튜디오 캐러멜의 공동 작품, ‘50M’를 연재해요. 이건 서바이벌 드라마 장르예요. 35부작 안팎입니다. 재밌을 거예요. 많이 기대해주세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더 길게는 얘기하지 않을게요.

 

* 편집자 주 :  ‘나쁜 상사’는 레진코믹스에서, ‘50M’는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연재될 예정입니다.

 

 

반디 | 《결똑》에는 서로를 향한 애정뿐만 아니라 만화를 대하는 두 분의 열의를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도 등장합니다. 초창기부터 작가님들의 만화를 빠짐없이 보아온 독자로서 뭉클했던 대목인데요. 만화가로서 작가님의 포부나 소망이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네온비 | 간단하게, 독자들과 오래 함께 호흡하며 좋은 만화를 내는 작가가 되고 싶습니다.

 

반디 | 마지막으로 독자 분들에게 5월 덕담 한 마디 부탁드려요!

 

네온비 | 벌써 5월이에요. 하루하루 건강하고 재미있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항상 제 만화를 챙겨봐 주셔서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6월에 만화속세상에서 선보일 스튜디오 캐러멜의 신작도, 반디앤루니스도 많이 사랑해주세요!

 

 

네온비

 

1985년생. 만화가. 2007년 만화 잡지 《팝툰》의 단편으로 데뷔. 스튜디오 캐러멜 소속. 좋아하는 것은 운동, 멍멍이, 흰 올빼미, 충분한 잠, 치킨, 이토준지, 두유, 아이돌, 근육질 남자. 어려워하는 것은 마감, 밤샘, 요리와 계획대로 살기,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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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여전한 과거와 아직인 미래 사이의 공감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김중미 작가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제공 | 창비

 

삶의 거처

 

강이 어디에 있냐고 그가 물었다
길을 묻는가 해서 내가 되물었다
이리 쭉 가면 다리가 나오느냐고 다시 물었다
비닐 가방에 때 절은 작업복
거친 손에 머리는 반백인 사내

 

늦가을 찬바람 안고 돌아서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모든 걸 잃은 사람에겐
사람의 체온이 종교다

 

저들의 탐욕과 음모와 속임수로
숱한 사람들 찬 거리로 내몰렸지만
우린 또 기억한다 그 숨막히던 날들
모두가 졸부가 되던 뻔뻔스럽던 날들
모두가 모두를 소비하고 내다버리던 날들

 

그 사람 앞에 앉아 나도 밥 한 그릇 받는다
어쩐지 목숨 비치는 국밥 한 그릇 받는다
강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가
목숨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던가

- 백무산, ‘삶의 거처’ 전문

 

아주 오래된 오늘이 있습니다.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날들인데요. 종종 앉은 자리 그대로 영영 일어서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기도 하는 때입니다. 아직 한참이나 멀리 있어야 할 삶의 끝자락에 강제로 밀려나, 간신히 제 몸의 무게로 버티고 선 이들의 시간입니다. 누군가는 이미 지나와 벌써 잊어버렸을 테고, 또 누군가는 이 삶 어디에 그런 게 있느냐고 해맑게 물어볼, 여전한 과거입니다. 다만 견디는 것으로, 그러나 그 몸 가까이의 체온이 있어 버틸 수 있는 삶들입니다. 그렇게 아직은 미래를 품고 일어나 기지개 켤 수 있는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동수는 민들레 싹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담 밑에 먼지처럼 쌓여 있는 흙가루들을 쓸어다가 뿌리 위에 덮어 주며 말했다.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고 나왔니? 외로웠지? 그래도 이렇게 싹을 틔우고 나오니까 참 좋지? 여기저기 친구들이 참 많다. 자, 봐. 여기 우리 공장 옆에도, 저기 길 건너 철공소 앞에도 네 친구들이 있잖아. 나도 많이 외롭고 힘들었는데 친구들 덕분에 이젠 괜찮아. 우리 친구 하자. 여기가 좀 잡고 답답해도 참고 잘 자라라. 아침마다 내가 놀아 줄게.”
  동수는 일어나서 허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허리만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는 구김살까지도 쭉 펴지도록 팔을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271-272쪽)

 

반디 | 축하 드립니다. 어린이 단행본으로는 처음으로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200만부를 돌파했는데요. 출간 이후 1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많은 분들에게 꾸준히 읽혀졌기에 가능한 일인 것 같습니다. 소감 한 말씀, 부탁 드릴게요.

 

김중미 | 어린이책으로 처음 200만부라는 말에 부담스럽기도 하고, 책임감도 느껴집니다. 좀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지금보다 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반디 |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아동문학에 속합니다. 그렇다면 아동문학이란 무엇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일단은 주 독자층이 아동이라는 전제가 있을 테지요. 하지만 작가님의 글이 일반 성인 독자에게도 사랑 받는 요즘에 이런 정의는 조금 낡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의 견해를 듣고 싶은데요. 작가님께서 지향하시는 아동문학은 무엇인지, 이와 관련하여 독자 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중미 | 제가 처음 ‘아동문학’의 범주라는 규정을 의식하고 읽게 된 책은 창비아동문고였습니다. 빈민지역에 공부방을 열기 위해 준비를 하다가 창비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선배의 친구에게서 창비아동문고 100권을 기증 받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읽히기 전 먼저 읽어볼 요량으로 읽기 시작한 그 책들을 통해 어린이 책의 매력을 알게 되었고, 그 뒤 권정생, 이원수 선생님의 글을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몽실언니》나 《하느님이 우리옆집에 살고 있네요》 같은 책을 읽으며 좋은 아동문학은 어른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몽실언니가 연령대를 초월해, 학력과 성별을 초월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쉬우면서도 감동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들의 책읽기는 정보와 지식 습득보다 정서적인 성장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감능력과 풍부한 언어표현능력과 이해능력은 지식 책이 아닌 문학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반디 |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바탕에는 작가님께서 1987년부터 인천 만석동에서 꾸려오신 ‘기차길옆작은학교’라는 공부방의 경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곳에서 공부방을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은데요. 또 공부방과 그곳 아이들이 아동문학의 길을 걷는 작가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김중미 | 빈민운동을 시작한 뒤, 철거투쟁이 이루어지는 곳만큼이나 비철거지역의 공동체운동에 관심이 더 갔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서울보다는 인천지역에서 활동하고 싶어 지역조사를 하게 되었고 우연히 간 만석동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처음 1년은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동네에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며 지냈고, 88년부터 공부방을 시작했습니다. 공부방을 연 뒤 2-3년 동안은 아이들이 늘 물었습니다 .

“이모 공부방 언제까지 할 거예요?”

그러면 저와 다른 이모삼촌들은 늘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공부방은 우리 집이야. 여기는 우리 동네고 우린 여기 안 떠나. 너희가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으면 공부방은 계속 될 거야. 너희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어도……”

제게는 작가의 역할도 공부방 큰이모의 역할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반디 |  ‘기차길옆작은학교’를 거쳐간 실제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공부방에서 싹튼 아이들의 미래와 관련해,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면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김중미 | 공부방을 졸업해 나간 아이들과 인연이 모두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첫회 졸업생이었던 두 아이가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청소년기를 참 힘겹게 보낸 아이들이죠. 그 중 한 친구는 신혼여행 중 되돌아오게 할만큼 사고도 많이 쳤지만 성실하게 잘 컸어요. 두 친구가 다 결혼해 아버지가 되었어요. 한 아이는 미용사인데 아주 착하고 생활력 강한 아내를 만나 성실하게 삽니다. 한 때는 결혼자금을 모으기 위해 미용사와 택배기사를 병행하며 힘들게 보냈습니다. 여전히 가난하지만 큰 욕심 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살고 있죠. 그 친구의 단짝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열심히 일을 했지만 청년기 때 병을 얻었어요. 배운 것 없는 사람들한테 몸이 재산인데 어려움이 많았죠. 그래도 착한 아내를 만나 아이를 키우며 사는데 경제적으로 어려워요. 그 친구가 2년 전 공부방 친구 아이의 돌잔치 때 만나 말하더군요.

“공부방 때문이야. 이모들이 착하게 살라고 하지 않았으면 나도 남 등쳐먹으며 살 수 있을 텐데, 나쁜 짓을 못하겠잖아.”

원망과 신세한탄이 섞인 말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마음이 아프고 미안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의 말이 오히려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힘들 때, 혹은 아주 작지만 기쁜 일이 있을 때면 공부방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는 그 친구들이 공부방이 아이들에게 어떤 곳이 대변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디 | 그런가 하면, 과도한 입시 경쟁과 암기식 교육으로 정작 아동문학을 읽어야 할 독자들은 그 문학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야 뒤틀린 사회 구조를 바꾸어가는 데 있겠지만, 그 이전에 아동문학과 아이들을 연결해준다면, 어떤 매개의 방식이 가능할까요? 현재까지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는 작가님의 경험으로부터 조언을 부탁 드립니다.

 

김중미 | 공부방 아이들은 스스로 책을 읽지 못합니다. 어려서부터 책과 친해질 기회가 별로 없었고, 한글을 뗐다 해도 책의 즐거움을 맛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저희가 택한 방법은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입니다. 저학년, 고학년, 청소년 책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들에게는 중학생에게도 저학년 동화나 그림책을 읽어주기도 하지요. 가정에서는 부모님들이 유아기 때부터 책을 자주 읽어주고 이야기를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활자가 눈에 들어오기 전부터 아이들의 머릿속에 이야기 구조가 생기고 이야기를 재미와 감동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아무리 원해도 스마트폰이나 핸드폰은 중학생이 되기 전에는 사주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저희 공동체는 초등학생 때는 절대 휴대전화나 컴퓨터를 가지고 놀지 못하게 하거든요. 책과 이야기의 맛을 알게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디 | 얼마 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사랑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책이 쓰여진 당시와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인해 사회적 불평등이 극심해진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말씀하셨는데요. 하지만 계층 간 이동의 가능성이 점점 더 희박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으로 볼 때, 그 ‘희망’을 받아들이는 온도 차가 있을 듯합니다. 2013년, ‘지금 ?여기’에서의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새롭게 읽히는 지점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김중미 | 솔직히 말해서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왜 지금까지 읽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사실 요즘 아이들도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정말 재미있게 읽을까? 그 곳에서 아이들은 어떤 감동을 느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학교에 가 아이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면 그런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왜 선생님 책에는 엄마 없는 애들이 많이 나와요?” “가난한 아이들을 도우려면 어떡해 해야 해요?” “요즘도 이런 아이들이 있어요?”

 

그 질문이 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있어? 이렇게 가난한 곳이 있어? 왜 이 책에서는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 성공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지? 아이들은 책을 통해 자기가 경험하지 않은 세상에 대해 간접체험을 하고, 또 책을 통해 왜?라고 질문하게 될 겁니다. 왜 김명희 선생님은 다시 가난해졌지? 왜 영호삼촌은 동수와 명환이를 선택했지? 왜 숙자와 숙희는 다를까? 그러면서 가난의 책임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어렴풋이 깨닫지 않을까. 그 지점이 새롭던 새롭지 않던 책을 읽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디 |  현재 우리나라처럼 사회적 안전망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선 구조적 원인에 의한 문제들마저 개인이 오롯이 책임지고 해결해야만 하는데요. 그래서 “가난하기 때문에 서로 돕고 나눌” 수 있다는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메시지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평소, 사회적 약자들이 서로를 통해 희망을 찾는 공동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어떠신가요?

 

김중미 | 네, 저는 가난한 이들, 사회적 약자들이 스스로 노력해 가난을 벗어나고 주류에 편입해가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셨듯이 이제는 계층 간 이동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계층 간 이동이 가능했던 것은 저희 세대로 끝이겠지요. 그런 현실에서 사회적으로 약한 이들이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서로 힘을 모으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는 여러 가지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공동노동 공동생산 공동분배를 원칙으로 하는 공동체부터 느슨한 생활공동체까지 다양한 공동체의 실험을 통해 힘없는 사람들이 이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틈을 확장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디 |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시작으로 근래에는 《조커와 나》에 이르기까지, 여러 책을 통해 독자 분들과 꾸준히 만나고 계십니다. 지금은 어린이 월간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제주 강정마을 이야기를 연재 중이시죠. 또, 앞으로는 농촌을 배경으로 한 청소년 소설을 계획하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진행 중인 두 가지 작업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김중미 | 강정마을 이야기는 강정을 어떻게든 더 널리 알리고 싶은 마음 하나에서 시작했습니다. 개똥이네 놀이터가 저학년을 대상을 한 잡지여서 작품의 대상을 정하는 것이 어려웠고, 강정의 여러 문제들을 제대로 드러낼 수 없다는 한계, 또 월간지이다 보니 작품의 무대가 되는 시점도 무시할 수 없고 여러 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공부방을 졸업한 대학생들이 삽화를 담당해 줘서 2년 가까이 강정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어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월간지 연재를 하며 받는 인세와 삽화비는 저희가 강정을 오갈 때 쓰는 경비를 제외하고는 강정마을회나 강정 관련된 곳에 후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강정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어 마음이 아픕니다. 〈너영나영 구럼비에서 놀자〉를 어떻게 결론지어야 할지도 고민이 많습니다.

 

농촌을 배경으로 한 청소년 소설은 원래 《조커와 나》에 같이 엮으려 했던 중편인데 길이가 너무 길어서 빼고 장편으로 다시 수정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강화에 가서 살기 시작한 지 11년이 넘었지만 만석동을 오가며 살다 보니 마음이 강화생활에 온전히 스며들지 못했습니다. 처음 경험해보는 농촌현실,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많이 낯설었죠. 그래서 언젠가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있으면서도 쉽게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 역시 열쇠는 아이들이 쥐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10년째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고 그 아이들을 통해 내가 사는 여기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반디 |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출간된 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가난과 소외계층의 문제가 계속해서 유효하고, 그로 인한 상처를 위로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뜻이기도 할 텐데요. 누군가에게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그렇듯, 작가님께도 유효한 고민과 그것을 해소해주는 책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소개해주신다면요?

 

 

김중미 | 제가 청소년 때 읽었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아직까지도 제게 여러 가지 고민을 하게 해줍니다. 권정생 선생님의 《점득이네》,  《몽실언니》도 그런 작품입니다.

 

반디 | 요즘 아동문학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등을 보면 이야기가 점점 다양하고 재밌어지는 것 같고요. 아이들뿐만 아니라 대중의 공감을 얻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나 《완득이》 같은 작품은 영화화되기도 합니다. 작가님께서도 국내에서 주목하는 아동문학이 있을 텐데요. 5월을 맞아 조카나 내 아이에게 줄 책 선물을 고르는 분들에게 몇 권 추천해주세요.

 

 

김중미 | 여전히 제게 힘을 주는 작품은 권정생 선생님의 작품입니다만 최근에 창비에서 나온 《기호 3번 안석뽕》을 재미있게 읽었고요. 몇 년 전, 《소나기밥 공주》도 좋았습니다. 또 출간된 지 좀 지난 김리리의 《나의 달타냥》과 박정애의 《환절기》도 권하고 싶습니다. 이현의 《1945 철원》도 청소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반디 | 이제 곧 5월입니다. 달력은 아이들을 기념하고, 계절은 아이들이 뛰어 놀기 좋은 천연의 무대를 만들어주는데요. 아동문학 작가로서 5월을 맞는 아이와 부모에게 덕담 한마디 부탁 드립니다.

 

김중미 | 마음껏 놀고 즐기십시오. 세상은 어느 때나 어렵고 힘겹습니다. 잠시나마 짐을 내려놓고 신록을 느끼고 그 신록에서 뛰어놀아보세요. 어린이나 부모님들이나 모두. 멈춰서지 않으면 우리가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볼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 지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누구와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멈춰서서 돌아보세요. 우리 곁에 의외로 많은 벗들이 함께 한다는 걸 느끼실 겁니다. 나무와 꽃과 풀, 그리고 이웃들과 동무들………

 

김중미

 

동화 · 청소년소설 작가. 1987년부터 인천 만석동에서 ‘기차길옆공부방’을 운영하며 지역운동을 해왔고, 2001년 강화 양도면으로 이사해 지금까지 '기차길옆작은학교'의 농촌 공동체를 꾸려 가고 있다. 제4회 창비 좋은 어린이책 원고 공모에 당선이 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쓴 책으로《괭이부리말 아이들》,《내 동생 아영이》,《종이밥》,《우리 동네에는 아파트가 없다》,《블루시아의 가위바위보》(공저),《거대한 뿌리》,《꽃섬고개 친구들》,《모여라, 유랑인형극단》,《다시 길을 떠나다》,《조커와 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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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사람을 남기는, 그 사람 -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의 여행작가 변종모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희진
사진 제공 | 허밍버드

 

여행을 좋아합니다. 그런데도 혼자 다닌 적은 없습니다. 매번 일행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 여행길에는 익숙한 지인들과의 추억이 남아 있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은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이야기지요. 수차례의 여행을 홀로 해 왔던 사람이라면 좀 다를까요? 궁금증을 풀어준 책이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입니다. 이 책은 굳이 분류하자면 여행서인데요. 흔히 말해지는 ‘관광’이나 ‘추억 만들기’에 할애한 지면이 거의 없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요.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는 점에서, 그것을 끊임없이 반복한다는 점에서 변종모 작가님의 여행은 우리 삶과도 닮았습니다. 여행이든 삶이든 최종적으로 우리가 남기게 될 것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했다는 식의 연대기가 아닐 겁니다. 그보다 너에게 난, 나에게 넌 이런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일 테죠. 변종모 작가님의 여행담에 의하면 말이에요.

 

* 프로필(ⓒ엄삼철)을 제외한 나머지 사진은 변종모 작가님이 여행 중 찍은 것으로,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에 수록된 내용의 일부입니다.

 

반디 |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의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이후 일 년 만의 새 책인데요. 책 소개와 함께 이전의 글보다 중점을 두었던 부분-식탁에 관한 기억이라든가-을 설명해주신다면요?

 

변종모 | 그간 3년 또는 2년에 한 권씩 발표를 하다가 이번에는 꼭 1년 만에 새 책을 소개하게 되었네요. 신간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는 지금까지와 조금은 다른 형식의 내용입니다. 물론 여행지에서 경험한 일임에는 변함없지만, 이번 책은 장소와 상관없이 낯선 곳에서 만난 사람의 이야기, 그리고 그 사람과 저 사이에 놓였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당시 그들에게서 받은 그 무수한 마음들을 제 마음속에서 오래오래 키워오다가, 즉 그 힘으로 살아오면서, 이것을 언젠가 한 번은 꼭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상이 몰라도 되는 일이지만 제 마음의 온도가 너무나 높아서, 반드시 다른 누군가에게도 따뜻한 이야기로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여행자 중 한 사람일 뿐이었음에도 낯선 그들은 제게 잠시 가족 같았다가 친한 친구 같기도 했고, 스승이기도 했다가, 오래 소식이 끊겼다 만나게 된 후배 같기도 했지요. 산다는 것은 이런 일들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호의가 느껴질 때, 반쯤은 접혀 있던 나의 마음이 다시 펴지는 기분. 살면서 저는 누구나 이런 기분을 자주 경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달콤한 부분이 있으므로.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반디 | 지난 번 책도 그렇고 의미심장한 제목이에요. 책을 펼쳐 보기도 전에 여운을 남깁니다. 결국 달고 쓴 맛은 하나의 삶 안에 뒤섞여 있다고 받아들여도 될는지요?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라는 제목에 숨은 뜻을 부연해 주세요.

 

변종모 | 저의 첫 책 제목이 《짝사랑도 병이다》였어요. 그리고 두 번째 책의 제목이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였고요. 그때 친한 후배가 전화를 걸어 왔어요. “형! 이번에도 의학 서적 낸 거야?” 하고요. 그 당시 모든 것은 제게 병적이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을 그때는 처절하다 생각했었나 봅니다. 그 이후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은 순전히 제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반성문’의 의미가 강했어요. ‘결국 그리움의 대상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그런 제 마음의 반성문입니다.

 

그리고 이번 책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는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처음 보는 대상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대접을 받곤 할 때면 그것이 화려하거나 거창하지 않아도 저의 불안을 재울 수 있었고, 저는 나누지 않았는데 그들이 먼저 주었던 마음들은 제게 너무나 달콤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익숙하지 않아 감당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을지라도 그 이면에는 분명 따뜻함이 있었고, 그렇기에 결국 그것은 제가 오래도록 건강한 마음이 될 수 있게 했지요. 그것을 생각하면 저는 자주 그날들을 떠올리므로, 지나간 모든 인연의 마음들이 ‘달다’고 생각해봅니다.

 

반디 | 작가님의 여행기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식의 육하원칙적인 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도드라진 기억을 밀도 있게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의 시기나 장소가 혼재되어 있는데요. 언제 이 많은 여행을 다녀오셨는지 궁금해하는 독자 분들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도, 파키스탄, 아르헨티나, 그루지야 등 10여 년간 다녀오신 나라라고 들었는데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보태주신다면요?

 

변종모 | 맞습니다. 저의 글에는 어떠한 여행지나 풍경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지요. 정보 역시 없어서 제 책은 절대로 여행 지침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것은 인터넷이 훨씬 더 정확하고 발 빠르게 전달한다고 믿고, 제가 정보에 그다지 밝지 못하기도 하고요. 저는 여행을 갈 때 정확한 기간이나 일정을 계획하고 떠나는 편이 아닙니다. 가령, 파키스탄의 훈자에 머물 때는 비자가 끝날 때까지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계속 지내다가 인도로 옮겼어요. 좋으면 그저 싫어질 때까지, 아니 옮길 만한 이유를 찾을 때까지 무작정 있는 편이거든요.

 

저를 그렇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사람’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어떤 장소를 찾았다가 자연스레 짐을 풀고 하루 이틀 지내다 보면, 그곳의 사람들이 점점 친근해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낯선 그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떠나기가 더욱 힘들어지는 일들. 처음에는 물론 그곳의 풍경에 이끌렸던 것이겠지요. 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여행 사진 대부분에 사람이 등장하는 것 역시 같은 이유인 것 같습니다.

 

 

 

반디 | 앞서 말했다시피 여행의 기억을 글로 써 나가고 계십니다. 아무리 본인이 겪고 느낀 것들의 기록이라고 해도, 혹은 그래서 더더욱 술술 써지기보단 막힐 때가 더 많을 것 같습니다. 책 한 권이 되기까지 글쓰기의 괴로움을 어떻게 견디셨는지요.

 

변종모 | 저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글에 대해서 능통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일기를 써왔어요. 제가 글쓰기에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 부분 때문인 게 크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의 괴로움이야 누구에게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고민도 많이 하게 되는데요.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해야 할 고민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행을 떠난 곳에서 기분과 느낌을 기록할 수도 있지만, 오늘 하루를 떠올리며 나의 이야기를 써보는 것이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앞서 말했듯 자신의 마음을 보는 일, 자신의 진심을 가장 진심에 가깝게 써내는 일이 중요하지요. 일기장을 토대로 하거나 메모지를 근거로 하지 않아도, 진심이란 바뀌지 않는 것이니까요. 달라진다면 진심이 아닌 거니까요. 저는 소설 쓰는 사람이 아니므로 사실에 대해서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면 될 뿐이라 생각합니다. 오히려 때로 제 마음이 나 자신에게 너무나 밀착되어 상대방의 느낌이나 생각을 왜곡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괴로움이라면 괴로움이지요.

 

반디 | 한편, 작가님께서 글쓰기만큼이나 애용하는 기록 방법은 사진일 것 같은데요. 글과 사진은 어떤 면에서 같거나 다를 겁니다. 경험을 들어 그 같고 다름을 설명해 주세요. 개인적으로는 어느 쪽을 더 선호하시는지도 궁금하고요.

 

변종모 | 저는 대부분 혼자 여행을 다니므로 자연스레 사진을 찍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의 일환입니다. 한번 떠나면 길게는 1년 6개월씩 다니다 보니 저만의 시간을 소비하는 한 방식이 된 것 같아요.

 

글은 자신의 생각이나 마음을 그대로 찍어내는 일이며 사진은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내 마음으로 옮겨 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저는 글을 쓰는 일에는 제 감정을 최대한 공평하게 반영하고 사진을 찍을 때는 대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고 하는 편입니다. 제가 아직 상업 사진가의 영역을 넘볼 수는 없을 겁니다. 사진에 대해서도 잘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대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이게 할지 또는 빛의 조건을 가장 훌륭하게 이용할 수 있을지 등을 잘 알지 못합니다. 저는 그저 제가 바라보는 느낌 그대로 촬영하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사진 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가장 결정적이고 인상적인 사진을 남기는 법 또한 연구해보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지금의 방식이 여행에서 훨씬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글과 사진 중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는지는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가 없네요. 두 가지 모두가 제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라 어떤 때는 글이 더 편하고 어떤 때는 사진이 더 효과적이기도 하니까요.

 

반디 | “돌아왔다는 것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에필로그의 한 구절이 인상적입니다. 살아가면서도 돌아오기 이전의 일들에 분명 영향을 받을 텐데요. 다시 살아가며 가장 자주 떠오르는 여행의 기억, 그리운 식탁의 풍경이 있다면요?

 

변종모 | 아, 너무나 많네요! 제가 길 위를 나서면서 가졌던 마음들, 그리고 그곳에서 돌아왔을 때 조금 나아지거나 좋아졌던 마음들은 분명 길 위에서 느낀 것들이나 그 시간들의 추억 때문일 겁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요. 딱히 어떤 추억 때문에 살아간다기보다, 어떤 기분이나 느낌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네요. 수많은 추억을 일일이 떠올리며 산다기보다 그때의 좋았던 기분으로 오래오래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도 한 가지를 꼽으라면 스리랑카에서 만난 청년이 자주 떠오릅니다. 이번 책에도 등장하는 이야기인데요. 그가 처한 생활환경과 불투명한 미래, 반면에 그런 그의 가족에게서 받았던 감사의 마음이 기억납니다. 당시 청년은 일자리를 찾아 한국으로 가기 위해 한글을 배우던 중이었는데, 제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함께 한글 공부를 했어요. 청년의 할아버지는 제가 그를 방문할 때마다 아득한 높이의 야자나무에 올라가 야자열매 한 통을 따서 내밀곤 하셨습니다.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도 가난한 여행자였고, 그래서 도울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음에도 그들은 자꾸 저에게 주려고만 했습니다. 참으로 선량한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결국 한국에 오지 못했을 그 청년이 지금은 무얼 하고 있을지 너무나 궁금합니다.

 


반디 | 오랫동안 여행자로 살아오고 계십니다. 그만큼 쌓여 있는 기억이 있을 테고, 이 책에도 못다 한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요. 이런 상상을 해보고 싶습니다. 지면이 무한하게 주어졌다면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는 어떤 책이 되었을까요?

 

변종모 | 아……. “지면이 무한하게 주어졌다면”이란 말이 좀 무섭군요. 하하하. 책에 미처 담지 못한 내용들을 계속 이어나갔을 겁니다. 세상은 점점 화려하고 거대한 것에만 박수를 보내고 있지만 제가 받은 많은 소박한 마음들이 결코 그 거대하고 화려한 것들에 비해 부족하거나 초라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세히 봐야 잘 보이는 그 마음들에 대해서만큼은 꼭 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 또한 누군가에게 한 번이라도 달콤한 사람이 돼야겠다고, 하루하루 길 위를 걸으며 배웠던 것을 베풀어야 하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이유에서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의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겁니다. 다만, 분량이 너무 늘어나 독자 분들이 지겨워했을지도 모르겠군요.

 

 

반디 | 책은 아마 여행을 대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매체일 겁니다. 많은 독자 분들이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를 통해 간접경험을 하듯이 말이죠. 그런 책이 여행 이전의 작가님에게도 있었는지요. 꼭 여행도서가 아니라도 책 몇 권을 소개해 주세요.

 

변종모 | 모든 것은 길 위에서 배웠다고 저는 주장하지만, 그런 결론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된 책들과 길 위에서 오래도록 곱씹게 했던 마음의 한 줄들이 있습니다.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어느 날 다시 돌아왔을 때, 큰형처럼 또는 부모나 친구처럼 따뜻한 힘이 된 책들 또한 있지요. 그러다 다시 먼 곳이 그리워질 때 그곳을 떠올리게 한 책들 역시 있습니다.

 


말로 모건의 《무탄트 메시지》를 읽었을 때, 제가 길 위에서 자주 삶에 대해 느끼던 것과 굉장히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는 우리는 결코 떠나지 않고서도 무한히 여행처럼 살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최갑수의 《잘 지내나요, 내 인생》을 펼쳐놓고는 같은 여행자로서 그의 시선이나 마음이 살짝 궁금해지거나 부럽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여행하지 않고서도 여행할 수 있고, 여행하면서도 여전히 떠나지 않은 것처럼 지금의 자리를 소중히 돌보게 하는 마음의 글들을 항상 곁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늘 저의 많은 부분을 흔들어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반디 | 작가님께 또 소개 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행지인데요. 이제 4월을 지나 5월이고, 완연한 봄입니다. 이 계절에 가기 좋은 곳, 바꿔 말하면 어느 곳에서의 봄을 가장 좋게 기억하시는지요? 그 이야기를 독자 분들에게 들려주세요.

 

변종모 |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그곳의 4월은 정말이지 제정신이 아니지요. 식민지 시절의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주변의 소박한 자연과 잘 어우러지고, 불교 국가 특유의 정서가 종교와 관계없이 사람을 고요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밤의 루앙프라방은 또 확연히 다른 분위기라서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었습니다.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하고 있는 기분이고, 특별히 뭔가를 보지 않아도 늘 새로운 것이 보이는 곳이지요. 부겐베리아가 지천으로 핀 사원의 마당을 걷거나 말 없는 메콩 강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는 일, 골목의 낡은 카페에서 맥주 한 병 끼고 하늘의 별을 보는 일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곳. 바로 루앙프라방이지요. 아직도 저는 그곳의 봄을 잊지 못합니다.

 

 

반디 | 누구나 여행의 로망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여행을 주저하는 사람도 있고, 여행을 계획하며 들떠 있는 사람도 있고, 한창 여행 중인 사람도 있고, 이미 여행을 다녀와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런 사람들 중 어떤 분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으신가요?

 

변종모 | 욕심 같아서는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싶지만 이미 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제 글에 좀 더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저의 지난 많은 여행들 중에서도 장소나 계절에 관계없이 오로지 그들과 제 삶에 잠시 스쳤던 커다란 마음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니, 여행을 다녀온 후라면 더 크게 공감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여행을 앞둔 분들 역시 제 이야기에서처럼 좋은 인연을 기대해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그런 인연에는 자기식의 존중과 정성이 필요하리란 것을 꼭 말씀드리고 싶네요.

 

반디 | 작가님의 다음 여정이 궁금합니다. 또 다른 여행을 떠나실지, 아니면 여행의 기록을 정리해 나가실지, 사람들과의 만남을 가지실지요.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이후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다면 들려주세요.

 

변종모 | 글쎄요. 저는 미래에 대해서 발설하기를 좀 꺼리는 편이긴 한데, 가능하다면 다시 여행을 떠나도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 시기는 이곳 한국에서 저를 딱히 필요로 하지 않을 때라면 좋겠어요. 떠나게 된다면 다시 파키스탄에서 보내는 1년을 상상해봅니다. 제가 만났던 인연들, 다 알지 못하는 그곳의 계절에 대해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글을 쓰겠지요. 그 글들이 세상에 나오게 될지 그러지 못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늘 하던 일을 하고 늘 상상하던 일을 상상할 것입니다. 별일 없다면 별일 없이 지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에요. 많은 것을 계획하지 않는 일이 저의 계획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반디 |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 여행은 혀의 기억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특히 덜 갖춰진 식재료로 요리를 해 먹는 모습이 종종 등장하는데요. 꼭 여행을 다녀온 적이 없어도 공감 가는 부분입니다.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맛을 내며 사는 것이 우리네 삶이니까요. 이런 의미에서 작가님 자신의 삶을 음식에 비유한다면 어떤 요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변종모 | 음……. 제가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에게 든든한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먹는 일은 아주 소중하지요. 허기진 마음을 잠시나마 그렇게 채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데, 저는 쌀밥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한 가지로는 별로 의미 없는 것. 다른 반찬과 꼭 곁들여야 하는 그런 쌀밥 같은 사람 말이에요. 사람이 혼자 행복하다면 그것이 행복이겠습니까. 그러나 나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행복이라면, 그것은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생각해보니 그러려면 제가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군요. 부담스러워라.

 

 

 

변종모

 

한때 광고대행사 아트디렉터였다가 오래 여행자로 살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이며 미래에도 여행자일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서 한 번은 떠나게 될 것이니 우리는 모두 여행자인 셈이므로. 배부르지 않아도 행복했던 날들을 기억한다. 길 위에서 나누었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생각하며, 그날처럼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짝사랑도 병이다》, 《여행도 병이고 사랑도 병이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거짓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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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경쟁을 '벗'어나 새로운 교육을 모색하는 '벗' - 출판사 교육공동체 벗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제공 | 교육공동체 벗

 

대개의 유년이 학교, 그 동일한 공간을 배경으로 합니다. 가족의 테두리 밖으로 나와 또래와 함께 서툴고 어눌하게 스스로의 자리를 찾아가는 곳, 관계에 처해 비로소 자기를 알아가고 세상의 면면을 배워가는 터.

 

그러므로 아직 오지 않은 사회의 얼굴은 그곳으로부터 그려지고, 이미 와 버린 사회의 원인은 고스란히 그곳에 있습니다. ‘지금-여기’를 지배한 무한 경쟁의 사회가 타인과의 사이에서 ‘경쟁’을 가장 먼저 배우고, 경쟁에 따른 등수로 자기의 존재를 확인해왔으며,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환영받는 게 이 세상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일찍이 알아버린 그때의 아이들이 어른 되어 사는 곳이 부정할 수 없는 오늘의 대한민국이듯. 그렇게 그 중 누군가는 분명 “경쟁에만 길들여진 채 교대, 사대에 들어가” “순종적인 ‘교사 타입’”의 인간이 된 채 “유능한 교사로 인정받기 위해 자기계발”에 열을 올리고 승진을 위해 “영혼을 팔”고 있을지 모르고요. 어떤 아이들의 잊히지 않는 유년의 풍경에 숨 막히게 갑갑한 감옥 같은 교실을 그려 넣으면서요. 체제에 맞설 투철한 행동가는 커녕 체제에 부딪혀 깨진 이의 잔잔한 벗도 돼주지 못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노예를 양산”하면서 말이죠.

 

그러니까 언제고 끊어버려야 할 이 악순환의 고리 어디쯤에, 언젠가는 제대로 뿌리 내려야 할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 그리고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이 자리하는 것이고요.  

 

반디 | 출판사 이름이 의미심장합니다. '교육공동체 벗'은 단지 교육 관련 책을 만드는 곳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넓은 범위에서 활동하는 것 같은데요. 책의 뒤쪽을 보면 만드는 사람이 무려 758명에 이르고요. '교육공동체 벗'을 조직하게 된 계기와 활동 내용, 함께하는 분들에 대해 소개해 주신다면요?

 

교육공동체 벗(이하 벗) | 교육공동체 벗의 ‘벗’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경쟁과 수월성이 아닌 교육을 통한 우정의 실현(友)과 대안적 실천에 대한 의지의 표현(but)입니다.

 

한국에서 교사, 학생, 학부모를 포함한 모든 교육 주체들은 누구나 교육 때문에 고통스럽고, 경쟁과 효율성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 교육의 병폐는 더 심화돼 가는데 이 현실을 직시하고, 대화하고, 새롭게 모색하는 노력들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새로운 교육운동을 기획하고 제안하는 주체가 되어 만들어 보고자 한 게 바로 ‘벗’입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닌 각자 권리와 의무를 나누어가지는 한 식구로서 만나고자 했기에 협동조합을 모델로 하게 되었습니다.

 

 

 지난해 8월, 담양에서 열린 교육공동체 벗 조합원 여름 연수

'하여 함께'에서 조합원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

 

현재 벗의 조합원은 810여 명인데, 교사의 비중이 78% 정도로 가장 높지만, 학부모나 청소년, 대학생, 일반인들의 비중도 20%가량 됩니다. 조합 매체인 격월간 《오늘의 교육》, 교육 출판, 그리고 다양한 포럼이나 강의 등이 벗의 주요 사업입니다. 여러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오늘의 교육》 읽기 모임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이를 기반으로 지역에서 각종 포럼이나 토론회 등의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기도 합니다.

 

반디 | 지난해 12월에 출간된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은 교육공동체 벗에서 2012년 8월에서 10월까지, 세 달여에 걸쳐 진행한 동명의 강의를 묶은 것입니다. 처음에 이 강의를 기획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벗 | 학교 현장은 날마다 악화되어 가고 있고, 이게 대체 교육인가 싶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데, 그런 학교에서 마냥 '성실한' 교사로 산다는 게 과연 옳은 것일까 싶었습니다. 교사가 학교의 잘못된 지침이나 관행들, 교육부의 횡포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을 마치 교사답지 않은 행동처럼 보는 시선에도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고요. 오히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더 교사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거든요.

 

지난해 8월부터 10월까지 교육공동체 벗에서 진행한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에서 홍세화 선생님이 강연 중인 모습

 

교육공동체 벗에 모인 교사들이 기본적으로 그런 문제의식을 어느 정도 공유하고 계신 분들인데, 이런 문제의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그럼 대체 교사란 무엇이며 교육은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는 자리, 일상에서 불온을 실천하고 계신 분들을 모셔 함께 수다를 떨며 내공을 쌓아 가는 자리를 만들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나만 이렇게 학교라는 공간이 불편한가' 싶어 외로운 교사들이 동료를 만드는 자리가 필요하단 생각도 했고요.

 

반디 | 이 강의는 ‘새내기 교사와 예비 교사를 위한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했는데요. 왜 그 대상이 ‘새내기 교사와 예비 교사’인가요? 특정 대상군을 지칭하지 않고 그냥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일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벗 | 경력이 많은 교사도 물론 그러하겠지만 젊은 교사나 새내기 교사들 중 현재의 학교교육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분들이 학교에서 느끼는 좌절감, 고립감, 외로움이 상당히 커 보였습니다. 2011년에 조합원인 한 새내기 교사가 첫 발령을 받은 지 열흘도 채 되지 않아 죽음을 택한 일이 있었습니다. 발령받자마자 NEIS 업무를 맡아 매일 밤늦게까지 프로그램 작업을 하느라 수업 준비도 하지 못한 채 학생들을 만나는 것에 괴로움이 컸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비 교사들은 대개 이런 학교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학교에 들어가고, 이끌어 주는 좋은 선배 교사나 동료를 학교에서 만나기가 쉽지 않은 탓에 부조리함을 느끼면서도 혼자 끙끙 앓는 경우가 많지요. 그래서 새내기 교사와 예비 교사들이 지금 자신이 겪는 어려움이 어디에서 기인한 문제인지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고, 먼저 그런 문제에 부딪쳤던 선배 교사들과 만나서 그것에 대처하기 위한 방법과 태도를 함께 모색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반디 | 새내기 교사가 실제 학교 안에서 운신할 수 있는 폭은 굉장히 좁은 게 사실입니다. 강의를 통해 양성된 새내기 교사가 그 불온을 전염(?)시키기 위해 현실에서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벗 | 가장 많이들 시작하는 일은 책 읽기 모임을 만드는 것이더라고요. 공부를 하기 위함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교사들이 머리를 맞댈 시간을 만들기 위함이 큰 것 같아요. 작년 시즌 1, 2때도 한 선생님께서 강의를 듣고 학교에서 책 읽기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 모임을 통해 '이 선생님에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고 그동안 제대로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어 오해를 하고 있던 동료 교사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렇게 반짝이는 면이 있는 분이었구나' 하고요. 우선은 옆에 생각을 나눌 수 있는 동료, 어깨를 결 수 있는 동료를 만들어 가면 어떨까 싶습니다.

 

반디 | '교육공동체 벗'의 책을 접하면서 '내가 몰라도 너무 모르는구나! 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학교 밖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저와 같은 미혼자는 관련 종사자나 학부모가 되지 않는 이상 교육을 남의 일인 양 여기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학교 문제는 공론화로부터 고립되는 것 같습니다. 성과도 적지 않은 반면 아쉬움이 있으실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벗 | 교육은 관계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속성이 중요합니다. 벗 조합원이 교직에 계신 분이 많은 것은 그런 상황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교육문제를 말할 때 학부모들이 빠지지 않습니다. 자녀를 매개로 관련돼 있기 때문입니다. 함정은 바로 이것이죠. 자녀가 학업기를 마치면 그만입니다. 이것은 벗에게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 불행입니다. 역설적으로 근시안의, 자기 자녀만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갖게 만들죠(이런 점에서는 학교 문제가 공론화로부터 고립돼 있다고만 볼 수도 없겠네요^^;). 그렇지만 이를 풀어 갈 뾰족한 수는 아직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교육문제는 사회문제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교육에 대한 고민이 사회문제와 맞닿을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러므로 벗은 교육을 사회와 유리시키려는 태도에 토를 달밖에요. 더 나아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반디 |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과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 가장 최근에 출간된 《수업》을 통해 참교육을 방해하는 학교 운영 체제와 교육계의 현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직접적인 주체 또한 교사와 학교 당국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학교 밖의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도우면 좋을까요?

 

벗 | 가장 중요한 건 인식의 전환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한국 교육에서 무엇이 잘못돼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우수한 몇몇 학생들을 위해 대다수의 학생들을 들러리로 만들고 자신이 가진 능력을 철저히 사유화하는 인식은 우리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능력주의와 탁월함에 대한 신봉은 이른바 진보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다르진 않은 것 같습니다. 한 명 한 명 이런 인식에 대한 전환이 이루어지고,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도 바뀐다면 교육 역시 본연의 역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반디 | 현재 대한민국 교육의 문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무한 경쟁, 성과주의 사회가 부과하는 자기 착취의 굴레, 그로부터 교사를 포함한 이 나라의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겁니다. 또 그런 이유로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요. 말하자면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건 이와 같은 뒤틀린 사회구조인 건데요. 혹시 같은 원인을 두고 싸우고 있는 다른 단체들과의 소통이 있으신가요?

 

벗 | 벗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관심의 방향은 사회의제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풀어가기 위한 화두는 지역입니다. 교육공동체 벗의 지역모임이 바로 그런 화두를 붙잡고 갈 단위이고요. 전국적 단위로 사회의제를 제출하고 논의를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 논의에 생명을 부여하고 변화를 이끌어 가려면, 이것을 지역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지역에서 풀어 갈 주체를 만들어 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주체들은 교육 안과 밖을 두루 통찰할 때 튼실해진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역의 타 단체들과 연대와 소통이 필수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6월, 농사학림에 참여한 교사들이 모내기를 위해 한창 모판을 옮기는 중인 모습 

 

 

지난해 10월, 농사학림에 참여한 교사들이 낫으로 직접 모를 수확한 후 남은 볏짚을 모아 묶고 있다

 

부산지역모임에서 민주시민공원과 교사아카데미를 기획한다거나 광주지역모임에서 5.18재단과 5월연수를 공동 진행한다거나, 괴산증평지역모임에서 청소년인문학교실을 꾸린다거나, 서울에서 하자센터와 교육포럼을 함께 연다거나, 사무국이 있는 마포지역에서 '마포교육네트워크'에 참여하여 지역 교육 현안에 공부하고 소통한다거나, 합정동홈플러스입점저지투쟁에 함께했던 것도 그런 과정이라 할 것입니다.

 

반디 | 몇 달 전, KBS에서 <학교 2013>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많은 이들이 ‘현재의 대한민국 학교’에 주목하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학교 현장의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고요. '교육공동체 벗'에 계신 분들은 이 드라마를 어떻게 보셨는지요.

 

벗 | 《오늘의 교육》 3.4월호에 이 드라마에 대해 세 분의 리뷰가 실렸습니다.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같은 드라마에 대해서도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더라고요. 예컨대, 청소년인권활동가분의 경우 이 드라마가 여전히 '좋은 교사'의 헌신에 기대어 학교라는 거대한 구조의 구멍을 메우려는 것 아닌가, 여전히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어요. 드라마에서 여전히 학생들은 어른들이 보듬거나 관리해야 하는 대상이지 문제를 함께 해결해 갈 주체로서 그려지지 않고 있다는 거지요. 이와 달리 정인재 교사와 같이 문학 교과를 가르치는 선생님의 경우 입시로 갈갈이 분절된 학교의 모습에 많이 공감하시더라고요. 또, 학교를 자퇴한 오정호가 승리고로 돌아오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오정호가 다닐 수 있는, 오정호에게 맞는 학교가 더 만들어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기도 하시고요. 기간제 교사인 한 선생님은 다른 것보다도 정인재의 곁에 있던 동료 교사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에게도 그런 동료 교사들이 있었으면 좋겠단 이야기를 하셨어요. 대개 학교를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선 비슷한 의견을 보이시는데 각각 중요하게 보거나 생각하신 부분들은 이렇게 다양했습니다.

 

반디 |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에는 교육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을 구체화하고 심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의 《자발적 복종》,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 등-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 외에 진정한 교육이 무엇인지를 고심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 있을까요?

 

 

벗 | 기존의 학교나 교육에 대한 상이나 교사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꾀할 수 있는 책들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교사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무지한 스승》(자크 랑시에르), 《침묵으로 가르치기》(도널드 L. 핀켈) 등을 소개해 드리고 싶구요, 학생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교사라면 《아동의 탄생》(필립 아리에스)을, 성과 사회에서 자기계발과 책임론에 시달리고 있는 분들에게는 《피로사회》(한병철),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한윤형 외), 《긍정의 배신》(바버라 에런라이크) 등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현대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위기, 신자유주의와 생태 문제 역시 교육과 무관한 문제가 아니기에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 통찰력 있는 질문을 던지는 이반 일리치와 웬델 베리의 책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반디 |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이나 《이것은 교육이 아니다》와 같은 책이 일반 독자와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매개한다면, 그 바탕에는 2011년에 창간한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이 있는데요. 조합원이면서 실제 교직에 계신 분들 다수의 글이 게재되는 것으로 압니다. 기고와 참여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요?

 

벗 | 처음부터 《오늘의 교육》을 조합 매체로서 성격을 규정하고, 조합원들의 집단지성으로 함께 만들어 가려고 했지만 쉽게 않은 게 사실입니다. 모든 조합원들이 적극적 필자로 참여하는 것도 너무 이상적인 바람알 뿐이고, 편집위원회와 조합원 사이의 소통도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의 교육》을 공부할 거리로 생각하는 조합원들이 많고, 그저 소극적 독자로서 위치에 만족하는 조합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지역의 읽기모임들이 활성화되면서 적극적인 소통의 통로들이 만들어지고 있고, 조합원들이 직접 현장의 교육 문제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증언자로서 글쓰기에 참여해야 한다는 초기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반디 | 《고래가 그랬어》라는 월간지를 재밌게 본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단위에서 교육 운동을 하고 있는 김규항씨가 만든 어린이 교양지죠.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화두를 던지는 컨텐츠가 돋보이는데요. '교육공동체 벗'도 이처럼 아이들을 주독자로 겨냥(?)한 출판물 계획이나 희망사항을 가지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벗 | 그동안 벗에서는 ‘청소년 벗’ 시리즈로 《생각해 봤어? 인간답게 산다는 것》과 《외면하지 않을 권리》를 냈습니다. 의도했다기보다는, 벗에서 하는 활동의 결과물들이 자연스럽게 엮인 것인데, 아마 어린이책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교육에서 어린이, 청소년들을 어떻게 자기 삶의 주체로 살아가게 할 것인가는 영원한 화두일 수밖에 없고, 그런 고민들이 자연스럽게 어린이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반디 | 이 나라의 교육 현실이 많은 문제를 껴안고 있다 보니, 책은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주제를 다루게 됩니다. 책을 만들 때 특히 심혈을 기울이는 면도 생길 것 같고요. 한 출판사로서도, 편집자 개인으로서도 소신 없이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에게 '교육공동체 벗'이란? 하고 질문 받으면 무엇이라고 답하실는지요.

 

벗 | 벗은 좀 특별한 출판사입니다. 주력하고 있는 영역을 교육출판이라고 규정짓는다면 그중에서도 ‘출판’보다는 ‘교육’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출판 편집자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 교육운동의 한 주체로서 정체성도 있는 것이지요. 좋은 교육이 좋은 삶에 대한 고민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처럼, 좋은 책 역시 좋은 삶에 대한 고민과 함께 가는 것 같습니다. 벗은 일터이자 삶터이고, 내 일이 내 삶과 내 정체성을 배반하지 않는 곳입니다. 

 

반디 | 4월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날이 가고 달이 가며 계절이 바뀌어도 학교를 배경으로 한 아이들, 학부모, 선생님은 모두 언제나 바쁘기만 한 것 같은데요. 하지만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꼭 챙겨봤으면 하는 '교육공동체 벗'의 책을 세 권만 권해주신다면요? 

 

벗 | 어려운 질문인데요. 물론 모든 책이 주옥같지만(^^) 세 권만 꼽으라면 《나는 왜 교사인가》,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 《수업-누구나 고민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을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왜 교사인가》는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교사인 필자가 현장의 여러 교사들을 인터뷰한 책인데, 교사로서 실존적 고민을 인간적으로 탐구한 책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야말로 모든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불온한 교사 양성 과정》은 벗에서 자신 있게 내놓는 우리 시대 교사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비/교사의 목소리로 교육은 무엇이어야 하는지, 교사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선명하게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수업-누구나 고민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를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수업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담은 책인데, 역설적이게도 교사가 수업을 잘하는 기능인일 수만은 없는 이유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교사로서 나를 성찰하고, 교육을 다시 생각하고, 수업에 대한 혜안까지 얻는다면 한 학기를 버텨 나갈 에너지가 가득 충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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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젊은 시인들, 셋 : 완전히 다른 무엇 되기 - 《에듀케이션》의 시인 김승일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제공 | 고함20

 

사람은 무엇이 되려고 합니다. 무엇이란 대개 직업을 뜻하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수입이 안정적인 공무원이 된다거나, 화려하게 주목받는 연예인이 된다거나, 실력을 갈고 닦아 요리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타인의 삶에서 일찌감치 보아온 무엇들이죠. 사람은 이렇게 무엇이 된 타인처럼 살아갑니다. 확률만 따져 봐도 무엇이 되기보다 무엇이 되지 않기, 즉 완전히 다른 무엇 되기가 더 희박한 일입니다. 헌데 저는 그 길을 가겠다는 한 사람을 압니다. 바로 김승일 시인이에요. 이번 젊은 시인들과의 인터뷰에서 마지막으로 만나 보았는데요. 어쩌면, 어쩌면요. 우리는 완전히 다른 무엇을 이미 마주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들어 보시죠. 김승일 시인의 이야기입니다.

 

 

 

반디 | 첫 시집을 낸 시인이 되셨습니다. 막 등단을 했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일 것 같습니다. 이후는 시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보다 더 먼 타인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할 테니까요. 느낌이 어떠신지요?

 

김승일 | 자 그러면 이제 시집을 낸 시인으로서 시집을 또 내고 시집이나 또 내고 그렇게 늙어 죽을 때까지 살면 되겠구나 싶어요. 저는 시 쓰는 게 제일 좋거든요. 출판사가 내 시집 내준다고 하면 감사하고, 또 감사해하면서 그렇게 살고 싶어요. 그러면 훌륭한 거장이 될 수 있겠죠? 느낌이 어떨까요. 수많은 느낌이 여기에 있네요.

 

반디 | 시집 제목을 짓거나 시의 수록 순서를 구성하는 것은 시인이 직접 한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책에 비하면 기획자이자 편집자의 역할까지 하는 셈인데요. 어떤 의미로 붙인 제목인지, 어떤 주제로 시집을 구성했는지 궁금합니다.

 

김승일 | 사실은 시집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저는 제 이름도 마음에 들지 않거든요. 시집 제목을 내가 정하긴 했지만 더 좋은 제목이 있었을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정한 것 같지도 않아요. 시간이나 운명이 시집 제목을 지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시간이 나한테 이렇게 명령을 한 거죠. 교육으로 해 교육, 교육은 항상 중요하잖아, 한국말로 하지 말고 영어로 해 영어. 그래서 에듀케이션이 된 것 같아요. 시의 수록 순서는 내 친구 최원석하고 같이 읽어보면서 뭐가 뭐 앞에 가면 좋을까 고민하였어요. 한 2시간 걸렸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집 만드는 데에도 엄연히 편집자가 있어요. 편집자 누나가 짱이에요.

 

   내 방에서 만들었지 딸아이 방을. 훔쳐봤어 내 방에서 딸아이 방을. 밀려왔다 밀려가는 벽이 있는 방. 나랑 같이 건너가자 딸아이 방에. 답장 없는 편지를 자꾸만 썼다? 아니야, 괜찮아 나는 쓸 거야. 하루에 한 통씩 쓰고 싶어라. 초대장은 원래 그런 거잖아?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 거잖아?

 

- ‘에듀케이션’ 중에서(《에듀케이션》, 문학과지성사, 2012)

 

반디 | 글을 쓴다는 것은 타인과 통하는 어느 순간을 전제합니다. 첫 시집이고, 그래서 더 타인의 반응이나 감상이 궁금할 것 같습니다. 조금은 내밀한 질문이 되겠는데요. 검색창에 본인의 이름이나 시집 제목을 검색해본 적이 있나요? 혹은 리뷰나 평론 등을 부러 찾아보거나, 어땠느냐고 주변에 직접 물어본 적이 있나요?

 

김승일 | 저는 맨날 맨날 검색해요. 최근엔 이 링크에 들어가서 보았는데요. 들어가서 보시면 알겠지만 “씨발 김승일 시집은 제목부터 3류”라고 써 놓았어요. 이 사람은 저저번주에 “이준규가 짱이고 박성준도 더 읽어보아야 하는데 김승일은 너무 과대평가 되었다”라고 써 놓았어요. 그 글은 지웠더군요. 저 링크도 언제 폭파가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저렇게 저보고 “씨발 김승일”이라고 그러면 저는 마음이 참 아파요. 제가 욕을 먹고 다니는 걸 알면 우리 엄마도 슬플 것 같아요. 제 애인도요. 그리고 제 친구들도요. 어쩌면 시인 친구들은 좋아할 수도 있겠군요. 제가 과대평가 받았다고 욕을 먹으면 제 시집은 덜 팔리고 자기들 시집이 더 잘 팔릴 수도 있으니까요. 욕을 많이 먹으면 오래 살까요? 어쨌든 여든 살까지는 살고 싶어요.

 

반디 | 무어라 느끼든 그 사람의 자유라지만 내 시에 대한 모든 감상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 반대로 글쎄다 싶은 반응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김승일 | 이 시대의 평론가들은 시인보다 시를 더 잘 아는 것 같아요. 저는 리뷰하는 블로거나 평론가들이 죄다 그냥 시를 썼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보다 잘 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저보다 좋은 시를 많이 쓰면 저도 그 사람들보다 멋진 시를 쓰려고 지금보다 더 노력할 수 있겠죠? 생각만 해도 기대가 되어요.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어요. 마음에 안 들었던 이야기? 대부분의 이야기가 마음에 쏙 들지는 않았어요.

 

   축하해, 너 시인 됐더라? 읽었어, 너다운 시를 쓰더라? 그리고 너는 이제 끄덕이겠지. 문학을 포기한 사람들에게. 이해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아량을 베풀겠지 이해하니까.
   있잖아, 근데 너 까먹었잖아? 네가 나랑 어떻게 헤어졌는지. 모르잖아. 모르면서 시 쓰는 거니?

 

   문학을 포기한 사람의 시점을 통해. 뭘 말하고 싶은 거니? 용서받을래? 도대체 뭘 용서받고 싶다는 거야.
   위로하고 싶은 거니? 네 선생님을? 재밌어? 재밌으면 지어내도 돼? 선생님, 더는 못 쓰겠어요. 더는 못하겠어요. 선생님인 척.

 

   뭘 뜻할 수 있는 거죠? 우리의 이별. 선생님이 아직도 과외 한다고. 누가 말해줬어요. 유명하다고.
   왜 계속하는 거죠. 수학 과외를! 선생님 시 쓰세요! 시를 쓰세요! 남들 시를 보는 걸로 만족한다고, 만족을 하신다고 그러셨지만. 믿을 수가 없었어요. 못 믿었어요.

 

- ‘펜은 심장의 지진계’ 중에서(《에듀케이션》, 문학과지성사, 2012)

 

반디 | 시를 쓰는 시인이면서, 극작과 전공자로 희곡을 쓰기도 하실 것 같습니다. 《에듀케이션》을 보면 떠오르는 말들을 모노드라마의 연기자처럼 풀어 놓는 화자가 있거나, 예컨대 ‘같은 부대 동기들’과 같은 시는 상황극이나 소설 속에서 툭 떼어온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시 쓰기-희곡 쓰기가 시작(詩作)에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을까요? 실제로 어떠한지요.

 

김승일 | 네. 저는 희곡을 쓰는 게 좋아요. 시를 쓸 때는 괴롭습니다. 희곡을 쓸 때는 왠지 흥분이 됩니다. 지금처럼 인터뷰를 하는 것도 재밌어요. 희곡을 쓰는 것 같거든요. 대화를 이어나간다는 것. 무언가를 지속하고, 계속한다는 것. 저는 그것이 예술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시도 약간 독백, 방백, 독백처럼 쓰여지는 거겠죠? 요즘에는 희곡을 잘 쓰지 않았는데요. 이제 좀 많이 써보려고요. 그러면 흥분되겠죠? 그 흥분된 상태를 유지하면서 시를 쓰면 시가 더 잘 써질 것 같아요.

 

반디 | 작가님의 시들은 비판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그저 “’에듀케이션’의 공백 상태’를 무심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작가님을 두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기성의 가치를 수호하는 에듀케이션의 효력이 붕괴된 교실에서 무엇을 배워야할지 알 수 없는 학생처럼 앉아 있다”고도 표현했는데요. 가르칠 것도 배울 것도 없는 시대, 그 안에 살고 있는 학생들의 ‘성장’, 어떻게 보시나요?

 

김승일 | 음, 먼저, 저는 신형철 평론가님이 시인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신형철 평론가가 시인으로서, 기성의 가치를 수호하는 에듀케이션의 효력이 붕괴된 교실에 앉게 된다면. 그러면 어떤 시를 쓰실 수 있을까? 저는 그게 너무 궁금해요. 지금의 저는 교실 안에 앉아있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네요. 사후세계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사후세계의 교실로 가고 싶어요. 그 세계의 교실은 어떤 교실일까? 저는 그게 궁금하네요. 그 교실에 시인이 앉아있다면 그 교실의 시인에게 묻고 싶군요. 무슨 생각을 하니. 무엇을 배우고 있니? 그러면 저는 그걸 받아 적거나 그 시인의 시를 평론하는 평론가가 되어보고 싶군요. 사후세계의 평론가가 되고 싶어요. 아, 사후세계는 제 리그 오브 레전드(온라인 게임) 아이디입니다. 저는 이 시대의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이 시대의 학생들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만나기로 했던 너를
   못 만나고
   쓴다,
   가까이 가고 싶은가?

 

   당신에게 주려고
   나는 썼지만
   주고 싶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죽어도,
   발표하지 않을 작품을
   내가 썼지
   만나고 싶은 사람아

 

   누구일까?
   만나기로 했던 당신은

 

   무엇일까?
   질문이 원하는 답은

 

- ‘만나요’ 중에서(《에듀케이션》, 문학과지성사, 2012)

 

반디 | 시를 읽을 때는 이 시가 있었을 순간에 대해 상상하게 됩니다. 시를 쓰는, 혹은 내가 시와 만나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상황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처음 시와 만났을 때의 기억이나 일상적으로 시를 쓰는 모습을 그림 그리듯 묘사해 주신다면요?

 

김승일 | 어떤 시를 쓸지 맨날 생각한다. 맨날 맨날 아주 많이 생각한다. 생각을 많이 하면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된다. 김승일은 생각을 아주 아주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 저녁 8시쯤에 카페에 간다. 시를 쓴다. 시를 지운다. 다시 쓴다. 민정기 최원석 황인찬에게 전화를 한다. 가끔 이지영에게 전화를 한다. 시를 읽어주고 시가 좋은지 안 좋은지 물어본다. 다시 시를 쓴다. 새벽 4시에서 5시다. 이렇게 씁니다.

 

반디 | 어떤 시는 특정한 이미지를 연상케 합니다. 시인에게는 관념적인 것이 이미지가 되기도 하고, 이미지가 자신의 이야기를 불러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영향을 받은 적이 있으신지 궁금한데요. 요즘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진이나 그림, 기억의 잔상, 꿈의 이미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김승일 | 저는 이미지가 싫습니다. 이미지는 보통 상징을 가지기 쉬운데 저는 상징을 싫어합니다. 저는 상징을 싫어하는 사람의 상징입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제 이미지입니다. 저는 그 이미지를 고수합니다. 언제까지 고수할까? 그건 몰라요.

 

반디 | 혼자 쓰는 것이 글이지만, 또 같이 쓰고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동력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많은 시인들이 동인이나 이런저런 소모임을 가진다고 알고 있는데요. 참여하고 계신 활동이 있다면 무엇인지, 누구와 함께하고 계신지, 어떤 식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계신지 소개해주세요.

 

김승일 | ‘는’이라는 동인을 하고 있습니다.

 

반디 | 이번에 함께 인터뷰하게 된 다른 시인 분들(이혜미 시인, 황인찬 시인)을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승일 | 황인찬은 아름다운 시인이지요. 그래서 황인찬의 삶과 시가 아름답지 않게 되면 어떤 시가 세상에 나올지 무척 기대가 되어요. 지금은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사랑에 빠집니다. 제가 만약 두 번째 시집을 내게 된다면 황인찬이 제 해설을 써주었으면 좋겠습니다. 황인찬은 싫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로 두 번째 시집을 내게 된다면 황인찬도 좋다고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리고 이혜미가 저번 인터뷰에서 제가 또라이라고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 엄마 아빠가 무척 화가 났습니다. 맥락상 그냥 좀 특별한 애였다는 거였는데. 엄마랑 아빠는 제가 또라이 소리를 들어서 너무 싫었던 것 같습니다. 이혜미는 또라이가 아닙니다. 또라이가 아니라서 참 좋겠다. 저도 또라이 아닙니다.

 

반디 | 친구로서, 글을 함께 쓰는 문우로서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면 선생님으로서 존경하는 시인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열패감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준 예술가를 독자 분들에게도 열렬하게 소개해 주세요.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

 

김승일 | 저는 영화감독 헤어조크*를 좋아합니다. 열렬하게 소개해 달라고요? 열렬하게 좋아합니다. 저는 뭐든 빨리 지루해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헤어조크는 항상 좋아했습니다. 한번도 지루해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사람을 존경합니다. 그 사람을 존경하는 나 자신을 존경하기 때문에 헤어조크를 존경합니다. 시인도 존경해야 하나요? 그러면 누구를 존경해야 할까? 모르겠어요. 시인이면 다 존경합니다. 시인이면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헤어조크도 자기가 시를 가슴에 품고 있다고 자주 말하더군요. 시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 친구 민정기를 존경합니다. 최원석도 존경하고 박성준도 존경합니다. 아 맞다 황인찬도 존경합니다. 얘들이 저보다 인간이 잘났습니다. 엄마 아빠도 존경합니다.

 

* 베르너 헤어조크는 1942년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다. 바바리아 지방의 깊은 산 속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지낸 그는 십대가 되어서야 영화를 접했다. 혼자서 영화를 공부한 그는 15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썼고 20살에 용접공으로 일해 번 돈으로 첫 단편영화 ‘헤라클레스’를 만들었다. 1968년 크레타 섬으로 가 장편 데뷔작 ‘사인즈 오브 라이프’를 만들어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아귀레, 신의 분노’, ‘피츠카랄도’, ‘카스퍼 하우저의 비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2012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그의 최근작 ‘데스 로’를 상영하였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반디 | 이번 인터뷰는 ‘젊은 시인’이라고 불리는 분들과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요즘 문단에서는 흔히 80년대(말) 출생 시인을 젊다고 칭하고, 독자들도 그렇게 인식하는 편이죠. 사실 십 년 전이나 오십 년 전, 아니 백 년 전에도 그 시대의 ‘젊은 시인’은 있었을 텐데요. 그렇게 따지면 유통기한이 있는 수식어입니다. 본인에게 ‘젊은 시인’이라는 이 말, 젊다는 유통기한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김승일 | 내가 무슨 마트에서 파는 요플렌가 싶네요. 애초에 예술가라는 게 상품성이 있냐 없냐로 판가름 되면 안 되는 겁니다. 자꾸 돈돈거리니까 예술하면 멋도 있고 돈도 쪼끔 되나보다 싶어서 재능도 없는 사람들, 평생을 바치지도 않을 사람들이 등단하면 젊은 시인이 되는가보다, 늙으면 교수도 할 수 있나보다 싶어서 등단등단 거리는 거 아닙니까? 사람들이 꿈꾸는 것을 꿈꾸었던 나 자신이 개탄스럽습니다. 완전히 다른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

 

반디 | 봄입니다. 여름도, 가을도, 다시 겨울도 올 테죠. 다가올 계절을 대하는 나의 자세와 시인으로서 올해의 작업 계획을 들려주세요. 더불어 나의 첫 시집을 읽을 독자 분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승일 | 돈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서 돈을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 돈으로 건물을 하나 짓고 회사를 만들 것입니다. 돈 없는 사람들을 위해 돈을 벌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돈 없는 사람들한테 줄 것입니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가 밀어만 준다면 제 시를 번역해서 세계에 삐라처럼 뿌릴 것이고 당연한 반응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겠습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수상소감문은 한국말로 읽겠습니다.

 

   실외기가 한동안 시끄러웠다. 타당하고 불가피한 고전 작품을 실외기 밑으로 떨어뜨리고.

 

   김승일은 영원히 말이 없었다.

 

   가볍게

 

   툭 건드리자, 그것은 서서히 기울어졌다. 나보다 비장한 실외기 위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 순식간에 1층으로 내려갔었다.

 

   여기 어딘가에 떨어져 있는 불가피한 고전을 내가 쓰려고.

 

- ‘2011년 6월 23일’ 중에서(《에듀케이션》, 문학과지성사, 2012)

 

김승일

 

1987년 경기도 과천에서 태어나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를 졸업했다. 2009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시단에 나왔다. ‘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또 다른 시인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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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젊은 시인들, 둘 : 만져지지 않는 세계 속으로 - 《보라의 바깥》의 시인 이혜미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제공 | 창비

 

당신은 이 글을 읽을 것입니다. 뭔가 앞에 나타나면 쳐다볼 테고, 누군가 소리 높여 부르면 대답할 것입니다. 이것들을 감각하는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요. 이렇듯 한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만, 이 세계가 당신 세계의 전부일까요? 자신에게 읽히지 않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허상인가요? 이혜미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해요. 잠자리의 겹눈이 보는 세계나 나비가 인식하는 꽃의 색깔을 함께 볼 수 없다는 것이죠. 조금이나마 시를 통해 그런 지점을 엿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라고요. 용케도 당신은 이 마음이 깃든 첫 시집을 가질 수 있습니다. 궁금했던 것을 물어볼 수도 있고요. 질문은 지난번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세계가 다른 만큼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리라는 것, 잘 아실 겁니다. 이번에는 만져지지 않는 세계를 탐구하는 시(詩)의 길로 접어들어 봐요!

 

* 인터뷰 사이마다 게재된 그림은 이혜미 시인이 소개한 화가 '레오노르 피니'의 작품입니다.

 

 

반디 | 지난 2011년에 첫 시집을 낸 시인이 되셨습니다. 막 등단을 했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이후는 시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보다 더 먼 타인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할 테니까요. 느낌이 어떠하셨는지요?

 

이혜미 | 허우적거리다 부여잡을 수 있는 부표 하나 띄워놓은 기분입니다.

 

반디 | 시집 제목을 짓거나 시의 수록 순서를 구성하는 것은 시인이 직접 한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책에 비하면 기획자이자 편집자의 역할까지 하는 셈인데요. 어떤 의미로 붙인 제목인지, 어떤 주제로 시집을 구성했는지 궁금합니다.

 

이혜미 | 시집을 열었을 때 만나게 될 첫 시와, 닫고 나가는 마지막 시를 먼저 정했어요. 처음과 끝에 배치할 시를 고르면서 가장 중요시했던 것 역시 처음의 문장과 끝의 문장입니다. 시집 맨 앞에 실린 시의 첫 문장은 “어떤 문장들은 사라지기 위해 태어납니다”(10쪽, ‘얼음편지’ 중에서)이고,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의 마지막 문장은 “그러니 함께, 멀리로 가자/아름다울 몫이 남아 있다”(95쪽, ‘투어(鬪魚)’ 중에서)입니다. 사라지는 것으로 시작하여 남아 있는 무언가를 만지며 끝내고 싶었습니다.

 

그 후에는 1부의 처음과 끝, 2부의 처음과 끝, 3부의 처음과 끝… 이런 식으로 정해나갔습니다. 처음과 마지막을 정하면 그 중간은 자연스럽게 구성되었던 것 같아요. 시마다 나름의 묘한 리듬들이 있어서, 같이 붙여 보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있고 시너지가 생겨나는 것들이 있는데 그런 것들을 잘 배치하는 과정이 중요했습니다.

 

   이제야 나는 이곳에 도착한 것이다
   눈을 감고
   몸 안을 떠다니는 흐린 점들을 바라본다
   발밑으로 빛의 주검들이 흘러내렸다

 

- ‘보라의 바깥’ 중에서 (《보라의 바깥》, 창비, 2011)

 

제목은 처음부터 《보라의 바깥》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예전부터 잡을 수 없는 것, 사라지는 것, 우리의 가시(可視)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식물이나 동물들에 대한 집착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에요. 우리가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들을 엿보고 싶은 욕심이 있어요. 메커니즘이 다르고 주어진 환경이 다른 것들이 빚어내는 감정이라든가 느낌들.

 

그래서 ‘이종(異種)의 시선으로 보는 인간’이라는 모티브를 좋아해요. 인간은 저들끼리 미추를 나누고 위계를 정하고 재단하고 규정하지만, 실은 조금만 멀리서 보면 부질없는 짓이거든요. 예를 들면 전체가 가스로 이루어진 목성이나 토성 같은 곳에 지적 생명체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의 생존 방식은 우리와 완전히 판이하겠죠. 의식주(이 개념 자체도), 예술,문화, 사랑이나 번식의 방식 등…… 아무튼 간에 목성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주변에는 다른 종들이 넘쳐나고, 우리는 그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해요. 잠자리의 겹눈이 보는 세계나 나비가 인식하는 꽃의 색깔을 함께 볼 수 없다는 것이죠. 조금이나마 시를 통해 그런 지점을 엿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반디 | 글을 쓴다는 것은 타인과 통하는 어느 순간을 전제합니다. 첫 시집이고, 그래서 더 타인의 반응이나 감상이 궁금할 것 같습니다. 조금은 내밀한 질문이 되겠는데요. 검색창에 본인의 이름이나 시집 제목을 검색해본 적이 있나요? 혹은 리뷰나 평론 등을 부러 찾아보거나, 어땠느냐고 주변에 직접 물어본 적이 있나요?

 

이혜미 | 다들 해보지 않을까요?^^ 나랑 동명이인이 무슨 일들을 하는지 막 다 알고 있고…… 시집 나왔을 때보다 오히려 나오기 전에 더 많이 찾아봤던 것 같아요. 발표했던 시들이나 인터뷰가 올라와 있으면 기쁘죠. 거기서 뭔가 확신이나 지표를 얻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까 시집이 일종의 부표 같다고 했었는데, 시집을 갖게 되면서 그런 불안이라거나 인정투쟁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반디 | 무어라 느끼든 그 사람의 자유라지만 내 시에 대한 모든 감상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 반대로 글쎄다 싶은 반응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이혜미 | 가장 기억에 남고 자주 이야기하는 평인데, 류흔 시인이 제 시집에 실린 ‘어비목’이라는 시를 소개하면서 짧은 단평을 달아주신 것이 있어요. 마지막 문장이 이랬어요. “이 시를 읽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비뇨기과에 가 보시라”. 끝내주죠! 들었던 평 중에 가장 강력하고 기쁜 평이었어요. 마음이 동(動)한다는 말도 그렇고, “비뇨기과”라는 단어가 시평에 등장할 수 있다니 너무 신선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시는 참 추상적이고 잡히지 않는 것인데, 물리적이고 구체적으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무엇이 될 수도 있다는 거죠.

 

   음악의 종지를 알리는 검은 가슴마다

 

   고백과 고문이 서로 앉을 자리를 겨루었고

 

   엇대인 두 아가미가 투명한 회문(回文)으로 얽혀들면

 

   아직 아무것도 피어나지 않는 이음새의 시간

 

- ‘어비목(魚比目)’ 중에서 (《보라의 바깥》, 창비, 2011)

 

반디 | 《보라의 바깥》에서 일관되게 느껴지는 정서는 본래의 나에게 변화가 생기는(뭔가를 잃어가는) 상태입니다. 젖은 것이나 달과 같은 이미지가 그렇고, ‘시인의 말’에서는 “사라졌던 내 어깨”의 기억을 이야기하고도 계신데요. 세상의 변화하는 것들(혹은 나)에 민감하게 열려 있는 시편들이 아닌가 합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변화, 그리고 나의 변화란 어떤 것인지 부연해 주신다면요?

 

이혜미 | 앞서도 이야기했듯 ‘사라지는 것’에 대한 천착이 좀 있어요. 순간순간들이 흘러가고 곧 흩어져 버리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것들을 붙잡아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 시를 이루는 중요한 축이 된다고 생각해요.

 

‘젖는 것’이 무언가를 잃어가는 것이라는 말이 맘에 드네요. 휘발되고 증발하면서 잃어버리는, 혹은 그럼으로써 얻어지는 것들이 있지요. 그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는 과정 그 자체를 붙잡고자 하는 것에 가까워요.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경험을 누구나 해본 적 있을 텐데, 저에게는 그 경험이 상당히 쓸쓸하게 다가왔던 것 같아요. 더불어 인생의 한 순간이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생각도 했죠. 부재(不在)로서 존재하는 방식은 시의 은밀함과도 관련이 있겠고요.

 

   서로의 어두운 입술을 나누며
   나는 그의 몸속으로 환하게 흐르는
   빛의 강을 상상한다

 

- ‘한 마리의 어둠’ 중에서 (《보라의 바깥》, 창비, 2011)

 

반디 | “우리는 타인 안에서 자신의 빛나는 지점을 찾기 위해 온 생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본질적으로 빛은 모든 색(色)을 포함하고, 보는 이에 따라 또 각도에 따라 제각각의 색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작가님은 타인에게서 어떤 ‘색’으로 빛나고 싶으신지요.

 

이혜미 | 어차피 사람은 자기 안의 거울로 상대를 되비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뿐일지도 모르죠. 서로가 가진 거울이 마주볼 때 끊임없이 서로를 비추고, 그 속에 끝없는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이고요. 타인이 저를 어떻게 보고 느끼든 그것은 자신이 가진 색의 발로이지 저라는 사람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것일지 몰라요.

 

“파랑은 파랑이 아니다”라는 명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파랑이라고 일컫는 색의 스펙트럼 속의 한 단면은 실은 하나의 색으로 정확히 분리해낼 수 없이 뒤섞여 있는 무엇이죠. 우리의 규정과 범주화로 추상적인 층위에서 ‘파랑’이라는 관념이 되어 있는 거예요. 게다가 파랑색을 띄는 사물들이 파랑으로 보이는 이유는 사실 파랑을 제외한 모든 색을 흡수하고, 파랑색만을 튕겨내고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 튕겨낸 색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고. 실은 사물에게서 가장 거부당한 색인 거죠. 그렇다면 ‘파랑색 셔츠’라고 부를 게 아니라 ‘파랑이 아닌 모든 색인 셔츠’라고 불러야 타당하지 않을까? ‘초록 나뭇잎’은 실은 ‘초록만은 되고 싶지 않았던 나뭇잎’이 아닌가? 짧은 과학적 지식만 들이대어도 이런 식의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되지요. 중요한 건 상대적인 관점,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반디 | 시를 읽을 때는 이 시가 있었을 순간에 대해 상상하게 됩니다. 시를 쓰는, 혹은 내가 시와 만나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상황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처음 시와 만났을 때의 기억이나 일상적으로 시를 쓰는 모습을 그림 그리듯 묘사해 주신다면요?
  
이혜미 | 시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별로 낭만적인 풍경은 아니라서... ㅎㅎ 중학생 때였던가? 우연히 나가게 된 백일장이었어요. 시나 산문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써야 했는데 시가 분량이 적으니까 빨리 쓰고 놀려고 시를 선택했죠.

 

‘개나리’가 주제였는데 담장 위의 개나리가 노란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며 썼어요. 쓸 때는 몰랐는데 그 후가 재미있어요. 지나다니면서 개나리를 볼 때마다 그날 썼던 내용들이 생각나는 거예요. 분명 내가 써낸 것인데 그거에 다시 내가 영향 받고 포섭된다는 게 굉장히 신기했어요. 내 안에서 ‘개나리’라는 사물이 비로소 규정되고, 재구조화된 느낌이었죠.

 

   언니, 우린 분명히 교묘히 어긋난 한 사람일 거야. 딸기의 어수선한 초록 왕관을 쓰고 이불 속에서 첫 몽정을 말하던 아침에. 땀구멍마다 질긴 씨를 하나씩 슬어놓으며 우리는 함부로 은밀해지고 조금씩 말랑해졌지. 반투명 젤리 속 일렁이는 둘만의 왕국에서.

 

- ‘딸기잼이 있던 찬장’ 중에서 (《현대시 2012년 4월호》에 게재)

 

반디 | 어떤 시는 특정한 이미지를 연상케 합니다. 시인에게는 관념적인 것이 이미지가 되기도 하고, 이미지가 자신의 이야기를 불러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영향을 받은 적이 있으신지 궁금한데요. 요즘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진이나 그림, 기억의 잔상, 꿈의 이미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이혜미 | ‘딸기잼이 있던 찬장’ 같은 시들을 쓸 때 레오노르 피니의 그림을 많이 봤습니다. 이미지를 그렇게 직접적으로, 또 깊이 바라보고 시와 접목시켜 본 일은 처음이어서 상당히 인상적인 느낌으로 남아 있어요. 피니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아름다운 화가죠. 보여 드리는 그림 외에도 좋은 것들이 많으니 꼭 찾아보시길 바랄게요. 이차적 텍스트인 시가 이르기 어려운 경지를 회화는 간단히 극복해 버리는 일이 많아요. 부럽고 질투 나는 지점이지요.

 

 

반디 | 혼자 쓰는 것이 글이지만, 또 같이 쓰고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동력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많은 시인들이 동인이나 이런저런 소모임을 가진다고 알고 있는데요. 참여하고 계신 활동이 있다면 무엇인지, 누구와 함께하고 계신지, 어떤 식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계신지 소개해주세요.

 

이혜미 | 요즘 동인 많이들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뻔한 이야기지만, 시는 혼자밖에는 방문할 수 없는 지극히 깊숙하고 먼 공간에 있다고 생각해요. 글 쓰는 동료들을 만나 술 마시고 이야기할 때에도, 서로 시 얘기는 잘 꺼내지 않는 것 같네요. 아쉽기도 하지만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반디 | 이번에 함께 인터뷰하게 된 다른 시인 분들(김승일 시인, 황인찬 시인)을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혜미 | 두 시인 모두 인상적인 첫 시집을 가졌다는 것과, 정말 문학 하게 생긴 남자들이라는 점이 공통점이군요. ㅎㅎ 김승일 시인은 고등학교 때 같은 반에서 공부했었는데, 상당한 또라이라고 생각했어요. 말투나 행동이 다 특이했었으니까. 지금은 그때보다 많이 마주치지 못해서 아직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정상적인 톤의 사람이 되어 있다면 살짝 아쉬울 듯? 그렇게 특이하고 재미있는 것도 귀한 재능 중 하나니까요. 황인찬 시인은 의외로 젠틀한 이미지로 남아 있어요. 전화 통화 할 때의 조심스런 말투 같은 것들이 기억에 남네요.

 

반디 | 친구로서, 글을 함께 쓰는 문우로서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면 선생님으로서 존경하는 시인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열패감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준 예술가를 독자 분들에게도 열렬하게 소개해 주세요.

 

 

이혜미 | 각각의 문학들로 따지면 어느 시인이든 존경하고 배울 지점이 있지요. 저는 그것보다는 약력 속에 숨은 그 사람의 내력을 보는 편입니다. 시집을 몇 년 텀으로 내는가, 산문집을 냈다면 어떤 것을 냈는가, 무슨 시기에 어떤 활동들을 했으며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였는가. 그런 것들을 찬찬히 보면서 그 사람의 고민이나 선택들을 음미해보는 거죠.

 

오래도록 글을 쓰는 지구력 같은 것에 특히 감탄하는 편인데요. 꾸준하고 오래도록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을 보면 부럽고 존경심을 가지게 됩니다. 폴란드의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1945년에 등단해서 88세로 별세한 2012년까지 계속해서 창작을 이어갔고, 말년으로 갈수록 더 좋은 시들을 써냈어요. 《끝과 시작》(1993), 《순간》(2002), 《콜론》(2005) 등의 시집은 세월을 꿰뚫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시선으로 생과 순간들을 통합해내죠. 그건 젊은 감각만으로는 절대 이를 수 없는 경지에요. 오랜 시간 문학 속에서 삶을 통찰해온 내력에서 비롯된 것이죠. 우리 문단이 주로 젊은 시인 위주로 돌아가고, 시인들의 좋은 작품들이 주로 젊은 시절에 나오는 것을 보면 안타까워요. 문학은 쌓여가는 세월의 집적 속에서 더 새로워지고 현명해질 수 있는 것일 텐데. 쉼보르스카를 보면서 그런 지점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죠.

 

 

반디 | 이번 인터뷰는 ‘젊은 시인’이라고 불리는 분들과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요즘 문단에서는 흔히 80년대(말) 출생 시인을 젊다고 칭하고, 독자들도 그렇게 인식하는 편이죠. 사실 십 년 전이나 오십 년 전, 아니 백 년 전에도 그 시대의 ‘젊은 시인’은 있었을 텐데요. 그렇게 따지면 유통기한이 있는 수식어입니다. 본인에게 ‘젊은 시인’이라는 이 말, 젊다는 유통기한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이혜미 | 처음 등단했을 때가 만 19세로 상당히 어린 편이었죠. 그 부분에 조명도 많이 받았고요. 제가 등단할 때까지만 해도 주변에 또래가 없었어요. 지금에야 또래 시인도 많고 저보다 더 어린 친구들, 일테면 90년대생도 문단에 나오고 있잖아요. 이렇게 일군의 시인들이 등장해서 ‘젊은 시인’의 군락을 이루는 것을 보면 뭔가 묘한 기분이죠.

 

젊은 나이에 등단한다는 것이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많아요. 그러니 굳이 ‘젊은’이라는 수식어에 집착할 필요는 없죠. 기왕에 빨리 시작했다면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좋아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 시인의 성장을 지켜보는 과정 같은 거죠. 앞서도 말했지만 꾸준히 오래도록 쓰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젊은 시인’에서 ‘안 젊은 시인’이 되는 게 아니라, 한 사람의 좋은 시인이 되어가는 과정 자체를 바라볼 자세가 문단에도 독자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젊은’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잠시 소비되었다가 버려질 뿐이에요.

 

 

반디 | 봄이 오고 있습니다. 여름도, 가을도, 다시 겨울도 올 테죠. 다가올 계절을 대하는 나의 자세와 시인으로서 올해의 작업 계획을 들려주세요. 더불어 나의 첫 시집을 읽을 독자 분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혜미 | 연애합시다! ^^

 

   우리는 두 개의 날카로운 비늘, 아름다운 모서리가 남겨졌다

 

   아직은 목젖을 붉게 적시며 구체적인 오후를 꿈꾸고, 잃어버린 아가미를 찾아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우리의 기도는 한곳만을 고집스레 방향하는 일이니, 깊이 고인 맹목이라 해도 헛된 문장만은 아닐 것

 

   그러니 함께, 멀리로 가자
   아름다울 몫이 남아 있다

 

- ‘투어(鬪魚)’ 중에서 (《보라의 바깥》, 창비, 2011)

 

이혜미

 

1988년 경기 안양에서 태어났다. 건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2006년 중앙신인문학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9년 서울문화재단 문예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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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만난 사람] 젊은 시인들, 하나 : 완성된 문장을 가지기까지 - 《구관조 씻기기》의 시인 황인찬

 

편집·정리 | 컨텐츠팀 에디터 현선·희진
사진 제공 | 민음사

 

젊은 시인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저는 늘 묘한 조합이라고 여겨 왔습니다. 예컨대 ‘늙은 시인’이라고는 잘 말하지 않잖아요. 이건 듣기에 따라 좀 무례한 표현인 탓도 있겠지만, 육체나 정신의 노화가 따로 지칭할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늙어가는 건 당연하고, 이 당연한 일에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으며, 촉망 받아 마땅한 쪽은 한때라서 더 특별한 젊은 시절이니까요. 헌데요. ‘젊은 시인’이라고 불리는 한 사람이 말합니다. 이 젊음은 주어진 시절이나 한때에 불과하지 않다고요. 끝없이 갱신해 가야 하는 것이라고요. 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습니다. 그의 이야기에서 ‘젊은 시인’이라는 말의 바깥으로 뻗어 나가는 진짜 젊은 시인들을 봅니다. 황인찬 시인, 이혜미 시인, 김승일 시인을요. 4월 한 달 동안 이들을 만날 참입니다. 완성된 문장을 가지기까지 이들이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 걸어갈 시(詩)의 길, 동행하지 않으실래요? 황인찬 시인과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반디 | 첫 시집을 낸 시인이 되셨습니다. 막 등단을 했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일 것 같습니다. 이후는 시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보다 더 먼 타인과 만나는 시간이기도 할 테니까요. 느낌이 어떠신지요?

 

황인찬 | 처음으로 책을 받아 들었을 때 느낀 것은 일종의 낯섦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여전히 저의 책을 보면 약간의 이질감을 느낍니다. 시는 손에서 놓는 순간 저와는 전혀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버리는데, 한 권의 책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면서도 뭐라 단정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더 먼 타인과 만나는 것이라 질문을 하셨지만, 저에게 가장 먼 타인은 촌스럽게도 저의 책입니다.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 ‘구관조 씻기기’ 중에서(《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반디 | 시집 제목을 짓거나 시의 수록 순서를 구성하는 것은 시인이 직접 한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책에 비하면 기획자이자 편집자의 역할까지 하는 셈인데요. 어떤 의미로 붙인 제목인지, 어떤 주제로 시집을 구성했는지 궁금합니다.

 

황인찬 | 책의 제목을 정하는 데 가장 고생을 했습니다. 어떤 것이 책을 설명하는 가장 좋은 제목일까 친구들과 오래 고민을 해도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제목에 대한 어떤 생각도 나지 않게 되었을 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려보았습니다. 책을 설명하는 대신 책을 설명하지 않는, 책을 낯설게 하는 제목을 생각해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제목이자 책의 첫 시이기도 한 ‘구관조 씻기기’는 그전에는 제목으로 전혀 고려하지 않던 작품이었습니다. 반면 책의 구성은 비교적 쉬웠습니다. 등단 이후에도 저의 시는 조금씩 변화를 거쳤는데, 그 흐름과 변화를 드러내도록 고민하였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지금의 형태를 갖게 되었습니다. 가장 예전에 쓴 시들은 대부분 1부에 가고, 비교적 근래에 쓴 시들은 3부에 가는 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반디 | 글을 쓴다는 것은 타인과 통하는 어느 순간을 전제합니다. 첫 시집이고, 그래서 더 타인의 반응이나 감상이 궁금할 것 같습니다. 조금은 내밀한 질문이 되겠는데요. 검색창에 본인의 이름이나 시집 제목을 검색해본 적이 있나요? 혹은 리뷰나 평론 등을 부러 찾아보거나, 어땠느냐고 주변에 직접 물어본 적이 있나요?

 

황인찬 | 어떤 글을 가장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글을 쓴 사람 자신일 것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쓰기 전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지만 한 편을 써낸 후에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의견을 묻습니다. 가장 신뢰하는 동료들이자 독자인 친구들에게 의견을 묻고, 그들이 ok를 해줄 때까지 시를 다시 고치며 시집에 수록될 시를 묶었습니다. 리뷰와 평론의 경우에는 챙겨보기는 하지만 크게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이미 시가 저의 손을 떠난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디 | 무어라 느끼든 그 사람의 자유라지만 내 시에 대한 모든 감상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이야기, 반대로 글쎄다 싶은 반응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황인찬 | 달리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단순한 감상이든 평론이든 타당한 논리를 갖추고 있는 쪽을 좋아합니다. 타당한 논리를 갖춘 비판을 아무 의미 없는 칭찬보다 선호합니다. 저의 글을 꼼꼼하게 읽어주었다는 그 사실이 저에게는 가장 고마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으면 저곳으로 가야 한다고, 언덕 위의 법원을 가리키며 할머니가 말할 때마다
   그게 대체 뭐냐고 묻고 싶었는데

 

   이제 할머니는 안 계시고, 어느새 죽은 것이 물 밖으로 꺼내지곤 하였다.
   저 차갑고 축축한 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할머니는 대체 저걸 어떻게 하셨나

 

- ‘법원’ 중에서(《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반디 | 이번에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세계의 문학》 제37권에 실린 심사평에도 언급되어 있듯, 이 상은 작가님을 새롭고 다른 개성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일 텐데요. 누구에게나 현재의 자신을 있게 한 삶의 근거들 중 유년의 흔적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의 현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유년 시절에 대해 얘기해주실 수 있을까요?

 

황인찬 | 시로 옮기기도 하였고, 몇 번인가 다른 산문에도 적어서 밝힌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저의 최초의 기억은 다섯 살 때, 법원 아래의 언덕길에 살던 시절부터 시작됩니다. 쥐가 들끓는 동네였던지라 아침마다 할머니는 쥐덫의 쥐를 잡아 물에 빠뜨리곤 하셨습니다. 친구가 없던 지라 혼자 노는 일에 많이 익숙했습니다. 언덕을 걸어 오르다보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백색 건축물이 저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당시의 저는 법이 무엇인지 법원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하게 그 근처에만 가면 숨을 죽이곤 했습니다. 그때의 이미지가 여전히 저에게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 시절의 기억을 시로 적어 옮긴 것이 ‘법원’이라는 시입니다.

 

반디 | 절제되고, 정제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는 시편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는 《구관조 씻기기》에서 감정의 조각이 드러나는 이야기를 만나기도 하는데요.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로 시작하는 표제작은 그래서 오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감정이 닿는 대상, 관계의 시간, 그리고 너와 나라는 존재를 시 안에서 어떻게 다루고자 하시나요?

 

황인찬 | 감정은 언제나 의심의 대상입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너무나 불확실하며 종종 우리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채로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감정에 대해 다룰 때는 그러한 면을 의식하고, 그 불분명함과 확실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자 노력합니다. 언어는 워낙 거친 틀인지라 대상을 섣부르게 설명하려 들면 쉽사리 원래의 대상을 망쳐버리기에, 저는 설명하는 대신 그대로 내버려두는 쪽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바깥은 늦은 저녁이고, 바깥은 늦은 저녁의 공원이다 공원이 아닌 곳이 없다 어린 것들은 눈을 감고 노인들은 두 눈을 뜬 저녁이다 공원에는 끝없는 게임을 계속하는 노인들이 있고, 날아다니지 않는 새가 있고, 흔들리지 않는 나무가 있고, 너무 익숙해진 풍경이라서 이게 마지막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다

 

   나는 눈을 떴다
   나뭇가지 위로 작은 잎들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

 

- ‘엔드게임’ 전문(《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반디 | 시를 읽을 때는 이 시가 있었을 순간에 대해 상상하게 됩니다. 시를 쓰는, 혹은 내가 시와 만나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상황이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처음 시와 만났을 때의 기억이나 일상적으로 시를 쓰는 모습을 그림 그리듯 묘사해 주신다면요?

 

황인찬 | 특별하지 않은 순간에 시의 단서를 발견합니다. 책을 읽다가, 친구가 던진 농담을 듣다가, 멍하니 앉아 맞은편 자리를 보다가, 갑자기 하나의 문장이 떠오르면 거기서 시가 출발합니다. 저는 워낙 더디게 시를 쓰는 지라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합니다. 그 시간을 모두 시를 생각하는 데 소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핸드폰 게임도 하며 다른 일을 하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그런 식으로 물리적인 시간을 두며 시를 계속 들여다보면 행과 행의 사이가 멀어지고 그 사이에 여백이 들어서게 됩니다. 새벽이 될 때까지 그러한 일을 반복합니다. 그러다보면 시는 늘어나있기는커녕 오히려 더 줄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가 한편 나오기까지 이러한 일을 반복합니다.

 

반디 | 어떤 시는 특정한 이미지를 연상케 합니다. 시인에게는 관념적인 것이 이미지가 되기도 하고, 이미지가 자신의 이야기를 불러내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영향을 받은 적이 있으신지 궁금한데요. 요즘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진이나 그림, 기억의 잔상, 꿈의 이미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황인찬 | 이미지에서 별다른 영감을 받지 못하는 편입니다. 저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완성된 문장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는 별다른 뜻을 갖지 못하는 문장들, 백과사전에 적힌 것과도 같은 문장들이 저에게는 시의 문장처럼 보입니다.

 

반디 | 혼자 쓰는 것이 글이지만, 또 같이 쓰고 고민하는 것도 하나의 동력이 될 것 같습니다. 요즘 많은 시인들이 동인이나 이런저런 소모임을 가진다고 알고 있는데요. 참여하고 계신 활동이 있다면 무엇인지, 누구와 함께하고 계신지, 어떤 식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계신지 소개해주세요.

 

황인찬 | 동인 ‘는’에서 활동 중입니다. 저를 비롯해 최정진, 박성준, 박희수, 김승일 총 5명이 동인의 구성원입니다. 근래에는 다들 바빠서 자주 모이지는 못하지만 만나면 가장 편한 친구들입니다. 비슷한 나이, 비슷한 시기에 데뷔를 한 친구들이라 비슷한 고민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어 큰 힘이 됩니다.

 

반디 | 이번에 함께 인터뷰하게 된 다른 시인 분들(김승일 시인, 이혜미 시인)을 알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서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황인찬 | 김승일 시인은 제가 가장 질투하는 친구입니다.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을 이 친구에게서 종종 발견하고, 당해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한편으로는 가장 신뢰하는 문우이기도 합니다. 시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가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아주 귀여우면서도 어른스러운 친구인지라 좋아합니다.

 

이혜미 시인은 제 또래 가운데 가장 먼저 등단한 시인입니다. 학부생 시절 제 또래가 등단을 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의 저는 시를 쓰기는커녕 제대로 읽어본 적도 없는 학부생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자기 세계를 지켜온 좋은 시인이라 생각하기에 언제나 부러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입니다.

 

   수업은 정오에 시작하고 오후 세 시면 끝난다
   두 시간이나 남은 강의를 나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책을 읽고, 낙서를 하며, 가끔 강의를 들었다

 

- ‘모두 잘 되어 가고 있다’ 중에서(《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반디 | 친구로서, 글을 함께 쓰는 문우로서 좋아하는 시인이 있다면 선생님으로서 존경하는 시인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열패감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준 예술가를 독자 분들에게도 열렬하게 소개해 주세요.

 

 

황인찬 | 평생에 걸쳐 자기 작품을 계속 갱신시켜 온 예술가들을 존경합니다. 사이드가 언급한 ‘말년의 양식’에 관심이 깊은데, 말년에 이르러 지금까지의 세계를 부정하고 파괴의 양식에 도달한 작가들에게 열패감과 환희를 느낍니다. 생존 작가 중에는 오에 겐자부로와 이승훈 선생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반디 | 이번 인터뷰는 ‘젊은 시인’이라고 불리는 분들과의 만남이기도 합니다. 요즘 문단에서는 흔히 80년대(말) 출생 시인을 젊다고 칭하고, 독자들도 그렇게 인식하는 편이죠. 사실 십 년 전이나 오십 년 전, 아니 백 년 전에도 그 시대의 ‘젊은 시인’은 있었을 텐데요. 그렇게 따지면 유통기한이 있는 수식어입니다. 본인에게 ‘젊은 시인’이라는 이 말, 젊다는 유통기한은 어떻게 다가오나요?

 

황인찬 | 예술의 역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요구하기에 빠른 속도로 ‘젊음’을 탕진합니다. 여기서의 ‘젊음’은 단지 생물학적 젊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원숙함을 거절하고 화해를 포기하며 계속 자신을 갱신하는 이가 젊은이일 것입니다. 저 또한 노숙해지는 것을 경계하며 이 젊음을 지켜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러한 갱신이 점차 어려워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 총체적 파산 상태를 이겨나갈 방도를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하는 중입니다.

 

반디 | 봄이 오고 있습니다. 여름도, 가을도, 다시 겨울도 올 테죠. 다가올 계절을 대하는 나의 자세와 시인으로서 올해의 작업 계획을 들려주세요. 더불어 나의 첫 시집을 읽을 독자 분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황인찬 | 다음 책을 준비하기 위해 여러모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 한동안 이 고민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 부족한 책을 읽어주신 분들께는 모두 깊고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저녁에는 저녁을 먹어야지

 

   아침에는
   아침을 먹고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 ‘무화과 숲’ 중에서(《구관조 씻기기》, 민음사, 2012)

 

황인찬

 

1988년 경기도 안양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창과를 졸업했으며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로 제31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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