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딱지> - 언젠가 새살은 꼭 돋는다

 

샤를로트 문드리크, 올리비에 탈레크, <무릎딱지>, 한울림어린이, 2010

 


아이는 말합니다.

“엄마가 오늘 아침에 죽었다. 사실은 어젯밤이다.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난 밤새 자고 있었으니까 그동안 달라진 건 없다. 나한테 엄마는 오늘 아침에 죽은 거다”

팔과 다리를 쭉 뻗고 힘없이 침대에 누워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퍼뜩 ‘망연자실 茫然自失’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런데 왠지 이 말이 아이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갑작스럽게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의 마음을 어른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서 오는 어색함이랄까요? 제 눈엔 분명 아이가 ‘자기를 잃은 듯 아득하고 멍한’ 그 상태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해도 말이죠.

그러나 더 이상 어른인 제가 어떤 말을 떠올리며 아이를 설명하려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있으며, 저는 그저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며 아이의 언어를 배우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러니 그 아이의 언어로 채워진 <무릎딱지>를 읽은 것은 상실과 상처로부터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가는 우리 삶의 과정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아이로 돌아가, ‘엄마의 죽음’이라는 크나큰 상처에 새살이 돋고 한 폄 쯤 더 성장해 가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일은 그래서 애잔함과 동시에 따뜻한 마음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하루아침에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는 화가 납니다. “이렇게 빨리 가 버릴 거면 나를 낳지 말지, 뭐 하러 낳았”는지. 아침마다 빵에 지그재그로 꿀을 발라서 반으로 잘라먹는 걸 아빠한테 가르쳐 주지 않은 일에도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이 아이, “엄마가 어디로 떠난 게 아니라 죽었다는 것”을, “살아 있지 않는 게 죽음이라는 걸” 다 알고 있네요. 엄마의 죽음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까지도요. 오히려 아이는 “젖은 수건 짜듯이 꼭 짜면 온몸에서 눈물이 뚝뚝 쏟아질 것” 같은 가엾은 아빠를 어떻게 돌봐야 할지를 고민합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죽은 지 몇 밤이 지나고 나자, 아이는 아빠를 돌볼 정신이 없어집니다. 자꾸 사라지는 엄마 냄새와 목소리를 잊지 않으려 애를 써야 하니까요. 우선 엄마 냄새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집 안의 창문을 꼭꼭 닫아야 합니다. 아무리 날씨가 더운 여름이라고 해도 말이죠. 잘못하면 엄마 목소리가 지워질지도 모르니까 어떻게든 다른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합니다. 엄마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게 귀를 막고 입을 다무는 일도 잊지 않습니다. 그래도 숨은 쉬어야 하니까 코는 그냥 놔두고요.

그러다 아이는 자신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엄마의 목소리가 바로 들여온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침 마당을 뛰다가 넘어져 무릎에 상처도 났습니다. 아이는 계속 엄마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고, 그래서 무릎에 앉은 딱지는 계속 뜯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다시 상처에 딱지가 앉고 새살이 돋아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상처가 난 자리에 다시금 상처를 내며 아픔을 반복하긴 보단, 그 상처를 덮고 있던 딱지가 떨어지고 매끈매끈한 새살이 돋아나는 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낫겠죠. 곧 사라지고 말 엄마의 냄새와 목소리는 가슴으로 기억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저절로 떨어진 딱지를 보며 “울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울지 않았던 아이처럼 말입니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고 성숙해진다는 말은 아이의 몸에서 어른의 몸으로 자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종종 우리에게서, 가장 원하고 사랑하는 무언가를 빼앗아 가며, 죽음과 이별 그 또한 삶의 일부라고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절망과 상실감으로 상처 입은 우리는 그만큼의 ‘삶에 대한 이해’와 함께 정서적으로도 성장해나가니까요.

 

-현선(anejsgkrp@bandinlun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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