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과 장미> - 20세기에도 21세기에도 여전히 필요한 그것, 연대

 

캐서린 패터슨, <빵과 장미>, 문학동네, 2010

 


11월 7일, G20이라는 커다란 행사를 앞둔 서울한복판에서 전태일 40주기 전국노동자 대회가 열렸다. 5만 명 이상이 참가해 인근 도로까지 꽉 채운 그야말로 40주기라는 이름에 걸맞은 행사였다. 그날 광장에 선 사람들은 결의문을 통해 외쳤다. 오늘날의 노동현실은 전태일 열사가 스스로의 몸을 분신한 그 40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이다. 정말 그럴까?
 


2010년 노동자 대회의 모습 출처: 프로메테우스 신문
 

가을의 초입에 들어선 9월 7일, 20대의 한 청년이 실족으로 인해 뜨거운 용광로에 추락하는 사고가 있었다. 아름다운 청춘이 시커먼 공장 안에서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 인터넷 인기검색어는 ‘4억 명품녀‘와 도박을 했다는 한 연예인의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추락 사고에 대한 기사가 난 것은 그 일이 있고 며칠이 지나서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 대한 대책을 외치는 목소리는 작다. 언론은 조용하고 정치인들은 잠잠하다. 어느 누가 기업인에게 받았다는 몇 만 달러에는 지진이라고 날 듯 소리치던 이들답지 않게 너무나도 조용하였다. 하긴 세상은 20대의 꽃 같은 처녀가 백혈병으로 죽어갈 때도 조용했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1위 기업으로 거듭 태어나야 하는 삼성이 무서워서였다. 무릇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를 대하는 자세는 그러하다. 철저한 무관심이거나 아니면 원색적 비난으로 그들을 폭도로 몰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다.

40년 전 청년 전태일의 분신, 노동기본법을 보장하라는 그의 외침, 그리고 실족사와 백혈병, 1912년 미국 매사추세츠 로렌스 파업은 참으로 닮았다. 100여년의 시간이 지났건만 노동자를 위한 세상은 여전히 멀고 노동자를 보는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소설 <빵과 장미>에서도 우리는 이와 같은 슬픈 현실을 발견할 수 있다. 파업을 결의하고 파업한 사람들을 폭도라고 선전하고 이 파업에 외부 운동가들이 참여하고 파업이 확대되면서 공권력이 투입되는 상황들이 상세히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소설이 멈췄다면 우리는 이 소설을 현실을 반영한 슬픈 노동문학으로 여겨야 했겠지만 소설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이전의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문학과 달리 아이들의 시선에서 파업을 바라봄으로서 파업에 대한 외부시선과 내부시선을 자연스럽게 교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로사는 이탈리아 노동자의 아이이다. 이 소녀는 누구보다 반듯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영어를 익히고 미국의 역사를 익히고 그리고 하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늘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사는 곳에서 파업이 일어나고 소녀의 어머니마저 파업에 동참하게 된다. 소녀는 선생님이 파업노동자들이 폭도이며 부모님이 혹시 파업에 참가하거든 이를 말려야 한다는 가르침에 따라 엄마와 언니의 파업을 방해하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파업에 나선 사람들이 나쁜 것이 아니며 그들이 폭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처럼 갈팡질팡하면서 아이가 파업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일반대중의 시각과 그리 다르지 않다.

또 하나 이 소설의 특별함은 소설의 중심에 성장과 연대가 있다는 것이다. 로사는 파업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선생님이 말하는 것과 달리 노동자가 아니라 고용주의 문제가 더욱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서서히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실제 삶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게 된다. 이는 우연히 로사와 만난 제임스에게도 일어나는 일이다. 그저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학대받으며 하루하루 공장에서 일하던 제임스에게 파업은 새로운 공간과의 만남이었고 자신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렇듯 아이들의 파업을 겪으면서 성장을 한다. 스스로의 내적성장은 물론이거니와 외부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커진다. 이 아이들이 파업을 통해서 성장하게 된 것은 연대의 힘이 크다. 소설의 후반부의 감동을 이끄는 것은 바로 이 연대이다. 로렌스의 파업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로렌스의 사람들에게 식량과 돈을 보내준다. 그리고 아이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아이들을 파업기간 동안 맡아 양육하기도 한다. 빵을 보냄으로서 그들이 편하게 파업을 할 수 있는 물질을 제공해주고 아이들을 맡고 파업을 응원함으로서 정서적 지지를 보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연대 아래 실제 “빵과 장미의 파업”은 성공하게 된다. 연대가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책은 이제 우리에게 묻는다.  21세기가 들어서고 10년이 지난 지금 그대들은 충분히 연대하고 있는가? 라고 말이다. 노동자들이 외치는 빵과 장미에 얼마만큼 동조하고 지지하며 그들을 돕는지 묻는 것이다. 그저 파업이라고 하면 폭력이나 빨갱이와 같은 단어들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눈을 돌리진 않았는지? 11월 7일 열린 노동자대회를 G20을 반대하는 시위로만 여기지는 않았는지 또한 젊은 청춘들의 서글픈 죽음 앞에서도 그들의 죽음에 분노하기 보다는 연예인 스캔들이나 한 일반인의 말실수에 분노하여 그들을 비난하느라 미처 청춘의 죽음조차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묻는 것이다. 

연대,  노동자가 탄생하고 그들이 노동자 운동을 하면서 누차 들었던 말, 아니 인류의 역사에서 민중에게 주어지는 단 하나의 힘, 그래서 연대는 이상적이며 연약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혹은 신자유주의의 거친 경쟁의 물결 속에서 연대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만큼 막연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캐서린 페터슨의 소설 <빵과 장미>는 그 연약하고 이상적인 외침으로만 들리는 단어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소설이 실화인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가슴에 새길 수 있을 것이다. 20세기에도 그리고 21세기에도 우리에겐 여전히 연대가 필요함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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