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연습> - 같은 하늘, 같은 인간

 

조정래, <인간 연습>, 실천문학사, 2006

 


오래된 연습

작품의 제목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사실 너무 친절했다. <인간연습>이 아니고 ’인간’이거나 ’연습’이었다면 작품앞에서 조금은 덜 주춤거렸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인간연습’이라고 하시니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다면 ’인간’앞에 형용될 그 ’어떤’ 인간에 물음이 닿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여기서 말하는 ’인간’ 이라는 의미가 철학적인 근원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인 성찰의 존재체라기 보다는 역사적인 배경위에 자리하는 한국적인 조건부의 개념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작가는 이 작품으로 분단문제를 마무리하고 싶었다고 했기에 식민의 해방과 역사, 분단과 전쟁의 역사에 천착해온 긴 여정의 길이 어떻게든 종착역에 이르렀음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사실은 독자인 나로 하여금 그토록 긴 여정의 마침표에 그저 관객으로서 웃으며 박수만 치게 할 것 같지는 않았음이다. 그래서 인지 작품의 양적인 두께에 비해서 사고를 확장케 하는 질적인 아젠다가 조금은 힘겨웠다. 마치 42.195 km를 쉬지 않고 달려온 마라톤 주자를 결승점에서 맞이하면서 내가 목격하고 만 것은 고작 발걸음을 멈추는 일뿐이었음을 알게 된 순간이거나 그 순간 밀려드는 알게 된 것에 대한 일종의 허탈감...그것도 두려웠음을 부인치 않겠다. <인간연습>이 실은, 연습과정을 따라가면서 소정의 결과를 제시 할 것이 분명했기에(어쩌면 연습의 목표까지도...)나는 약삭빠르게 이 사실을 눈치 채고 선뜻 작품을 열어보지 못했던 독자였음을 고백한다.

나는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도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반공주의’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우리 세대들은 당시 ’인간연습’보다는 ’반공연습’으로 오랫동안 길들여졌고 관리되어 왔다. 북한을 지칭할 때 ’괴뢰군’이나 ’괴수’라는 명사를 집요하게 강요하면서 ’무찌르자’, ’때려잡자’라는 원색적인 동사로 적개심을 선동하지 않았던가. 학교친구들과 동네에서 고무줄 놀이를 할 때 불렀던 노래의 첫 구절은 ’무찌르자 공산당’이거나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아니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그날을’ 이 세곡이 전부였다. 어쩌다가 삐라를 주워 온 친구가 있으면 그날은 금방 전쟁이라도 일어 날 것처럼 공포에 떨었던 기억, 민방위 훈련 날에 울리던 싸이렌 소리, 간혹 가다 발견되던 남침용 땅굴 소식, 교과서에 흐릿한 사진으로 기록된 도끼 만행사건 등등...그 당시 세상의 온갖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들은 모두 공산당이었고, 세상에 모든 피해를 입힌 원흉 역시 공산당이었다. 당시 철없던 우리에게 각인된 반공사상은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를 논하기 이전에 이미 남한인으로서의 인간 자격을 획득하는 하나의 통과의례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가 반공연습에 매달리던 그때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의 인민연습이 처절하게 시행되고 있었으리라. ’인간’이라는 것을 어떠한 주의나 종교를 배제한 본연의 고결한 존엄적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어쩌면 북한이나 남한이나 인간이 아닌 엉뚱한 것을 연습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그동안 ’북한은 비인간적’, ’남한은 인간적’이라는 경험적 사실에 입각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소련과 미국을 이분법적으로 구분짓는 국가에서 가장 기억력이 민첩할 시기에 그 이분법의 잣대를 획일적인 교육으로 받고 자랐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달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깨달았다고 해서 오랫동안 자리한 사고의 체계가 바뀌거나 부러 바꾸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못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인간연습』과 같은 문학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늘 스스로 놀라고 그렇게 놀라는 내 자신이 적잖이 당황스럽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몹시 미안하며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많이도 미워진다. 작가의 분단여정 종착역에서 마음껏 박수치지는 못하지 싶은 마음 한구석에 아마 슬며시 외면하고픈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이 숨어 있었기에 선뜻 고개를 들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인간이라는 불행

소설의 시작은 낙엽이 흩날리는 공원에서였다. 가을 찬바람에 못 이겨 떨어지고 마는 한 잎 낙엽에서 잎잎이 친구의 죽음을 회상하며 누구나 허망한 죽음과 그보다 더 공허했던 친구의 삶을 기억하고 싶어 했다. 친구는 사회주의 사상의 이념적 동지였던 박동건, 자신은 병마에 휩쓸려 억지로 전향서에 도장을 찍고만 윤혁이라는 분단시대 가장 불행한 인간들이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윤혁이라는 인물의 시선으로 바라본 친구의 죽음은 생각보다 냉철했다. 평생을 좇기고 짓밟히며 살아온 친구의 한스런 죽음앞에서 겹쳐지는 자신의 눈물이 아마도 앞으로 살아가야 할 자신의 삶으로 귀결될 것임을 진즉에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와는 일란성 쌍생아라고 하던 윤혁의 시선이 한때 혁명에 순혈을 바쳐온 동지라고 하기엔 비교적 담담해 보였음이다. 그런데 그것은 어쩌면 윤혁이라는 인물에 대한 내 나름의 편견이거나 거리감일 수도 있었다. 아니 작가가 감정을 절제한 시각으로 인물을 그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박동건의 막내아들을 통해 밝혀지는 ’버려지고 외로웠던 박동건의 삶’은 분명 가슴 아픈 사연임에 틀림없었지만 나는 아직 그때까지만 해도 ’소설적 진실’보다 ’낭만적 거짓’에 더 갸우뚱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박동건의 삶과 죽음이 내게는 반갑지 않았음이고 공감은 커녕 어쩌면 내심 화를 품었던 건 아닐까 생각된다. 연좌제로 고생한 어머니와 사회에서 외면당한 큰형, 자살한 누나의 가족사를 막내에게 듣고 있던 내 심정은 분명 윤혁과는 달랐고 급기야 그 불편함은 ’하나의 신념을 저토록 오랜 세월 변함없이 지켜온 사람이야 말로 가장 순수하고 숭고한 그래서 비인간적인 사람들일 것이다’는 다소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사유로 흘러들었다. 어떤 것이 ’인간적’ 인 것인지 작품에 등장하는 윤혁의 어지럼증만큼이나 혼란스러웠다. 어지럼증을 극복하고 마침내 환청이나 망상에서 벗어난 윤혁처럼 박동건이라는 인간에 대한 어지럼증을 탈출하고자 나는 윤혁에게 은연중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마음을 의지하고 부축했던 유일한 대상인 박동건의 죽음은 사상의 변절자요, 혁명의 패배자가 되어버린 윤혁의 죄책감을 더욱 수면위로 떠오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방어기제로 윤혁은 그동안 역사의 피해자에서 역사의 기록자로서 역할이동을 하게 된다. 물론, 그 변화과정이 깊고도 외로운 사유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쉽지만은 않았다. 윤혁이 박동건과 같이 의미없는 ’수동적 죽음’을 맞이 하지 않고 의미있는 ’능동적 죽음’으로 다가가기 위한 일련의 행보가 썩 논리적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그것은 희망의 종착역을 향한 우리 모두의 바램을 반절 섞은 순수한 불순물로 충분히 이해될 만한(이해하고 싶은)개연성이었다. 윤혁마저 친구처럼 아니 친구보다 더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면 비록 소설이지만 그 좌절감이 인간성을 상실한 것만큼 큰 상처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이라는 행운

불행한 인간이었던 윤혁의 행운은 죽음을 준비하고 그것을 맞이하는 길에 우연히 만난 ’인간’들이었다. 죽음을 잘 준비하게 된 것이 결국 인간적인 삶의 한 부분이었다. 첫 번째 인간은 파릇파릇 새싹이 돋듯 온몸에 생기를 불어 넣는 두 송이 꽃의 기준과 경희였다. 기준과 경희는 주의나 이념에 자유로운 인간적인 정으로만 관계할 수 있는 어린 생명들로서 그들은 북에 두고 온 아내의 남쪽 그림자를 상징한다 할 것이다. 윤혁은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같은 아주 극적인 순간에 항상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 그 순간 ’깃발’이나 ’동지’가 떠오르지 않았던 자신에 인간으로서의 의아함과 사회주의자로서의 죄책감을 동시에 함의하고 있던 본능적 인간이었다. 여고생의 몸으로 후퇴하는 인민군을 따라 북행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가 만약 임신을 하여 자신의 아이를 낳았다면 그 아이의 자식은 분명 기준과 경희처럼 꽃보다 어여쁜 손주였을 것이다. 윤혁은 두 아이들과 피도 이념도 나누지 않았지만 ’인간’으로서 ’인간’됨을 나누었기에 추후 피치 못할 헤어질 상황에서도 끝내 아이들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인간’임을 지키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행운은 감옥에서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나눔으로써 인간적인 신뢰가 형성된 강민규라는 젊은이였다. 일본어를 번역하고 지식인으로서 문학적 소질이 내재되어 있던 윤혁에게 소련붕괴 후 바깥세상의 흐름과 변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소식을 전달하던 강민규는 모든 관계가 단절된 전향자 윤혁으로선 유일한 사회적 네트워크이자 인적 경쟁력을 암시한다 할 수 있다. 사회주의 신봉자였던 강민규가 윤혁에게 공산주의의 붕괴원인을 다각도로 브리핑할 때는 마치 사회 선생님이 교단에 서서 학생을 가르치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윤혁이 자신이 떠나올 당시엔 인민을 위한 당원의 희생이 더 중요했던 북한의 초심을 회상하며 몰락한 현실을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는 장면 역시 상당히 억누르는 듯한 작가적 객관성을 느꼈기에 강민규의 설득과 윤혁의 고뇌가 소설적으로 공평하게 표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친구 박동건에겐 이렇듯 생의 활기를 선사하던 아이들도 굳어진 사고를 말랑말랑하게 어루만져줄 젊은이도 없었기에 그토록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자신앞을 지나치던 그 모든 인간들을 그저 스쳐 보내지 않고 자신의 인생앞에 등장한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그들을 받아들인 윤혁의 열린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윤혁은 보호감찰자로서 늘 그를 감시하고 간섭하는 인간도 만나지만 그를 그저 공무수행의 역할자로서 받아 들이며 싸움을 거는 쪽을 인정하며 오히려 무색케 하는 전략을 구사하여 전향자로서 비교적 편한 생활을 유지해 나간다. 이 부분 역시 더 이상 자신의 과거를 갉아먹은 신념보다는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가치를 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신념을 지키면서 인간이길 바라던 친구를 뛰어 넘어 인간을 지키면서 인간답게 살기를 바라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행운은 강민규의 부탁으로 집필하게 된 전향수기를 보고 자신을 찾아온 최선숙 보육원 원장이었다. 전쟁당시 대학병원 간호부시절 사병을 먼저 치료하라던 인민군 장교의 희생에 감명받아 사회주의를 지지하게 된 과거를 지닌 최원장이었다. 그녀에게 ’윤혁’이라는 전향자는 비록 인민군 장교와 동명이인이긴 하지만 최초 정신만은 순수했던 그 시절 아무도 모르게 간직하고 싶었던 ’윤혁’이라는 인간성의 순수 귀향지를 상징한다. 최원장은 그때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윤혁과 두 아이들을 받아 들여 자신들이 꿈꾸는 인간의 꽃밭에 함께 머물러 줄 것을 부탁한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윤혁이 몸서리치던 독방에서 자살을 결심했을 때, 그리고 둘도 없던 친구에게 배신 당한 일들이 스쳐 지나가며 벅찬 눈물이 그렁거렸다. 연로하신 아버님과 어머니, 형수님까지 옥중에서 부고를 들으며 자신을 자책하던 윤혁에게도 더 살아가야 할 이유는 분명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요즘 소설에서 마저 더 할 수 없이 비극적인 결말로 현실을 깨우치는 작품들을 많이 접했기에 오히려 이러한 미래적인 결말이 새삼 놀랍고 눈물겨웠다. 기약도 없이 오랫동안 기차를 타고 내려 보니 꼭 저 멀리서 하얀 옷을 입고 마중 나와 계신 어머니라도 발견 한 듯 기쁘고도 아릿했다. 그리고...그래서 이것이 소설임이 비로소 슬펐다. 윤혁에게 행복하냐고 물어 보고 싶었던 강민규가 끝내 말을 삼키고 그를 알고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간직하면서 막을 내리는 마지막이 소설이라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은 아니라는 것이 아프게 느껴졌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을 되짚으며 남쪽 하늘로 마음만 띄워 보낸다는 강민규의 담담한 목소리가 꼭 북에서 남을 향한, 남에서 북을 향한 그리운 넋두리 같았고 소설 밖으로 나온 나는 한참을 멍하니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공평한 연습

이 작품은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할 거 없이 공통으로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주의를 만들고 실천하는 것도 주의를 발전시키고 몰락시킨 것도 결국은 인간이었고 그러하기에 그 어떤 주의보다는 단한명의 인간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었다. 더욱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 비인간적이 될 수 있는 것도 인간이고 비인간적인 삶을 택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인간이라는 사실, 하지만 살아있는 한은 그러한 시행착오와 잔인한 역사속에서도 절대 우리가 인간임을 잃지 말고 끝까지 인간으로서 인감됨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정중하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인간됨을 향하는 발걸음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필요한 인간연습의 과정임을 숙연하게 내비친다. 인간은 어쩌면 그러한 인간연습의 모든 과정이 끝나는 그 순간 인간으로서 생을 다할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인간성 보다 훨씬 더 높은 수치의 절대적 인간을 목표로 생을 끊임없이 다그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러한 과정이야 말로 누구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격려하고 있다. 그 사실이 못내 고맙다. 목표치가 높았건 결과치가 형편없었건 누구나 인간으로서 인간다워짐을 노력하고 인간적인 삶을 살고자 하는 그 과정이 공평하게 아름다울 수 있다면 우리는 혹시 인간이 되지 못할지라도 그 연습만은 중단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반공주의에 깊게 물들여진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자로서의 인간적 고뇌를 논리적으로 만나볼 수 있어 뜻 깊었고 책을 덮고 난 지금 결국 분단과 전쟁에 관한 소설의 종착지에서 그를 환영하는 인파에 속할 수 있어 독자로서 무척이나 기쁘다. 다음의 작품에선 대기업 비리와 자본주의의 문제를 파헤치는 굵직한 서사를 특유의 필체로 그려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제나 우리 민족의 역사와 당면한 현실 앞에서 국민으로서의 진지한 성찰을 요구해온 작가의 저력에 고개 숙인다. 그를 기다리는 마음이 늘 편한 것만은 아니나 그것은 이 시대의 문학적 운명이며 그의 숙명이듯이 우리 독자들의 순명일 것이다. 나는 끝까지 그 운명에 동참하는 독자가 되고 싶은 밤이다. 남쪽 하늘은 아직 밝고도 아름다운 것 같다. 같은 하늘이기에 같은 인간임을 바래어 본다.

 

오늘의 책을 리뷰한 '아느미애'님은?
한편의 책을 읽는 것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혹시나 얻었을지 모르는 실망이나 상처 한 모금을 씻어주는 일이라 생각하며,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것은 책을 쓴 사람이 어떻게 상처를 극복했는지 그 조용한 한마디를 애써 기억하려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읽고 쓰는'일을 가슴으로 작성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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